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현대대륙철학 일차문헌

[니체] 「벗에 대하여」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부 14장)

현담 2023. 4. 27. 22:25

내 주위에는 언제나 한 사람이 더 있다.” 홀로 있는 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언제나 하나에 하나를 곱하는 것이지만, 시간이 흐르면 둘이 된다!” // 나와 나는 언제나 너무 열심히 대화를 나눈다. 한 사람의 벗도 없다면 내 어찌 견디겠는가? // 홀로 있는 자에게 벗은 언제나 제3의 존재다. 3의 존재는 둘 사이 대화가 깊게 가라앉지 않게 해주는 코르크다.

"One is always too many about me" - thinks the anchorite. "Always once one - that makes two in the long run!" // I and me are always too earnestly in conversation: how could it be endured, if there were not a friend? // The friend of the hermit is always the third one: the third one is the cork which prevents the conversation of the two sinking into the depth.

"Einer ist immer zu viel um mich" - also denkt der Einsiedler. "Immer Einmal Eins - das giebt auf die Dauer Zwei!" // Ich und Mich sind immer zu eifrig im Gespräche: wie wäre es auszuhalten, wenn es nicht einen Freund gäbe? // Immer ist für den Einsiedler der Freund der Dritte: der Dritte ist der Kork, der verhindert, dass das Gespräch der Zweie in die Tiefe sinkt.

: 여기서 벗과 우애는 일상적 의미의 친구를 넘어 부모와 자녀, 선생과 제자, 상사와 직원 등, 인간관계 전반에 적용된다. 1싸움과 전사에 대하여에서 제시되었던 진정한 적 = 진정한 벗의 프레임 속에서 니체는 이제 모든 사람 이 서로에게 진정한 벗이어야 하고, 그런 우애를 맺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려 한다. 벗과 우애는 당연히 서로의 위버멘쉬적 삶을 자극하고 고무시킨다. (역주)

  Ich und Mich(I and me). 고독한 삶을 선택했어도 홀로 있는 자는 흔자가 아니다. 자기 자신이라는 대화싱대가 있는 것이다. 물론 1*11이듯, (Ich)의 대화상대(Mich)도 나(Ich) 외의 다른 존재는 아니다. 하지만 대화상대로서의 나는 내게 대자(對自) 존재처럼 작용한다. 마치 내가 인 것처럼 말이다. 대화는 나와 또 하나의 내가 관계 맺는 방식이며, 이런 자기 자신과의 대화를 통해 나는 나로서 성장해간다. 홀로 살아도 내게는 벗이 있는 셈이다. (역주)

  나와 나 사이의 대화는 내부로의 하염없는 침잠이라는 위험을 동반한다. 그 침잠은 나를 외부로부터 단절해버리는 또 다른 위험을 초래하여, 결국에는 나를 고립된 원자처럼 살아가게 하거나, 나라는 우물 속의 개구리 같은 나로 만들 수 있다. 이것은 삶을 위한 지혜를 얻으려 고독을 선택한 자에게는 그의 존재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상황이다. 이때 외부의 벗은 코르크로 만든 부표 같은 기능을 한다. 나라는 우물 속으로 갚이 침잠하는 나를 끌어올려 주고, 내 시야가 단지 우물 속 개구리 관점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해주어 좀 더 높고 좀 더 넓은 시야로 나를 개방시킨다. 흘로 있는 내가 라고 하는 깊고도 깊은 심연 속에 있을 때, 나를 위로 올려주는 높이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역주)

  원문에는 ’(주격, ich)나를’(직접목적격, mich)을 나누고 있기 때문에 번역이 나는 나를 상대로 하여 대화에 너무나 열중한다.”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문장(내가 나를 상대로 한 대화에 너무나 열중함)을 다음 문장에서 이것(es)으로 받고 있기 때문에 다음 문장 번역은 한 사람의 벗도 없다면 내 어찌 이 대화를 견디겠는가.”가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한 사람의 벗가 아니라 뒤에 나오는 제3의 존재이다. 3의 존재인 친구가 없다면, 자기 자신과 나누는 대화에 빠져서 자기 관점에 완전히 매몰될 수 있다는 것이다.

  친구를 필요로 하는 것은 고독을 견딜 수 없어서가 아니라 스스로만의 편협한 관점에 빠지는 걸 방지하고 나아가 친구의 장점을 본받으려하면서 자기를 극복하려 하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친구는 자기가 본받을 수 있는 사람이자 자기의 적이 될 수 있는 사람이다. 우리가 보통 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느 정도 우리랑 대등하거나 우리보다 강한 사람이다. 적은 나한테 없는 힘이나 장점을 갖고 있는 존재이자 뭔가 두려워할만한 그런 존재이다. 두려워할만하지 않는 존재를 우리는 적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예컨대, 다섯 살짜리 아이가 와서 자꾸 건드리면 귀엽거나 귀찮게 생각하지 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깡패가 와서 건드리면 적으로 생각한다. 결국 벗은 나를 고독에서 구해준다기보다는 편협한 관점과 자기만족에 빠져있는 것에서 구해준다. (교수님)

  국역은 “Immer Einmal Eins -”언제나 하나에 하나를 곱하는 것이지만,”으로 번역하는데, 이는 대화 상대로서의 내가 항상 나 자신과 다르지 않다는 점을 밝히면서 나 자신의 통일성을 강조한다. 영역은 “Always once one”(언제나 어느 시점 하나였던 것은,)으로 번역하는데, 이는 시간적으로 어느 한 시점에서 하나였던 나 자신이 시간이 지나면 둘이 된다는 점을 밝히면서 나 자신의 분열을 강조한다. 나는 후자의 손을 들어주고 싶은데, 왜냐하면 그 앞 문장이 분열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원문은 "Einer ist immer zu viel um mich"인데 직역하면 하나는 언제나 너무 많다 내 주위에이다. 이를 조금 다듬자면 내 주위에는 언제나 한 사람이 더 있다.”(국역)보다는 내 주위에는 언제나 너무 많은 하나가 있다로 번역하는 게 좋아 보이는데, 이렇게 되면 니체는 분열을 부정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역자 백승영은 역주에서 자기 자신과의 대화를 통해 나는 나로서 성장해간다.”라고 말하며 이런 자기 대화를 긍정적으로 해석하고 있지만, 자기 대화에 그러한 긍정적인 면이 있을지라도 적어도 여기 원문에서는 그런 측면이 전혀 드러나고 있지 않다. 오히려 분열 후의 자기 대화는 심연으로 가라 앉을 수 있는 위험을 가진 부정적인 것으로 서술되고 있고 그 위험을 벗어나게 해주는 코르크로 오히려 벗이 긍정적으로 서술되고 있다. 다시 말해, ‘자기 대화도 좋은데 벗이 있어야 한다는 내러티브가 아니라 자기 대화가 잘못될 수 있는데 벗이 그것을 방지한다는 내러티브라는 말이다. 이런 내러티브에서 은 자기 대화의 상대자가 아니라 제3의 존재로 한정된다. 자기 대화의 상대자인 이라는 해석은 틀린 해석이다.

  백승영은 니체 저서들을 자기 나름대로 소화하여 니체 사상을 체계적으로 구조화하고 있고 니체와 연관된 텍스트들(성서, 에머슨 에세이 등)에도 해박한 니체 전문가임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백승영 번역서를 메인 국역본으로 참고하면서 공부하며 드는 생각은 그가 가끔은 텍스트 자체의 맥락을 존중하여 번역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가 점자책을 더듬어서 점자가 말하는 바를 자신의 노트에 옮겨 쓰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노트에 이미 쓰인 바를 점자책에 점자로 옮기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물론 백승영의 니체, 정동호의 니체, 박찬국의 니체 등 자신만의 니체 해석을 가지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다. 하지만 항상 자신만의 니체가 니체 그 자체가 아니라 니체의 한 가지 해석임을 염두에 두고 그 간극을 의식하며 끊임없이 니체로 다가가고자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니체 텍스트의 맥락을 존중하며 니체를 번역하는 것은 그 다가가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일 것이다. (사견)

 

다른 사람들에 대한 믿음은 우리가 자신의 어떤 점을 기꺼이 믿으려 하는지를 누설한다. 벗에 대한 우리의 동경은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누설해주는 폭로자인 것이다.

Our faith in others betrays wherein we would rather have faith in ourselves. Our longing for a friend is our betrayer.

Unser Glaube an Andre verräth, worin wir gerne an uns selber glauben möchten. Unsre Sehnsucht nach einem Freunde ist unser Verräther.

: 벗을 보면 내가 무엇을 가치있다고 여기는지 내가 건강한 삶을 살고 있는 자인지 등을 알 수 있다. 벗을 통해 나 자신을 알 수 있는 것이다. (H 발제문)

  니체의 우정 개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정 개념과 상당히 유사하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우정은 친구들이 서로를 완성된 존재가 될 수 있도록 독려하고 돕는 것이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오직 인간에게만 우정이 가능할뿐 신이나 동물에게는 우정이 가능하지 않다고 말했다. 신은 이미 완성된 존재이기 때문에 친구가 필요 없고, 동물은 완전성에 대한 이념이 결여되어 있어 완전성을 위해 노력하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에 친구가 필요 없기 때문이다. 결국 친구관계는 서로 완전한 존재가 되도록 독려하고 돕는 관계이다. 내가 친구에 대해 경탄할 때 나는 내가 완전한 인간이 되는 데에 있어서 무엇을 결여하고 있는지 알 수가 있다. (교수님)

 

사람들은 흔히 사랑으로 질투 그 하나를 뛰어넘으려 한다. 사람들은 흔히 자신이 공격당할 여지가 있음을 숨기기 위해 공격을 시작하고 적을 만든다. // “최소한 내 적이라도 되어다오!” 우애를 청할 용기가 없는 참된 외경은 이렇게 말한다.

And often with our love we want merely to overleap envy. And often we attack and make ourselves enemies, to conceal that we are vulnerable. // "Be at least my enemy!" - thus speaks the true reverence, which does not venture to solicit friendship.

Und oft will man mit der Liebe nur den Neid überspringen. Und oft greift man an und macht sich einen Feind, um zu verbergen, dass man angreifbar ist. // "Sei wenigstens mein Feind!" - so spricht die wahre Ehrfurcht, die nicht um Freundschaft zu bitten wagt.

: 어떤 사람들은 질투 때문에 벗을 원한다. 질투하는 자들은 벗의 성공을 진정으로 축하하거나 존중하지 못하고 시기하고 질투한다. 이 자들은 벗에 대한 시기와 질투를 사랑의 형태로 위장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공격 당하고 싶지 않아서 공격할 만한 대상으로 벗을 찾는다. 나보다 우월한 사람과 진정한 우애 관계를 맺을 자신이 없기 때문에 그들에게 적으로라도 인정받고 싶어하는 것이다. 질투하는 자, 자신이 공격받지 않기 위해 공격하는 자는 진정한 벗을 만들 수 없다. (H 발제문)

  질투하는 자는 다른 사람이 자신보다 특별한 장점을 가지고 있다고 했을 때 자기도 그 못잖은 훌륭한 인간이 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질투와 연결된 경우 사랑은 좋은 의미라고 볼 수 없다. 상대에 대한 소유욕, 집착을 가리킨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 장 후반에 폭군이나 노예는 친구를 만들 수 없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어떤 사람을 자기 것으로 만들면서 폭군도 나름대로 사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상대방을 자신에게 복속시키는 사디즘적 사랑일 것이다. 한편 노예와 같이 상대에게 복종하는 식으로 사랑할 수도 있는데 이는 마조히즘적 사랑이다. 여기서 사랑도 이런 종류의 사랑, 즉 상대방에게 복속되거나 상대방을 복속시키려는 사랑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질투는 왜곡된 종류의 사랑으로 나타날 수도 있지만, 상대방을 제거하려 들거나 모함/비하하는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다.

  우애를 청할 용기가 없는 자는 질투에 사로잡힌 자보다는 낫다. 우애를 청하기에는 상대방보다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상대방이 자기보다 우월한 존재인 점을 인정하는 것을 전제한다. 질투는 그 점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상대방을 나름대로 존경한다는 의미에서 그의 외경은 참되다. 그러나 우정을 청하기에는 스스로 그만한 존재가 되지 못한다고 생각하여 적이라도 되달라라고 이야기한다. 상대방이 자기를 적으로 여겨준다는 것은 자기와 대등한 존재로 인정해준다는 것이니까. 결국 그는 상대에게서 우애까지 바라지는 않고 인정만을 바란다. (교수님)

 

*전쟁(war, der Krieg) : 진정으로 벗을 사귀고 싶다면 그와 전쟁과 같은 건강한 힘싸움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벗은 나를 성장시키는 적과도 같은 것이다. 진정한 벗은 내가 존중하고 인정할 만한 최상의 적이어야 하고, 그런 적이야말로 나의 진정한 벗이다. (H 발제문)

 

*맨몸(nakedness, die Nacktheit) : 당신의 나약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면, 그래서 벗으로부터 연민과 동정을 받고자 한다면 그와는 진정한 우애를 맺을 수 없다. 벗에게 연민과 동정을 구걸하는 것은 벗에게도 그 어떤 영예가 되지 못한다. 오히려 대등한 힘싸움과 힘의 고양을 방해하기 때문에 벗은 분노할 것이고, 나약한 당신을 악마에게 던져버리려 할 것이다. 자신의 모든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려면 적어도 신 정도는 되어야 할 것이다! 벗을 위한다면, 벗과 진정한 우애관계를 맺고자 한다면, 나약한 모습을 보일 것이 아니라, 그의 진정한 적이 되어주고 함께 위버멘쉬로 살아 가려는 목적을 위한 힘싸움의 상대가 되어주도록 해라. (H 발제문)

  그처럼 해석할 수 있겠지만, 자기 자신을 극복하려고 하지 않고 자기가 부족한 그 모습 그대로 친구가 받아들여주길 원하는 그런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동정과 연민을 꼭 바라지 않더라도 우리는 친구들끼리 허물없이 예의 차리지 않고 서로 편하게 대한다. 우리는 친구를 만날 때 품격 있는 사람처럼 자기를 꾸미려하지 않는다. 그런데 니체나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완전성을 지향하는 좋은 길로서 우정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친구 앞에서도 항상 자기를 극복하려 해야 한다. 신은 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굳이 자기를 꾸밀 옷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옷은 여기서 자기를 향상시키려는 노력을 의미한다. (교수님)

 

그대는 벗이 잠든 모습을 본 적이 있는가? 그 모습에 깜짝 놀라지는 않았는가? , 내 벗이여, 사람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Saw you ever your friend asleep? Were you not dismayed at your friend looking so? O my friend, man is something that has to be surpassed.

Sahst du deinen Freund schon schlafen? Erschrakst du nicht, dass dein Freund so aussieht? Oh, mein Freund, der Mensch ist Etwas, das überwunden werden muss.

: 만약 그대의 벗=적이 잠들고 나약한 모습을 하고 있다면, 그대 자신도 나약하고 온전치 못한 상태일 것이다. 그런 나약하고 병들어 있는 자들은 극복이 필요한 존재일 뿐이다. (H 발제문)

  자는 모습은 나약한 모습이라기보다는 전혀 꾸미지 않고 부족한 그대로 자기자신을 드러내는 모습일 것이다. 그런 모습은 사실 우리 자신의 불완전한 모습이기도 하다. 친구가 대단하고 훌륭한 존재라고 생각했는데, 친구의 적나라한 모습이 자신과 마찬가지로 불완전한 모습이라 깜짝 놀라게 된다. 친구든 자신이든 단점들이 많이 있는 불완전한 존재이고 극복되어야 할 존재이다. (교수님)

 

벗이라면 추측하는 일과 침묵하는 일에서 대가여야 한다. 모든 것을 보려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대의 벗이 깨어 있을 때 한 일에 대해서는 그대의 꿈이 그대에게 누설해야 한다. // 그 추측 중 하나가 그대의 동정이기를. 말하자면 벗이 과연 동정을 원하는지를 먼저 알아내야 하는 것이다. 벗이 그대에게서 사랑하는 것이 그대가 갖고 있는 불굴의 눈과 영원의 눈길일 수도 있으니. // 벗에 대한 동정은 단단한 껍질 속에, 그것을 깨려다 이 하나쯤은 부러질 각오를 해야 하는 껍질 속에 가두어놓으라. 그래야 동정이 섬세함과 감미로움을 갖추게 된다.

In divining and keeping silence shall the friend be a master: not everything must you wish to see. your dream shall disclose to you what your friend does when awake. // Let your pity be a divining: to know first if your friend wants pity. Perhaps he loves in you the unmoved eye, and the look of eternity. // Let your pity for your friend be hid under a hard shell; you shall bite out a tooth upon it. Thus will it have delicacy and sweetness.

Im Errathen und Stillschweigen soll der Freund Meister sein: nicht Alles musst du sehn wollen. Dein Traum soll dir verrathen, was dein Freund im Wachen thut. // Ein Errathen sei dein Mitleiden: dass du erst wissest, ob dein Freund Mitleiden wolle. Vielleicht liebt er an dir das ungebrochne Auge und den Blick der Ewigkeit. // Das Mitleiden mit dem Freunde berge sich unter einer harten Schale, an ihm sollst du dir einen Zahn ausbeissen. So wird es seine Feinheit und Süsse haben.

: =적이 그대에게 원하는 것이 동정이어서는 안된다. 그대의 강인한 힘과 정신을 사랑하고자 하는 자와만 진정한 벗이 될 수 있다. 동정은 벗을 사귀는 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동정은 그것의 나약함과 부드러움을 감출 수 있도록 잘 숨겨두어야 한다. (H 발제문)

  침묵은 상대의 단점을 보려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추측이 무엇을 추측한다는 것인지 분명치 않다. 친구에게 단점보다는 초인이 될 소지를 추측한다고 해석해볼 수 있겠다.

  친구가 깨어있을 때 하는 일은 친구가 잠든 모습과 대비된다. 잠든 모습은 아까 살펴보았다시피 부족한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는 상태, 자기극복을 하지 않는 상태이다. 그렇다면, 깨어 있는 상태는 자기극복하는 상태로 봐야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부족한 점을 잘 알고 있고 그것을 극복하는 이상을 꿈꾸곤 한다. 그렇다면 그대의 꿈은 우리 자신이 꿈꾸는 초인의 이상으로 봐야할 것이다. 결국 우리는 자기극복하는 벗의 모습을 초인의 이상으로 꿈꿔야 한다는 말로 보인다.

  앞서 추측을 벗이 초인이 될 소지에 대한 추측으로 해석했었는데 그 해석의 근거가 여기 있다. 친구는 나에게서 동정보다도 초인의 이상을 향해 갈 수 있는 강인한 마음을 원하기 때문이다.

  친구에 대한 동정은 숨겨야 한다. 친구도 나약해질 수 있고 가끔 좌절할 수도 있다. 그런 친구에 대해 불쌍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런 동정을 숨겨야 한다는 것이다. 동정이 친구를 오히려 더 나약하게 만들 수도 있고, 그의 수치심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동정을 받는다는 것은 불쌍한 존재로 간주된다는 것이기에 자존심이 강한 사람은 수치심을 느낄 수 있다. 친구에게는 동정보다도 뭘 그까지 걸로 힘들어하냐, 너는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는 식으로 독려하는 게 필요하다. (교수님)

  교수님 해석에 반대한다. 추측은 벗이 초인이 될 소지에 대한 추측이 아닌 것 같다. 차라투스트라는 그 추측 중 하나가 그대의 동정이기를바라는데, 동정은 초인이 될 소지와 완전히 반대의 것, 즉 부족한 점과 나약한 모습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런 추측 중 하나인 동정 대신의 것으로 불굴의 눈과 영원의 눈길이라는 초인의 이상을 향한 마음을 벗이 요구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추측 = {동정, ....} 초인의 이상을 향한 마음>의 구도가 성립한다. 추측은 내용적으로도 형식적으로도 초인의 이상을 향한 마음과 반대에 있다.

  “추측하는 일침묵하는 일과 병렬적으로 서술된 것을 보았을 때, 오히려 그것은 모든 것을 보려 해서는 안 되는 것과 연결된다. 침묵하는 일이 친구의 단점을 굳이 보고 말하려 하지 않는 일인 것처럼 추측하는 일은 친구의 단점을 굳이 보고 확인하지 않는 일이다. 내가 보아야 할 것은 벗이 잠들어 있을 때의 적나라한 모습이 아니라 벗이 옷 입고 치장한 모습, 즉 두렵고 강한 적으로서의 벗의 모습이다. 내가 벗의 그런 모습을 자꾸 볼 때, 나는 꿈에서 벗이 그런 모습으로 초인의 이상을 향해 노력하는 일을 보게 될 것이다. (사견)

 

그대는 그대의 벗에게 깨끗한 공기이자 고독이자 빵이자 약인가? 많은 이들이 자기의 사슬을 풀지 못하지만 그래도 벗에게는 구원자가 되지. // 그대는 노예인가? 그렇다면 그대는 벗이 될 수 없다. 그대는 폭군인가? 그렇다면 그대는 벗을 가질 수 없다.

Are you pure air and solitude and bread and medicine to your friend? Many a one cannot loosen his own fetters, but is nevertheless his friend's emancipator. // Are you a slave? Then you can not be a friend. are you a tyrant? Then you can not have friends.

Bist du reine Luft und Einsamkeit und Brod und Arznei deinem Freunde? Mancher kann seine eignen Ketten nicht lösen und doch ist er dem Freunde ein Erlöser. // Bist du ein Sclave? So kannst du nicht Freund sein. Bist du ein Tyrann? So kannst du nicht Freunde haben.

: 동정은 넣어두고 벗에게 위버멘쉬를 향한 공기이자 고독, 빵이자 약이 되어주도록 하자. 스스로가 사슬을 풀고 위버멘쉬로 고양되는 것은 어렵지만, 벗의 고양에는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노예와 폭군은 벗을 가질 수 없다. 노예는 상대의 힘에 무조건적으로 굴복하는 수동적이고 무기력한 인간이고, 폭군은 폭력적인 강압을 통해 상대의 힘을 약화시키려는 자이다. 이들은 위버멘쉬로 고양시키는 벗=적 관계를 맺을 수 없다. 폭압은 그것에 종속되는 존재를, 복종은 자신을 굴복시키는 존재를 전제하기 때문에 노예와 폭군은 상호 의존적이다. 이 상태는 힘에의 의지의 상승적 역학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는 병리적 상태이고 그 의지의 주체들도 병들어 있는 상태이다. 서로 간의 힘 싸움은 상대의 힘을 없애려는 폭압이 되거나 상대의 힘 앞에서 저항을 포기하는 예속이 되어버린다. (H 발제문)

  깨끗한 공기와 고독은 퇴락한 말세인의 상태에서 벗어나 있는 높은 정신의 상태/차원을 말한다. 빵은 친구를 성장시킬 수 있는 존재, 약은 친구의 병든 상태를 치유할 수 있는 존재의 비유이다.

  친구들 간의 관계는 서로 대등한 관계이지만 노예와 폭군의 관계는 대등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상태의 인간에게는 자기극복이 있을 수 없다. 노예는 복종, 폭군은 지배하는 상태에 머물고 자기를 극복하려고 하지 않는다. (교수님)

 

*여자(woman, das Weib) : 여자의 사랑은 노예와 폭군이기 때문에 우애를 맺고 진정한 벗을 사귈 수 없다. 여자의 사랑은 그 대상에 대해서 맹목적이고 배타적이다. 여자는 지적인 사랑을 한다고 할 때에도 이성의 빛과 함께 예측할 수 없는 비이성적인 예민함, 감정적 충동, 어두운 슬픔과 우울이 섞여 있다. 여자는 도도하면서도 상냥하고 은근히 복종하는 고양이이자, 새장 속에 갇힌 새와 같다. 여성은 보호 받으면서 집이나 우리 속에 갇혀 있어야 하는 존재인 것이다. 혹은 여자는 기껏해야 자식을 낳고 기르며, 출산을 통해 대를 잇는 역할을 하는 암소이다. 따라서 여자는 진정한 우애를 맺을 능력이 없다. (H 발제문)

  병리적 경우에 대한 설명이다. 여자와 남자의 예를 들지만, 생물학적 구분이라기보다는 인간전체에 있는 노예성과 폭군성에 대한 고발로 이해할 수 있다. 이것들이 활동을 하면 진정한 적=진정한 벗도 우애도 불가능하다. ‘고양이’, ‘’, ‘암소같은 메타포나 여성의 노예폭군은 여성의 건강성과 병리성, 여성을 바라보는 건강한 시선과 병리적 시선 중에서 후자(병리성)에 관한 메타포이다. 1늙은 여자들과 젊은 여자들에 대하여, 아이와 혼인에 대하여에서도 건강성과 병리성의 구분이 전제되어 있다. (역주)

  니체도, 쇼펜하우어도, 헤겔도 모두 가부장적인 사회분위기 속에 살았던 사람이라 여성비하적이다. 19세기의 명망 있는 남자 철학자들은 그 당시 여성에 대한 편견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그런 점에서 플라톤은 상당히 진보적이다. 여성도 철인 정치가가 될 수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19세기 철학자들보다 그런 점에서 훨씬 낫다.

  여자의 사랑은 앞서 질투에 찬 사랑처럼 노예적 사랑이나 폭군적 사랑으로 이해될 수 있다. “여자의 지적 사랑안에 조차 부정적인 의미로 보인다. 빛은 눈을 부시게 하고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한다. 그러니 빛은 자기가 사랑하는 대상에 꽂혀서 사랑하지 않는 것들을 무시하는(“자기가 사랑하지 않는 것 전부에 대한 불공정과 맹목”) 여자의 사랑을 의미한다. “불의의 기습과 번개(번개 또한 기습적인 것이다) 여자가 내리는 판단의 비논리적이고 비약적인 성격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은 여성의 감정이 갖는 불합리한 성격을 가리킨다. 불합리한 감정에는 꼭 슬픔과 우울만 있지는 않다.

  “고양이는 조용하면서도 교활하고 위협을 받으면 발톱을 내미는 앙칼진 성질이 있다. 니체가 여성을 고양이에 비유할 때는 여성이 남성보다도 더 자연에 가깝고, 맹수와 같은 교활함과 유연성을 갖고 있으며, 교육이 불가능한 내적인 야성을 지니고 있다는 의미로 주로 비유한다. “고양이가 이렇게 여성들이 가지고 있는 강하고 야성적인 측면을 나타낸다면, “는 여성들이 가지고 이쓴 섬세하고 상처받기 쉬운 측면을 나타낸다. 그래서 로서 여자는 남자들 눈에는 더 경이롭고 달콤하게 보이며 남자들의 보호본능을 자극한다. “암소는 인내심은 있는데 우둔한 존재를 의미한다. 니체는 당대 조르주 상드를 암소에 비유했다. 조르주 상드는 그 당시의 페미니스트 같은 사람이었는데 바지를 입고 다니고 남성과 자주 교류했다. 조르주 상드 같은 지적인 여자라도 니체는 둔하고 객관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본 것이다. (교수님)

  니체는 여자는 아직 우애를 맺을 능력이 없다.”라고 말한다. 그는 여성이 우애를 맺을 능력이 원천적으로 없다고 말하지는 않는 것이다. (H 프로토콜) 니체는 여성에 대한 편견이 있었지만, 루 살로메나 니체의 후원자 역할을 했던 말비다 같은 여성을 보면서 편견을 상당히 버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럼에도 차라투스트라의 제자는 다 남성이었을 것 같기는 하다. 여성이 있었다면 따로 언급하지 않았을까. 여하튼 여성이 우애를 맺을 능력을 원천 부정한 것은 아니겠다. (교수님) 차라투스트라는 형제여라는 표현을 자주 쓴다. 적어도 차라투스트라의 제자는 다 남성이었을 것 같다는 데에 동의한다. (사견)

 

*그대 사내들(you men, ihr Männer) : 하지만 남자들이라고 상황이 다르지는 않다. 남자들이라고 해서 우애를 맺을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 영혼이 가난하고 인색한 자들은 대가를 바라지 않고 나누어주는 사랑을 하지 못하고 대가를 바란다. 진정한 사랑은 흘러 넘치는 힘을 대가 없이 나누어 줄 수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인색한 영혼을 가진 자들이 대가를 바라면서 줄만한 것들을 나와 같은 사람들은 대가를 바라지 않고 선물로 줄 것이고 그렇다고 내가 더 가난해지지도 않는다. (H 발제문)

  대부분의 남자들은 가난하고 인색하며 대가없이 베풀 줄 모른다. “그대들이 친구에게 주는 만큼 나는 내 적에게 줄 것이다.”는 그대가 친구에게 선물한다는 것이 너무 알량한 나머지 그 정도는 그 정도는 적한테도 줄 수 있다는 의미로 보인다. 여기서 적은 선의의 경쟁 상대가 아니라 내가 증오하고 제거자하고자 하는 상대이다. (교수님)

 

동지애라는 것이 있다. 그렇다면 우애라는 것도 있기를!

There is comradeship: may there be friendship!

Es giebt Kameradschaft: möge es Freundschaft geben!

: 동지애는 한 가지 목표를 공유하고 그것을 위해 서로 협력하고 상호결속의 유대를 견지하는 사람들끼리의 사랑이다. 거기서는 여성과 남성이라는 생물학적 구별도 없다. 이런 동지애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으니, 벗들 사이의 우애도 불가능한 꿈은 아닐 수 있다. (역주)

  진정한 벗은 위버멘쉬라는 공동의 목표를 위한 힘 싸움에서 생겨난 동지애를 우애로 삼아야 한다. (H 발제문)

  동지애는 나름대로 있는데 우정은 아직 없다는 말 보인다. 서로 이념을 같이 하는 자들, 즉 나치즘이든 막시즘이든 종교든 같이 신봉하는 자들이 동지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런 동지 관계가 친구 관계는 아니다. 단지 이념을 같이 한다고 해서 서로 애정을 갖고 고양을 위해 독려하는 관계는 아닌 것이다. (교수님)

 

자신의 마음을 단단히 잡고 있어야 할 것이다. 마음을 놔버리면, 그 즉시 머리도 자제되지 않으니!

One should hold fast one's heart; for when one lets it go, how quickly does one's head run away!

Man soll sein Herz festhalten; denn lässt man es gehn, wie bald geht Einem da der Kopf durch!

: 상대를 허투루 동정하지 않도록 마음을 꽉 붙잡아라. 마음이 약해져서 상대를 동정하고 연민을 베풀게 되면 냉철한 판단력을 잃게 되고 상대를 진정으로 도울 수 없게 된다. 상대를 진정으로 돕고 싶거든 동정과 연민을 베풀것이 아니라 냉철함과 차가움을 통해 상대의 힘과 의지를 고양시켜 줄 수 있는 적이 되어주도록 하라. (H 발제문)

 

*어리석음(follies, T(h)orheiten) : 상대를 동정하는 것은 상대를 나와 동등한 존재로 존중하지 않는 것이고, 상대가 스스로 자신의 힘과 의지를 통해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거하는 어리석은 행위이다. 이러한 어리석음이 세상에 오히려 더 많은 고통을 가져왔다. 많은 이들을 병들고 나약한 자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악마가 내게 말했었다. “신마저도 자신의 지옥을 갖고 있다. 인간에 대한 그의 사랑이 바로 그것이다.” // 그리고 최근에 나는 악마의 이런 말도 들었다. 신은 죽었다. 인간에 대한 그의 동정 때문에 죽고 만 것이다.”

Thus spoke the devil to me, once on a time: "Even God has his hell: it is his love for man." // And lately, did I hear him say these words: "God is dead: of his pity for man has God died."

Also sprach der Teufel einst zu mir: "auch Gott hat seine Hölle: das ist seine Liebe zu den Menschen." // Und jüngst hörte ich ihn diess Wort sagen: "Gott ist todt; an seinem Mitleiden mit den Menschen ist Gott gestorben."

: 신조차도 인간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지옥을 가지고 있다. 지옥을 가지고 인간을 위협하고, 천국을 대가로 인간에게 자신에 대한 충성을 요구하는 것이다.

  신은 인간을 동정했기 때문에 죽었다. 신은 인간을 죄인으로 낙인 찍고 자신을 부정하고 수치심을 느끼도록 했다. 자신에 의해서 구원 받아야만 하는 존재로 만든 것이다. 이런 동정의 시선을 견디지 못한 인간이 신을 죽여버리고 말았다. (H 발제문)

  신이 지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신에게도 어떤 고통스러운 것이 있다는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 그리스도교의 신은 동정의 신이다. 인간이 원죄로 인해서 고통받는 것을 보고 독생자를 내려보내 십자가를 짊어지게 하였다. 니체는 이에 대해 신이 인간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비판하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신이 동정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의 고통을 보면서 쓸데없이 고통을 배가시키고 있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독일어에서 동정은 Mitled, 동정하다는 mitleiden인데, 어원적으로 함께 고통을 느끼는/겪는다는 의미이다. 동정하는 사람은 동정받는 사람이 느끼는 고통을 똑같이 느껴야 한다. 그러니 고통이 불필요하게 배가되는 것이다. 여기서도 신이 인간의 고통을 동정한다고 신 또한 고통스러워한다고 읽어야 한다. 그래야 그 다음 부분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 있다.

  신이 인간의 동정 때문에 죽었다는 것은 여기서 인간이 신을 죽였다는 의미로 해석하기는 어렵다. 물론 그렇게까지 읽을 수도 있다. 니체는 즐거운 학문광인에서 신은 죽었다고 말하면서 신이 죽은 것은 인간이 살해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 경우, 인간이 동정의 시선을 견디지 못해서 신을 죽였다기보다는 인간이 신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기 위해 신을 죽였던 것이다. 자신을 독립적인 존재로 고양시키기 위해서 그랬던 것이다. 프로이트가 말하는 부친 살해와 상당히 유사하다. 자식이 독립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부친에 대한 의존, 부친이 주입하는 가치와 규범을 극복해야 한다. 한편 백승영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4가장 추악한 자를 토대로 이렇게 해석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 부분에서도 인간이 신을 살해한 이유는 그가 동정의 시선 견디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가 스스로를 세상에서 가장 추악한 자로 느끼고 신이 그런 자신의 추악한 측면을 속속들이 들여다보고 있는데 그러한 신의 시선을 견디지 못해서이다. 그 부분에서 동정의 시선을 견디지 못했다는 이야기까지는 나오지 않는다. 그 부분도 상당히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라 나중에 살펴볼 것이다. 여하튼 여기서는 인간이 신을 동정 때문에 살해했다고 보기는 지나치다.

  『안티크리스트7절에서 니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스도교는 동정의 종교이고, 동정은 의기소침하게 만들면서 힘을 상실시킨다. 우리는 앞에서 동정이 고통을 배가시키는 측면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여기서는 동정이 의기소침하게 만드는 측면이 등장한다. 왜 동정은 의기소침하게 만드는가? 동정은 일종의 자기연민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동정은 고통스러운 사람이 처한 상황에 자신이 처했을 때의 자기 자신에 대한 연민이기 때문이다. 심약한 사람은 동정하면서 내가 저런 처지에 있으면 얼마나 힘들까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지간해서는 고통이나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 강한 인간들의 경우 고통을 겪는 사람을 보고, 이러한 동정/자기연민에 웬만해서는 빠지지 않고, ‘내가 그러하듯이 저 사람도 충분히 극복하겠지하고 넘어간다. 동정은 인간의 연약함에서 비롯되고 동정에 사로잡히면서 더 나약해지기 쉽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자유로운 죽음에 대하여장에서 니체는 예수가 조금 더 살았으면 대지를 긍정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니체에 따르면, 예수는 바리새인들의 비난과 히브리인들에 대한 동정으로 인해 일종의 염세주의에 빠졌고 죽음에 대한 동경이 덮쳐일찍 죽었다. 동정심이 많은 사람들 같은 경우, 이 세상에 너무 고통이 많으며 인간이 이런 고통에 너무나 시달린다고 생각하면서 염세적인 생각에 빠지기 쉽다.

  결국 신이 인간에 대한 동정 때문에 죽었다는 이 대목도 안티크리스트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자유로운 죽음에 대하여에서 니체가 말하는 이야기의 연장에서 해석해야 할 것이다. (교수님)

 

*위대한 사랑(great love, grosse Liebe) : 동정은 인간을 나약하게 만들기 때문에 경계되어야만 한다. 모든 위대한 사랑은 동정을 넘어서는 것이다. 위대한 사랑은 자신이 사랑할 대상을 창조한다. 창조하는 자들은 자기 자신을 바칠 위버멘쉬를 창조하고 사랑한다.

  창조하는 자들의 사랑, 위대한 사랑, 위버멘쉬에 대한 사랑은 따뜻한 위로와 동정 그리고 연민이 아니라 상대를 강하게 만들어 스스로 고통을 극복하게 만드는 차가움과 냉혹함이다. (H 발제문)

 

 

(수업 : 박찬국, <존재론연습> (20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