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현대대륙철학 이차문헌

[해석학] 김창래(2008), 「나은 이해 또는 다른 이해?」, 『범한철학』 51(4)

현담 2022. 5. 27. 13:45

<목차>

 

1. 두 개의 해석학? (240-245)

2. 나은 이해와 다른 이해 (245-253)

  1) 나은 이해 (245-250)

  2) 다른 이해 (250-253)

3. 다른 이해로서의 나은 이해 (254-264)

4. 나은 이해로서의 다른 이해 (265-274)

5. 하나의 해석학을 위하여 (274-278)

 

1. 두 개의 해석학?

 

*문제 상황 : 두 개의 해석학이 대립한다는 견해(이분법적 견해) (P. 리쾨르, R.E. 팔머)

  Ⓐ 전통적 해석학 : 이해의 객관성을 위한 방법론적 성찰에 주력

  Ⓑ 철학적 해석학 : 이해의 역사성에 대한 존재론적 기술에 매진

  cf) “전통적”, “철학적명명은 가다머(Wahrheit und Methode, 1960)에 의함

 

*문제 상황의 시발점 : 하이데거의 (기초) 존재론적 전향 가다머의 이해의 역사성

- 하이데거와 가다머는 해석학의 문헌학적, 방법론적 전통을 거부

- 하이데거는 해석학을 현존재의 실존의 실존성 분석론으로, 이해를 현존재의 존재의 근본 양상혹은 인간적 삶 자체의 근원적 존재 성격으로 규정

- 가다머는 해석학의 문제를 텍스트의 배후에 숨은 고정된 사실로서의 저자의 의도에 대한 일방적 해독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의 상호적인 매개에 대한 철학적 해명으로, 이해를 저자의 의도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 해석자의 관점에서(해석자 자신의 미래성의 빛 아래서”) 진행되는(기투하는) 하나의 다른 이해(andersverstehen)로 규정

 

*존재론적 전향과 이해의 역사성에 대한 반발 (E. 베티, E.D. 허쉬)

- 베티는 가다머 이후 이해가 현재와의 매개로 변질되었고, 이는 불가피하게 객관성의 부식이라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지적

- 허쉬는 가다머 이후 해석학이 이해의 타당성을 위한 기준인 원저자를 추방함으로써 허무주의에 가까워지며, 텍스트의 의미(meaning)와 이 의미가 현재의 상황에 줄 수 있는 의의(significance)를 구분해야 한다고 지적

- 베티는 원저자의 의도에 대한 정직한 승복”(erliche Unterordnung)을 요구하며, 허쉬는 다른 이해에 앞서 우선은 저자를 꼭 같이 잘 이해함으로서의 나은 이해(Besserverstehen)를 요구

 

*철학적 해석학과 전통적 해석학의 상호 비판

- 철학적 해석학 : 전통적 해석학은 근대 자연과학의 이상에 고무된 나머지 역사 인식의 객관성을 위해 인간의 근원적 역사성을 외면 모든 해석자는 자신의 시간과 역사의 규정을 벗어날 수 ㅇ벗고 따라서 모든 이해는 다른 이해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음

- 전통적 해석학 : 철학적 해석학은 이해의 역사성에 집착한 나머지 객관적 인식의 의무를 저버리고 객관성과 이해 기준의 부식을 불러왔으며 결국은 해석학적 허무주의에 빠짐 바람직한 이해는 꼭 같이 잘 이해함으로서의 나은 이해이고, 그것이 성취된 후에야 다른 이해의 시도가 차후적으로 허용됨

 

*문제 상황에 대한 문제 제기 (F. 로디)

: “두 개의 전적으로 상이한 반성의 차원을 구분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해석학의 하나의 발전 과정 안에서의 두 개의 단계를 구분해야 할 것인가?”

 

*저자의 입장과 작업 방법

: “나의 테제는 두 개의 해석학이 아니라 하나의 해석학만이 있다는 것이다.” (244)

 

1. 나은 이해(전통적 해석학에서의 이해)가 이해의 완전한 객관성을 전제한다는 것은 오해이다.

  ← 전통적 해석학은 이해의 한계를 자각하기 때문이다. (나은 이해는 이해의 한계의 역설적 표현이다)

2. 다른 이해(철학적 해석학에서의 이해)가 해석학의 무한 자유와 폭력을 허용한다는 것은 오해이다.

  ← 철학적 해석학은 이해의 기준을 가지기 때문이다. (다른 이해는 다름을 반대 방향에서 규제하는 같음이 있다.)

3. 나은 이해는 오직 다른 이해로서만 가능하다.

4. 다른 이해는 나은 이해여야만 한다.

5. 따라서, 전통적 해석학과 철학적 해석학은 두 개의 대립하는 해석학이 아니라 하나의 해석학의 두 단계이다.

 

2. 나은 이해와 다른 이해

 

1) 나은 이해

 

*나은 이해에 대한 통상적 이해 (슐라이어마허의 나은 이해)

1) 나은 이해는 저자의 언어 사용에 관련된 문법적 해석에만 적용되고 저자의 개별성에 관한 기술적 해석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내용이 없고 다만 형식적인 규칙)

2) 나은 이해는 저자에게 무의식적으로 머무는 것을 의식의 수준으로 고양시킨다는 점에서만 타당하다. (내용적으로 더 나은, 더 창조적인 이해가 아님)

3) 나은 이해는 <꼭 같이 잘> 이해함(저자의 생각을 정확하게 이해함)에 뒤따르는 차후적 단계이다.

나은 이해의 공식은 저자의 근원적인 구성 행위에 대한 더 명료해진 추구성(형식적 내지 언어적 의식화)일 뿐이며, 나은 이해는 객관적 이해(<꼭 같이 잘> 이해함)의 요청으로 남는다.

 

*딜타이의 나은 이해

- 슐라이어마허와의 차이점 : 1) 나은 이해는 작품의 내적 형식(작품의 내적 연관을 구성하는 창조적인 천재성의 방법), 따라서 저자의 개별성의 영역(천재 미학의 차원)에도 적용된다.

- 슐라이어마허와의 공통점 : 2) 나은 이해는 무의식적인 것의 의식화이다. (추구성) 3) 나은 이해는 <우선 꼭 같이>를 전제한다.

나은 이해는 다른 이해와는 결코 양립할 수 없고, 따라서 일단은 이해의 객관성 요구의 극단적인 표현으로 간주될 수 있어 보임

 

2) 다른 이해

 

*다른 이해의 기원 : 하이데거의 이해

- 현존재는 아직 아닌 것, 그러나 그가 앞서 이해한 것을 향해 스스로 내던지는데, 이 내던짐을 완수하고 자기화하는 일을 해석이라 부름

- 모든 해석은 이미 앞서 이해하고 있는 해석자의 자유로운 기투에 의해 주도되며, 텍스트의 의미도 단적인 사실로서의 저자의 의도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해석자 자신의 미래성의 빛을 향해서 내던져진 것

 

*가다머의 다른 이해

- 해석자는 이해되어야 할 텍스트를 자신의 현재적 상황으로 적용(Anwendung), 나의 삶으로 적용

- 적용된 텍스트는 원저자의 의도가 아니라 나에 대한 새로운 의미를 전달해주며, 이 새로운 의미는 원저자가 전혀 생각할 수 없었던 해석자의 기투하는 적용에 의해 새롭게 창출된 의미임

 

*다른 이해의 핵심 : 다른 이해의 불가피성

- 다른 이해는 역사적으로 규정된 존재자로서의 인간이 결코 피해갈 수 없는 존재론적 규정

- 문제의 핵심은 다른 이해의 허용 가능성이 아니라 그 불가피성

 

*다른 이해에 대한 전통적 해석학의 비판

- 텍스트의 동일성이 사라지며 해석 대상 자체의 해체가 일어나며, 그와 더불어 타당한 해석의 기준도 사라지게 됨

- 해석의 기준이 사라지면서 해석학은 상대주의”, “회의주의”, “허무주의에 빠지게 됨. , 철학적 해석학에는 의미의 같음은 없고 해석의 다름만이 존재하게 됨.

다른 이해는 해석의 자의성의 극도의 표현이고 나은 이해의 이상에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처럼 보임

 

3. 다른 이해로서의 나은 이해

 

*나은 이해에 대한 통상적 이해의 검토 (슐라이어마허와 딜타이의 나은 이해)

- 나은 이해의 대상이 되는 글 : “이해가 자동으로 산출되지는 않는 글, “오해가 자동으로 산출되고 그리고 모든 점에서 이해가 의욕되고 추구되게끔하는 글

- 나은 이해의 과제 : 무한한 반복을 통해서만 추구되는 것에 접근(Annäherung)해 갈 수 있는 과제, 가까워질 수 있지만 결코 이를 수 없는 과제

 

*이해의 한계

1) 저자의 개별성 혹은 타인의 삶에 대한 객관적 인식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

2) 저자 혹은 타인을 <꼭 같이 잘> 이해하기를 원하는 인간 역시 근본적으로 역사적 존재자이므로 자신의 시대의 고유 가치와 그 상대성을 극복할 수 없다.

- <더 잘> 이해함의 전제조건으로서의 <꼭 같이 잘> 이해함이 슐라이어마허와 딜타이에게는 이상적인 한계 경우”(Grenzfall), 즉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접근의 목표임

- 오해가 보편화된 현상이라는 사실 때문에 기술론으로서의 해석학이 더욱 절실히 필요한 것. 이 기술론의 도움 아래 해석자는 여전히 멀리 떨어진목표를 향해 부단히 접근해갈 뿐.

나은 이해는 <꼭 같이 잘> 이해함을 전제한 후에 이루어지는 차후적인, 그리고 단순한 의식화가 아님. <꼭 같이 잘> 이해함이 도달 불가능한 목표이고, 나은 이해의 공식은 저자와 동일화보다 더한 것도 추구하라는 역설적 요청과 과제임.

 

*나은 이해의 철학적 전사(前史)

 

1) 칸트의 플라톤 해석

  1-1) 나은 이해는 철학적 개념의 문제이고, 궁극적으로는 개념 안에서 사유되는 내용, 사태 자체의 문제이다.

  ↔ 문법적 해석, 저자의 단순한 언어 사용 문제

  1-2) 나은 이해는 저자의 불충분한 개념 규정, 또는 이로 인한 자기모순적 발언이나 사유 때문에 생겨난 저자의 잘못된 이해보다 더 나은 이해, 즉 명시적으로 한 철학 체계의 내적 모순의 수정이다.

  ↔ 무의식적인 것의 의식화

  1-3) 나은 이해에서 나음의 기준 혹은 수정의 척도는 한 철학적 개념의 근원적 의미, 정확히는 근원적이어야 할 의미(저자가 자신의 개념을 충분히 조심성 있게 규정해서 자신의 고유한 의도에 어긋나게 말하거나 사유하지 않았더라면 그도 공유했을 의미)이며, 나은 이해는 그것을 새로 제시한다.

  ↔ <꼭 같이 잘>의 규범적 의미

 

2) 피히테의 루소 해석

- 수정으로서의 나은 이해는 단지 체계 내부의 결함의 수정만이 아니라, 현재적 해석자와의 일치까지 고려. , 나은 이해의 문제는 해석자의 현재성의 관점으로 이동.

 

3) 쉘링의 라이프니츠 해석

  3-1) 수정의 대상에는 체계 내부의 모순뿐 아니라, 수용사의 오류까지도 포함된다.

  3-2) 옳은 이해는 나은 이해의 전제 조건이 아니라, 오히려 나은 이해를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목표이다. (<우선 꼭 같이, 그리고는 더 잘> <우선 더 잘, 그래야 옳게>

 

*다른 이해로서만 가능한 나은 이해

- 나은 이해의 핵심 : 사태 부합성(Sachangemessenheit)에 입각한 저자의 오류의 수정(Berichtigung)과 저자의 사유의 고양(Erhöhung)

- 다른 이해의 가능성 : 핵심이 저자의 의도에서 사태 자체로 이동하면서 <꼭 같이 잘>로부터 해방되고 비로소 풍부한 다른 이해의 가능성이 열림

- 저자와 해석자 : 모든 저자는 오직 자신의 시대만을 살며, 자신의 시대의 빛 아래서만 글을 쓸 뿐, 자신의 글을 후대의 빛 아래서 읽을 수 없음. 모든 새로운 시대의 해석자는 사태에 대해 더 잘 사유할 수 있는(더 잘 사유할 수 있는 시대에 살게 된) 사람.

같음은 다름을 허용하지 않는데, 나음은 분명 다름의 한 종류임. 나은 이해는 오직 다른 이해로서만 가능함.

 

4. 나은 이해로서의 다른 이해

 

*다른 이해의 검토 (하이데거와 가다머의 나은 이해)

- 현존재는 그가 현사실적으로 처해 있는 곳에 이미 던져진 자로서만 아직 처하지 않은 곳을 향해 스스로를 던질 수 있음. 이해는 늘 처해 있음(Befindlichkeit)과 함께 사유되며, 단적인 기투가 아니라 던져진 기투(geworfener Entwurf).

- 이해는 관거의 지배, 전통의 연속성, 존재의 같음이라는 한 측면과 미래의 우위, 전통의 파괴, 존재자의 다른 이해라는 또 다른 측면의 상호 귀속적전체 또는 이 둘의 긴장자체

 

*지평 융합으로서의 이해 (가다머)

- 이중의 변증법 : 1) 미시적으로는 과거 지평(Vn)과 현재 지평(Gn) 간의 상호적이고 일회적인 융합 2) 거시적으로는 이 일회적인 융합의 무한한 반복을 통해 형성되는 선형적인 연속 운동

- 지평 융합의 도식

… Vn+Gn = Vn+1  → (Vn+1)+(Gn+1) = Vn+2 → (Vn+2)+(Gn+2) = Vn+3
이해

- 다른 이해의 자기 주장 : 과거 지평과 달리 이해하려는 현재 지평이 상호적으로 융합되는 단계에서 작용하고 있는 두 항(Vn, Gn) 중 한 항(Gn)으로서의 반쪽의 자기주장

- 융합의 결과 : 그 자체로 존재하는 두 지평(Vn, Gn)은 지양되어 서로 안으로 소멸하고, 상호적인 융합의 두 항이었던 존재의 연속성과 존재자의 다른 이해를 모두 자신 안에 포괄하는 더 고차적인 지평”, “하나의 거대한 지평이 형성됨

- 융합의 반복의 결과 : 각 시대마다의 존재자의 다른 이해에 의해 매개되면서 자신의 같음을 관철해나가는 하나의 연속적이고 일차원적인 운동(존재, 영향사, 수용사, 역사, 전통)이 형성됨

 

*이해의 기준

: 전승의 같음과 해석자의 다른 이해 간에 반복된 융합의 과정을 통해 형성되어 온 의미, 해당 시기까지 진행된 해석사를 통해 형성된 의미

- 이러한 기준은 실제의 해석 행위를 통해 산출된 것(해석). 대응설적인 해석 기준(해석되는 것)이 인간에게는 결코 주어지지 않고, 우리는 하나의 해석을 늘 다른 해석으로 평가할 수밖에 없음.

- 하나의 다른 이해의 적절성을 평가하는 기준은 지금까지의 더 나았던 다른 이해들. 유일하게 가능한 비교는 사유의 외부에 있는 사태 자체와 그에 대한 철학적 사유가 아니라, 사태에 대한 하나의 철학적 사유와 사태에 대한 다른 철학적 사유의 비교뿐.

- 칸트의 이념의 근원적 의미는 플라톤에서 칸트에 이르는 장구한 형이상학의 역사가 이념에 대한 여러 다른 사유들을 형성해 오다가 비로소 칸트의 시대에 이르러 도달할 수 있었던 이념의 의미. 이 의미는 그때까지의 이념에 대한 사유의 역사의 온 과정을 자신 안에 함축하는 결정판이고, 그런 의미에서 적어도 그 시대에는 정당하게 근원적이라 불림.

 

*나은 이해여야만 하는 다른 이해

- 어떤 다른 이해는 단지 당파적인 성격만을 갖고 우리를 오해로 인도하지만, 이런 다른 이해는 지금까지의 해석사의 연속성에 의해 걸러지고 고사

- 오직 텍스트의 같음과의 융합을 온전히 견디어낼 수 있는 다름만이 하나의 더 나은 이해로서 텍스트의 같음을 매개할 수 있음

다름은 단지 다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같음을 매개하는 다름이고, 그런 한에서만 하나의 나음임. 반대로 나음은 다름으로서의 다름이 아니라 다름이 매개하는 같음, 정확히는 다름을 통해 스스로를 점진적으로 개선해 가는 같음임.

다름이 아닌 같음, 분화가 아닌 연속성의 선택이라는 의미에서 다른 이해는 나은 이해여야만 함

 

5. 하나의 해석학을 위하여

 

*잘못된 대립과 올바른 대립

- 잘못된 대립 : 같음에 머무는 한 나음은 허용되지 않고, 또 다른 이해가 나은 이해가 아니라면 이것은 당연히 거부됨 나은 이해와 다른 이해의 대립은 애당초 잘못된 것이다.”

- 올바른 대립 : 나은 이해와 다른 이해는 둘 모두 같은 이해를 배제한다는 점에서- 원래 같은 것이며, 나은 이해의 해석학과 다른 이해의 해석학은 함께 같은 이해의 해석학(문헌학적 해석학)에 대립했어야 함

 

*잘못된 대립의 원인 : 문헌학의 에토스

- 초기의 철학으로서의 해석학은 문헉학과 필요 이상의 유착관계를 맺어오면서 철학적 나은 이해의 정신을 본받지 못하고 <꼭 같이 잘>(같은 이해의 정신 문헌학적 에토스)을 훼손하지 않을 수 있는 나은 이해를 구상하는 데 골몰했고, 그 결론은 무의식적인 것의 의식화라는 공허한 자명성이었음

- 나은 이해의 해석학은 나음을 저해하는 같음과의 연결고리를 끊고 과감하게 철학적인 나은 이해의 문제사로, 그리고 다름을 통한 나음에로 돌아갔어야만 했음

- 다른 이해의 해석학도 근본적으로 나음을 목표로 한 다름의 시도라면, 이 해석학 역시 나은 이해의 해석학을 자신의 모태로 승인하고 이론적 단절 대신 내적 연속성을 추구했어야 함

 

*하나의 해석학

- 전통적 해석학은 추구의 과제와 목표(가장 나은 이해, 무한히 접근해야 함)에 초점을 맞추며, 철학적 해석학은 추구의 규정성과 현실(인간적 현존재의 존재론적 규정성, 추구가 결코 완결에 이를 수 없음)에 초점을 맞춘다는 점이 다를 뿐

- 두 해석학은 모두 규정과 현실에 발을 디디고 저 과제와 목표를 추구하고 있음. 그리고 그 추구는 하나라는 점에서 두 해석학은 하나의 해석학임.

- 중간자의 처소(현실과 목표 사이, 존재와 당위 사이, 처해 있는 곳과 처해야 할 곳 사이)에서 두 해석학은 나아졌지만 아직도 더 나아져야 하는 이해만을 소유한 채 여전히 더할 나위 없는 이해를 추구하고 있음.

 

이들은 모두 중간적인 현실에서 현실을 넘어서는 어떤 것을 추구하고 있다. [...] 그런 한에서 슐라이어마허, 딜타이, 하이데거, 그리고 가다머는 모두 말의 본래적인 의미에서 애지자(eros philosophos), 즉 철학자들이다. 나는 이 네 사람을 모두 철학으로서의 해석학이라는 하나의 타이틀 아래 포괄하고 싶다. 그리고 이 해석학의 과제는 단 하나이다. 다른 이해를 통한 나은 이해의 추구, 나은 이해를 목표로 한 다른 이해의 시도.” (277-2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