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고대철학 이차문헌

편상범(2014), 「덕과 즐거움」, 『철학사상』

현담 2022. 6. 18. 14:40

<목차>

 

. 들어가며 (4-5)

. 덕의 표시로서의 즐거움 (5-8)

. 감정(pathos)과 행위(praxis) (8-11)

. 감정의 덕 (11-13)

. 감정과 인식 (14-16)

. 감정(pathos)의 즐거움과 행위(praxis)의 즐거움 (17-22)

. 용기의 덕과 즐거움 (23-27)

. 나가며 (27-28)

 

. 들어가며

 

*문제의식

 

덕인은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덕행에서 즐거움을 느끼며, 따라서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도 그는 즐겁게 덕행을 실천할 뿐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비참한 상황에 빠진 이웃을 도우며 자신의 선행에서 기쁨을 느끼고, 목숨을 건 전투에서 자신의 용감한 행동에 즐거워하는 사람이 덕인일까? 그런 상황에서는 어떤 행동을 해도 슬프고 괴로운 것이 정상이 아닐까?” (4)

 

- 문제의식 : 자신의 덕행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 덕의 표시라는 말은 어떤 의미인가? 상황에서 오는 고통과 자신의 행위에서 느끼는 즐거움은 어떤 관계에 있는가?

- 문제상황 : 아리스토텔레스는 상반되는 두 감정이 양립가능하다고 보았지만, 그것이 서로 어떤 관계에 있는지 등에 관해서는 용기의 덕을 논의하면서 비유적으로 설명할 뿐 그다지 주목하지 않음

 

*논문의 목적 : (aretē), 감정(pathos), 즐거움(쾌락, hēdonē), 발휘(활동, energeia) 등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를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고통과 즐거움의 뒤섞임을 보다 명료하게 이해하기

 

*논문의 작업 방식 : 감정(수동적 발휘)과 행위(능동적 발휘)의 두 양태에 대한 이해를 통해 괴로운 상황에서 오는 고통과 즐거움에 관한 문제를 해소

 

. 덕의 표시로서의 즐거움

 

*품성의 표시

- 덕의 품성은 덕의 실천을 지향하는 욕구를 함축하며, 따라서 정서적 지향이 없다면 정의로울 수 없음

- 행위자의 품성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단지 외적인 행동만이 아니라 그가 그 행동을 원하는가, 그래서 그 행동을 즐겁게 또는 기꺼이 하고 있는가를 보아야 함

행위에 따른 즐거움과 고통은 품성의 표시

 

*즐거움과 고통의 두 차원

- 절제의 경우

 

1) 일차적 즐거움 : 육체적 욕구의 대상으로부터 오는 즐거움

2) 이차적 즐거움 : 1)을 삼가는 데서 오는 즐거움(자신의 절제 있는 행위에 수반하는 즐거움)

 

- 용기의 경우

 

1) 일차적 고통 : 견뎌내야 할 무서움에서 오는 두려움의 고통

2) 이차적 즐거움 : 1)을 견디는 데서 오는 기쁨(아니면 적어도 고통 없음)

 

품성의 표시는 바로 이차적 즐거움이나 고통

cf) 만약 앵크라테스(enkratēs, 자제력 있는 자)라면 강한 자제력으로 육체적 쾌락을 삼가겠지만, 그 쾌락을 억제하는 데서 오는 고통을 느낄 것

 

*오해의 부분적 해소

 

고통스러운 상황에서의 일차적 고통과 자신의 덕행에서 오는 이차적 즐거움은 서로 다른 차원에 있으므로 모순적인 관계에 놓일 필요가 없게 된다. 동일한 사람이 동일한 차원에서 상반되는 감정을 느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7)

 

- 사실 한 사람이 특정 상황에서 반드시 즐거움과 괴로움 중 하나만을 느껴야 한다는 것은 억지. 많은 경우 우리는 복잡한 감정을 가지며, 특히 도덕적 상황은 대체로 복잡하고 힘든 상황이고 그런 경우에 단순한 하나의 감정을 갖기는 어려움.

- 심지어 하나의 감정도 한 측면에서는 고통이지만 다른 측면에서는 즐거움임. 분노는 자신 또는 자신과 가까운 사람이 모욕을 당했다는 판단에 따른 고통이며, 동시에 복수의 희망을 함축한 즐거움이기도 함(수사학1378a30-32, b1-2)

 

*즐거움과 고통의 두 차원의 이해

- 즐거움과 고통의 두 차원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각각 감정/행위의 대비로 이해해야 함

- 그리고 감정/행위의 대비는 수동적 발휘/능동적 발휘의 대비를 의미

감정/행위, 수동/능동의 구별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기본적인 존재론적 구별이기에 이에 관한 자세한 설명이 없을 뿐, 덕과 즐거움의 문제에 관한 그의 논의에도 자연스럽게 전제되어 있는 틀

 

. 감정(pathos)과 행위(praxis)

 

*존재의 기본적인 두 양태

 

1) 파토스(pathos) : 영향받은 상태 (정서적 상태만을 감정이라고 부름)

파스케인(paschein, to suffer, to be affected) : 겪음, 당함, 영향받음

2) 프락시스(praxis) : 행위

포이에인(poiein, to make, to do) : 만듦,

 

파스케인/포이에인은 수동/능동이라는 존재의 기본적인 두 양태를 가리키며, 감정과 행위는 이에 상응하는 인간의 두 발휘에, 즉 수동적 발휘와 능동적 발휘에 속함

 

*발휘(energeia, 현실태, 활동)

: 능력(dynamis, 가능태, 잠재태)의 사용

수동적인 발휘든 능동적인 발휘든 간에 그럴 수 있는 가능태를 전제하며, 그러한 가능태를 실현하는 활동이 바로 발휘

덕인은 올바른 습관에 의해 훌륭한 품성상태(hexis, 성향, 습성), 즉 가능태를 지니게 되고, 그러한 품성상태를 우리는 덕(aretē)이라고 부름

 

*덕인의 발휘

 

1) 덕의 수동적 발휘 : 감정의 덕이 발휘되어 잘 영향받는(올바르게 느끼는) 상태

2) 덕의 능동적 발휘 : 행위의 덕이 발휘되어 훌륭하게 행위

 

- 1)의 경우, 주체의 책임이나 능동성이 배제된, 속절없이 당하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됨. 그 순간에는 어쩔 수 없이 겪는 수동적 측면이 있지만, 감정은 평소 자신의 실천(습관)에 따라 형성된 품성을 주체적으로 사용하는 활동(Kosman, 1980)이며, 그래서 동일한 상황에서도 사람마다 정서적 반응이 다를 수 있음

- 감정의 덕과 행위의 덕을 분리하는 것은 행위와 행위자의 내적 상태(감정, 동기 등)를 분리하는 것이 아님. 엄밀한 의미의 행위는 행위자의 내적 조건과 분리될 수 없음. 전자의 의미에서 분리는 단지 전자가 수동적 활동의 덕이고 후자가 능동적 활동의 덕임을 분명히 하려는 것일 뿐, 두 가지 덕 모두 행위자의 내적 상태인 탁월한 성품, 즉 덕임.

 

. 감정의 덕

 

*감정의 덕

- 감정에 이끌리지 않고 이성에 따른 올바른 행동을 할 수 있는 품성은 자제력 있음이지 덕이 아님

- 행위에 초점을 맞추어 감정을 단지 행위 이전의 선행 조건으로 본다면 굳이 감정의 덕을 말할 필요가 없음

감정과 행위는 대등한 지위를 가지며, 감정은 올바른 행위를 위해 억제하거나 무시해야 할 대상이 아님. 감정의 덕은 잘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 자체를 올바로 갖는 것.

아리스토텔레스는 행위보다는 오히려 감정을 중심으로 덕을 설명하면서, 감정 자체의 중용을 말한 이후에 비로소 행위에도 마찬가지로 중용이 적용될 수 있음을 부가해서 설명

 

*감정의 덕이란? : 상황에 마땅한 감정을 갖는 것으로서, 즐거울 때 즐거워하고 괴로울 때 괴로워하는 성품의 상태

 

. 감정과 인식

 

*마땅한 감정

- 감정이 합리적일 수도 있고 불합리할 수도 있음을 전제하는 표현

- 감정은 맹목적인 자동적 반응이 아니라 대상에 관한 일종의 평가 판단이며, 마땅한 감정을 갖는다는 것은 상황을 올바로 인식하고 있다는 말

 

*감정의 인지적 측면

- 나의 감정은 내가 상황을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달리 말하면 상황이 나에게 어떻게 드러나는가에 따라 달라짐

- 상황에 대한 나의 판단이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듯이, 감정 또한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음. 올바른 판단에 기초한 감정이 곧 올바른 감정이며, 그릇된 판단에 기초한 감정이 잘못된 감정.

감정의 차이는 곧 판단의 차이이며 세계를 보는 방식의 차이라고 할 수 있음

감정의 덕은 상황에 적합한 마땅한 감정을 느끼는 것이며, 이는 곧 상황을 올바르게 판단하고 있음을 의미

 

. 감정(pathos)의 즐거움과 행위(praxis)의 즐거움

 

*감정에 따르는 즐거움과 고통

 

만일 덕이 행위와 감정에 관계하는 것이고, 모든 행위와 감정에는 즐거움과 고통이 따른다면, 이것 때문에도 덕은 즐거움과 고통에 관련할 것이다.”(1104b13-16)

 

내가 말하는 감정이란 욕망(epithymia), 분노, 두려움, 대담함, 시기, 기쁨, 친애, 미움, 갈망, 시샘, 연민, 일반적으로 즐거움이나 고통이 따르는(holōs hois hepetai hēdonē ē lypē) 것들이다.”(1105b21- 23)

 

- 아리스토텔레스는 즐거움이나 고통을 단지 여러 감정들 중 하나로 보지 않음

- 즐거움이나 고통이 감정들에 따른다는 것을 시간적 연쇄나 우연적인 동시 발생의 의미로 보긴 힘듦

- 즐거움이나 고통을 감정의 정의적 요소로 사용하거나(수사학), 감정을 그 자체로’(kath’ hauta) 즐거움과 고통이 따르는 것으로 표현할 때, 아리스토텔레스는 즐거움이나 고통을 감정들의 본질적 요소로 보고 있다고 할 수 있음

덕은 감정과 행위에 관계하고, 모든 감정과 행위에는 본질적으로 즐거움과 고통이 따른다면 우리는 감정에 따르는 즐거움을 감정(올바른 수동적 발휘)의 즐거움이라고, 행위에 따르는 즐거움을 행위(올바른 능동적 발휘)의 즐거움이라고 부를 수 있음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즐거움

-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즐거움이란? : 방해받지 않은 활동(energeia) 또는 활동을 완성시키는 것

- 플라톤에게 즐거움이란? : 결여에서 충족으로의 운동(과정, kinēsis)

즐거움을 운동이 아니라 활동의 범주로 옮겨놓는 것은 즐거움이 결여의 충족이 아니라 자연적 상태 및 능력의 발휘에 있음을 의미

ex) 식사의 즐거움은 허기를 충족하는 과정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몸의 건강한(자연적) 부분이 영양섭취 능력을 발휘하는 데 있음

 

*인간의 마땅한 즐거움

: 인간의 마땅한 즐거움은 덕인의 품성상태의 발휘에 있으며, 그 중에서 감정의 즐거움은 수동적 품성상태의 발휘이며, 행위의 즐거움은 능동적 헥시스의 발휘

(, 즐거움은 단지 자연적 상태의 활동이 아니라 방해 없는또는 활동을 완성하는경우에 얻을 수 있기 때문에 덕인이 자신의 헥시스를 발휘할 때마다 항상 즐거움을 느끼는 것은 아님_

 

*감정의 즐거움에서 수동자와 능동자

- 감정에는 감각(지각)에 의한 인식이 함축되어 있으므로, 감정의 즐거움에는 감각의 즐거움이 함축되어 있음

 

1) 수동자 : 감각활동은 수동자인 주체가 좋은 감각능력을 갖추고,

2) 능동자 : 능동자인 감각 대상 역시 좋은 경우에 완성되는 것이며, 그럴 때 즐거움이 발생

ex) 아름다움을 볼 줄 아는 시각(심미안)을 가진 수동자가 아름다운 자연이나 예술작품이라는 능동자를 받아들일 때 시각적 즐거움이 생김

ex) 정의로운 사람이 불의로운 사태를 목격한다면, 감각의 대상인 능동자(사태)가 좋은(아름다운) 상태에 있지 못하기 때문에 그의 감각활동에는 고통이 따를 것

 

- 감정의 경우 주체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 능동자이고, 행위의 경우 행위자가 능동자라는 점에서 다르지만, 능동자와 수동자가 모두 좋은 상태에 있을 때 즐거움이 생긴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

 

*고통과 즐거움의 뒤섞임에 대한 이해

- 상황에 대한 인식에서 오는 고통은 감정의 고통이며, 수동적 활동에 따르는 고통

- 고통의 이유는 상황(감각 대상), 즉 능동자가 좋은 상태에 있지 않기 때문

- 그럼에도 덕인에게는 덕행에 따르는 즐거움이 있는데, 이는 행위의 즐거움이며, 능동적 활동에 따르는 즐거움

- 이 덕행을 방해하는 것이 없다면 덕행의 완성에 따른 즐거움이 있을 것. 그리고 이 즐거움이 바로 덕인의 성품을 드러내는 표시.

cf) 엥크라테스라면 덕행에 따른 고통을 느낄 것. 그에게는 좋지 않은 내적 요소가, 즉 덕행에 반하는 나쁜 욕구가 덕행의 완성을 방해하기 때문

 

. 용기의 덕과 즐거움

 

*용감한 사람(용기를 발휘하는 덕인)의 고통과 즐거움

 

그럼에도 용기에 따른 목적은 즐거운 것처럼 보이고, 다만 주변상황 때문에 그 사실이 불분명해지는 것 같다.”(1117a35-b1)

 

- 고통 : 주변환경 때문에 겪는 고통, 덕인의 수동적 활동에 따른 고통, 감정의 고통

- 즐거움 : 용감한 행위의 목적에서 오는 즐거움, 덕인의 능동적 활동에 따른 즐거움, 행위의 즐거움

용기의 덕을 발휘하는 덕인에게는 이처럼 두려움의 감정에 따른 고통과 용감한 행위에 따른 즐거움이 혼재하는데, 우리는 압도적인 고통의 크기 때문에 덕행의 즐거움을 보지 못한다는 것

 

*용감한 행위(용기를 발휘하는 행위)의 목적

 

덕의 발휘(energein)가 즐겁다는 것은, 목적에 도달한(tou telous ephaptetai) 경우가 아니라면, 모든 덕에 타당하지는 않다.”(1117b15-16)

 

- 용기 있는 행위의 목적은, 모든 덕행의 목적이 그렇듯이, 그 행위 자체의 고귀함

- 용기 있는 행위는 그 행위 자체의 고귀함만이 목적이 아니라, 전투에서의 승리를 통한 국가의 수호나 평화의 회복 등의 행위 외적 목적을 가짐. 그리고 행위 자체의 가치는 외적 목적의 가치에 의존할 수밖에 없음.

- 그러나 용기 있는 행위의 가치가 전적으로 외적 목적의 성취에 의존하는 것은 아님. 비록 전투에서 패배했어도, 그 행위 역시 용감한 행위일 수 있는 이유는 고귀한 목적을 위한 행위 자체가 훌륭하며, 그 상황에서 행위자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행위이기 때문.

목적에 도달할 경우에덕행이 즐거울 수 있다는 말은, 그러한 행위 자체의 고귀함을 생각한다면 그 행위 자체는 즐겁다는, 또는 적어도 고통스러운 것은 아니라는 의미로 해석해야 할 것

 

. 나가며

 

*덕의 성품 : 상황에 따라 마땅한 감정을 갖는 것

덕의 표시 1 : 덕행에 따른 즐거움은 덕의 품성을 갖추었다는 것

덕의 표시 2 : 슬프거나 괴로운 상황에서는 느끼는 고통은 덕의 품성을 갖추었다는 것

고통스러운 상황의 덕행 : 상황 인식에서 오는 고통과 덕행 실천의 즐거움이 혼재할 수밖에 없음

 

*삶의 두 양태 : 수동적 발휘(감정)와 능동적 발휘(행위)

수동적 발휘(감정) : 상황(능동자)에 의해 내(수동자)가 영향받는 활동

능동적 발휘(행위) : (능동자)가 환경(수동자)에 영향을 미치는 활동

두 발휘(활동)을 하나로 묶어 즐거운가 괴로운가를 묻는 것은 불합리. 두 발휘는 서로 다른 발휘이기 때문.

 

*즐거움에 대한 오해 : 즐거움을 오로지 느낌에만 한정하기

 

나는 슬픈 영화도 즐기고 신나는 영화도 즐긴다. 슬픈 영화를 볼 때 나는 대체로 고통스러운 느낌 속에 있는데 그럼에도 영화를 즐긴다는 말은 무엇인가?” (28)

 

- 내가 무엇을 즐기는 경우는 대체로 그 활동 이외에는 다른 생각에 빠질 수 없을 만큼 그 활동에 몰두하는 경우. 그래서 그 활동이 다른 것에 의해 방해받지 않기를 바라며 도중에 그만두고 싶지 않을 때 나는 그 활동을 즐긴다고 말할 수 있음.

- 이러한 생각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즐거움, 즉 방해받지 않는 활동 또는 활동의 완성과 얼마나 유사한지는 검토해보아야할 문제이지만, 적어도 우리 역시 즐거움을 느낌에만 한정하지는 않고 즐거움이라는 표현을 활동에 수반하는 정서적 평가의 의미로 넓게 사용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