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벗들이여, 그대들의 벗에게 이렇게 빈정대는 말이 다가선 적이 있다. “차라투스트라를 보라! 그가 짐승들 사이를 거닐듯 우리들 사이를 거닐고 있지 않은가!” //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것이 더 나았을 것이다. “깨우친 자가 짐승인 인간들 사이를 거닐고 있다.” // 깨우친 자에게는 사람 자체가 붉어진 뺨을 갖고 있는 짐승이다.
MY FRIENDS, there has arisen a satire on your friend: "Behold Zarathustra! Walks he not among us as if among animals?" // But it is better said in this wise: "The discerning one walks among men as among animals." // Man himself is to the discerning one: the animal with red cheek.
Meine Freunde, es kam eine Spottrede zu eurem Freunde: "seht nur Zarathustra! Wandelt er nicht unter uns wie unter Thieren?" // Aber so ist es besser geredet: "der Erkennende wandelt unter Menschen als unter Thieren." // Der Mensch selber aber heisst dem Erkennenden: das Thier, das rothe Backen hat.
: 사람들은 차라투스트라가 마치 짐승처럼 대중들 사이를 거닐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차라투스트라, 깨우친 자는 짐승과 같은 인간, 인간의 외양을 가지고는 있지만 아직 존재의 의미도 목표도 없는 인간말종, 병리적 인간 사이를 거닐고 있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에게 인간은 수치심 때문에 붉어진 뺨을 가지고 있는 짐승이다. 인간은 자신의 유한성을 부정되어야 할 것으로,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것으로 여겼다. 이런 노예도덕의 역사가 인류의 역사를 주도했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인류의 역사는 수치심의 역사인 것이다. (H 발제문)
“빈정대는 말이 다가선 적이 있다.”는 한국말이 아닌 번역이다. “빈정대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라고 번역해야 할 것이다. “그대들의 친구”는 차라투스트라를 가리킨다. 그리고 차라투스트라가 짐승처럼 대중들 사이를 거닐고 있다고 빈정대는 것이 아니다. 차라투스트라가 “짐승들 사이를 거닐 듯이 우리들 사이를 거닐고 있”는 것이니까, 차라투스트라가 자기네를 짐승들로 여기고 있다고 빈정대는 것이다. 즉, 우리는 인간이고 짐승보다 우월한 존재인데 어찌 차라투스트라는 우리를 짐승처럼 여기는지 분개하는 것이다. 서설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인간은 짐승에서 초인으로 진화해나가는 존재라고 했는데, 그대들은 여전히 원숭이고 벌레라고 비난한 적이 있다. 그런 식으로 차라투스트라가 자신들을 보고 있다는 점을 빈정대고 있다.
그런데 차라투스트라는 인간이 짐승과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고 본다. 이원론자들은 인간을 순수한 영혼으로 생각하는데 사실 인간은 짐승과 같다. 짐승도 힘에의 의지를 추구한다. 사자는 용감하고 여우는 지혜롭다. 그런데 인간은 어떤 짐승인가? 인간은 “붉은 뺨을 갖는 짐승이다.” (니체의 유명한 말이다.) 수치심을 느낄 줄 아는 동물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백승영은 수치심을 노예 같은 인간들이 가지는 감정이라고 해석하는데, 이건 잘못된 해석이다. 수치심은 동정받을 때를 포함하여 우리 자존감에 상처를 받을 때 느끼는 감정이다.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이러한 수치심을 유난히 잘 느끼는 동물이다. 인간은 자신을 강하고 고귀한 인간으로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이 있고, 스스로도 그렇게 믿고 싶어하는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욕망이 좌절되었을 때 인간은 수치심을 느낀다. 특히 동정을 받을 정도의 불쌍한 인간이라고 생각될 때 수치심을 크게 느낀다. 노예도덕에 사로잡힌 인간 뿐만 아니라 초인을 지향하는 자 또한 동정받으면 수치심을 느낀다. 백승영은 노예적 인간들만 느낀다고 하는데, 아니다. 모든 인간은 자존감, 긍지에 상처를 받았을 때 수치심을 느낀다. 그리고 인간이 수치심을 너무나 자주 느꼈기 때문에 인간은 붉은 뺨을 갖게 되었다. 니체는 인간이 수치심 갖는 것을 문제로 보지 않았다. 오히려 수치심 없는 인간들이 문제이다. 자존감은 없지만 뻔뻔스런 인간들, 전락할 대로 전락했는데 잘났다고 생각하는 인간들이 문제인 것이다. (교수님)
그래서 고귀한 자는 수치심을 느끼게 하지 말라고 자신에게 명령한다. 하지만 고통받는 모든 사람들 앞에서는 스스로를 부끄러워하라고 자신에게 명령한다.
And on that account does the noble one enjoin on himself not to abash: bashfulness does he enjoin himself in presence of all sufferers.
Und darum gebeut sich der Edle, nicht zu beschämen: Scham gebeut er sich vor allem Leidenden.
: 수치심을 병리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고귀한 자들은 고통받는 자들을 구원하지 못했다는 부끄러움을 제외한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다. (H 발제문)
번역이 이상하다. “이 때문에 고귀한 자는 남들에게 수치심을 주지 않으려고 조심한다.” 정도로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고귀한 자는 자신의 동정심을 경계하고, 남을 함부로 동정하지 않으면서 남에게 수치심을 주지 않으려 조심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왜 고귀한 자들은 고통받는 자들 앞에서 스스로 부끄러워해야 하는 걸까? 그들을 구원하지 못햇다고? 그들의 벗이 되지 못했다는 점에서? 나중에 나오는 부분과 관련해서 해석해보자면 그렇게 해석하기 보다는 다음과 같이 해석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고통받는 사람들의 경우, 자신이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을 남에게 목격당했을 때 그가 자존심이 있는 인간이라면 자존감에 상처를 입는다. 그런 모습은 남들에게 보여주기 싫은 모습이다. 설사 심각한 병이 있더라도 당당한 모습으로 자신을 보여주고 싶어하지, 힘들어하고 고통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러니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을 고귀한 자가 목격했을 때 스스로에게 부끄러움을 느껴야 할 이유는, 그들에게 이런 식으로 수치심을 주게 되기 때문이다. 다른 이유는 고통받는 사람들의 목격이 나아가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한 은밀한 우월감을 느끼게 만들기 때문이다. 힘에의 의지를 충족하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 한 가지 방식은 자기보다 약한 인간들, 혹은 괴로워하는 인간들을 보면서 ‘나는 쟤보다는 강하다’, ‘나는 저런 식으로 고통받고 있지는 않다’고 생각하며 우월의식을 느끼는 것이다. 이는 쉽고 비겁하고 힘에의 의지를 충족하는 방식이다. 힘에의 의지는 보다 우아하고 고귀한 방식으로 충족시킬 수도 있다. 자기와 대등하거나 우월한 인간들을 넘어서려고 하면서 상대의 경탄을 불러일으키고 자신에 대해 당당한 자부심을 가지는 식으로 말이다.
고귀한 자는 고통받는 자들이 스스로 자신을 구원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고귀한 자는 그런 사람들을 자극하고 도울 수 있다. 그렇지만 그들을 구원하는 사람은 아니다. 만약 그렇게 되어 버리면, 그때부터는 진짜 동정이다. 고통받는 자들이 스스로 구원할 힘에의 의지가 결여된 인간이라고 보는 것이니까. 이는 차라투스트라가 정확히 배격하는 방식의 동정이다. 고귀한 자라면, “뭐 그런거까지 고통받냐, 충분히 이겨낼 수 있어!”라고 말하며 고통받는 자들이 빨리 고통에서 벗어나도록 독려를 할 것이다. (교수님)
실로 나는 동정하면서 행복해하는 저 자비롭다는 자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저들에게는 수치심이 너무나도 결여되어 있다.
Truly, I like them not, the merciful ones, whose bliss is in their pity: too destitute are they of bashfulness.
Wahrlich, ich mag sie nicht, die Barmherzigen, die selig sind in ihrem Mitleiden: zu sehr gebricht es ihnen an Scham.
: 실제로는 동정만 하는 것이면서도 자신을 자비롭다고 여기며 행복해하는 사람들을 “나”[차라투스트라]는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은 전혀 수치심도 느끼지 않지만, 그들의 자비는 자비의 대상을 고통을 받고 있고, 그래서 자신의 도움, 자비, 동정을 받아야하는 존재로 여긴다는 점에서 오히려 부끄러운 일이다. 그들은 상대에게 자신의 자비를 구걸하거나 자신의 자비에 감사하라고 강요한다. 이런 자비는 상대를 스스로 자신의 고통을 이겨내지 못하는 의존적이고 타율적인 존재로 만든다. 이들의 자비는 진정으로 상대를 위하는 선물이 아니고 고통을 이겨내는 상대의 힘을 방해하기도 한다. 상대를 자신과 동등한 주체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H 발제문)
동정하면서 베풀고 자기를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수치심이 너무 결여되어 있다. 이들은 힘에의 의지를 너무 쉽게 충족시키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부끄러움도 못 느낀다. 약한 사람들을 괴롭히는 거보단 낫겠지만 그와 유사하게 쉽게 자기 힘을 느끼려는 태도를 가진 자들이다. 약자를 괴롭히는 자가 부끄러운 줄 알아야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비롭다는 자 역시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교수님)
내가 동정을 해야만 한다 해도, 동정하는 자라고는 불리고 싶지 않다.
If I must be pitiful, I dislike to be called so
Muss ich mitleidig sein, so will ich's doch nicht heissen
: 만약 내가 어떤 동정을 해야만 하더라도 나는 위에서와 같은 의미[자비롭다는 자들의 동정]로 동정하는 자라고 불리고 싶지 않다. 나는 상대로부터 감사와 인정을 원하지 않고 오히려 상대가 자율적인 힘과 의지를 통해 자신의 고통을 극복하기를 원한다. 그래서 나는 멀리 떨어져서 얼굴을 가리고 상대를 돕고자 한다. 나는 나와 함께 위버멘쉬로 이르는 길을 갈 수 있는, 자신의 힘과 의지로 고통을 이겨내고 삶을 긍정할 수 있는 자들이 내게로 왔으면 한다. (H 발제문)
도움을 줘야할 사람에게 도움을 줘야할 때도 동정 주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다는 것. 차라투스트라는 상대가 수치심을 느끼지 않도록, 자존심 상하지 않도록, 긍지에 상처받지 않도록 기꺼이 멀리서 도와준다. 또한 고통받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고통받는 것을 타인이 보았을 때는 큰 수치심을 느끼게 될 텐데, 그들이 그렇게 느끼지 않도록 차라투스트라는 얼굴을 가리고 돕는다. 그런데 얼굴을 가리지 않고 돕는 자들 중 자기가 돕는 걸 선전하는 자들도 있다. 누가 이런 자선사업을 했다, 누가 이만큼 기부했다 등. 여하튼 이후 차라투스트라는 동정할 필요가 없이 자신과 같이 초인의 길을 같이 걸을 자들이 자신에게 보내졌으면 소망한다. (교수님)
참으로 나는 고통받는 자들에게 이런저런 좋은 일을 했었다. 하지만 나 자신이 더 잘 기뻐할 줄 알게 되었을 때, 늘 더 나은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 우리가 더 기뻐할 줄 알게 되면, 다른 이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일도, 고통스럽게 하려는 궁리도 가장 잘 잊을 수 있다.
Truly, I have done this and that for the afflicted: but something better did I always seem to do when I had learned to enjoy myself better. [...] And when we learn better to enjoy ourselves, then do we unlearn best to give pain to others, and to contrive pain.
Wahrlich, ich that wohl Das und jenes an Leidenden: aber Besseres schien ich mir stets zu thun, wenn ich lernte, mich besser freuen. [...] Und lernen wir besser uns freuen, so verlernen wir am besten, Andern wehe zu thun und Wehes auszudenken.
: 나의 동정, 내가 고통받는 자들에게 베푸는 사랑은 자비를 가장한 동정과는 다르다. 나의 사랑은 상대의 고통을 대신 덜어주는 것이 아니라 상대 자체에 대한 사랑이자 긍정이고, 그것을 통해 나 자신도 기쁨을 느낀다.
인간은 자신을 죄를 지어서 고통 받는 자, 그래서 구원을 받아야만 행복해질 수 있는 자라고 생각해왔기 때문에 삶 속에서 기뻐하지 못했다. 만약 우리가 우리 자신의 삶 속에서 진정으로 기뻐할 줄 안다면 다른 이들을 고통스럽게 하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다. (H 발제문)
천성적으로 낙천적이고 밝은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똑같이 어려운 상황에 있어도 사람들한테 밝음을 선사해주곤 한다. 반대로 고통에 빠진 사람은 다른 인간들도 고통을 겪었으면 하는 심리가 있다. 그래서 스스로가 먼저 인생이 행복하고 기쁨을 느끼는 사람만이 남에게도 행복과 기쁨을 줄 수 있고, 인생이 고통스러운 사람은 남에게도 고통을 주기 쉽다.
이원론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삶을 고통으로 여기면서 고통받기 떄문에 남들에게도 이원론을 강제하기 쉽다. 또한 양심의 가책, 죄책감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남들도 자기 같이 양심의 가책을 느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부덕한 인간이라고 얘기할 수 있다. 현실이 부조리하다고 생각하고 불만을 느끼는 사람은 남들도 그렇게 느끼지 않으면 정의롭지 않다, 문제의식이 없는 인간이다, 라고 말하기도 한다. 니체의 예리한 심리 분석이다. 남을 돕고 동정하는 사람의 밑바닥에서 작용하고 있는 무의식적인 흉악한 측면들을 여기서 드러내고 있다. 남들을 이러저러하게 동정하는 거보다 스스로 삶을 즐기고 기뻐하는 모습 보여주면서 남들도 자신 같은 삶을 살게 하는 것이 최선의 도움이다. (교수님)
나는 고통받는 자들을 도왔던 내 손을 씻는다. 내 영혼도 씻는다. // 고통받는 자의 고통을 보면서 나는 그의 수치심이 수치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그를 도왔을 때 그의 자부심에 심하게 상처를 입히고 말았기 때문이다.
Therefore do I wash the hand that has helped the sufferer; therefore do I wipe also my soul. // For in seeing the sufferer suffering - thereof was I ashamed on account of his shame; and in helping him, sorely did I wound his pride.
Darum wasche ich mir die Hand, die dem Leidenden half, darum wische ich mir auch noch die Seele ab. // Denn dass ich den Leidenden leidend sah, dessen schämte ich mich um seiner Scham willen; und als ich ihm half, da vergieng ich mich hart an seinem Stolze.
: 나는 고통받는 자들을 도우려고 했던 시도를 후회하고, 그들로부터 상처 받은 내 영혼을 씻는다. 자신의 존재 자체에 대해 수치심을 느끼고 자기를 부정하는 병든 자들이 보이는 행태가 수치스러웠기 때문이다. 내가 그들을 진정으로 도우려고 해도 그들은 나의 사랑을 선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나를 의심하며 감사해하지도 않고 자신의 별 볼 일 없고 같잖은 자부심에 상처를 입는다. (H 발제문)
잘못 해석했다. 고통받는 자들는 병적인 자들이 아니라 그냥 일반 사람들 중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고통을 목격당했을 때 수치심을 느끼고, 수치심 느낀다는 측면에서 어느 정도 건강한 정신을 가지고 있다. 이와 대비되는 자들이 “거지들”이다. 이들은 동정을 받아도 부끄러운 줄 모르고 오히려 동정을 구걸하는 자들이다. 이런 자들에 대해 차라투스트라는 없어져야 한다고 강력하게 비판한다.
결국 내가 고통받는 자들을 도왔을 때 손과 영혼을 씻는 이유는 그의 자부심에 상처를 입히기 때문이고 은밀한 우월의식을 느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도왔다는 것도 잊어버리고 싶어 한다. (교수님)
크나큰 빚은 감사가 아니라 복수욕을 일으킨다. 그리고 작은 선행이 잊혀지지 않으면, 그 속에서 좀벌레가 생겨난다.
Great obligations do not make grateful, but revengeful; and when a small kindness is not forgotten, it becomes a gnawing worm.
Grosse Verbindlichkeiten machen nicht dankbar, sondern rachsüchtig; und wenn die kleine Wohlthat nicht vergessen wird, so wird noch ein Nage-Wurm daraus.
: 텍스트 맥락 속 수치심의 주체는 자기부정적 성향의 병든 인간이다. 그의 병든 마음은 큰 호의도 작은 선행도 하는 사랑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서설〉 2의 사람처럼 도둑인지를 의심하고, 무언가 다른 의도가 있을 것이라는 삐딱한 시선을 보낸다. 그러니 감사의 마음도 생기지 않는다. 작은 선행은 그 의미를 좀벌레처럼 맑아먹어 퇴색시키고, (정신적이든 물질적이든) 규모가 큰 호의나 친절은 무시의 행위로 여기거나 갚아야 할 빚으로 삼아버린다. 순수한 호의로 ‘그냥 주는 선물’을 그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그의 의식을 ‘무시당했다는 분노’, 그리고 ‘빚을 지고 있다는 채무감’이 지배한다. 호의를 베푼 상대에게는 채권자에 대해 채무자가 갖는 불편함과 적개심과 악의가 자라난다. (역주)
이 부분도 병적인 인간들이 이렇다고 백승영이 해석하는데 이렇게 해석할 필요가 없다. 크나큰 빚은 동정에서 비롯된 큰 도움을 가리킬 것이다. 우리가 동정에서 비롯된 도움을 받을 때는 일단은 감사하다고 하겠지만 복수욕을 품게 된다. 이 사람에게 내가 불쌍한 인간으로 간주되었구나 수치심과 모욕을 느끼면서. 동정에서 비롯된 작은 선행은 복수욕을 갖게 하지는 않지만 잊혀지지 않으면 좀벌레 같은 원한을 생기게 한다. (교수님)
“받을 때는 냉정하도록 하라! 받아들임이 그대들을 구별하게 하라!” 줄 것이 없는 자들에게 나는 이렇게 권한다.
"Be shy in accepting! Distinguish by accepting!" - thus do I advise those who have naught to bestow.
"Seid spröde im Annehmen! Zeichnet aus damit, dass ihr annehmt!" - also rathe ich Denen, die Nichts zu verschenken haben.
: 넘쳐흐르는 사랑을 베풀 수 있는 자가 아니라면, 받을 수 있는 능력이 그 사람을 구별해준다. 병든 자는 상대의 호의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채무감만을 갖게 되므로 받을 자격이 없다. 호의를 선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 받을만한 자격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고 ‘받는 능력’이 사람을 구별해주는 징표가 된다. (H 발제문)
병든 수치심의 주체(줄 것이 없거나 줄 수 없는 자들)처럼 받아서 문제가 생기는 경우라면, 받지 말아야 한다. 줄 수 있는 자들인 건강한 인간들은 받아도 무방하다. 호의를 선물로 받아들일 줄 안다는 것, 즉 받을만한 자격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받을 수 있음’ 혹은 ‘어떻게 받아들이는지’가 사람들을 구별해주는 징표 역할을 하는 것이다. (역주)
그럼 여기서는 병든 수치심의 주체에게 “너는 받지 말도록 하라! 받지 않음으로써 병든 그대들을 건강한 자들로부터 구별되게 하라!”라고 권한다는 것인가? 일단 “냉정하게 받아라”와 “받지 말아라”는 다른 말이다. 그리고 병든 자에게 병든 자의 정체성을 가지도록 권하는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역자의 번역을 수정없이 그대로 읽어도, 받으려면 이런 식으로 받아라고 권고하는 것으로 읽히지, 역주의 해석처럼 받지 말아라고 권고하는 것으로 읽히지는 않는다. (사견)
핀트가 어긋난 해석이다. 우선 “받을 때는 냉정하도록 하라!”라는 번역은 “받기를 꺼려라!”로 고쳐야 한다. 그리고 “받아들임이 그대들을 구별하게 하라!”는 이상한 말이다. “구별해서 받아라.” 정도가 되어야 한다. 결국 줄 것이 없는 자들에게 차라투스트라는 아무한테서나 아무거나 받지 말고 까다롭게 받아라, 무언갈 받을 때는 그 무언갈 자신에게 선사하는 자에게 특별한 영예가 되도록 하라, 이런 이야기다. 나한테 줬다는 것을 그 사람이 큰 영광으로 여기게 하라는 것이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긍지에 찬 인간(강상진 외 역 기준 “포부가 큰 사람”)에 대해 하는 말과 유사하다. 긍지에 찬 인간은 명예를 소중히 하는데, 누가 자신에게 상을 주려 한다고 하더라도, 자기가 경멸하는 보잘것없는 자들이 상을 주려 하면 거부해버린다. 그러나 그는 자기와 대등한 자가 주는 상은 기꺼이 받음으로써 수여자를 자신과 대등한 인간으로 인정하고 수여자가 자신에게 상을 주는 것이 수여자에게 영예가 되도록 한다. 니체가 말하는 고귀한 인간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긍지에 찬 인간과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받을 때는 아무에게서 아무거나 받지 말고 내게 무언가를 줄만한 자격이 있는 인간, 즉 훌륭한 인간에게서만 받아라. 받을 때는 그 사람이 ‘당신이 나의 상을 받아줘서 영광이다, 내가 당신에게 도움을 줘서 영광이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방식으로 받아라. (교수님)
하지만 거지만큼은 남김없이 제거해버려라! 참으로 그들에게는 주어도 화가 나고 주지 않아도 화가 난다.
Beggars, however, one should entirely do away with! Truly, it annoys one to give to them, and it annoys one not to give to them.
Bettler aber sollte man ganz abschaffen! Wahrlich, man ärgert sich ihnen zu geben und, ärgert sich ihnen nicht zu geben.
: 거지근성을 가진 자들은 선물을 받을 자격도 없다. 그들은 뻔뻔하게 부끄러워하지도 않으면서 계속 자비와 동정을 요구하므로 주면서도 화가 나고, 주지 않으면 나를 비도덕적인 자라고 욕할테니 주지 않아도 화가 난다. (H 발제문)
“거지”는 받을 때도 전혀 수치스러운 줄 모르는 자들이다. 거지에게는 무언가를 주어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스스로 일어나서 도움을 받지 않는 인간이 되야겠다는 태도도 보이지 않으므로 화가 나는 것이다. 그런데 또 거지의 비참한 처지를 보면 완전히 방관할 수도 없고 그래서 주지 않아도 화가 날 수도 있다. 다시 말해, 뭔가 도움을 줘야 할 거 같은데, 도움을 주자니 받기만 하고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도움을 주지 않자니 방기하는 거 같고, 그래서 화가 난다. (교수님)
가장 나쁜 것은 별 볼 일 없는 생각이다. 진정, 별 볼 일 없는 생각에 빠져 있느니 악한 행위를 하는 것이 더 낫다. [...] 악한 행위는 농양 같다. [...] 그런데 별 볼 일 없는 생각은 진균 같다.
The worst things, however, are the petty thoughts. Truly, better to have done evilly than to have thought pettily! [...] Like a boil is the evil deed [...] But like infection is the petty thought.
Das Schlimmste aber sind die kleinen Gedanken. Wahrlich, besser noch bös gethan, als klein gedacht! [...] Wie ein Geschwür ist die böse That [...] Aber dem Pilze gleich ist der kleine Gedanke
: 악한 행위는 농양처럼 가려움을 일으켜서 터지게 만든다. 악한 행위는 정직하게 문제적인 사태를 직면시키고 이를 극복하려는 의지와 힘을 고양시킨다. 반면, 별 볼 일 없는 생각은 진균처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람들의 힘과 의지를 잠식하고 약화시킨다. 기독교, 노예도덕, 배후세계론, 신체 경멸 등이 이런 진균에 해당한다. 이런 진균이 온 몸에 퍼지면 그 자는 생명력을 잃고 병들고 시들어 버린다. (H 발제문)
“kleiner Gedanke”는 “작은 생각”이나 “왜소한 생각”으로 번역할 수 있다. 왜소한 생각은 우리를 왜소한 존재로 만드는 생각이다. 그것은 “진균”처럼 우리의 생명력을 야금야금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다 소진시켜버린다. 반면, <창백한 범죄자들에 대하여>에서 보았듯이 악한 행동은 자신의 열정을 통합하지 못한 데서 오는 병이다. 악행은 그래도 열정에서 비롯되기에 왜소한 생각보다는 낫다. 또한 악행은 “농양”처럼 자신이 병들어 있다는 것을 정직하게 드러낸다. 그래서 고칠 수도 있다. 그런데 왜소한 생각은 “진균”처럼 자신이 병들어 있다는 것을 전혀 정직하게 드러내지 않는다. 왜소한 자들은 오히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고 사람들에게 자기가 절대적인 진리라고 주장하며 사람들을 왜소한 생각들로 세뇌시킨다. (교수님)
나는 악마에 사로잡힌 자의 귀에 대고 이 말을 해 준다. “네 악마를 키우는 것이 더 좋겠다! 네게도 위대해질 수 있는 길이 아직 남아 있는 것이니!”
To him however, who is possessed of a devil, I would whisper this word in the ear: "Better for you to rear up your devil! Even for you there is still a path to greatness!"
Dem aber, der vom Teufel besessen ist, sage ich diess Wort in's Ohr: "besser noch, du ziehest deinen Teufel gross! Auch für dich giebt es noch einen Weg der Grösse!"
: 신체의 생명력을 갉아 먹고 영혼을 병들게 하는 별 볼 일 없는 생각을 하느니 악마가 되어 위대한 악행을 저질러라! 오히려 [위대한] 악행을 통해서 진정한 힘과 의지 그리고 신체의 생명력을 고양시킬 수 있을 것이다! (H 발제문)
아, 내 형제들이여! 사람들은 모든 이들의 무언가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은 우리에게 뻔히 들여다보인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관통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침묵하기가 그토록 어렵기 때문이다. // 게다가 우리는 우리를 거역하는 자들이 아니라 우리와 아무 상관없는 자들에게 가장 부당하게 대하기도 한다.
Ah, my brothers! One knows a little too much about everyone! And many a one becomes transparent to us, but still we can by no means penetrate him. // It is difficult to live among men because silence is so difficult. // And not to him who is offensive to us are we most unfair, but to him who does not concern us at all.
Ach, meine Brüder! Man weiss von Jedermann Etwas zu viel! Und Mancher wird uns durchsichtig, aber desshalb können wir noch lange nicht durch ihn hindurch. // Es ist schwer, mit Menschen zu leben, weil Schweigen so schwer ist. // Und nicht gegen Den, der uns zuwider ist, sind wir am unbilligsten, sondern gegen Den, welcher uns gar Nichts angeht.
: 별 볼 일 없는 생각 중에 대표적인 것이 잡담이다. 사람들은 너무나도 많은 것들에 대해서 안다고 떠들어댄다. 사람들은 잡담하면서 다른 사람에 대해서 마치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그 사람을 꿰뚫어보고 있는 것처럼 말하지만 사실은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관통해서 알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침묵할 줄 모르고 잡담만 해대는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것은 정말 환멸나고 어려운 일이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뜻에 반해서 거역하는 사람보다도 자기와 아무 상관도 없는 남에게 가장 험하고 부당하게 대한다. (H 발제문)
이 대목은 병적인 인간들이 가지는 호기심이나 잡담으로 해석하기보다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약점과 고통이 다 들여다보이고 바로 그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동정심을 갖게 되어 그들을 무시하고 통과해 지나가버릴 수 없다고 해석해야 할 것 같다. “침묵”은 동정을 표시하지 않는 일이다. 사람들의 약점과 고통이 너무 잘 보이니 동정을 표시하지 않는 일이 참 어렵다. 니체는 자신이 가장 빠지기 쉬운 위험이 동정에 빠지는 것이라 말했다. 그는 스스로 동정심이 많은 인간이며 동정심을 극복하기 어렵다고 고백했었는데 여기서 바로 그런 의미로 이야기하는 것 아닌가 싶다.
누군가를 “부당하게 대한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동정심을 품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를 거역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동정심을 품지 않는다. 그들은 우리와 대등하거나 우리를 능가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경우에 따라 그들에게 두려움이나 존경심을 가질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와 아무 상관 없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동정심을 품곤 한다. 그들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그들을 불쌍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나는[교수님은] 막시즘에 빠져 있었던 젊은 시절, 내가 고통받는 민중과 노동자들을 구해낼 것이라고 어느날 어머니께 말씀드린 적이 있다. 그러자 어머니께서 “노동자들이 아니라 니가 불쌍하다.”라고 말했다. 어쩌면 공산혁명의 가능성은 보이지 않고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몰라 고뇌하고 우울해하던 나 자신이 내가 불쌍하게 여기던 성실한 공장 노동자보다 더 불쌍했을지도 모르겠다. (교수님)
하지만 그대에게 고통받는 벗이 있다면 그대는 그의 고통에 휴식처가, 말하자면 딱딱한 침상, 야전침상이 되도록 하라! 그러면 그대는 벗에게 가장 큰 도움이 될 것이다.
If, however, you have a suffering friend, then be a resting-place for his suffering; like a hard bed, however, a camp-bed: thus will you serve him best.
Hast du aber einen leidenden Freund, so sei seinem Leiden eine Ruhestätte, doch gleichsam ein hartes Bett, ein Feldbett: so wirst du ihm am besten nützen.
: 만약 삶의 고통 속에서 괴로워하는 벗이 있다면 그에게 야전침상이 되어 주는 것이 벗에게 가장 도움이 되는 것이다. 야전침상은 벗에게 영원한 평온을 안겨주지도 못하고 고통을 완전히 없애주지도 못한다. 하지만 그가 자신만의 전쟁터에서 고통을 겪을 때 잠시 쉬어갈 수 있는 휴식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휴식을 통해 벗이 스스로 자신의 고통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라! (H 발제문)
그대에게 벗이 악행을 저지르면 이렇게 말하라. “그대가 내게 한 짓은 용서한다. 하지만 그대 자신에게 그 짓거리를 했다면 내 어찌 용서할 수 있을 것인가!”
And if a friend does you wrong, then say: "I forgive you what you have done to me; that you have done it to yourself, however - how could I forgive that!"
Und thut dir ein Freund Übles, so sprich: "ich vergebe dir, was du mir thatest; dass du es aber dir thatest, - wie könnte ich das vergeben!"
: 벗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벗이 그대에게 행한 악행은 용서할 수 있겠지만, 벗이 자기 자신에게 악행을 저지른 것은 용서할 수 없다. (H 발제문)
벗이 자기 자신에게 악행을 저질렀다면, 그 악행 자체는 허용하겠지만, 그 악행을 저지르도록 스스로에게 허용한 그 벗은 허용할 수 없다. 다시 말해, 벗이 저지른 악행 때문에 손해/상처를 입은 건 용서하겠지만, 벗이 그런 짓을 할 정도로 전락했다는 것은 용서하기 어렵다는 의미로 보인다. 그래서 벗이 그 자신을 초극하도록 채찍질 하겠다는 말이다. (교수님)
(수업 : 박찬국, <존재론연습> (20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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