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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코마코스 윤리학』 "우리가 할 수 있는 데까지 우리들이 불사불멸의 존재가 되도록"(1177b34)에 관한 짧은 글

현담 2023. 2. 21. 17:43

Q : 다음 언명은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어느 맥락에서 나온 말인지, 주장하는 바가 무엇인지 가능한 한 설득력 있게 설명한 후, 자신의 입장에서 평가하시오.

 

인간이니 인간적인 것을 생각하라혹은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니 죽을 수밖에 없는 것들을 생각하라고 권고하는 사람들을 따르지 말고, 오히려 우리가 할 수 있는 데까지 우리들이 불사불멸의 존재가 되도록, 또 우리 안에 있는 것들 중 최고의 것에 따라 살도록 온갖 노력을 기울여야만 한다.

 

 

  『니코마코스 윤리학17장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적인 좋음인 행복을 탁월성에 따른 영혼의 활동으로 정의한 후 또 만약 탁월성이 여럿이라면 그중 최상이며 가장 완전한 탁월성에 따르는 영혼의 활동이 인간적인 좋음일 것이라는 조건을 덧붙였었다. 그는 107장에 이르러 그 조건을 따지며 행복이 무엇인지 다시 검토하는데, 여러 탁월성 중 지성의 탁월성인 지혜가 최상이며 가장 완전한 탁월성으로 드러난다. 인간적인 것 이상의 것인 지성의 탁월성을 따르는 삶인 관조가 결국 행복이므로 그것을 권고하는 맥락에서 위 언명이 나오게 된다. 필자는 위 언명이 나오는 맥락을 보다 자세히 살펴보고, 그것이 주장하는 바가 무엇인지 가능한 한 설득력 있게 설명한 후, 평가할 것이다.

 

  ➀ 아리스토텔레스는 107장에서 행복이 탁월성에 따르는 활동이라면, 그것은 당연히 최고의 탁월성을 따라야 할 것이라는 말로 최고의 탁월성이 무엇인지 따져보고 행복을 다시 구체적으로 정의하고자 하는 의도를 내비친다. 그에 따르면, 최고의 탁월성은 최선의 것에 대한 탁월성일 것이고, 최선의 것은 본성상 우리를 지배하고 이끌며, 고귀하고 신적인 것들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에 해당하는 가장 유력한 후보는 인간 영혼 내에 있는 것들 중 최고인 지성(nous)이다. “지성이 상대하는 대상 또한 앎의 대상들 중 최고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성의 탁월성인 지혜(sophia)가 최고의 탁월성일 것이며, 지혜에 따르는 활동인 관조(theōria)가 행복일 것이다.

  그러나 관조가 여러 행복의 조건들을 만족하는지 검토해야 하고, 10권 이전 많은 장들을 다양한 성격적 탁월성들과 그것들에 따른 활동을 살펴보는 데에 할애하였기에 관조와 그것들의 비교 또한 필요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두 작업을 동시에 수행한다. 우선, 관조는 가장 완전하다. 가장 완전한 혹은 단적으로 완전한 것은 언제나 그 자체로 선택될 뿐 다른 것 때문에 선택되는 일이 없는 것”(17)이다. 관조는 관조한다는 사실 이외에 아무것도 생겨나지 않고 오로지 그 자체 때문에 사랑받는 것 같으므로 가장 완전하다. 이는 실천적 활동과 비교된다. “실천적 활동으로부터는 행위 자체 외의 무엇인가를 다소간 얻고자 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용감한 활동은 전쟁에서 성립하는데 이것은 평화를 얻기 위한 것이며, 정의로운 활동은 정치에서 성립하는데 이것은 동료 시민들에게 행복을 마련해주려 하는 것이다. 물론 실천적 활동들은 그 자체로 고귀하고 선택할만한 것이지만 일단 선택하여 실행에 옮기게 되면 행위 자체 외에 외부적 목적 또한 성립한다. 그러나 관조는 오로지 관조 행위에 의해 선택되고 실행에 옮긴 후에도 관조 행위 외에 아무것도 성립하지 않는다. 나아가 실천적 활동의 외적 목적은 여가에 기여하는 것으로 보이며, 그 여가 속에서 성립하는 것은 관조이기에, 관조는 실천적 활동보다 상위에 성립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관조는 가장 자족적이다. 물론 그전에 다른 모든 것들처럼 삶을 위해 필수적인 것들이 충분히 갖춰져야 관조 활동도 가능하겠지만, 관조 활동 자체는 그런 것들이나 타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혼자 조용히 사유하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관조 활동에도 동반자를 가질 수 있지만 필수적인 것은 아니고, “그가 지혜로우면 지혜로울수록 더욱혼자 있어도 잘 관조할 것이다. 그러나 실천적 활동은 삶을 위해 필수적인 것들이 갖춰진 이후 활동 자체 내에서도 외부적 좋음이나 타인을 필요로 한다. 예컨대, 통이 큰 활동을 하려면 돈이 많아야 하고, 정의로운 활동을 하려면 같이 사는 동료 시민이 있어야 한다. 나머지 관조가 가지는 성질들은 이러한 두 가지 주요한 조건 외에 추가적인 조건일 수도 있겠고 그 두 조건에 기여하는 성질으로 볼 수도 있겠다. 관조는 어떤 실천적 행위보다 더 연속적이다. 또한 자신의 고유한 즐거움을 가지지만 동시에 진지한 것이다. 그리하여 관조적 활동이야말로 인간의 완전한 행복일 것이다.”

 

  ➁ 결국 위 언명에서 우리 안에 있는 것들 중 최고의 것은 지성이고 그것에 따라 사는 것은 관조적으로 사는 것이며, 그렇게 살도록 온갖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는 그런 삶이야말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완전한 행복을 누리는 삶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삶은 우리가 인간 이상의 것인 불멸의 대상들을 알고자 하는 동시에 그것들을 사유할 수 있는 인간 영혼의 부분인 지성을 따를 때만 가능한 것이다. 이런 삶 속에서 우리는 완전하고 자족적인 활동을 통해 우리 스스르도 불사불멸의 존재에 가까워진다. 이러한 삶이 명백히 행복하고 우리 인간에게 가능한 것으로 남아 있는 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니 인간적인 것을 생각하라혹은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니 죽을 수밖에 없는 것들을 생각하라고 권고하는 사람들을 따르지 말라고 권고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가 비판하는 사람들의 권고 속 인간적인 것죽을 수밖에 없는 것들은 무엇일까? 인간 이상의 것과 인간적인 것을 가르는 기준이 무엇일까?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스스로 인간과 인간적인 것들을 규정하는 대목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국가는 자연의 산물이며, 인간은 폴리스적 동물임이 분명하다. [...] 공동체 안에서 살 수 없거나, 자급자족하여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자는 국가의 부분이 아니며, 들짐승이거나 신일 것이다.”(정치학) 인간은 자급자족하여 홀로 살지는 못하지만 공동체를 구성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기에 국가를 구성하여 그 안에서 사는 폴리스적 동물이다. 이러한 인식은 자족성을 인간적인 자족성으로 규정하는 17장의 논의에서도 드러난다: “인간은 본성상 폴리스적 동물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야기하는 자족성은 자기 혼자만을 위한 자족성, 고립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위한 자족성이 아니다. 부모, 자식, 아내와 일반적으로 친구들과 동료 시민들을 위한 자족성이다.” 인간은 폴리스적 동물인 한 자신의 가족과 친구와 동료 시민의 삶과 연결된 삶을 살아가고 그 안에서 자족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인간적인 것은 인간은 폴리스적 동물이다.”라는 명제에 의존하는 것들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단순히 동물로서 인간이 몸과 감정을 가지는 것을 넘어서 타인과 교류하고 공동체를 형성하여 삶 전반이 그 속에 삽입된 특별한 동물로서 인간이 갖는 것들까지 포함한다. 그러나 관조는 인간은 폴리스적 동물이다.”라는 명제에 의존하지 않는다. 기초 요건만 충족하면 관조 활동 자체는 홀로 가능하고, 그 외에 아무것도 산출하지 않은 채 그 자체만으로 선택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인간적인 것 이상의 것 혹은 자급자족하여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것으로서 신적인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③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적인 것 이상의 관조적 삶이 본래적 의미에서 행복한 삶이며 그러한 삶을 살라고 권고하는 것은 두 가지 비판에 직면할 수 있지만 필자는 그에 대해 옹호해보고자 한다. 첫째,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에게 인간적인 것 이상의 삶을 요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비판이다. 인간은 그 정의상 인간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그러나 필자는 인간적인 것 이상의 삶 역시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간적인 것에 관한 철학”(109)의 기획 속에 있으며, 넓은 의미에서 충분히 인간적인 삶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17장에서 살펴보았듯, 인간의 기능은 이성을 잘 발휘하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이성이 인간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성은 113장에 따르면 욕구적 부분을 지도하기도 하지만, 그 자체로 사유하기도 한다. 그 후자가 일차적인 의미의 이성이다. 그 안에 지성이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인간을 이성적 동물로 정의한다면, 이성을 잘 발휘하는 탁월한 인간 삶으로 관조적 삶과 실천적 삶을 동시에 이해할 수 있다. 앞선 폴리스적 동물로서의 인간 역시 인간을 다른 짐승과 신과 구별지음과 동시에 그 사이에 위치시키는 역할을 수행하는 훌륭한 정의이지만, 실천적 이성의 역할에 집중했다는 측면에서 좁은 정의이기도 하다. 그러나 인간이 지닌 일차적 이성의 역할에 집중할수록 인간은 신과 닮게 된다는 측면에서 해당 정의는 선명한 정의이기도 하므로 아리스토텔레스가 그 정의를 주되게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인다. 둘째,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천적 삶에 따른 소위 이차적인 의미에서 행복한 삶”(108)은 사실 행복한 삶이 아니게 되는 것인가? 관조적 삶이 실천적 삶을 행복의 지위에서 밀어내면서 둘은 충돌하고 두 가지 행복은 배타적이게 되는 것인가? 하지만 사실 둘은 인간에 대한 넓은 이해에 기초했을 때 충돌하기보다는 보완적이다. 물론 위계는 있고, 관조적 삶이 가장 완전하므로 가장 좋은 것이다. 그러나 인간 영혼은 지성 그 자체가 아니라 다른 부분들을 모두 포함한다. 그러므로 그 위계 아래 실천적 삶이 존재할지 언정 그것을 배제하거나 무시할 수는 없다. 인간은 자신 안에 가장 좋은 것으로 자신을 끊임없이 스스로 규정하면서 그에 따른 활동을 추구하고자 노력해야겠지만, 어쨌든 인간은 몸과 감정을 가지고 타인과 함께 산다. 그런 인간의 조건 속에서 정치와 전쟁은 필연적이고, 따라서 정의로운 행위와 용감한 행위가 없다면 여가도 없고 관조도 없다. 인간의 완전한 행복은 관조적 삶이겠지만, 인간이 인간인 한 행복을 완전히 누리기 위해서는 실천적 삶과 관조적 삶이 함께 요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