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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코마코스 윤리학』 활동, 몰입, 존재, 고귀 논평

현담 2022. 6. 23. 13:52

활동, 몰입, 존재, 고귀

 

본고의 목적은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활동, 몰입, 존재, 고귀 개념이 무엇이며 서로 어떻게 연결되는지 탐구하고 그 연결을 보여주는 사례를 찾아 연결에 대한 이해를 명료화하는 것이다.

 

활동(energeia)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방식의 대조(對照)로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다. 우선, 활동은 능력(dynamis)과 대조되는데, 그것은 능력의 발현이다. 예컨대, 뒤뚱거리며 빵부스러기를 쪼는 비둘기는 비행 능력을 지니지만 그것을 발현하지는 않는데, 개구쟁이 아이가 갑자기 뛰어들자 놀라서 푸드덕거리며 날아오를 때 비로소 그 비둘기는 자신이 지닌 비행 능력을 발휘하며 활동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의 성립과 관련하여 활동을 설명하는데, 활동은 탁월성의 소유와 대비되는 탁월성의 사용으로, 인간이 탁월성에 따르는 활동에서 좋고 고귀한 것을 산출할 때 행복이 성립한다고 말한다(1098b30-1099a6). 다음으로, 활동은 생성(genesis)이나 운동(kinēsis)과 대조되는데, 그것은 순간에 전체로서 완성되는 것이다. 반면, 생성이나 운동은 시간 안에서 부분으로 분할될 수 있으며(1174b11-12), 경과한 전체 시간이 아닌 어떤 목적에 다다른 시간에만 완성된다(1174a20-23). 아리스토텔레스 스스로 드는 예시는 보는 것과 신전 짓기이다. 보는 것은 어느 때나 완성된 전체이기에 활동이지만, 신전 짓기는 시간 안에서 초석을 놓고 기둥에 홈을 파는 부분적인 일들로 분할될 수 있으며 신전이 완성되는 순간이 아니고서는 완성되지 않기에 운동이다. 정리하자면, 활동은 순간에 전체로서 완성되는 능력의 발현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위에서 살펴본 활동처럼 명확한 개념화를 통해 몰입을 서술하고 있지는 않지만, 우리는 활동과의 연결을 토대로 그의 몰입과 관련된 서술들에서 충분히 몰입을 개념화하여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다. 우선, 몰입은 행위와 구별되는 목적이 있는 운동의 경우가 아닌, 그 자체가 완성의 계기를 담고 있어 자기목적적인 활동의 경우에 목격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참주들이 놀이에 빠져드는 일을 서술하는 대목에서, 놀이는 그들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의 몸과 재산을 소홀히 하게 만들어 그들에게 손해를 입힘에도 그들이 놀이를 선택한다고 말한다(1176b8-18). 놀이는 자기목적적인 활동이기에 몰입하게 되는 것이다. 그 자체가 목적인 활동에서 벗어날 때 몰입이 깨지는 현상도 자주 있다. 예컨대, 재밌는 영화를 보고 놀이처럼 즐거이 감상문을 쓸 때는 몰입하다가도, 그 감상문을 잘 써서 좋은 성적을 받아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몰입은 깨지고 문장들을 어떻게 써야 하나 머리가 지끈지끈하기 시작한다. 나아가, 몰입은 활동 중에서도 완전한 활동에서 성립한다. 좋은 상태에 있는 특정한 능력(dynamis)이 그에 대응하는 특정한 좋은 대상과만 온전히 관계할 때 방해받지 않는 하나의 가장 완벽한 활동(energeia)이 성립하는데 이때, 몰입에 이른 사람은 활동 그 자체와 합일을 이룬다. 예컨대, 사물놀이 공연에서 자신의 탁월한 솜씨를 발휘하여 자진모리장단으로 꽹과리를 연주하는 연주자는 자신의 장단에 녹아들어 신명 나게 상모를 돌린다. 상모가 장단에 맞추어 춤출 때, 우리는 그 연주자가 그의 연주 혹은 그가 만들어내는 장단과 합일에 이르러 그 순간에는 그가 연주로 존재한다거나 장단으로 살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결국, 몰입은 완전한 활동의 양태이며, 완벽하게 활동 중인 존재의 존재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산다는 것이 일종의 활동(1175a12)이라면, 그리고 우리가 활동을 통해서 존재(1168a7)한다면, 활동은 곧 삶이자 우리 존재의 드러냄일 것이고, 몰입은 완전한 삶이자 우리 존재의 완벽한 드러냄일 것이다. 위의 꽹과리 연주자의 사례에서 그는 연주를 통해 비로소 연주자로서 살게 되며, 특히 연주에 몰입함으로써 연주자로서의 자기 존재를 완벽하게 현실화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활동과 존재를 연결 지어 제작자가 작품을 사랑하는 이유를 설명하기도 한다. 제작자는 자신이 대체 어떤 사람인지, 그 가능태에 있어서 무엇이었는지”(1168a9) 제작일을 통해 만든 작품에서 비로소 알게 된다. 그래서 제작자는 어떤 의미에서 활동을 통해 작품으로 존재하기 때문”(1168a7), 그리고 자신의 존재를 사랑하기 때문”(1168a8), 작품을 사랑한다. 어쩌면 우리는 활동과 존재의 연결을 식물인간이라는 단어를 통해 이미 이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무런 활동도 하지 못하고 병상에 꼼짝없이 누워 삶을 연명하는 식물인간의 경우, 인간이지만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인간다운 존재의 모습이 현실적으로 그에게서 드러나지 않고 있기에, 그는 인간이라기보다는 식물에 가깝다. 안타깝게도 그는 인간의 삶, 인간으로서의 존재함이 희박해진 잠재태(dynamis)로서의 인간인 것이다. 그의 가족들은 그가 병상을 박차고 일어나 즐겁게 이야기하고 뛰놀며 다시 인간다운 삶을 살기를, 인간으로서의 그를 재회하기를, 매일같이 고대한다.

 

고귀한 것은 탁월성에 따르는 행위가 실제로 성취하는 것이다(1099a5-6). 그런데 그 행위가 실제로 성취한다는 고귀한 것은 바로 자신, 즉 탁월성에 따르는 그 행위 자체이다(1099a22-23). 결국 탁월성에 따르는 행위는 그 행위의 순간에 완전한 전체로서 성취되는 자체목적적인 활동이고, 따라서 고귀한 것은 탁월성에 따르는 활동으로서의 행위로 이해할 수 있다. 고귀한 것이 본성적으로 즐거운 것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서술도 그것이 탁월성에 따른 활동임을 고려할 때 함께 이해할 수 있다. 탁월성은 인간 영혼의 기능을 잘 수행하도록 하는 품성상태라는 점에서 인간에게 본성적이고, 즐거움은 활동에 수반하는 정점으로서 활동을 완성하는 것”(1174b34)이므로 탁월성에 따른 활동이 즐거울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활동은 곧 삶이자 존재의 드러냄이었음을 상기한다면, 탁월성에 따르는 활동인 고귀한 것은 인간에 본성적인 즐거운 삶이자 인간다움의 즐거운 드러냄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나아가 인간이 몰입해서 고귀한 행위를 수행한다면, 인간은 환희 속에서 더욱 진정한 의미에서의 삶”(1098a6-7)을 완전히 영위하게 되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우리는 고귀한 행위로의 몰입을 통해 가장 진정한 의미에서 삶을 살게 되는 사례를 용감한 군인에게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두려움과 대담함에 관련하는 중용의 품성상태인 용기를 발휘하는 용감한 군인이 삶과 죽음이 오가는 전장에서 몰입하여 전투를 치를 때 그는 황홀경 속에서 다시 태어나는 체험을 한다고 보고된다.

 

다시 말해 황홀경이다. 성자와 위대한 시인의 조건, 위대한 사랑의 조건이 위대한 용기를 지닌 사람에게도 허락된다. 사내다운 열정이 차고 넘쳐, 혈관을 솟구쳐 흐르듯 끓어 오른 피가 심장을 통과하며 부글부글 달아오를 지경이다. 그 어떤 도취도 능가하는 흥분이며 모든 구속을 끊는 해방이다. 그때 [전투 중] 개인은 격렬하게 몰아치는 폭풍 같고, 요동치는 바다, 으르렁거리는 천둥 같다. 그는 이미 모든 것으로 녹아들었기 때문이다.” (에른스트 윙거, 내적 체험으로의 전투, 1922. (유발 하라리, 극한의 경험, 김희주 역, 2017, 옥당, p.31.에서 재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