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후세계론자(believers in an afterworld, Hinterweltler) : Hinter(뒤) + Welt(세계) + ler(사람을 나타내는 접미어), 직역하면 ‘이 세계 뒤편의 또 다른 세계’를 믿거나 말하는 사람, 형이상학적 이원론자를 지칭한다. (역주)
일찍이 차라투스트라도 모든 배후세계론자들과 마찬가지로 인간 저편에 대한 망상을 품었었다. 그때에는 세상이 고통받고 번민하는 신의 작품으로 보였던 것이다. // 그때 세상은 내게 꿈이자 어떤 신이 꾸며낸 허구로 보였다. 불만족한 신의 눈앞에 피어오르는 오색 연기로 보였던 것이다.
Once on a time, Zarathustra also cast his fancy beyond man, like all believers in an afterworld. The work of a suffering and tortured God, the world then seemed to me. // The dream and fiction of a god, the world then seemed to me; colored smoke before the eyes of a discontented god.
Einst warf auch Zarathustra seinen Wahn jenseits des Menschen, gleich allen Hinterweltlern. Eines leidenden und zerquälten Gottes Werk schien mir da die Welt. // Traum schien mir da die Welt und Dichtung eines Gottes; farbiger Rauch vor den Augen eines göttlich Unzufriednen.
: ‘고통받고 번민하는(leidender-zerquälter Gott) 신’은 디오니소스 자그레우스(Dionysos Zagreus) 신이다. 니체는 이 신의 신화적 상징성을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라는 독특한 철학적 개념에 담는다, 예술가-형이상학에서 이 신의 속성은 ‘근원일자(Ureine)’라는 개념으로 전이되어 고통받는 근원일자(‘디오니소스적’)가 고통을 잊기 위해 이 세상을 창조해낸다(‘아폴론적’)고, 이 창조행위는 근원일자의 ‘자기망각이자 자기치유’ 행위라고 한다. 텍스트에 이어지는 내용은 이에 관한 묘사다.
텍스트 전반부는 『비극의 탄생』(1872)에서 제시된 네 가지 테제 중 예술가-형이상학에 대한 니체의 자기비판이다 예술가-형이상학이 형이상학적 이원론의 한 측면을 공유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예술가-형이상학의 여러 측면 중 하나일 뿐이다. 실제로 예술가 형이상학은 전통적인 이원론과 구분되는 요소를 더 많이 갖고 있다. (역주)
이 장의 도입부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자신 역시도 지난 날에는 이 세계가 “고통받고 번민하는 신의 작품”이라고 믿었음을 고백한다. 이 세계의 창조자인 신이 고통받고 번민하며 “불완전”하다는 것은 평온하며 만족한 상태의 유대-그리스도교적 신의 이미지와는 사뭇 다른데, 백승영(2022)에 따르면 이는 『비극의 탄생』에서 나타나는 초기 니체의 세계관, 즉 세계가 디오니소스적 ‘근원일자(Ureine)’에 의해 창조된 것이라는 관점에서 비롯된 것이다. 당시의 니체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디오니소스가 티탄들에게 찢기는 고통을 당한 것처럼, 근원일자 역시 마찬가지의 고통을 겪었으며, 이 고통으로부터 시선을 돌릴 곳이 필요하여 세계를 만들었다고 생각했는데, 도입부에서의 차라투스트라의 고백은 바로 니체 자신의 초기 철학에 대한 반성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이쪽 세계가 신의 작품이자 허구, 일종의 연기이자 모사라는 것은 인간 저편에야말로 이 세계가 모방하고자 하는 진정한 세계가 있다는 것을 뜻할 테다. 차라투스트라는 바로 이러한 배후세계론에 대한 믿음을 서설에서 언급된 ‘재(Asche)’의 일부로써 들고 산으로 올랐다. (S 발제문)
기독교를 포함한 어느 전통적인 종교에서도 신이 고통받는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기독교의 신은 지복, 선, 사랑에 가득 차있다고 존재이다. 고통받는 신은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크게 받은 니체의 초기 저작 『비극의 탄생』에서 등장한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상세계 배후에 실재세계 내지는 물자체가 있다. 현상세계는 공간과 시간 속 개체들이 나타나는 세계이고, 이렇게 개체들로 이루어진 세상 이면에 통일적인 세계의 의지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물자체, 즉 세계의지는 끊임없이 결핍감에 시달리는 맹목적인 생존의지이다. 그러다보니 현상계의 개체들도 결핍감과 욕망에 시달린다. 물자체가 가장 고도로 나타난 것이 인간이라 인간의 욕망은 밑빠진 독과 같이 한도 끝도 없다. 인간은 끊임없이 결핍감과 욕망으로 고통받는다.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는 물자체, 즉 세계의지를 결핍된 존재로 보는 데서 궁극적으로 비롯된다.
『비극의 탄생』에서 니체는 이러한 쇼펜하우어의 형이상학적 도식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현상세계는 개체로 이루어져있고, 개체들의 이면에 세계의 의지가 있다. 이 세계의지가 니체에게서 디오니소스 신이다. 디오니소스 신은 불만과 고통으로 가득 차있다. 그런데 니체가 세계의지의 고통 원인을 파악하는 방식은 쇼펜하우어와 다르다. 쇼펜하우어는 세계의지가 결핍감 때문에 고통스럽다고 말한다. 그러나 니체는, 비록 『비극의 탄생』에서는 분명하게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그의 후기 철학과 연관지어서 볼 때, 세계의지가 결핍감 때문이 아니라 넘쳐나는 충만한 힘 때문에 고통받는다고 본다. 헤라클레스가 자기 힘을 분출하지 못하면 얼마나 고통스럽겠는가. 세계의지도 마찬가지이다. 쇼펜하우어는 이 세계를 결핍된 세계로 보지만, 니체는 이 세계가 낭비적일 정도로 풍요로운 세계로 본다. 세계의지가 충만한 힘을 폭발시킨 것, 표현한 것이 현상세계이다. 그리고 인간을 통한 예술이 세계의지가 자기 고통을 해소하는 주요한 방식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여기 이 대목에서 니체는 그때의 자신이 세계를 신/창조자가 자기 불만을 해소하고 자기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만들어낸 아름다운 가상으로 보았었던 것을 고백하고 있다. (교수님)
도취적 쾌락과 자기상실. 한때 세상은 내게 그렇게 보였던 것이다.
Drunken joy and self-forgetting, did the world once seem to me.
Trunkne Lust Und Selbst-sich-Verlieren dünkte mich einst die Welt.
: 근원일자의 ‘고통을 잊으려는’ 행위는 근원적 고통(Ur-Schmerz)을 망각하려는 것이기에 결국 자기상실과 다를 바 없다고 말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역주)
도취적 쾌락이 여기서는 디오니소스적 예술만을 가리키는 건 아니고 현상세계를 통해서 자기를 분출하는 것이 세계의지에게는 도취적인 쾌락으로 나타났다는 말을 하고 있다. 세계의지는 이런 식으로 힘을 분출하면서 자기를 잊어버리는 것이다. (교수님)
아, 그대 형제들이여, 내가 지어낸 이 신은 사람이 만들어낸 작품이자 망상이었다. 다른 신들이 모두 그러하듯 말이다! // 이 신은 인간이었고, 그저 인간의 초라한 작품에, 나의 초라한 작품에 불과했다. 이 유령은 나 지신의 재와 불길로부터 내게 온 것이지, 진정 저편 세계로부터 온 것은 아니었다!
Ah, you brothers, that god whom I created was man-made and madness, like all gods! Human was he, and only a poor fragment of a human and ego. // Out of my own ashes and glow it came to me, that phantom. And truly, it came not to me from the beyond.
Ach, ihr Brüder, dieser Gott, den ich schuf, war Menschen-Werk und -Wahnsinn, gleich allen Göttern! // Mensch war er, und nur ein armes Stück Mensch und Ich: aus der eigenen Asche und Gluth kam es mir, dieses Gespenst, und wahrlich! Nicht kam es mir von Jenseits!
: 니체 자신도 배후세계론자처럼 현상세계 이면의 통일적인 세계의지 같은 형이상학적인 허구를 이야기했었지만 지금은 더는 믿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 것은 실제로 인간 저편의 것이 아니라 초라한 상태의 인간이 만들어낸 망상이다.
『비극의 탄생』에서 디오니소스적 예술에 관한 부분에서 니체는 우리가 디오니스소스적 도취에 빠질 때 만물이 하나가 되는 경험, 모든 것이 베토벤의 환희의 합창을 부르는 경험을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후기 니체는 이러한 일종의 대동세상을 상당히 감상적인 이야기로 본다. 후기 니체에 따르면, 이 세계는 힘에의 의지의 따른 위계질서로 이루어져있으며 개체들이 끊임없는 갈등한다. 모든 것이 하나가 되는 상태를 가능하다고 생각하면서 희구하던 자신은 현세에서 느끼는 비참함을 잊어버리고자 시도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재와 불길”은 비참한 상태, 삶에서 느끼는 허무감이나 피로감을 가리킨다. 이러한 인간의 상태로부터 신이 등장하지만, 종교를 믿는 사람은 거꾸로, 신이 우리에게 계시를 했기 때문에 우리는 신을 믿는다고 생각한다. 염세주의에 빠져 고통받던 “나”는 “자신의 재를 산으로 날라서” “불꽃”, 즉 초인 사상을 만들어 냈다. (교수님)
고통과 무능력. 이것이 배후세계 일체를 만들어냈다. 가장 고통받는 자만이 경험하는 그 짧은 행복의 망상이 그 세계를 만들어냈다.
Suffering it was, and impotence - that created all afterworlds; and the brief madness of bliss, which is experienced only by those who suffer most deeply.
Leiden war's und Unvermögen - das schuf alle Hinterwelten; und jener kurze Wahnsinn des Glücks, den nur der Leidendste erfährt.
: 차라투스트라에 따르면 신은 실체 없는 “유령”이자 고통과 무능력 속의 인간이 창조해낸 “초라한 작품”이며, “죽음의 도약”을 통해 차안으로부터 피안으로 도피해버리고자 하는 행복한 망상 내용에 불과하다. 여기서도 먼저 어떤 존재(창조자)가 고통을 겪고, 그 고통을 회피하기 위해 무언가(피조물)를 창조하는 것이라는 설명적 구조는 동일하지만, 이 구조의 양항은 서로 뒤바뀐다. 창조자는 신이 아니라 이 세계 속 인간이고, 피조물은 이 세계가 아니라 신인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서설에서 재를 들고 산을 올랐지만, 불꽃을 가지고 산을 내려가는 것으로 묘사된 바 있다. 허무주의라는 질병과 고통을 극복해버린 차라투스트라 앞에서 이제 신이라는 유령은 달아나버리고, 배후세계와 신에 대한 믿음은 오히려 고통이며 굴욕스러운 것이 되어버렸다. (S 발제문)
*신체(body, Leib) : 이어지는 부분에서 신체와 대지에 절망하여 신과 배후세계 일체를 만들어낸 것은 다름 아닌 신체 자신이었다는 차라투스트라의 말은 이후 4장, <신체를 경멸하는 자들에 대하여>에서의 언급과 연결된다. 거기에서 차라투스트라는 누군가 신체를 경멸하고 있을 때조차, 그는 ‘자기’와 신체에 봉사하고 있는 것이라고, 신체에 대한 경멸은 ‘자기’가 더 이상 스스로를 극복하고 창조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음을 깨닫고서 스스로의 몰락을 원하는 상태에 이르렀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여기 3장에서는 정신으로 하여금 인간 저편의 세계를 고안해내어 신체와 대지를 배반하게끔 한 것 역시 사실은 절망에 빠진 신체의 행위였음이 주장된다.
이처럼 절망에 빠진 신체는 ‘머리’, 즉 도구적 이성으로 하여금 배후세계를 만들어내게끔 했지만, 그러한 세계는 본성상 인간에게 이해될 수 없다는 의미에서 감추어져 있으며, 인간에게 말을 건네지 않는다. “사물의 척도이자 가치”라는 말로 언급되고 있는 프로타고라스 역시도 설령 신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인간이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고 말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사실 존재는 우리에게 이미 말해지고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나’의 모순과 혼란”을 통해서이다. 다시 말해, “그 어떤 것도 더 이상 원하지 못하는” 신체가 자기 자신에게 절망해 있는 상태를 통해, 사실 이 작용들의 배후에 있는 존재는 신체였다는 것이 가장 잘 드러난다는 것이다. ‘나’는 사실상 신체이기 때문에 더 많이 배울수록 더욱 정직하게 존재, 즉 신체를 드러낸다. (S 발제문)
*존재의 배(belly of existence, Bauch des Seins) : 신을 가리킨다. 왜 하필 배라는 상징을 사용하였는가? 어떤 해석자는 동물의 내장 상태를 보고 미래에 일어날 일을 예측하는 내장점을 시사한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배가 신체의 중간에 있고 주요 장기가 있는 핵심 부위라 존재의 핵심이라는 뜻에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교수님)
*가장 기적적인 것(the strangest of all things, das Wunderlichste aller Dinge) : 신체(Leib)를 지칭함. “어떻게 그러한 엄청난 살아 있는 생명의 통합이, 각각 의존하고 예속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명령하고 자신의 의지로 행동하며, 전체로서 살고 성장하고 특정 시간 동안 존속할 수 있는지는 아무리 경탄해도 끝이 없다. 이런 것은 명백히 의식을 통해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그런 ‘기적 중의 기적’에 의식이란 단지 하나의 도구일 뿐 그 이상은 아니다. 위가 신체의 도구라고 할 때와 동일한 의미에서 말이다”(『유고』 KGWVII3 37[4]). 이어지는 〈신체를 경멸하는 자들에 대하여〉 참조. (역주)
*나(I, Ich) : 자아를 가리킬 수도 있는데, 여기서는 신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신을 꾸며내고(“야단을 떨고”) 염세주의에 빠져 절망할 때(“부러진 날개로 푸드덕거릴 때”)조차 모순과 혼란에 빠져있는 신체가 자기 자신을 정직하게 표현한 것이다. 그런 신체는 건강해지면서 점점 더 정직하게 말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그로써 대지와 신체를 긍정하게 된다. (교수님)
1부 4장에서 차라투스트라는 ‘나(Ich)’와 ‘자기(Selbst)’를 구별하여, 전자로는 의식적인 자아, 후자로는 무의식적인 자아를 가리킨다. 그러나 3장에서 모순과 혼란을 겪는 ‘나’는 신체를 가리키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왜냐하면 이 ‘나’는 신체의 기능인 창조와 의욕과 평가의 주체이며, 가장 정직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차라투스트라의 신체는 한 때 신과 피안을 창조하는 등의 야단을 떨기도 했고, 부러진 날개로 푸드덕거리는 등 염세주의에 빠지기도 했지만 지금은 건강을 되찾아 차라투스트라에게 새로운 긍지를 가르친다. (S 프로토콜)
더 이상 머리를 천상적인 것들의 모래에 처박지 말고, 거기서 벗어나 당당히 들라. 이 대지에 의미를 창조해주는 지상의 머리를!
no longer to thrust one's head into the sand of heavenly things, but to carry it freely, a terrestrial head, which creates a meaning for the earth!
nicht mehr den Kopf in den Sand der himmlischen Dinge zu stecken, sondern frei ihn zu tragen, einen Erden-Kopf, der der Erde Sinn schafft!
: 통설에 따르면, 타조는 위험에 빠졌을 때 모래에 고개를 처박고 위험이 지나갔다고 생각하는데, 사람들이 현실에 느끼는 고통과 불안을 잊기 위해서 아예 허구적인 관념에 의지하는 것이 타조와 유사하다. (교수님)
*저들의 샛길과 피의 음료(their secret ways and bloody potions, ihre Schliche und blutigen Tränklein) : 앞서 등장한 “천상의 것과 구원하는 핏방울”이 천국(or 신?)과 피흘려 인간을 구원한 예수를 가리킨다면, 여기서 샛길은 천국으로(신에게로) 가는 길로서 기독교적 신앙, 피의 음료는 예수의 인간 구원설을 믿는다는 의미에서 다시 기독교적 신앙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사견)
꾸며내는 자 그리고 신에 대해 편집적 갈망을 갖는 자들 중에는 늘 병든 자들이 많았다. 그런 자들은 깨우친 자를 그리고 덕 중에서 가장 새로운 덕인 ‘정직’을 격렬히 미워한다.
Many sickly ones have there always been among those who invent fables and long for God; violently they hate the discerning ones, and that youngest of virtues, which is called "honesty".
Vieles krankhafte Volk gab es immer unter Denen, welche dichten und gottsüchtig sind; wüthend hassen sie den Erkennenden und jene jüngste der Tugenden, welche heisst: Redlichkeit.
: 병든 자들이 정직이라는 덕을 가장 싫어하는 것은, 바로 이 덕을 통해서 자신들이 부정하고자 하는 신체가 말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들에게 건강한 신체의 음성, 정직한 음성에 귀 기울이기를 촉구한다. (S 발제문) 여기서 ‘정직’이 가장 새로운 덕인 이유는, 기존의 기독교에서 강조하던 ‘정직’이 신 앞에서의 정직이라면, 니체가 강조하는 ‘정직’은 신체 앞에서의 정직이기 때문이다. 배후세계론자들은 신에 대한 “의심이 곧 죄이기를” 바라지만, “참으로, 저들이 가장 믿고 있는 것은 배후세계나 구원하는 핏방울이 아니라 다름 아닌 신체다.” 니체는 신체가 병들어 버린 이런 자들은 “죽음의 설교자에게 귀를 기울”이더라도, 보다 건강한 신체를 가진 “형제들”에게는 “건강한 신체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라. 그게 더 낫다. 좀 더 정직하고 좀 더 순수한 음성은 그것이니.”라고 타이른다. (사견)
(수업 : 박찬국, <존재론연습> (20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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