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설교하는 자들(the preachers of death, Prediger des Todes) : ‘죽음의 설교’는 삶보다는 죽음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하고 삶에 대한 부정의식을 일으키는 사유 일체를 지칭한다. 철학적/종교적 이원론 및 염세주의, 그리스도교 도덕뿐만 아니라 노동과 삶에 대한 프로테스탄트 윤리 같은 19세기의 새로운 가치들이 그 예들로 등장한다, 인간이 온전한 자유정신이자 창조자가 되기 위해 벗어나야 하는 것들이다. (역주)
이 장에서 다루어지는 ‘죽음을 설교하는 자’ 혹은 그러한 ‘설교를 들어 마땅한 자’들은 3장에서의 배후세계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자들뿐만 아니라, 더 많은 부류의 인간들을 포함하는 범주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래 “죽음을 설교하는 자들의 유형” 참고) 그러나 차라투스트라가 그 중에서도 특히 죽음을 설교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그들이 스스로 삶을 떠나버렸으면 좋겠다고 하거나, 살아 있을 가치가 전혀 없는 “잉여인간(Überflüssigen)”, 또는 “살아있는 관”이라며 독설을 퍼붓는 것은 앞서 배후세계론자들을 ‘병든 자’로 취급하여 온화하게 대하였던 것과는 사뭇 다른 태도이다. 이는 그들이 단순히 죽음 이후의 세계를 신봉하는 것을 넘어서서, 죽음을 ‘설교’하기까지 하여 다른 사람들 역시 타락시키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S 발제문)
차라투스트라는 이원론자나 염세주의자들과 같이 죽음을 설교하는 자들이 죽어 마땅하다고 여긴다. 특히 이원론자들은 자신의 실체를 유령과도 같은 순수한 영혼에서 찾는다는 점에서 한 번도 제대로 된 신체를 소유한 적이 없고, 그러한 점에서 “아직 인간이 되지도 못한” 자들로 여겨지고, 염세주의자들은 “영혼이 결핵에 걸린 자들”로 불린다. (S 프로토콜)
염세주의자들, 특히 이원론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이원론자가 아니더라도 염세주의자일 수도 있다. (교수님)
*누런 사람들(the yellow ones, Gelbe), 검은 사람들(the black ones, Schwarze) : 노란색은 질투와 연관된 색이다. (인터넷 참고 - 예수의 제자인 유다가 예수를 군인들에게 팔아넘긴다는 성경구절에서, 유다가 받은 '돈'을 상징하는 노란색은 유다의 상징 색이 되었다. 이러한 인식은 널리 퍼져, 노란색은 시기, 질투, 욕망의 상징색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죽음을 설교하는 사람들은 지상의 세계에 대한 시샘어린 분노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이다. (「신체를 경멸하는 자들에 대하여」 참고) 검은색은 죽음과 연관된 색이다. (교수님) 죽음을 설교하는 자들은 또한 지상의 세계에 대한 질투와 분노에 사로잡혀있다는 점에서 “누런 사람들”이라고도 불리고, 죽어있는 것들의 색깔을 따라 “검은 사람들”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S 프로토콜)
*맹수(the beast of prey, das Raubtier) : 차라투스트라에 따르면 죽음을 설교하는 자들은 마음속에 “맹수”를 품고 다니며, 자신의 생을 갈기갈기 찢듯이 부정해버리면서 마조히즘적 쾌락을 느끼는 인간들이다. (S 발제문)
죽음을 설교하는 자들은 생을 부정하기도 하고, 성욕 등 육체에 속하는 것들 또한 부정한다. 그런 것들을 부정하고 근절하려고 하면서 그들은 마조히즘적 쾌락을 느낀다. 쇼펜하우어도 성욕, 소유욕 등의 욕망을 근절해야 한다고 말하며 금욕주의를 주장한다. (교수님)
병자나 노인이나 송장을 마주치기라도 하면 저들은 즉각 “삶은 반박되었다!”고 읊어댄다. // 하지만 정작 반박된 것은 단지 저들 자신, 그리고 생존의 한 측면만을 주목하는 저들의 눈이다.
They meet an invalid, or an old man, or a corpse - and immediately they say: "Life is refuted!" // But they only are refuted, and their eye, which sees only one aspect of existence.
Ihnen begegnet ein Kranker oder ein Greis oder ein Leichnam; und gleich sagen sie "das Leben ist widerlegt!" // Aber nur sie sind widerlegt und ihr Auge, welches nur das Eine Gesicht sieht am Dasein.
: 이들은 병자나 노인, 송장 등 삶과 조금이라도 멀어진 이들을 보면 곧장 삶이 반박되었다고 외치지만, 정작 반박된 것은 삶과 죽음에 관한 그들의 시각일 뿐이다. 그들은 생이 반박되었다고 외치는 와중에도 자신들이 지푸라기와 같이 초라한 것으로 간주하는 그 삶을 유지한다는 점에서 그들의 비일관성이 곧장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S 발제문) 정작 드러나는 건 저들 자신이 건강한 자들이 아니라 병든 자들이라는 점이다. (교수님)
“삶은 반박되었다!”는 특이한 표현이다. 보통 우리는 어떤 명제에 대해서 “반박되었다”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죽음을 설교하는 자들은 “삶은 고통일 뿐이다.”라고 주장하거나 “삶을 등지라는 설교를 하”기에 그들이 믿는 명제는 ‘삶은 살만한 가치가 없다.’ 정도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명제의 역이 반박되어야 그들의 믿음이 참이 된다. 그렇다면 그들로서 반박되어야 하는 명제는 ‘삶은 살만한 가치가 있다.’일 것이다. 이러한 명제 대신 니체는 “삶”이라는 명사를 덩그러니 집어넣었다. 어쩌면 니체는 어떤 인간의 삶이든 그 삶이 살만한 가치가 있다는 그 인간 자신의 믿음을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삶의 가치를 부정하는 자는 그 자가 살아서 그렇게 생각하거나 말하고 있는 한 자기모순을 범하게 된다. 그는 “지푸라기와 다름없는 생에 매달리면서, 여전히 그러고 있는 자기 자신에게 조소를 보내는 것이다.” (사견)
이 사람들은 “삶은 부정되었다(Das Leben ist widerlegt)”고, 즉 삶은 역시 고통이 아니냐고 외쳐대지만, 정작 보여지는 것은 삶이 고통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 병든 자들이라는 것에 불과하다. (S 프로토콜) “삶은 부정되었다”라고 외치는 사람들인 “저들”과 “삶은 고통일 뿐이다”라고 외치는 “이렇게 말하는 다른 자들”은 서로 다른 사람들인 것 같고, 죽음을 설교하는 자들인 “저들”이 “삶은 부정되었다”로 의도하는 의미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는 것 아닐까? (D) 삶이 고통이지만 그 고통에 의미가 있다면 삶을 살 가치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삶이 고통이고 그 고통에 의미가 전혀 없다면 삶을 살 가치가 없을 것이다. 염세주의자는 무의미한 고통, 즉 후자를 이야기할 것이며, 그렇게 되면 S와 D의 말이 거의 비슷한 말일 것으로 보인다. (교수님)
저들의 지혜는 말한다. “삶에 머무는 자는 바보다. 그런데 우리가 그토록 바보다! 바로 이것이 삶에서 가장 바보 같은 일이다!”
Their wisdom speaks thus: "A fool, he who remains alive; but so far are we fools! And that is the most foolish thing in life!“
Ihre Weisheit lautet: "ein Thor, der leben bleibt, aber so sehr sind wir Thoren! Und das eben ist das Thörichtste am Leben!"
: 『비극의 탄생』 장에서도 소개된 바 있는 실레노스의 말을 염두에 둔 것이다. 니체에게 그는 염세주의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는 인생에서 제일 좋고 훌륭한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미다스 왕에게 이렇게 말했다 한다 “하루살이 같은 가련한 족속이여, 우연의 자식이자 고통의 자식이여 그대는 듣지 않는 것이 그대에게 가장 이로운 것을 내게 말하도록 강요하는가? 최상의 것은 그대에게 불기능한 것이다 그것은 태어나지 않는 것이며 존재하지 않는 것이고 무(無)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대에게 차선의 것이 있다면, 그것은 가능한 한 빨리 죽는 것이다.” (소포클레스, 콜로누스의 오이디푸스』 1224) (역주)
“삶은 고통일 뿐이다.” 이렇게 말하는 다른 자들도 있는데, 그건 거짓말은 아니다. 그렇다면 그대들도 이제 삶을 끝내도록 애써 보라! 고통뿐인 삶을 그만두도록 애써 보라!
"Life is only suffering": so say others, and lie not. Then see to it that you cease! See to it that the life ceases which is only suffering!
"Das Leben ist nur Leiden" - so sagen Andre und lügen nicht: so sorgt doch, dass ihr aufhört! So sorgt doch, dass das Leben aufhört, welches nur Leiden ist!
: 쇼펜하우어의 주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겨냥한 발언. (역주) “그건 거짓말이 아니다.”라는 말은 삶이 고통일 뿐이라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삶이 진짜 고통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니 삶을 어서 끝내라고 니체는 그들에게 권고한다. (교수님)
*죽음을 설교하는 자들의 유형 (?)
: 차라투스트라는 ‘죽음을 설교하는 자들’로서 다음의 여러 유형의 사람들을 언급한다. 1) “영생”을 말하는 기독교인들: 이들은 대표적인 이원론자들로서, 육체의 죽음 이후에 진정하고 영원한 삶이 있다고 말하는 자들이다. 2) “삶에 머무는 자는 바보”라거나 “삶은 고통일 뿐”이라고 말하는 염세주의자: 이들은 삶을 가장 노골적으로 부정한다. 이들이 정말로 일관적이려면 자살을 통해 그들이 경멸하는 삶으로부터 결별해야 할 것이다. 3) 금욕주의자: 이들은 힘에의 의지가 자신을 확장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도구 중 하나인 자연스럽고 건강한 성욕마저도 금기시한다. 4) 반출생주의자: 이들은 염세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삶이란 것은 필연적으로 불행하다고 보며 새로운 삶, 즉 아이가 태어나게 하는 분만에 반대한다. 5) 자신을 동정하는 자: 동정은 본질적으로 동정의 대상에 대해서, 그것이 ‘동정받을만한 것’ 이라는 식의 비하를 포함하고 있는 태도이다. 따라서 자신의 삶을 철저하게 동정하는 자들이라면, 철저하게 평가절하된 자신의 삶을 도저히 사랑할 수가 없고, 싫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S 발제문)
1) ~ 5)는 별개의 유형이 아니라 모두 이원론자나 염세주의자에 속하는 사람이라 봐야 할 것이다. (교수님) 니체는 “그대들의 덕은 이렇게 가르쳐야 하리라.”라고 말하며 1) ~ 5)의 내용들을 언급하였다. 그러니, 물론 그대들을 그 내용들로 세분하여 규정할 수도 있을 것이고 그대들의 덕 또한 마찬가지로 세부적으로 규정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본래의 텍스트적 맥락에서는 그대들과 덕은 분류되지 않으며 단지 그 내용들이 구체적으로 밝혀지고 있을 뿐이다. 죽음을 설교하는 자들의 유형을 분류하는 것은 조금은 과한 해석으로 보인다. (사견)
3)과 4)와 관련하여, 이원론자와 염세주의자 모두 삶이 고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러한 삶을 새롭게 창조하는 분만, 더 나아가 분만의 원인이 되는 육욕까지를 모두 금기시한다. 5)와 관련하여, 특히 쇼펜하우어와 같은 염세주의자는 동정을 설파한 바 있다. 그는 삶의 고통이 개별화의 원리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서로 나뉘어진 개체들이 각자의 이익과 욕망을 추구하다보니 자원이 부족해지고, 이로 인해 결핍감으로 인한 고통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쇼펜하우어가 제안하는 방법이란 다름 아닌 동정이다. 타인을 동정하고 “내가 갖고 있는 것”, “내가 나로 존재하게 하는 것”을 베풂으로써 서로의 고통을 줄여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차라투스트라가 보기에 염세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진정한 동정은 서로가 빨리 죽게 만들어주는 것, 서로의 목을 졸라 죽여주는 것이다. (S 프로토콜)
악하게 있기. 이것이야말로 저들의 참다운 선의일 것이다.
To be wicked - that would be their true goodness.
Böse sein - das wäre ihre rechte Güte.
: 자살이나 이웃을 죽이는 것이 염세주의자가 이웃에게 베풀 수 있는 참다운 동정이라는 의미이다. (교수님)
저들은 삶으로부터 벗어나기를 원한다. 그러니 저들 자신의 사슬과 선물로 다른 이들을 더 단단히 묶어놓을 필요가 어디 있단 말인가!
But they want to be rid of life; what care they if they bind others still faster with their chains and gifts!
Aber sie wollen loskommen vom Leben: was schiert es sie, dass sie Andre mit ihren Ketten und Geschenken noch fester binden!
: 사슬 - 금욕주의적 학대를 가리킨다. 금욕주의적 학대 또한 마조히즘적 쾌락을 줌으로써 삶의 고통을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게 해준다. 선물 - 동정을 가리킨다. 니체는 죽음을 설교하는 자들은 삶으로부터 벗어나길 설교하면서 동시에 사람들을 금욕주의적 자기학대를 통한 쾌감이나 동정으로 삶에 묶어놓으려 하니 모순적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교수님)
그리고 삶이 고된 노동이자 불안인 그대들, 그대들도 삶에 무척 지쳐 있지 않은가? 죽음의 설교에 아주 합당한 모습이 되어 있지 않은가? // 고된 노동을 좋아하고, 빠르고 새롭고 낯선 것을 좋아하지만, 그대들 전부는 자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 그대들의 근면이란 도피이자 자신을 잊고자 하는 의지다.
And you also, to whom life is rough labor and disquiet, are you not very tired of life? Are you not very ripe for the sermon of death? // All you to whom rough labor is dear, and the rapid, new, and strange - you put up with yourselves badly; your diligence is flight, and the will to self-forgetfulness.
Und auch ihr, denen das Leben wilde Arbeit und Unruhe ist: seid ihr nicht sehr müde des Lebens? Seid ihr nicht sehr reif für die Predigt des Todes? // Ihr Alle, denen die wilde Arbeit lieb ist und das Schnelle, Neue, Fremde, - ihr ertragt euch schlecht, euer Fleiss ist Flucht und Wille, sich selber zu vergessen.
: 차라투스트라에 따르면 고된 노동으로 가득 찬 삶을 사는 이들은 자신의 삶을 믿지 못해서, 그리고 역량이 부족하여 자신의 정신을 성숙하게 만들 시간을 가질 수가 없다. 그러나 무언가를 기다리거나 게으름을 피우는 빈 시간은 그들에게 불안을 일으키기에, 그들은 그저 자기 자신에게서 주의를 돌릴 대상을 찾기 위해 “빠르고 새롭고 낯선 것”, 쉴 새 없는 노동으로 도피하는 것이다. 이들은 아직 생을 부정하거나 죽음을 추구하고 있지는 않지만, 언제든지 죽음의 설교를 듣기만 한다면 그렇게 될 강력한 성향을 지니고 있는 자들이다. (S 발제문)
그대들이 삶을 좀 더 믿었더라면, 자신을 순간에 내던지는 일도 덜 했을 텐데.
If you believed more in life, then would you devote yourselves less to the momentary.
Wenn ihr mehr an das Leben glaubtet, würdet ihr weniger euch dem Augenblicke hinwerfen.
: 자신을 순간에 내던진다, 찰나에 자신을 맡긴다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앞에서 “삶이 고된 노동이자 불안인 그대들”이 “빠르고 새롭고 낯선 것을 좋아하”는 것과 연결되는 말로 보인다. 창조는 여유에서 비롯된다. 삶은 삶 자체가 성숙시키는 것이고 무르익기 위해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 아리스토텔레스도 학문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여가가 필요하다고 이야기했다. (교수님)
니체가 <도덕의 계보>에서 금욕주의가 나타나는 여러 방식 중 하나로 노동을 언급하는 것과 유사하게, 여기서도 삶의 피로감으로부터 노동으로 회피하는 근대인들의 모습이 나타난다. 이들은 자신을 잊기 위해 빠르고 새롭고 낯선 것을 찾고, 고된 노동에 빠져드는데, 삶 역시도 그런 고달픈 노동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학문과 같은 문화는 여가가 있어야만 탄생할 수 있다고 말했던 것처럼, 니체에게서도 진정한 창조는 빈틈이 없는 고된 노동이 아니라 여유와 게으름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S 프로토콜)
(수업 : 박찬국, <존재론연습> (20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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