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현대대륙철학 일차문헌

[니체] 「창백한 범죄인에 대하여」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부 6장)

현담 2023. 4. 20. 19:58

보라, 창백한 범죄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에는 위대한 경멸이 서려 있구나. // “나의 자아는 극복되어야 할 무엇이다. 나의 자아는 내게 인간의 위대한 경멸이다.” 이렇게 그의 눈은 말하고 있다. // 그 스스로 자신을 판결했다는 것, 이것이 그의 최고 순간이었다. 그러니 이 고매한 자를 다시 그의 저열함으로 되돌리지 마라!

Behold. the pale criminal has bowed his head: out of his eye speaks the great contempt. // "My ego is something which is to be overcome: my ego is to me the great contempt of man": that is what his eyes say. // When he judged himself - that was his supreme moment; let not the exalted one relapse again into his baseness!

Seht, der bleiche Verbrecher hat genickt: aus seinem Auge redet die grosse Verachtung. // "Mein Ich ist Etwas, das überwunden werden soll: mein Ich ist mir die grosse Verachtung des Menschen": so redet es aus diesem Auge. // Dass er sich selber richtete, war sein höchster Augenblick: lasst den Erhabenen nicht wieder zurück in sein Niederes!

: 니체는 이미 신체를 경멸하는 자들에 대하여에서 자아(Ich)와 자기(Selbst)의 구분을 명확히 하였다. 이 구분이 여기서 그대로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재판정에서 판관들은 범죄인에게 사형선고를 내리기 전 범죄인이 고개를 끄덕여 자신의 죄를 인정하기를 원한다. 범죄인은 범죄자로서 규정된 자아, 스스로조차 경멸스러워 마지않는 그러나 이 경멸은 극복을 이끌어낸다는 점에서 위대하다- 그 자아를 극복하기 위해서 사형을 받고자 고개를 끄덕인다. 이 순간이 범죄인이 이를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순간이고, 범죄인이 가장 고매한 자가 되는 순간이다. 그는 어쩌면 그의 인생에서 최초로 스스로 자신을 판결하여 인간으로서의 초극을 비로소 실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범죄인은 결국 사형을 당하여 파멸할 것이다. 그러나 줄타기 곡예사가 줄에서 떨어져 죽기 전 내딛은 그 고귀한 한 걸음은 그를 한 걸음이라도 초인에 가깝게 만들었다.

  역자 백승영은 나의 나(자아)를 나의 본모습으로 해석하고, 이 문장을 나는 사람들에게서 경멸받는다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틀린 해석이다. 단지 사람들에게서 경멸받는 사태는 그 스스로 자신을 판결했다는 것의 완전히 반대이기 때문이다. 또한 사회적 선악관을 가진 사람들의 경멸은 그를 고매한 자로 만들 수 없고 경멸의 사태를 그의 최고 순간으로 만들 수 없음이 분명하다. (D 발제문)

  재판정에서 재판관들은 자신들의 판결을 범죄인이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며 그가 고개를 끄덕이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재판정에서 범죄인이 고개를 끄덕였을 때, 그가 재판에 순응했다거나 재판관들의 판결을 받아들였다고 보긴 어렵다. 재판관들은 범죄인을 단순히 돈을 뺏기 위해서 혹은 복수를 하기 위해서 사람을 죽인 저열한 인간으로 치부하고 있지만, 위대한 경멸이 눈에 서린 범죄인이 스스로 자신을 판결한 사태는 그가 고매한 자가 되는 최고 순간으로 긍정적으로 서술되고 있기 때문이다. 범죄인이 고개를 끄덕였다는 것은 범죄인이 자신을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나름대로 노력하였던 자로, 비록 그것이 살인이라는 잘못된 방식을 통해서였지만 기존의 그 자신을 넘어서려 시도했던 자로 스스로 판결했다는 것이다. 니체는 우상의 황혼』 「어느 반시대적 인간의 편력45절에서 범죄인을 병이 들어버린 강한 인간이다.”라고 말한다. 니체에 따르면, 범죄인은 열정으로 가득한 존재이며 나폴레옹처럼 새로운 가치와 질서를 창조할 수 있었던 인간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창백한 범죄인에 대하여에서 범죄인은 위대한 경멸의 소지를 갖춘 인간으로 볼 수 있다. (교수님 D 프로토콜)

 

자기 자신 때문에 그토록 고통받는 자에게는 빨리 죽는 것 말고 다른 구원은 없다.

There is no salvation for him who thus suffers from himself, unless it be speedy death.

Es giebt keine Erlösung für Den, der so an sich selber leidet, es sei denn der schnelle Tod.

: 자신 안의 열정들의 혼란 때문에 크게 고통받고 있지만 그것에 대한 제대로 된 해결책이 없어서 그 고통을 벗어날 수 없는 범죄인에게는 빨리 죽는 것 말고는 다른 구원은 없다.” 니체는 아침놀202번에서 범죄자에게는 [...] 형편이 좋지 않을 경우에는 치유될 것 같지 않다는 사실을 아주 분명하게 제시해야만 한다. 자기 자신에게도 혐오의 대상이 된 치유불가능한 범죄자에게는 자살의 기회가 제공되어야 한다.”라고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창백한 범죄인에 대하여에서 빠른 죽음만이 자신의 구원이 된 범죄인은 자신을 죄인이라 단죄하고 스스로 혐오하는 상태에 깊이 빠진 것으로 보인다. (교수님 D 프로토콜)

 

그대 판관들이여, 그대들은 복수가 아니라 동정으로 범죄인을 죽여야 한다. 그리고 명심하라. 죽이면서 그대들 스스로가 삶을 정당화해야 한다는 것을. // 그대들이 죽이는 자와 그대들이 화해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대들의 슬픔이 위버멘쉬에 대한 사랑이 되도록 하라. 그렇게 그대들의 여전히 살아있음을 정당화하도록 하라!

Your slaying, you judges, shall be pity, and not revenge; and in that you slay, see to it that you yourselves justify life! // It is not enough that you should reconcile with him whom you slay. Let your sorrow be love to the overman: thus will you justify your own survival!

Euer Tödten, ihr Richter, soll ein Mitleid sein und keine Rache. Und indem ihr tödtet, seht zu, dass ihr selber das Leben rechtfertiget! // Es ist nicht genug, dass ihr euch mit Dem versöhnt, den ihr tödtet. Eure Traurigkeit sei Liebe zum Übermenschen: so rechtfertigt ihr euer Noch-Leben!

: 범죄인을 판결하는 재판관들은 범죄인이 사회질서를 무너뜨린 악인이므로 사형이라는 복수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재판관들은 범죄인이 내부의 열정을 통합하지 못하여 고통을 겪는 병자이고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살인을 저질렀다고 생각해야 하며, 그가 겪는 고통에 동정하여 사형으로 그를 구원해야 한다. 이렇게 범죄인과 일종의 화해를 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재판관들은 범죄인이 이르지 못했던 내부의 열정들을 통합하는 인간, 즉 초인이 되겠다는 열정으로 범죄인에 대한 동정과 슬픔을 승화시켜야 한다. 인간은 이렇게 초인이 되고자 할 때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이 정당화되고 진정한 삶의 의미를 갖게 된다. (교수님 D 프로토콜)

 

이라고 불러야 하되 악한이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 “병자라고 불러야 하되 무뢰한이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 “바보라고 불러야 하되 죄인이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

"Enemy" shall you say but not "villain," "invalid" shall you say but not "wretch," "fool" shall you say but not "sinner.“

"Feind" sollt ihr sagen, aber nicht "Bösewicht"; "Kranker" sollt ihr sagen, aber nicht "Schuft"; "Thor" sollt ihr sagen, aber nicht "Sünder".

: 재판관들은 범죄인을 악한(Bösewicht)”이나 악당(무뢰한, Schuft)”이라 불러서는 안 된다. 그렇게 부를 때는 범죄인에 대한 경멸과 그렇게 부르는 자신에 대한 오만이 깔려 있다. , 암묵적으로 나는 선인이고 너는 악인이다.’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재판관들은 범죄인을 (Feind)”이라 불러야 한다. 적이라고 부를 때는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인정이 깔려 있다. 재판관들에게 범죄인은 나름대로 자기를 초극하려는 시도를 했다는 점에 있어서 자신들보다 조금 더 나은 인간일 수도 있고, 그런 의미에서 자신들이 뛰어넘어야 될 적이 될 수 있다. 적으로서 범죄인은 재판관들이 더 훌륭하게 자기 자신을 극복해야겠다는 깨우침을 불러일으키는 사람이다.

  재판관들은 범죄인을 죄인(Sünder)”이라 불러서는 안 된다. 그가 겪은 고통이 죄인 것도 아니고 그가 사회에 끼친 해악이 벌이라는 복수로 앙갚음되어야 할 죄도 아니기 때문이다. 재판관들은 범죄인을 병자바보라고 불러야 한다. 그는 자신의 열정들 사이에서 일어난 갈등에 시달렸던 병자이자, 엉뚱하게 자신의 열정들을 해석하여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한 바보이기 때문이다. (교수님 D 프로토콜)

 

*행위 이전의 착란(madness before the deed, Wahnsinn vor der That)

: 범죄인은 뱀들의 얽히고설킴이다.” 뱀은 독수리와 함께 차라투스트라의 수호 동물로 주로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는데 여기서는 니체가 병이 든범죄인을 규정하는 데에 사용하면서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실 은 뱀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좀처럼 서로의 곁에서 쉬지 못하는 거친 뱀들의 문제 내지는 그런 뱀들이 세상으로 뿔뿔이 흩어져 먹잇감을 찾게되면서 발생하는 문제이다. 환희와 열정에 대하여절에서 니체는 덕들의 충돌이 악이며 그것이 인간을 황폐화시킨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구도 하에, 니체는 범죄인 안에서 열정들로부터 비롯된 덕들(“뱀들”)이 하나의 덕인 힘에의 의지에 기여하지 않고 서로 반목하며 각자 자신의 몫을 찾고 자신 이외의 것의 몫을 빼앗으려 함으로써 범죄인이 건강한 인간이 아닌 질병더미가 된 것으로 묘사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병든 인간인 범죄인은 여기서 범죄인은 살인과 강탈을 해서 재판에 오른 범죄인이므로- 아마 자신의 사나운 기질, 강한 힘에 대한 욕망 등을 주체하지 못하고 여기저기 분출하고 다녔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 그때마다 그는 사회에 의해 제재받고 처벌받았을 것이다. 그렇게 신체는 고통받고, 갈구했던 것은 얻지못한 범죄인의 가련한 영혼은 자신을 불행하게 했던 사회에 대한 분노에 가득 차 자신의 열정들을 제멋대로해석한다. ‘, 나는 도덕적으로 허용되지 않는 살인을 해야 속이 시원하겠구나. 나는 사회가 허락하지 않는 칼춤을 춰야 좀 후련하겠구나.’ 그의 정신은 사회의 전통적 세계관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자신을 악인의 위치에 놓는다. 그러고는 세상으로 손을 뻗어악인으로서의 자신에게 희생될 먹이를 세상에서 찾는다. 사회에서 지금[근대] 악이라 불리는 악이그를 덮쳐버린 것이다.

  그러나 한때[중세]는 의심과 자기의지가 악이었다.” 기독교의 신이 세상을 지배하던 시절, 가장 큰 죄악은 신을 의심하는 것과 의지의 방향이 신이 아닌 자신으로 향하는 것이었다. 지금의 범죄인과 달리 그 시절 병든 자는 사회에 의해 이단자나 마녀로 규정되어 사회에 의해 고통받았으며, 그 시절 악이라 불리는 악이 그를 덮쳐 그 자신조차 자신을 이단자와 마녀로 규정하고 이단자나 마녀로서사회에 보복하려 했다. 지금과 다른 선악의 규정 속에서였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이 반복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전통적 세계관을 받아들인 병자의 정신이 자기를 악인으로 규정하고 이른바 악행을 원하는 사태, “악이라 불리는 악이 병자를 짚어삼키는 사태를 일컬어 니체는 행위 이전의 착란이라 부른다. 여기서 잠시 번역에 관하여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발제자가 앞서 착란으로 번역한 “Wahnsinn”을 역자 백승영은 망상광기라는 서로 다른 한국어 단어로 번역하고 있다. 백승영은 본 장에서 “Wahnsinn”을 부정적인 의미로 해석하고자 하는 구절에서는 망상으로, 긍정적인 의미로 해석하고자 하는 구절에서는 광기로 번역하는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역자는 그대들의 선한 자들이 파멸하게끔 하는 것으로서 “Wahnsinn”이 등장할 때는 망상으로 번역하지만, 바로 아래 문단에서 진리라고, 성실이라고, 정의라고 불리기를바라는 것으로 등장할 때는 광기로 번역한다. (cf. 그런데 발제자는 바로 이 대목에서만 “Wahsinn”이 긍정적인 의미로 쓰였으므로 광기로 옮기는 것이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백승영은 행위 이전의 “Wahnsinn”을 언급하는 몇몇 대목들에서도 광기로 종종 옮기고 있다. 발제자는 이러한 대목들에서 역자의 번역을 통한 해석적 개입이 틀렸다고 생각하여 착란으로 옮긴다.) 발제자는 역자의 이러한 번역어를 통한 해석적 개입의 의도를 인정하지만, “Wahnsinn”이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해석되는 경우에 망상대신 착란으로 번역하고자 한다. 1) 독일어 Wahndelusion(착각), Sinnsense(감각)를 의미한다. 주어진 감각을 이상하게 해석하여 착각한다는 의미가 “Wahnsinn”에 담긴 것이다. 그런데 범죄인은 전통적 세계관을 받아들인 정신을 통해서 세상으로 손을 뻗어대는것으로 묘사되고 있으니 착각보다는 정신착란이라는 한국어 단어를 연상시키는 단어 착란이 좋다고 생각했다. 2) “망상말도 안 되는 상상이라는 의미로 주로 이해된다. “착각이나 착란이 주는 감각의 틀린 해석이라는 의미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 3) 서설 3그대들이 접종되어야 할 광기에서 광기“Wahnsinn”이다. 이때는 명백히 긍정적인 의미로 쓰였으며 착란이라는 번역어가 어색하다. 본 장에서도 마찬가지로 긍정적인 의미로 쓰일 때는 광기로 쓰는 것이 일관적으로 보인다. 다만, ‘정신이 온전치 않음이라는 의미의 광기가 긍정적으로도 부정적으로도 사용될 수 있기에 착란”/“망상광기로 나누어 번역하지 말고 일관되게 광기로 번역하여 독자에게 온전히 해석을 맡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D 발제문)

  범죄인은 열정들을 통합하지 못한 사람이고 그러다보니 고통스러워하는 자이다. 범죄인의 고통의 원인은 열악한 외부 환경이 아니라 내부의 열정들의 갈등이다. 만약 범죄인이 자신의 고통스러워하는 이유를 열정들의 통합 부재에서 찾았다면 통합하려는 방법을 모색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자기가 겪는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살인을 택한다.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잘못 택한 것이다. 이렇게 범죄인은 자신의 열정을 통합하지 못해서 겪는 고통을 살인을 통해서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한다. 이것이 행위 이전의 착란이다.

  참고로 니체는 전통적인 도덕을 비판하긴 하지만 살인이나 도둑질을 용인하는 것은 아니다. 니체는 공동체에 책임지는 것 또한 주요 덕목으로 보았다. 그러나 그것을 정당화하는 근거를 신의 말씀이나 양심의 소리 따위에서 찾지 않고 힘에의 의지의 고양에서 찾은 것이다. 달리 말하면, 인간을 더 고귀하고 기품있는 인간으로 만드는 것에서 찾은 것이다. (교수님 D 프로토콜)

 

*행위 이후의 착란(madness after the deed, Wahnsinn nach der That)

: 범죄인은 하나의 덕을 원하면서 자신의 열정들을 자신의 덕들로 해석하여 유능하게 이용하지 못한다. 그는 사회의 선악관을 받아들여 자신을 악인으로 규정하고 자신의 열정들을 악행하고자 하는 열정으로 해석해버렸다. 구체적으로는 자신이 ”, “칼의 행복따위를 원한다고 이해해버린 것이다. 그런데 그는 사람을 죽이기 전에는 이렇게 착란을 일으키다가도 사람을 죽인 후에는 또 다르게 생각한다. 그는 자신의 범죄에 놀란 가련한 이성에 귀를 기울인다. 그의 이성은 그에게 다음과 같이 속삭인다: ‘너 설마 피를 원한 거니? 칼의 행복을 원한 거야? 너가 설마 그런 사회적으로 도저히 용납이 안 되는 극악무도한 의도로 범죄를 저지른 거라고? 강탈하려던 거잖아. 복수하려던 거잖아.’

  범죄인은 솔직하게 자신의 착란을 인정하고 부끄러워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이미 사회의 선악관을 받아들이고 있기에 그 선악관 하에서 자기가 피에 목마른 악마라 사실 병든 착란자일 뿐이지만- 자인하기보다는 강탈자나 복수자 정도로 인정받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가련한 이성의 착란 직면 거부와 자기 기만의 결과는 결코 안락하지 않다. “이제 죄라는 납덩이가 다시 한번 그를[범죄인을] 짓누른다.” 범죄인은 이제 다음과 같이 생각할 것이다: ‘내가 강탈하려다가 살인을 저질러버렸다고? 내가 복수하려다가 살인을 저질러버렸다고?’ “붉은 옷을 입은 판관은 범죄인의 반대편 판관석에 앉아 이러한 범죄인의 심리를 그대로 반영하여 말한다. “이 범죄인이 왜 살인을 했지? 그는 강탈하려 했던 것이었는데.”

  이렇게 범죄인이 죄에 짓눌려 창백해지는 사태의 배후에는 또다른 착란이 작동한다. 그것은 자신이 자기 행위의 행위자라는 착란이다. “그는 늘 자신을 어떤 행위의 행위자로 여겼다.” 그런데 실상은 그가 행위를 했을 때 그는 자신의 행위와 동시발생(Gleichwüchsig = gleich : 같은, 같게 + wachsen : 자라다, 발생하다)”할 뿐이다. 늘 행위 배후의 명령자는 힘에의 의지이다. 범죄인의 자기(Selbst)’가 아니라 행위자로서의 자신이 행위의 주인이라는 착란은 예외가 본질로 전도된” “행위에 대한 관념(idea, Bild)”인 것이다. 이러한 잘못된 관념은 범죄 행위 이후에 범죄인을 꼼짝없이 범죄자로 낙인찍히게 만들면서 더 이상 다른 행위로 나아가지 못하게 한다. 마치 한 줄의 금이 암탉을 꼼짝 못 하게 묶어놓는것처럼 말이다. 범죄인 자신이 범죄자이며 죗값을 치러야한다는 착란, 그것이 바로 행위 이후의 착란이고 마침내 창백한 범죄인을 만들어낸다. (D 발제문)

  범죄인이 범죄를 저지를 때, 그는 자기 열정들의 혼란에서 비롯된 고통에 못이겨서 살인을 저지른 것이다. 하지만 범죄인이 범죄를 저지른 이후, 그가 자신의 살인 행위에 대해 가지는 표상은 강도짓 혹은 복수를 위해 살인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이러한 표상은 살인 행위를 자신과 타인에게 납득시킬 수 있게 하지만, 범죄인을 창백하게만든다. 이제 범죄인은 돈이나 복수 때문에 살인을 한 인간으로 자신을 규정하고 그로써 자신을 악인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행위 이후의 착란이다.

범죄인은 늘상 범죄를 저지르던 사람이 아니라 열정들의 혼란을 해결하지 못하여 어쩌다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다. 그러나 범죄인은 어쩌다 자신이 저지른 범죄 행위 하나로 자신을 악한 인간으로 규정하고 단죄한다. “예외가 본질로 전도된 셈이다. 실상 범죄인은 악한 인간이라 아니라 자신의 열정을 통제하지 못하는 병자이다.

  또한 인간의 행위라는 것은 그때그때의 힘에의 의지의 상태에서 비롯되는 것이기에 인간은 항상 자신의 행위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로운 주체가 아니다. 범죄인은 사실 힘에의 의지가 병든 상태라 어쩌다 범죄를 행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범죄인은 자신을 어떤 행위도 할 수 있었던 자유로운 행위 주체로 생각하고, 자신이 나쁜짓인 줄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범죄를 행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그는 양심의 가책 내지는 죄책감에 시달리게 된다. (교수님 D 프로토콜)

 

그러나 이런 말을 그대들은 들으려 하지 않는다. 이런 말은 그대들의 선한 자들에게 해로울 뿐이라고 그대들은 내게 말한다. 그런데 그대들의 선한 자들이 대체 내게 뭐란 말인가!

But this will not enter your ears; it hurts your good people, you tell me. But what does it matter to me about your good people!

Aber diess will nicht in eure Ohren: euren Guten schade es, sagt ihr mir. Aber was liegt mir an euren Guten!

: 소위 말하는 선량한 자들은 범죄인이 악한이고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저질렀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들은 범죄인이 강한 열정을 가졌던 사람이고 다만 그것을 통제하지 못했던 사람이라는 말을 말세인인 자신들의 안락함을 위협하는 해로운 말로 치부한다. (교수님 D 프로토콜)

 

그대들의 선한 자들은 많은 점에서 내게 구역질을 일으킨다. 하지만 정녕 저들의 악은 그렇지 않다. 나는 저들도 저들 자신을 파멸로 몰아갈 착란을 지녔으면 하고 바란다. 저 창백한 범죄인이 그랬듯이!

Many things in your good people cause me disgust, and truly, not their evil. I would that they had a madness by which they succumbed, like this pale criminal!

Vieles an euren Guten macht mir Ekel, und wahrlich nicht ihr Böses. Wollte ich doch, sie hätten einen Wahnsinn, an dem sie zu Grunde giengen, gleich diesem bleichen Verbrecher!

: 범죄인들과 대비되는 그대들의 선한 자들”, 즉 사회에서 선하다고 불리는 자들은 니체에게는 오히려 혐오스럽다. 그들은 범죄인처럼 이윽고 한 발이라도 초인에 가까워질 수 있는 계기가 없는 채로 사회에 순응하여 살기 때문이다. 니체는 차라리 범죄인처럼 그들도 착란으로 인해 한 걸음이라도 앞으로 내딛고 파멸했으면 한다. (D 발제문)

 

진정, 나는 저들의 광기가 진리라고, 성실이라고, 정의라고 불리기를 바랐다! 하지만 저들은 오래 살기 위해서만, 가여운 안일 속에서 살기 위해서만 자신들의 덕을 갖추고 있다.

Truly, I would that their madness were called truth, or fidelity, or justice: but they have their virtue in order to live long, and in wretched self-complacency.

Wahrlich, ich wollte, ihr Wahnsinn hiesse Wahrheit oder Treue oder Gerechtigkeit: aber sie haben ihre Tugend, um lange zu leben und in einem erbärmlichen Behagen.

: 또한 니체는 저들의 악”/“저들의 광기”, 즉 사회에서 악/광기로 규정되는 것이 진리, 성실, 정의의 위치로 올라섰으면 한다. 여기서는 아마 착란으로 왜곡되기 이전에 범죄인이 가졌던 강한 열정들을 “Böse”/“Wahnsinn”으로 일컫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들은 본래 뱀들이고 그대의 덕들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른바 선한 자들은 가여운 안일 속에서” “오래 살기위한 이른바 덕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D 발제문)

 

나는 급류 가장자리에 놓인 난간이다. 잡을 수 있는 자는 잡아라! 그러나 나는 그대들의 지팡이는 아니다.

I am a railing alongside the torrent; whoever is able to grasp me may grasp me! Your crutch, however, I am not.

Ich bin ein Geländer am Strome: fasse mich, wer mich fassen kann! Eure Krücke aber bin ich nicht.

: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은 급류와 같이 열정이 강한 인간들에게는 도움을 줄 수 있는 난간이다. 하지만 그것은 안락함만을 바라는 말세인의 안락함을 보장해주는 지팡이는 아니다. (교수님 D 프로토콜)

 

 

(수업 : 박찬국, <존재론연습> (20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