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가논/연구법

이기상(2020),「독일 유학시절 회상 – 유학생활 십년을 허송한 어떤 분!」 전문

현담 2022. 7. 10. 12:31

독일 유학시절 회상 – 유학생활 십년을 허송한 어떤 분!

 

  아는 사람 중의 한 사람이 한국서 철학과 학부를 마치고 독일 쾰른으로 유학을 나왔다. 나와 비슷한 시기에 유학 온 사람이다. 석사부터 시작하다가 지도교수를 잘 만나서 석박사 통합과정에 등록할 수 있게 되었다. 한국학생들이 대체로 지도교수를 자주 찾아가지 않는다. 지도교수의 세미나와 지도학생 콜로키움에 빠짐없이 나가서 다른 지도받는 학생들과 어울리며, 지도교수의 전공분야와 세부적인 관심사항에 대해 충분한 정보를 얻어야 하는데, 보통은 그렇지 못하다. 혼자 공부하며 자신 있게 무언가 말하며 제안할 수 있을 때까지는 집과 도서관을 다니며 열심히 책과 씨름한다. 그러면 정말 2-3년은 금방 지나간다. 간신히 나름대로 공부한 것 정리해서 계획서를 작성해서 제출하고, 지도교수와 약속잡고 상담시간에 나간다. 미리 세미나나 콜로키움에서 주제에 대해 말씀드리고 조언을 받는다면, 주제의 방향이 어느 정도 잡힐 수 있다. 그런데 그런 과정 없이 혼자 자기 관심에 따라 공부하여 체계를 짜가다 보면 큰일 날 수 있다. 자기 계획서를 읽어보고 지도교수가 이것은 방향이 잘 안 맞으니, 이런저런 주제로 공부를 해서 다시 작성해오라고 말씀한다.

 

  얼마나 실망스럽겠는가! 2년 혼자 끙끙거리며 나름 피나게 공부해서 작성한 건데. 또 혼자 틀어박혀 열심히 공부해서 일 년 뒤 지도교수를 찾아뵌다. 이런 식으로 유학생활이 6년가량 훌쩍 지나버렸다. 그러다 지도교수의 건강이 안 좋아져 급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이러면 그야말로 청천벽력이다. 새로 지도교수를 물색해야 한다. 간신히 논문주제 잡아서 어느 정도 진척이 생겼는데 말이다. 어렵사리 새 지도교수를 정하고 새로 주제를 부여받고 또 새롭게 공부를 시작한다. 그런데 이 지도교수가 깐깐해서 진척이 안 된다. 그렇게 또 2-3년이 흘렀다. 결국은 틀어져서 논문 다 팽개치고 귀국한다.

 

  약간의 상상력이 동원되기는 했지만 큰 틀에서는 이야기가 맞는다. 내가 학위논문을 끝내고 쾰른 쪽에 갈 일이 있어 한 번 만났다. 그때 새 지도교수와 막바지 논문작업을 하는 중이었다. 유학 온 지 거의 8-9년차였을 것이다. 그러다 몇 년 뒤 한국에서 전화를 받았다. 귀국했다고. 학교에 강의 하나 받을 수 있는지 물어왔다. 그런데 문제는 그의 최종학력이 여전히 대학 철학과 학사라는 점이다. 10년 유학생활에 독일어 능숙하고 철학지식이 풍부할지는 몰라도 한국 대학 학제상 학부졸업한 사람이 대학강단에 서기는 어렵다. 그래서 도와줄 수가 없었다. 결국 그 사람은 어느 대학에서도 강의를 받지 못했다. 40대에 다른 일자리를 찾아봐야 했다.

 

-이기상 (한국외국어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

(출처 : https://m.blog.naver.com/saiculture/222012676228)

 

  요지는 다음과 같다. 한국에서 철학과 학부를 졸업하고 독일로 유학 와서 철학과 석박사 통합과정을 밟게 된 사람이 있었는데, 교수나 동료들과 학문적 교류를 일절 하지 않고 혼자 책만 붙들고 끙끙거리며 공부하다가 망했다는 것이다. 몇 년씩 혼자 공부하다가 지도교수를 찾아가고, 다시 또 혼자 공부하다가 찾아가고, 그러다가 원래 지도교수가 세상을 떠나서 새로운 지도교수와 다시 논문을 시작하는데 새 논문이 잘 안 쓰이고, 결국 10년이 가도 논문을 완성하지 못한 채 귀국한 사람이었다. 귀국해서도 그의 불행은 이어졌는데 그의 최종학력이 학사라 아무 데서도 강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기상 교수는 이 사례에서 드러나는 한국인 독일 유학생의 문제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지도교수의 세미나와 지도학생 콜로키움에 빠짐없이 나가서 다른 지도받는 학생들과 어울리며, 지도교수의 전공분야와 세부적인 관심사항에 대해 충분한 정보를 얻어야 하는데, 보통은 그렇지 못하다.” 낯선 이국땅에서 난해한 철학적 주제에 관해 외국어로 외국인들과 교류하는 일은 큰 심적 부담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 심적 부담에도 억지로 부대끼면서 스승과 동료들에게 자기 의견을 표현하여 검토받고 방향을 수정해나가면서 공부해나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공부가 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없고, 논문이 제대로 써질 수가 없다. 방구석 철학은 어떤 성과도 낳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