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현대대륙철학 일차문헌

[니체] 「세 변화에 대하여」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부 1장)

현담 2023. 4. 6. 01:31

*정신(spirit, Geist) : 차라투스트라의 첫 번째 가르침은 정신의 변화에 관한 것이다. 이때의 정신은 물론 니체가 비판하는 이원론적 정신, 곧 육체와 육체에 속한 욕망에서 분리되어 있다고 믿는 순수한 정신이 아니다. 니체가 말하는 정신은 육체와 욕망을 긍정하고 욕망의 주인이 되는 정신이다. 이 정신은 힘의 의지[생명력]에 따라 결정되는 종속적인 성격을 갖기도 하지만 동시에 독자적인 성찰 능력을 갖고 힘의 의지의 상태를 반성하며 그것에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주기도 한다. 정신에는 낙타 정신, 사자 정신, 아이 정신의 3단계가 있는데, 차라투스트라는 정신의 3단계 변화를 인간이 지향해야 할 목표인 초인에 이르는 길로서 제시한다. (J2 발제문)

  “정신의 세 변화에서 정신은 이원론자가 말하는 정신이 아닌 것은 맞다. 그러나 발제자가 설명한 정신은 아이의 정신에게는 타당할 수 있는데 낙타의 정신에게는 타당하지 않다. 여기서 정신은 힘에의 의지 정도로 봐야 할 것이다. 힘에의 의지가 낙타의 단계, 사자의 단계, 아이의 단계에 있다고 읽을 수 있다. 니체가 어떤 개념을 완전히 일의적으로 사용하지는 않는다. 어떤 사람이 자기를 강화하고 고양하는데 필요한 방법을 고안하는 역할을 하는 정신이 지성이다. , 발제자가 말한 힘에의 의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은 지성인 것이다. 그러나 텍스트에서 정신의 3단계라고 했을 때 정신은 힘에의 의지에 결정되는 지성이라기보다는 힘에의 의지 자체이다. (교수님)

 

*낙타(camel, das Kamel) : 낙타 정신은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정신이다. 무엇이 무거운 짐인가? 기독교 같은 이원론적 종교와 플라톤 이후 유럽 철학인 이원론적 철학이 제시하는 전통적 가치들이다. 낙타 정신은 형이상학적 이원론이 부여하는 도덕과 의무 앞에 두렵고 공경하는 마음을 갖는다. 이 가치들을 불변하고 신성한 것으로 믿기에 노예처럼 복종하고 순종하는 것이다. 게다가 가장 무거운 짐을 가득 실을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가장 무거운 짐들 앞에서 자발적으로 무릎 꿇는다. 아무리 자신을 무겁게 짓누르는 가치들이라 해도 가득 실어낼 만큼 억센 힘을 가졌기 때문이다. 물론 이 무게가 고통스럽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낙타 정신은 고통을 참고 인내하는 데서 스스로 기쁨을 느낀다. 마치 육체의 욕망에서 벗어날 수 없는 영혼이 자신을 학대하면서 느끼는 쾌락과 비슷한 마조히즘적 기쁨이다. 그렇게 낙타는 신, , 이성, 행복 등 최고로 신성한 것들을 사랑하며 너는 해야 한다는 타율적인 도덕에 복종하는 타율적인 삶을 산다. 이어 가장 무거운 짐들의 목록((1)~(7))(백승영, 2022: 110-113)이 열거된다.

 

(1) “자신의 교만을 아프게 하려고 자신을 낮추자신의 지혜를 조롱하려고 자신의 어리석음을 드러내는겸양의 덕이다. 낙타는 이미 주어진 가치 앞에서 자신을 보잘것없는 존재로 여기며 끝없이 낮춘다.

 

(2) “도모했던 일이 잘 이루어져 승리를 축하할 때, 그 일에서 손을 떼버리며 자신의 성취와 자기 자신에 대한 긍지를 자발적으로 단념하는 것이다.

 

(3) 기독교 신에 대한 순종과 믿음이다. 니체는 예수가 악마의 유혹을 받는 장면을 패러디하여 악마가 아니라 오히려 예수가 신에 대한 순종과 믿음으로 유혹하는 자[악마]를 유혹하는 것처럼 표현한다.

 

(4) 이원론적 종교와 철학이 주는 진리를 위해 영혼의 굶주림을 참고 견디는 것이다. 초월세계, 육체적 욕망에서 벗어난 덕이성행복 등을 진리로 추구하지만, 이들은 실상 대지와 현세의 삶과 무관하거나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지식을 위한 지식일 뿐이다. (J2 발제문)

  여기서 이원론적 진리를 이러한 지식을 위한 지식으로 해석하기는 어려울 거 같다. 니체가 말하는 지식을 위한 지식, 학문을 위한 학문은 실증주의 역사학 같은 것을 가리킨다. 실증주의 역사학에서는 별로 삶에 도움도 되지 않는 세세한 지식을 추구한다. 조선 사람들이 어떤 옷을 입었고, 어떤 음식을 먹었고 등. 그런 것들이 우리 삶에 얼마나 도움이 되겠느냐. 현실에서 도피해서 학문에서 안식을 찾는 태도의 소산이다.

  “진리를 위해 영혼의 굶주림을 참고 견디는 것은 이원론이 제시하는 진리라는 것이 우리의 영혼을 충만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빈약하게 만든다는 말이다. 이원론적 진리는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까지도 죄의식에 사로잡히게 만들고 자기를 신에 비해서 보잘 것 없는 존재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이원론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삶에 지치고 허약한, 병든 자들이다. 이원론은 그들에게 살아갈 힘(“도토리와 풀”)을 준다. 하지만 결국 이 사람들의 영혼을 빈곤하게 만든다. (교수님)

 

(5) 그로 인해 결국 병에 걸렸음에도 도움이 되는 사람들은 멀리하고 그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결코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와 벗하는 것이다. 정신이 제대로 된 처방을 구분하지 못할 만큼 깊게 병들어 자신을 낫게 해주지도 못할 변변찮은 부류와 어울리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J2 발제문) 여기서 귀머거리 무엇인가? 해석가능성이 다양한데 신이 아닐까 싶다. 이원론을 믿는 자들은 신에게 열심히 기도하는 데 사실 신은 귀머거리이고, 소원 빌어봤자 아무 쓸데도 없다는 말이다. (교수님)

 

(6) “진리의 물이라면 더럽더라도뛰어들 만큼 진리라고 불리는 것들을 아무런 비판 없이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이다. “차가운 개구리는 학자들을, “뜨거운 두꺼비는 사제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J2 발제문) 개구리나 두꺼비는 입에 거품을 물고 거짓 진리를 떠드는 사람들을 상징하는 것이다. (J2 추가) 개구리보다 두꺼비가 더 못나서 개구리 대신 굳이 두꺼비를 성직자의 상징으로 뒀을 수도 있겠다. (사견) 왜 진리의 물이 더러운가? 이원론의 진리는 대지와 생성을 부정하는 정체되어 있는 진리라서 그럴 수 있겠다. (교수님)

  ‘차가운 개구리를 마다하지 않는다는 부분은 분명치 않다. “차가운 개구리를 학자라고 볼 수 있지만, 학자들은 삶에 직접 참여하지 않고 관망하기를 원하는 자들, 곧 지식을 위한 지식을 추구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어떤 사태를 가리켜 사람들이 그들을 마다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J2 프로토콜)

  “진리의 물이 이원론처럼 정체된 진리를 상징하고, “뜨거운 두꺼비가 이원론적 종교를 신봉하는 성직자를 상징한다면, 두꺼비와 동종이고 같은 물에 사는 차가운 개구리지식을 위한 지식을 추구하는 학자로 해석하기보다는 이원론을 정당화하는 철학자로 해석하는 것이 어떨까? 그렇다면 이원론자는 그런 철학자를 마다할 이유가 없어진다. (D)

  두꺼비를 성직자로, 개구리를 이원론을 지지하는 학자로 해석할 경우, 그 이후의 표현 마다하지 않는가?”와의 충돌이 불가피해진다. 이미 이원론을 믿는 사람이 자신과 이미 생각이 같은 사람들을 마다하고 말고 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교수님)

도덕의 계보에서 니체는 영국의 심리학자”[경험론자]들을 가리켜 개구리라 부른다. 개구리는 파리처럼 아주 작은 먹잇감만 바라보기 때문에 편협한 시야를 갖는 학자를 상징하는 것일 수 있다. (J) 도덕의 계보에서 니체는 영국의 경험론자들을 늪지대 속에서 사는 개구리에 비유한다. 그들은 우리가 흔히 아주 고귀하는 것으로 여기는 도덕과 종교의 기원을 순수 영혼이나 신의 계시 따위에서가 아니라 인간들의 저차적인 심리상태에서 찾기 때문이다. 그들은 도덕의 기원을 인간들의 관습에서 찾고, 종교의 기원을 인간들이 자연에 대해 느끼는 불안감/두려움에서 찾는다. 여기서도 니체가 두꺼비와 개구리로 이러한 학자들을 가리켰다면, 그런 자들이 아무리 이원론에서 소중히 여기는 가치들이 인간의 저차원적 심리상태에서 비롯된다고 말할지라도, 그런 말에 개의치 않는다는 식으로 해석 가능하다. (교수님)

  이 부분에서는 교수님의 해석을 받아들이기 힘들다. 니체는 (1)~(7)에서 일관적으로 기독교적 이원론을 비판하고 있다. (6)에서 갑자기 영국의 경험론자가 등장하는 것은 다소 뜬금없다. 또한, “마다하지 않는다개의치 않는다는 다른 말이다. “마다하지 않는다는 거절하지 않는다는 뜻이고 개의치 않는다는 신경쓰지 않는다는 뜻이다. 원문의 “nicht von sich weisen”“not repelling”으로 영어로 번역되며 거절하지 않는다로 읽어야 한다. 한편, 개구리와 두꺼비가 이미 이원론자들이라면 이미 이원론자인 사람이 그들을 마다하고 말고 할 것이 없다는 교수님의 비판에 대해서는, “마다하지 않는다가 이원론자의 심리적 상태 기술이라기보다는 마땅히 마다해야 할 것을 마다하지 않는 이원론자의 행태를 비판하는 당위적 기술로 이해하면 대응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내게는 여전히 이원론적 진리에 뛰어들고서는 이원론적 종교인과 학자를 거절하지 않는다는 독해가 더 설득력 있다. (사견)

 

(7) “우리를 경멸하는 자들인 이원론자들을 사랑하고 우리를 위협하는 유령에게 손을 내미는 것이다. “유령은 이원론자라고 볼 수도 있고, <서설>에 등장했던 육체와 분리된 순수 정신으로서의 유령을 가리킨다고 볼 수도 있다. (J2 발제문)

  “우리를 경멸하는 자들을 사랑한다는 이야기는 예수가 왼쪽 뺨을 맞으면 오른쪽 뺨을 내줘라는 이야기를 연상시킨다. 니체는 복수하지 마라, 원수를 사랑하라,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그런 행위는 예수와 같은 성인이 할 때는 사랑에서 비롯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서는 대체로 비겁함과 비굴함에서 비롯된다. 니체가 추구하는 귀족적 인간, 그리스 로마의 귀족들은 보복을 할 때는 보복을 한다. 귀족적 인간은 상대가 용서를 빌 때 용서해줄 수도 있지만, 여전히 왼쪽 뺨을 맞았다고 오른쪽 뺨을 대주는 사람은 아니다.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성자가 아닌 것이다. 여하튼 여기서는 예수의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을 가리키는 것 같다. 만약 우리를 경멸하는 자들을 이원론자로 해석하면, 낙타의 정신에 사로잡힌 사람은 스스로가 이원론자일텐데, 이 구절이 스스로를 사랑하는 사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은 좀 이상하다.

  그렇다면 유령은 무엇인가? 이원론에서 죽음과 함께 영혼이 육체를 떠나 분리되어있는 상태를 유령으로 말한 것 아닌가 싶다. 일종의 귀신이 되는 건데, 그런 식의 상태로 천국에 간다는 게 확실하면 두렵지 않겠지만, 유령이 되어서 지옥에서 떠돌 수도 있고 지상에서 떠돌 수 있는 걸 생각하면 두려울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이원론자는 그런 상태를 받아들인다. 다시 말해, 죽음과 함께 영혼이 분리되어서 유령이 되지만 그러한 상태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해석할 수 있지 않나 싶다. 유령을 이원론자로 보기는 어렵다. 서설에서 등장했던 육체와 분리된 영혼을 가리킨다고 봐야겠다. (교수님)

 

  이렇게나 많은 짐을 진 낙타 정신은 과연 어떻게 사자 정신으로 변화할 수 있을까? 비록 낙타가 병들고 약한 생명력을 지니긴 했지만, 힘의 의지는 본성상 자신을 고양하고 강화하고자 한다. 삶의 무게를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낙타의 정신은 반성을 하기 시작한다. “그 자신의 사막”, “가장 고독한 사막으로 달려가는 것이다. 이처럼 의지가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때, 정신은 자신만의 고독 속에서, 비로소 성찰을 시작한다. 더욱이 기독교 같은 이원론적 종교는 신 앞에서 진실하라고 가르치기도 했다. 그런데 이렇게 진실성을 추구하다 보면 피안과 인격신의 존재가 허구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고 이원론적 종교와 도덕도 부정할 수밖에 없다. 그런 인식에 도달했을 때, 낙타는 사자로 변신한다. (J2 발제문)

 

그런데 가장 고독한 사막에서 두 번째 변화가 일어난다. 거기서 정신은 사자가 된다. 정신은 자유를 쟁취하기를 원하며, 자기 자신의 사막에서 주인이기를 원한다.

But in the loneliest wilderness the second metamorphosis happens: here the spirit becomes a lion; it will seize freedom, and become master in its own wilderness.

Aber in der einsamsten Wüste geschieht die zweite Verwandlung: zum Löwen wird hier der Geist, Freiheit will er sich erbeuten und Herr sein in seiner eignen Wüste.

: 하필 사자가 사막에서 주인이기를 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자는 이원론에서 벗어나기는 했지만, 새로운 삶의 의미 같은 게 주어지지 않은 채로 황량한 세계에 던져져 있기 때문이다. (교수님)

 

*사자(lion, der Löwe) : 사자 정신은 기존의 전통과 가치를 더 이상 섬기지 않는 정신이다. 낙타 정신이 신성하게 숭배했던 이원론적 종교와 철학에 대해 회의하고 부정하며 마침내 그것을 파괴하고자 한다. 그 자신이 스스로 주인 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사자 정신은 나는 원한다라고 말한다. 무엇을 원하는가? “자신의 사막에서 주인이기를 원한다.” 이전에 섬겨왔던 가치들을 더 이상 주인이나 신으로 부르려 하지 않으며 그들에 맞서 승리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이는 과거 노예 상태에 놓여있던 자기 자신에 대한 부정이자, 동시에 기존의 자명성에 대한 부정인 셈이다. 기존의 가치에 따라 부정할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가치 체계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기에 사자의 부정은 신성한 부정이다.

  이제 사자가 대결하고자 하는 신과 주인은 거대한 용이라는 메타포로 등장한다. 용은 단단한 갑옷처럼 금빛 비늘로 무장하고 있는데, 그 비늘 하나하나에는 천 년 이상 내려온 종교와 철학의 가치들이 너는 해야 한다라는 명령으로 새겨져 있다. 용은 이원론적 전통 하에 가치는 이미 모두 창조되어 있다창조된 일체의 가치, 그것이 바로 나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왜 용일까(백승영 2022: 114-115)? 먼저 용은 상상의 동물이기 때문이다. 용이 내리는 명령과 의무가 기실 실체 없는 공상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또 용은 보통 거대하고 강력한 존재로 여겨진다. 형이상학적 이원론은 허구에 불과한 가치 체계임에도 우리는 그것에다가 큰 힘과 가치를 부여하면서 거대한 힘으로 키워버렸다. 끝으로 <요한계시록>에서 악마이자 사탄으로 등장하는 용에 대한 패러디일 수 있다. 다만 차라투스트라는 성경과는 반대로 기독교 신을 우리가 물리쳐야 할 용으로 설정하고 있다. (J2 발제문)

 

  용은 신이나 이원론이 추구하는 가치에 대한 상징이다. 어떤 해석자들은 차라투스트라의 수호동물 중에서 뱀과 용을 비교한다. 뱀은 허물을 벗어나가며 성장한다. 그러나 용은 딱딱한 비늘 속에서 변화가 없다. 신이나 이원론이 추구하는 가치들이 영원한 불멸한 고정된 것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교수님)

  “비늘마다 너는 해야 한다!”라는 명령이 금빛으로 빛나고 있다.”는 대목을 보고 용이 칸트 철학을 상징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미 칸트 철학은 전통적 이원론에 포함되어 있을 것이긴 하다.) 칸트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고 한다. “생각하면 할수록 놀라움과 경건함을 주는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내 위에서 항상 반짝이는 별을 보여주는 하늘이며, 다른 하나는 나를 항상 지켜주는 마음속의 도덕률이다.” (사견)

 

  마침내 사자는 용을 물리치고 정신의 자유를 쟁취한다. “최고로 신성한 것이라 여겨진 이원론적 가치 체계 속에서, 숨어있던 온갖 망상과 자의들을 냉철한 지성을 통해 찾아낸 것이다. 우리 삶에 의미와 방향을 부여해주던 초월적 가치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이제 어떤 힘도 발휘할 수 없다. 하지만 아직 주의할 사항이 남아 있다. 기존의 모든 가치가 붕괴한 곳에서 정신은 삶의 의미와 방향을 찾지 못한 채 허무주의에 빠져들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신은 사자가 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하지만 사자 정신은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기 위한 권리를 쟁취하고 자유를 창출해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J2 발제문)

 

*아이(child, das Kind) : 사자 정신이 맞닥뜨린 허무주의의 위험 속에서 정신은 다시 한번 자신의 반성 능력을 발휘한다. 신은 죽었고 남은 것은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목표도 없는 이 세계뿐이다. 만일 정신이 아무것도 남지 않은 허무주의적 상황에 진실로 충실할 수 있다면 존재하는 세계는 바로 우리 사는 세계밖에 없음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어떤 의미나 가치나 목표가 없는, 있는 그대로의 대지와 삶이 그 자체로 완전하고 완벽한 것임을 절대적으로 긍정하게 된다. 이러한 신성한 긍정을 통해 정신은 아이가 된다.

  아이 정신은 자신의 의지”, 곧 자신의 힘의 의지를 원한다. 현세의 인간을 극복하려는 힘의 의지와 자신의 역량을 자각하고 긍정하는 것이다. 정신이 그 어떤 외부의 권위나 명령에 기대는 법 없이 자기 자신에게 내재한 창조적 힘을 욕망하고 긍정할 때, 아이는 비로소 자기의 가치를 새롭게 창조하기 시작한다. 이원론적인 도덕을 모두 불태우고 남은 재(허무주의)를 산으로 날랐던 차라투스트라가 지금 불덩이를 가지고 산을 내려온 것처럼 말이다.

  아이 정신은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한다. 기존의 전통과 가치를 망각하고 “(창조의) 놀이를 시작한다. 놀이에는 아무것도 미리 정해진 것이 없다. 그래서 새로운 놀이를 창안할 수 있고, 규칙을 스스로 만들거나 바꿔가면서 지속할 수 있다. 또 원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으며, 아예 새로운 놀이를 시작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놀이는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하는 행위다. 그런 측면에서 아이의 행위는 제힘으로 돌아가는 바퀴이자 외력이 필요 없는 최초의 움직임이다. 그리고 이 모든 유희는 언제나 무죄. 이원론적 세계 하에서 대지는 죄로 가득찬 곳이었지만, 아이 정신은 대지의 생성소멸에서 그 어떤 죄도 발견하지 못한다. 아울러 충만한 생명력을 향유하는 자신의 행위에도 아무런 죄가 없다. 더군다나 아이 정신은 욕망에 이끌려 제멋대로 행동하는 어리석은 정신이 아니라 욕망을 절제하고 통제하는 지혜로운 정신이다. 아이 정신, 다시 말해 자유정신이자 초인은 이로써 형이상학적 이원론의 세계를 상실하고 자신의 힘의 의지가 창조한 자신의 세계를 획득한다. (J2 발제문)

  아이가 기존의 전통과 가치를 망각한다는 해석은 옳지 않다. 기존 전통과 가치는 이미 사자의 정신에서 부정했다. 이것들은 망각의 대상이 아니라 파괴와 부정의 대상이다. 여기서 망각의 대상은 과거의 망각할 만한 일이다. 아이의 정신은 망각할 건 쉽게 망각해버리는 상태다. 니체는 건강한 삶의 조건 중 하나가 망각이라 말했다. 과거의 일에 후회하고 시달리면 창조적으로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가끔 과거의 상처나 회한에 사로잡혀 아무 일도 못할 때가 있다.

  아이의 정신은 어떤 특정한 가치에 얽매이지 않고 그때그때 상황마다 자기를 고양할 수 있는 가치를 창조하는 존재이다. 그런데 창조의 놀이를 위해서는 신성한 긍정이 필요하다.” 여기서 영원회귀사상이 이미 암시되고 있다. 이 세상의 고통과 고난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긍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 긍정하면서 유희하듯이, 춤추듯이 살아가는 정신, 이원론이 완전히 극복된 상태가 바로 아이의 정신이다. (교수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때 그는 얼룩소라고 불리는 도시에 머물고 있었다.

Thus spoke Zarathustra. And at that time he staying in the town which is called The Motley Cow.

Also sprach Zarathustra. Und damals weilte er in der Stadt, welche genannt wird: die bunte Kuh.

: ‘얼룩소(Die bunte Kuh, The Motley Cow)’라는 도시는 1부 전체 서사가 진행되는 장소이며, 다른 부들에서도 이 도시가 등장하는 경우가 있는 것으로 보아, 차라투스트라1~3부 전체의 배경도시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독일어 Die bunte Kuh는 석가모니가 설교하던 장소 중 한 곳인 Kalma-sadalmaya(팔리어로는 Kammasuddamam)를 독일어로 번역한 것이다. 니체는 이 표현으로 부처가 자신의 가르침으로 사람들을 깨우치려 하듯, 차라투스트라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암암리에 보여주려 한 것 같다. 또한 독일어 ‘bunt’[...] (역주)

 

Q. 차라투스트라가 설교를 하고 있는 도시 얼룩소에도 다른 어떤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가? (J2 프로토콜)

A. 얼룩소는 부처가 설법했던 장소 중 한 곳을 독일어로 번역한 말이라고 한다. 만약 얼룩소에 다른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면, 얼룩소는 다채로운 색깔을 지닌 소니까 다양한 인간들이 모여 사는 그런 곳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 (교수님)

 

Q. 역주 43에서 백승영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정신의 이 세 상태의 변화는 단계적 변화나 순차적 이행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정신의 그때 그때의 선택이다. 정신 속에는 낙타에 대한 지향과 사자에 대한 지향, 그리고 아이에 대한 지향이 늘 공존하며, 어느 것을 선택하는지가 관건인 것이다. 그러니 아이 상태에서 낙타 상태로 갈 수도, 사자에서 아이 상태로 갈 수도 있다. 그런데 니체에게서 정신은 힘에의 의지에 의해 규제된다. 정신의 선택은 곧 의지의 선택인 것이다.”

  역주 50에서 백승영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독일어 ‘bunt’가 다양한 색상과 모습의 공존을 의미하듯, 우리의 정신 속에는 낙타에 대한 지향과 사자에 대한 지향, 그리고 아이에 대한 지향이 늘 공존하며, 세상에도 낙타 정신, 사자 정신, 아이의 정신이 뒤섞여 있음을 얼룩소라는 이름으로 보여주려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정신에 세 상태에 대한 지향이 늘 공존하고 정신이 그때그때 선택한다는 이 해석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니체는 스스로 단계적으로 정신의 상태 변화를 서술하고 있다. 낙타는 부족하고, 사자는 필요하지만, “사자가 다시 아이가 되려면 무엇이 있어야한다. 세 상태는 분명히 백승영이 부정하는 단계적 변화로 보인다. (D)

A. 우선 선택이라는 표현이 어색한 것은 사실이다. 상황마다 정신이 세 종류의 상태 중 하나를 고를 수 있는 것 같다는 뉘앙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승영이 말한 선택은 소위 작은 이성이라 불리는 지성이 내리는 선택이 아니라 큰 이성이라 불리는 힘에의 의지가 내린 명령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분명 니체는 단계적으로 차근차근 올라가는 식으로 변화를 서술하지 여럿 중 하나를 선택하여 변화한다고 서술하지 않는다. 하지만 백승영은 올라갔던 단계에서 내려갈 수도 있기 때문에 세 상태가 늘 공존한다는 표현을 쓴 것 같다. (J2)

  선택이 지성의 선택이 아니라 힘에의 의지의 충동에 가까운 것으로 이해하더라도, 변화가 비가역적이지 않다는 점을 양보하더라도, 정신에 세 가지 상태에 대한 지향이 늘 공존한다는 해석은 여전히 받아들일 수 없다. 세 가지 상태를 늘 지향한다는 말과 세 가지 상태 중 어느 상태로 변화할 가능성이 늘 존재한다는 말은 다른 말이다. 정의상 사자의 정신은 낙타의 정신을 극복한 상태이고, 아이의 정신은 사자의 정신을 극복한 상태이다. 물론 어떤 치명적인 계기로 아이의 정신은 그 밑의 정신으로 후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아이의 정신이 암묵적으로라도 낙타처럼 어떤 이원론적 가치관을 받아들이고 짐을 지고 있다고 이해하는 것은 곤란하다. 물론 텍스트상 논리적으로 허용되는 해석이고 백승영 입장에서 해당 해석을 더 옹호할 수도 있겠지만 저자인 니체가 받아들일 법한 해석은 전혀 아니다. (D)

  역주에서 정신이 세 상태 중 하나를 선택한다는 말은 분명 이상하긴 하다. 아이의 정신이 퇴보할 수도 있겠다 정도로 이해 가능하다. 항상 아이의 정신을 유지하긴 힘들고 다시 허무주의(사자)나 이원론(낙타)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본래적 실존은 상당히 드물게 실현하는 것이고, 대부분 비본래적 실존으로 산다. 비본래적 실존은 항상 우리를 끌어들이는 소용돌이 같다고 하이데거는 말한다. 니체 본인도 아이의 정신으로 살았겠지만 항상 그렇게 살긴 힘들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 해도 니체가 이원론으로 전락할 거 같지는 않긴 하지만 말이다. (교수님)

 

Q. 힘의 의지힘에의 의지중 어떤 용어를 사용해야 하는가? (J2 프로토콜)

A. 독일어 원어는 ‘Wille zur Macht’인데, 니체 연구자들은 이를 관습적으로 힘에의 의지라 직역해서 쓰고 있다. ‘Wille zur Macht’는 힘을 얻고자 하는 의지이다. 그런데 힘의 의지라고 번역하면 이 주어가 되어서 의지가 힘에 속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문제가 발생한다. 학계에서 힘의 의지라고 번역하는 학자는 거의 찾아볼 수 없지만, 누군가 힘의 의지라고 번역했거나 그렇게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면, 그것은 아마 힘에의 의지가 일본어투이고 한국어 문법상 다소 어색한 표현이라는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어 문법상 자연스러운 표현으로 고치더라도 힘의 의지가 아니라 힘을 향한 의지로 번역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힘에의 의지라는 짧은 용어가 힘을 고양/강화하려는 의지라는 의미로 이미 무리없이 통용되고 있기 때문에 힘에의 의지를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더 좋을 것으로 보인다.

 

세 변화에 대하여(The Three Metamorphoses, Von den drei Verwandlungen)

: 이 장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가장 유명한 부분이다.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통해서 전하고자 하는 가장 핵심적인 사상이 여기서 표현되고 있다. 일단 텍스트에서는 각 개개인들이 밟아나가는 정신의 단계를 얘기하는 걸로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세 변화는 니체 개인사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서양 역사 전체를 해석하는 틀로도 볼 수 있다. 니체는 원래는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이원론을 신봉했을 것이고, 후에 김나지움에서 사자의 정신을 경험했을 것이며, 차라투스트라 바위 앞에서 영원회귀 사상을 발견했을 때는 아이의 정신을 경험했을 것이다. 낙타의 정신은 서양 전체 역사를 고려할 때 중세일 것이고, 사자의 정신은 기독교를 부정하는 근대일 것이다. 그러나 아직 근대는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지 못하고 허무주의에 빠져있는 상태다. 그것을 극복하는 것이 자기 철학이 예고하는 미래인 것이다. (교수님)

 

 

(수업 : 박찬국, <존재론연습> (20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