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들은 이웃 주위로 몰려간다. 그런 행동에 대한 미사여구도 갖고 있다. 그러나 내가 그대들에게 말하노니, 그대들의 이웃사랑은 그대들 자신에게는 좋지 못한 사랑이다. // 그대들은 자기 자신에게서 도피하여 이웃으로 달아난다. 그러고는 거기서 덕 하나를 만들고 싶어 한다. 하지만 나는 그대들의 “자기 상실”의 정체를 꿰뚫고 있다. // ‘너’는 ‘나’보다 더 오래되었다. 너’는 신성하다고 불리지만 ‘나’는 아직 그렇지 못하다. 이러면서 사람들은 이웃으로 몰려간다.
You crowd around your neighbor, and have fine words for it. But I say to you: your neighbor-love is your bad love of yourselves. // You flee to your neighbor from yourselves, and would rather make a virtue thereof: but I fathom your "unselfishness." // The you is older than the I; the you has been consecrated, but not yet the I: so man presses nigh to his neighbor.
Ihr drängt euch um den Nächsten und habt schöne Worte dafür. Aber ich sage euch: eure Nächstenliebe ist eure schlechte Liebe zu euch selber. // Ihr flüchtet zum Nächsten vor euch selber und möchtet euch daraus eine Tugend machen: aber ich durchschaue euer "Selbstloses". // Das Du ist älter als das Ich; das Du ist heilig gesprochen, aber noch nicht das Ich: so drängt sich der Mensch hin zum Nächsten.
: 그대들은 이웃사랑에 대한 “미사여구”, 즉 아름다운 성경 구절들을 갖고 있다. 그 성경 구절들에서 일컫는 ‘너’(das Du), 즉 이웃은 ‘나’(das Ich), 즉 근대와 함께 탄생한 자아보다 훨씬 더 오래되었고 신성시된다. 그래서 “그대들은 이웃 주위로 몰려간다.” 하지만 실상 그대들의 이웃사랑은 “그대들 자신에게는 좋지 못한 사랑이다.” (왜 그런지에 대해서는 이후 부분에서 더 자세히 다룰 것이다.) 그대들은 이웃사랑을 통해 “이타심”이라는 하나의 덕을 얻고자 하지만 차라투스트라는 그것의 “정체”가 바로 힘에의 의지의 상실이라는 점을 “꿰뚫고 있다.” (D 발제문)
여기서 미사여구는 이웃사랑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백승영 역주와 같은 해석) 그대들은 실상 삶에서 느끼는 공허감을 달래기 위해, 하찮은 삶에서 오는 자존감의 결여를 선한 사람이라는 인정으로 메우기 위해 이웃 주위로 달려가면서 그런 행동들을 이웃사랑이라는 미사여구로 치장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보통 혼자 있다 보면 외로움, 공허감에 엄습당한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우리가 남을 사랑하려면 혼자 있으면서도 마음이 넉넉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한데 프롬은 정신집중과 깨어있기와 같은 명상을 추천한다. 프롬은 참선을 오래 했던 사람이고 그가 권장하는 명상은 불교적인 명상이다. 우리가 명상을 하면서 마음의 때를 가라앉히면 마음이 맑아지면서 충만해진다. 이럴 때 우리가 정말 남을 사랑할 수 있다. 그렇지 않고 우리가 외로움, 공허감에 지배당하는 상태에서 남을 사랑하게 되면, 남을 통해서 외로움, 공허감을 충족시키려 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남에게 기대하게 되고, 기대는 많은 경우 환멸로 마무리된다. 흔히 이성간의 사랑에 빠지면, 처음에 우리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환상을 상대에게 투사하여 기대를 갖고 기대가 충족되길 바라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상대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부족하고 힘들어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고 상대에게 실망하곤 한다.
“schlechte Liebe”는 “좋지 못한 사랑”이 아니라 “나쁜 사랑”으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 여기서 니체는 그대들의 이웃사랑이라는 것이 건강한 자기애가 아니라 병적인 자기애, 나쁜 자기애의 한 형태라고 말하고 있다. 자기를 진정으로 건강하게 사랑하려면 힘에의 의지를 건강하게 실현해야 하지만, 그대들은 힘에의 의지의 실현에는 소홀한 채 이웃에게 칭찬받고 인정 받아서 힘의 고양감만을 느끼려고 한다. 진정으로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이 남한테 사랑을 줄 수도 있다고 말한 아리스토텔레스와 마찬가지로, 니체도 자기애를 부정하지 않으며 건강한 형태의 자기애를 요청한다.
“Selbstlos”는 “자기 상실”보다는 “사심없음”으로 번역하는 게 좋을 듯하다. ‘자기 상실’은 직관적으로 부정적 뉘앙스를 풍긴다. 그런데 그대들에게 덕으로 여겨지는 “Selbstlos”는 겉으로는 긍정적인 뉘앙스를 풍겨야 한다. 그대들이 정말 사심없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 같이 말이다. 니체는 바로 이런 맥락에서 그대들이 정말 사심없이 이웃을 사랑하기보다는 사실 외로움, 공허함을 견디지 못해서 이웃으로 달아나 이웃에게 선행을 베풀고 그래서 자기가 정말 이타적인 사람으로 보이도록 하는 것이라 지적하고 있다. (교수님)
차라투스트라에 따르면 이웃사랑은 우리들 자신에 대한 “나쁜 사랑(Schlechte Liebe)”이다. 이는 훌륭하지 못한 사람들이 스스로의 공허감이나 자존감의 결여를 메우기 위해 이웃에게 의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스스로를 충분히 사랑하지 못하여 이웃에게 친절을 베풀어 자신이 좋은 사람이라고 “착각(Irrtum)”하게 만들고 그 착각으로 스스로를 “도금(vergolden)”하며, 이에 대해 “이웃사랑”이나 “사심 없음(Selbstlos)” 같은 미사여구(schöne Worte)를 갖다 붙인다. (S 프로토콜)
근대 이전만 하더라도 ‘나’라는 개념, 개인이라는 개념이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근대 이전에 개인의 정체성은 가문과 같이 개인이 속한 더 큰 집단에 종속되었다. 전근대적인 사회에서 나를 내세우는 것은 이기적이고 못된 것으로 간주되었고 항상 공동체에 대한 희생이 강조되었다. 이런 식의 전근대적 사고방식이 사실 아직까지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 지금도 “너 자신을 사랑하라.”고 이야기하면 사람들이 그런 말을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워 한다. 나아가 어떤 사람들은 이기적인 인간이 되라는 이야기냐고 되묻는 등 부정적으로 반응하기도 한다. (교수님) 근대 이전까지는 ‘나’, 즉 개개인의 고유성에 대한 인정이 없었고, 개인의 정체성은 언제나 가문과 같은 다른 집단, 즉 ‘너’에게서 찾아졌었다. 이웃사랑에는 무언가 신성한 데가 있다는 생각은 바로 니체의 시기까지 이어진 이러한 사고 방식 때문인 것이다. (S 프로토콜)
내가 그대들에게 이웃사랑을 권하는 것 같은가? 나는 가장 가까이 있는 자에게서는 차라리 달아나고, 가장 멀리 있는 자를 사랑하라고 권하고 있다!
Do I advise you to neighbor-love? Rather do I advise you to neighbor-flight and to furthest love!
Rathe ich euch zur Nächstenliebe? Lieber noch rathe ich euch zur Nächsten-Flucht und zur Fernsten-Liebe!
: 차라투스트라는 대안으로 이웃사랑 내지는 가장 가까이 있는 자에 대한 사랑과 정반대의 것, 즉 “가장 멀리 있는 자에 대한 사랑”을 권한다. 백승영은 가장 멀리 있는 자에 대한 사랑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리가 아직은 그런 모습이 아니어서 여전히 멀리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지만, 우리 자신이 달성해야 하는 모습에 대한 사랑이다.”(역주) 짧게 말하면, 초인에 대한 사랑이다. 이는 “미래의 사람에 대한 사랑”, “주어진 과업과 유령에 대한 사랑”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후자의 표현에서 “과업”은 인간의 초극일 것이고 “유령”은 “아직은 구현되지 않아 형체가 없지만 현실화시켜야 하는 인간 실존의 모습, 즉 위버멘쉬[초인]”(역주)일 것이다. (D 발제문)
내 형제여, 그대에게 달려오고 있는 이 유령은 그대보다 더 아름답다. 어째서 그대는 그 유령에게 그대의 살과 뼈를 주지 않는가? 그대는 오히려 두려워하면서 그대의 이웃으로 달려가고 있구나.
The phantom that runs on before you, my brother, is fairer than you; why do you not give to it your flesh and your bones? But you fear, and run to your neighbor.
Diess Gespenst, das vor dir herläuft, mein Bruder, ist schöner als du; warum giebst du ihm nicht dein Fleisch und deine Knochen? Aber du fürchtest dich und läufst zu deinem Nächsten.
: 그대들은 인간으로서 자아를 초극하기 위해 주어지는 고난과 고통(“살과 뼈”를 주는 것)을 “오히려 두려워하면서 그대의 이웃으로 달려”간다. (D 발제문) “유령에게 살과 뼈를 주”는 것은 초인의 이상을 체현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교수님)
그대들은 그대들 자신을 견뎌내지 못하며 그대들 자신을 충분히 사랑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웃을 유혹해 그대들을 사랑하도록 만들고, 이웃의 오류로 그대들 자신을 미화하려는 것이다.
You cannot endure it with yourselves, and do not love yourselves suffiꠓciently: so you seek to mislead your neighbor into love, and would rather gild yourselves with his error.
Ihr haltet es mit euch selber nicht aus und liebt euch nicht genug: nun wollt ihr den Nächsten zur Liebe verführen und euch mit seinem Irrthum vergolden.
: 그대들은 짐승과 초인 사이에 줄타기하는 인간으로서 그대들 자신의 본질을 독립적으로 “견뎌내지 못하고”, 그 줄타기를 이행해나갈 수 있도록 “그대들 자신을 충분히 사랑하지 않는다.” 대신 그대들은 그렇게 약해빠진 자신을 사랑하도록 “이웃을 유혹”하고, 그렇게 얻어지는 가짜 사랑으로 위안을 얻는다. 그것이 가짜, 즉 “오류” 내지는 “거짓말”인 이유는 이웃은 사실 그대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위안(“자신의 무지에 반하는 말”)을 건네기 때문이다. 이웃은 실상 위안의 공동체이다. 즉, 이웃들은 서로로부터 위안을 얻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 사이에서는 서로의 실상에 대한 앎에서 비롯되는 쓴말의 교환보다는 –서로가 “야전침대”의 역할을 수행하기보다는- 표상적 위안의 교환이 이루어질 것이 명약관화하다. (D 발제문)
“이웃의 오류로 그대들 자신을 미화하려는 것”은 “이웃의 착각으로 그대들 자신을 도금하려는 것”으로 번역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다. 니체는 그대가 이웃으로 하여금 자신이 선한 사람이라고 착각하게 만들어 자신을 미화하고, 나아가 자기 자신도 그렇게 미화된 자신을 믿어버리는 사태를 지적하고 있다(“증인을 유혹해서 그대들에 대해 좋게 생각하도록 유도하고 나서, 그대들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해버린다.”). 실상 그대는 별로 좋지 않은 인간(나쁜 형태로 자기를 사랑하는 인간)인데 자신이 그런 인간인 줄 모르고 있으며, 모르고서 그대는 스스로를 좋은 인간(이타적인 인간)이라 착각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좋은 인간으로 현혹하고 평가하도록 한다(“자신의 무지에 반하는 말”). (교수님)
이웃사랑이라는 거짓말은 자신이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좋은 사람인 것처럼 의도적으로 행해지기도 하지만(“자신의 앎에 반하는 말”), 모르면서 행해지기도 한다. 또한 공허한 내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 행해지기도 하지만, 고독과 외로움으로 가득한 자신을 잃기 위해 행해지기도 한다. (S 프로토콜)
그러니 바보는 이렇게 말하지. “사람들과의 교제는 고유의 성격을 망가뜨린다. 아무런 성격도 갖고 있지 않을 때 특히 그렇다.”
Thus says the fool: "Association with men spoils the character, especially when one has none.“
Also spricht der Narr: "der Umgang mit Menschen verdirbt den Charakter, sonderlich wenn man keinen hat.“
: 만약 누군가 “사람들과의 교제는 고유의 성격을 망가뜨린다. 아무런 성격도 갖고 있지 않을 때 특히 그렇다.”라고 말한다면, 그는 “바보”다. 그는 이웃사랑이라는 열등한 방식의 교제만을 염두에 두고 이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대들에게는 대안이 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벗”이 되어 교제하는 것이다. (D 발제문)
여기서 바보는 역설적 표현이다. “바보”는 사람들이 보기엔 바보이지 사실은 현인이다. 번역에서 “고유의”는 빼도 좋다. 현인은 이웃들과 온기를 나누는 일이 한 사람의 성격을 망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때 성격은 독립적인 기개, 자기자신에 대한 긍지로 해석할 수 있다. 우리말에도 “한 성격한다.”라는 표현이 있는 것처럼, 독일어 “Charakter”에도 그런 뜻이 있다. (교수님)
이웃과의 교제는 아무런 기개/긍지(Charakter)를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의 기개를 망쳐버리지만,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는 사람을 오히려 바보 취급해버린다. (S 프로토콜)
어떤 사람은 자신을 찾기 위해 또 다른 어떤 사람은 자신을 잃기 위해 이웃으로 달려간다. 그대들 자신에게 좋지 않은 사랑이 고독을 그대들의 감옥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The one goes to his neighbor because he seeks himself, and the other because he would rather lose himself. Your bad love to yourselves makes solitude a prison to you.
Der Eine geht zum Nächsten, weil er sich sucht, und der Andre, weil er sich verlieren möchte. Eure schlechte Liebe zu euch selber macht euch aus der Einsamkeit ein Gefängniss.
: 그대들 중 일부는 자신이 원하는 자신의 허상을 얻기 위해, 또 다른 어떤 사람은 자신이 싫어하는 자신의 진상을 잃기 위해 이웃에게 기댄다. “자기 자신과 더불어 이웃을 속이는 것이다.” 쓰디쓴 진실을 일깨워줄 수 있는 “고독”은 이웃이라는 오류의 공동체 속에서 오히려 자유의 공간이 아니라 “감옥”이 되어버린다. (D 발제문)
삶이 공허하다고 느끼면서 삶의 의미를 남을 위해 희생하는 것에서 찾기 위해 이웃에게 가는 사람도 있고, 이웃과 나누는 수다 등으로 자기를 잊어버리기 위해 이웃에게 가는 사람도 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고독이 두려워서, 외로움을 벗어나기 위해서 이웃으로 달려가는 사람들이다. (교수님)
고독은 자신을 충분히 건강하게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즐거운 시간이지만, 건강한 자기애를 결여한 사람에게는 감옥과도 같은 시간이어서, 이를 참지 못하고 온기를 느끼기 위해 이웃에게로 달려간다. (S 프로토콜)
그대들의 이웃사랑 때문에 좀 더 멀리 있는 자들이 대가를 치른다. 게다가 그대들 다섯 사람이 한자리에 모이면, 여섯 번째 사람은 언제나 매장되지.
The furthest ones are they who pay for your love to the near ones; and when there are but five of you together, a sixth must always die.
Die Ferneren sind es, welche eure Liebe zum Nächsten bezahlen; und schon wenn ihr zu fünfen mit einander seid, muss immer ein sechster sterben.
: ‘이웃’ 개념의 문제점에 대한 지적이다. 이웃과 이웃 아님의 구분이 존재하기에, 이웃의 경계 외부에 있는 대상에게는 배타적 공격성이 발휘되기도 한다. 텍스트에 나오지는 않지만, 이웃 개념은 그 외연이 늘 가변적이다. (역주)
오류 혹은 가짜 위안은 공짜가 아니다. 그대들이 그것을 위해 치러야 할 댓가는 지금의 그대들보다 조금 더 초인에 가까운 그대들 자신(“좀 더 멀리 있는 자들”)이다. 또한 이웃공동체를 형성한 이후에(“다섯 사람이 한자리에 모이면”) 그대들은 이웃공동체를 공고히 유지하기 위해서 그대들을 지적해줄 수 있는 외부인을 처단하기도 한다(“여섯 번째 사람은 언제나 매장되지.”). (D 발제문)
쉽게 말하면, 다섯 사람 모이면 거기 없는 사람 흉본다, 그 얘기 아닌가. 하이데거의 세상사람이 니체의 말세인과 유사하다. 세상사람이 가지고 있는 세 가지 특색이 잡담/수다, 호기심, 애매성이다. 여기서 니체는 수다와 호기심의 측면을 지적한 것 아닐까. 일상적으로 남들에 대해 나쁘게 말하면서, 즉 흉보면서 자기들끼리는 결속감을 다지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좀 더 멀리 있는 자들의 경우는 수다 자리에 없는 사람을 가리킨다.
세상사람들은 느긋하게 자기 자신을 돌이켜 보기보다는, 호기심에 가득 차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이 쏠려서 수다스럽고 바쁜데, 자신들의 그런 삶을 가장 생기 있는 삶으로 착각한다. 사실은 공허하고 뿌리뽑힌 삶인데 말이다. 그들은 실상 자기 자신의 외로움이나 공허감을 채우기 위해서 그들은 그런 식의 행위를 하고 삶을 산다. 자기 자신 상태에 대한 참된 인식에 도달하지 못하고 자기 멋대로 착각한다는 의미에서 하이데거는 애매성(zweideutichkeit)을 이야기한다. 니체에서도 이웃사랑을 하는 사람들은 자기 착각에 빠져있으니 그들의 특색으로 애매성을 이야기한다고도 볼 수 있다. (교수님)
나는 그대들의 축제를 좋아하지 않는다. 너무나도 많은 배우들이 거기에 있고, 관객들마저 종종 배우처럼 구는 것을 보았으니.
I love not your festivals either: too many actors found I there, and even the spectators often behaved like actors.
Ich liebe auch eure Feste nicht: zu viel Schauspieler fand ich dabei, und auch die Zuschauer gebärdeten sich oft gleich Schauspielern.
: 이웃사랑은 서로 위안을 건네주는 역할을 맡는 “배우들”의 “축제”이다. 배우들의 열연은 워낙 뛰어난 나머지 지켜보던 “관객들”마저도 이웃사랑에 전염되어 배우들을 흉내내기에 이른다. (D 발제문)
축제는 자선 행사나 바자회 같은 것을 염두에 두고 말한 것 아닌가 싶다. 이런 행사에서 이웃들이 모여 다 자신들이 선한 사람인 것처럼 꾸민다. (교수님)
나는 그대들에게 벗에 대해 그리고 벗의 넘쳐흐르는 심장에 대해 가르치노라. 그런데 이 넘쳐흐르는 심장에게 사랑받기를 원한다면, 해면으로 있을 줄을 알아야 한다.
I teach you the friend and his overflowing heart. But one must know how to be a sponge, if one would be loved by over-flowing hearts.
Ich lehre euch den Freund und sein übervolles Herz. Aber man muss verstehn, ein Schwamm zu sein, wenn man von übervollen Herzen geliebt sein will.
: 스스로 “그 내면에 세계가 완성되어 있는 벗”(이하 참조)이 못된다면 그대는 적어도 그를 질시하고 거부해서는 안 된다. 이웃에게서 받던 위안 따위와는 전혀 다른 “벗의 넘쳐흐르는 심장”에게서 비롯되는 지상의 힘과 진리로 가득찬 사랑을 “스펀지”(sponge, ein Schwamm)처럼 흡수할 줄 알아야 한다. 그대는 “그대 벗 안에 있는 위버멘쉬를[초인을] 존재 이유로 사랑”하면서 그것에 도달하기 위해 끊임없이 지금의 자기 자신을 초극하고자 해야 한다. (D 발제문)
나는 그대들에게 벗을 가르치노라. 그 내면에 세계가 완성되어 있는 벗, 선을 품고 있는 하나의 그릇, 언제나 완성된 세계를 선사해야 하는 창조하는 벗을 말이다. // 그리고 세계가 한때 벗에게서 굴러 나갔지만, 그렇게 굴러 나간 것처럼 이제 세계는 퉁근 고리를 형성하면서 다시 벗에게로 굴러온다. 악을 통해 선이 생겨나고 우연으로부터 목적이 생겨나듯이.
I teach you the friend in whom the world stands complete, a capsule of the good, - the creating friend, who has always a complete world to bestow. // And as the world unrolled itself for him, so rolls it together again for him in rings, as the growth of good through evil, as the growth of purpose out of chance.
Ich lehre euch den Freund, in dem die Welt fertig dasteht, eine Schale des Guten, - den schaffenden Freund, der immer eine fertige Welt zu verschenken hat. // Und wie ihm die Welt auseinander rollte, so rollt sie ihm wieder in Ringen zusammen, als das Werden des Guten durch das Böse, als das Werden der Zwecke aus dem Zufalle.
: “그 내면에 세계가 완성되어 있는 벗”은 「세 변화에 대하여」 장에서 등장한 아이의 정신으로 해석할 수 있다. “창조의 놀이”를 하는 그는 완성된 세계를 선사하려고 창조한다. “신성한 긍정”을 하는 그에게서는 “악을 통해 선이 생겨나고, 우연으로부터 목적이 생겨”난다. 세계는 이런 식으로 끊임없이 그에게서 선과 목적의 세계로 굴러나가고 다시 악과 우연의 세계로 굴러들어온다. 그는 또한 니체적 의미에서 유덕자로 해석할 수 있다. 그는 힘에의 의지라는 하나의 덕(“그릇”)으로 자신만의 “선을 품고 있는” 자이기 때문이다. (D 발제문)
니체는 아이의 정신의 상태에 도달했을 때 비로소 세계를 긍정한다, 이 세계가 완성된 것으로 나타난다고 말한다. 이 세계가 완성된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은 이 세계에서 뺄 것이 하나도 없다, 심지어 악으로 보이는 것도 선을 위해서 필요하다, 심지어 말세인들조차도 필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세계가 벗에게서 굴러나갔다는 말이 분명하지 않은데, 세계가 벗에게 펼쳐졌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또, 세계가 다시 원환을 이루며 감긴다는 말은 니체가 완성된 세계를 원환의 세계로 표현하는 것으로 보인다. 니체는 완성된 세계를 영원회귀되는 세계, 즉 모든 것이 똑같이 되돌아와도 좋다고 생각하는 세계라 말한다. 우리는 이 세계의 악들을 불가피하게 마주치는 우연이라 생각하는데, 영원회귀되는 완성된 세계에서는 그런 것들도 사실은 선을 위해서 다 필요한 것이다. (교수님)
(수업 : 박찬국, <존재론연습> (20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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