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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학] 『진리와 방법』 짧은 글

현담 2022. 6. 23. 13:45

세계문학 개념에서의 세계분석

 

1. 서론 (생략)

2. 본론

 

2-1. 세계문학의 세계 개념 문제

 

가다머는 진리와 방법에서 뭇 문학 작품에 대한 규범적 의미를 내포하는 세계문학 개념을 그 중요도에 비해 현저히 부족해 보이는 두 페이지 남짓한 분량만을 할애하여 설명하고 있으며, 그 안에서도 세계문학의 세계 개념을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부분은 다음이 전부로 보인다.

 

세계문학에 속하는 것은 모든 사람의 의식에 자리 잡고 있다. 그것은 세계에 속한다. 한 작품이 세계문학에 귀속되었을 때, 그 세계는 이 작품이 말하는 원래의 세계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을지도 모른다. 그 세계가 더 이상 동일한 세계가 아니라는 것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세계문학 개념에 들어 있는 규범적 의미는, 세계문학에 속하는 작품들이 말하는 세계가 전혀 다른 세계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호소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WM 229)

 

우리는 여기서 가다머가 세계문학의 세계 개념을 두 가지 의미로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선, 문학 작품이 표현하는 세계라는 의미로 사용한다. 이는 작품이 말하는 원래의 세계”, “더 이상 동일한 세계가 아닌 세계”, “전혀 다른 세계등의 표현으로 지시된다. 이 세계는 작품 내재적으로는 원래의 세계이지만, 그 밖에서는 동일하지 않고 완전히 다른 세계이다. 그렇다면 작품 밖에서 작품이 표현하고자 하는 세계의 비동일성 혹은 이질성을 결정하는 준거가 되는 또 다른 세계는 무엇인가?

 

그것은 모든 사람의 의식의 세계, 즉 문학 작품 감상자의 세계로 보인다. 한 작품이 세계문학에 귀속된다는 것은 곧 모든 사람의 의식에 자리 잡는 것인데, 이는 모든 사람의 의식이 세계문학에 귀속될 작품에 이미 자리를 내줄 수 있는 어떤 세계를 형성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세계문학작품은 이런 의미의 “‘세계에 속한다.” 문학 작품이 표현하는 세계는 문학 작품 감상자의 세계와 적어도 동일하지는 않을 것이며 아주 멀리 떨어져 있을지도모를 세계이다. 해리포터가 날아다니는 빗자루를 타고 퀴디치 경기를 하는 세계나 헤르메스가 날아다니며 제우스의 소식을 전달하는 세계와 땅에 두 발을 붙이고 사는 우리의 세계는 분명히 전혀 다른 세계이다.

 

세계 개념을 이처럼 두 가지 의미로 구별해 보았을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우선, 문학 작품은 어떻게 감상자의 세계에 자리 잡을 수 있는 것인가? 그것이 표현하는 세계는 감상자의 세계와 완전히 다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예컨대, J.K 롤링의 <해리포터>는 어떻게 마법 지팡이도 없고 날아다니는 빗자루도 없는 우리의 세계에 자리 잡을 수 있는가? 나아가, 세계문학작품은 어떻게 모든감상자의 세계에 자리 잡을 수 있는 것인가? 모든 감상자가 각기 다른 세계를 삶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예컨대, 기독교를 믿는 21세기의 미국인의 세계와 제우스를 믿는 기원전 6세기의 그리스인의 세계에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는 어떻게 같이 자리 잡을 수 있는 것인가? 이러한 문제는 모두 문학 작품의 세계와 감상자의 세계 사이의 관계를 올바르게 이해함으로써 세계문학의 세계 개념을 총체적으로 파악하고, 세계문학작품의 호소력 있는 세계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을 때 해소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이하에서 가다머가 진리와 방법에서 분석한 예술작품의 존재론을 토대로 문학작품의 존재론을 이해함으로써 해당 작업을 수행해보고자 한다.

 

2-2. 가다머의 예술작품 이해와 세계문학의 세계

 

가다머는 칸트와 이후의 근대 미학이 예술작품을 천재의 주관적 체험의 표현으로 이해함과 동시에 취미라는 주관적 의식의 권역에 미적 경험을 가두어버림으로써 예술작품의 고유한 진리 요구와 삶에의 연관을 끊어버렸음을 비판하고, 새로이 예술작품을 이해할 모델을 찾기 위해 놀이를 선택한다(김선규 2011, 114-116). “중간태적 의미”(WM 154)의 놀이는 주객의 구별을 파괴한다. 왜냐하면 놀이는 놀이 주체가 있어 그의 대상적 태도에 의존하면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놀이자가 모든 일상적 진지성에 벗어나 단지 놀이에 정신이 팔려 놀 때 놀이 자체만이 드러나는 방식으로 비로소 행해지기 때문이다. 예컨대, 카드놀이를 하는 놀이자는 카드놀이의 규칙을 따르면서 상대방의 수를 읽고 자신이 유리한 수를 파악하는 데에 여념이 없을 뿐, 그림이 그려진 코팅종이를 인위적인 규칙에 따라 내려놓는 일을 한다는 생각 따위는 하지 않는다. 만약 그런 식의 대상화가 이루어진다면 그는 더 이상 카드놀이를 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놀이의 존재방식은 놀이하는 사람이 놀이를 대상처럼 대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WM 152) 놀이는 놀이하는 사람이 자신을 객체화하는 주체가 되는 것을 거부하고, 오히려 놀이하는 사람을 지배한다는 데 그 본질이 있다.”(WM 158) 놀이자는 놀이의 정신으로 가득 채워지고 놀이를 자신을 능가하는 현실로서 경험한다(WM 161-162).

 

그러나 예술은 특이한 방식의 놀이이다. 놀이가 관객을 향해 열려 있으면서 관객을 위한 표현”(WM 162)이 될 때, 그리고 그 표현이 관객을 총체적으로 변화시키고 관객이 안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알려진 것 이상의 것”(WM 168)으로 재인식시킬 때, 그 놀이는 예술작품이 된다. 예컨대, 카드놀이는 그것을 보는 관객을 전제하지 않으며 놀이자에게 무언가 새롭게 보게 하는 계기를 제공하지 않지만, 카드놀이판에서 구겨져 떨어진 카드를 그린 그림은 전시되어 관객에게 카드놀이에 중독된 사람의 분노와 슬픔을 표현하여 카드놀이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가지게 할 수 있다. 놀이가 관객을 변화시키고 자신의 고유한 세계로 완전히 귀속시킴으로써 하나의 예술작품으로서 완성체”(WM 163)가 된다면, 혹은 형성체로의 변화”(WM 165)를 이룩한다면, 그 속에는 하나의 완결된 세계만이 존재한다. 그 세계는 현실과의 비교를 넘어서서 완전히 자체적인 근거를 가지는 세계이지만 또한 현실에서 우리가 간과하거나 무시해버리면서 은폐되어 버린 세계의 단면이 밝게 드러낸 세계이므로 현실보다 우월한 세계라 말할 수 있다(김선규 2011, 124).

 

예술작품이 관객을 끌어들인 세계가 현실보다 더 밝은 세계혹은 알려진 것 이상의 세계인 이유는 예술작품이 하나의 상(그림)으로서 원상의 존재를 증대하는 방식으로 표현하기 때문이다. 모사상이 원상과의 유사성을 근거로 원상과 자신의 동일시하기를 완료하고서는 스스로 지양해버린다면, 상은 적극적으로 원상에 대해 무언가를 진술”(WM 200)하는 표현을 통해서 거꾸로 원상에게는 원상이 표현을 통해 나타나게”(WM 200) 한다. , 원상이 상을 매개로 자신이 더욱 자신다운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예컨대, 카드 그림의 원상이 도박장의 어지러운 카드놀이판이었을 때, 카드 그림은 구겨져 구석에 떨어져 있는 카드를 부각시키는 방식으로 카드놀이판을 표현함으로써 카드놀이가 놀이자들의 어떤 감정을 담고 행해지는 것인지 관객은 더 잘 알 수 있게 된다.

 

지금까지 분석한 예술작품의 존재론을 문학 작품에 적용하여 세계문학의 세계 개념을 이해해보자. 문학 작품은 하나의 놀이이기에 감상자와 문학 작품은 주객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문학 작품이 감상자를 지배하고 감상자는 문학 작품에 몰두하여 그것의 내용을 따라가기에 여념 없게 된다. 예를 들어, <해리포터>의 감상자는 주인공인 해리포터를 따라 93/4 기둥을 뚫고 들어가 마법사들이 다니는 학교인 호그와트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좇으면서 울고 웃기 바쁘다. 감상자가 일상적 세계의 관점에서 <해리포터>J.K 롤링이 아들을 키우기 위해 돈을 벌려고 만든 공상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대상화하는 순간 그는 놀이자가 아니게 되고 따라서 감상자도 아니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문학 작품이 표현하는 세계가 문학 작품 감상자의 세계와 무척이나 다름에도 불구하고 감상자의 의식 속에 자리 잡을 수 있는 이유를 알게 된다. 감상자는 놀이자이기에 감상의 순간에는 감상자의 세계가 지워지고 오로지 작품의 세계가 가득 들어와 그를 지배하게 된다. 작품 세계와 감상자 세계가 얼마나 다른지는 사실 상관이 없다. 그것이 마법사의 세계이든, 고대 그리스의 세계이든, 바로 오늘날의 세계이든, 문학 작품이 표현하고자 하는 세계는 감상자를 사로잡아 그 안에서 감상자가 뛰어놀게 만든다.

 

그러나 문학 작품이 모든 감상자의 의식에 자리 잡을 수 있을 때만 그것은 세계문학이 된다. , 어떤 문학 작품이 세계문학이 되려면, 어떤 사람이 관객으로 오든 열려서 그들을 위해 세계를 표현해야 하며, 그것도 훌륭한 상으로서 세계를 표현하여 전에 보이지 않던 세계를 모두에게 재인식시키는 예술작품이어야 한다. 문학작품이 이러한 예술작품으로서의 조건을 만족하여 세계문학이 되기는 극히 어려운 일로 보인다. 모든 사람을 관객으로 삼아 그들 모두에게 세계의 은폐된 면을 밝히는 것은 지구상의 모든 사람을 파티에 초대하여 그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일보다 더 힘든 일 같다.

 

하지만 세계문학은 불가능하다고 포기되기보다는 오히려 모든 문학 작품이 세계문학으로서 평가받고 인정받아 전승되기를 바라야 하며 그럴 만큼 충분히 가능하다. 이러한 가능성은 독일인이나 중국인이나 다 같은 인간이기에 감정과 행동과 생각이 서로 별반 다르지 않다는 믿음 아래 민족문학과 대비되는 세계문학 개념을 처음으로 내세운 괴테에게서 명백히 긍정된다(장원영 2005, 140).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문학이란 것은 인류의 공유물이라는 사실을 좀 더 절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시대를 가리지 않고 수백 수만의 인간이 사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문학이 생겨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에커만, P., 괴테와의 대화, 1827. 장원영(2005, 140)에서 재인용.) 가다머 또한 번역문학이 읽히는 것은 여전히 모든 사람들에게 진리와 타당성을 지닌 무엇이 표현되고 있다는 것을 증명”(WM 229)하는 것으로 보았다. 감상자가 어떤 국가의 사람이든, 어떤 시대의 사람이든, 그 사람들이 공유하는 보편적인 세계의 여러 측면들이 은폐되어 스스로의 진리를 요구하고 있으며, 세계문학은 그 사람들을 관객으로 초대해 그 사람들의 세계를 탈은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세계문학작품의 세계가 모든 감상자의 의식에 자리 잡을 수 있는 이유는 그 세계가 시공을 초월해 타당한 세계의 은폐된 진리를 자체 완결적인 매력적인 세계를 통해서 인식시키기 때문이다. 세계문학의 호소력 있는 세계는 바로 이러한 위대한 표현을 해내는 작품 세계인 것이다. 다만 세계문학은 역사의 흐름 속에 있는 것이며, 따라서 마찬가지로 역사적으로 한계지어진 감상자에 의해 끊임없이 새로 재생되고 규범적인 요구를 받아 수행해야 한다. 그래서 세계문학은 살아 있는 통일체”(WM 228)로서 완결되지 않은, 결코 완결될 수 없는 과정”(WM 228)이다.

 

3. 결론 (생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