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현대대륙철학 일차문헌

[니체] 「환희와 열정에 대하여」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부 5장)

현담 2023. 4. 20. 12:07

내 형제여, 그대에게 덕 하나가 있고, 그것이 그대의 것이라면, 그대는 그 덕을 누구와도 공유하지 않는다. [...] 그런데 보라! 이제 그대는 그 덕의 이름을 대중과 공유하게 되었고, 그대의 덕으로 그대는 대중이 되고 가축떼가 되어버렸다!

My brother, when you have a virtue, and it is your own virtue, you have it in common with no one. [...] And behold, you have its name in common with the people, and have become one of the people and the herd with your virtue!

Mein Bruder, wenn du eine Tugend hast, und es deine Tugend ist, so hast du sie mit Niemandem gemeinsam. [...] Und siehe! Nun hast du ihren Namen mit dem Volke gemeinsam und bist Volk und Heerde geworden mit deiner Tugend!

: 그대의 덕을 규정하고 공유한다는 것이 정확히 어떤 의미인가? 힘에의 의지를 한 가지 양식으로 규정하고 그 규정만이 선임을 여럿과 공유하면서 그 규정만을 따르는 것이다. 예컨대, 내가 힘을 키우기 위해서 겸양이 필요한 경우가 있다. 구체적으로는, 강하고 유능한 자 밑에서 그의 능력을 배우고 그의 힘을 매개로 다른 자들의 힘을 취하는 동시에 그에게는 내가 그에 비해 한참 모자라다고 말해야 하는 경우를 떠올릴 수 있다. 그런데 내가 그의 밑에 있는 다른 자들과 함께 겸양만이 덕이라 생각하면서 겸양만을 절대적으로 따르게 된다면 나는 절대 그의 그늘을 벗어날 수 없다. 나는 아마 평생 강자의 수족으로 부려질 것이다. 이때 겸양은 더 이상 힘에의 의지의 한 가지 양식이 아니라 노예정신이 되어버린다. 언젠가 나는 겸양은 접고 오만하게 강자를 떠나거나 강자와 대결함으로써 힘을 키워야 한다. 그래서 니체는 덕이 아니라 유능함을 갖추라고 강조한다. 유능함은 그때그때 힘을 키우기 적합한 양식으로 힘에의 의지를 발휘할 수 있는 능력으로 이해할 수 있다. (D 발제문)

  덕은 인간 개개인의 열정들에서 비롯되는데, 이는 곧 덕이 개개인의 독자적인 삶에서 비롯된다고 이해할 수 있고, 그래서 덕은 그 사람에게 고유하게 속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결국 각각의 사람에게 탁월한 열정이 다르고, 그 열정에 따라서 각자가 추구해야 할 덕이 달라지는 것이다. 그러나 철학에서는 인간의 다양성을 경시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예컨대, 불교에서는 모두가 다 부처 같은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지만, 힘이 폭발적으로 일어나는 헤라클레스 같은 사람에게 부처처럼 하루종일 명상하라고 요구한다면, 그는 굉장히 큰 고통을 느낄 것이다. 헤라클레스 같은 사람에게는 그 나름대로 주어진 열정을 승화시켜 추구해야 할 덕이 있고, 그때 그것은 플라톤의 군인의 경우에서처럼 공동체에 기여하는 덕이 될 수 있다.

  플라톤은 국가에서 인간들의 유형을 나누고 그에 걸맞은 덕의 유형을 나눈다. 먼저, 공익/공공선을 중시하는 사람은 정의의 덕을 갖춘 철인 정치가가 될 소질이 있다. 한편, 명예욕이 강한 사람은 용기의 덕을 갖춘 군인이 될 소질이 있다. 이들은 남들에게 지는 것을 참지 못하고, 전쟁터에서 공을 세우고 싶어한다. 마지막으로, 정치가나 군인의 소질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절제의 덕이 권고된다. 플라톤은 한 국가에서 가장 경제적인 소득을 많이 올린 사람과 가장 적게 올린 사람의 격차가 8배를 넘어서는 안 된다고 정하기도 하였다. (참고로 니체 또한 소유욕의 노예가 된 탐욕스런 인간을 저열한 인간으로 보겠지만, 소유욕의 노예가 되지 않고 재물을 잘 사용할 수 있는 인간이라면 문제가 없기에, 플라톤처럼 소득의 최고 한계선 따위를 주장할 것 같지는 않다.)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니체 역시 자기 실현을 이야기하면서도 그와 함께 공동체에 대한 책임을 이야기한다. 니체는 덕을 그대의 덕이라 부르지만 그대의 덕이 공동체의 질서와 안녕에 위배되는 덕은 아니다. 사람마다 자기의 덕을 구현함으로써 공동체도 부흥할 수 있는 덕이 니체가 말하는 덕이다.

  정리하자면, “그대의 덕은 사람들마다 소질이 다르고 열정이 다르기 때문에 각자가 자기의 덕으로 삼아야될 것이 다르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그대의 덕은 각자의 삶에서 형성되는 고유한 것이기 때문에 일반화하거나 보편화하기 어렵다. 다시 말해, 각자의 덕은 각자에게 고유하기에 보편적인 의미를 갖는 일반적인 언어로 다른 사람에게 개념적으로 전달하기 힘든 것이다. (교수님 D 프로토콜)

  교수님께서 해석한 그대의 덕은 개별자의 개별적 특성을 강하게 반영하는 반면, 내가 해석한 그대의 덕은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개별 상황에서 힘을 고양할 수 있기 위한 의지의 발현으로서 유능함이라는 보편적 특성을 강하게 반영한다. 물론, 개별자가 상황에 맞지 않는 자신만의 특성을 고집해서도 힘을 고양할 수 없지만, 여럿에게 똑같은 상황이 닥치더라도 개별자마다 자신에 맞는 방식으로 상황에 대처해야 힘을 잘 고양할 수 있기 때문에, “그대의 덕에는 개별적 특성과 보편적 특성이 혼재되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사견)

  하나의 덕의 개별적인 성격을 강하게 해석할건지 힘에의 의지의 고양에 기여하는 일반적인 성격을 강하게 해석할건지 문제에서 행위자 특유의 기질과 열정에 좀 더 무게를 둬야 하는 거 아닌가하는 쪽으로 점점 생각된다. 발제할 때는 좀 반대편 쪽에서 해석했었지만. (D) 내용은 개별적이되, 형식은 보편적인 것 같다. 사람들 마다 자신을 최고로 고양할 수 있는 하나의 덕을 가져야 한다는 것은 형식적인 요구이지만, 그 덕의 내용은 사람들마다 다른 개별적인 것이니까. (J) 온건하고 체계적인 해석이다. (D) 다원주의적 현실을 존중하면서 그 토대 위에서 여전히 도덕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내용의 개별성을 자유롭게 열어 놓는 순수 형식적 요구를 제시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J)

 

그대는 이렇게 말해야 했다. “내 영혼을 고통스럽게도 하고 감미롭게도 하는 그것, 내 내장의 굶주림이기도 한 그것은 아직은 발설할 수도 없고 명칭도 없다.”

It is better for you to say: "Inexpressible is it, and nameless, that which is agony and sweetness to my soul, and also the hunger of my belly.“

Besser thätest du, zu sagen: "unaussprechbar ist und namenlos, was meiner Seele Qual und Süsse macht und auch noch der Hunger meiner Eingeweide ist.“

: 그대의 덕은 내장의 굶주림처럼 무언가를 섭취하고자 함이다. 니체는 이 사람을 보라』 「나는 왜 이렇게 영리한지1절에서 여기서와 유사한 비유를 사용한다.

 

너희 힘의 최대치, 즉 르네상스 양식의 비르투이자 도덕적인 약성분이 없는 덕의 최대치에 이르기 위해서 너[그대]는 정확히 어떻게 영양을 섭취해야 하는가?

 

통상 선으로 일컬어지던 것이지만 니체에 의해 기각된 일련의 선들, 그 선들이 지니는 도덕적인 성질을 지니지 않는 덕/힘의 포만을 위해 그대는 영양을 섭취하고자 한다. 힘을 최대치에 이르게 해주는 것이 영양이자 그대의 덕이 굶주려 있는 대상이고, 그대는 그대의 덕을 배부르게 하기 위해 굶주린 사람처럼 영양 가득한 무언가를 찾아 먹을 것이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그대의 덕은 힘이고 덕으로서 힘은 힘을 원한다는 것이다.

 

힘이 바로 그것, 새로운 덕이다.(차라투스트라1베푸는 덕에 대하여)

 

만족이 아니라 더 많은 힘, 평화가 아니라 전쟁, 덕이 아니라 유능함 (르네상스 양식의 덕, 비르투, 도덕적인 약성분이 없는 덕)(안티크리스트2)

 

덕으로서 힘은 정확히 말하면 힘을 원하는 힘에의 의지다. 그리고 힘에의 의지는 항상 더 많은 힘을 원한다. 즉 그것은 포만을 모른다. 그러므로 그대는 그것의 포만을 위해 노력하겠지만 그대의 노력은 멈출 수 없다. 그래서 그대는 끊임없이 전쟁을 치러야하며, 전쟁에서 승리하고 힘을 쟁취하기 위한 유능함을 지녀야 한다.

  한 가지 흥미로운 부분은 비록 영양을 섭취하고 전쟁을 치르는 것은 그대이지만 실로 그대는 그대의 주인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대의 진짜 주인은 그대가 힘을 얻기 위해 몸과 마음을 다하게 만드는 힘에의 의지이다. 힘에의 의지는 신체를 경멸하는 자들에 대하여에서 살펴보았던 그대, 즉 나(자아, Ich)를 지배하는 자기(Selbst)이다. 그래서 니체는 힘에의 의지인 그대의 덕을 자기 혹은 자기애(Selbst-Lust)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대들이 가장 사랑하는 자기, 그것이 그대들의 덕이다.(차라투스트라2덕스러운 자들에 대하여)

 

그대들의 덕은 그대들의 자기라는 것으로서, 밖에 있는 어떤 낯선 것이나 껍데기가 아니며 걸치고 있는 외투와 같은 것도 아니다.(차라투스트라2덕스러운 자들에 대하여)

 

신체와 영혼이 누리는 자기애는 스스로를 일컬어 이라고 한다.(차라투스트라3세 가지의 악에 대하여)

 

이처럼 덕은 그대 바깥의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대의 내밀한 곳에서 그대의 신체와 영혼이 사랑으로 봉사하게 만드는 자기이다. (D 발제문)

 

그러니 말하고 더듬더듬 말하라. “이것이[나의 덕이] 나의 ()이며, 나는 이것을 사랑한다. 이렇게 그것은 내게 전적으로 기쁨을 주며, 단지 이렇게 나는 선을 원한다.

Then speak and stammer: "This is my good, this do I love, it pleases me entirely, only this way do I want the good.

So sprich und stammle: "Das ist mein Gutes, das liebe ich, so gefällt es mir ganz, so allein will ich das Gute.

: 그대의 덕(your virtue, deine Tugend)은 통상 선으로 일컬어지던 것이 아니다. , 그것은 신의 율법”[기독교의 교리], “인간의 규범”[세속적 법, 세속적 도덕률, 정언명령], “인간의 필수품”[인간 생존에 기여하는 것], “대지 저편으로나 파라다이스로 안내하는 길잡이”[각종 종교/주의의 교리, 예컨대 맑스주의의 교리]가 아니다. 그것은 그대 자신만의 선, 그대 입장에서 오롯이 나의 이라 부를 만한 것이다. 그대 자신만의 것이기에 그대는 그 덕을 누구와도 공유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대 자신만의 것이기에 하나뿐인 자식이나 애완동물처럼 너무나 사랑스럽게 보여 이름을 지어주고 쓰담고 싶을 것이며 귀를 살짝 잡아당기고 장난도 치고 싶을 것이다.” (아래의 비유 분석에서 이러한 그대의 덕의 사랑스러운 속성을 더 자세히 다룰 것이다.) 이제 선은 더 이상 그대를 구속하는 당위나 강제가 아니다. 선은 사랑받는 그대 자신만의 것으로서 그대에게 전적으로 기쁨을 주며”, 그대는 선을 사랑하는 방식으로만 선을 원한다.”

  그런데 그대는 왜 그대가 그토록 사랑하는 그 덕에 관해 말을 해야만 한다면말을 더듬게 되는 것인가? 그 이유는 그것의 성질이 그것으로 하여금 발설할 수도 없고 명칭도 없는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그대의 덕은 한 가지 이름으로 규정되고 대중과 공유되는 순간 더 이상 그대의 것이 아니게 되고 그대 또한 그대 자신이 아닌 대중의 일원으로 전락해버리게 된다. 그러니 그대는 그대의 덕을 함부로 무엇이라 규정하고 그렇게 불러서는 안 될 것이고, 무엇이라 규정한 후 대중과 공유해서는 더더욱 안 될 것이다. 그대는 그대의 덕을 친숙한 이름으로 부룰 수 없을 만큼 드높여야 한다. 그리고 그것에 관해 말을 해야만 할 때는, 그것을 어떤 이름으로 부를 수도 없고 어떤 것이라 재단할 수도 없으며 대중과 공유해서도 안 되니, 다만 더듬더듬 그것에 관해 말하며 그것을 칭송해야 할 뿐이다. (D 발제문)

 

그런데 이 새가 내 곁에서 둥지를 틀었으니, 나는 이 새를 사랑하고 보듬는다. 이 새는 지금 내 곁에서 황금알을 품고 있다.”

But that bird built its nest beside me: therefore, I love and cherish it - now it sits beside me on its golden eggs.”

Aber dieser Vogel baute bei mir sich das Nest: darum liebe und herze ich ihn, - nun sitze er bei mir auf seinen goldnen Eiern.“

: 그대 혹은 자아는 힘에의 의지 혹은 자기의 명령에 따르고 기꺼이 봉사한다. 하지만 니체는 그 둘 사이의 관계를 단순한 주인-노예 관계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그대의 덕은 그대 곁에 둥지를 튼 새(bird, Vogel)이고 그대는 그 새를 사랑하고 보듬는일종의 새 주인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대는 그 새를 데려온 적도 없고 부른 적도 없다. 그 새는 언젠가 그대 곁에서 둥지를 틀었을 뿐이다. 그렇게 그것이 둥지를 튼 이상 그리고 그것이 그대에게 너무나 매력적으로 보이는 황금알”[그대가 그대의 덕을 사랑하고 그대의 덕에 봉사할 때 얻는 기쁨]을 품고 있는 이상 그대는 반강제로 그것의 주인 차라리 주인이 자신을 보살피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곤 하는 도도한 동물인 고양이를 기르는 묘주(猫主)를 가리키는 표현, ‘집사가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이 되어 그것을 사랑하고 보살핀다. 그대는 그 새에게 푹 빠져버려 앞에서 언급했듯 이름을 지어주고 쓰다듬고 싶을 것이며 귀를 살짝 잡아당기고 장난도 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그대가 그 덕의 이름을 대중과 공유한다면 그대는 대중이 되고 가축떼가 되어버린다. 이는 비유컨대 다음과 같은 상황일 것이다. 어느날 그대는 그대의 베란다에 둥지를 틀고 자리를 잡은 참새를 발견한다. 그 참새는 놀랍게도 황금알을 폼는다. 그대는 그 참새에게서 황금알을 얻기 위해 그 참새를 보살피기 시작한다. 때로 그 참새는 그대를 위해 사랑스러운 여가수처럼 노래를 불러주기도 한다. 그대는 그 참새에 푹 빠진다. 그러던 그대는 문득 그 참새를 여러 사람에게 알리고 싶어진다. 그래서 그대는 <<동물농장>>이라는 TV 프로그램을 섭외하여 그 참새를 대중에게 알린다. <황금알을 품은 참새, 짹짹이>라는 이름으로 그대의 새는 널리 알려진다. 이제 대중들이 짹짹이를 구경하기 위해 그대의 집을 찾아오기 시작하고 더 이상 유명해진 짹짹이를 감당할 수 없어진 그대는 짹짹이를 새장에 넣어 집밖에 내놓고 대중과 함께 그것을 구경하는 신세가 된다. (D 발제문)

 

한때 그대는 열정을 지녔었고 그것을 악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지금 그대는 오로지 그대의 덕들만을 지닐 뿐이다. 그것들은 그대의 열정들로부터 자라났다. // 그대는 이 열정의 심장부에 최고 목표를 세웠다. 그러자 열정이 그대의 덕이 되었고 환희이 되었다.

Once you had passions and called them evil. But now you have only your virtues: they grew out of your passions. // You set your highest goal in the heart of those passions: then they became your virtues and joys.

Einst hattest du Leidenschaften und nanntest sie böse. Aber jetzt hast du nur noch deine Tugenden: die wuchsen aus deinen Leidenschaften. // Du legtest dein höchstes Ziel diesen Leidenschaften an's Herz: da wurden sie deine Tugenden und Freudenschaften.

: 인용문에서 열정의 단복수 구별을 하지 않은 번역자 백승영과 달리 (아마 자연스러운 한국어 표현을 위해서 그런 것으로 보인다) 발제자는 굳이 ‘~을 붙여 번역하였다. 위에서 다루었던 그대의 덕과 열정들로부터 자라난 그대의 덕들은 그 층위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대의 덕은 오로지 힘에의 의지 그뿐이다. 그대의 덕들로서 열정들은 그대의 덕으로서 힘에의 의지의 다양한 양태이다. 열정들이 그대의 덕들일 수 있는 이유는 그것들이 그대의 덕의 본질, 즉 힘에의 의지가 힘을 원한다는 최고 목표를 심장부에 꽂고 있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악(“악마”, “지하실의 거친 개들”, “”, “비탄이라는 그대의 암소”)으로 치부되었던 열정들은 이제 그대가 사랑하는 그대의 덕들로 환골탈태하여 그대의 선(“천사”, “”, “사랑스러운 여가수”, “향유”, “달콤한 젖”)이 되었다. 그대가 만약 신경질적인 자”, “음탕한 자”, “광신적인 자”, “복수욕에 불타는 자등 전통적으로 나쁜 기질을 가진 자의 혈통일지라도 그대가 그로부터 물려받은 기질 또한 그대의 덕들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천상의 신에 비해 한없이 비천하고 더러웠던 지상의 인간들이 품고 있었던 모든 열정들은 지상의 덕(an earthly virtue, eine irdische Tugend)인 힘에의 의지에 의해 이제 지상의 덕들이 되었다. (D 발제문)

  전통적인 이원론적 철학에서는 덕과 열정을 대립시키고 열정을 악으로 보았다. 하지만 니체가 보기에 모든 덕은 이런 열정들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여기서 열정은 성욕, 승부욕, 정복욕, 소유욕 등 모든 종류의 욕망들을 가리킬 수 있다. 호색적인 기질, 화를 잘 내는 기질, 광신적인 기질, 복수심 많은 기질 또한 덕이 될 수 있는 열정들이다. 예컨대, 이성에게서 인정을 받고 싶어하는 욕망이 상당한 동력이 되어 예술가들이 훌륭한 작품을 만드는 경우가 열정이 덕이 되는 대표적인 현상일 것이다. 화를 잘 내는 기질도 어떤 의미에서 자존심이 강한 기질로 해석할 수 있고 남들보다 훌륭한 작품을 만들겠다는 의지 등으로 전환될 수 있다. 이처럼 니체에게서도, 프로이트와 마찬가지로, 승화라는 개념이 중요하다. 이원론자들은 열정을 악한 것으로 봐서 근절하려고 했지만, 니체는 그것들을 좋은 방향으로 승화시켜야한다고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지하실의 개들과 같은 거친 열정들을 덕들로 잘 승화시켰을 때 그것들은 새들, “사랑스런 여가수들로 변한다. (교수님 D 프로토콜)

 

앞으로는 그대에게서 어떤 악도 더는 자라나지 않을 것이다. 그대의 여러 덕들 사이의 싸움에서 자라나는 악이 아니라면 말이다. // 내 형제여, 그대가 행운을 잡는다면 단 하나의 덕만을 가질 뿐, 다른 덕은 갖지 않게 된다. 그렇게 하여 그대는 더 가볍게 다리를 건너게 된다.

And nothing evil grows out of you any longer, unless it be the evil that grows out of the conflict of your virtues. // My brother, if you are fortunate, then you will have one virtue and no more: thus you go more easily over the bridge.

Und nichts Böses wächst mehr fürderhin aus dir, es sei denn das Böse, das aus dem Kampfe deiner Tugenden wächst. // Mein Bruder, wenn du Glück hast, so hast du Eine Tugend und nicht mehr: so gehst du leichter über die Brücke.

: 위에서 설명하였든 이제 그대가 가진 열정들은 더 이상 악의 원천이 아니다. 하지만 열정들을 그대의 덕들로 삼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악으로 불릴만한 것이 다른 어디선가로부터 발생한다. 바로 열정들 간의 싸움으로부터 말이다. 예컨대, 그대는 차분한 기질을 타고났지만 또한 강한 성욕을 가지고 있다. 이 둘이 싸움을 벌여 그대가 그대의 기질과 성욕 사이 갈피를 잡지 못하게 된다면, 차분한 기질을 살려 공부를 제대로 할 수도 없을 것이고 성욕을 살려 사랑하는 사람과 열정적인 사랑을 나누기도 힘들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열정들 간의 싸움과 전투필연적이라 피할 수 없다. 열정들은 하나하나가 최고가 되려고하며, 힘 전체를 독차지하고 정신을 전령으로 부리기를 원한다. 이렇게 욕심 가득한 열정들은 조금이라도 자신의 몫을 빼앗기기 싫어하고 자신이 아닌 것의 몫을 차지하길 원하는 나머지 서로를 질투하고 불신하며 비방한다. 그대는 그대의 덕들 모두와 타협하여 많은 덕들을 갖추는 것을 택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힘든 운명이다. 위 문단에서 살펴본 예시의 그대는 차분함과 성욕을 동시에 갖추려고 했지만 공부도 사랑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이러한 상태가 계속 이어지다가는, 덕들 사이의 싸움이 되고 싸움터가 되는 것에 지쳐버린 나머지, 그대는 종국에 황폐한 인간이 되어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지도 모른다.

  인간인 그대가 짐승과 초인 사이에 놓인 다리를 더 가볍게 건너고자 초인에 이르고자 한다면 단 하나의 덕만을 가질 뿐, 다른 덕은 갖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 그 하나의 덕은 여러 덕들 가운데 어느 하나를 가리키지 않는다. 그 하나의 덕은 다시 그대의 덕이다. 그대의 덕, 즉 힘에의 의지는 몰락하려는 의지요 동경의 화살”(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부 서설 4)이다. 힘에의 의지가 힘을 섭취하는 방식은 스스로 몰락하고 다시 동경을 향해 일어서는 것이다. 이러한 파괴와 재건에 자신을 투신한다면 그에 필요한 것이 어떤 열정이든간에 그것을 이용하면 된다. 그리하여 인간은 여러 덕들을 지니지만 하나의 덕만 원하면 된다.

 

나는 사랑하노라 너무 많은 덕을 원치 않는 자를. 하나의 덕은 두 개의 덕 이상이다. 그 덕이야말로 운명이 걸려 있는 매듭이기 때문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부 서설 4)

 

차라투스트라-니체가 사랑하는 인간은 인간의 운명, 극복되어야 할 무엇으로서의 운명이 의존하는 하나의 덕, 즉 힘에의 의지가 지시하는 바대로 몰락을 거듭하며 스스로 초극하는 자이다. 수많은 열정들의 담지자로서의 인간인 그대는 그대의 열정들 덕분에 그렇게 몰락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그 열정들을, 그대의 덕들을 사랑해야 한다.” (D 발제문)

  니체에게서 악은 열정들이 아니라 열정들 간의 투쟁이다. 열정들 사이 갈등이 조정되지 않은 상태, 열정들에 질서가 주어지지 않는 상태가 악인 것이다. 한 사람의 내부에서 열정들이 투쟁하는 예시로 어떤 경우를 들 수 있을까? 예컨대, 명예욕이 강하면서 동시에 이성의 사랑을 받고 싶어하는 욕망도 강한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 사람이 전쟁의 발발 소식을 접하게 되었을 때, 그 사람의 내부에서는 전쟁에 참여하여 자신의 명예욕을 실현하고 싶은 욕망과 전쟁을 피하여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안정된 가정을 이루고 싶은 욕망이 갈등할 수 있다.

  다른 곳에서 니체는 소크라테스 이전 아테네 사람들의 열정들이 아주 혼란한 상태에 빠져있다고 본다. 니체에 따르면, 이렇게 열정들에 질서가 주어지지 않은 상태, 즉 데카당스 상태에 대한 처방으로서 소크라테스 철학이 등장하였다. 소크라테스 철학은 이런 열정들을 근절하는 방향에서 해결책을 찾았다. 마찬가지로 기독교나 플라톤의 이원론적 철학도 열정들 전체를 악으로 돌려 제거하는 방식으로 혼란을 해결하려 하였다. 그러나 니체는 열정들을 덕들로 잘 승화시키고 그것들 사이의 투쟁과 갈등을 잘 조절하는 인간, 덕들에 위계질서를 부여할 수 있고 필요할 때 어떤 덕에 집중할 수 있는 인간을 이상적인 인간으로 본다. (교수님 D 프로토콜)

 

어떤 덕이라도 다른 덕을 질투한다. 그런데 질투란 끔찍한 것이어서, 덕들도 질투 때문에 몰락할 수 있다. // 질투의 불길에 휩싸인 자는 결국 방향을 돌려, 전갈처럼 독침을 자기 자신쪽으로 향하게 되니.

Each virtue is jealous of every other, and jealousy is a dreadful thing. Even virtues can perish of jealousy. // He whom the flames of jealousy surround, at last, like the scorpion, turns the poisoned sting against himself.

Eifersüchtig ist jede Tugend auf die andre, und ein furchtbares Ding ist Eifersucht. Auch Tugenden können an der Eifersucht zu Grunde gehn. // Wen die Flamme der Eifersucht umringt, der wendet zuletzt, gleich dem Scorpione, gegen sich selber den vergifteten Stachel.

: 열정들에 질서가 주어지지 않아 서로 갈등을 빚을 때 인간은 큰 고통을 겪게 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창백한 범죄인에 대하여장에서 니체는 범죄인이 살인을 저지른 궁극적 이유가 범죄인이 자기 내부에 열정들을 통합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니체는 열정들을 뱀들에 비유하는데, 뱀들은 범죄인 내부에서 갈등하고, 범죄인은 그 갈등 때문에 고통에 빠지며, 나아가 타인들에게 고통을 가하고자 하게 된다. (교수님 - D 프로토콜)

 

 

(수업 : 박찬국, <존재론연습> (20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