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1. 왜 이 책의 제목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Also Sprach Zarathustra, Thus Spoke Zarathustra)”일까? 왜 하필 니체는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빌려 이야기하는가?
A. 차라투스트라는 조로아스터교의 창시자이다. '조로아스터교'라는 이름은 창시자인 차라투스트라에게서 유래한다. 차라투스트라의 본래 이름은 아베스타어(고대 페르시아어)로 '자라수슈트라(Zaraϑuštra)'인데, 이게 그리스에서 전사라는 뜻의 '조로아스트레스(Ζωροάστρης, Zōroastrēs)'가 되었고, 그것이 라틴어를 거쳐 영어로 '조로아스터(Zoroaster)'가 되었다. 조로아스터교(Zoroastrianism)는 ‘배화교(拜火敎)’나 ‘마즈다교(Mazdaism)’라고도 불리며, 창조신 아후라 마즈다를 중심으로 한 유일신 사상과 선악의 이분법을 핵심교리로 두고 있는 고대 페르시아의 종교다. 그 교리는 유대교의 형성, 더 나아가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의 형성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J 발제문 및 인터넷 참고)
*나는 조로아스터교 교리가 선의 신과 악의 신이 있는데 선의 신과 악의 신의 투쟁에서 선의 신의 편에 서서 선의 신을 돕는 게 인간의 과제라고 주장한다고 알고 있었다. (교수님) 마즈다가 창조신이고 그 자손으로 선의 신과 악의 신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J) 기독교에는 악한 신이 따로 있진 않지만 사탄은 있다. 기독교 신자들이 우리 마음 속에 사탄을 제거해야 한다고 하는데, 여기에는 조로아스터교적 성격이 있는 것이다. (교수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883-1885, 이하 『차라투스트라』)에서 니체는 차라투스트라 라는 인물의 입을 통해 말한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차라투스트라인가? 약 5년 후에 쓰인 『이 사람을 보라』(1888)의 후반부에서 니체가 직접 이 물음에 대답하고 있다.
“[…] 차라투스트라라는 이름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라고 사람들은 당연히 내게 물었어야 했다. 그러나 아무도 물은 적이 없었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저 페르시아인을 역사상 유일무이한 존재로 만드는 것은 정녕, 비도덕주의자인 내가 말하려고 하는 것과 정반대의 것이기 때문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선과 악의 투쟁을 모든 사물의 운행을 가능하게 하는 근본적인 바퀴로 본 최초의 인간이었다. 도덕을 힘, 원인, 목적 자체와 같은 형이상학적인 것으로 번역한 것이 차라투스트라의 업적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물음이 근본적으로 이미 답이 된다. 차라투스트라는 가장 치명적인 오류인 도덕을 창조했다. 따라서 그는 이러한 오류를 인식하는 점에서도 최초의 인물임에 틀림없다. 그는 이 도덕의 문제에 대해 그 어떤 사상가보다 더 오래 그리고 더 많은 경험을 쌓았다. 역사 전체가 사실상 이른바 ‘도덕적 세계질서’라는 명제에 대한 실험적인 반박인 것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차라투스트라는 다른 어떤 사상가보다도 진실하다는 것이다. 그의 가르침은, 그리고 오직 그의 가르침만이 진실(Wahrhaftigkeit)을, 즉 현실에서 도망치는 이상주의 자의 특성인 비겁(Feigkeit)과 정반대되는 것을 최고의 덕으로 삼고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모든 사상가의 용기를 다 모아놓은 것보다도 더 많은 용기를 갖고 있다. 진리를 말하고, 화살을 잘 쏜다는 것, 그것이 페르시아의 덕이다. 내가 말하는 것을 아는가? … 진실성에서 비롯되는 도덕의 자기 초극, 도덕주의자가 자신과 정반대되는 것으로 ― 즉 나에게로 ― 자신을 초극하는 것, 이것이 내 입에서 나온 차라투스트라라는 이름이 의미하는 것이다.”
니체에 따르면, “차라투스트라는 가장 치명적인 오류인 도덕을 창조했다. 따라서 그는 이러한 오류를 인식하는 점에서도 최초의 인물임에 틀림없다.” 이는 무슨 뜻인가?
차라투스트라는 최초로 도덕-형이상학을 창조한 인물이다. 그런데 도덕-형이상학은 오류이며 기껏해야 신성한 거짓말에 불과하다. 따라서 적어도 그것을 창조한 인물 그 자신은 도덕-형이상학적 세계관이 거짓으로 창조되는 것임을 간파하고 있는 인물일 수밖에 없다.
Q1-1. 도덕-형이상학이란 용어를 니체가 쓰는가? (교수님)
A. 아니다. 전통적 철학을 일컫기 위해 스스로 명명한 용어이다. 니체의 용어로는 플라톤주의나 그리스도교가 있다. 니체는 전통적인 도덕이 피안을 창조하는 형이상학적인 것으로 본다. 그런데 니체에 따르면, 철학은 도덕이라는 마녀에 사로잡혀있었다. 그러므로, 전통적 철학은 곧 도덕-형이상학이다. (J)
그러나 도덕-형이상학은 그것이 본래 거짓으로 날조·창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진실성의 덕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도덕-형이상학은 진실한 신앙 없이는 신봉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실성의 요구가 점점 더 자라나서 거대해지면, 도덕이라는 오류의 창조자, 거짓말쟁이인 차라투스트라 그 자신도 진실성의 요구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게 된다. 그래서 차라투스트라는 끝내 그 진실성의 요구에 의해 오히려 가장 진실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서 자신이 창조해낸 거짓, 즉 도덕-형이상학적 세계관을 다시 거두어들일 수 있다. 요컨대 오류로부터 창조된 도덕은 그것이 요구하는 진실성의 덕을 통해서 오히려 도덕을 극복할 수 있는 자기극복의 계기를 처음부터 자체 안에 가지고 있는 셈이다. 도덕의 자기극복. 최초의 도덕주의자 차라투스트라가 니체에 의해서 비도덕주의자로 다시 태어나 니체의 대변자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러한 경위에서다. 니체의 대변자로서의 차라투스트라는 도덕을 극복한 자이며 그럼으로써 동시에 자기 자신을 극복한 자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Q1-2. 비도덕주의자는 무슨 뜻인가? (S)
A. 선과 악의 이분법을 넘어서는 자를 뜻한다. (J) 어떤 의미에서 선과 악을 나누지 않는가? 니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니체가 모든 종류의 도덕을 폐기하려고 하는 걸로 오해를 할 수 있다. 니체가 세상을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싶어하는구나,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착취하는 약육강식의 세상을 정당화하는구나. 특히 막스주의자들이 그렇게 니체를 해석하곤 한다. 게오르그 루카치라는 헝가리 출신 막스주의자는 『이성의 파괴』라는 책에서 니체를 자본주의적 착취를 정당화하는 사상가로 분석한다. 그런 식의 해석에 뒷받침되는 문장들을 니체에서 찾자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긴 하다. 여기도 마찬가지이다.
니체가 모든 도덕을 부정하는 건 아니다. 니체는 도덕을 군주(주인)도덕과 노예(군축, 무리)도덕으로 나눈다. 니체가 비판하는 도덕은 노예도덕이다. 노예도덕은 선악이원론에 서있다. 노예도덕에서 선이라는 것은 자기희생, 약한 자/불쌍한 자/고통을 받는 자를 동정하고 그들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이다. 우리가 흔하게 생각하는 선이다. 힘든 사람들 도와주는 등의 일을 우리는 선행이라고 한다. 한편, 주인도덕은 선과 악이 기준이 아니라, 탁월한 인간과 열등한 인간을 기준으로 삼는다. 나폴레옹, 시저는 어떤가. 노예도덕의 관점에서 보면 선한 사람이 아니다. 전쟁을 막아도 시원찮을 판에 전쟁 일으키고. 수많은 사람들 죽인 악한 사람이다. 천국과 지옥이 있다면 지옥으로 빠질 인간들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나폴레옹을 위인으로 보기도 한다. 위인전에 실린다. 민주주의 입장, 사회주의 입장, 무정부주의 입장에서 평등, 민중들의 편의와 안락을 중시한다면, 나폴레옹이나 시저는 위인적 목록에서 빼야 된다. 그런데 현실은 또 그렇지가 않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한편으로는 선한 인간이 되라고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나폴레옹 같은 위인이 되라고 함. 모순된 거 아닌가. 두 가지 도덕이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것이다. 노예도덕과 군주도덕. 이 두 개가 같이 사회를 지배하는 것이다.
군주도덕의 이상적 인간은 선량한 인간이나 한없이 잘해주는 인간이 아니다. 하지만 이런 사람도 필요하다.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 큰 불만 없고 저항이 없는 사람. 그런데 너무 선하고 이런 사람은 호구가 되기 쉽다. 현실에서 호구가 되곤 하는 이런 사람들이 행복하게 잘 사는 천국을 떠올리기도 한다. 하지만 니체가 보기에는 말도 안 되는 공상인 것이다.
니체가 생각하는 이상적 인간상이 그렇다고 폭군은 아니다. 나폴레옹이나 시저는 적에 대해 관용을 베풀 줄 아는 사람들이고, 자기보다 강하면 존경하는 사람들이다. 강한 인간, 탁월한 인간은 자기에 대한 강한 긍지를 가지고 있고, 상황에 잘 대처하는 여우 같은 지혜를 가지고 있으며, 집단에 대한 강한 책임의식도 갖춘 사람이다. 이들은 부하들의 존경, 나아가 외경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러기 위해서는 강해야 한다. 어지간한 고난이나 고통은 우습게 넘기는 사람이다. 조금만 고통스러워도 징징거리는 사람은 존경할 수가 없다. 나폴레옹은 장교 시절 항상 앞에서 싸웠다고 한다. 그래서 부하가 존경하는 것이고 이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쳐도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또한 이들은 남을 전혀 돕지 않는 것도 아니다. 돕더라도 스스로 일어날 수 있도록, 강한 인간이 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돈 몇 푼 던져준다거나 이래서는 안 된다.
비도덕주의자는 결국, 주인도덕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도덕주의, 즉 노예도덕은 인간을 연약하게 만든다. 이들에게는 투쟁, 갈등, 고통은 악이다. 니체는 물론 모든 종류의 악을 다 긍정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고통이 인간을 더 성숙하게 만들기도 한다. 온실 속에서 산 식물들은 조금만 바람불어도 휘어져버린다. 이 세상에 갈등과 투쟁이 없으면 어떻게 되는가. 생기와 활기가 없고 권태로워진다. 기존의 사회주의국가를 보라. 일 열심히 해도 열심히 안한 사람과 돈을 똑같이 받는다. 사람이 활력을 발휘하려하겠나. 고통과 갈등이 사라진 세상을 원하는 사람은 연약한 사람이고, 비겁한 인간이다. 이들은 고통과 갈등이 사라진 환상에 의지한다. (교수님)
★비도덕주의와 군주도덕
: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라는 이름에 자기 자신을 극복한 비도덕주의자라는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이때 ‘비도덕주의’는 무슨 뜻인가? 그것은 일차적으로 ‘선악의 저편’에 서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선악의 저편’에 서있다는 것은 또 무슨 뜻인가? 그것은 도덕의 폐기를 의미하는가? 종종 그런 오해가 있다. (이와 관련하여 게오르크 루카치는 니체의 철학이 제국주의와 자본주 의의 착취를 정당화하는 철학이라고 비난한 바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우리는 ‘선악의 저편’ 이라는 표어만을 가지고 니체가 도덕의 폐기를 주장했다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이와 관련해서 니체의 말을 직접 살펴보는 것이 좋겠다. 전통적인 도덕 일반에 대한 본격적인 전쟁을 선포하는 『아침놀』(1881)의 103절에서 니체는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나는 비(非)윤리도 부정한다. 무수한 사람들이 자신을 비윤리적이라고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느껴야 하는 근거가 진리에 있다는 사실을 부정한다. 내가 바보가 아니라면 내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명하다. 비윤리적이라고 불리는 많은 행위들을 피해야 하고 극복해야 하며, 윤리적이라고 불리는 많은 행위들은 행해야 하고 장려해야 한다. 그러나 나는 전자도 후자도 이제까지와는 다른 근거들에 의해 행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다르게 배워야만 한다. 아마 상당히 오랜 시간이 지난 후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마침내 더 많은 것에 도달하기 위해, 즉 다르게 느끼기 위해.”
니체의 이 말은 마지막까지 유효하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니체는 전통적인 도덕들 전체를 뭉뚱그려 비판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도덕 일반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니체는 도덕을 “다르게 배워야만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정리해도 좋다면, 니체는 비도덕주의자(immoralist)이지만 적어도 반도덕주의자(amoralist)는 아니다. 니체는 전통적인 도덕을 비판하면서 언제나 동시에 새로운 도덕의 가능성을 발굴하고 또 시도하려고 한다. 그렇다면 니체가 강조하고자 하는 새로운 도덕은 어떠한 도덕인가? 그것은 ‘선악의 저편’에 있는 새로운 도덕이다. … 선과 악을 떠나서 도덕적일 수 있다고? 이것은 모순이 아닌가?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선악의 저편’은 적어도 ‘좋음[탁월함]과 나쁨[저열함]의 저편’이라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도덕의 계보』) ‘선악의 저편’에 있는 새로운 도덕은 ‘선(good, Gut)’과 ‘악(evil, Böse)’이라는 전통적인 가치기준에 따르는 노예도덕이 아니라 ‘좋음·탁월함(good, Gut)’과 ‘나쁨·저열함 (bad, Schlecht)’이라는 새로운 가치기준에 따르는 주인도덕(군주도덕, Herren-Moral)이다. ‘good, Gut’이라는 하나의 표현은 본질적인 차이를 갖는 상반된 두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노예도덕의 관점에서 ‘good, Gut’은 ‘선’을 뜻하지만, 주인도덕의 관점에서 ‘good, Gut’은 ‘좋음· 탁월함’을 뜻한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주인도덕은 노예상태로부터 벗어나 ‘주인(Herr)’으로 거듭나기를 촉구하는 도덕이다. 그리고 ‘주인’은 좋은·탁월한·우월한·훌륭한·고귀한 인간을 뜻한다. 그는 성자와 같은 유형이 아니어서 얼마든지 선한 인간이 아닐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악한 인간으로 나타나곤 한다. 그렇지만 그는 존경을 받는 훌륭한 위인이다. 왜냐하면 그는 선과 악에 구애 받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들을 자유롭게 활용하면서 위대한 과업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 수 있는 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주인’의 대표적인 예시로 나폴레옹을 지목할 수 있다. 니체의 표현에 따르면, 나폴레옹은 “비인간(Unmensch)과 초인(위버멘쉬,Übermemsch)의 종합”(『도덕의 계보』)이다. 그는 결코 선하고 유순하지 않다는 점에서 비인간적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위버멘쉬에 가까워지고 있는 인간, 선과 악의 저편에 있는 탁월한 인간이기도 했다.
Q1-2-1. 비인간이 무슨 뜻인가? (S)
A. 비인간적인 행위를 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나폴레옹은 전쟁 일으키고 수많은 자국민 타국민을 죽였다. 그런 의미의 ‘비인간’은 아무나 될 수 없다. 역사상 위인, 영웅들은 그런 의미의 ‘비인간’이다. 이런 사람들은 우리에게 초인이라는 의미에서는 존경심, 비안간이라는 의미에서는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한마디로, ‘외경심’을 불러일으킨다. (교수님)
Q1-2-2. 비인간이기 때문에 나폴레옹은 순수한 초인이 아닌 것인가? (J2)
A. 니체는 완벽한 초인은 나타나지 않았다고 하지만, 초인에 가까운 사람들을 이야기한다. 예컨대 시저, 나폴레옹, 괴테. 괴테도 삶의 불행과 고통을 겪었지만 자신의 삶과 세계 전체를 긍정하고 포용했다는 점에서 초인에 가깝다고 말한다. 괴테는 일반적인 도덕적 기준으로 보자면 문제가 많다. 그는 부인한테 충실하지 않았고 가는 도시마다 여자를 두는 바람둥이였다. 여하튼 비인간적이라고 해서 초인이 될 수 없는 조건으로 보지는 않는 것이다. 또한 비인간적이라하더라도 나폴레옹이나 시저는 적에 대해 관용을 베풀 때는 또 베푸는 사람이었다. 패자에 대해 관용을 베풀줄 아는 사람으로 본 것이다. 그러나 상식적인 입장에서의 도덕적 행위나 부도덕한 행위를 대단찮은 것으로 보았다. (교수님)
주인도덕이 추구하는 탁월한 인간은 강한 긍지를 가지고 있는 인간, 외경심을 받는 인간, 책임질 줄 아는 인간, 강인한 인간, 솔선수범하는 인간, 존경받는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인간은 “현실에서 도망치는 이상주의자”와 정반대되는 인간유형이다.
우리는 우리들 사이에서 나폴레옹에 대한 이중적인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나폴레옹은 정복전쟁을 일으키고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갔던 악인으로 평가되기도 하지만, 그는 그러면서도 동시에 일반적인 인간의 수준을 뛰어넘은 존경스러운 위인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사람들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하고 유순하고 자기 희생적인 인간이 되기를 권고하는 사회라면, 아마도 나폴레옹을 위인전에서 제거하는 것이 옳은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나폴레옹을 위인으로 여기기를 그치지 않는다. 나폴레옹에 대한 이중적인 평가는, 우리의 정신 속에 여전히 주인도덕이 혼재해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우리의 민주주의적 시대에서는 더 이상 주인과 노예, 귀족과 천민이라는 구분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질 수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주인과 노예, 귀족과 천민의 혼합유형으로서 존재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의 정신 속에 있는 노예근성과 천민근성을 반성하고, 주인정신과 고귀한 귀족정신을 이끌어낼 수 있다. 우리의 민주주의가 인간의 천민화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 바로 이것이 니체가 말하는 주인도덕이 우리에게도 여전히 중요한 이유다. (J 프로토콜)
니체는 민주주의를 부정, 엘리트주의 정체를 표방했던 철학자이다. 그가 추구했던 정치체제의 기본적인 구조는 플라톤의 철인정치와 유사하다: 귀족주의의 프레임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혈통이 아닌 능력을 기반으로- 보다 정확히는 용기, 긍지, 책임감, 지혜 따위로 정의되는 ‘귀족적 정신‘을 갖춘 이들에게만-정치적 권력이 주어지며 정치 참여에 요구되는 이러한 자질들의 수준에 따라 인간의 고귀함/비천함이 규정된다고 보는 ‘정신적 귀족주의‘이다. 니체 연구자 브란데스(Georg Brandes)는 이를 귀족적 급진주의(aristocrical radicalism)라고도 명명한 바 있다. 니체의 이러한 주장을 해석함에 있어서 그것의 능력 중심적/반-혈통주의적 성격에 초점을 맞추어 니체 철학을 (단순히 반-민주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보완하는, ‘참된 민주주의’를 뒷받침하는 철학으로 해석하여 생산적으로 수용하고자 하는 움직임도 존재한다: 니체의 ‘귀족적 정신‘ 개념을 차용하여 민주주의가 다중에 대한 선동의 정치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서는 시민들의 평균적 수준이 높아져야, 즉 상술한 것과 같은 덕들이 도모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N 프로토콜)
Q1-3. 기독교는 왜 진실성(정직)을 강조하는가? (교수님)
A. 신이 우리 내면의 악을 다 꿰뚫어보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기독교에 ‘간음하지 말라’라는 규율은 단순히 바람피우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마음 속에서조차도 다른 여자를 생각하지 마라는 이야기다. 다른 여자가 끌리면 이미 간음의 죄를 범하는 것이다. 조로아스터교도 이와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에 대해 진실되어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으로 보인다. 신이 꿰뚫어보고 있으니까. 그래서 항상 악을 자각하고 없애려고 노력해야 한다. 위선이나 거짓변명하려고 하지마라. 참회하고 회개하라. 항상 진실된 인간으로 덕을 추구하라.
그런데 진실성을 추구하다보면, 이원론적 종교를 부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자연과학이 발달하면서, 정직한 사람이라면 도저히 인격신이 존재한다는 말을 받아들일 수 없다. 이 지상의 선과 악이 완전히 다 해소되고 선한 것만이 지배하는 세상이 올거라든가 그런 이야기들을 다 부정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사는 이 세계밖에 없다. 천국이니 공산주의니 다 허구다. 그걸 인정할 수밖에 없다.
니체에게서도 제일 중요한 덕 중 하나가 진실성이다. 허구가 위로를 줘도 그걸 거부해라. 그러나 우리는 실질적으로 허구의 도움으로 삶을 버틸 때가 많다. 연애할 때도 상대방에 대한 환상을 많이 가지지 않는가. (교수님)
덧붙이자면, 루터교 목사 집안에서 태어나 남다른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소년 니체가 끝내 그리스도교를 극복하고 스스로 안티크리스트를 자처하게 된 것에도 그리스도교로부터 물려받은 진실성의 덕이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니체는 도덕의 오류를 간파하고 비도덕적인 현실세계의 삶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는 것만이 진정한 진실성이자 용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실성의 덕에 대한 니체의 강조는 도덕에 대한 내재적 비판이기도 하겠다. (J 발제문)
Q2. 왜 이 책의 부제는 “모두를 위한 책 그러면서도 아무도 위하지 않은 책(Ein Buch für Alle und Keinen)”일까?
A. 『이 사람을 보라』의 서문에서 니체는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여기서[『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행해지고 있는 것은 ‘설교’가 아니다. 여기서는 신앙이 요구되고 있지 않다. 무한히 충만한 빛과 무한히 깊은 행복으로부터 한 방울 한 방울, 한 마디 한 마디가 떨어진다. 그 말은 부드럽고 느린 템포를 갖는다. 그 말은 극히 엄선된 자들에게만 들린다. 그 말을 듣는 자가 된다는 것은 비할 바가 없는 특권이다. 차라투스트라의 말을 들을 수 있는 귀는 아무나 갖고 있지 않다.”
이러한 니체의 말을 고려한다면, ‘모두를 위한 책 그러면서도 아무도 위하지 않은 책’이라는 부제는 ‘오직 차라투스트라-니체의 말을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진 자들을 위한 책’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차라투스트라-니체의 말은 오직 그의 말에 걸맞은 기질유형과 정신을 가진 자들만을 염두에 두고 있다. 차라투스트라-니체는 청중과 독자들을 선별하며, 그런 점에서 『차라투스트라』는 ‘모두를 위한 책 그러면서도 아무도 위하지 않은 책’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모두를 위한 책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아무도 위하지 않은 책도 아닌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선별된 독자들을 위한 책이다. (J 발제문) 이러한 해석에 따르면, ‘나의 말을 들을 수 있는 모두를 위한, 그러나 나의 말을 듣지 못하는 어떤 사람도 위하지 않은 책’이라고 부제를 이해할 수 있겠다. (사견)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초인이 될 소질을 다 타고나지만 어느 누구도 초인을 되기 위한 노력이 없이는 초인이 될 가능성이 없기에 이런 부제를 달았다고 해석할 수 있다. (교수님) 이러한 해석에 따르면, ‘모든 사람을 위한, 그러나 초인이 되고자 노력하지 않는 어던 사람도 위하지 않은 책’이라고 부제를 이해할 수 있겠다. (사견)
(수업 : 박찬국, <존재론연습> (20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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