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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자유로운 죽음에 대하여」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부 21장)

현담 2023. 4. 28. 14:30

*자유로운 죽음(voluntary death, frien Tod) : 앞 텍스트에 이르기까지 수태와 양육, 신체, 여성과 남성, 혼인, 도덕과 국가와 법 등의 소재로 창조자로 살아가는방식을 알려주었다면, 그 마지막 여정으로 어떻게 죽을 것인지를 다룬다. 이렇게 하여 차라투스트라는 삶에 대한 자신의 지혜를 완성시키려는 것이다. 여기서 죽음은 삶과 적대적인 대립이 아니라, 양극적 대립 (Polarität)로 제시된다. 남극과 북극, 음과 양처럼 하나가 없으면 다른 하나도 없고 서로를 보완하는 모양새인 것이다. 그러니 죽음은 삶의 적대자도, 삶을 파괴하는 것도 아니다. 이런 죽음을 텍스트는 삶을 완성시키는 죽음이자 자유로운 죽음이라고 부른다. 이 죽음의 정체는 더 이상 위버벤쉬로 살 수 없을 때, 위버멘쉬라는 목적을 위해 스스로 선택하는 이성적 자살아다. 즉 위버멘쉬적 삶을 추구하는 인간이 죽음과 맺는 최고로 합리적인 선택이다. 그래서 이성적 자살은 병리적 자살이나 낭만적 자살에 대한 옹호론이 아니다. (역주)

  독어에서 자유로운 죽음은 자살(der Freitod)이다. 자살은 자기가 스스로 자기의 죽음을 결정하는 것이다. 니체는 자살을 긍정한다. 물론 모든 종류의 자살을 긍정하는 것은 아니다. 니체가 긍정하는 자살은 죽는 사람이나 임종을 지켜보는 사람이나 모두에게 축제가 될 수 있는 자살이다.

  이번 장은 기독교라든가 많은 인격신을 믿는 종교에서 자살을 금하는 것에 대한 하나의 비판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도 안락사 도입이 안 되는 주요한 이유가 바로 기독교의 반대다. 물론 다른 여러 인도주의적 이유도 있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안락사를 도입해야 하지 않을까. 부작용은 부작용대로 없앨 방책을 강구해야 하겠지만 말이다. 옛날에 중환자실에 갔다가 매우 놀란 적이 있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말그대로 산송장처럼 침상들을 메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은 본인이 원한다면 안락사를 시켜줘야 하지 않을까. 그런 삶은 본인한테도 부담이고 가족한테도 부담이 될 것이다. (교수님)

 

많은 사람들이 너무 늦게 죽고, 몇몇은 너무 일찍 죽는다. [...] // 제때 죽도록 하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가르치노라. // 하긴 제때 살지 못한 자가 어찌 제때 죽을 수 있겠는가? 그런 자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어야 했다! 나는 잉여인간들에게 이렇게 충고한다.

Many die too late, and some die too early. [...] // Die at the right time: so teaches Zarathustra. // To be sure, he who never lives at the right time, how could he ever die at the right time? Would that he might never be born! - Thus do I advise

the superfluous ones.

Viele sterben zu spät, und Einige sterben zu früh. [...] // Stirb zur rechten Zeit: also lehrt es Zarathustra. Freilich, wer nie zur rechten Zeit lebt, wie sollte der je zur rechten Zeit sterben? Möchte er doch nie geboren sein! - Also rathe ich den Überflüssigen.

: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제때 죽지 못하고 너무 늦거나 일찍 죽는다. 죽음에는 알맞은 때가 있으니 사람은 자신의 자유로운 의지적 결단을 통해 제때 죽어야 한다. 제때 죽기 위해서는 제때 살아야 한다. 제때 산다는 것은 위버멘쉬를 향한 삶을 말한다. 창조의 주체로서 의미 있게 살고, 삶의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자랑스럽게 사는 것, 그것이 제때 사는 것이다. 잉여인간들은 그 반대로 사는 사람들, 즉 삶을 부정하는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나았다. (H 발제문)

  대부분의 사람들이 너무 늦게 죽는다. 약에게, 의사에게, 주위 사람들에게 의존하면서 구차하게 살려고 한다. 그런데 몇몇은 너무 일찍 죽는다. 이번 장 후반에 나오겠지만, 예수 같은 사람들을 가리킨다. 니체는 예수가 철들기 전에 너무 일찍 죽었으며, 좀 더 살았다면 자신 같은 사랑을 가졌을 것이라 말하며 개탄한다.

  “제때 살지 못한 자는 살아야 할 때 제대로 살지 못한 자, 즉 살아생전에 삶을 긍정하고 즐기면서 살지 못하고 삶을 비관하며 사는 염세주의자나 허무주의자들을 가리킨다. <죽음을 설교하는 자들에 대하여> 장에서 니체는 그런 자들이 자신들의 이념에 맞게 빨리 죽는 게 맞다, 자살하는 게 맞다고 했는데, 여기서는 그런 자들이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라고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났겠는가. 차라리 좀 죽어서 사라져라는 말과 같을 것이다. (교수님)

 

잉여인간들조차도 자신들의 죽음은 중요하게 받아들인다. 속이 텅 비어 있는 호두조차 깨뜨려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But even the superfluous ones make much ado about their death, and even the hollowest nut wants to be cracked.

Aber auch die Überflüssigen thun noch wichtig mit ihrem Sterben, und auch die hohlste Nuss will noch geknackt sein.

: 잉여인간을 포함한 모든 인간들이 죽음을 인생의 중요하고 확실한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이처럼 죽음이 인생에서 중요한 사건임에도 사람들은 죽음을 제대로 이해하고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법을 모른다. (H 발제문)

  잉여인간들조차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진지하게 생각한다. 사실 염세주의자의 이념에 따르면 바로 자살을 하는 게 마땅한데, 이 사람들도 죽는다는 것을 그렇게 쉽게 결정 못한다는 말로 보인다. 깨뜨려지기를 바란다는 것은 스스로 죽기보다는 것보다는 죽음이 닥쳐오는 걸 기다린다는 의미로 보인다. 죽는 것을 두려워하고 죽음을 쉽게 결정할 수 없는 자들은 자연사를 기다린다. (교수님)

 

모두가 죽음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런데도 죽음은 아직도 축제가 아니다. 인간은 가장 아름다운 축제를 벌이는 법을 아직도 배우지 못했다.

Every one regards dying as a great matter: but as yet death is not a festival. Not yet have people learned to inaugurate the finest festivals.

Wichtig nehmen Alle das Sterben: aber noch ist der Tod kein Fest. Noch erlernten die Menschen nicht, wie man die schönsten Feste weiht.

: 감동적인 대목. 죽음은 갑자기 문을 박차고 쳐들어와 주인을 밖으로 질질 끌고나가는 괴한이 아니다. 죽음은 삶이라는 교향악의 대미를 장식하는 피날레다. 죽음조차 긍정하는 사람, 죽음을 기쁘게 끌어안는 삶, 바로 초인이고 초인의 삶이다. (사견)

 

나는 그대들에게 완성을 가져오는 죽음, 살아있는 자에게 자극이 되고 서약이 될 죽음을 보여주겠다.

The consummating death I show to you, which becomes a stimulus and promise to the living.

Den vollbringenden Tod zeige ich euch, der den Lebenden ein Stachel und ein Gelöbniss wird.

: 죽음은 삶과 적대적인 대립이 아니라 삶을 완성시키는 것이다. 완성을 가져오는 죽음은 첫째, 죽음을 결단하는 자의 삶을 완성시킨다. 위버멘쉬로 살았던 자는 자신이 더 이상 위버멘쉬로 살 수 없을 때 죽음을 통해 자신의 삶을 완성할 수 있다. 이것은 삶을 도피하는 죽음이 아니라 삶의 의미를 바라는 죽음이다. 둘째, 살아 있는 자의 삶도 완성시킨다. 살아 있는 자들이 죽음을 결단하는 자를 통해서 자신의 죽음을 진지하게 대면하며, 주어진 삶의 의미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이때 살아 있는 자는 삶의 자극을 받고, 위버멘쉬로의 삶에 서약하게 된다. 완성을 가져오는 죽음을 결단한 자는 희망에 차서 위버멘쉬로 살고자 하는 자들에게 둘러싸일 것이다. 이런 죽음이 최선의 죽음이므로 사람들은 이렇게 죽는 법을 배워야 한다. (H 발제문)

 

진정, 나는 실을 잣는 자들처럼은 되고 싶지 않다. 자기들의 실을 길게 잡아끌면서 그 자신도 늘 뒤로 물러서고 있으니.

Truly, not the rope-makers will I resemble: they lengthen out their cord, and thereby go ever backward.

Wahrlich, nicht will ich den Seildrehern gleichen: sie ziehen ihren Faden in die Länge und gehen dabei selber immer rückwärts.

: 운명의 여신 모이라(Moira)가 인간 운명의 실을 잣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생물학적으로 생명이 계속 연장되고는 있더라도 실제로는 퇴보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면, 죽음을 결단해야 한다는 뜻. (역주)

  운명의 여신을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여기서 실을 잣는 자들은 자신의 생명을 연장시키려고 발버둥치는 사람들이다. 니체에 따르면, 우리 인간은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 죽음은 신이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죽을 때가 지나도 비겁함 때문에 계속 산다. (교수님)

  차라투스트라는 인간만이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고 말한다. 자연사는 신이 부여한 생명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오래 살고 싶고자 하는 욕망과 비겁함 때문에 인간 자신이 선택하는 것이다. 이런 선택은 병들고 나약한 선택이고, 반대로 스스로 결단하는 죽음은 고귀한 선택이다. (H 프로토콜)

 

*이빨빠진 입(a toothless mouth, ein zahnloser Mund) : 늙어서 이빨이 다 빠진 상태. 이러한 상태에서는 진리를 맛볼 권리를 더 이상 갖지 못한다. 문자 그대로 늙었다기보다는 정신이 늙어버린 그런 사람이다. 염세주의자처럼 되어버렸다든가 생명력을 상실해버린 상태를 가리킨다. (교수님)

 

어떤 자는 마음이 먼저 늙고 어떤 자는 정신이 먼저 늙는다. 몇몇은 젊은 나이에도 백발이 된다. 그런데 늦게 젊음을 누리는 자가 그 젊음을 오랫동안 유지하는 법이다.

In some ages the heart first, and in others the spirit. And some are hoary in youth, but the late young keep long young.

Andern altert das Herz zuerst und Andern der Geist. Und Einige sind greis in der Jugend: aber spät jung erhält lang jung.

: “마음은 열정, “정신은 지성을 가리킨다. 젊은 나이에 백발이 된 자는 젊은 나이에 생명력과 열정을 상실해버린 사람, 말세인이 되어서 세상 편하게 사는 게 제일 좋은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늦게 청년이 되는 자는 늦은 나이에 생명력과 열정을 가지게 되는 자이다. 니체가 바그너를 숭배했을 당시 니체는 바그너가 늙은 나이에도 열정을 간직하고 있는 자라고 평했었다. (교수님)

 

*독충(poison-worm, ein Giftwurm) : 많은 사람들이 위버멘쉬를 향한 고양된 삶을 살지 못한다. 그들의 자유로운 정신이 고양되는 것을 막는 독충과 같은 것들, 예를 들어 기독교, 배후세계론자의 가르침 등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럴수록 이들은 자신의 삶을 완성시키는 죽음을 결단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H 발제문) 독충은 염세주의, 이원론, 말세인의 안일에 대한 욕망 등을 가리킨다. 독충에 심장을 갉아먹힌 이들이 삶을 실패할 때 죽음이라도 좀 성공했으면 좋겠다고 니체는 이야기하고 있다. (교수님)

 

많은 이들이 결코 익은 맛을 내지 못한다. 여름에 이미 썩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아직 이들을 자신의 가지에 매달고 있다면, 그것은 비겁이다.

Many never become sweet; they rot even in the summer. It is cowardice that holds them fast to their branches.

Mancher wird nie süss, er fault im Sommer schon. Feigheit ist es, die ihn an seinem Aste festhält.

: 많은 사람들이 이미 위버멘쉬로의 삶을 살 수 없을 정도로 병들고 나약하게 썩어버렸음에도 생명력이 퇴화된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자연사 할 때까지 버티고 있다. 이처럼 죽음의 제때를 결단하지 못하는 것은 비겁한 것이다. (H 발제문)

  번역이 좀 이상하다. “이들은 비겁한 자들이기에 아직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다.” 같은 식으로 번역해야 한다. 이들은 젊은 시절에 퇴락해버렸고, 이미 썩어버려서 떨어져야 하는데, 즉 차라리 죽는 게 나은데, 비겁하기 때문에 아직도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 (교수님)

 

빠른 죽음을 설교하는 자들이라도 와 주면 좋겠다! 이들은 삶의 나무를 뒤흔드는 적절한 폭풍일 수 있으니! 그런데 내게 들려오는 것은 단지 천천히 죽고 이 지상의 모든 것을 참고 견디라는 설교 뿐이다.

Would that there came preachers of speedy death! Those would be the appropriate storms and agitators of the trees of life! But I hear only slow death preached, and patience with all that is "earthly."

Möchten Prediger kommen des schnellen Todes! Das wären mir die rechten Stürme und Schüttler an Lebensbäumen Aber ich höre nur den langsamen Tod predigen und Geduld mit allem "Irdischen".

: 제때 죽으려 하지 않는 잉여인간들이 많은 이유는 지상에서의 삶을 참고 견뎌서 내세에서 축복을 받으라는 천천히 죽으라는 설교 때문이다. 오히려 빨리 죽으라고 설교하는 자들이 폭풍과 같이 나타나서 저 썩고 벌레먹은 잉여인간들 제거해주면 좋으련만! (H 발제문) “신이 내려주신 생명인데 인간이 어찌 함부로 스스로의 목숨을 빼앗는가, 죽을 때까지 기다려라, 신이 부를 때까지 기다려라.” 이런 식의 설교가 많이 들려온다는 것. (교수님) 재밌게도 죽음을 설교하는 자들빠른 죽음을 설교하는 자들은 아니다. 삶을 부정하면서도 삶을 끝까지 살아내라고 요구하는 자들이 바로 죽음을 설교하는 자들이다. (사견)

 

*히브리 사람 예수(the Hebrew Jesus, der Hebräer Jesus) : 니체는 예수에게서 늘 신성보다는 인성에 초점을 맞추고(‘그 사람’), 그리스도교 교회가 말하는 예수와 차별화시키곤 한다. 예수의 복음도 마찬가지다(2<사제들에 대하여>). (역주)

  천천히 죽으라고 설교하는 기독교인들이 숭배하는 히브리 사람 예수는 제때 죽지 못하고 너무 일찍 죽어버렸다. 제때 죽지 못했다는 것은 제때 살지 못했다는 것이다. 예수는 삶을 긍정하지 못하고 위버멘쉬로서의 삶을 살지 못했다. 예수의 삶에는 눈물과 우울만이 있었고 그래서 죽음을 동경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런 죽음이 후대의 기독교인들에게 재앙이 되었다.

  그가 선하고 의롭다고 하는 자들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혼자 살았더라면, 대지를 사랑하고 삶을 긍정하며 사는 법을 배웠을 것이다. 예수가 일찍 죽지 않고 삶을 긍정할 수 있을 정도로 나만큼 오래 살았더라면 예수의 가르침은 지금과 달랐을 것이다. 예수는 그럴 정도로 훌륭하고 고귀했다. 인간과 대지를 사랑하고 삶을 긍정하기 위해서는 성숙해져야 한다. 하지만 예수는 십자가에 묶여서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삶이 고난이었고, 인간과 대지를 긍정하고 사랑할 수 없었다. (H 발제문)

  “선하고 의롭다는 자들은 바리새인이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증오하면서 자신들만이 선하고 의롭다고 생각했다. 이 사람들을 외식주의자라고도 말한다. 말하자면, 겉으로 꾸미는 자들인데, 신을 정말 믿고 사랑하는 자들이 아니라 그런 것처럼 꾸미는 자들, 계율의 참된 정신에는 관심이 없고 계율에 집착하는 자들이다. 한편, 히브리인들은 로마인들의 억압을 받으며 비참한 상태(“눈물과 우울”)에 빠져 있었다.

  니체는 예수를 상당히 고귀한 인격을 가진 사람으로 평가한다. “고귀함은 정직함을 염두에 둔 표현으로 보인다. 다른 곳에서 니체는 조로아스터교를 만들었던 차라투스트라도 원래 신봉했던 이원론을 정직성 때문에 나중에 포기했을 것이라고 자기멋대로 추측하는데, 여기서도 예수는 고귀하고 정직한 인간이라서 오래 살았으면 분명히 이원론을 거부하고 차라투스트라와 마찬가지의 사상을 설파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교수님)

 

더 이상 긍정의 말을 할 때가 아닐 때 신성한 부정의 말을 하는 자는 죽음에 대해서도 자유로우며 죽음에 임해서도 자유롭다. 이렇게 그는 죽음과 삶을 이해한다.

Free for death, and free in death; a holy Naysayer, when there is no longer time for Yes: thus understands he about death and life.

Frei zum Tode und frei im Tode, ein heiliger Nein-sager, wenn es nicht Zeit mehr ist zum Ja: also versteht er sich auf Tod und Leben.

: 위버멘쉬를 목표로 살아가라는 긍정의 말을 더 이상 할 수 없을 때, 죽음을 통해 삶을 완성하라는 신성한 부정의 말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자만이 죽음에 대해서 주도적이고, 자유로울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의 의지를 통해 삶을 완성하는 죽음을 결단할 수 있을 때 죽음과 삶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H 발제문)

  “더 이상 긍정의 말을 할 때가 아닐 때보다는 긍정할 시간이 더 이상 없을 때로 번역해야 한다. 어떤 때인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나이가 들어서 죽음을 앞두고 있을 때, 자기 할 일을 다 마치고 더 이상 살지 않아도 될 때로 읽을 수 있겠다. “신성한 부정의 말을 하는 자보다는 성스럽게 부정하는 자로 번역할 수 있다. 긍정하는 자와 부정하는 자는 삶에 대하여 대립한다. 그런데 성스럽게 부정하는 자는 염세주의자처럼 지상의 삶을 모욕하면서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삶은 아름답고 긍정할만한 것이지만 죽을 때가 되어서 스스로 죽음을 택하여 삶을 부정하는 사람이다. (교수님)

  “wenn es nicht Zeit mehr ist zum Ja”위버멘쉬를 목표로 살아가라는 긍정의 말을 더 이상 할 수 없을 때가 아니다. 자유로운 죽음을 선택하는 자는 비록 자기 삶을 계속 초극해나갈 수 없다고 판단하였기에 죽음을 택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죽음의 자리에서까지 살아있는 자들에게 초인이라는 목표를 상속하고 그 목표를 위해 살 것을 서약시키기 때문이다. 교수님께서는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혹은 삶에서 성취를 이루고 더 성취를 이루며 살지 않아도 될 때로 해석하고자 했지만, 실제로 죽음까지 많이 남았더라도 죽기 적절한 때일 수도 있고 삶에서 성취를 이루었더라도 죽기 적절하지 않을 때일 수도 있어서 그 해석을 받아들이기는 힘들다.

  자신을 끊임없이 초극하며 살기 위해서는 내적으로 열정이 불타오르고 있어야 하며 정신과 육체가 그 타오르는 열정을 잘 소화하여 실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노화는 정신과 육체를 자연스럽게 서서히 고장나게 한다. 힘에의 의지는 자신의 장난감들의 노화에 초인의 삶을 긍정할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음을 직감할 것이다. 결국 건강한 정신의 인간은 그런 직감이 커져갈 때 어느 순간 자신에게 초극하는 삶을 긍정할 시간이 이제 남지 않았다라고 과감하게 판단할 것이며 성스럽게 부정하는 자로서 자유로운 죽음을 선택할 것이다. (사견)

 

 

(수업 : 박찬국, <존재론연습> (20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