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가논/연구법

김영민(2020), 단어 사용의 기술

현담 2023. 3. 14. 18:26

1. 정확한 단어 사용과 단어의 정확한 이해

 

a. 그저 멋지다는 이유만으로 그 단어를 사용하지 말라.

 

단지 멋있게 들린다는 이유 하나로, 하드웨어(hardware)의 문제를 구조적(structural) 문제라고 부르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그가 이 세탁기는 구조적인 문제가 있어라고 하면, 그것은 세탁기 기계 구조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뜻이 아니라 그냥 세탁기 부품이 고장 났다는 뜻이다. 그가 우리 사회는 구조적인 문제가 있어라고 하면, 그것은 우리 사회의 구성 요소들 간에 지속적인 문제가 있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 건설된 댐이나 빌딩에 문제가 있다는 뜻이다.”

 

, 사람들이 열광하는 단어이니 성명서에 민주주의라는 표현을 넣어볼까. 다수가 공분하는 단어이니 신자유주의라는 라벨을 붙여볼까. 그런 식으로 사용될 때, 그 단어는 멍멍!’과 크게 다르지 않다.”

 

b. 유사어 간 차이를 판별하라.

 

이를테면, 구름, 수증기, 김과 같은 단어들을 생각해보자. 수증기는 물이 투명한 기체 상태로 된 것이기에 눈에 보이지 않는다. 반면, 구름은 수증기가 작은 물방울, 혹은 얼음 알갱이로 변하여 공중에 떠다니는 것으로서 가시적인 것이다. 김 역시 수증기가 찬 기운을 받아서 엉긴 작은 물방울로서 수증기와는 다르다.”

 

사람들이 거창한 주장을 할 때 종종 들먹이는 국가, 정부, 사회, 공동체 등의 단어들, 그리고 민족, 겨레, 종족 등의 단어들 역시 유사하지만 다른 단어들이다. 그러한 단어들의 뜻을 제대로 판별하여, 맥락에 맞게 활용하지 않는 한 정교한 의사소통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c. 같은 단어라고 해서 반드시 같은 뜻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똑같이 사랑해라고 말하더라도 사람들은 그 말에 각기 다른 의미를 담는다. 감정이 석류처럼 풍부한 A사랑해라고 하면, 그것은 당신과 정서적인 교감을 나누자는 말이다. 성욕이 성게알처럼 흘러넘치는 B사랑해라고 하면, 그것은 당신과 격렬한 성교를 하고 싶다는 말이다. 반지를 손에 쥐고서 C가 애걸하듯이 말하는 사랑해는 당신과 결혼하고 싶다는 말이다. 생활고에 지친 D가 내뱉는 사랑해라는 말은 당신과 싸우고 싶지 않으니 제발 자신을 혼자 내버려두라는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A, B, C, D는 별개 사람이 아니라 같은 사람이 생애 주기의 여러 국면에서 사랑의 의미를 달리하는 모습일 수도 있다. 상황이 이러할진대, 사랑이라는 단어가 극히 고매한 뜻을 담을 수도, 극히 저열한 뜻을 담을 수도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d. 다른 단어라고 해서 반드시 다른 뜻을 갖는 것도 아니다.

 

한국 사람들이 모두 잘 알고 있는 한강(漢江)’이라는 단어를 생각해보자. 과거에 사용된 경강(京江)은 한강과는 다른 단어이지만 그 역시 한강을 지칭했다. 그뿐 아니라 한서(漢書)』 「지리지에 나오는 대수(帶水),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에 나오는 아리수(阿利水), 삼국사기에 나오는 한수(寒水) 역시 모두 한강과는 다른 단어이지만, 모두 한강을 지칭했다.

  그러나 이 단어들이 모두 오늘날 한강을 정확하게 지칭한다고 결론 내리기도 어렵다. 오늘날 한강은 서울 주변을 넘어서는 꽤 긴 물줄기를 지칭하는 데 비해, 경강은 상대적으로 서울 부근의 한강을 가리켰기 때문이다. 그리고 경강 내에서 비로소 한강, 서강(西江), 용산강(龍山江) 등의 세부적인 강 명칭이 있었다.”

 

이처럼 한강이라는 같은 단어가 시대에 따라 다른 대상을 지칭할 수도 있고(c.), 다른 단어들이 같은 강을 지칭할 수도 있는 것이다(d.) [...]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역사적인 문헌을 가지고 글을 쓰거나 대화를 할 때 염두에 두어야 할 사실이다.”

 

e. 자명해 보이는 단어가 전달하는 내용이 분명치 않을 수 있다.

 

“‘국립이나 사립과 같은 단어를 생각해보자. 우리는 대개 국립대학이라는 단어를 통해서 국립대학은 나라에서 세운 학교이며, 운영에 필요한 재정을 나라로부터 조달할 것이라는 가정을 하기 쉽다. 마찬가지로 사립대학은 민간에서 세운 학교이며, 재정을 민간에서 조달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2010년 지역 국립대 중에서 가장 많은 정부 예산을 받은 곳은 경북대학교였는데, 그 액수는 2126억 원이었다. 반면 사립 연세대학교는 그보다 많은 2349억 원의 예산을 정부로부터 지원받았다. 이러한 사실은 단어의 기본적인 뜻으로 해소하기 어려운 (정치적) 함의가 한국어의 국립혹은 사립에 담겨 있음을 보여준다.”

 

f. 모호해 보이는 단어가 정확한 뜻을 전달할 수 있다.

 

언론에서는 성기를 중요 부위라고 칭하곤 하는데, 독자들은 다 그것이 성기를 지칭한다는 사실을 명확히 알고 있기에, 도대체 어느 부위가 그토록 중요하단 말인가, 라는 의문을 새삼 제기하지 않는다.”

 

이처럼 모호한 표현에 높은 사회적 합의가 담겨 있을 경우, 그것은 그 사회의 마음 상태에 대한 의미심장한 지표가 될 수 있다. 사람에 따라 성기보다는 머리를, 혹은 쇄골을, 혹은 목 뒷덜미를, 혹은 복사뼈를 더 중요시할 수 있다. 그럼에도 어떤 사회에서 하필 성기를 골라서 중요 부위라고 부르고 있다는 사실은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회에 대해 뭔가 시사하는 게 아닐까.”

 

2. 단어의 정의(definition) 찾기

 

a. 정의와 부수 현상을 구별하라.

 

반짝임은 대머리의 부수 현상일지는 몰라도 대머리의 정의는 아니겠죠. 대학생이 되었는데, 아직 셰익스피어도 안 읽었나요? 반짝인다고 다 금은 아니다(All that glitters is not gold)라는 말도 있죠. 반짝인다고 다 대머리는 아닙니다.”

 

b. 정의와 비유를 구별하라.

 

“‘환하게 불이 들어오는 거요. 대머리는 불 들어온 인간 전구.’ 선생을 놀리려는 수작임을 알고 있으나, 놀랄 일은 아니다. ‘, 그건 대머리의 정의가 아니라 대머리의 비유겠죠.’”

 

c. 정의가 꼭 사실에 대응하는 것은 아니다.

 

“‘대머리는 머리털이 적은 상태를 말합니다.’ ‘머리털이 적은 상태라니? 도대체 얼마나 적어야 대머리가 되는 거죠? 철학자 티머시 윌리엄슨은 머리털의 배열과 머리털의 길이까지 고려해야 하다고 주장한 바 있어요. 좀 더 구체적인 예를 들어볼게요. 똑같이 1만 개의 머리털을 가졌다고 해도 머리가 작은 소두인은 그 정도 머리털만으로도 두피를 가릴 수 있는 반면, 머리가 큰 대두인은 두피를 가리지 못해서 대머리가 되기 쉽겠죠. 그리고 머리털이 1만 개면 뭐하고, 1억 개면 뭐하겠어요. 1억 개의 머리털이 뒤통수에만 빼곡하게 나 있다면, 결국 대머리겠죠. 머리털 수 가지고는 대머리를 효과적으로 정의하기 어려워요.’”

 

“‘그러면 빠지는 머리카락 수로 대머리를 정의하면 되지 않을까요? 하루에 300개 이상 머리털이 빠지면 대머리다, 이런 식으로.’ ‘, 대머리를 고정된 상태라기보다는 역동적인 과정으로 이해하자는 거군요. 그런 식이라면, 원래 뒤통수에만 머리털을 가지고 태어났으되, 그 머리털이 좀처럼 빠지지 않는 사람을 설명하기 어려울 것 같네요.”

 

d. 정의는 사회적 영향을 받는다.

 

“‘[...] 대머리는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건가요, 남들에게 대머리로 간주될 때야 비로소 대머리가 존재한다는 말씀인가요?’ [...] ‘대머리라는 것이 남들이 그렇게 부르느냐 마느냐에 좌우되는 것이라면, 대머리 치료제를 개발하려고 애쓸 필요도 없겠네요. 사람들이 대머리 운운하지 않으면 대머리란 사라지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이어서 이걸로 대머리 치료제 특허를 내도 되겠는데요’”

 

“[...] 한두 명이 대머리라고 부르지 않는다고 해서 사회적 현실이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다수가 기꺼이 그런 길을 따르면, 정말 대머리라는 게 세상에서 사라져버릴지도 모르죠. 잘은 모르지만, 변발이 유행하던 청나라 때는 대머리 인식이 지금과는 다르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저는 빠지는 머리털을 볼 때마다 변발이 다시 유행하기를 바랍니다. 한때 변발이 유행하던 시절이 있었지만, 오늘날에는 그렇지 않다는 것은, 무엇이든 영원한 것은 없다는 말이기도 하죠. 오늘날 통용되는 대머리의 정의도 언젠가는 바뀔 수 있겠지요. 말이 재정의되는 일은 한 사회의 마음이 변화하고 있다는 표시이기도 합니다.”

 

어떤 것이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임을 깨닫는다고 하여, 사회적 현실이 곧 변하지는 않지요, 변화란 쉽지 않습니다. 뿌리 깊은 인간의 열망에 호소할 수 있을 때만 변화가 가능하겠지요.”

 

3. 단어의 사회적 함의

 

a. 단어 간 미구분과 구분

 

“‘다르다틀리다를 구분할 줄 모르면서, 다양성이 넘치는 혹은 정의가 구현되는 사회를 이룰 수 있을까. 다른 의견을 모두 틀린 의견으로 몰아세울 텐데? 혹은, 틀린 의견을 다른 의견이라고 변명할 텐데?”

 

그렇다고 해서, 구분이 다 능사라는 말은 아니다. 어떤 구분은 지나치게 정치적이다. 백인종, 황인종, 흑인종과 같은 인종 구분은 서구 제국주의의 전개와 더불어 정착되었다. 나는 황인종으로 분류되지만, 내 뽀얀 우윳빛 속살을 볼 때마다 나는 내가 황인종이라는 사실을 의심한다.”

 

b. 단어의 평가적 기능

 

“‘노예라는 단어는 단지 특정 현상을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평가하는 역할까지 한다. 그렇기에, 조선 시대 노비를 노예로 부를 것인가, 위안부를 성노예로 부를 것인가 하는 문제는 정치적인 이슈이기도 하다.”

 

퀜틴 스키너(Quentin Skinner)가 말했듯이, 평가어는 해당 사회의 의식을 반영한다. 그렇기에, 어떤 단어에 단순히 변화를 준다고 해서, 해당 사회가 곧 바뀌는 것은 아니다. 장애인에 대한 의식을 개선하기 위하여, 장애인이라는 말 대신 장애우라는 말을 택한다고 해서 관련된 사회의식이 자동으로 바뀌는 것은 아니다. 명실상부한 사회의식 변화가 뒤따르지 않는다면, 장애우라는 신조어는 오히려 장애를 가진 이들에게 스트레스만 줄 수도 있다. 친구로 대하지도 않으면서 왜 친구라고 부르는 거야! 문명인처럼 군답시고, 먼 나라 원주민을 야만인 대신 야만우라고 부른다면, 그것은 문명이라는 이름의 야만일 것이다.”

 

c. 단어의 의미와 적용 방식의 변화

 

단어를 둘러싼 제반 조건이 바뀐다면, 단어 자체가 바뀌지 않아도 그 단어의 함의는 바뀔 수 있다. [...] 대규모 상업의 발달, 그리고 뒤이은 자본주의의 발흥은 실로 인류사의 거대한 변화 중 하나다. 이러한 변화의 흐름 속에서 상인들은 기존에 종종 탐욕스럽고 부정직한 패거리로 인식되어온 자신들의 이미지를 바꾸고, 자신들의 이윤 추구 활동을 정당화하기 원했다. 그리하여 그에 공명한 지식인들은 기존 평가어들의 함의를 바꾸고자 부심하였다. 그 과정에서 검소(frugality), 야심(ambition), 약삭빠름(shrewdness)과 같은 용어의 함의가 바뀌었다. 역사가들에 따르면, 프로테스탄트의 정신이 자본주의의 발흥에 정말 중요한 원인이 되었는지는 의심스럽지만, 적어도 프로테스탄트 윤리는 자본주의를 정당화하는 데 유용한 평가어들을 제공하는 데는 큰 역할을 했다. 그러한 평가어의 변화는 자본주의의 발흥이라는 큰 사회적 변화와 함께했기에 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퀜틴 스키너는, 우리가 사는 세계는 규범적인 평가어들의 쓰임새에 의해 지탱되므로,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그 평가어의 적용 방식을 바꾸는 것이라는 취지의 주장을 한 바 있다. 실로 뛰어난 작가는 시대의 흐름을 예민하게 포착하여, 당대의 평가어를 재정의해내기도 한다. 이를테면,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을 통해 한때 미덕으로 높이 평가되던 관대함(liberality)이 사실 악덕일 수 있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by. 김영민

(서울대학교 정치학 교수)

(출처 : 김영민, 공부란 무엇인가, 서울: 어크로스, 2020, 19-35, 5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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