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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돈』 "올바른 주화는 오직 현명함 뿐"(69a)에 관한 짧은 글

현담 2023. 2. 21. 01:57

Q : <파이돈> 69a-b에서 소크라테스는 현명함만이 올바른 주화라고 이야기한다. 소크라테스가 어떤 뜻에서 현명함이 일종의 화폐라고 주장하는지 설명하고, 그의 주장에 대해 비판적으로 논의하시오.

 

 

  현명함만이 올바른 주화라는 소크라테스의 이야기는, 그가 철학자가 아닌 사람(일반인)의 덕과 철학자의 덕을 구별하고, 전자는 두려움이나 즐거움 등의 상호교환을 통해 갖게 되는 온전한 바도 참된 바도 없는 것인 반면, 후자는 두려움이나 즐거움 등과 현명함이라는 올바른 주화의 교환을 통해 도달하는 참된 덕이라고 주장하는 맥락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필자는 먼저 일반인의 덕과 철학자의 덕이 어떻게 구별되고 왜 후자가 참된 덕이지만 전자는 그렇지 못한 것인지 살펴본 후, 소크라테스가 어떤 뜻에서 현명함이 일종의 화폐라고 주장하는지 설명하고, 그의 주장에 대해 비판적으로 논의할 것이다.

 

  ➀ 소크라테스는 일반인의 덕을 일반인의 용기와 일반인의 절제라는 두 가지 범례를 통해 분석한다. 필자도 그를 따라 그 둘을 분석하면서 일반인의 덕을 이해해보고자 한다. 먼저, 일반인은 다음과 같은 구조로 죽음을 견디면서 용기의 덕을 가진다고 말해진다.

 

1. 일반인은 죽음을 크게 나쁜 것으로 여긴다.

2. 크게 나쁜 것은 더 크게 나쁜 것들에 대한 두려움에 의해서 견딜 수 있다.

3. 따라서, 일반인은 죽음을 죽음보다 더 크게 나쁜 것들에 대한 두려움에 의해서 견딜 수 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두려움에 의해 무언가를 행하는 것은 비겁이며, 그러므로 위에서 살펴본 용기의 덕은 사실 용기의 반대인 비겁이라는 악덕임을 다음과 같이 밝힌다.

 

1. 일반인은 두려움에 의해 죽음을 견딘다.

2. 그러나, 두려움에 의해 무언가를 하는 것은 비겁이다.

3. 따라서, 일반인은 죽음을 견딘다는 측면에서 용감해 보이지만, 사실 두려움에 의해 죽음을 견디기에 비겁하다.

 

  다음으로, 일반인은 용기의 덕과 유사한 구조로 즐거움을 자제하면서 절제의 덕을 가진다고 말해진다.

 

1. 일반인은 즐거움에 제압된다.

2. 어떤 즐거움은 다른 어떤(더 큰) 즐거움에 제압됨으로써 자제할 수 있다.

3. 따라서, 일반인은 어떤 즐거움을 다른 어떤 즐거움에 제압됨으로써 자제할 수 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즐거움에 제압되어 무언가를 행하는 것은 방종이며, 그러므로 위에서 살펴본 절제의 덕역시 사실 절제의 반대인 방종이라는 악덕임을 다음과 같이 밝힌다.

 

1. 일반인은 즐거움에 제압되어 즐거움을 자제한다.

2. 즐거움에 제압되어 무언가를 하는 것은 방종이다.

3. 따라서, 일반인은 즐거움을 자제한다는 측면에서 용감해 보이지만, 사실 즐거움에 제압되어 즐거움을 자제하기에 방종하다.

 

  한편, 철학자는 다음과 같은 구조로 죽음을 견딜 필요가 없어진 상태에서 오히려 죽음을 추구하며 진정한 용기의 덕을 가진다.

 

1. 죽음은 나쁜 것이 아니다.

(1.` 죽음은 오히려 좋은 것이다.)

2. 철학자는 죽음이 나쁜 것이 아님을 안다.

(2.` 철학자는 죽음이 오히려 좋은 것임을 안다.)

3. 나쁘지 않은 것은 그것이 나쁘지 않은 것임을 아는 한 견딜 필요가 없다.

(3.` 좋은 것은 그것이 좋다는 것임을 아는 한 오히려 추구해야 한다.)

4. 그러므로, 철학자는 죽음을 견딜 필요가 없다.

(4.` 철학자는 죽음을 오히려 추구해야 한다.)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영원불멸하는 영혼의 몸으로부터의 해방인 죽음은 비로소 영혼의 순수한 추론을 가능하게 하여 이데아에 대한 앎의 획득을 가능하게 하는 좋은 것이지 결코 나쁜 것이 아니다. 이데아에 대한 앎, 즉 지혜를 사랑하는 자들인 철학자들은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죽음을 견딜 필요가 없어지고 오히려 기꺼워 할 수 있는 상태, 즉 참된 용기의 덕에 도달할 수 있다.

  다음으로, 철학자는 용기와 유사한 구조로 즐거움을 제압할 필요가 없어진 상태에서 오히려 즐거움을 하찮게 여기며 진정한 절제의 덕을 가진다.

 

1. 즐거움은 욕망할만한 것이 아니다.

(1.` 즐거움은 오히려 하찮은 것이다.)

2. 철학자는 욕망할만한 것이 아님을 안다.

(2.` 철학자는 즐거움이 오히려 하찮은 것임을 안다.)

3. 욕망할만한 것이 아닌 것은 욕망할만한 것이 아님을 아는 한 제압할 필요가 없다.

(3.` 하찮은 것은 그것이 하찮은 것임을 아는 한 오히려 하찮게 여겨야 한다.)

4. 그러므로, 철학자는 즐거움을 제압할 필요가 없다.

(4.` 철학자는 즐거움을 오히려 하찮게 여겨야 한다.)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진리에 대한 탐구 과정에서 영혼을 기만하고, “갖가지 환상들과 많은 바보짓으로 우리를 가득 채워서어떤 것도 제대로 사유할 수 없게 만들며, “전쟁들과 내분들과 싸움들을 일으키는 몸과 몸에서 유래하는 즐거움은 결코 좋은 것이 아니며 오히려 나쁜 것이다. 이데아에 대한 앎을 추구하는 자들인 철학자들은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즐거움을 욕망할 필요가 없어지고 오히려 하찮게 여길 수 있는 상태, 즉 참된 절제의 덕에 도달할 수 있다.

 

  ➁ ➀의 맥락을 고려할 때 우리는 비로소 소크라테스가 어떤 의미에서 교환의 비유를 사용하여 일반인의 덕과 철학자의 덕의 획득을 묘사하였는지 알 수 있게 된다. 먼저, 일반인이 죽음을 견디는 것은, 보다 정확하게는 -죽기 전이라야 무언가를 견딜 수 있기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견디는 것은 죽음보다 더 크게 나쁜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능하므로, 큰 두려움을 주고 작은 두려움을 받는 식의 교환으로 묘사될 수 있다. 그리고 일반인이 즐거움을 자제하는 것 또한 유사한 방식으로 작은 즐거움을 주고 큰 즐거움을 받는 식의 교환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러한 주고 받음 속에서 통용되는 주화는 일반인이 겪고 그것에 의해 추동되는 두려움이나 즐거움과 같은 감정들이다. 일반인의 덕은 결국 이런 감정들에 의해 일방적으로 휘둘리는 상태이므로 실로 노예에게나 어울리며”, 영혼을 기만하고 악행을 추동하는 몸에 대한 사랑이기에 실제로는 악덕이며, 실제 대상이 가지는 입체감을 살리기 위해 그림자를 정교하게 넣은 그림자 그림처럼 올바른 덕은 아니지만 그처럼 보이기 위해 악덕을 정교하게 사용하기에 온전한 바도 참된 바도 없는 것이다.

  반면, 철학자가 죽음을 견딜 필요가 없어진 상태에서 오히려 그것을 추구하거나 즐거움을 욕망할 필요가 없어진 상태에서 오히려 그것을 하찮게 여기는 것은, 죽음이 나쁘지 않고 오히려 좋은 것이며 즐거움이 좋지 않고 오히려 하찮은 것이라는 앎을 가짐으로써 두려움이나 즐거움을 줘 버리는 식의 교환으로 묘사될 수 있다. 이러한 주고 받음에 의해 철학자(의 영혼)는 지혜의 획득에 최대한 가까워질 수 있도록 돕는 “[영혼에] 이질적인 것이 아닌 그것 자체의 장식(질서, kosmos)”(115a)으로서 용기와 절제를 획득하게 된다.

  이제 우리는 현명함, 곧 죽음이 나쁘지 않고 오히려 좋은 것이며 즐거움이 좋지 않고 오히려 하찮은 것이라는 앎이, 두려움과 즐거움과 교환되어 참된 덕을 산출할 수 있는 유일한 올바른 화폐임을 이해할 수 있다. 비유컨대, 일반인의 덕 획득의 경우, 10, 50원을 취급하지 않는 자판기에 50원 동전을 10원 동전으로 바꾸어 투입한 후 아무것도 안 나온, 아니 오히려 이상한 음료가 나온 경우이다. 반면, 철학자의 덕 획득의 경우, 같은 자판기에 50원 동전을 100원 동전으로 바꾸어 투입한 후 제대로 된 음료가 나온 경우이다.

 

  ③ 혹자는 소크라테스가 두려움과 즐거움을 아예 제거하고 초연해진 상태를 참된 용기와 절제로 규정한 것을 극단적이라고 비판할 수 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두 가지 지점에서 반박할 수 있다. 우선, 두려움과 즐거움은 몸에 대한 사랑의 일종인데, 몸은 플라톤에게 무지와 악행의 원천이기에 적당히 용인할 수 없는 것이다. 지혜롭고 평화로울 수 있는데, 많이 무지하고 크게 싸우는 것보다 적게 무지하고 작게 싸우는 것이 더 낫다고 굳이 마지막을 선택하는 것은 잘못된 선택이다. 또한, 소크라테스는 감정에 이리저리 휘둘리는 비자발성의 메커니즘을 부수고 지혜의 추구 속에서 비로소 성립할 수 있는 자발적 덕의 토대를 놓았다. 두려움에 의해 무언가를 행하고 즐거움에 제압당해 무언가를 행하는 과정 속에 처해있는 한, 행위자는 자신을 찾아와 명령하는 감정의 노예와 다를 바 없다. 노예는 아무것도 자발적으로 행하지 못하기에 칭찬받을 수 없고, 따라서 그에게 칭찬의 대상인 덕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이런 난점을 타개하기 위해 감정에 초연하면서 자발적으로 앎을 획득하기 위한 노력의 상태를 설정하였고 주인된 철학자에게는 칭찬의 대상인 덕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이처럼 철학자의 덕이 참된 덕일 수 있는 조건을 갖추었다는 점은 부정하기 힘들다. 그러나 문제는 철학자의 덕으로 가는 첩경인 현명함의 획득이 난망해 보인다는 것이다. 죽음이 좋고 즐거움이 덧없다는 앎은 그 이전에 죽음이 몸과 영혼의 분리이고, 영혼이 불멸하고, 영혼은 순수한 추론을 통해 이데아에 대한 앎을 획득할 수 있다는 등의 형이상학적이고 인식론적인 명제들이 참임을 전제한다. 그렇다면 그런 명제들이 참임을 증명할 수 있어야 하는데, 소크라테스는 파이돈편 내내 신, 이데아, 상기 등의 개념을 통해 그것을 증명하고자 하지만 그의 대화 상대자나 독자의 입장에서는 납득하기 쉽지 않다. 심지어 대화 상대자인 심미아스는 그런 증명들을 의심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도 그 논변들이 다루고 있는 것들의 중대성 때문에, 그리고 인간적 미약함을 대단찮게 여기기 때문에 [...] 여전히 미식쩍음을 지니지 않을 수 없다고 시인한다. 이에 소크라테스 또한 더 명확히 검토되어야만 하인간이 따라갈 수 있는 최대한도까지 따라갈필요가 있다고 대답한다(107b-c). 증명이 완전한 지도 의문이지만 미약한 인간이 중대한 사안을 다루는 증명의 완전성을 이해할 수 있을 지도 의문인 것이다. 어쩌면 소크라테스도 현명함의 획득이 힘들다는 사실을 인정하여 차선책으로 신화를 제시하고 그것에 대한 확신을 통해 참된 덕에 도달하기를 바랐을 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