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현대대륙철학 일차문헌

[니체] 「타란툴라에 대하여」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2부 7장)

현담 2023. 5. 5. 02:37

*타란툴라(tarantulas, Taranteln) : 타란툴라는 남유럽 지중해 연안에 서식하는 독거미다. 물리면 심한 통증과 현기증 끝에 정신착란을 일으켜 죽음에 이르게 된다. 이탈리아 동남부 타란토 사람들은 타란툴라에 물렸을 때 땀을 많이 흘리면 해독이 된다고 믿어 격하게 춤을 추었다고 한다. (S2 발제문)

  유럽에서는 이미 수 백 년 전부터 무도병이 알려져 왔다. 11~17세기에 집단적으로 광란의 춤을 추며, 몇 날 며칠을 쉬지도 않고 이리저리 떼를 지어 몰려다니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죄다 무도병 환자라 여겼다. 그들은 왜 그렇게 미친 듯 춤을 추고 떼지어 다녔을까? 타란튤라tarantula라는 이름의 독거미에 물리면 그렇게 된다는 사람도 있고, 거미의 독을 빼기 위해 그렇게 춤을 추어야 된다는 말도 있었다. (청년의사(http://www.docdocdoc.co.kr), “유럽 헌팅턴 병의 역사”)

  일반적으로 독이 강하고 치명적인 거미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은 공포영화에 자주 등장하면서 '독거미'의 이미지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타란튤라는 벌 정도의 약한독을 가지고 있을 뿐이며 공격을 하기보다는 후퇴하는 편이다. (위키피디아, “타란툴라”)

  타란툴라는 복수 기제를 숨기고 있는 산술적-형식적-본체론적 평등 이념(및 이론가)에 대한 메타포다. 텍스트는 부 독사의 옮에 대하여가 정의 개념 속에 숨겨진 복수기제를 폭로했던 절차와 유사하게 진행된다, 산술적-형식적 평등을 니체는 무리를 지어야만 하는 약자들의 것으로 판단한다. 이들은 강자로 살려는 의지도, 힘도 없다. 자신을 강자로 만드는 자율적이고도 생산적인 행위를 하기에는 그들은 너무 무기력하다. 그들에게 있는 힘은 그저 부정하는 힘이자 파괴적 힘이어서 강자의 힘을 빼앗는 데로 향한다(하향 평준화에 대한 열망이자 강자에 대한 복수). (역주)

 

네 등에는 세모꼴 검은 표식이 찍혀 있다.

Black on your back is your triangle and symbol.

Schwarz sitzt auf deinem Rücken dein Dreieck und Wahrzeichen

: ‘세모꼴 검은 표식을 기독교의 삼위일체로 해석하는 학자도 있다. 기독교적 평등주의는 평균주의의 한 유형으로 대표적으로 하느님 앞에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가 있다. (S2 발제문)

 

그대 평등을 설교하는 자들이여, 이렇게 나는 영혼을 돌게 만드는 그대들에게 비유를 들어 말한다. 그대들은 내게 타란툴라이며, 숨어서 복수를 노리는 자들이다!

Thus do I speak to you in parable, you who make the soul giddy, you preachers of equality! Tarantulas are you to me, and secretly revengeful ones!

Also rede ich zu euch im Gleichniss, die ihr die Seelen drehend macht, ihr Prediger der Gleichheit! Taranteln seid ihr mir und versteckte Rachsüchtige!

: 타란툴라의 정체는 평등을 설교하는 자들이다. 그들이 평등을 설교하는 것은 강자에 대한 복수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때 평등은 산술적 평등으로 근대 자연법 사상에 의해 그 토대를 확립하였다. 산술적 평등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위를 기준으로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끌어올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래를 기준으로 위에 있는 사람들을 끌어내리는 것이다. 타란툴라는 아래에 있는 사람으로서 후자, 즉 하향평준화를 선택한다. 이는 또한 평등을 주장하는 근대 정치혁명들이 선택한 길이기도 하다. 타란툴라의 복수는 영혼을 돌게 만드는 죽음을 초래한다. 타란툴라에게 물리면 검은 부스럼이 자라는데 이때 검은색은 죽음을 의미한다. 니체는 유고에서 타란툴라를 가장 끔찍한 세상을 설교하는 자라고 부른다. (S2 발제문)

  타란튤라는 평등주의자를 가리킨다. 평등주의자들은 복수심, 도덕의 계보에서는 원한이 추동한다. 인간은 원한이나 복수심을 극복해야 하고 적의를 필요로 한다. 부정적 의미의 원한과 긍정적 의미의 적의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교수님) 적의를 가진 사람은 강자와 당당히 싸우고 같이 고양되고자 하지만, 원한을 가진 약자는 비겁한 방식으로 강자를 자기 수준으로 끌어내리고자 한다. (S2) 그런 차이도 있다. 다른 차이로는, 긍정적 의미에서 적의/적개심을 가진 사람은 상대방을 존경/존중하며, 나아가 자기보다 낫다고 인정하고 겸손하게 그로부터 무언가를 배우려고 할 수도 있다. 상대방이 자기에게 패배하더라도 관대하게 대하거나 용서해줄 수도 있다. 반면, 복수심/원한을 가진 사람은 자기를 선한 존재, 상대를 악한 존재라 생각한다. 그래서 상대는 단지 제거해야 할 존재일 뿐이다. 상대는 절대악으로 간주되어 그를 살해해도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으며, 상대에 대한 관대함이나 용서가 없다. 그리고 자기 자신은 절대선이라 발전이 필요 없다. 원한을 가진 사람은 교만하고 오만하다. (교수님)

 

Q. 앞에서는 니체가 복수해야 할 때는 복수할 줄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고 들었다. (J2)

A. 그때의 복수는 넓은 의미의 적개심에 포함될 것이다. 영화 <대부>에서 주인공은 마피아들에게 억울하게 살해당한 자신의 아버지의 복수를 갚는다. 주인공이 그런 보복을 할 때 자신이 절대선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일반 주민의 관점에서는 똑같이 착취하는 마피아이니 나쁜놈이기는 하다. 그런데 다른 마피아처럼 악랄하게 착취하지 않고 나름대로 보호해주는 면도 보인다. 여하튼 주인공 입장에서 자기 아버지를 살해한 사람을 그대로 두고 복수하지 않으면 비겁한 것이 된다. 만약 마피아가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주인공에게 사과를 한다든가 했다면 그는 흔쾌히 받아들일 용의가 있었을 것이다. 니체가 말하는 복수는 이런 복수이다. 옛날 그리스나 로마 귀족들은 상대가 자기 자존심에 상처를 내고 사과하지 않는다면 보복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보복하지 않으면 쓸개가 없는 인간 취급을 받았다. 나쁜 의미는 윤리적인 잣대를 들이대고 보복하는 것이다. (교수님)

 

Q. 타란툴라는 자기가 스스로 복수심을 정의로 포장한 존재라고 인식하는가? (S2)

A. 인식하지 못한다. 아마 자신을 정의의 사도라고 생각할 것이다. 복수심을 정의로 포장했다는 사실은 차라투스트라가 타란툴라의 심리를 꿰뚫어보아 아는 것이다. (교수님)

 

그렇기에 나는 그대들의 거미줄을 찢어낸다. 그대들은 분노하여 그대들의 거짓의 굴 밖으로 유인될 것이고, 그대들의 정의라는 말의 뒤편에서 그대들의 복수가 튀어오를 것이다. // 인간을 복수로부터 구제하는 것. 이것이 내게는 최고 희망에 이르는 다리이자 오랜 폭풍우 뒤에 뜨는 무지개다.

Therefore do I tear at your web, that your rage may lure you out of your den of lies, and that your revenge may leap forth from behind your word "justice." // Because, for man to be redeemed from revenge - that is for me the bridge to the highest hope, and a rainbow after long storms.

Darum reisse ich an eurem Netze, dass eure Wuth euch aus eurer Lügen-Höhle locke, und eure Rache hervorspringe hinter eurem Wort "Gerechtigkeit." // Denn dass der Mensch erlöst werde von der Rache: das ist mir die Brücke zur höchsten Hoffnung und ein Regenbogen nach langen Unwettern.

: 차라투스트라는 정의라는 옷을 걸친 평등의 실체가 실은 복수라는 사실을 밝히고자 한다. 타란툴라는 저열한 복수심에서 비롯된 평등을 포장하기 위해 정의를 찾아냈다. 그 결과 대중들은 타란툴라에 물려 미친듯이 춤을 추는 사람처럼 열광했고 급기야 근대 대중혁명으로까지 이어졌다. 사람들과 세계는 온통 평등이라는 광기에 휩싸였고 더이상의 향상은 없었다. 이는 곧 죽음이다.

  강자를 질투하여 끌어내려 복수하지 않고 그의 높이를 인정하는 것은 인류 향상의 전제 조건이다. 그러자면 인간을 먼저 복수심에서 해방시켜야 한다. 복수는 병리성의 소산이고 그 자체도 병리성이다. 복수에서 해방되려면 사람은 평등하지 않고 평등해서도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이것은 비례적 평등으로서 진정한 정의이다. (S2 발제문)

  니체는 인간들 사이의 수준의 차이가 있으며 그중 탁월한 인간이 지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모든 평등주의자가 복수심에 가득차 있을까? 인간의 심리라는 것이 하나로 딱 설명되지 않는 법이다. 어떤 평등주의자는 민중에 대한 사랑과 동정이 강할 수도 있다. 니체처럼 단순화시켜 보는 것도 문제가 있다. 평등주의의 기제는 상당히 복합적일 것이다. (교수님)

 

*“동등”(“equality”, "Gleichheit") : 타란툴라는 강자가 되고싶지만 향상할 능력도 의욕도 없다. 하여 그들은 강자를 부정하고 파괴하여 자신과 동등하게 만들고자 한다. 그러고는 덕이라는 미명 뒤에 숨는다. (S2 발제문)

  니체 사상이 한편으로는 의미가 있다고 하더라도, 다른 한편으로는 니체가 비판하는 근대민주주의의 성과를 받아들여야하는 거 아닌가 싶다. 근대민주주의는 기회의 평등을 추구하며 복지정책을 펼친다. 결과적 평등은 나태함을 조장할 수 있지만, 인간들 사이의 경쟁이 공정한 경쟁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기회의 평등 이념은 어떤 의미에서 니체 사상에도 적합하다. (교수님)

 

*분노에 찬 오만과 억눌린 질투(fretted conceit and suppressed envy. vergrämter Dünkel, verhaltener Neid) : ‘분노에 찬 오만은 자신이 강자가 될 수 있는 존재라고 여겼지만 실현되지 않았을 때 오만이 상처를 받음으로 인해 분노한 것을 가리킨다. ‘억눌린 질투는 강자에 대한 질투를 사회 도덕의 제약으로 인해 억제한 것을 가리킨다. 선조부터 장시간 누적된 분노와 억압이 폭발하여 복수심이 되었고 이는 타란툴라로 하여금 평등을 설교하게 만들었다. (S2 발제문)

  ‘분노에 찬 오만은 자기네가 정의이고 절대선으로서 분노하고 있다고 여기는 것, 막시즘의 경우 자기네가 절대진리를 다 파악하고 있고 정의를 위해 싸우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아닐까. 막시스트들은 자신들이 절대선이기 때문에 자기 집단을 위해 스스럼없이 거짓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막시스트였을 때 교수들 강의도 시원찮고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교수님)

 

아버지가 침묵했던 것은 아들에게서 발설되기 마련, 나는 아들이 아버지의 폭로된 비밀임을 자주 발견했다.

What the father has hid comes out in the son; and oft have I found in the son the father's revealed secret.

Was der Vater schwieg, das kommt im Sohne zum Reden; und oft fand ich den Sohn als des Vaters entblösstes Geheimniss.

: 아버지때부터의 복수심이 아들에게서 폭로된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아버지는 아마 피지배계층, 약자로서 원한과 복수심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니체는 도덕의 계보에서 기독교를 원한의 종교라고 말하는데, 그 당시 로마의 노예들의 원한의 발로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기독교에서는 인간들 사이에 수준차가 있음에도 인정하지 않고 신 앞에서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자기들이야말로 억압받았기 때문에 선한 존재이며, 지배자들은 악한 존재라 생각한다. 중세 혹은 아버지 시대에는 이러한 기독교로 원한이 은밀히 해소되었지만, 근대 혹은 아들 시대에는 민주주의, 사회주의, 무정부주의에서 원한이 노골적으로 표출된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교수님)

 

저들은 열광하는 자들과 같다. 그런데 저들을 열광시키는 것은 심장이 아니라 복수다. 저들이 섬세하고 냉정해진다면, 저들을 섬세하고 냉정하게 만드는 것은 정신이 아니라 시샘이다. // 저들의 질투가 저들을 사상가의 길로 이끌기도 한다. 그런데 그 질투의 표정이 있으니, ‘저들은 언제나 너무 멀리 간다는 것이다 저들은 지쳐버려 결국에는 눈 위에라도 누워 잠을 자야만 한다.

Inspired ones they resemble: but it is not the heart that inspires them - but vengeance. And when they become subtle and cold, it is not spirit, but envy, that makes them so. // Their jealousy leads them also into thinkers' paths; and this is the sign of their jealousy - they always go too far: so that their fatigue has at last

to go to sleep on the snow.

Den Begeisterten gleichen sie: aber nicht das Herz ist es, was sie begeistert, - sondern die Rache. Und wenn sie fein und kalt werden, ist's nicht der Geist, sondern der Neid, der sie fein und kalt macht. // Ihre Eifersucht führt sie auch auf der Denker Pfade; und diess ist das Merkmal ihrer Eifersucht - immer gehn sie zu weit: dass ihre Müdigkeit sich zuletzt noch auf Schnee schlafen legen muss.

: 이때 사상가는 산술적 평등이론을 주장하는 이론가들을 의미한다. 그들의 이론들은 모두 강자에 대한 질투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표징은 다음과 같다. 질투는 열화와도 같아 제어하기가 어렵기에 결국 자신이 그 희생양이 된다. 그들은 현실에서 벗어난 이론들을 주장한다. 그들은 영원히 실현불가능한 이론들을 주장하기에 피로감에 젖어 차가운 눈 위에 쓰러져 죽어가는 것이다. (S2 발제문)

  “사상가는 막스나 프루동 등 평등을 주창하는 철학자들을 가리킬 것이다. “지쳐버려 결국에는 눈 위에라도 누워부분은 어떻게 해석해야할지 잘 모르겠다. 비현실적인 이론을 주창하기 떄문에 지쳐 쓰러지는 것일까? 그런데 니체 당시에는 사회주의나 무정부주의가 태동한지 얼마 되지 않았고 실현을 위해 노력한 기간도 얼마 되지 않아서 실현하다가 지쳐 쓰려진다고 보긴 어려울 것 같다. 저들이 자신을 극복하면서 성장하는 건강한 생명력을 상실했다고 해석해야 하지 않을까? (교수님) 그러면 언제나 너무 멀리 간다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S2) 잘 모르겠다. (교수님)

  나는 섬세하고 냉정한을 연결하고 싶다. “섬세하고 냉정한“fein und kalt”의 번역인데, 해당 번역이 해당 문장에서 자연스럽기는 하지만, 원래 의미는 을 연상시키는 순수하고 차가운이다. 결국 질투심으로부터 비롯된 평등에 대한 열광이 나타나는 한 가지 방식은 사상가가 되는 것인데, 사상가가 된 평등주의자는 자신의 평등 사상을 굉장히 길게 포장하여서 자신을 피곤하게 만드는 질투심을 섬세하고 냉정한사상 속에서 달랜다는 말 같다. 참고로 눈 위에서 자는 것의 주어는 저들이 아니라 저들의 피로”(their fatigue, ihre Müdigkeit)라는 점도 이 해석의 설득력을 높여준다. (사견)

 

*판관이 되는 것(being judge, Richter-sein) : 타란툴라는 판관이 되고자 한다. 판관이 된 타란툴라는 강자를 악하고 부정의하다고(선하고 의로운 것과 반대된다고) 심판하고 강자를 끌어내리고 고통을 가하는 처벌을 행사한다. (S2 발제문)

 

*사형집행인과 사냥개(the hangman and the sleuth-hound, der Henker und der Spürhund) : 니체에 따르면, 복수를 해야 할 때는 해야 하지만, 상대가 사과하고 관용을 베풀 것을 간청한다면 관용을 베풀 수도 있어야 한다. 그런데 평등주의자들은 처벌에 대한 욕망으로 가득 차 있다. 근대 평등주의자들은 정권을 잡은 후 반대 세력을 모두 처형한다. 니체는 프랑스 혁명 당시 로베스피에르가 귀족들과 반대파를 모두 처형했던 사실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 것이다. 도덕의 계보에서 니체는 기독교도 평등주의와 똑같은 정신에 사로잡혀 있다고 본다. 기독교에서 처벌에 대한 욕망은 지옥의 형태로 나타난다: ‘저 억압하는 강자는 지옥으로 갈 것이다!’ (교수님)

 

그리고 저들이 선한 자, 의로운 자로 자칭할 때, 잊지 말라! 저들이 바리새인이 되는 데 다만 권력만이 모자랄 뿐임을.

And when they call themselves "the good and just," forget not, that for them to be Pharisees, nothing is lacking but power.

Und wenn sie sich selber "die Guten und Gerechten" nennen, so vergesst nicht, dass ihnen zum Pharisäer Nichts fehlt als Macht!

: 타란툴라의 평등은 병리적인 평등으로 덕도 정의도 아니다. 그들에게는 단지 권력이 모자랄 뿐이다. 권력만 있다면 그들은 금세 바리새인처럼 특권 계급으로 군림할 것이다. (S2 발제문)

  바리새인은 위선자를 가리킨다. 그들은 겉으로는 선을 표방하지만 안으로는 오만에 가득차 있다. 예수가 살았던 시대의 이런 바리새인과 근대의 평등주의자의 다른 점은 다만 바리새인은 권력을 쥐고 있었지만 평등주의자들은 아직 권력을 잡지 못했다는 점 뿐이다. (교수님)

 

내 벗들이여, 나는 섞이고 싶지도 않고 혼동되고 싶지도 않다.

My friends, I will not be mixed up and confounded with others.

Meine Freunde, ich will nicht vermischt und verwechselt werden.

: 타란툴라 중에는 언뜻 보면 차라투스트라와 비슷한 가르침을 펴는 자들이 존재한다. 예를 들면, 종교의 피안성을 배척하고 현실세계를 중시할 것을 주장하는 무신론자, 세계의 모든 것이 운동으로 환원된다고 주장하는 유물론자 등이 있다. (S2 발제문) 니체와 마찬가지로 혁명적 무정부주의나 혁명적 사회주의자는 다 무신론자였다. 무신론자라는 점 때문에 이들과 자기를 혼동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자기는 이들과 혼동되고 싶지가 않다는 이야기다. (교수님)

 

이 독거미들이 동굴에 들어앉아 삶에 등을 지고 있으면서도 삶에 대해 좋게 말하는 것은, 고통 주기를 원해서다. // 그렇게 하면서 지금 힘을 갖고 있는 자들에게 고통을 주려고 하는 것이다. 이들에게 죽음의 설교가 아직도 가장 친숙하기 때문이다. // 그렇지 않다면 타란툴라들은 다르게 가르칠 것이다. 타란툴라들이야말로 한때는 최고의 세계비방자들이자 이단자를 화형시키는 자들이었으니.

That they speak in favour of life, though they sit in their den, these poison-spiders, and withdrawn from life - is because they would thereby do injury. // To those would they thereby do injury who have power at present: for with those the preaching of death is still most at home. // Were it otherwise, then would the tarantulas teach otherwise: and they themselves were formerly the best world-maligners and heretic-burners.

Dass sie dem Leben zu Willen reden, ob sie gleich in ihrer Höhle sitzen, diese Gift-Spinnen, und abgekehrt vom Leben: das macht, sie wollen damit wehethun. // Solchen wollen sie damit wehethun, die jetzt die Macht haben: denn bei diesen ist noch die Predigt vom Tode am besten zu Hause. // Wäre es anders, so würden die Taranteln anders lehren: und gerade sie waren ehemals die besten Welt-Verleumder und Ketzer-Brenner.

: 타란툴라들도 마치 삶을 긍정하는 차라투스트라처럼 삶을 긍정하는 말을 하지만 그것은 진심이 아니라 고통을 주기 위한 함정에 불과하다. 죽음의 설교를 펼치는 기독교가 지금의 통치계급(“지금 권력을 갖고 있는 자들” - 니체 당시의 황제처럼 권력을 쥐면서도 기독교를 믿는 자들)에게 여전히 득세하기에 그들에게 고통을 주기 위하여 고의로 반대되는 입장을 펼치는 것이다. 한때 타란툴라는 기독교 세력에 편승하는 자였고 삶을 긍정하는 사상가들을 박해하는 자들이었다. (S2 발제문)

  포이에르바흐, 마르크스, 바쿠닌 모두 무신론자이다. 타란툴라들이 삶을 긍정한다는 말을 한다는 것은 이러한 혁명적 무신론자들이 삶을 긍정하는 것처럼 내세라는 것은 없고 현실세계뿐이라고 말한다는 이야기이다. 그렇지만 이들은 평등한 사회를 실현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오히려 현실로부터 등을 돌리고 있다. 이들이 추구하는 사회는 인간들 사이에 계급이 없는 사회, 지배자 피지배자가 없는 사회, 모든 사람이 직접적으로 참여하는 사회일텐데 그런 사회는 현실적으로 없다. 현세의 평등주의자들도 이원론자나 마찬가지이다. 미래의 유토피아와 현재의 비참한 세계의 대비는 내세와 현세의 대비와 궤를 같이 한다.

  혁명적 무신론자들은 기독교 성직자들과 그들이 정당화하는 지배계급을 비난한다. 하지만 이런 무신론자들은 본질적으로 자신들이 비난하는 자들과 동일한 정신을 갖는 자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이 절대선이고, 자신들에게 동의하지 않으면 절대악이라 단죄하고 싶어하는 심리에 사로잡혀있기 때문이다. 평등주의는 기독교가 이단자들을 박해하던 것의 변양된 형태로 고통을 주고 싶어할 뿐이다. 중세 기독교인들이나 근대 평등주의자들이나 똑같다. (교수님)

 

나는 평등을 설교하는 이런 자들과 섞이고 싶지도 않고 혼동되고 싶지도 않다. 정의가 내게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평등하지 않다라고.

With these preachers of equality will I not be mixed up and confounded. For thus speaks justice to me: "Men are not equal.“

Mit diesen Predigern der Gleichheit will ich nicht vermischt und verwechselt sein. Denn so redet mir die Gerechtigkeit: "die Menschen sind nicht gleich."

: 차라투스트라는 일부 평등을 설교하는 자들과 유사해 보이지만 근본적으로 다르다. 차라투스트라는 평등이 아닌 불평등을 설교한다. 힘에의 의지가 벌이는 힘싸움의 세계에서 불평등이야말로 진정한 정의이다. 이때 불평등은 비례적 평등을 의미한다. (S2 발제문)

  산술적-형식적 평등에 대한 거부이자 동시에 합리적 차별을 전제한 비례적 평등에 대한 옹호다. ”동등한 자에게는 동등을, 동등하지 않은자에게는 동등하지 않음을 - 정의에 대한 진정한 표현은 바로 이것일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로서, 동등하지 않은 자를 결코 동등하게 만들지 말라“ (우상의 황혼』 〈어느 반시대적 인간의 펀력48). 니체는 이런 생각을 토대로 분배 정의를 제시하기도 한다. 따라서 니체를 무조건적인 반평등주의자라고 하는 것은 니체에게는 정당하지 않다. (역주)

 

평등해져서도 안 된다! 내가 달리 말한다면 위버멘쉬에 대한 나의 사랑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 사람들은 천 개의 다리와 좁은 길을 지나 미래를 향해 돌진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는 더 많은 싸움과 더 많은 불평등이 조성되어야 한다. 내 위대한 사랑이 이렇게 말하게 한다!

And neither shall they become so! What would be my love to the overman, if I spoke otherwise? // On a thousand bridges and piers shall they throng to the future, and always shall there be more war and inequality among them: thus does my great love make me speak!

Und sie sollen es auch nicht werden! Was wäre denn meine Liebe zum Übermenschen, wenn ich anders spräche? // Auf tausend Brücken und Stegen sollen sie sich drängen zur Zukunft, und immer mehr Krieg und Ungleichheit soll zwischen sie gesetzt sein: so lässt mich meine grosse Liebe reden!

: “Stegen”좁은 길”(백승영)이나 오솔길, 작은 길로 번역할 수도 있고, “외나무 다리”(황문수)(중문판은 小桥 - 작은 다리”, 영문판은 “piers - 부두/잔교로 번역)좁은 다리로 번역할 수 있다. 만약 후자를 택하여 천 개의 다리와 외나무 다리라고 번역한다면, 초인에의 길이 인간에 따라 동일하지 않고 각자에게 유일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S2 발제문)

  단수가 der Steg, 복수가 die Stege, 복수 여격(복수 3, plural dative)Stegen이다. 원문은 “Stegen”이므로 이나 다리중 무엇을 택하든 복수로 좁은 길들이나 좁은 다리들이라고 번역해야 할 것이다. 뒤에 등장하는 계단들 사이의 모순 [...]” 대목에서 계단들과 마찬가지 상징이 아닌가 싶다. (교수님)

 

*형상들과 유령들(figures and phantoms, Bilder und Gespenster) : 여러 가지 이상과 새로운 사상을 의미한다. (S2 발제문) ‘여러 가지 이상과 새로운 사상이라는 표현은 니체가 자신들의 적대관계 속에서사람들이 고안해낼 형상들과 유령들로 고려하지 않을 평등주의나 국가주의 등을 포함할 혐의가 있기 때문에 부적절하다. 투쟁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을 고양할 최고의 전투를 벌이기 위해 가지는 서로 다른 초인의 이상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보다 적절하다. (사견)

 

삶이 높이를 필요로 하기에, 계단이, 계단들 사이의 모순이, 오르는 자들 사이의 모순이 필요한 것이다! 삶이 오르기를 원하고 오르면서 자신을 극복하고자 한다.

And because it requires elevation, therefore does it require steps, and variance of steps and climbers! To rise strives life, and in rising to surpass itself.

Und weil es Höhe braucht, braucht es Stufen und Widerspruch der Stufen und Steigenden! Steigen will das Leben und steigend sich überwinden.

: “계단들은 초인으로 향하는 단계들, 수준들, 계급들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계단들 사이의 모순불평등/수준차/위계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계단들을] 오르는 자들 사이의 모순초인으로 향하는 불평등/수준차/위계에 있는 사람들 사이의 대립/투쟁로 이해할 수 있다. (교수님)

 

한때 여기서 자신의 사상을 돌에 담아 높이 쌓아 올렸던 자는, 최고의 현자가 그러했듯 진정 삶의 모든 비밀을 알고 있었다! // 아름다움 속에조차 싸움과 불평등이 있고, 힘을 위한 싸움과 힘을 넘어서는 힘을 위한 싸움이 있다는 것. 이 사실을 그는 여기서 가장 분명한 비유로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Truly, he who here towered aloft his thoughts in stone, knew as well as the wisest ones about the secret of life! // That there is struggle and inequality even in beauty, and war for power and supremacy: that does he here teach us in the plainest parable.

Wahrlich, wer hier einst seine Gedanken in Stein nach Oben thürmte, um das Geheimniss alles Lebens wusste er gleich dem Weisesten! // Dass Kampf und Ungleiches auch noch in der Schönheit sei und Krieg um Macht und Übermacht: das lehrt er uns hier im deutlichsten Gleichniss.

: ‘최고의 현자는 헤라클레이토스를 가리킨다. 그는 대립하는 것들의 싸움과 투쟁을 만물의 형성원리라고 했다. 니체 역시 힘에의 의지가 벌이는 힘싸움을 만물의 본성이라 여긴다. ‘가장 분명한 비유는 헤라클레이토스가 만물의 근원은 불이다라고 한 것을 가리키는 듯하다. (S2 발제문) 헤라클레이토스의 은 끊임없이 변하면서 생동하는 생명력의 상징이다. (교수님)

 

*둥근 천장과 아치(vault and arch, Gewölbe und Bogen) : 겉으로 보기엔 정적이고 아름답기만 한 천장과 아치는 사실 신적인 모습으로 분투하고 있다. 앞 문장에서 아름다움 속에서조차 싸움과 불평등이 있고, 힘을 위한 싸움과 힘을 넘어서는 힘을 위한 싸움이 있다는 것에 대한 가장 분명한 비유는 바로 이 둥근 천장과 아치를 가리킬 수도 있다. (S2 프로토콜)

 

, 이런! 방금 내 오랜 적인 타란툴라가 나를 물었다! 내 손가락을 물었다. 신적으로 당당하고 근사하게! // 타란툴라의 생각은 이랬던 것이다. “처벌이 있어야 하고 정의가 있어야 한다. 이곳에서 차라투스트라가 아무런 대가를 치르지 않고 적대관계를 예찬하는 노래를 불러서는 안 된다!”

Alas. There has the tarantula bit me myself, my old enemy! Divinely steadfast and beautiful, it has bit me on the finger! // "Punishment must there be, and justice" - so thinks it: "not gratuitously shall he here sing songs in honor of enmity!"

Wehe! Da biss mich selber die Tarantel, meine alte Feindin! Göttlich sicher und schön biss sie mich in den Finger! // "Strafe muss sein und Gerechtigkeit - so denkt sie: nicht umsonst soll er hier der Feindschaft zu Ehren Lieder singen!"

: 평등을 설교하는 타란툴라이지만 반대하는 자에게는 복수심을 가감없이 드러내면서 정의라는 미명 하에 처벌을 내린다. 타란툴라가 복수심을 드러내는 것도, 복수심에서 비롯된 평등을 설교하는 것도 병리적이기는 하나 역시 힘에의 의지의 표현이다. 타란툴라에게도 강자를 지배하고자 하는 힘에의 의지가 있다는 사실만은 긍정할만한 가치(“신적으로 당당하고 근사하게!”)가 있다. 물론 타란툴라의 힘에의 의지는 건강하지 않기에 서로의 힘에의 의지를 고무시켜 위버멘쉬의 길로 나아가는 진정한 적으로서의 싸움을 하지 않는다. (S2 발제문)

  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 사이의 보다 높은 힘에의 의지의 실현을 위해서 적대관계, 끊임없는 투쟁을 예찬한다. 평등주의자들은 자신들이 내세우는 정의를 무시하면서 이런 식으로 마음대로 예찬하는 차라투스트라가 단죄를 받아야 한다는 심리에서 그를 처벌하고자 그의 손가락을 물어버린다.

  여기서 신적으로 당당하고 근사하게!”는 평등주의자들의 복수를 긍정하는 표현이라기보다는 평등주의자들이 스스로 정의의 화신인 것처럼 자신[차라투스트라]을 단죄한다는 것을 비꼬는 표현으로 보인다. 타란툴라도 힘에의 의지를 실현하려고 하긴 한다. 그러나 니체는 왜곡된 힘에의 의지의 실현은 부정한다. 타란툴라의 힘에의 의지는 위선적이고 자기도취적인 힘에의 의지이다. 타란툴라는 정당한 투쟁이나 경쟁을 통해서 자기가 상대보다 탁월하다 입증하는 방식으로가 아니라, 자신은 절대선이고 상대는 절대악이라는 생각을 통해서 힘에의 의지를 만족시켜버린다. 이런 것도 물론 힘에의 의지의 표현이지만, 힘에의 의지가 성장하는 데에 도움되지 않는 방식의 표현이다.

  도덕적인 위선이 지배하는 곳에서 같이 산다는 것은 매우 힘들다. 젊은 시절 내가 막시스트로서 힘들었던 이유는 그 집단 안에서도 경쟁이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경쟁이 있다. 하지만 이념에 사로잡힌 사람들 사이의 경쟁보다는 비인간적이지 않다. 막시스트 집단 안에서는 누가 이념에 더 충실한지, 누가 더 훌륭한 혁명가인지를 두고 경쟁한다. 그 경쟁에서 기회주의자로 낙인이 찍히면 인간도 아닌 인간으로 취급받게 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경쟁에 지면 가난하게 될 뿐이다. 물론 가난한 자도 간혹 무시당하긴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천박한 인간이 그렇게 무시한다. 그러나 이념 집단에서는 상대방을 간첩이나 기회주의자로 몰아세우고는, 김일성이 그랬던 것처럼, 경쟁에서 패배한 상대방을 학살해버리기도 한다. 누가 더 이념에 더 충실하냐는 경쟁은 이렇게 비인간적인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위선적이다. 완전한 혁명가는 불가능하기에 자기 자신을 그런 사람인 것처럼 꾸민다. 자기 자식은 상류층 편입하고 싶어서 해외 유학을 보내놓고는 서민 코스프레를 하기도 한다.

  여하튼 니체는 힘에의 의지라고 해서 다 긍정하는 것은 아니며, 명시적으로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니체는 서로 다른 유형의 힘에의 의지의 성격을 분명하게 구분한다. 비겁한 힘에의 의지는 약자를 괴롭히는 강자의 힘에의 의지이다. 위선적 힘에의 의지는 자신을 절대선이라 생각하고 자신의 적대자를 절대악이라 생각하는 자의 힘에의 의지이다. 건강한 힘에의 의지는 적이라 할지라도 자기보다 우월한 상대이거나 대등한 상대이면 존중하며 최소한 자기와 대등한 자와 경쟁하는 자의 우아하고 기품있는 힘에의 의지이다. (교수님)

 

*기둥에 묶인 성자(a pillar-saint, Säulen-Heiliger) : “Säulen-Heiliger”를 백승영과 황문수 모두 기둥에 묶인 성인/성자로 번역했다. 추측하건대, 바로 앞의 구절에서 차라투스트라가 영혼이 돌아버리지 않도록 자신을 기둥에 묶으라 말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Säulen-Heiliger” 자체에는 묶였다는 의미가 없으며 이 표현이 실제적으로 의미하는 것은 주상성자(柱顶圣者, 기둥 위 성자)이다.

  영혼이 돌아버리지 않도록 자신을 기둥에 묶어달라고 하는 대목은 호메로스 <오뒷세이아> 12권에서 세이렌 자매의 유혹을 피하기 위해 오뒷세우스가 전우들로 하여금 자신을 결박해라고 하는 대목에 대한 패러디이다. 타란툴라에 물렸으니 차라투스트라는 금세 현기증에 잠식되어 타란툴라의 춤을 출 것이다. 그러나 차라투스트라는 귀향길에 오른 오뒷세우스처럼 흔들림 없이 목표를 향해 나아가야 하기에 자신을 기둥에 묶어달라고 하는 것이다.

  주상성자는 고대 시리아, 파키스탄 일대의 기둥 위에 사는 고행자들을 가리키는 말로 첫 주상성자는 시메온이다. 그는 시리아 안타오기카 교외의 데이르 세만에서 고행을 시작했는데 이후 40년 가까이 이어갔다. 시메온은 과도한 고행으로 인해 수도원에서 함께 지내기가 어려웠기에 기둥 위로 피신해 혼자만의 고행을 즐긴 자이다. 차라투스트라는 타란툴라의 복수의 소용돌이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주상성자가 되어 저들에게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다. (S2 발제문)

  차라투스트라조차도 타란툴라의 복수심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힘들기에 그것에 휘둘리지 않도록 기둥에 묶어달라고 요청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타란툴라식으로 생각하기 쉽다. 우리는 잘나가는 사람을 보고 나보다 능력도 없는데 윗사람한테 아부해서 저렇게 잘나가는구나생각할 때가 있다. 연예 기사에 달리는 수많은 인터넷 악플은 타란툴라 정신에 물들어 있는 사람들의 행태를 잘 보여주기도 한다. (교수님)

 
 

(수업 : 박찬국, <존재론연습> (20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