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쿠로스 도덕론의 공리주의적 해석에 대한 Rosenbaum(1996)의 반대 검토
본고의 목적은 에피쿠로스 도덕론의 공리주의적 해석을 반대한 Rosenbaum(1996)의 논변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그것의 설득력을 평가하는 것이다. 필자는 Rosenbaum의 논변이 공리주의적 해석자의 가능한 반론에 노출되어 위태로워질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겠지만, 적절한 보완을 통해 공리주의적 해석자의 반론에 대응함으로써 설득력이 제고될 여지가 있다는 점을 보일 것이다.
1. 공리주의적 해석의 유혹과 Rosenbaum의 반대 논변
에피쿠로스에게 있어 도덕적인(moral) 혹은 올바른(정의로운, just) 행위는 궁극 목적인 행복(eudaimonia, 좋은/잘 삶, well-being)을 구성하는 쾌락(hedone, pleasure)을 산출하는 행위인데 이는 주로 한 사회 내 사람들이 같이 잘 살 수 있도록 사회적 관계를 조성하는 제도적 규칙을 따르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Rosenbaum에 따르면, 이러한 에피쿠로스 도덕론의 쾌락주의적 성격이 현대 공리주의자들로 하여금 그것을 단순한 형태의 초기 행위 공리주의나 규칙 공리주의로 해석하도록 만들 우려가 있다. 특히 『메노이케오스에게 쓴 편지』에서 에피쿠로스가 산출될 쾌락을 벤담식으로 계산하는 것으로 보이는 대목은 에피쿠로스 도덕론을 올바른 행위는 쾌락을 최대화하는 행위로 보는 행위 공리주의로 해석하도록 부추긴다. 한편, 『주요한 견해들』에서 에피쿠로스가 사회 구성원들의 쾌락 성취에 유용한 원칙들을 따르는 행위가 올바른 행위라고 주장하는 대목은 에피쿠로스 도덕론을 올바른 행위는 쾌락을 최대화하는 규칙을 따르는 행위로 보는 규칙 공리주의로 해석하도록 동기부여한다.
하지만 Rosenbaum은 에피쿠로스 도덕론이 둘 중 어느 식으로든 공리주의적으로 해석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가 제공하는 근거는 두 가지이다. (형식적으로 그는 세 가지 꼭지에서 근거를 제공하지만, 필자가 보기에 실질적으로 그가 제공하는 근거는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 에피쿠로스가 말하는 쾌락은 감각적 쾌락 따위와 달리 양적으로 평가되고 합산되어 최대화할 수 있는 쾌락이 아니기 때문이다. 에피쿠로스적 쾌락은 “정적” 쾌락(“katastematic” hedone), 즉 심리적 고통(근심)의 부재인 아타락시아(ataraxia, 평정)와 신체적 고통의 부재인 아포니아(aponia, 평안)이다. 이렇듯 쾌락을 고통의 부재로 정의한 에피쿠로스에게는 공리주의적 쾌락이 상정하고 있는 쾌락과 고통 사이의 상태란 없다. 또한 당연히 이런 식의 쾌락으로 구성되는 에피쿠로스적 행복은 공리주의에서처럼 증대될 수도 없다. 둘째, 에피쿠로스적 쾌락으로 구성되는 행복, 즉 좋은 삶은 올바른 행위로만 달성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올바른 행위가 쾌락을 산출하는 개별적 행위이건 쾌락을 산출하는 규칙을 따르는 행위이건 간에 좋은 삶을 살기 위해서는 올바른 행위를 할 뿐만 아니라 올바름의 덕을 지닌 올바른 행위자여야 한다. 나아가 행위자가 올바름의 덕을 가지는 것만으로도 좋은 삶을 살기에 부족하다. 그는 실천적 지혜(phronesis, practical wisdom)와 같은 다른 덕 또한 가져야 하며, 마땅한 종류의 욕망, 즉 필연적이고 자연적인 욕망과 함께 살아야 좋은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정리하자면, Rosenbaum은 에피쿠로스적 쾌락이 공리주의적 쾌락과 달리 최대화될 수 없으며, 에피쿠로스적 쾌락으로 구성되는 행복이 공리주의에서와 달리 비단 올바른 행위를 통해서만으로는 달성될 수 없다는 점에서 에피쿠로스 도덕론의 공리주의적 해석을 거부한다.
2. Rosenbaum의 반대 논변 비판과 보완
필자는 먼저 Rosenbaum이 제시한 근거들을 그가 제시한 역순으로 비판적으로 검토하여 그의 논변이 어떻게 위태로워질 수 있는지 드러내보이고자 한다. 우선, 공리주의적 해석자는 행복이 올바른 행위를 통해서만으로 달성될 수 없다는 기존의 비판이 무의미하다고 주장할 수 있다. 올바른 행위든, 그것이 의거하는 규칙이든, 그것을 동기부여하는 올바름이라는 덕이든, 그것에 관련된 다른 덕이든 간에 어차피 실천적 지혜가 쾌락의 성취를 위해 도입한 수단이라면, 실천적 지혜를 가진 에피쿠로스적 유덕자가 행위 공리주의자나 규칙 공리주의자로 딱 맞아떨어지지는 않더라도 가장 안정적인 방식으로 쾌락을 산출할 줄 아는 세련된 공리주의자이자 공리주의적 입법자로 보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이는 유덕한 행위가 그 자체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자체목적적으로 올바른 활동이자 행복의 완성적 계기로 고려되는 아리스토텔레스 덕윤리가 마주하지 않을 문제이다. 아리스토텔레스적 덕윤리가 공리주의로 환원되지 않는 것은 행위로 환원되지 않는 덕이 행복의 성취에 결정적임을 강조해서가 아니라, 덕스러운 행위 자체가 목적이지 쾌락 산출을 위한 수단이 아니기 때문이다. 도덕적 명령이 정언명령이 아니라 쾌락 산출을 위한 가언명령이라면 이또한 칸트적 의무론이라기보다는 규칙 공리주의의 일종으로 환원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쾌락의 양적 평가와 합산이 불가하더라도 고통의 양적 평가와 합산은 가능하기에 공리주의적 해석자는 에피쿠로스 도덕론을 불완전한 공리주의로 이해할 수 있다. 에피쿠로스의 쾌락은 심리적 고통과 신체적 고통의 부재로 정의된다. 이미 부재하는 것은 더 부재할 수 없다는 점에서 양적 평가와 합산이 무의미하다. 그러나 우리는 근심이 많은 사람과 적은 사람, 신체적 고통에 극심하게 시달리는 사람과 별로 시달리지 않는 사람을 구별하고 우리 자신이 후자가 되기를 바라곤 한다. 이는 충분히 심리적 고통과 신체적 고통의 양적 평가와 합산이 가능하고 나아가 그것들의 ‘최소화’ 역시 가능하다는 말과 다름 아니다. 그렇다 해도 쾌락의 최대화가 가능하다는 말은 여전히 아니다. 하지만 이제 쾌락에 ‘최대한’ 가까이 가고자 하는 메커니즘이 성립하고, 그것의 양적 판단 기준이 마련되었다. 이까지 오면, 공리주의적 해석자는 에피쿠로스 도덕론을 ‘끝’이 막힌 공리주의로 이해할 수 있다. 수학적으로 비유하자면, 한쪽은 무한히 음수로 발산하지만 다른 한쪽은 0에서 중단되는 반직선인 것이다. 현대 공리주의자의 입장에서 이는 불완전한 부분적 공리주의이다. 현대 공리주의가 되기 위해 보완해야 할 점은 막힌 ‘끝’을 뚫는 것 뿐이다. 수학적으로 다시 비유하자면, 앞서 0에서 중단된 반직선을 무한히 양수로 발산하는 직선으로 만드는 것이다.
여기서 막힌 ‘끝’을 뚫는 것이 왜 불가능한지, 쾌락의 증대 가능성이 어떻게 에피쿠로스 도덕론의 본질을 파괴하는지를 Rosenbaum이 설명할 수 있을 때 그의 논변이 공리주의적 해석자의 반론을 방어하고 설득력을 제고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필자는 이제 Rosenbaum의 다른 논의를 토대로 그를 대신하여 그의 논변을 보완해보고자 한다. 에피쿠로스에게 있어 정적 쾌락이 ‘궁극적으로’ 추구할 만한 그리고 ‘벗어나지 않을 만한’ 바람직한 상태라는 인식은 어디서 비롯되는가? 에피쿠로스에 따르면 우리는 왜 평정과 평안에 ‘머물러야’ 하는가? 에피쿠로스가 쾌락주의자이면서도 자연적이고 필연적인 욕망의 충족만을 강조하며 그렇지 않은 욕망을 차단하는 금욕주의로 나아간 데에서 그 이유를 추정해볼 수 있다. 욕망이 다양할수록 충족시켜야 할 결핍과 결핍을 해소하기 위한 수단이 다양해지고, 욕망이 클수록 충족시켜야 할 결핍도 마찬가지로 커진다. 그리고 결핍에는 고통이 따른다. 예컨대, 걸어다니는 데에 아무런 불편함이 없던 사람이 차를 사고자 하며 차가 없음에 결핍을 느낀다면, 그때부터 차를 어떻게 살지 고민해야 하고 차를 살 돈을 마련하기 위해 수고해야 한다. 그 차가 비싼 차일수록 고민은 깊어지고 수고는 늘 것이다. 고민과 수고의 과정에서 근심, 걱정, 불안, 수면의 줄어듦으로 인한 고통, 노동의 늘어낢으로 인한 고통이 비롯될 것은 자명하다.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쾌락의 최대화는 에피쿠로스적 관점에서 결핍 가능성의 최대화를 수반한다. 충족 이면의 결핍과 고통을 감지한 에피쿠로스는 결핍과 고통의 가능성을 극소화하기에 충족의 극소화를 요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정점에 평안과 평정이 존재하기에 정적 쾌락이 궁극적 도달 지점으로 성립한다. 결국 공리주의의 쾌락의 최대화 요구는 에피쿠로스에게는 최소화하고자 했던 고통의 최대화 위협과 같다. 기본적인 욕구도 충족되지 못한 상태도 고통스럽지만, 크고 다양한 욕구들을 충족되지 못한 상태, 충족되었더라도 더 크고 다양한 욕구들을 갈구하며 결핍감을 느끼는 상태 또한 고통스럽다. Rosenbaum의 논변 보완을 통해 이러한 해석에 이르게 되면, 에피쿠로스 도덕론은 더 이상 불완전한 공리주의로 해석될 수 없음 넘어 공리주의 자체를 비판하는 이론으로 성립하게 된다. 당연히 에피쿠로스주의자는 쾌락주의자는 맞지만 세련된 공리주의자나 공리주의적 입법자로도 해석되지도 않을 것임이 분명하기도 하다.
'철학 > 고대철학 이차문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창우(2016), 「스토아 철학」, 『서양고대철학2』 (0) | 2023.04.03 |
---|---|
오유석(2016), 「에피쿠로스주의: 치유로서의 철학」, 『서양고대철학2』 (0) | 2023.03.20 |
Rosenbaum(1996), "Epicurean Moral Theory", History of Philosophy Quarterly (2) | 2023.03.18 |
『니코마코스 윤리학』 "우리가 할 수 있는 데까지 우리들이 불사불멸의 존재가 되도록"(1177b34)에 관한 짧은 글 (6) | 2023.02.21 |
『파이돈』 "올바른 주화는 오직 현명함 뿐"(69a)에 관한 짧은 글 (2) | 2023.02.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