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현대대륙철학 이차문헌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신체 개념 분석

현담 2023. 6. 26. 01:46

1. 서론 (생략)

2. 니체의 신체 개념

 

2-1. 자기(Selbst)로서 신체

 

  니체는 신체를 경멸하는 자들에 대하여에서 신체가 의식적으로 생각하고 느끼는 자아”(Ich)의 배후에서 그것을 명령하는 자기”(Selbst)라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밝힌다.

 

  너희들은 자아운운하고는 그 말에 긍지를 느낀다. 믿기지 않겠지만 그보다 더 큰 것이 있으니 너의 신체와 그 신체의 커다란 이성이 바로 그것이다. 그것은 자아 운운하는 대신에 그 자아를 실행한다.

 

  감각과 정신은 한낱 도구이자 놀잇감이다. 그것들 뒤에는 자기라는 것이 버티고 있다. 이 자기 또한 감각의 눈으로 탐색하며 역시 정신의 귀로 경청하는 것이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흔히 를 중심으로 느낌과 생각을 표현한다. ‘나는 오늘 하늘이 아름답다고 느꼈어.’, ‘나는 올해 안으로 그 일을 그만두기로 생각했어.’와 같은 식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느끼고 생각하는 를 우리 자신과 동일시할 뿐만 아니라, ‘로서 의식적으로 개별적인 행위들을 선택하고 전체적인 삶을 이끌어가는 데에 자부심을 느낀다. 하지만 니체에 따르면 이런 우리의 생각은 착각이다. ‘혹은 자아는 사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우리의 명령자, 자기의 명령을 수행하는 도구이자 내키는대로 사용하곤 하는 놀잇감이다. 하늘이 아름답다는 느낌은 신체가 자아로 하여금 그런 느낌이 들도록 명령한 것을 실행한 결과이고, 올해 안으로 일을 그만두겠다는 결심은 신체가 자아로 하여금 그런 결정을 내리도록 명령한 것을 실행한 결과인 것이다. 흔히 자아의 것으로 간주되는 감각과 정신은 사실 자기가 그런 명령을 내리는 데에 필요한 자료를 받아들이고 또한 구체적인 명령을 하달하는 통로이다.

  이러한 자기-자아 구도는 신체성을 완전히 결여한 순수한 정신을 자신의 본질로 간주하며 신체를 경멸하는 사람들에게도 예외없이 적용된다. 다시 말해, 신체를 경멸하는 자들은 역설적으로 그들의 자기인 신체의 명령을 받아 신체를 경멸하고 생을 포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신체를 경멸하는 자들이여, 너희는 아직도 너희가 저지르는 어리석음과 너희가 하는 경멸에서조차 이렇듯 너희의 자기를 모시고 있는 것이다. 너희들의 자기 스스로가 이제 죽기를 원하여 생에 등을 돌리고 있다.

  그가 무엇보다도 소망해온 것, 자기 자신을 뛰어넘어 창조하는 것을 더 이상 할 수 없으니. 그것이 그가 가장 바라는 것이며, 그의 전 열망인데도 말이다.

 

  자기로서 신체는 자기 자신을 극복하여 힘이 고양된 상태를 끊임없이 의지하며, 그 과정에서 자기 자신과 자기 자신이 관계하는 세계를 끊임없이 허물고 재건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러한 창조자로서의 신체는, 신체를 경멸하는 자들의 경우에서처럼 그 본질에 어긋나는 삶을 겪어내야하게 되었을 때, 다시 말해 신체에 내재적인 열정들이 경멸당하고 삶이 그로부터 절연되면서 창조와 지배보다는 답습과 복종을 숭상하는 삶이 주어질 때, 오히려 스스로 파멸하고자 한다. 이렇게 극심하게 병든 상태로서의 신체는 자신의 본래적인 모습어야 했을 건강한 삶을 시샘하면서 더 이상 창조자가 아니게 된 자신을 경멸하도록 자아에게 명령한다.

  이로부터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신체의 본질은 고양을 향한 자기 극복이지만, 신체의 양태는 병든 상태에서 건강한 상태에까지 다양하다는 점이다. 신체를 경멸하는 자 -예컨대 자신의 육욕에 죄의식을 가지고 스스로를 경멸하며 자신의 등에 채찍질을 가하는 중세 수도원의 수사- 의 자기로서 신체는 생을 떠나기를 바란다. 그러나 초인에 가까운 위대한 자 예컨대 보잘것 없는 신분에서 황제의 지위로 올라선 후 국민을 통합하고 유럽 제국들과 전쟁을 벌이며 유럽을 호령했던 나폴레옹- 의 자기로서 신체는 생에서 주어지는 위험을 즐기며 극복하고 생을 고양시켜 나간다. 세 변화에 대하여에서 니체는 이원론적 가치관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하고 그것이 요구하는 의무들을 무던히 [짊어]지는낙타의 정신, 그러한 가치관과 의무들을 거부하고 새로운 가치를 위한 권리를 쟁취하고자 하는 사자의 정신, 그리고 자기 자신의 의지를 의욕하며 즐거운 창조의 놀이로서 삶을 사는 아이의 정신으로, 자기로서 신체의 양태를 크게 삼분하기도 한다. 이렇듯 니체가 신체의 양태를 구별하여 묘사하면서 병든 상태를 가차없이 비판하고 건강한 상태를 긍정하는 이유는 독자로 하여금 자신의 신체 상태를 진단하고 건강한 상태로 나아가기를 촉구하기 위함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2-2. 열정들의 원천으로서 신체

 

  2-1.에서 필자는 신체를 자기라는 측면에서 하나의 의미로 살펴보았다. 그러나 니체에 따르면, 신체는 하나의 의미를 지닌 다양성이다. 신체는 다양한 열정들이 서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일종의 집합체이다. 그런 열정들은 신체를 경멸하는 이원론적 가치관 하에서는 악이라고 불렸지만, 신체를 긍정하면서 신체가 바라는 극복과 창조의 목표에 봉사하게 될 때 덕이라고 새로이 불리게 된다.

 

  너는 일찍이 열정들을 지녔었고 그것들을 불러 악이라고 했다. 그러나 너 이제는 단지 네 자신의 여러 덕을 갖고 있을 뿐이다. 그것들도 너의 열정에서 자란 것들이지만.

  너는 이들 열정의 심장부에 너의 최고 목표를 세웠다. 그러자 그것들은 너의 덕이 되고 환희가 되었던 것이다.

 

  전통적인 이원론적 관점에서 신체가 지닌 열정들은 원죄에서 비롯된, 근절하고 싶지만 결코 근절할 수 없는 악한 욕망들이었다. 그러나 니체에게서 신체가 지닌 열정들은 자기로서 신체의 창조를 가능하도록 해주는 덕이자 환희이다. 니체는 악 셋에 대하여에서 그런 열정들을 육욕, 지배욕, 이기심으로 크게 삼분하기도 하며, 구체적으로는 성마름, 음탕함, 복수심 등 악덕으로 여겨졌던 기질 또한 열정들에 포함시킨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이러한 열정들이 그 자체로는 더이상 악이 아니지만 이들 사이의 통제되지 않는 갈등은 악에 가까운 상태 니체는 선악의 구분 대신 건강과 병듦의 구분을 도입하였으므로 병든 상태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앞으로는 너로부터 그 어떠한 악도 자라나지 않을 것이다. 너의 여러 덕 사이의 갈등에서 자라나는 악이 아니라면 말이다.

 

  덕들 사이의 갈등은 열정들로서 덕들이 본성상 덕 하나하나가 최고의 자리에올라 힘 전부를 갖기를 원하며 그 과정에서 저마다의 덕은 한결같이 다른 덕을 질투하기 때문에 피할 수 없다. 예컨대, 전쟁에 참여하여 조국의 승리에 첩경이 될 중요한 전투에 나서게 된 병사는 내면적으로 승리에 대한 열정과 죽음을 피하고자 하는 열정, 싸우다 죽을지언정 조국을 지키겠다는 열정과 적당히 싸우다가 가족 곁으로 돌아가겠다는 열정이 갈등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갈등이 이윽고 위계적으로 통제되는 대신 계속해서 지속되면 인간은 파멸하게 된다. 앞선 예에서, 해당 병사가 자신의 열정들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가는 전투에서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지만 그렇다고 도망치지도 않게 되어 상대편 적군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인간은 주어진 상황에서 힘의 고양을 성취할 수 있도록 자신의 열정들 사이의 투쟁을 구조화하여 하나의 덕으로 만들어내야 한다. 앞선 예에서. 해당 병사는 전쟁에 참여한 이상 조국의 수호와 승리에 대한 열정을 하나의 축으로 세워 다른 덕들을 통제하고 나아가 활용해야 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그는 열심히 싸우되 죽지 않고자 하는 열정을 살려 신중하게 싸워야 하고, 가족에 대한 사랑을 조국에 대한 사랑으로 승화시켜 승리를 목표로 삼아야 한다. 이렇듯 니체가 신체의 다양한 열정들을 묘사하면서 그것의 다원성을 강조함과 동시에 그로부터 비롯되는 갈등의 지속 상태를 병든 상태로 규정하는 이유는 독자로 하여금 자신의 신체적 열정들을 긍정하되 그것들에 주의를 기울여 하나의 덕으로 통합함으로써 자기 고양을 하도록 촉구하기 위함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3. 신체와 정신의 관계에 대한 니체의 관점

 

  이번 장에서는 2장에서 논의한 니체의 신체 개념을 토대로 니체가 새로이 설립한 신체와 정신 간의 관계가 어떠한 것인지에 관한 다른 해석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필자의 해석을 제시하고자 한다. 니체 철학은 기존의 정신-신체 관계를 전복시키고 신체를 전면에 내세우면서 철학사에 일종의 전회를 가져온 것으로 평가되곤 한다. 그러나 신체 개념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결여하거나 신체에 과도한 강조점을 찍을 때 니체의 신체-정신 관계는 오해되고 왜곡될 가능성이 있다. 신체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토대로 니체의 신체-정신 관계를 해석할 때에서만 우리는 니체의 신체 철학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를 바탕으로 그것의 철학사적 성취를 존중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니체의 신체-정신 관계를 일종의 전도된 이원론적 관점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 정신이 인간 본연의 신체를 억압하고자 하기에 인간은 정신을 무시하고 신체에 몰두하여 힘을 고양시켜야 한다고 해석해서는 안 된다. 양해림(2005: 6, 11)작은 이성은 힘에의 의지를 배제하고 순수사유를 본질로 하는 데카르트적 이성을 지칭하고 몸의 회피를 수행하는 것으로 이해하여, “작은 이성으로서 정신을 큰 이성으로서 신체에 대립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하지만 이는 신체경멸자와 같이 이원론적 가치관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순수한 정신과 니체의 작은 이성으로서 정신을 혼동한 해석이다. 니체는 이원론적 가치관에 입각한 순수정신의 숭상이 신체를 부정하고 힘에의 의지를 약화시킨다고 비판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때 니체가 비판하는 정신은 이원론적 정신 개념일 뿐이다. 니체 자신은 정신을 신체의 도구로 규정하며, 자기로서 신체가 명령을 내렸을 때 자아가 써야할 머리로 묘사한다. 백승영(2022: 62)이 밝히듯, ‘생각하는 능력으로서의 정신은 총체적인 신체의 부분이자 신체가 추구하는 자기 극복이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이다. 본고의 2-1.에서 살펴보았듯 심지어 신체를 경멸하는 신체경멸자의 정신조차 사실 신체의 자기 파괴적 명령을 수행하는 수단이었다. 니체의 신체 철학에서 정신은 신체의 수단이자 도구일 뿐 신체의 대립자가 아니다.

  다음으로, 니체의 신체-정신 관계를 흄(Hume)식의 주인-노예 관계로 해석해서도 안 된다. 데이비드 흄은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A Treatise of Human Nature)에서 이성은 정념들의 노예이고, 오직 그래야만 하며, 그것들을 받들고 복종하는 직() 이외의 어떠한 직도 절대 가장해서는 안 된다.”(T II.3.3 415)라고 선언한다. 이는 일견 본고 2-1. 첫머리에서 인용하였던 차라투스트라의 두 대목이나 형제여, 네가 정신이라고 부르는 너의 작은 이성 또한 너의 신체의 도구, 너의 커다란 이성의 작은 도구이자 놀잇감일 뿐이다.”와 같은 니체의 언술과 같은 의미를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신체는 열정들의 집합체이고, 신체가 정신에게 명령을 내린다면, 정신은 흄이 말하듯 정념들의 노예가 아닌가? 하지만 니체는 잡것들에 대하여에서 쾌락과 안락함의 노예가 되어버린 대중들과 그에 영합하는 권력자들을 코를 막은 채 언짢아한다. 또한, 니체는 창백한 범죄자에 대하여에서 살인의 즐거움비수의 행복에 대한 욕망에 따라 살인을 저지르게 된 창백한 범죄자의 이성을 가련한것으로, 그 범죄자를 병자바보로 간주한다. 이런 전거들을 고려할 때, 니체는 정념들의 노예가 된 정신을 정신의 본질적인 ()”을 수행하는 것으로 보기 보다는, 병든 상태에서 일탈을 저지르는 것으로 보는 듯하다. 이른바 잡것들이 니체에게 역겨운 것인 이유는 그들이 힘에의 의지를 고양하기는커녕 현실에 안주하고 쾌락에 골몰하며 힘에의 의지를 약화시키고 있기 때문이며, 범죄자가 니체에게 가련하게 여겨지는 이유는 그들이 힘에의 의지를 고양하는 방법을 잘못 택했기 때문이다. 결국 정념의 노예가 된 정신은 병든 정신, 즉 신체의 명령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정신일 뿐이다. 정신은 본래 신체의 명령을 수행하는 것이고, 건강한 정신은 자기로서 신체를 고양하라는 명령을 잘 수행한다. 본고 2-2.에서 살펴보았듯 정신은 정념들을 통제하고 하나의 덕을 만드는 데에 기여할 때 신체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제대로 기능하는 것이다. 니체의 신체 철학에서 정신은 본래적으로 신체의 자기 고양이라는 목적에 기여하는 수단이지 정념들의 노예가 아니다.

  필자는 니체의 신체-정신 관계 속에서 정신은 신체를 제한적으로 성찰할 수 있으며 신체의 명령에 강제된다기보다는 신체를 자발적으로 모시듯이 그의 명령을 이행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정신은 여전히 신체의 수단이지만 신체와의 관계에서 나름의 자율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를 니체는 환희와 열정에 대하여에서 새와 새 주인의 관계로 묘사한다. 자신의 덕을 사랑하는 인간은 마치 자신도 모르게 자신 곁에 둥지를 튼 새를 사랑으로 보살피는 새 주인과 같다. 그 새는 황금알” -한 인간이 자신의 덕을 사랑하고 자신의 덕에 봉사할 때 얻는 기쁨- 을 가져다 준다. 우리는 한 인간에게 그 자신의 덕이란 힘을 고양시키는 승화된 열정임을 2-2.에서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자신의 덕을 사랑하는 건강한 인간의 정신은 새를 돌보는 새 주인처럼 신체를 돌보고 사랑하며 그런 자신의 활동에 기쁨을 느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새 주인이 새를 잘 돌보기 위해서는 새의 상태를 살펴볼 줄 알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정신이 신체에 잘 봉사하기 위해서는 신체의 상태를 성찰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성찰의 기능을 니체는 제한적으로 인정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특히 차라투스트라가 영원회귀사상을 받아들일 때 자신이 중력의 정령에 맞서고 있고 영원회귀사상이 수반하는 허무주의적 함축을 소화하지 못했음을 끊임없이 의식하고 고통스러워할 때 드러난다. 또한 니체는 초인에 가까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그 전의 신체의 고양의 단계를 거쳐야 하고 그 단계에 맞는 고양의 방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하는데, 이때 그는 인간이 자신이 어느 단계에서 처해있고 그 상황에서 자신이 취할 최적의 방법이 무엇인지 돌아보는 능력을 상정하고 있다. 물론 이는 최소한의 신체의 건강을 요구한다. 신체를 경멸하는 자들의 정신의 경우 자신이 병든 줄도 모르고, 자신이 병들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도 않으며, 신체 자신의 자기파괴적 명령만을 이행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새 주인이 새를 잘 돌보기 위해서는 새를 위한 최적의 방법으로 돌보아야 한다. 앞서 살펴보았듯, 신체를 나약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쾌락에 골몰하는 잡것들이나 신체를 고양할 수 없는 방식으로 자신이 원하는 쾌락을 멋대로 해석하는 창백한 범죄자는 신체를 돌보기 위한 최적의 방법을 찾지 못한 자들이다. 니체는 벗을 대할 때 자신의 나약한 모습을 가리는 치장을 할 것을 종용하는데, 이는 벗과의 관계에서 서로간의 연민을 제거하고 힘을 고양하기 위한 경쟁에 집중하게 하는 바람직한 방식이다. 이때, 치장은 인간의 정신이 자신의 강점을 중심으로 자신의 고유한 기질과 특성들을 통합하는 방식으로 마련해주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또한 니체는 자신의 취향과 운명을 만들어내는 자가 될 것을 촉구하는데, 이는 한 인간이 자신을 고양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것을 즐기고 또 고양할 수 있는 길을 계속해서 만들어나가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때, 어떤 것이 자신의 취향에 편입될 수 있을지 선택하고 어떤 위험과 몰락을 자신의 운명으로 승화시킬 수 있을지 선택하는 것은 인간의 정신의 역할로 보아야 할 것이다.

 

4. 결론 (생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