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현대대륙철학 일차문헌

[니체] 「신체를 경멸하는 자들에 대하여」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부 4장)

현담 2023. 4. 7. 20:28

신체를 경멸하는 자들에게 나는 말하고자 한다. 저들이 다르게 배우고 다르게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단지 자기들의 신체에 작별을 고하고 입을 다물라고 할 뿐이다.

To the despisers of the body I want to speak. I would not have them learn and teach differently, but merely say farewell to their own bodies - and thus become silent.

Den Verächtern des Leibes will ich mein Wort sagen. Nicht umlernen und umlehren sollen sie mir, sondern nur ihrem eignen Leibe Lebewohl sagen - und also stumm werden.

: 여기서의 신체경멸자는 정신성 중심의 이원론자다. 이런 지들은 육체성을 존중하지 않고 오히려 펌훼한다. 육체성을 존중하지 않으니, 결국 신체 전체를 존중하지 않는것이나 마찬가지다. 따라서 그들은 죽어도 무방할 것이다. (역주)

  신체경멸자들은 너무 나약해서 가르칠 수조차 없다. 구제불능인 것이다. 그래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들에게 사람들한테 왜곡된 생각을 전파할 생각하지 말고 차라리 그냥 죽어라’, ‘삶이 그렇게 저질스럽다면 죽어라하는 상당히 강한 의미로 말하는 것이 아닐까. 니체는 기독교 박멸법까지 이야기도 한다. (교수님)

  차라투스트라가 여기서 단순히 이원론자들 보고 그냥 나가 죽으라고 말하는 것일까? 그들의 자기모순을 지적하는 것이 아닐까? 신체경멸자들은 자신들이 그토록 경멸하는 신체를 통해서 떠들고 계속 떠들 수 있게끔 신체를 보존한다. 그러나 차라투스트라는 그들이 참된 신체경멸자라면 그만 떠들고 신체를 떠나는 게 그들의 신념에 일관적인 행위라고 지적하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 또한 이원론적 사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If someone says ‘I have a body’ he can be asked ‘Who is speaking here with this mouth?’”(On Certainty, 244) (사견)

  신체경멸자들이 신체를 경멸한다고 해서 꼭 신체를 통해 말하는 것을 그만두고 신체를 떠나야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 입장에서는 신체가 경멸할 만한 것이라는 점이 진리인 이상 신체에 그릇된 가치를 부여하는 사람들을 깨우치고 계도하는 것이 진리를 개인적으로 소유하다가 죽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행위, 혹은 나아가 도덕적 의무일 수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원론자들에게 신체를 존중하지 않으니 차라리 그냥 죽으라고 험담하는 것도 아니고 이원론자들의 자기모순을 지적하는 것도 아니다. 차라투스트라가 내세우는 대지의 철학, 힘에의 의지의 철학은 기존의 이원론과 패러다임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자신의 철학을 배우고 그것을 가르치게끔 이원론자들을 논리적으로 설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 패러다임의 차이는 합리성의 수준이 아니라 정신의 건강 수준의 차이로 진단되며, 허약한 정신 상태에 있는 이원론자들이 니체의 패러다임을 받아들일 수준으로 도약하지 않는 이상 그들에게 차라투스트라의 말은 소귀에 경읽기일 뿐이다. 그래서 차라투스트라가 할 수 있는 말은 다만 어서 천국 가고 그만 떠들라뿐인 것이다. (Neon)

 

나는 신체이고 그리고 영혼이다.” 이렇게 아이는 말한다. 어찌하여 사람들은 아이처럼 말하지 못하는가? // 하지만 깨어난 자, 깨달은 자는 말한다. ‘나는 전적으로 신체고, 그 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영혼이라는 것은 단지 신체에 있는 어떤 것에 대한 말에 불과하다.’

"Body am I, and soul" - so says the child. And why should one not speak like children? // But the awakened and the knowing say: "Body am I entirely, and nothing more; and soul is only a word for something about the body.“

"Leib bin ich und Seele" - so redet das Kind. Und warum sollte man nicht wie die Kinder reden? // Aber der Erwachte, der Wissende sagt: Leib bin ich ganz und gar, und Nichts ausserdem; und Seele ist nur ein Wort für ein Etwas am Leibe.

: 차라투스트라는 먼저 이원론자들보다 나은 입장을 가진 두 집단의 견해를 소개한다. 첫째는 아이들이다. 백승영은 나는 신체이고 그리고 영혼이다라는 아이들의 말에 대해 여전히 인간을 육체와 영혼이라는 두 단위로 나누고 있으며, 힘의 의지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부족하다고 본다. 하지만 그리고(und)’라는 접속사를 써서 육체와 영혼을 대등한 관계로 놓았다는 점에서는 이원론보다 낫다고 말한다. 반면 정동호(2021)는 아이들이 나는 신체이자 영혼이라고 말한 이유는 육체를 떠나서는 영혼을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본다. 차라투스트라가 죽어가는 줄타기 곡예사를 위로하며 영혼이 신체보다 빨리 죽을 것이라고 말한 데서 보듯 육체와 영혼의 생사는 거의 동시적이기 때문이다. (J2 발제문)

  여기서 아이는 아이의 정신에서 이야기하는 아이가 아니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그런데 육체와 영혼을 대등한 관계로 보았다는 점에서 아이의 생각이 이원론보다 낫다는 백승영의 해석은 문제가 있다. 육체와 영혼을 대등한 관계로 놓은들 여전히 이원론이기 때문에 나은 게 별로 없기 때문이다. 육체를 떠나서는 영혼을 생각할 수 없다고 보았다는 점에서 아이의 생각이 이원론보다 낫다는 정동호의 해석이 더 그럴듯해 보인다. 어쨌든 아이는 근저에 크나큰 힘에의 의지가 있다는 걸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부족하다. (교수님)

  “bin”이 동사이므로 “ich”가 주어겠으니 나는 신체이고 그리고 영혼이다.”는 좋은 번역이다. 그러나 원문은 “Leib”를 도치시켜 문장 앞으로 내세웠기에 신체가 바로 나다, 영혼이 나이기도 하지만.”의 느낌으로 읽힌다. 아이의 생각이 획기적인 이유는 바로 이렇게 신체를 자신과 강하게 동일시하는 데에 있다. 아이는 먹고 자고 싸고 뛰노는 자신(신체)을 자신으로 동일시하는만큼 가만히 앉아서 빨간펜/구몬 학습지를 푸는 자신(영혼)을 자신으로 동일시하지 않는다. 아이는 아마 이원론에 노출되었기에 신체와 영혼을 구별하고 둘 모두에 자신을 동일시하기는 하지만, 자연스럽고 솔직하게 신체가 자신이라는 점을 먼저 말한다. 그래서 차라투스트라는 어찌 사람들이 아이처럼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는지 개탄하는 것이다.

  아이가 신체와 영혼을 대등한 관계에 놓았다는 백승영의 해석이나 아이가 영혼을 신체에 의존하는 관계로 설정했다는 정동호의 해석은 사실 약화된 이원론을 지지하는 어른을 아이에 대입시킨 해석이다. 진짜 아이가 내뱉은 말이라 생각하고 있는 그대로 텍스트를 읽고 아이를 이해하였을 때, 아이는 훨씬 깨어난 자에 가까우며, 이원론적 세계관 속에 사는 사람들내지는 어른들로부터 훨씬 멀리 떨어져 있다. (사견)

  이원론자의 경우에는 신체와 영혼 모두 존재한다고 하지만 영혼이 우리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이원론자에게 신체는 영혼의 감옥이다. 그런데 순수한 아이는 신체를 영혼보다 더 우선시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부분을 이해할 수도 있겠다. (교수님)

 

  다음으로 깨어난 자, 깨달은 자는 차라투스트라의 입장을 대변하는 자들이다. 이원론자들이 영혼을 육체와 분리된 실체로 보는 반면, 이들은 영혼과 신체는 분리할 수 없으며, 나아가 이원론자들의 영혼이란 단지 신체에 속한 특정 활동에 붙이는 말(명칭)에 불과한 것으로 본다. 신체는 힘의 의지와 반성적 정신 그리고 살아 숨 쉬는 몸이 떼려야 뗄 수 없이 서로 얽혀 있는 관계체인 까닭이다. 이에 니체는 이러한 유기적 총체성으로서의 인간을 가리켜 신체라고 부르며 나는 전적으로 신체라고 선언한다. (J2 발제문)

  니체의 인간 개념에 대해서 각각의 해설서마다 조금씩 다르게 해석하고 있다. 백승영은 인간을 정신성과 육체성과 힘에의 의지가 뒤얽혀있는 것으로 해석한다. 황문수나 정동호는 인간을 정신과 육체가 일체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해석한다. 나는 그 두 가지 해석들이 다 문제가 있다고 본다. 인간은 힘에의 의지가 본질적이다. 의식적인 차원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은 다 힘에의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들의 의식이나 몸, 이런 것들은 힘에의 의지가 자기 전개를 위해서 만들어낸 것일 뿐이다. 정신성과 육체성이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다? 상식적인 이야기일 뿐이다. 니체다운 성격이 없다. 누구든지 그렇게 이야기한다. (교수님)

 

신체는 큰 이성이고, 하나의 감관을 지닌 다수이고, 전쟁이자 평화, 가축 떼이자 목자다.

The body is a great intelligence, a multiplicity with one sense, a war and a peace, a herd and a shepherd.

Der Leib ist eine grosse Vernunft, eine Vielheit mit Einem Sinne, ein Krieg und ein Frieden, eine Heerde und ein Hirt.

: 신체 전체가 힘에의 의지에 의해 규제된다는 점을 유념한 것이다. 예컨대 뇌라는 기관과 위라는 기관도 힘에의 의지가 끌어가기에, 그 사이에서는 이기려는 싸움이 일어나고, 힘의 정도에 따른 질서(이기고 짐)가 형성된다. 이런 힘씨움은 신체 전체에서 ’ ‘전방위적으로일어난다. 그러니 힘의 정도에 따른 질서도 그때그때 달라진다. 이런 힘싸움을 통해 신체는 변화하고, 그 변화는 자기극복의 양태로 드러난다. 이렇듯 신체는 부분과 전체가 이루어내는, 기적처럼 놀라운 통일성(전체로서는 하나지만 부분적으로는 다수’)을 보여주는 살아 있는 예다. 니체의 유고는 신체의 이런 특정을 잘 묘사해준다. “신체를 단초로 삼아서 우리는 인간을 다양성으로 살아가는 존재로 이해한다. 부분적으로는 싸우고 부분적으로는 정돈되고 위아래로 질서 지워지며, 그것의 개개의 단위에 대한 긍정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전체가 긍정되는 존재로. 이런 살아있는 존재들 사이에는 복종보다는 고도로 지배하는 것들이 있으며, 이것들사이에는 다시 싸움이 있고 승리가 있다”(유고KGW VII2 27[27]). (역주)

  신체는 팔, 다리, 심장, 위장 등 부분 기관들로 이뤄져 있지만 보다 상위의 관점에서는 하나의 유기체를 이루고 있기에 하나의 감관(感官)을 지닌 다수라고 표현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각 기관이 사이좋게 통일되어 있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더 먹고 싶어 하는 위장과 그만 먹을 것을 주문하는 뇌 사이에는 늘 싸움이 일어나고 어느 한쪽이 승리함에 따라 일시적으로 화해하는 전쟁이자 평화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부분 신체들은 가축 떼처럼 각자의 욕망에 따라 이리저리 날뛰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마치 목자가 이끄는 듯 하나를 이룬다. (J2 발제문)

  “Einem Sinne”하나의 감관이 아니라 하나의 의미로 번역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신체가 하나의 감각기관을 지녔다는 말은 이상하다. 신체는 통일적인 복합체다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백승영은 신체를 문자 그대로의 신체와 동일시하고 있다. 그래서 신체 기관들이 서로 투쟁하고 갈등한다는 식으로 해석한다. 그런데 니체는 신체 기관들도 본질은 힘에의 의지라고 본다. 힘에의 의지는 단일한 것이 아니고 열정, 욕망, 충동들로 나타나는데, 그런 의미에서 무리이다. 그러니 여기서 전쟁은 단지 신체 기관들뿐만 아니라 우리 안의 여러 열정들이 벌이는 투쟁으로 이해해야겠다. 예컨대, 내가 공부를 해야 하는데 놀고 싶은 욕망도 강해서 내면적 갈등을 겪을 수 있다.

  이러한 열정들은 또한 위계적으로 통일되어 평화로울 수 있다. 니체가 생각하는 이상적 인간은 목자처럼 열정들을 각 상황에 따라서 적절히 통제하고 이용할 줄 아는 인간이다. 내가 지금 공부를 해야 할 상황이면 내가 공부를 하고 싶은 욕망으로 다른 욕망들을 압도하고, 그 욕망을 타고서 열심히 공부해야 하는 것이다. 전쟁을 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전쟁에서 이기고 싶어하는 욕망이 후퇴하고 싶은 욕망을 압도해야 한다. 그런데 열망들이 통제가 안 되고 분열되어 버릴 수 있다. 그럴 때 그 인간은 황폐한 삶을 살게 된다. (교수님)

 

내 형제여, 그대가 정신이라고 부르는 그대의 작은 이성, 그것 또한 그대의 신체의 도구, 그대의 큰 이성의 작은 도구이자 놀잇감이다. // 그대는 라고 말하며 그 말에 긍지를 느낀다. 하지만 그대가 믿으려 하지 않는 그보다 더 큰 것이 있으니, 그대의 신체이자 신체의 큰 이성이 바로 그것이다. 큰 이성은 나 운운하지 않고, 나를 행한다.

An instrument of your body is also your little intelligence, my brother, which you call "spirit" - a little instrument and toy of your great intelligence. // "I," you say, and are proud of that word. But greater is that in which you do not wish to believe - your body with its great intelligence; it does not says "I," but does "I."

Werkzeug deines Leibes ist auch deine kleine Vernunft, mein Bruder, die du "Geist" nennst, ein kleines Werk- und Spielzeug deiner grossen Vernunft. // "Ich" sagst du und bist stolz auf diess Wort. Aber das Grössere ist, woran du nicht glauben willst, - dein Leib und seine grosse Vernunft: die sagt nicht Ich, aber thut Ich.

: 이원론자들은 육체와 분리된 이성을 인간의 본질로 간주하며 순수한 이성만이 참된 세계와 객관적인 진리를 인식할 수 있다고 믿었다. 순수 이성은 자신의 활동에 (Ich)”라는 이름을 붙였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같은 말을 떠올려보고는 자신의 인식능력에 무한한 긍지를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차라투스트라는 순수 이성을 가리켜 작은 이성에 불과하다고 못박는다. 순전한 의식 활동으로서는 결코 포착할 수 없는, 작은 이성을 능가하는 큰 이성이 있기 때문이다. 신체가 바로 그것이다. 정신성과 육체성, 그리고 힘의 의지의 총화인 신체는 단지 사유하는 능력에 국한된 순수 이성을 압도한다. (J2 발제문)

  작은 이성을 이원론적 정신으로 보기는 어렵다. 의식 차원에서 일어나는 여러 생각들, 인식 활동들 모두가 작은 이성이다. 건강한 힘에의 의지를 가진 사람들의 경우에도 의식적 사고를 한다. 니체가 이렇게 책을 쓰는 것도 자기의 작은 이성을 발동해서 쓰는 것이다. 물론 그 뒤에 큰 이성인 힘에의 의지가 있겠지만 말이다. 이원론자들의 정신에 대해서 니체는 작은 이성이라고 말하지 않고 순수 이성이라 말하지 않나. 순수 이성과 작은 이성은 같은 것이 아니다. 정리하자면, 큰 이성은 힘에의 의지, 작은 이성은 지성이다. (교수님)

  작은 이성은 자신을 (Ich)’라고 명명하며 자신이 인간의 중심이고 모든 활동을 관장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작은 이성이 그렇게 생각하는 배경에는 큰 이성인 신체가 감춰져 있다. 인간의 의식 활동과 사유 작용을 발생시키는 것은 사실 순수작은 이성이 아니라 힘의 의지로서의 신체이다. 에 대한 운운을 위시한 작은 이성의 모든 활동은 전부 큰 이성인 신체에서 생겨난다. 따라서 를 실질적으로 수행하는 것은 큰 이성이며, 큰 이성이야말로 의 활동을 결정하는 근본 원인이다. 그러므로 큰 이성이 작은 이성인 (Ich)를 행한다고 말할 수 있다. 마치 큰 이성이 작은 이성을 작은 도구이자 놀잇감처럼 부리며, 여러 의식 활동을 일으키도록 조종하는 셈이다. (J2 발제문) 나를 행한다는 말이 불분명하기는 하지만, 실질적으로 나의 생각과 행위를 지배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겠다.

  신체, 즉 큰 이성은 힘에의 의지 자체이다. 그리고 힘에의 의지가 도구로서 몸(감관)과 지성을 만들어냈다고 봐야 한다. 우리들에게 근본적인 건 욕망과 의지이다. 여기서 욕망과 의지는 흔히 우리가 의식하는 욕망이나 의지가 아니다. 의식하는 능력으로서 지성은 다 근원적인 욕망와 의지의 도구일 뿐이다. 그런 표현을 먼저 쓴 사람은 쇼펜하우어이다. 니체는 쇼펜의 사유도식을 받아들인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쇼펜하우어는 우리들의 모든 의식적인 욕망들, 감정들, 인식활동의 근저에 있는 의지의 본질을 생존 본능과 종족 보존 본능이라고 본 것에서 니체와 차이가 있다. 예컨대, 우리가 사랑에 빠졌을 때, 우리는 그 이성을 사랑하는 이유가 그 이성이 너무나 아름답고 매력적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라고 말한다. 그런데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사실 그 근저에 종족 보존 욕망이 그렇게 보도록 만드는 것이다. 성욕이 없다면 이성은 그냥 그저 그렇게 보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 이성에 빠질 때 성욕 때문에 빠졌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너무 좋은 사람이라서 빠졌다고 말한다. 쇼펜하우어가 보기에는 성욕의 장난일 뿐이다. 자식에 대한 사랑도 마찬가지다. 부모들은 자식이 귀하고 예뻐서 헌신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거기에도 종족 보존 본능이라는 자연이 심어준 욕망이 근저에 작동하고 있다. 왜 자연이 우리에게 자식을 아름답게 보이도록 만들어놓는가. 그렇지 않으면 자식을 키우는 일은 매우 힘들기 때문이다. 너무나 많은 노고가 들어가는 일인 건데 그러니 자연이 우리로 하여금 자기 자식을 눈에 넣어도 안 아픈 귀하고 예쁜 존재로 현혹시키는 것이다. 의식적 차원에서는 너무 귀한 존재니까 헌신한다라고 말하게 하더라도. (교수님)

 

Q. “힘에의 의지가 자기 자신의 도구로서 몸과 지성을 만들어냈다.”라고 할 때, ‘만들다라는 말은 잠재태가 현실태로 이행한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할까? (J2)

A. 니체 자신이 그러한 표현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니체는 감각과 정신은 도구이자 놀잇감이다.”(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4)라고 말했다. “만들어냈다는 표현은 상당히 지나친 감이 있다.

  힘에의 의지를 잠재태로, 감각과 정신을 현실태로 이해하긴 어렵다. 잠재태 개념은 예컨대 어린이는 잠재태로서 이성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라는 식으로 사용된다. 인간을 이성적 동물로 정의한 고대철학자들에게 어린이가 어른으로 성장해가는 과정은 아직 이성이 발달하지 않은 어린이가 잠재태로서의 이성적 능력을 현실태로 만들어가는 과정으로 이해되었던 것이다. 이와 달리 힘에의 의지는 어떤 때 잠재태로 존재하다가 어떤 때 현실화되는 것이 아니다. 힘에의 의지는 항상 현실태로서 존재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힘에의 의지는 항상 어떤 형식으로든 자기자신을 표현한다. 그 표현이 여러 감각활동과 의식활동이다. 어린이든 병자든 여러 감각활동과 의식활동을 하는데 이러한 활동들 모두 이들의 힘에의 의지의 표현이다. (교수님)

 

감각이 느끼고 정신이 인식하는 것은 결코 그 자체 안에 목적을 갖지 않는다. 하지만 감각과 정신은 자기들이 모든 것의 목적이라고 그대를 설득하려 한다. 그렇게 허황된 것이 감각이고 정신이다. // 감각과 정신은 도구이자 놀잇감이다. 그것들 뒤에는 자기가 놓여있다. 자기가 감각의 눈으로 찾고 정신의 귀로 경청하는 것이다.

What the sense feels, what the spirit knows, never has its end in itself. But sense and spirit would persuade you that they are the end of all things: that is how vain they are. // Instruments and toys are sense and spirit: behind them there is still the self. The self also seeks with the eyes of the senses, it also listens with the ears of the spirit.

Was der Sinn fühlt, was der Geist erkennt, das hat niemals in sich sein Ende. Aber Sinn und Geist möchten dich überreden, sie seien aller Dinge Ende: so eitel sind sie. // Werk- und Spielzeuge sind Sinn und Geist: hinter ihnen liegt noch das Selbst. Das Selbst sucht auch mit den Augen der Sinne, es horcht auch mit den Ohren des Geistes.

: 사정이 이러하니 감각”, “정신[작은 이성]이 인식하는 것”, “생각”, “느낌등 우리 의식상 에 떠오르는 모든 것들은 자체적인 목적을 갖는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이들은 큰 이성인 신 체의 존재를 모르고, “자기들이 모든 것의 목적이라고 믿는 오류에 빠져있다. (J2 발제문) 여기서 감각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신체, 감각 기관을 갖는 것으로서 신체이다. 결국 감각은 몸 전체를, 정신은 의식 차원에서 일어나는 여러 욕망들, 인식들을 모두 포함한 의식적인 정신을 가리키고, 자기는 힘에의 의지를 가리킨다.

  니체를 흔히 말하는 유물론자로 볼 순 없다. 니체가 단순히 신체만이 존재하고 정신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고 이해해서는 안된다. 우리의 의식활동은 모두 뇌에서 일어나는 전기화학작용일 뿐이다, 이게 유물론인데 니체는 그런 종류의 유물론자가 아닌 것이다. 그는 힘에의 의지가 우리들의 몸과 지성을 만들었다고 보는 거니까. 그래서 니체 철학은 유물론이 아니라 vitalism, 활력론이라고 불린다. 베르그송도 그런 철학사조에 속한다. (교수님)

 

자기는 늘 경청하고, 늘 찾는다. 자기는 비교하고 강제하고 정복하고 파괴한다. ‘자기는 지배하며 또한 의 지배자다. // 내 형제여, 그대의 생각과 느낌 뒤에는 좀 더 강력한 명령자, 알려지지 않은 현자가 서 있다. 그의 이름이 바로 자기. 그대의 신체에 자기가 살고 있고, 그대의 신체가 바로 자기.

Always the self listens and seeks; it compares, overpowers, conquers, and destroys. It rules, and is also the ruler of the "I". // Behind your thoughts and feelings, my brother, stands a mighty ruler, an unknown sage - it is called the subconscious self; it dwells in your body, it is your body.

Immer horcht das Selbst und sucht: es vergleicht, bezwingt, erobert, zerstört. Es herrscht und ist auch des Ich's Beherrscher. // Hinter deinen Gedanken und Gefühlen, mein Bruder, steht ein mächtiger Gebieter, ein unbekannter Weiser - der heisst Selbst. In deinem Leibe wohnt er, dein Leib ist er.

: ‘신체큰 이성에 이어 자기(das Selbst)’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자기는 감각과 작은 이성을 도구로 삼아 나(Ich)의 모든 활동을 규정하는 실질적인 지배자다. 인용문은 자기의 활동을 비교적 구체적으로(?) 명시한 대목이다. 자기는 비교, 강제, 정복, 파괴하는 활동 양상을 띤다. 백승영은 이 구절을 니체가 신체의 모든 활동을 해석(interpretation)으로 규정했다는 점과 연관 짓는다(백승영, 2022: 143-144). 니체에게 해석이란 삶을 위해 유용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별하고 비교하여 취사선택하는 활동이다. 이러한 선택행위는 몸의 감각 지각과 이성의 의식작용 등 신체의 모든 활동에 걸쳐 벌어진다. 가령 여럿이 같은 상황을 겪었다 해도 개인마다 어디에 초점을 맞추고 무엇을 선택적으로 지각하고 무엇을 배제했는지에 따라 다른 목격담이 진술된다. 해서 객관적 인식작용이란 불가능한 꿈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러한 신체의 해석작용에 대해 “‘자기는 비교하고 강제하고 정복하고 파괴한다라고 표현한다. 이뿐 아니라 자기는 우리의 감정까지도 결정한다. (J2 발제문)

  해석/선택은 몸의 감각 지각과 이성의 의식 작용 이면에 있는 무의식적 자기의 활동이다. 백승영이 말하는 것처럼 신체의 모든 활동에 걸쳐서 벌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런 것들 배후에서 감각작용과 이성작용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규정하는 것이다. 예컨대, 이원론 추종자들 스스로는 객관적으로 생각해보니까 이원론이 참이라서 믿는다고 말하겠지만, 그 이면에는 삶에 지치고 피로한 힘에의 의지가 그런 식의 활동을 하도록, 이원론적 세계관을 갖도록 만들고 있을 수 있다.

  니체의 ichselbst의 구분, 의식적 자아와 무의식적 자기의 구분은 프로이트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직접적이진 않더라도 니체에게 영향을 받은 심리학자들이 다시 영향을 끼치는 방식으로 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쳤을 수 있다. 프로이트 또한 우리의 의식 활동이 빙산의 일각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프로이트가 니체 책을 읽는 게 상당히 겁난다고 말했다고 한다. 자기만의 새로운 견해를 니체가 벌써 다 이야기한 것 같아서 그렇다는 것이다. (교수님)

 

그대의 신체에는 그대의 최고 지혜보다 더 많은 이성이 들어 있다. 그대의 신체가 무엇을 위해 다름 아닌 그대의 최고 지혜를 필요로 하는지 누가 알 것인가? // 그대의 자기는 그대의 와 그 나의 잘난 도약을 웃는다. ‘자기는 스스로에게 말한다. “사유의 도약과 비상이란 것들이 내게 무엇인가? 내 목적에 이르는 우회로다. 내가 바로 를 이끌어가는 끈이자 의 개념들을 귓속말로 알려주는 자다.”

There is more reason, sanity and intelligence in your body than in your best wisdom. And who knows why your body requires precisely your best wisdom? // Your subconscious self laughs at your "I", and its bold leaps. "What are these leaps and flights of thought to me?" it says to itself. "A detour to my purpose. I am the leading-string of the ego, and the prompter of its thoughts."

Es ist mehr Vernunft in deinem Leibe, als in deiner besten Weisheit. Und wer weiss denn, wozu dein Leib gerade deine beste Weisheit nöthig hat? // Dein Selbst lacht über dein Ich und seine stolzen Sprünge. "Was sind mir diese Sprünge und Flüge des Gedankens? sagt es sich. Ein Umweg zu meinem Zwecke. Ich bin das Gängelband des Ich's und der Einbläser seiner Begriffe."

: “그대는 이원론자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 일반적인 보통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자기의 이성이 자기 삶의 주체라고 생각하면서 그런 의식적인 자아에 대해서 긍지를 느끼며 내가 내 삶의 주인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사실 의식적 자아는 내 삶의 주인이 아니다. 의식하지 못하는 자기가 삶의 주인이다. (교수님)

 

자기에게 말한다. “여기서 고통을 느껴라!” 그러면 나는 고통스러워하면서 어떻게 하면 더는 고통스럽지 않을지를 곰곰이 생각하지. 바로 것을 위해서 는 생각이라는 것을 해야 하는 것이다. // ‘자기에게 말한다. “여기서 쾌감을 느껴라!” 그러면 는 기뻐하면서 어떻게 하면 자주 기뻐할 수 있을지를 곰곰이 생각하지. 바로 이것을 위해서 나는 생각이라는 것을 해야 하는 것이다.

The subconscious self says to the "I": "Feel pain here!" Then the "I" suffers, and thinks how it might end its suffering - and that is why it is made to think. // The subconscious self says to the "I": "Feel desire or pleasure or joy here!" Then the "I" is happy, and thinks how it might often be happy again - and that is why it is made to think.

Das Selbst sagt zum Ich: "hier fühle Schmerz!" Und da leidet es und denkt nach, wie es nicht mehr leide - und dazu eben soll es denken. // Das Selbst sagt zum Ich: "hier fühle Lust!" Da freut es sich und denkt nach, wie es noch oft sich freue - und dazu eben soll es denken.

: 우리가 느끼는 고통과 기쁨의 감정도 의 바람과는 전혀 관계없이 오로지 자기의 명령에 따른 행위다. 원한다고 느낄 수 있는 일도 아니며 원하지 않는다고 피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로서는 자기의 명령에 따라 고통이나 기쁨을 느끼면서 어떻게 하면 이 고통이나 기쁨을 덜어내거나 더할 수 있을지를 계산하고 방법을 생각해내는 게 전부다. 그렇다면 자기는 무엇을 위해 명령하는가? 자기의 목적은 무엇일까? 자기, 그러니까 힘의 의지의 가장 큰 바람은 자기 자신을 넘어서 창조하는 일이다. 의지는 자기를 고양하고 강화하여 자기 자신을 뛰어넘기를 온몸으로 열망한다. 결국 무의식적인 자기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라는 의식은 감각, 인식, 감정은 물론이고 최고 지혜사유의 도약과 비상에 이르는 온갖 노고를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J2 발제문)

  니체의 예를 들어서 이해해보자. 니체는 원래 고전문헌학자였다. 그런데 고전문헌학 교수가 되기 전부터 고전문헌학에 대해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물론 교수가 되어서 어머니는 엄청 기뻐했는데, 정작 니체는 고전문헌학에 환멸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니체는 고전문헌학자를 과거의 텍스트를 훈고학적으로 파고들어서 새로운 입법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로 이야기했다. 반면 철학자는 입법가라고 이야기했다. 철학자는 사람들이 살아가야 할 방향, 규범을 제시한다는 의미에서. 자기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은데 고전문헌학자로서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없으니, 니체는 바젤 대학에 철학과 교수로 전과하고 싶다고 청원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그 청원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니체는 고전문헌학 교수를 계속 할 수밖에 없었다. 니체의 병은 교수활동을 하면서 악화되었다. 니체는 그 병이 힘에의 의지가 만들어낸 거라고 보았다. 자기로 하여금 고전문헌학 교수직을 그만두게 하기 위해서. 우리 주변에서도 직장에 취업했는데 그 직장이 마음에 안 들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해서 그냥 직장에 다니다가 병이 드는 사람을 볼 수 있다. 그 사람은 그 병을 계기로 그만둘 수도 있다. 병은 단순히 병이 아니라 내면의 힘에의 의지가 촉구하는 명령이다. 니체는 결국 고전문헌학 교수직을 그만두고서 홀가분함을 느꼈다. 힘에의 의지가 고양된 상태에서 기쁨을 느끼게 된 것이다.

  이 부분에서도 자아(ich, 작은 이성)와 자기(selbst, 큰 이성)를 구분한다. 니체는 병에 들어 고민했을 것이다. 어떻게 해야 병을 나을까. 그때 그 고민은 니체의 작은 이성이 하는 것이다. 그러나 니체를 그렇게 고민하도록 만드는, 그러면서 어떤 행위를 하도록, 즉 고전문헌학 교수직을 버리도록 몰아대는 그런 힘이 있는데, 그게 바로 니체의 큰 이성이다. (교수님)

 

신체를 경멸하는 자들에게 내 한 마디 하겠다. 저들의 경멸도 저들의 존중이 만든 것이라고. 그런데 존중과 경멸을 창조해낸 것, 그리고 가치와 의지를 창조해낸 것은 무엇이었을까? // 창조하는 자기가 존중과 경멸을 쾌감과 고통을 창조해낸 것이다. 창조하는 신체가 의지의 손으로 삼으려고 정신을 창조해낸 것이다.

I want to speak to the despisers of the body. It is their respect and esteem that produces their despising. What is it that created respecting and esteeming and despising and worth and will? // The creative subconscious self created for itself respecting and esteeming and despising, it created for itself joy and sorrow and pain. The creative body created spirit as a hand of its will.

Den Verächtern des Leibes will ich ein Wort sagen. Dass sie verachten, das macht ihr Achten. Was ist es, das Achten und Verachten und Werth und Willen schuf? // Das schaffende Selbst schuf sich Achten und Verachten, es schuf sich Lust und Weh. Der schaffende Leib schuf sich den Geist als eine Hand seines Willens.

 

그대 신체를 경멸하는 자들이여 어리석음과 경멸에 빠져있을 때조차도 그대들은 전히 그대 의 자기에 봉사하고 있다. 내가 말하노니, 그대들의 자기스스로가 죽기를 원해서 생에 등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

Even in your folly and despising you each serve your self, you despisers of the body. I tell you, your very self wants to die, and turns away from life.

Noch in eurer Thorheit und Verachtung, ihr Verächter des Leibes, dient ihr eurem Selbst. Ich sage euch: euer Selbst selber will sterben und kehrt sich vom Leben ab.

: 그렇다면 이원론자들은 왜 여태껏 그렇게나 잘못된 주장을 펼쳐왔는가? 차라투스트라는 육체를 경멸하는 자들이 형이상학적 이원론이라는 어리석음에 빠져 육체를 경멸하고 있을 때조차도 그들이 자기 자신의 자기에 봉사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앞서 살펴본 논의를 적용해보면, 이원론자들의 작은 이성은 그들의 큰 이성인 자기의 명령에 따라 형이상학적 이원론을 고안했다는 말이 된다. 달리 말해 이원론자들의 이성이 형이상학적 이원론이 객관적인 사실이며 진리라고 독자적으로 사유하고 판단한 것이 아니다. 곧 순수한 정신이 육체보다 실제로 우월하고 육체가 정신보다 열등해서 육체를 경멸해온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원론자들의 병들고 약한 자기가 그토록 육체를 경멸하게끔 그들 자아를 추동하고 이끌어온 것이다. (J2 발제문)

 

그대들의 자기는 그 스스로가 가장 바라는 일, 그러니까 자기 자신을 넘어서 창조하는 일을 더는 할 수가 없다. 그것이 그가 가장 바라는 것이자 그의 온 열망인데도 말이다. // 이제 자기가 그 일을 성취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그래서 그대들의 자기는 몰락을 원하는 것이다. 그대 신체를 경멸하는 자들이여. // 그대들의 자기가 몰락을 원하기에 그대들은 신체를 경멸하는 자가 되었다! 그대들이 더는 자기 자신을 넘어서 창조할 수 없기 때문이다.

No longer can your subconscious self do that which it desires most: to create beyond itself. That is what it desires most; that is all its fervour. // But it is now too late to do so: so your self wishes to go under, you despisers of the body. // Your subconscious self wants to go under, to perish; and that is why you have you become despisers of the body. For you are no longer able to create beyond yourselves.

Nicht mehr vermag es das, was es am liebsten wilI: - über sich hinaus zu schaffen. Das will es am liebsten, das ist seine ganze Inbrunst. // Aber zu spät ward es ihm jetzt dafür: - so will euer Selbst untergehn, ihr Verächter des Leibes. // Untergehn will euer Selbst, und darum wurdet ihr zu Verächtern des Leibes! Denn nicht mehr vermögt ihr über euch hinaus zu schaffen.

: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이원론자들의 자기는 왜 육체를 경멸하도록 몰아붙였는가? 이원론자들이 주장하는 피안의 세계가 문제의 실마리를 제공해 준다. 이원론자들의 작은 이성이 허구적인 피안의 세계를 고안한 것은 그들의 자기가 현세에서 자기 자신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는 대신 피안을 짓도록 지시했다는 의미가 된다. 현세에서는 더 이상 자기 자신을 넘어설 수 없을 만큼 힘의 의지가 병든 탓이다. 하지만 병에 걸렸다 하더라도 어지간한 경우라면 올바른 처방을 찾기 마련이다. 그런데 지금 이원론자들은 그런 방법을 찾기는커녕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거나 오히려 해로운 처방인 피안의 세계에 매달리고 있으니. 이미 건전한 판단이 불가할 정도로 병이 깊다는 사실을 짐작해볼 수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런 모습을 보고 그대들의 자기스스로가 죽기를 원해서 생에 등을 돌리고 있는 것이라며 그대들의 자기는 몰락을 원하는 것이라고 일갈한다. 그런 신체로는 결코 초인에 이르는 다리가 될 수 없다고 전하면서. (J2 발제문) 첨언하자면, 이 경우 몰락은 긍정적인 의미가 아니다. 신체경멸자들은 그냥 죽기를 바란다는 의미이다. (같은 용어라도 맥락에 따라 다른 의미로 쓴다는 사실을 유념하라.) (교수님)

 

그 때문에 그대들은 이제 생과 대지에 분노한다. 그대들의 경멸하며 홀겨보는 시선에는 의식되지 않은 시샘이 도사리고 있다.

And therefore are you now angry with life and with the earth. An unconscious envy speaks out of the squinting glance of your contempt.

Und darum zürnt ihr nun dem Leben und der Erde. Ein ungewusster Neid ist im scheelen Blick eurer Verachtung.

: 분노 - 신체경멸자들은 삶과 대지에 대해 원한을 가지고 있다. 자신은 영원한 삶, 고통과 고난이 없는 삶을 살고 싶은데, 삶과 현실세계인 대지가 그걸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무의식적인 질투 분명하지 않지만 건강하게 삶과 대지를 즐기는 자, 기쁘게 살아가는 자들, 이런 자들에 대한 무의식적인 질투가 아닐까 싶다. (교수님)

 

세계관과 생명력

: 철학, 특히 형이상학은 세계 전체를 문제 삼는다. 그런데 세계 전체에 대한 객관적인 고찰이나 탐구가 가능할까. 유물론자나 관념론자나 모두 합리적 근거에 따라 자신의 입장을 지지한다고 하는데, 이들은 세계 전체에 대한 전체적 인식이 가능하다는 전제를 깔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인식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전체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세계를 우리가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생을 숲에 갇혀 산 사람이 숲이 크다, 아름답다 이렇게 객관적으로 이야기할 수 없다. 밖에서 보고 비교해봐야 가능한 이야기다. 인생과 세계도 마찬가지다. 니체는 결국 철학이라는 것이 삶과 전체를 문제삼지만 객관적인 인식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그렇다면 여러 철학이나 종교는 다 어디서 비롯되는 것인가. 그냥 각자의 힘에의 의지의 상태, 각자의 정신 총체적인 상태에 따라 세계와 삶을 이렇게 저렇게 본다는 것이다. 생명력이 크게 떨어진 사람들은 세계를 염세적으로 보거나 천국이 있다든가 지극히 복된 유토피아 세계가(공산사회 등이) 있다고 믿게 된다. 각자 자기가 처한 정신적 상태에 따라서 이 사람은 이런 철학, 저 사람은 저런 철학, 이 사람은 이런 종교, 저 사람은 저런 종교, 혹은 무신론을 신봉하게 된다.

  그렇다면 그런 관점들이 다 옳다는 것인가. 그건 아니다. 니체는 상대주의는 아니다. 그런 세계관 중에 어떤 것은 사람들을 건강하게 만들고 어떤 것은 사람들을 병들게 만든다. 그 중 사람들을 건강하게 만드는 세계관이 객관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현실을 잘 반영하는 세계관이 아닌가 니체는 생각한다. 우리가 세계를 눈으로 볼 때, 건강한 눈으로 볼 수도 있고, 흐릿한 눈으로 볼 수도 있다. 우리는 후자로 드러난 세계가 세계의 진상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전자의 눈으로 본 세계가 세계의 진상이라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건강한 어떤 생명의 상태가 있고, 건강한 생명에 보인 세계가 진상일 거다. 그렇지만 생명이 병들어 있는 사람에게 건강한 사람이 보는 것과 똑같이 보게 하기는 불가능하다. 결국 철학적인 논쟁은 아무리 논리를 정치하게 만들어도 해결되지 않는다. 아무리 정치한 논리를 제기해도 기독교를 독실하게 믿는 사람들은 기독교가 맞다고 한다. 생명력의 상태가 바뀌지 않는 한 논리만을 가지고서 철학적 문제를 해결하고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다는 믿음은 니체에게는 순진한 환상일 뿐이다. (교수님)

 

 

(수업 : 박찬국, <존재론연습> (20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