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현대대륙철학 일차문헌

[니체] 「차라투스트라의 서설」 5-6절,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현담 2023. 4. 2. 16:37

차라투스트라의 서설5

 

저들은 그저 저렇게 웃고만 있구나. 저들은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구나. 나는 저런 자들의 귀를 위한 입이 아니다. // 눈으로 듣는 법을 배우도록 먼저 저들의 귀를 때려 부수어야 할까? 울리는 북이나 참회설교자들처럼 요란을 떨어야만 할까? 혹 저들은 더듬거리며 말하는 자들만을 믿는 것일까?’

"there they laugh: they do not understand me; I am not the mouth for these ears. // Must one first smash their ears, that they may learn to hear with their eyes? Must one clatter like kettledrums and preachers of repentance? Or do they only believe the stammerer?“

"da lachen sie: sie verstehen mich nicht, ich bin nicht der Mund für diese Ohren. // Muss man ihnen erst die Ohren zerschlagen, dass sie lernen, mit den Augen hören. Muss man rasseln gleich Pauken und Busspredigern? Oder glauben sie nur dem Stammelnden?”

: 차라투스트라는 군중 앞에서 말하지만, 군중이 묵묵히 서 있으면서 차라투스트라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웃고 있다. 이제 차라투스트라는 소통의 좌절을 겪고 소통의 방식에 대한 고민에 빠진다. 군중의 이해를 못 받아서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이 저런 자들의 귀를 위한 입이 아니라고 여기고 그들이 눈으로 듣는 법을 배우도록 먼저 저들의 귀를 때려 부수어야 하냐고 고민한다. 여기는 '눈으로 듣는 법'성서"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에 대한 비아냥이다. <마태복음>에서는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니체는 이 책을 제5의 복음서로 쓰고 성서를 자주 인용하고 그리스도교를 풍자한다. (E 발제문)

  말더듬이는 이원론을 광신적으로 신봉하는 사람, 신의 말씀이라고 황당한 얘기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방언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굳이 말더듬이라고 말하는 것 아닌가 싶다. (교수님)

 

*교양(education, Bildung) : 차라투스트라 보기에는, 군중은 자신이 갖춘 교양을 스스로 자랑스럽게 여기고 이 교양이 자신을 목자보다 뛰어난 사람으로 만든다고 여긴다. 그래서 차라투스트라는 일부러 그들에게 가장 경멸스러운 것을 말하고자 한다. 그것은 바로 인간말종이다. (E 발제문)

  니체 당시만 하더라도 상당히 교양 있다고 하는 사람들 많았다. 하지만 니체가 보기에 독일의 교양은 껍데기일 뿐 내실에 없었다. 그들은 많은 책을 읽었지만 교양을 체화하지 않았기에 그들의 교양은 실제 삶에서 행위로 나타나지 않는 교양이었다. 우리 현대인들도 마찬가지다. 옛날 사람들에 비해 교양을 많이 쌓았다고 하지만 훌륭한 인품을 가진 사람들이 더 많은가? 결코 그렇지 않다.

  군중은 교양있다고 자부하면서 스스로를 차라투스트라보다도 잘 났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차라투스트라는 군중의 자부심을 겨냥하여 자기를 경멸하라는 식의 말을 하고자 한다. ‘말세인처럼 되지 말아야지하는 생각을 품게 만들고자 한다. (교수님)

 

*인간말종(말세인, the last man, der letzte Mensch) : 초인(Übermensch)의 대립자이자 노예병든 자와 동의어이다. 인간말종은 현재에 만족하고 머물며 온갖 자명성들에 복종하는 노예정신의 소유자이며 극복되어야 할 인간의 모습이다. (E 발제문) 자기극복을 포기한 인간, 자기자신의 현재 상태에 만족해 있는 인간을 가리킨다. (교수님) 백승영의 인간말종은 탁월한 번역이다. 황문수의 최후의 인간은 오히려 진화의 정점에 있는 인간이라는 긍정적인 인상을 주며, 박찬국의 말세인말세가 가지는 부정적 뉘앙스 덕분에 부정적인 인상을 주지만 차라투스트라가 원하는 경멸적인 뉘앙스를 충분히 가지지는 못한다. (사견)

 

*토양(his soil, sein Boden) : 차라투스트라는 군중을 포기하지 않고 여전히 희망을 있다고 생각해서 군중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제는 인간이 자기의 목표를 세우는 때다. 인간이 자신의 최고 희망의 싹을 심을 때다.” 지금도 인간말종에서 탈출할 희망이 있고, 아직 토양이 비옥해서 지금 서둘러서 초인을 기획해야 한다. 나중에 토양이 지력을 잃고나면 아무 나무도 크게 자라지 않게 된다. 초인이 탄생할 수 없는 철저한 인간말종의 시대가 도래하는 것이다. (E 발제문) 지금 빨리 각성해서 초인이 되도록 노력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교수님)

 

*혼돈(chaos, Chaos), 춤추는 별(a dancing star, tanzender Stern) : 인간은 아직 춤추는 별들을 생성시킬 수 있는 혼돈(χάος)을 지니고 있다. 카오스는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우주 발생의 시작이고, 무한히 가능함을 생육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은 자유로운 춤을 추는 삶의 형식으로 창조성이 충분히 있고 물질과 정신이 상호통일되어 있으며 창조를 일으킬 수 있다. (E 발제문)

  춤추는 별은 초인을 의미하고, 혼돈은 기존의 가치규범과 안락한 삶을 파괴할 수 있는 강력한 생명력을 의미한다. 군중에게는 아직은 혼돈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초인을 준비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교수님)

 

“‘우리는 행복을 고안해냈다 인간말종들은 이렇게 말하고는 눈을 껌빽거린다.”

“"We have invented happiness", say the last men, and they blink.”

“"Wir haben das Glück erfunden" - sagen die letzten Menschen und blinzeln.”

: 인간말종들은 행복을 만들어냈다, 우리야말로 행복이 뭔지 안다며 자부하는 것. (교수님)

  눈을 껌뻑거리는 것으로 인간말종들의 태도를 볼 수 있다. 인간말종들이 계속 눈을 껌뻑거리는 이유는 그것이 편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세상의 진정한 모습을 보지 않으려고, 진리의 빛이 눈부시니 눈을 감는다. 플라톤의 동굴비유에서 인간말종의 태도는 동굴 밖의 세계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다. 새로운 것에 대한 감각, 그것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려는 의지도 없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행복의 요소를 믿고 나머지 대안을 거부한다. (E 발제문)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지만 단순하게 인간말종들이 별 생각도 없는데 뭔가 깊이 생각하는 척하는 모습을 표현하는 것일 수 있다. (교수님)

 

인간말종의 행복

: 차라투스트라는 안일을 탐하는 인간말종이 생각하는 행복한 삶의 요소를 묘사하고 풍자한다. 다음의 각 요소는 이후 차라투스트라의 여행 중에서 다시 더 자세히 나올 것이다.

  첫 번째 요소는 이웃사랑이다. 인간말종은 너무 약해서 살기 힘든 곳에서 떠나고, 따뜻함이 필요해서 무리를 짓고 이웃을 사랑한다.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과 어울리게 사는 것은 그리스도교 도덕(<마태복음>(5:43) "이웃을 사랑하고.")이다. 이웃사랑의 핵심은 연민이나 동정이다. 니체는 인간을 약하게 만드는 그리스도교 도덕을 지적하고 있다. (E 발제문) 말세인은 고통이나 고난을 회피하고, 그런 것들이 닥치면 서로 돕고 위로하는 데서 마음의 안정을 얻는다. (교수님)

  두 번째 요소는 복종하는 노예 정신이다. 인간말종들은 병에 걸리는 것과 의심하는 것을 죄로 여긴다. 니체에 따르면 이들은 아주 조심해도 넘어지는 바보. 병과 의심도 죄로 간주하는 것에서도 그리스도교의 이념을 볼 수 있다. 그리스도교에서 병에 걸리는 이유는 사람이 죄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리스도교에서는 교리를 의심하지 말고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진리를 탐구할 때 의심은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기에 인간말종은 의심을 통해 진리를 구하는 길을 버릴 수밖에 없다. (E 발제문) 병은 그리스도교와 연관 시키지 않고 일상적인 의미에서 병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말세인들은 건강을 아주 중시하기 때문이다. 니체는 병이라는 것이 우리를 아주 심오한 존재로 만들 수 있는 것이라 말한다. 그는 그 자신이 좋은 책을 쓸 수 있었던 것도 자신의 병 덕분이라 말한다. 그에 따르면, 약한 인간은 병으로 망가지지만, 강한 인간은 병을 통해서 이전에 보지 못했던 자신을 본다. 한편, 불신은 기존의 가치관, 즉 이원론적 세계관에 대한 불신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교수님)

  세 번째는 쾌락주의이다. 이들은 때때로 소량의 알코올이나 마약 등 독을 복용하고 즐긴다. 끝으로 많은 독[성직자들의 위로, 종교적 위안 - ‘당신은 죽어서 천국에 갈 것이다’ (교수님)]을 마셔 안락한 죽음에 이르게 된다. 여기서 인간말종의 고통을 회피하는 쾌락주의적 태도를 볼 수 있다. 이들은 독을 마시고 번뇌를 잊어버리고, 죽을 때도 안락한 죽음을 바란다. (E 발제문) 말세인은 쾌락을 추구하긴 하는데 건강 상하지 않도록 쾌락에 탐닉하진 않는다. 어떻게 보면 대단히 현명하게 삶을 꾸려가는 것이다. 말세인이 그렇게 나쁘진 않은 것 같지 않은가? (교수님)

  네 번째는 노동이다. 차라투스트라는 19세기 유럽 산업혁명 시기의 인간의 기계적이고 소모적인 노동을 비판하고 있다. 이런 노동에서 인간은 노동하는 기계이자 노동을 위한 소모품에 불과하다. 인간말종은 이런 노동에 만족한다. 창조적인 예술작품을 만들거나 자기를 성장시키는 일은 그들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 니체는 <싸움과 전사에 대하여>에서 "노동 대신 싸움"을 권한다. (E 발제문) 말세인은 노동을 통해서 삶의 공허함, 지루함에서부터 도피한다. 그렇지만 또 과로하지 않도록 조심한다. 건강이 최고니까. (교수님)

  다섯 번째는 평등이다. 차라투스트라는 평등이념을 뿌리로 하는 그리스도교. 계몽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아나키즘 등의 이데올로기를 비판한다. 니체는 <타란툴라에 대하여>에서 평등이념을 홍보하는 설교자를 타란툴라라는 큰 거미로 비유한다. 중세시대에는 그런 거미에 물리면 무도병에 걸린다는 속설이 있다. 무도병에 걸리면 반드시 미친 듯이 춤을 추고 나서 회복할 수 있어서, 마치 평등이념을 담는 사회주의에 감염되면 사람이 미친 듯이 춤춘다는 것과 같다. (E 발제문) 참된 지배자는 자기의 명령에 책임지려는 사람이고, 참된 복종자도 수동적으로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자신을 헌신해서 좋은 성과, 결과를 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평등을 원하는 자들은 참된 지배도, 참된 복종도 번거로우니까 대충 어울리면서 살고 싶어한다. (교수님)

  마지막 요소는 일상의 쾌락에 만족하는 삶의 방식이다. 인간말종들은 건강을 중시해서 다투더라도 빨리 화해하기 마련이다. 그들은 낮에는 낮대로, 밤에는 밤대로 소소한 쾌락을 즐긴다. 그들의 관심사는 오로지 생물학적 삶의 유지나 현재 삶의 보존이다. 여기서 니체는 소소한 쾌락의 확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는 공리주의,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의 유토피아를 또 한 번 비판한다. 신이 죽었다는 사실로부터 인간에게는 두 개의 선택지가 주어진다: 인간말종으로 타락하기, 초인되기. 인간말종은 일종의 경멸스러운 무신론자이다. 니체는 초인의 태도를 지닌 무신론으로 군중들을 이끌고자 한다. (E 발제문)

  차라투스트라가 그린 인간말종이 계몽주의, 사회주의 등의 이념들에 관련되어 있다고 해석하였는데 그렇게까지 해석하지 않아도 된다. 인간말종은 어느 사회든 볼 수 있는 평균적인 사람들이다: 니체 당시 독일 사람들, 키르케고르 당시의 덴마크 사람들, 우리 시대의 사람들. 니체 당시 독일의 일반인들은 니체가 말하는 그리스도교적 금욕주의나 이원론에 심하게 빠져있지 않았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일반 사람과 별반 다를 바 없이 산다. 자기 육체를 학대하면서 신이 요구하는 정결을 갖고자 하지 않는다. 키르케고르가 당시 기독교인을 진정한 기독교인으로 보지 않은 것이 바로 이들이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과 똑같이 살기 때문이었다. 매주 교회 나가고, 죽을 때 목사가 장례만 치러주면 자신을 기독교 신자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들은 부나 명예 등 세속적으로 중요한 가치들을 추구하면서 자기들이 가장 좋은 삶 내지는 행복한 삶을 산다고 착각하지만, 키르케고르가 보기에 유한성의 절망에 빠져있는 사람들이다.

  인간말종은 전통적인 실존철학에서 가장 비판적으로 보는 인간 유형이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 대부분 인간의 삶의 유형이기도 하다. 하이데거는 말세인을 세상사람(세인)(세인의 삶은 비본래적 실존)이라고 부른다. 세인의 특징은 호기심에 가득차 있다는 점이다. 모두가 비슷비슷한 삶을 사니까 호기심에 차서 자극적인 사건들을 쫓아다니는 것이다. 세인은 사건에 대해 피상적으로 밖에 모르지만 잘 아는 것처럼 끊임없이 수다를 떤다(잡담한다). 연예인 기사에 댓글을 보라. (교수님)

 

차라투스트라의 서설6

 

*줄타기 곡예사(tight-rope walker, der Seiltänzer), 두 개의 탑(two towers, zwei Türme) : 백승영(2022)의 해석에 따르면, 탑은 그리스도교의 교회 탑이고 차라투스트라가 연설하는 곳은 유럽의 중앙광장이다. 보통 유럽 중앙광장 옆에 두 그리스도교회 탑이 있기 때문이다. 결국 줄타기 곡예사의 시작점과 종점은 모두 그리스도교 탑이 된다. 줄타기 곡예사는 '사람과 초인'을 잇는 밧줄을 타야 하지만 '그리스도교와 그리스도교'를 잇는 밧줄을 타는 것이다. 그렇기에 줄타기 곡예사는 사이비 자유정신이며, 그의 추락도 이미 이런 숨겨져 있는 메타포를 통해 예고되고 있다. (E 발제문)

  백승영 씨는 줄타기 곡예사가 타는 줄이 이어져있는 탑이 교회 탑이라고 보는데, 그렇게 보지 않아도 된다. 그냥 탑들을 연결했다고 보면 된다. 다만, 한 쪽의 탑은 전통적이 이원론에 빠져있는 정신이고, 다른 쪽 탑은 초인의 정신을 상징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줄타기 곡예사를 사이비 자유정신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 가혹한 평가이다. 그는 전통적인 이원론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지만 거기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사람이고, 그래서 추락하는 사람이다. (교수님)

 

*포센라이서(익살꾼, clown, Possenreißer) : ‘포센라이서라는 메타포에서, ‘Possen’은 짓꿎은 말, 희롱, 못된 장난, 시시한 익살 같은 의미를 갖고 있다. 합성어인 ‘Possenreißer’‘Possenmacher’(possen을 하는 사람)의 옛말이다. 흔히 알록달록한 옷을 입은 익살꾼이나 광대(jester), 삐에로 정도로 번역되지만, 니체가 메타포로 사용하면서는 그런 일상의 의미를 넘어선다. 포센라이서는 옛 자명성의 힘에 대한 상징적 표현으로, 곡예사 인간을 능가하고 인간 위에 군림하는 힘, 인간이 옛 자명성(‘’)에서 빠져나오려고 할 때, 인간을 위협하고 죽음으로까지 내모는 힘이다. 바로 이 힘이 인류의 미래를 놓고 차라투스트라와 대결한다. 니체는포센라이서의 역할을 통해, 인간이 자유정신이 아닐 때 짐승과 위버벤쉬사이를 잇는 밧줄타기는 그저 탑과 탑사이를 오고 가는 일에 불과하게 될 것이며, 결국에는 자명성의 힘에 굴복하거나 실존적 죽음을 맞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다. (역주)

  익살꾼이라는 메타포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고 해석도 다양하다. 무의미나 우연을 의미한다고 보는 설, 역사를 뒤흔드는 혁명적 유토피아주의자이자 새로운 시대를 여는 자를 의미한다고 보는 설, 비양심적 선동의 대표자를 의미한다고 보는 설 등등이 있다. 안네마리 피퍼(Annemarie Pieper 1990)는 익살꾼을 바그너로 해석하고, 줄타기 곡예사를 니체로 해석한다. 쾰러(Köhler, 1989)는 니체를 "겁쟁이"로 욕하는 바그너와 "겁쟁이는 탑속에 남아있어야 한다!"라고 말하는 익살꾼을 대응시킨다. 익살꾼은 인간이 자신을 스스로 초극하고 초인으로 가는 길을 막고자 하고, 인간이 그리스도교의 탑 안에 가두어져야 하며 동물의 단계에 머물러야 한다고 말한다. (E 발제문)

  익살꾼은 무엇인가? 바그너와 니체를 끌어들이는 해석도 있고, 오히려 초인의 의지를 의미한다고 보는 해석도 있다. 그런데 나는 전통적인 이원론의 정신이 아닐까 한다. 전통적 이원론 세계에서 벗어나려 하는 줄타는 사람은 익살꾼으로 상징되는 이원론의 정신에 강하게 붙잡혀 있는 상태이다. 결국 줄타는 사람을 지배하는 이원론적 정신이 이원론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보다 훨씬 강하였기에 줄타는 사람은 줄을 다 건너지 못하고 떨어진다. 뒤에서 익살꾼은 또 나와서 차라투스트라를 협박하기도 한다. 가르침을 함부로 전파하지 말아라고. 그렇지 않으면 줄타는 사람처럼 추락해서 죽을 것이라고. 실질적으로는 기독교의 성직자나 교회로 볼 수 있겠다. (교수님)

 

예서 무엇을 하고 계시오?”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나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소. 악마가 내 발을 걸어 넘어뜨리게 될 것을. 이제 악마가 나를 지옥으로 끌고 가니, 그대가 막아주지 않겠소?” // 차라투스트라가 대답했다. “벗이여, 내 명예를 걸고 하거니와, 그대가 말하는 것들 전부는 존재하지 않네. 악마도 없고 지옥도 없지. 그대의 영혼은 그대의 육체보다 더 빨리 죽을 것이니, 이제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말게!”

"I knew long ago that the devil would trip me up. Now he drags me to hell. will you prevent him?" // "On my honor, friend," answered Zarathustra, "there is nothing of this that you speak: there is no devil and no hell. Your soul will be dead even sooner than your body; therefore, fear nothing more!"

"Was machst du da? sagte er endlich, ich wusste es lange, dass mir der Teufel ein Bein stellen werde. Nun schleppt er mich zur Hölle: willst du's ihm wehren?" // "Bei meiner Ehre, Freund, antwortete Zarathustra, das giebt es Alles nicht, wovon du sprichst: es giebt keinen Teufel und keine Hölle. Deine Seele wird noch schneller todt sein als dein Leib: fürchte nun Nichts mehr!"

: 줄타는 사람은 자기 나름대로 이원론적 세계를 벗어나려고 했지만 그전부터 그것을 방해하는 세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세력은 이원론적 세계관을 표방하는 교회라고 볼 수도 있지만, 자기 내부에서 자신을 얽매고 있는 이원론적 정신일 수도 있다. 그는 죽음을 앞에 두고 지옥에 떨어질까봐 두려워하고 있다. 이원론적 세계에 대한 믿음을 떨쳐버리지 못한 것이다. 그런 그에게 차라투스트라는 이원론적 세계관을 부정하며 악마도 없고 지옥도 없다고 말하고, 이원론적 영혼을 부정하며 그대의 영혼이 그대의 육체보다 더 빨리 죽을 것"이라 말한다. (교수님)

  차라투스트라가 그대의 영혼은 그대의 육체보다 더 빨리 죽을 것이니라고 말하는 부분은 파이돈에서 소크라테스의 영혼 불멸을 반박하기 위해 케베스가 내세운 이른바 직공의 마지막 외투 논증을 연상시킨다. 해당 논증은 다음과 같다: 직공이 죽으면, 그 직공이 짜서 둘러 입었던 외투는 온전하게 있겠지만, 직공은 온전하게 있다고 할 수 없다. 물론 직공은 많은 외투들을 짜고 닳게 했으며 그것들보다 나중에 소멸하긴 했지만, 그는 맨 마지막 것보다는 먼저 소멸한 것이다. 영혼과 몸도 마찬가지다. 영혼이 죽으면, 영혼이 짜서 둘러 입던 몸은 온전하게 있겠지만, 영혼은 온전하게 있다고 할 수 없다. 물론 영혼은 많은 몸들을 짜고 닳게 했으며 그것들보다 나중에 소멸하긴 했지만, 그는 맨 마지막 몸보다는 먼저 소멸한 것이다. (사견)

 

나야 사람들이 매질을 하고 변변찮은 먹이를 주면서 춤추도록 가르친 짐승보다 별반 나을 게 없으니.” // “아니, 그렇지 않네.” 차라투스트라가 대답했다. “그대는 위험을 업으로 삼았고, 그것은 전혀 하찮게 볼 일이 아니지. 그대가 이제 그대의 업으로 인해 파멸을 맞이했으니 내가 손수 그대를 묻어주겠네.”

"I am not much more than an animal which has been taught to dance by blows and a few meager morsels." // "Not at all," said Zarathustra, "you have made danger your calling; there is nothing contemptible in that. Now you perish by your calling: therefore I will bury you with my own hands.“

"Ich bin nicht viel mehr als ein Thier, das man tanzen gelehrt hat, durch Schläge und schmale Bissen." // "Nicht doch, sprach Zarathustra; du hast aus der Gefahr deinen Beruf gemacht, daran ist Nichts zu verachten. Nun gehst du an deinem Beruf zu Grunde: dafür will ich dich mit meinen Händen begraben."

: 차라투스트라는 줄타기 곡예사를 크게 인정한다. 줄타기 곡예사는 위험한 일을 자신의 천직으로 삼아서 안일을 탐하는 군중보다 낫다. (E 발제문) 줄타는 사람은 이원론적 세계관에 빠져서 육체를 학대하고 쾌락도 금하고 그 세계관에 따라 살았던 수동적 짐승과 다를바 없다고 자책한다. 하지만 차라투스트라는 그가 그래도 극복하려고 노력했다는 점을 인정한다. (교수님)

 

Q. 차라투스트라는 초인을 준비하는 자가 되라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하고, 초인이 되라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둘 중 어떻게 되라고 말하는 것일까? (D)

A. 비슷한 뜻으로 보인다. 인간은 항상 극복해야 할 것이 남아있다. 완벽한 초인은 하나의 이상이고 항상 초인을 향한 도정에 있는 것이다. 그 도정에서 초인에 가까우냐 머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초인의 경지에 이르렀다가 전락할 수도 있다. 그래서 초인을 준비하는 자가 돼라는 말과 그냥 초인이 돼라는 말은 비슷해 보인다.

  니체가 어지간한 사람에게는 초인을 준비하라고 말하지 않고 초인을 보조하라고 말한다. 예컨대, 모두가 피카소 같은 미술가가 되긴 어렵다. 그래서 피카소에 감동하고서 피카소를 지원하는 사람이 되어 거기서 기쁨을 느낄 수도 있다. 또 무두가 나폴레옹이 되긴 어려우니, 나폴레옹을 따라 싸우거나 나폴레옹을 재정적으로 지원해주는 식으로 또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초인이 될 수 없는 사람은 초인을 보조하고 그런 데서 기쁨을 느끼는데 대부분이 이러하다. 니체는 말세인을 초극해야한다고 말하지만, 실상 대부분의 사람들은 말세인에 머무를 거라고 보고 말세인의 삶도 초인을 뒷받침하면 어느 정도 의미있다고 본다. (모든 사람이 잘 먹고 잘 사는 게 민주주의가 추구하는 것인데 니체가 추구하는 것은 탁월한 소수를 낳는 것이다. 그는 인간의 가능성을 완전히 실현하는 소수의 사람들의 존재가 역사를 점령한다고 보았다.) 차라투스트라는 초인을 준비한다고 하지만, 이런 식으로 말세인으로서 경제활동에 종사하면서 초인을 돕진 않는다. 그는 초인에 가까운 삶을 산다. 결국 초인을 준비하는 자나 초인이나 성격상 큰 차이가 없을 것 같다. (교수님)

 

 

(수업 : 박찬국, <존재론연습> (20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