[니체] 「차라투스트라의 서설」 3절,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차라투스트라의 서설」 3절
“나는 그대들에게 위버멘쉬를 가르치노라.”
“I teach you the overman.”
“Ich lehre euch den Übermenschen.”
Q1 차라투스트라는 초인을 가르친다. 그런데 그는 초인인가? (D)
A. 결론부터 말하자면 차라투스트라는 초인이 아니다. 초인을 준비하는 자다. 예언가로서의 입장이다. (J)
차라투스트라는 초인은 아니긴 해도 초인이 뭔지를 알려면 어느 정도 초인의 경지를 경험했지 않을까 싶다. 초인에 대한 아무런 경험도 없이 초인에 대해서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완벽하게 체현은 못했지만 초인의 상태와 비슷한 상태를 체험했을 것이다.
니체는 철학이 머리로 하는 작업, 지성으로 하는 작업이 아니라고 말한다. 상식적으로 지성을 통해 따지고 근거를 파고들고 이런 것이 학문의 작업이라 생각하는데, 니체는 자신의 책이 피로 쓰였다고 이야기한다. 그 말이 문자 그대로 피로 쓴 책이라는 게 아니라 자신의 삶의 모든 체험, 자신의 인격에서 자신의 책과 철학이 비롯된다고 보는 것이다. 피히테는 그 사람이 어떤 철학을 하냐는 것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이상주의, 관념주의는 이상을 향해 나아가는, 자기 자신의 발전 및 창초적 극복을 지향하는 인간이 한다. 반면, 유물론은 물질처럼 노예처럼 살아도 좋은 인간이 한다. 피히테는 칸트의 도덕률을 철저히 실현하는 사람이 도덕적 인간이라고 보아서 그렇지 당연히 유물론자라고 비도덕적으로 살고 그런 건 아니다. 오히려 도덕, 정의를 소리 높여 외치는 사람 중에는 자신의 악한 욕망을 제어 못해서 오히려 더 도덕을 외치는 사람이 있다. 여하튼 피히테든 니체든 그 사람에 따라 그 사람의 철학이 달라진다고 본 것이다. 실제로 그런 것 같다. 대체로 그 사람의 성향에 달려 있는 것 같다. 맑스주의를 하는 사람이나 자유주의 경제학을 추구하는 사람을 보면, 나름의 타당한 근거를 제시하지만 애초에 그쪽으로 끌리는 성향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철학이 특히 그런 듯하다. 많은 과학들은 경험적 증거에 입각해서 자신을 입증하는데, 철학은 경험적으로 아무리 많은 증거를 대도, 예컨대, 유물론이 옳은지 관념론이 옳은지 아직 해결이 안 되었다. 아마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 (교수님)
*초인(overman, Übermensch) : “~위”, “넘어”(over)를 의미하는 독일어 전치사 über와 Mensch(인간)의 합성어로 통상 초인(superman, overman)으로 번역된다. 정동호(2021)에 따르면, 이러한 번역어들이 Übermensch의 어원이 내포하는 überwinden(극복하다)의 동적 계기를 충분히 표현하지 못한다고, 즉 Übermensch를 특정한 우월한 ‘상태’에 있는 완결된 존재로 오도할 위험이 있다고 비판한다. 니체의 Übermensch는 “자신을 극복한, 그리고 끊임없이 극복해가는 자”이다. (N 발제문)
초인도 자기자신을 극복하려고 하지만, 우리 모두 자기자신을 극복하려고 하지 않는가. 원숭이 상태를 인간이 극복했는데(“사람에게 원숭이는 무엇인가? 일종의 웃음거리 또는 견디기 힘든 부끄러움이지. 위버벤쉬에게는 사람이 그렇다. 일종의 웃음거리 아니면 견디기 힘든 부끄러움이다. 그대들은 벌레에서 사람에 이르는 길을 걸어왔다. 그러나 그대들은 아직도 많은 점에서 벌레다 그대들은 한때 원숭이였다. 그런데 사람은 여전히 그 어떤 원숭이보다 더 원숭이다.”), 그럼 인간도 초인이란 말인가. 정동호는 “초인”이라는 번역을 비판하지만 정동호의 정의는 초인의 정의로는 부족하다. 초인은 인간을 극복한 자, 인간을 넘어선 자이다. 소소한 안락을 추구하는 소시민적 인간을 넘어선 인간인 것이다. 인간을 넘어서 인간보다 나은 상태를 구현한 인간을 초인이라고 하는 것이다. 자기극복자라고 해서 다 초인은 아니다. (교수님)
정치학과에 좋아하는 교수님이 한 번 말씀하신 적이 있다. “원어를 음차해서 쓸 거면 그냥 원어로 써라. 쓸데없이 한국어로 쓰지 말고.” 나는 Übermensch를 초인이라고 번역하면 지상을 초월한 인간이나 초능력자라고 오해할까봐 (아니 도대체 누가??? 차라투스트라는 “초지상적인 희망을 말하는 자들을 믿지 말라!”라고 외친다. 초능력자...는 초등학생도 그렇게는 안 읽는다.) 아무런 번역도 하지 말고 음차하여 그대로 두자고 주장하는 학자는 독일에서 나고 자라 독일 사회와 학계에서만 철학하는 독일 철학자이거나 비겁한 학자라고 생각한다. (칸트의 transzendental, apriori 번역을 꺼리는 학자들도 마찬가지다.) 모든 텍스트는 해석을 요구하고, 모든 해석은 마찬가지로 해석을 요구한다. 이때 번역이라는 해석 자체를 내놓길 포기하는 학자들은 두 가지 점에서 잘못 생각하고 있다: 1) 나는 “니체의 원뜻”을 알아. 그러니 굳이 해석을 내놓진 않을거야. 2) 너네는 멍청해서 내가 아는 “니체의 원뜻”을 해석해준다고 할지라도 “오해”할 거야. 그러니 내 해석을 해석할 기회를 차단할 거야. 나는 이들에게 요구하고 싶다: 1) “니체의 원뜻” 따위는 당신이 해석을 내놓기 전에는 없다. 그러니 해석을 내놓기나 해라. 2) 독자는 충분히 똑똑하다. 그러니 당신은 당신이 어버버거려서 당신 해석이 이해되지 않는 일이나 없도록 신경써라. 그러면 “니체의 원뜻”에 당신이 가까운지 아닌지는 독자가 검토할 것이다. 독자가 당신의 해석이 틀렸다고 해서 “오해”했다고나 생각하지 말라.
학자로서도 용기를 가져야 한다. 해석을 내놓을 용기, 자신의 해석을 이해시킬 용기. 이런 용기가 없어서 아무런 해석도 내놓지 못하고 그저 텍스트를 자구 그대로 옮기면서도, 자신은 다른 용감한 학자들보다 더 나은 학자라고 착각하는 것만으로도 모자라, 여기저기 자신이 옳다고 당당하게 외치고 다니는 자들은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나는 백승영, 정동호가 적극적인 번역과 풍부한 역주를 통해 독창적인 니체 해석을 개진하였기에 그들이 용감하고 멋진 학자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적어도 초인 번역 문제에 관해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사견)
*벌레(worm, der Wurm), 원숭이(ape, der Affe), 인간(man, der Mensch) : 인간은 (‘신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등의 특수한/근본적으로 우월한 존재가 아니라) 벌레나 원숭이 따위를 거쳐 진화해 온 산물이다. 그리고 이 ‘진화’의 가능성과 필요성은 아직 종결되지 않았다. ‘원숭이 같은’ 상태에 머물지 않도록 끊임없이 스스로를 초월하며 발전해야 하는 것이다. (N 발제문)
벌레-원숭이-인간 진화는 다윈 진화론도 아니다. 다윈은 원숭이에서 인간이 나왔다고 이야기하지 않았다. 단지 인간과 원숭이의 공통된 조상이 있다고 하는 거다. 당연히 벌레에서 원숭이가 나온 것도 아니다. 여기서 벌레에서 원숭이, 원숭이에서 인간으로의 진화를 자기극복이라 하고 있는데, 다윈은 진화를 그렇게 얘기하지 않는다. 다윈 진화론에서는 오히려 돌연변이가 중요하다. 환경에 잘 적응하는 유전자가 돌연변이로 나타나서, 예컨대 기린 같으면 높은 데 과일을 따먹을 수 있는 갑자기 목이 긴 유전자가 나타나고, 그 유전자가 유전이 되고, 그래서 기린이 살아남았다고 말한다. 다윈에게서 진화는 우연히 일어나는 거지 자기극복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리고 니체의 이런 말 같은 경우는 벌레나 원숭이에 대한 멸시가 담겨있다. 그런데 어떤 대목에서는 모든 동물은 완벽하다라고 말하며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말이 터무니없다고 비판한다. 그렇다면 그 중에서 어떤 게 니체의 입장일까. 모든 동물은 그 자체로 완전하다고 보는 게 니체 사상의 전체적인 입장과 통하지 않나 싶다. 사실 어떤 동물이든 뭐가 낫냐 단적으로 판단할 수 없다. 판단의 기준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각 동물종이 각 동물종이 살기 적합한 세계가 있다. 그러므로 이 세계는 사실 무수한 세계들이 얽혀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하이데거가 형이상학의 근본개념 강의를 하는데 무수한 세계가 있다고 말한다. 벌레한테는 벌레의 환경 세계가 있고, 예컨대 시궁창, 쓰레기더미, 거기에는 우리가 살 수 없다. 각각의 세계가 다르고 그 세계의 기준에서는 각 동물이 제일 잘 산다. 기독교도 그렇고 많은 종교철학이 인간중심주의를 당연하게 생각한다. 인간을 영장이라 하고, 하느님이 자기 닮은 피조물을 창조한 것이 인간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지구만 하더라도 전 우주로 치면 티끌이다. 근데 성서나 코란에서는 신이 지구한테만 관심이 있는 것 같다. 말도 안 되는 지구중심주의, 인간중심주의인 것이다. 헤겔 철학도 그렇다. 헤겔은 자기를 루터교 신자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기 철학이 루터교를 가장 잘 근거짓는다고 하였다. 그에 따르면, 인간을 통해서 절대정신이 자기인식에 도달한다. 기독교가 깔려 있어서 인간중심주의 철학을 개진한 것이다. 우주를 창조한 존재가 있을 수 있고, 일자를 상정할 수도 있다. 만물의 근원이 되는 어떤 형이상학적 존재로부터 개체가 비롯되었다고 충분히 얘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만물의 근원을 체험할 수 있는 신비체험이 있다. 그게 꼭 인간에게만 가능한 것은 아니고 다른 별에도 체험할 수 있는 존재가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절대정신이 인간을 통해서만 자기인식에 도달하고, 인간이 특별한 존재다 이런 식의 이야기를 하는 건 인간중심주의다.
여하튼 아마 모든 동물은 그 자체로 완전하다고 보는 게 니체 입장이고, 여기서는 인간의 초극을 이야기하다보니까 진화론적 수사를 끌어들여 벌레나 원숭이보다는 인간이 발전한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 같다. 여기서 원숭이라는 것은 뭘 가르치냐. 벌레는 뭘 상징하냐. 벌레는 땅을 기어다니니까 권위나 권력에 굴종하는 삶과 태도를 상징하지 않을까. 원숭이는 흉내를 잘 낸다고 그러는데 시류에 영합한다든가 여론을 무비판적 수용하고 그에 편승하는 삶과 태도를 상징하지 않을까. (교수님)
Q2 대지를 긍정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J2)
A. 대지를 긍정한다는 것은 대지 외에 다른 세상이 없고, 대지 그 자체가 완벽하다는 의미이다. 대지에는 육체가 속하고, 육체와 결부되어 있는 욕망도 속하고, 그것들을 다 긍정하는 것이다. (교수님)
“이제 가장 끔찍한 일은 대지에 불경을 저지르는 것 그리고 저 규명되지 않은 뱃속을 이 대지의 뜻보다 더 높이 존중하는 것이다!”
“To sin against the earth is now the most terrible sin, and to revere the entrails of the unknowable higher than the meaning of the earth!”
“An der Erde zu freveln ist jetzt das Furchtbarste und die Eingeweide des Unerforschlichen höher zu achten, als der Sinn der Erde!”
: 규명되지 않은 존재는 신, 규명되지 않은 뱃속(내장)은 신의 뜻을 상징. (교수님)
Q3 니체는 심신이원론은 비판하지만, 자유정신(Freigeist)을 이야기한다. 니체에게 정신 개념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J2)
A. 니체는 몸을 위대한 이성이라고 하고, 커다란 이성에게 정신이라는 것은 장난감이라고도 한다. 커다란 이성이라는 것은 문자 그대로 우리가 생각하는 몸이 아니라 힘에의 의지를 가리킨다고 봐야 할 것이다. 니체에게 있어 우리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의 본질은 힘에의 의지이다. 자기 자신을 고양시키고 강화시키고 싶어하는 의지, 쉬운 말로는 생명력이다. 병든 힘에의 의지는 병든 생명력, 건강한 힘에의 의지는 건강한 생명력이다. 우리 신체라든가, 우리 지성은 힘에의 의지의 자기 확장의 도구다. 이런 식의 사고방식은 쇼펜하우어로부터 많이 받아들였다.
좌우간 자유로운 정신은 자유로운 의식, 지성을 이야기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니체는 자신의 입장이 확실하게 정리된 체계적 철학을 전개하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정신을 힘에의 의지에 종속된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유로운 정신이 힘에의 의지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부여한다고 이야기한다. 자유정신은 종교나 이데올로기적 관점에 사로잡히지 않고 다양한 관점들을 활용할 수 있는 열린 정신, 지성을 가리킨다. 그런 식의 지성은 건강한 의지나 생명력을 갖춘 사람만이 가질 것이다. 지성과 건강한 생명력은 결합되었다고 보겠지만, 어떻게 하면 건강한 생명력을 가질 수 있는가, 병든 생명력에서 건강한 생명력으로 나아갈 수 있는가, 우리 자신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고 대답할 때 인간에게 독특한 반성능력을 상정할 수 밖에 없다. 그 경우에는 지성이 힘에의 의지에 완전히 종속되어 있는 상태를 넘어서서 돌이켜보고 반성할 것이다.
유물론(물리주의)은 뇌밖에 없고 우리들의 의식이 뇌의 전기화학작용이라 보는 건데, 유물론자는 뇌한테 논리를 제시해가며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이성에게 호소하는 것이다. 유몰론자만 하더라도 정신을 전기화학 물질들이 움직이는 방식과 다르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유물론자들은 네 생각이 틀렸으니 반성을 해보라고 이야기하는데, 전기화학 작용은 자기를 성찰하거나 반성하지는 않는다. 진화론도 유사한 문제점이 있다. 진화론은 인간이나 동물이나 차이 없이 이들의 모든 욕망이 생명 보존 욕망이라고 본다. 문화든 철학이든 다 생존에 도움되는 도구적인 것이다. 우리가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도 다 생존에 필요해서 받아들인 것이다. 근데 진화론 자체는 어떤가. 진화론을 모른다고 생존에 차질이 생기지는 않는다. 진화론을 모르는 사람도 동물도 잘 산다. 진화론자들도 생존에 유리하니까 진화론 받아들이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우리 인간에게 생존을 넘어서 진리를 추구하려는 욕망이 있다 인정을 해야 진화론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이 가능하지 않겠나. 진화론은 일종의 환원주의이다. 모든 걸 생명 보존 욕망으로 환원하고자 한다. 물리주의도 일종의 환원주의이다. 모든 걸 물리적 현상으로 환원하려고 한다. 그러나 우리 인간에게는 하나로 환원될 수 없는 다양한 측면이 있지 않는가.
결국 니체 또한 우리 이성이 생명력의 상태에 의해서 많이 종속되는 면이 있긴 하지만, 또 다른 면에서 자신을 성찰하는 측면이 있다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니체의 이런 모든 논의가 다 쓸모 없다. 니체의 논의는 이미 생명력이 건강한 사람만 받아들일 수 있는 논의가 되고, 니체의 논의를 못 받아들이면 병든 인간으로 매도될 것이다. ‘너가 못 받아들이는 이유는 너가 병들어서 그래~’ 이런 식으로 가면 건설적인 논의가 불가능하다. 그런 상태로부터 벗어나 있는 이성을 상정해야지 니체에 대한 건설적인 논의가 가능하다. 막스주의자도 마찬가지다. 흔히 막스주의자는 막스주의를 안 받아들이면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서 그렇다고 말한다. 근데 진지한 토론을 하려면 자기의 계급적 조건으로부터 벗어나있는 그런 이성적 상태가 가능하다고 상정해야 한다. 이성적 상태가 계급적 지위에 의해 결정해있다고 보면 모든 토론은 무의미하다. 막스만 봐도 변호사 집안 출신이고 부인도 귀족 집안의 딸이다. 막스가 부르주아라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이성적 상태에 있다면 그가 주장하는 막스주의는 역설적으로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이다.
니체의 모든 저술을 이성적인 작업으로 볼 필요가 있다. 물론 니체 자신의 전체적인 정신의 상태, 생명의 상태, 경험해왔던 모든 것들에 뿌리를 두고 있다 볼 수 있겠지만, 어느 정도 그것들로부터 거리를 취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인정해야 한다. 니체 철학 내에서도 지성은 기본적으로 힘에의 의지에 종속되어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그것이 어느 정도 거리를 취할 수 있는 능력을 인정해야 한다. 그 경우 정신은 이원론적 정신과 다를 것이다. 이원론적 정신은 육체를 경멸하고 자신을 육체를 벗어나있는 순수한 정신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근데 그런 정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육체에 속한다고 하는 성욕, 소유욕에서 벗아날 순수한 영혼은 없다. 그런 정신은 결국 순수한 영혼이 되고자 하지만 자기를 더럽다고 생각하고 학대하는 자기분열적 영혼이 될 수밖에 없다. 이원론적 정신이 육체에 속한다는 욕망이 사실 육체에 속하는 게 아니라 힘에의 의지에 속한다. 그리고 그런 욕망 중 생명력을 건강하게 하는 욕망은 받아들인다. 많은 욕망들을 생명력을 건강하게 하는 욕망으로 변용하고 승화시켜야 한다. 니체는 우리의 문자 그대로의 신체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정신, 이성에 호소하는 것이다. 성찰 능력으로서의 독자적인 이성의 존재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 어떤 자기 의지에게 방향을 제시하는 이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런 이성은 욕망과 자기 자신을 대립적인 것으로 보지 않는 이성일 것이다. 욕망을 잘 다스리고 통제하며, 욕망 중에서 건강한 욕망과 병든 욕망을 구별하고 그 중 전자를 살리는 역할을 하는 이성일 것이다.
플라톤도 성욕 등을 죄악시하지는 않았다. 욕망에 사로잡히고 욕망의 노예가 되는 걸 어리석다고 보지 죄인이라 보지는 않은 것이다. 니체도 비슷하다. 욕망을 근절하려는 것도 병자들이지만, 욕망의 노예가 된 인간들은 어리석다고 보았다. 자기 욕망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공부할 때는 지성적 욕망이 자기 삶의 주인이 되게 하고 놀고 싶은 욕망을 추운히 자제할 수 있어야 한다. 필요한 욕망이 그때마다 주인되게 할 수 있는, 자신의 욕망의 주인이 되는 정신을 지향했다. 니체에 따르면, 나폴레옹이나 시저 같은 사람들도 자기의 욕망, 정복욕, 승부욕을 근절하려고 하지는 않았지만 상당히 절도 있게 분출했다. 징기스칸처럼 잔인무도하지 았았다. (교수님)
‘힘에의 의지’와 니체의 ‘자유로운 정신’의 관계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의 여지가 있다: 인간의 육체와 정신 모두가 힘에의 의지에 완전히 종속되어 있다는 듯한 서술과 힘에의 의지가 자유로운 정신에 의해 나아갈 방향을 부여받음을 암시하는 서술이 공존하는데, 니체 철학의 비체계적인 특성상 둘 중 하나의 해석이 단적으로 옳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다만 니체에게 있어서 양자가 어느 정도 동등한 지위로 결합할 수는 있을 것으로 사료된다- 니체의 자유정신이란 특정한 이데올로기나 종교 등의 사유의 프레임에 매몰되지 않고 다양한 관점들을 활용할 수 있는 ‘열린 정신’을 가리키는데, 니체는 건강한 의지 및 생명력을 가진 (즉 힘에의 의지가 건강하게 작동하는) 사람이 이러한 지성도 자연히 같이 갖추고 있었다고 보았을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말해지는 ‘자유로운 정신’은 이원론 하에서의 정신, 실은 불가능한 허상인 육체로부터의 분리를 추구하며 항상 자기 자신을 ‘더러운’ 존재로서 학대하는 불건강한 정신과는 명백히 다르다. 니체의 긍정적인 정신은 이원론적 사유 하에서 흔히 육체에게 속한다고 말해지는 욕망들 중 생명력을 건강하게 하는 욕망들을 긍정하고, 다른 다수의 욕망들을 그러한 생산적인 욕망으로 변형하여 승화시키고 통제하는 작업을 가능케 하는 성찰의 능력이다: 욕망과 자기 자신을 대립자로 상정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받아들이고 통제하는 주체로서의 이성인 것이다. (N 프로토콜)
“오, 바로 그런 영혼 자신이 야위었었고 몰골이 말이 아니었으며 굶주렸었다. 그러니 그 영혼이 누린 쾌락은 잔인함이었던 거지!”
“Oh, that soul was itself thin, hideous, and starved; and cruelty was the desire of that soul!”
“Oh diese Seele war selbst noch mager, grässlich und verhungert: und Grausamkeit war die Wollust dieser Seele!”
: 이원론적 영혼은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욕망조차도 배척하고 죄악시한다. 그렇지만 영혼은 욕망을 떨쳐내지 못하고 그래서 자신을 학대한다. 그러면서 야위고 비참해지고 굶주려졌다. 그런데 그러면서도 자기 학대에서 쾌감을 느꼈다. 신부나 수녀가 자기 등을 채찍으로 때리곤 하는데 자신의 죄의식을 더는 덜면서 동시에 쾌감을 맛보는 것이다. 잔혹함에서 느끼는 쾌감은 마조히스틱한 쾌감이다. (교수님)
“그대들의 영혼 자체가 궁핍하고, 때묻었고, 가여운 안일에 젖어 있다고 하지는 않는가?”
“Is your soul not poverty and dirt and wretched contentment?”
“Ist eure Seele nicht Armuth und Schmutz und ein erbärmliches Behagen?”
: 이원론자의 영혼은 자신을 순수하고 신에게 가깝다고 생각하면서도, 사실 빈곤하고, 더럽고, 가련한 즐거움을 느끼는 것 아니냐. 스스로 죄의식에 사로잡혀 자기를 더럽다고 생각하는 영혼. 신이 가진 사랑의 능력, 지혜 등을 결여한 빈곤한 존재로 생각하는 영혼. 자기를 학대하는 데서 즐거움을 느끼는 영혼. 이것이 이원론자들의 영혼 상태라는 것이다. (교수님)
“진정 인간은 더러운 강물이다. 더렵혀지지 않으면서 더러운 강물을 받아들이려면 인간은 먼저 바다이어야 한다.”
“Truly, a dirty stream is man. One must be a sea, to receive a dirty stream without becoming unclean.”
“Wahrlich, ein schmutziger Strom ist der Mensch. Man muss schon ein Meer sein, um einen schmutzigen Strom aufnehmen zu können, ohne unrein zu werden.”
: 우리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갖가지 욕망들 때문에 인간을 더러운 강이라 말한다. 욕망들은 이원론자들이 말하는 의미에서 더러운 것은 아니지만, 그것들이 통제, 절제되지 않으면 인간들 자신을 망칠 수 있다. 재물에 대한 욕망도 무분별한 탐욕이 될 수 있고, 성적 욕망도 섹스중독이 될 수 있다. 이런 욕망들을 다 받아들여야 한다. 받아들이면서도 휘둘리지 않으려면 바다가 되어야 한다. 바다는 강물, 하수도 물들을 받아들이지만, 바다로 동화시킨다. 초인은 이원론자들이 거부했던 욕망들, 경험들을 다 수용한다. 수용하면서 절도 있게 변용시킨다. 그러면서 그런 경험들, 체험들을 모두 자기 성장, 자기 극복의 계기로 끌어들인다. (교수님)
*커다란 경멸(great contempt, grosse Verachtung)
: 인간이 지금까지 덕, 행복, 이성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을 경멸하는 시간. 경멸이 왜 위대하냐(크냐). 그 경멸을 통해서 인간 스스로를 극복할 수 있으니까. 위대한 경멸이라는 것은 초인이 이원론자를 경멸하기보다는 원래 이원론자였던 사람이 이원론자였던 자신의 삶을 경멸하는 것. 그리고 그 상태를 넘어서려는 그런 열정이라 볼 수 있다. 자기를 초극하려는 태도가 위대한 경멸이다.
거리의 파토스는 자기를 고양시켜서 소위 천박한 인간, 비열한 인간과의 거리를 확장시키려는 열정인데, 그걸 자신에게 적용할 수 있다. 자기 자신에게 항상 비천한 요소들이 있는 거니까 거기에 대해 거리를 취해서 고양시키려는 열정을 위대한 경멸로 해석할 수도 있다. (교수님)
“그대들이 이렇게 말하는 때지. ‘내 이성, 그게 다 뭐냐! 그것은 사자가 먹이를 탐하듯 지식을 갈구하지 않는가! 그러니 궁핍이고 때묻었으며 가여운 안일이다!’”
“The hour when you say: “What good is my reason! Does it long for knowledge as the lion for his food? It is poverty and dirt and wretched contentment!””
“Die Stunde, wo ihr sagt: “Was liegt an meiner Vernunft! Begehrt sie nach Wissen wie der Löwe nach seiner Nahrung? Sie ist Armuth und Schmutz und ein erbärmliches Behagen!””
: “사자가 먹이를 탐하듯”이라는 탐욕스럽고 짐승적인 서술은 ‘앎 자체를 위한 앎’을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행위에 대한 니체의 비판적 인식을 반영한다. 삶을 긍정하고 삶에 기여하지 않는 공허한 앎의 추구는 경멸의 대상이 되어 마땅하며, 지식에 대한 올바른 형태의 추구는 그것이 ‘삶을 위한 지식’일 때 성립한다는 것이다. (N 발제문)
니체가 현대의 앎을 비판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맞다. 니체는 삶에 도움되지 않은 소소한 지식을 모두 탐구하는 행위를 경멸한다. 니체가 고전문헌학에 대해서 환멸을 느끼고 철학자의 길을 걸었던 이유도 이것이다. 그는 고전문헌학자들을 두더지 같다고 말했다. 삶에 도움도 안 되는 것들에 몰두하는. 그들은 삶으로부터 지식으로 도피한다. 앎을 위한 앎, 지식을 위한 지식, 학문을 위한 학문, 순수예술, 예술지상주의. 이런 것들도 마찬가지로 비판한다. 예술도 삶을 고양해야 하는데, 순수예술 이런 걸 추구하는 사람을 보면 현실에서 도피해서 그런 예술에서 삶의 위로를 찾으려는 거 아니냐는 것이다.
그러나 백승영 씨 번역이 잘못된 것 같다. “갈구하는가?”로 번역해야 한다. 니체에게서 사자는 항상 긍정적으로 이야기되는 동물이다. 나의 이성이 이원론이나 정당화시키고 있고, 허구를 정당화시키고, 천국이라든가 이런 데서 위로나 찾고 있고. 오히려 이제 사자가 먹이를 탐하듯이 나의 이성이 삶의 진리를 탐해야 하는거 아니냐 이런 식으로 해석해야 하는거 아닌가 싶다. (교수님)
“그대들이 이렇게 말하는 때지. ‘내 정의, 그게 다 뭐냐! 나는 나를 작열하는 불꽃과 숯이라고는 보지 않는다. 하지만 정의롭다는 자들은 작열하는 불꽃이자 숯이다!’”
“The hour when you say: “What good is my being just and right! I don't see myself as fire and coals. The just and the right, however, are fire and coals.””
“Die Stunde, wo ihr sagt: “Was liegt an meiner Gerechtigkeit! Ich sehe nicht, dass ich Gluth und Kohle wäre. Aber der Gerechte ist Gluth und Kohle!””
: ‘작열하는 불꽃이자 숯’은 〈로마서〉 12장 19~21절의 패러디다(“여러분 자신이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성서에도 ‘원수갚는 일은 내가 할 일이니 내가 갚겠다’하신 주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니 원수가 배고파하면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하면 마실 것을 주십시오- 그렇게 하면 그의 머리에 숯불을(독일어 성서: 작열하는 숯 glühende Kohle’) 쌓아놓는 셈이 될 것입니다 악에게 굴복하지 말고 선으로써 악을 이겨내십시오.”) 〈로마서〉의 이 구절을 니체는 정의 개념 속에 숨어 있는 복수 기제로 이해한다. 인간이 하지 않아도 결국에는 신이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하기에 신의 정의 구현은 함무라비 법전의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응보로서의 정의 구현과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이런 응보는 니체에게는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게 하면서 고통을 주는 것, 악을 악으로 갚는 복수다. 1부 〈독사의 옮에 대하여〉 참조. (백승영 역주)
역시 백승영의 오역이다. 밑줄 친 구절의 원문에는 ‘정의로움을 자처하는’ 혹은 ‘정의롭다고 보이는/말해지는’과 같은 거짓됨의 뉘앙스가 내포되어 있지 않다. 단순히 ‘정의로운 자들’이라고 옮기는 것이 적합하다. 백승영의 기존 번역에 따르면 ‘작열하는 불꽃과 숯’이 부정적인 관념으로- 즉 참된 정의가 아닌 무언가로- 해석될 소지가 큰데, 이 역시 해당 맥락에서 우리가 실현해야 할 (그러나 아직 그러지 못하는) 상태에 대한 긍정적인 의미로 쓰였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니체에게 있어서 정의는 사회의 구성원들을 안일에 빠트리고 ‘하향평준화’시키는 민주주의의 기계적 평등이 아니라 오로지 탁월한 자만이 지배하는, 그래서 다수에게 그러한 자격에 대한 갈망이라는 생산적 욕망을 낳는 구조이다: 후자가 도모하는 강함 따위가 ‘작열하는 불꽃’에 비유되고 있는 것이다. (교수님 – N 프로토콜)
“그대들이 이렇게 말하는 때지. ‘내 동정. 그게 다 뭐냐! 동정은 인간을 사랑했던 그자가 못 박힌 십자가가 아닌가? 하지만 내 동정은 십자가형이 아니거늘.’”
“The hour when you say: “What good is my pity! Is not pity the cross on which he is nailed who loves man? But my pity is not a crucifixion.””
“Die Stunde, wo ihr sagt: “Was liegt an meinem Mitleiden! Ist nicht Mitleid das Kreuz, an das Der genagelt wird, der die Menschen liebt? Aber mein Mitleiden ist keine Kreuzigung.””
: 앞서 서설 2 장에서도 확인한 것처럼, 니체는 동정 및 적선을 중심으로 정의되는 기독교적 선을 기만적인 것으로서 부정한다. 니체에게 있어서 타인에 대한 동정은 약자/죄인으로서의 상대에 대한 무시를 내포하고 있는 태도로, 그의 존재를 진정으로 배려하고 존중하는 ‘참된 사랑’일 수 없다. 니체가 생각하는 진정한 사랑은 상대가 위버멘쉬로 거듭날 가능성을 품고 있음을 존중하고 고통을 통해 그러한 성장을 추동하는 ‘가혹한 사랑’이다. (N 발제문)
예수는 인간의 죄를 사하기 위해 인간의 죄를 다 짊어지고 대신 십자가에 못 박힌다. 니체가 보기에 예수의 그러한 행위에는 인간이 자기 죄를 짊어질 수 없다는 인간 비하가 깔려있다. 니체는 오히려 인간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초인의 가능성을 실현하도록 채찍질하는 사랑을 바란다. (교수님)
“그런데 정작 하늘을 향해 외쳐댄 것은 그대들의 분수를 아는 만족이었다. 그대들의 죄가 외쳐댄 것이 아니었다. 그대들의 죄 한가운데서 그대들의 욕심이 하늘을 향해 소리를 질러댄 것이다!”
“It is not your sin - it is your thrift that cries to heaven; it is the meanness of your sin that cries to heaven”
“Nicht eure Sünde - eure Genügsamkeit schreit gen Himmel, euer Geiz selbst in eurer Sünde schreit gen Himmel!”
: 사람들은 기존의 가치들을 부정하는 ‘위대한 경멸’을 외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스스로를 죄인으로 여기고 죄를 사해 달라고 외칠 뿐이라는 것이다- 부정적인 의미에서 ‘분수를 아는’(스스로를 초월/발전하고자 하지 않고 죄의 사함만을 바라는, 안일한) 이들의 욕심인 것이다. (N 발제문)
“그대들의 분수를 아는 만족”은 “그대들의 자기만족” 정도로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대들의 죄 한가운데서 그대들의 욕심이 하늘을 향해 소리를 질러댄 것이다!”는 “죄짓는 일들에 있어서 인색함이 하늘을 향해 소리친 것이다!” 정도로 번역할 수 있겠다.
이원론자들이 죄로 생각하는 것들은 사실 죄가 아니다. 사람들이 죄라고 하는 건 뭐냐, 기껏해야 성욕을 갖거나 머릿속에서 남을 시기질시하는 정도인데, 니체가 보기엔 그건 죄도 아니다. 성욕이 잘못된 것도 아니고 남을 시기질시할 수도 있다. 오히려 시기질시가 발전의 동력이 될 수도 있다. 남을 음해하려는 게 아니면 자기를 다그치고 남을 앞서려고 노력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원론에 빠진 사람들은 죄도 아닌 것을 죄라고 생각하고 죄를 지어도 보잘것없이 짓는다. 역사적으로 위대한 인간들, 새로운 가치를 정립한 사람들, 니체 자신 같은 사람들이 기독교 입장에서 보면 가장 큰 죄인이다. 기존의 가치관을 뒤집어 버리기 때문이다. 이런 것이 죄라면 죄다. (정확히는 사회적 규범에 묶여있는 사람이 죄라고 부르는 것이겠지만 말이다.)
나중에 <창백한 범죄자들>이라는 장에서 보겠지만, 니체는 범죄자에 대해 이야기한다. 보통 우리들이 범죄자라고 하는 사람들은 강도, 살인자 등이다. 니체는 그런 사람들을 긍정하지 않고 병들었다고 본다. 사회적 구속을 견딜 수 없던 강한 자들이긴 하지만 역시 사회적 틀에 구속되어 있는 자들이다. 정말 강한 사람들은 나폴레옹, 시저처럼 사회를 넘어서는 자들이고 새로운 입법을 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니체에게 있어 위대한 범죄자들이다. “죄에 있어서의 인색함”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교수님)
(수업 : 박찬국, <존재론연습> (20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