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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돈』, 『니코마코스 윤리학』 용기 논평

현담 2022. 5. 8. 00:59

파이돈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의 용기 비판

 

  『파이돈에서 플라톤은 철학자가 아닌 사람들(이하 일반인’)의 용기를 두려움에 의한 용기로 규정하고 그것이 진정한 용기가 아니라 비판한 후, 진정한 용기로서 철학자의 용기가 무엇인지 설명한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도 이러한 플라톤의 전략과 유사한 방식으로 용기가 아닌 것과 진정한 용기의 구별을 시도한다. 나는 1절에서 플라톤의 철학자의 용기와 아리스토텔레스의 탁월성으로서 용기가 어떤 지점에서 연결되고 또 어떤 지점에서 분기되는지 탐구하고, 2절에서 그것들이 각각 어떤 장점과 한계를 지니는지 평가할 것이다.

 

1.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용기 비판 : 철학자의 용기와 탁월성으로서 용기

 

  플라톤에 따르면, 일반인은 죽음을 크게 나쁜 것으로 여겨서 용기 있는 일반인은 죽음이라는 크게 나쁜 것을 더 크게 나쁜 것들에 대한 두려움에 의해 견딘다. 말하자면, 일반인의 용기는 더 큰 두려움으로 인해 더 작은 두려움을 견디는 것이다. 플라톤은 이를 두고 덕을 위한 올바르지 못한 교환으로 평가하면서 작든 크든 두려움을 두려움으로 교환하는 한 실로 노예에게나 어울리며, 온전한 바도 참된 바도 없는 것”(69b)이라 비판한다. 일반인의 용기는 어쨌든 나쁜 것에 대한 두려움이고, 그것이 어떤 식의 두려움인 한 용기라 불릴 수 없다. 내 앞에 있던 무서운 범을 치우고 덜 무서운 표범을 가져다 놓았을 때, 나는 덜 무서운 것이지 용감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플라톤에게 진정한 용기란 무엇인가? 그것은 죽음이 나쁜 것이 아님을, 아니 오히려 좋은 것임을 깨닫고, 견뎌야 할 나쁜 것 혹은 그것에 대한 두려움 자체가 없어진 상태이다. 플라톤은 몸으로부터의 영혼의 해방”(64c)인 죽음을 통해 다른 지혜로우며 훌륭한 신들 곁으로, 그리고 그다음으로는 이 세상 사람들보다 더 훌륭한 죽은 사람들 곁으로 가게 될 것”(63b)이며, 순수해진 영혼의 추론으로 비로소 앎을 획득하게 될 것(67a-b)이라 말한다. 철학자는 이렇게 죽음이 오히려 좋은 것임을 아는 현명함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통해 두려움을 정화한 상태에 있다. 결국 진정한 용기로서 철학자의 용기란 죽음이 오히려 좋은 것임을 깨닫고 어떠한 두려움의 견딤 없이 죽음을 기꺼이 맞이할 수 있는 상태이다. 내가 내 앞에 있던 맹수가 사실 맹수가 아님을, 아니 오히려 맹수의 탈을 썼던 사랑하는 사람임을 깨달을 때, 나는 그것을 무서워하기는커녕 기꺼워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이 말하는 일반인의 용기를 변주하여 유사하게 비판한다. 가난이나 성적인 열망과 같은 다른 고통스러운 것을 피하기 위해 죽는 것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견딘다는 점에서 용기 있는 행위가 아니라 고통스러운 것을 피한다는 점에서 비겁한 행위이다(1116a10-16). 마찬가지로 법률 혹은 통치자에 의해 받게 될 처벌과 같은 나쁜 것을 피하기 위해 죽음을 견디는 시민적 용기 또한 진정한 용기가 아니다(1116a17-1116b3).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진정한 용기는 플라톤처럼 죽음이 좋은 것임을 아는 현명함과 두려움 사이의 이른바 덕의 올바른 교환에 의한 것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진정한 용기인 탁월성으로서 용기는 고귀한 것을 위해 마땅히 두려운 것을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방식으로 두려워하는 것이다(1115b18-20). 그것은 또한 주된 의미에서 고귀한 상황에서의 죽음, 즉 전쟁에서의 죽음을 견디는 것이기도 하다(1115a30-34). 전쟁은 폴리스를 방어하는 것이고, 따라서 그것은 개인의 인간적인 좋음보다 더 크고 완전하며 고귀하고 신적인 폴리스의 좋음을 취하고 보존하는 일(1094b7-12)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과 다른 어떤 덕의 올바른 교환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이를테면 고귀함과 두려움의 교환이다. 죽음은 나쁜 것이 맞으며, 특히 탁월한 자에게는 그것이 그에게서 그의 모든 탁월성과 행복을 앗아가기에 더욱 나쁜 것이다(1117b10-15). 하지만 탁월한 자는 인간적인 좋음이라는 최고선, 특히 폴리스의 좋음이라는 최고선을 위해 나쁜 것으로서 죽음을 수용한다.

 

  정리하자면, 철학자의 용기와 탁월성으로서 용기는 공통적으로 두려움에 의한 용기, 더 큰 두려움을 피하기 위한 더 작은 두려움, 다른 나쁜 것을 피하기 위해 죽음이라는 나쁜 것을 견디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철학자의 용기는 죽음이 좋은 것이라는 앎을 통해 견뎌야 할 나쁜 것 혹은 견뎌야 할 두려움 자체를 제거한 상태이고, 탁월성으로서 용기는 고귀한 것에 대한 추구를 위해 죽음이라는 나쁜 것 혹은 그에 대한 두려움을 견디는 상태이다.

 

2. 철학자의 용기와 탁월성으로서 용기 비판 : 각각의 장점과 한계

 

  철학자의 용기는 죽음이 좋은 것임을 앎으로써 즉각적으로 획득할 수 있다. 내가 맹수로 알던 것이 사실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은 순간부터 나는 그것을 더 이상 두려워할 이유도 없고 두렵지도 않을 것이다. 이는 탁월성으로서 용기를 획득하기 위해 필요한 수많은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하는 행위들과 그것의 습관화가 철학자의 용기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필요치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철학자의 수행이란 다만 육체적 즐거움과 몸을 돌보는 일을 멀리함으로써 몸으로부터 영혼을 최대한 분리하여 죽어 있음에 가까이 있는 것이다. 이것은 철학자의 용기를 위한 수행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순수한 영혼의 상태에 가깝게 만들어 순수한 추론을 통해 이데아에 대한 앎에 근접하기 위한 수행이다.

 

  그러나 죽음이 좋은 것이라는 앎 자체가 즉각적으로 획득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플라톤 자신도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파이돈의 모든 지면을 할애한다. 그는 주로 몸으로부터 해방된 영혼이 소멸하지 않는다는 것을, 즉 영혼 불멸 논제를 가능한 비판에 맞서 끊임없이 논증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인간을 돌본다는 신이 존재하는지, 상기된다는 이데아가 존재하는지 등 플라톤이 세운 형이상학적 논제들에 대한 의문이 남게 되고, 그것들이 앎이라고 불릴 수 있을 만큼 명확하게 증명되기 위해서는 수많은 논증이 필요하며, 애초에 그것들이 명확하게 증명될 수는 있는지조차 의심스럽다. 결국 현명함을 통해 철학자의 용기를 즉각적으로 획득할 수 있더라도, 그 현명함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복잡한 지적 추론이 필요하며, 그것이 획득될 수 있는지조차 확실치 않는다는 점이 그것의 한계로 지적될 수 있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탁월성으로서 용기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플라톤이 마주하는 엄청난 지적 부담을 지지 않아도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죽음은 끝(peras)이며, 죽어 버린 자에게는 좋은 것이건 나쁜 것이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1115a26-27)와 같은 객관적 관찰을 넘어섬으로써 증명이 요구되는 형이상학적 논제들이 필요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어디서도 신, 이데아, 영혼 불멸, 상기 따위를 이야기하지 않고 그럴 필요도 없어 보인다. 대신 탁월성으로서의 용기는 행위자에게 그것의 획득을 위한 실천적 부담을 지운다. 용감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그는 끊임없이 고귀한 것을 추구하면서 두려움을 마주하고 극복해야 한다. 그리고 실천적 부담은 시간이 지날수록 경감되지 않고 오히려 증가한다. 왜냐하면 탁월하면 탁월할수록 그가 가진 탁월성은 많아지고 그가 누리는 행복은 커지기에 죽음의 고통 또한 더 커질 것이기 때문이다(1117b10-15).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의 탁월한 행위자는 플라톤의 철학자가 도달할 수 있는 두려움 자체가 없는 정화 상태 나아가 죽음을 기꺼워하는 상태에는 이를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결국 큰 지적 부담 없이 획득할 수 있는 탁월성으로서 용기는 용기 있는 행동의 끊임없는 습관화와 점점 증가하는 죽음의 무게를 이겨내야 하는 실천적 부담을 지닌다는 점이 그것의 한계로 지적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