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 『반시대적 고찰』 “삶에 대한 역사의 공과”에서도 니체는 현대인의 교양(Bildung)을 고대 그리스와 대조하며 비판한 바 있다. 약 10년 간이 지난 이 글에서도 그러한 비판의식은 반복되는데, “삶에 대한 역사의 공과”에서의 Bildung에 대한 관점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내에서의 Bildung에 대한 관점이 구체적인 차이가 있을지 궁금하다. (H2 발제문)
A : 『반시대적 고찰』과 문제의식을 공유한다. 현대의 교양은 지식의 주입에 불과하니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 요지이다. 니체 당시 독일에서는 김나지움 단계에서부터 고전 문헌들을 읽으면서 라틴어와 희랍어를 많이 익혔다. 그런 문헌들을 읽히고 교양을 쌓는 것 자체에 대해서는 니체가 문제삼지 않는다. 문제는 그런 문헌들에 나오는 삶과 정신을 자기 것으로 체화하지 못하고, 단순히 누가 이랬다더라 누군 저랬다더라 수준의 지식을 쌓는데 그치고 있다는 점이다. 니체는 고대 그리스의 이상을 받아들이고 있으며 고대 그리스인들을 탁월한 인간들로 보았는데, 그들의 정신을 제대로 배우려면 고대 그리스인이 걸었던 것처럼 걸어보고 앉았던 것처럼 앉아보는 게 필요하다고 보았다. (교수님)
나는 미래로, 너무 멀리 날아갔었다. 전율이 나를 엄습했다. // 주변을 둘러보자, 보라! 시간(Zeit)만이 내 유일한 동시대인(Zeitgenosse)이었다. // 그때 나는 뒤돌아 고향 쪽으로 날았다. 점점 더 서둘러 날았다. 그렇게 나는 그대 현대인들에게로, 이 교양의 나라로 돌아왔다. // 처음으로 그대들을 위한 눈과 선의의 열망을 가지고서, 진정으로 심장 속에 동경을 품고서 왔다.
TOO far did I fly into the future: a horror seized upon me. // And when I looked around me, Behold. there time was my sole contemporary. // Then did I fly backwards, homewards - and always faster. Thus did I come to you: you present-day men, and into the land of culture. // For the first time brought I an eye to see you, and good desire: truly, with longing in my heart did I come.
Zu weit hinein flog ich in die Zukunft: ein Grauen überfiel mich. // Und als ich um mich sah, siehe! da war die Zeit mein einziger Zeitgenosse. // Da floh ich rückwärts, heimwärts - und immer eilender: so kam ich zu euch, ihr Gegenwärtigen, und in's Land der Bildung. // Zum ersten Male brachte ich ein Auge mit für euch, und gute Begierde: wahrlich, mit Sehnsucht im Herzen kam ich.
: 19세기 교양이 인간의 미래를 전율을 일으킬 정도의 것으로 만들어버려, 제대로 된 인간 한명을 발견 할 수 없었다는 뜻이다. (역주) 좀 더 쉽게 말하면 현대의 교양이 너무 개판이라 이대로 가다가는 제대로 된 인간이 하나도 없을 것 같으니 황급히 현대의 교양을 진단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사견)
이 문장들은 현대인들에 대한 본격적인 비판에 앞서 그 계기를 마련하는 서론격의 문장들이다. 미래에는 ‘Zeit’외의 ‘Zeitgenosse’가 존재하지 않는다. 차라투스트라가 경험한 전율은 이러한 고독의 상태에 대한 공포를 의미한다. 그가 고향에 돌아오는 과정에서 품었던 ‘선의의 열망(gute Begierde)’, ‘동경(Sehnsucht)’은 이러한 ‘Genosse’, 동반자를 마련하기 위한 욕망을 의미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미 서설에서 자신에게 ‘길동무’가 필요함을 언표한 바 있다. 이러한 욕망이 서설에서 차라투스트라를 시장으로, 교양의 나라로 몰락(Untergehen)시켰다. 그리고 이러한 욕망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최종장에서야 그 자신의 동정을 저버리는 방식으로 극복된다. (H2 발제문)
여기 텍스트에서 ‘길동무’나 ‘동정’까지 읽어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D) 여기서 “미래”는 초인의 나라나 시대로 이해할 수 있을텐데, 그런 “미래”를 깊게 생각하다보니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자기 뿐인 거 같고, 자기 뿐이라는 점에서 공포가 엄습하였다. “시간만이 내 유일한 동시대인이었다.”는 자신과 같이 초인을 추구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자신과 뜻을 같이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나 싶어서 현대로 돌아와 봤더니 현대인들은 천박한 교양인들에 불과하더라. 이런 이야기로 보인다. 발제자의 해석도 이와 비슷하게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동정을 저버리는 방식으로 극복된다’는 말은 고독을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극복된다는 말인가? 이 말은 분명치 않다. 여기서는 차라투스트라가 자신의 동반자를 찾고 싶어서 교양의 나라로 왔다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교수님) 텍스트의 내용 자체는 D가 말한 것처럼 해석할 수 있지만, 발제문에서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전체적인 내용을 녹여내는 동시에 차라투스트라가 몰락하는 서사를 강조하는 방식으로 해석하고자 했다. (H2)
발제자의 해석은 구체적인 텍스트 속에서 텍스트 전반에 걸쳐 반복되는 모티프(recurring motif)를 발견하여 잘 드러낸 것 같다. 해석자는 눈 앞에 보이는 텍스트의 자구와 눈에 보이지 않는 저자의 체계를 오고가며 중용에 맞게 해석해야 한다. 텍스트를 무시하고 해석자가 구상한 저자의 체계를 텍스트에 대입하기만 하면, 텍스트의 구체적인 맥락에서 드러나는 저자의 다채로운 목소리가 묵살되고 해석자의 목소리가 일방적으로 지배하게 되어, 저자를 해석자의 입맛에 맞게 일면적으로 오해하기 쉽다. 반대로 저자의 체계를 고려하지 않고 텍스트를 자구 그대로만 읽으려고 하면, 저자의 목소리가 파편화되고 심층적 맥락과 상징적 언어를 지나치게 되어, 저자를 불가해하게 만들거나 피상적으로 이해하기 쉽다. (사견)
*알록달록한 작은 반점투성이(motley-coloured, Buntgesprenkeltes), 염료통들(paint-pots, Farbentöpfe) : “Buntgesprenkeltes”라는 메타포는 〈서설〉의 알록달록한 옷을 입은’ 포센라이서와 유사한 표현으로, 19세기 교양이 여러 가지 것들의 마구섞임이자 잡탕이라는 뜻이다. 그러니 19세기 현대인들은 그 알록달록한 색채의 가면이자 일을 쓰고 있는 것이나 다를 바가없다. (역주)
교양의 나라는 정작 ‘염료통들(Farbentöpfe)’의 고향이었기에 차라투스트라는 조롱섞인 투로, 좌절감으로 웃어버린다. 이러한 염료통들은 알록달록한(bunt) 반점투성이(Gesprenkeltes)의 재료가 된다. 이러한 “Buntgesprenkeltes”는 이후 단락에서 제기될 차라투스트라의 현대인 비판의 요체가 된다. 즉, “교양의 나라에 대하여”의 주요 논지는 이러한 “Buntgesprenkeltes”가 무엇이고 어째서 문제적인지를 제기하는 것이다. (H2 발제문)
과거의 기호들이 가득 적혀 있고, 그 과거의 기호들 위로 새로운 기호들이 덧칠해져 있다. 이렇게 그대들은 온갖 기호 해독가들로부터 그대 자신을 잘도 숨기고 있다!
Written all over with the characters of the past, and these characters also pencilled over with new characters - thus have you concealed yourselves well from all decipherers!
Vollgeschrieben mit den Zeichen der Vergangenheit, und auch diese Zeichen überpinselt mit neuen Zeichen: also habt ihr euch gut versteckt vor allen Zeichendeutern!
: 백승영 역과 황문수 역에서는 각주에서 ‘기호(Zeichen)’를 역사로 해석하고 있다. 이는 『반시대적 고찰』 내의 “삶에 대한 역사의 공과” 내에서 제기되는, 역사의 과잉과 ‘쉰 개나 되는 얼룩’들을 동치시키는 해석이다. 해당 문헌에서 니체가 역사에 대해 비판하는 지점은, 학문화된 역사가 인식의 지평을 무제한적으로 확장함으로써 하나의 총체적 사유로 모든 것들을 포섭하고자 하는, 그리하여 삶에 역사를 종속시키고자 하는 것이 아닌 역사에 삶을 종속시키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무제약적으로 수집된 역사, 기호들은 그 자체로 무엇인가를 생성하기보다 오로지 그 자신의 역사적 지평만을 거울처럼 반복할 뿐이다. 그리고 이런 역사와 문화의 혼재들은 그 본연의 얼굴, 민낯을 가림으로써 본연의 모습인 신체로서의 자기를 가려버린다.
혹은 한 발 더 나아가서 이 ‘기호’을 기호 자체의 의미로, 곧 언어와 같은 것으로서 사유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니체는 1873년의 “비도덕적 의미에서의 진리와 거짓”에서 언어에서 진리가 나오고, 진리에서 법칙, 특권, 질서가 나옴을 주장한다. 이렇듯 언어기호를 가능케하는 법칙성은 문화를 가능케 하는 제반이 됨과 동시에 그 문화적 질서가 무근성을 (낱말과 물자체 간의 연결이 갖는 자의적 전용으로서의 성질을 통해) 드러낸다. 이러한 측면에서 기호가 역사의 과잉을 의미할 수 있는 것은 그러한 기호들의 중첩이 개별적 문화들, 언어들의 중첩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로제타석에서 한 공간에 세 문자가 동시에 들어있는 것과 같아서 어떠한 번역가조차도 해독할 수 없게끔 만든다. 그리고 이러한 혼재는, 지나치게 다양한 규준들로 인해 그 몸 자체의 의욕을 차폐하고, 억압한다. (H2 발제문)
기호는 과거의 문헌들에 대한 다양한 지식으로 쉽게 해석할 수 있다. 우리는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과거의 세계 해석들, 즉 다양한 종교들, 철학들 등을 배우며 엄청나게 많은 지식을 쌓는다. 우리는 그런 것들로 우리 자신들을 칠해놓았고 스스로를 교양인이라고 자처한다. 하지만 그런 지식들은 삶의 내면으로 체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실은 그런 겉치레나 빈껍데기에 불과하다. (교수님)
여기서 발제자의 해석은 텍스트 맥락에서 완전히 벗어나버렸다. 해석자가 구상한 저자의 체계를 텍스트에 덧씌워 텍스트를 질식시켜버린 것이다. 여기 텍스트에서 “역사에 삶을 종속시켜 본연의 모습인 신체로서 자기를 가려버린다”, “마치 로제타석에서 한 공간에 세 문자가 동시에 들어있는 것과 같아서 어떠한 번역가조차도 해독할 수 없게끔 만든다”, “몸 자체의 의욕을 차폐하고 억압한다” 같은 이야기까지 끌어내기는 무리로 보인다. 이는 마치 마르크스를 전공한 철학자가 컵누들을 먹는 것을 보고는 “그가 우리식 표현 ‘컵라면’ 대신에 영어식 표현 ‘컵누들’로 명명된, 나아가 동일 용량의 다른 컵라면보다 가격이 비싼 컵누들을 먹는 행위는, 미국으로부터 발원한 제국적 자본주의가 우리의 가장 일상적이고 생존에 기초적인 식단조차 통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마르크스를 전공한 자기 자신의 식사로써 아이러니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사실 그 철학자는 다이어트 중인데 컵라면 중에서 칼로리가 적기도 하고 마침 편의점에서 할인행사를 하고 있던 컵누들을 우연찮게 골라서 먹고 있는 중일 뿐이지만 말이다. (물론 그가 미국으로부터 발원한 제국적 자본주의가 우리의 가장 일상적이고 생존에 기초적인 식단조차 통제하고 있다는 데에 수긍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의 컵누들 식사가 그런 주장의 아이러니한 표현이라는 해석은 여러 정황적 근거가 없는 이상 함부로 내세울 수 없다.) (사견)
신장검사관일지라도 그대들에게 신장이 있다는 것을 어찌 믿을 것인가!
And though one be a trier of the reins, who still believes that you have reins!
Und wenn man auch Nierenprüfer ist: wer glaubt wohl noch, dass ihr Nieren habt!
: 신장(Nieren)에서는 두 가지 의미를 추측할 수 있다. 첫 번째는 노폐물을 걸러내는 신장이 없는 것처럼, 역사나 문화, 기호의 과잉으로 인해 그 역사들에 대해 능동적으로 판단하고 망각할 능력을 잃어버렸다는 비유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정작용의 상실로 인해 온갖 관습과 믿음이 잡탕이 되어 통일성을 이루지 못하고 ‘알록달록 말을 해댄다’. 두 번째는 1부 4장 “신체를 경멸하는 자들에 대하여”에서 언급된 신체성으로서의 ‘자기’를 잃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선악의 저편』에서 니체는 “생명이야말로 곧 힘에의 의지”임을 언급한다. 즉, ‘뼈만 남은 것들’, 신장을 잃어 능동적으로 판단하고 배제할 능력과 의욕, 자기의 지배자로서의 성격을 잃어버린 자들은 살아있어도 살아있다고 말할 수 없는, 그 자신들의 삶에 있어 삶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한 자들이다. (S2 발제문)
발제자처럼 신장의 기능에 초점을 맞춰 해석해볼 수도 있겠다. 『반시대적 고찰』에 실려 있는 “역사학의 공과 과”라는 논문에서 니체는 역사학이 탄력적인 조형력을 상실해버렸다고 진단한다. 근대실증주의 역사학을 염두에 둔 비판이다. 실증주의 역사학은 역사의 잡다를 연구한다. 예컨대, 조선시대 의상이 어땠고, 고려시대 음식 저땠고, 시시콜콜한 문제를 다 연구하는 것이다. 그런 것들이 우리들의 삶의 고양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망각할 것을 망각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기억의 무게에 오히려 짓눌려 창조적인 삶을 살기가 어렵다. 그래서 니체는 근대 역사학이 삶을 탄력적으로 조형하는 능력을 잃어버렸다고 진단한 것이다. (교수님)
“신장” 또한 앞에서의 “노란 사람들”처럼 기독교식 상징으로 보인다. “신장”은 성서에서 감정과 애정의 원천, 의지와 인격의 중심으로 이해된다고 한다(bskorea.or.kr 참고). 여기 텍스트적 맥락에서는 과거의 지식들을 무비판적으로 머리에 우겨넣는 현대의 교양을 비판하고 있기 때문에, 현대인이 신체성으로서 자기를 잃어버렸다고 해석하기보다는, 현대인이 과거를 주체적으로 수용한 후 현재의 상황에 맞게 변용하여 삶을 고양시키려는 의지나 주체성을 잃어버렸다고 해석하는 게 나을 것 같다. (사견)
*새(crow, der Vogel) : 새를 영역자는 “까마귀(crow)”라고 번역했다. “채색 없이 벌거벗은” 현대인들의 “뼈만 남은” 모습이 죽음의 조짐을 보이고 있기에, 새 중에서 굳이 죽음의 전조로 간주되는 새인 까마귀로 특정하여 번역한 것으로 보인다.
나는 1) “그의 손에는 겨우 새들이나 놀라게 할 정도의 것만 남으리라.”에서 새는 현대인의 손 안에 남는 것이 너무나 보잘 것 없기에 아주 작은 새들 정도나 놀랄 것이라는 맥락에서 ‘아주 작은 동물’ 정도로 이해한다. 한편, 2) “참으로 나 자신이 한때 채색 없이 벌거벗은 그대들의 모습을 보고 놀랐던 새다.”에서 새는 차라투스트라가 “미래로, 너무 멀리 날았갔었”지만 동시대인을 발견할 수 없어 다시 현대로 돌아온 후 결국 실망하게 되었다는 앞의 맥락에 따라 ‘초인의 이상을 함께할 벗을 기대했지만 현대인을 보고 실망한 차라투스트라’ 정도로 이해한다. (사견)
나는 차라리 하계에서, 과거의 망령들 사이에서 날품팔이꾼이 되겠다.
Rather would I be a day-labourer in the underworld, and among the shades of the by-gone!
Lieber wollte ich doch noch Tagelöhner sein in der Unterwelt und bei den Schatten des Ehemals! - feister und voller als ihr sind ja noch die Unterweltlichen!
: 무엇이 삶을 삶으로 만드는가? 살이 삶을 삶으로 만든다. ‘하계’의 ‘날품팔이’는 오뒷세이아에 등장하는 아킬레우스의 말, 저승에서 왕 노릇을 하는 것보다 살아서 날품팔이를 하며 종살이하는 것이 낫다는 탄식을 비튼 것이다. (H2 발제문)
아킬레우스의 말은 『비극의 탄생』에서도 등장한다. 그러나 거기서는 다른 맥락에서 등장한다. 거기서 니체는 원래 그리스인들이 염세주의자였다가 아폴론적 예술로 현세의 삶을 긍정하게 된다고 말한다. 원래 그리스인들은 태어나지 않는 게 제일 좋다고 생각했지만 이후에는 살아서 날품팔이하는 게 낫다는 식으로 이야기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그 이야기가 아니라 오히려 반대다. 이런 헛깨비 같은 현대인들 사이에서 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죽어서 망령이 되는 것이 더 낫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교수님)
*믿음(belief, der Glaube), 참된 꿈(presaging dreams, Wahr-Träume), 별의 조짐(astral premonitions, Stern-Zeichen) : 수동적인 자아들은 믿음을 가질 수, 곧 사유를 하나의 방향성으로 정렬할 수 없다. 앞서 언급하였듯 현대인들은 역사를, 혹은 사실들을 능동적으로 판단할 능력을 잃은, 곧 신체(가슴)를 잃은 상태이다. 달리 말하면 이들이 믿음을 잃은 것은 그 자신들이 믿음을 버린 것이 아닌, 믿음을 믿을 능력도 버릴 능력도 없기에 믿음을 믿을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들의 믿음 상실의 바탕이 된 반점들의 혼재 상태는 그러한 믿음들을 바탕으로 한다. 달리 말하면, 그들의 반점들, 불연속적인 문화적 잔재들은 그것들이 ‘기호’로서 현대인들이 맹목적 받아들이게 된 역사적 사실이 되기 전에는 이미 믿음이었다. 그렇기에 현대인들의 ‘현실’은 그 각각의 반점들, 믿음들이 기호가 되고, 법칙이 되고, 문화가 되었던 시대들 자체로서의 현실보다 현실적이지 못하다. (H2 발제문) 자꾸 읽다보니 발제자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대강 이해가 가긴 하는데 명료하게 썼으면 좋겠다. 니체 텍스트보다 발제자의 텍스트가 더 어려웠던 대목이다. (사견)
현대인들은 자신이 능동적으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할 수 없기에, 곧 자신의 의욕에 따라 판단할 수 없기에 불모의 존재들이다. 그렇기에 생명을 잃은 것이나 다를 바 없는, 삶의 가치를 잃은 자들이다. 반면 참된 꿈을 가진 자들, 단순히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존재가 아닌 능동적으로 창조하던 자들은 믿음을 믿었다. 달리 말하면, 그 자신의 생명으로서의 가치인 힘에의 의지를 긍정하였다. 이는 1부 1장 “세 변화에 대하여”에서 언급된 “자신의 의지를 의욕”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H2 발제문)
현대인들은 지식만 있을 뿐 신념이 없다는 이야기다. 현대인들은 일종의 상대주의에 빠져있다는 비판도 여기 포함될 수 있다. 각 시대마다 각자의 믿음이나 종교나 철학이 있었는데 각각은 각 시대에만 타당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추구해야할 절대적인 진리, 믿음, 신념을 갖기가 어렵다. 그 점에서 믿음을 갖지 못하는 자들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니체는 전통적 철학과 종교를 비판하지만,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삶의 통일성과 방향을 줄 신앙과 믿음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건 초인에 대한 신앙이다. 창조하는 자들, 건강한 생명력을 갖는 자들은 각자 지향했던 삶의 이상이 있었다. (교수님)
Q : 니체는 『반시대적 고찰』에서처럼 역사학을 부정하고 초역사적인 것을 추구하고 있는 것인가? (H2)
A : 『반시대적 고찰』에서 니체는 실증주의적 역사학을 부정할 뿐이지 역사학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는 실증주의적 역사학의 세 가지 대안을 제시한다. 첫째,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가 완전한 시대이고, 우리 시대의 목표는 그 시대의 회복이라 보는 골동품적 역사학이다. 둘째, 현대의 삶에 대해 비판적 관점을 취하는 비판적 역사학이다. 셋째, 과거의 이상적 삶의 형태를 다시 우리가 구현해야 할 삶의 형태로 보는 기념비적 역사학이다, 골동품적 역사학과 같아 보이지만 다른데, 동일한 형태로 실현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귀족적인 정신을 본받아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니체는 세 가지 역사학이 다 필요하다고 말하지만 암묵적으로 가장 이상적으로 봤던 것은 기념비적인 역사학으로 보인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그 세 가지 역사학이 같이 결합되어야 한다고 말하며 그 결합의 근거를 자신의 시간 개념에서 찾는다. 그에 따르면, 골동품적 역사학으로 과거를 인수하고, 비판적 역사학으로 현대를 비판할 필요가 있고, 기념비적 역사학으로 미래의 어떤 삶의 가능성을 열어야 한다.
여하튼 니체는, 역사학을 부정하고 초역사적인 추가한다기보다는, 역사에 대해서 우리가 취해야 할 생산적인 태도가 있다고 보았다. 물론 초역사적인 것 얘기하면서 영원회귀 개념을 선취하는 듯한 대목이 있긴 하다. (교수님)
그대들은 무덤파는 자들이 그 옆에서 기다리고 있는 반쯤 열려 있는 문이다. 그리고 그대들의 현실이란 바로 이런 것이지. “모든 것은 망할 만하다.”
Half-open doors are you, at which grave-diggers wait. And this is your reality: "Everything deserves to perish.“
Halboffne Thore seid ihr, an denen Todtengräber warten. Und das ist eure Wirklichkeit: "Alles ist werth, dass es zu Grunde geht.“
: 백승영 역에서는 “모든 것은 몰락할 만하다.”로 번역되었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서설에서 중요한 계기로 등장한 이후 종종 등장하는 “Untergehen”과의 구분을 위해 유사한 의미의 ‘망하다’로 번역하였다. (H2 발제문)
“무덤파는 자들”은 실증주의 역사학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반쯤 열린 문”은 무슨 의미인지 분명치 않다. <잡것들에 대하여>에서 등장한 “우울”과 비슷하게, 니체 텍스트의 모든 구절들을 납득할 수 있게 해석하기는 어렵다. 여기도 마찬가지인데, “반쯤 열린 문”이라는 것은, 현대인들은 살아있는 것 같지만 사실 진정한 생명력을 결여하여 역사학자들의 탐구 대상에 지나지 않는 송장 같은 존재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모든 것은 멸망하는 데에 가치가 있다.”라는 말도 이해하기 어려운데, 여기서는 현대인들이 추구할 목표라든가 신앙이 없기 때문에 결국 일종의 허무주의에 빠져서 하게 되는 말 같다. 현대인들이 인정하는 것은 ‘모든 것은 사멸하는 것이 마땅하다’ 뿐이다. 그런데 ‘마땅하다’는 말까지 할 수 있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절대적으로 영원한 진리는 없다’라는 말 정도로 이해할 수 있겠다. (교수님)
“무덤파는 자들”은 서설에서도 등장하고, 나중에도 등장하는데, 죽음 곁에서 이익을 챙기는 염세주의자들을 상징한다. 이들이 옆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하니 해당 대목에서 하는 말은 어떤 믿음도 창조할 수 없는 현대인들이 염세주의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이 반쯤 있는 것 아닌가. (J) “무덤파는 자들”을 근대 실증주의 역사학자로 보는 게 여기 맥락에 더 맞지 않을까. 그리고 그렇게 볼 때 “모든 것은 망할 만하다”는 “우리가 믿을만한 확고한 진리라는 것은 없다”라는 말과 상통한다. (교수님)
“잠들어 있는 동안 어떤 신이 내게서 무언가를 몰래 훔쳐간 것이 아닐까? 참으로 작은 여자 하나를 만들어내기에 충분할만큼! // 내 갈비뼈가 이토록 빈약하다니, 묘하군.” 현대인 몇몇은 이미 이렇게 말했다.
"There has surely a God filched something from me secretly whilst I slept? Truly, enough to make a girl for himself from that! // Amazing is the poverty of my ribs!" thus has spoken many a present-day man.
"es hat wohl da ein Gott, als ich schlief, mir heimlich Etwas entwendet? Wahrlich, genug, sich ein Weibchen daraus zu bilden! // Wundersam ist die Armuth meiner Rippen!" also sprach schon mancher Gegenwärtige.
: “현대인 몇몇”으로 구체적으로 지칭하고 있는 게 있을까? 어느 정도 깨어났지만 충분히 깨어나지 않은 자들을 가리킨다고 보면 될까? (H2) “mancher”라서 “많은 현대인”으로 번역하면 될 것 같다. 그런데 현대인들 중에서도 자기들의 삶이 아주 빈약하고 내용이 없는 삶이라는 사실을 통찰하고 있는 사람이 많다고 하면 이상하다. 현대인들은 대체로 자기 삶이 빈약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야말로 교양인이라고 으스댄다고 서설에서 이야기했다. 그래서 백승영은 앞의 이야기와 모순을 피하기 위해 “몇몇”으로 번역한 것 같다. (교수님)
나는 “많은 현대인”으로 번역해도 된다고 보는데, 여기서 묘사되는 현대인은 자기 삶이 허전(“갈비뼈가 이토록 빈약”)하다는 사실은 알지만 그 이유(이유)를 껍데기뿐인 교양의 과잉이나 참된 꿈/별의 조짐/믿음의 부재에서 찾지 못하고 고작 기독교적 서사에서 찾기에 “자기들의 삶이 아주 빈약하고 내용이 없는 삶이라는 사실을 통찰하고 있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독교적 서사는 신이 남자는 원래 그렇게 갈비뼈 하나 없이 태어났다(인간은 원래 불완전하게 창조되었다)는 식으로 설명하며 진짜 이유를 감춘다. (사견)
아, 괴롭겠구나. 내가 그대들의 놀람을 보고 웃지 못하고, 그대들의 작은 사발 속 역겨운 것들을 모두 마셔야만 한다면!
And woe to me if I could not laugh at your marvelling, and had to swallow all that is repugnant in your platters!
Und wehe mir, wenn ich nicht lachen könnte über eure Verwunderung, und alles Widrige aus euren Näpfen hinunter trinken müsste!
: 앞서 언급한 동반자를 향한 니체의 욕구, 서설에서 그가 산에서 내려오게 만든 사랑과 동정이 니체에게 고통으로 다가옴을 의미한다. (H2 발제문)
그렇게 해석할 수 없을 것 같다. 차라투스트라는 ‘만약 내가 교양에 자부심을 갖고 경탄하는 그대들을 비웃을 수 없고, 그대들의 그 교양이라고 하는 역겹기만 한 잡다한 지식들을 들이마실 수 밖에 없다면, 난 참 괴롭겠구나’, 짧게 말하면, ‘내가 너희들 같은 인간이라면 얼마나 슬프겠는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여기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미 초인이 될 수 있는 자는 소수라고 보고 있고, 이런 사람들에 대한 기대는 포기한 상태이다. 그렇기에 차라투스트라가 이런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동정 때문에 고통스러워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교수님)
하지만 나는 무거운 짐을 젊어져야 하기에, 그대들을 가볍게 받아들일 것이다. 내 봇짐 위에 딱정별레와 날벌레가 앉는다고 내게 무엇이 달라질 것인가! // 진정, 그런다고 내 짐이 더 무거워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대 현대인들이여, 그대들로 인해 내게 크나큰 피로가 닥치겠는가 말이다.
As it is, however, I will make lighter of you, since I have to carry what is heavy; and what matter if beetles and May-bugs also alight on my load! // Truly, it shall not on that account become heavier to me! And not from you, you present-day men, shall my great weariness arise.
So aber will ich's mit euch leichter nehmen, da ich Schweres zu tragen habe; und was thut's mir, wenn sich Käfer und Flügelwürmer noch auf mein Bündel setzen! // Wahrlich, es soll mir darob nicht schwerer werden! Und nicht aus euch, ihr Gegenwärtigen, soll mir die grosse Müdigkeit kommen.
: 황문수 역에서는 이 ‘무거운 것’을 영원회귀 사상에 대한 예고로 해설한다. 다만 서설에서 언급된 길동무가 어디까지나 초인의 길을 함께 가기 위한 동반자임을 고려할 때 초인에 이르기 위한 자기극복의 과정과 그 고통의 무거움을 의미할 수도 있을 것이다. (H2 발제문)
발제자처럼 해석하면 안 된다. 현대인들은 차라투스트라의 동반자가 아니고, 그들로 인해 차라투스트라의 짐이 무거워져 고통받는 것도 아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삶의 모든 것(“무거운 짐”)을 다 긍정하는 영원회귀 사상을 흔쾌히 받아들이기에 말세인인 현대의 교양인들(“딱정벌레와 날벌레”)마저도 가볍게 받아들이겠다고 말하고 있다. “크나큰 피로가 닥치겠는가” 반문하는 것은 이런 사람들과 같이 산다는 게 달갑진 않겠지만 이런 사람들로 인해 자신이 삶을 염세적으로 생각하게 되지는 않을 거란 이야기다. (교수님)
근래에 내 마음을 끌었던 현대인들은 내게 낯설기만 하고 조롱거리일 뿐이다. 나는 아버지의 나라와 어머니의 나라에서 내쫓긴 것이다. // 그래서 나는 내 아이들의 나라, 아직 발견되지 않은, 멀고 먼 바다에 있는 그 나라만을 사랑한다. 나는 내 돛에 명하여 그 나라를 찾고 또 찾는다. // 내가 내 조상들의 아이라는 사실을 내 아이들에게 보상하리라. 모든 미래에 보상하리라. 이 현재를!
Alien to me, and a mockery, are the present-day men, to whom of late my heart impelled me; and exiled am I from fatherlands and motherlands. // Thus do I love only my children's land, the undiscovered in the remotest sea: for it do I bid my sails search and search. // to my children will I make amends for being the child of my fathers: and to all the future - for this present-day!
Fremd sind mir und ein Spott die Gegenwärtigen, zu denen mich jüngst das Herz trieb; und vertrieben bin ich aus Vater- und Mutterländern. // So liebe ich allein noch meiner _Kinder_Land_, das unentdeckte, im fernsten Meere: nach ihm heisse ich meine Segel suchen und suchen. // An meinen Kindern will ich es gut machen, dass ich meiner Väter Kind bin: und an aller Zukunft - diese Gegenwart!
: 차라투스트라는 이 단락에서 아버지들/어머니들의 나라와 자신의 아이들의 나라를 대립시킨다. 현대인들이 사는 현재의 아버지의 나라, 어머니의 나라에서는 동반자, 길동무를 향한 차라투스트라의 동경이 충족될 수 없다. 멀고 먼 바다에 있는 아이들의 나라는 미래의 나라이다. 이 장의 서두에서 차라투스트라는 고향을 찾아 미래에서 현재로 왔다. 현재가 아닌 미래를 지향하는 것은 차라투스트라의 동반자를 향한 열망이 좌절될 것임을, 최종장인 4부 “조짐”에서 그가 동정을 극복할 것임을 암시한다. (H2 발제문)
아버지와 어머니의 나라를 현대인들의 나라라고 보긴 어렵다. 문명의 원료가 되는 과거의 위대한 시대들 아닌가 싶다. 그런데 쫓겨났다고 했으니 그런 시대들이 자기가 추구하고자 하는 삶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말일텐데, 그렇게 되면 과거의 위대한 시대라고 보긴 어려울 수도 있겠다. 옛날의 여러 시대들을 가리킨다고 봐야겠다. 여하튼 현대를 가리킨다고 보긴 어렵고, 과거의 시대들도 자기에게 삶의 이상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미래의 나라뿐이다, 이런 이야기 같다.
내 아이들에게 지금 현재를 미래를 통해서 보상하겠다고 말하는 것 같은데 분명하진 않다. 앞에서 기념비적 역사학을 언급했는데, 내가 내 조상들의 정신을 이어받아 그걸 내 아이들에 게 초인들의 세계를 실현함으로써 다시 계승시키겠다는 의미로 이해해볼 수 있을 것 같다. (교수님)
발제자의 해석과 교수님의 첫 번째 해석은 받아들이기 힘들다. 교수님의 두 번째 해석을 확장해야 한다. 지금 차라투스트라는 “동경을 품고서” “온갖 산 정상에” 올라 “아버지의 나라와 어머니의 나라들을 내려다보았”지만 “고향을 발견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이유가 아버지의 나라와 어머니의 나라(조상의 나라)가 삶의 이상(“고향”)을 제시하지 못해서라기보다는, 현대인들이 조상의 나라를 차지하고서는 과거의 삶의 이상을 지워버리고 조롱할만한 낯선 교양만을 숭배하고 있어서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미 “아버지의 나라와 어머니의 나라”, 즉 조국에는 고향이 함축되어 있다. 고향이 있으니까 조국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문제는 현대 교양인들이 조국을 차지하여 고향을 없애고 차라투스트라를 내쫓는 사태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고향에서 내쫓기며 자신이 “내 조상들의 아이라는 사실”을 현대인들로부터 보상받지 못했다, 이런 현대인들이 자신의 아이들에게 보상해주리 만무하다. 그러니 차라투스트라는 현대인들을 대신하여 자신의 아이들에게 자신이 마땅히 받아야했을 보상을 보상해줄 것이라고 다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차라투스트라는 현대에 들어 끊어진 조상들로부터 내려오던 참된 꿈/별의 조짐/믿음들을 자신이 계승하여 미래의 세대에게 전달할 것이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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