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고대철학 일차문헌

아리스토텔레스, 「제10권」 6장, 『니코마코스 윤리학』

현담 2023. 2. 7. 14:37

<10권 목차>

 

1장 즐거움

2장 즐거움에 관한 통념들

3장 즐거움에 관한 통념들의 검토

4장 활동으로서의 즐거움

5장 즐거움의 종류

6장 행복 : 지금까지 논의의 요약

7장 관조적 활동으로서의 행복

8장 정의된 행복과 통념의 부합

9장 윤리학, 입법, 정치체제

 

6장 행복 : 지금까지 논의의 요약 (1175a34-1177a11)

 

행복을 인간적인 것의 목적이라고 규정했으므로, 이제 남은 것은 행복에 관해 개략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다. 앞서 논의된 것을 다시 요약해 보면 논의가 보다 간결해질 것이다.”(1176a30-33)

 

1. 행복은 그 자체로 선택되는 활동이다. (1175a34-1176b7)

 

1. 행복이 품성상태라면, 평생 잠만 자면서 식물 같은 삶을 사는 사람도, 크나큰 비운을 겪고 있는 사람도 행복하다.

2. 식물 같은 삶을 사는 사람이나 크나큰 비운을 겪고 있는 사람은 행복하지 않다.

3. 따라서, 행복은 품성상태가 아니다.

 

1. 행복은 품성상태이거나 활동이다.

2. 행복은 품성상태가 아니다.

3. 그러므로, 행복은 활동이다.

4. 행복은 그 어떤 것도 부족한 것이 없고 자족적이다.

5. 그 어떤 것도 부족한 것이 없고 자족적인 것은 그 자체로서 선택된다.

6. 따라서, 행복은 활동이고 그 자체로서 선택된다(그 자체로서 선택되는 활동이다).

 

탁월성에 따르는 행위/고귀하고 신실한 것들을 행하는 것은 그 자체로서 선택할 만한 것들 중 하나이다.

 

2. 행복은 즐거운 놀이인가? (1) (1176b8-27)

 

그런데 즐거운 놀이 또한 그 자체로서 선택할 만한 것들 중 하나로 보인다. [...] 우리가 그것으로부터 도움을 받기보다는 오히려 몸과 재산을 소홀히 함으로써 손해를 보게 되니 말이다.”(1176b8-12)

 

(Q : 행복은 그 자체로서 선택되는 활동이다. 즐거운 놀이도 그 자체로서 선택되는 활동들 중 하나이다. 그렇다면 즐거운 놀이들은 행복의 특성”(행복은 즐거운 놀이)일까?)

 

Pros. 행복은 즐거운 놀이이다. 왜냐하면, 행복하다고 불리는 사람들(참주들) 대부분이 즐거운 놀이에 빠져들어 여가를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Cons.(Ar.) 열등한 사람(참주들)에게나 행복은 즐거운 놀이로 보일 뿐이다.

 

1. 각자에게는 그의 고유한 품성상태에 따르는 활동이 가장 선택할 만한 것이다(으로 보인다).

(2. 열등한 사람에게는 열등한 품성상태에 따르는 활동이 가장 선택할 만한 것으로 보인다.)

3. 신실한 사람에게는 탁월성에 따르는 활동이 가장 선택할 만한 것으로 보인다.

 

1. 영예로운 것이나 즐거운 것(가장 선택할 만한 것으로 보이는 것)도 신실한(훌륭한) 사람에게 그런 것이 실제로 그런 것(실제로 가장 선택할 만한 것)이다.

(2. 즐거운 놀이는 신실한 사람에게 영예롭거나 즐겁지 않다.)

(3. 탁월성과 지성으로부터 유래하는 신실한 활동(탁월성에 따르는 활동)이 신실한 사람에게 영예롭고 즐겁다.)

4. 그러므로, 신실한 활동이 실제로 영예롭고 즐거운 것이며, 즐거운 놀이는 실제로 영예롭거나 즐거운 것이 아니다.

 

신실한 사람에게 가장 선택할 만한 것으로 보이는 것(행복으로 보이는 것)도 탁월성에 따르는 활동이고, 실제로 가장 선택할 만한 것(실제 행복)도 탁월성에 따르는 활동이다.

 

Q : <신실한 활동이 행복이다. 왜냐하면, 신실한 사람이 하니까.>와 같은 선결 오류의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가? (N) 어떤 사람이 신실하다는 판단은 어떻게 내릴 수 있고 그것은 어떻게 행복으로 연결되는가?

A : 신실한 사람의 판단 기준은 품성상태에 있고, 신실한 품성상태의 판단 기준은 신실한 품성상태에 따른 활동에 있다. 그렇다면, 신실한 품성상태에 따르는 활동인지 아닌지 구별하는 방법은? 1) 어떤 행위가 고귀한 행위이다. 2) 오랜 시간 동안 고귀한 행위를 반복한다. 3) 고귀한 행위를 즐거워 한다. , 고귀함의 객관성에 기대어 신실한 품성상태와 그에 따른 활동을 판단할 수 있음.

 

Q : 고귀한 행위나 고귀함이 무엇인가?

A : 탁월한 것이 탁월성이라는 인간 내적 요소로 설명된다면, 고귀한 것(고귀한 행위)은 고귀함으로 설명되어야 할텐데 그것은 인간 외적 요소여야 할 것. 잘은 모르겠음.

 

3. 행복한 삶은 진지한 삶이다. (1176b28-1177a2)

 

1. 행복은 우리 삶의 목적이다.

2. 우리의 삶의 목적이 고작 (즐거운) 놀이라는 것은 이상하다(거짓으로 보인다).

3. 따라서, 행복이 놀이라는 것은 이상하다(거짓으로 보인다).

 

2.에 대한 설명이 필요. 삶의 목적이 놀이라는 것이 왜 이상한가?

 

1. 우리는 삶의 목적을 위해서 삶 전체에 걸쳐 애쓰고 어려움을 감내한다.

2. 그러므로, 삶의 목적이 놀이라면, 우리는 놀이를 위해서 삶 전체에 걸쳐 애쓰고 어려움을 감내한다.

3. 우리가 놀이를 위해서 삶 전체에 걸쳐 애쓰고 어려움을 감내한다는 것은 한심하고 너무 어린아이 같은 짓으로 보인다(이상하다, 거짓으로 보인다).

4. 따라서, 삶의 목적이 (고작) (즐거운) 놀이라는 것은 이상하다.

 

3.에 대한 설명이 필요. 놀이를 위해 삶 전체에 걸쳐 애쓰고 어려움을 감내한다는 것이 왜 이상한가? - 왜냐하면, “아나르카시스가 말한 것처럼 오히려 진지한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놀이한다라는 것이 옳은 이야기로 보이기 때문이다. “놀이는 휴식과 같은 것이며, 사람은 연속적으로 일을 할 수 없기에 휴식을 필요로 하는 것이니까. 따라서 휴식은 목적이 아니다.”

 

1. 우리는 삶의 목적을 위해서 삶 전체에 걸쳐 애쓰고 어려움을 감내한다.

2. 그러므로, 삶의 목적이 놀이라면, 우리는 놀이를 위해서 삶 전체에 걸쳐 애쓰고 어려움을 감내한다.

3. 놀이는 휴식과 같은 것이다. , 놀이는 애쓰고 어려움을 감내하는 것에서 잠시 벗어나는 것이다.

4. 그러므로, 삶의 목적이 놀이라면, 우리가 놀이를 위해, 즉 애쓰고 어려움을 감내하는 것에서 잠시 벗어나기 위해 삶 전체에 걸쳐 애쓰고 어려움을 감내하는 것이다.

5. 우리는 어떤 것에서 잠시 벗어나기 위해 삶 전체에 걸쳐 어떤 것을 감내하지는 않는다.

6. 그러므로, 우리는 애쓰고 어려움을 감내하는 것에서 잠시 벗어나기 위해 삶 전체에 걸쳐 애쓰고 어려움을 감내하지 않는다.

7. 따라서 삶의 목적(행복)은 놀이가 아니다.

 

5.는 당위 명제(“우리는 어떤 것에서 잠시 벗어나기 위해 삶 전체에 걸쳐 어떤 것을 감내해서는 안 된다.”)이거나 5.에서 가리키는 우리가 신실한 사람이어야 5.를 참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음. 사실 명제라면 참주들의 사례는 반례가 되기 때문. 해당 명제는 도박/마약 중독자들에게 적용할 수 있어서 재밌음.

 

또 행복한 삶은 탁월성에 따르는 삶으로 보이는데, 이것은 진지함을 동반하는 삶이지, 놀이에서 성립하는 삶이 아니다.”(1177a2-3)

 

활동의 위계 : 우습고 놀이를 동반하는 것보다 진지한 것들이 나음. 진지한 것들 사이에서는 더 좋은 것의 활동(더 나은 부분의 활동 혹은 더 나은 사람의 활동)이 더 진지한 활동임. 더 좋은 것의 활동(더 나은 것의 활동)은 더 우월한 것이고 더 많은 행복의 성격을 가지고 있음. (1177a3-6)

 

우습고 놀이를 동반하는 것 < 진지한 것들 : 덜 좋은 것의 활동(덜 진지한 활동) < 더 좋은 것의 활동(더 진지한 활동)

 

(Q : 진지함이란 무엇인가? 탁월성에 따르는 삶은 왜 진지함을 동반하는 삶인가?)

A : 진지한 것이 좋은 것이므로, 진지함은 좋음에 대응할 듯. 그 좋음은 노예까지도 가장 훌륭한 사람에 못지 않게 향유할 수 있는 육체적 즐거움을 포함하지 않음. (앞서 육체적 즐거움은 놀이에 대응했었음(1176b20-22). 아래 인용에서 소일거리라는 점에서 둘은 묶일 수 있는 듯.) 따라서, 그 좋음은 순수하게 인간적인 좋음, 이성에 따른 좋음으로 보임. 탁월성에 따르는 삶은 이성에 따른 삶이므로 진지함을 동반함.

 

또 육체적 즐거움은 아무나, 심지어 노예까지도 가장 훌륭한 사람에 못지않게 향유할 수 있다. 그러나 노예가 [진정한] 삶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더라도 행복에 참여하고 있다고까지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행복은 이런 종류의 소일거리에서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앞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탁월성에 따른 활동 속에서 성립하기 때문이다.”(1177a7-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