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뱃사람들(sailors, Schiffsleute) : 차라투스트라는 제2부 제2장에 등장한 ‘지복의 섬’을 떠나며, ‘지복의 섬’의 어떤 남자와 함께 배에 오른다. 배에 올라 먼 길을 여행하는 자들, 즉 위험 없는 삶을 좋아하지 않는 자들은 차라투스트라의 설파를 들을 자격이 있는, 진리를 향한 인생의 모험가들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승선 직후 처음에는 침묵으로 일관하다가, 이들이 자신의 설파를 들을 자격이 있음을 깨닫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차라투스트라가 여기서부터 영원회귀사상을 이야기한다. (J3 발제문)
앞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자기 사상을 사람들에게 설파했지만 사람들이 못 알아들었기에, 여기서 그는 실망한 상태로 배에 올랐다. 그래서 그는 배에서 아무 말 안 하고 있다가, 뱃사람들의 위험한 이야기들을 듣고 있으니, 이들이 기존의 가치에 사로잡히지 않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려는 성향이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여 비로소 입을 연다. 다른 곳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위험을 무릅쓰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사람들을 선원들, 항해사들에 비유하곤 한다. (교수님)
피리 소리에 홀려 온갖 미궁의 입구로 끌려가는 영혼을 지닌, 그대 수수께끼에 취한 자들, 어스름을 즐기는 자들에게!
To you the enigma-intoxicated, the twilight-enjoyers, whose souls are allured by flutes to every treacherous gulf:
euch, den Räthsel-Trunkenen, den Zwielicht-Frohen, deren Seele mit Flöten zu jedem Irr-Schlunde gelockt wird:
: “피리 소리”는 노랫소리로 오디세우스 일행을 유혹하려고 한 사이렌을 연상시킨다. 뱃사람들이 오디세우스처럼 모험을 즐겨 하는 자들이라는 이야기. (교수님) “미궁”, “수수께끼”, “어스름” 모두 그 정체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도전과 모험을 불러일으키는 것들. (사견)
그대들이 겁먹은 손으로 실 하나를 더듬으며 따라가려고 하지 않고, 추측할 수 있는 곳에서 추론하기를 싫어하기 때문인데, // 오로지 그대들에게만 내가 본 수수께끼를, 가장 고독한 자의 환영을 들려주겠다.
-For you dislike to grope at a thread with cowardly hand; and where you can divine, there do you hate to calculate- // To you only do I tell the enigma that I saw - the vision of the loneꠓsomest one.-
- denn nicht wollt ihr mit feiger Hand einem Faden nachtasten; und, wo ihr errathen könnt, da hasst ihr es, zu erschliessen - // euch allein erzähle ich das Räthsel, das ich sah, - das Gesicht des Einsamsten. -
: ‘추측하다(erraten, guess)’ 와 ‘추론하다(erschliessen, deduce)’가 대비되어 있다. 추론은 ‘겁에 질린 손을 하고는 조심조심, 마치 테세우스가 미노타우로스의 라비린스에서 아리아드네가 주었던 실을 따라 나오려고 하는’ 방식으로 묘사되어 있다. 증명과 설명, 입증과 반증의 지적 기술을 통해 조심스럽게 분석해내고, 그 분석을 통과하면 문제가 풀린다는 지성 인식의 태도다. 니체는 이런 방식이 영원회귀 사유의 ‘실천적’ 기능에 대한 적절한 이해 방식이 아니라고 말하려는 것이다. 그 실천적 기능은 영원회귀 사유가 실제로 삶에 일으킬 결과를, 아니 그 가능성을 추측해보고 상상해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그 사유를 받아들일지 말지를,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받아들일지를 충분히 선택하고 결단할 수 있다. 이렇듯 영원회귀 사유의 실천적 기능은 추측과 상상과 선택과 결단의 대상인 것이다. 그래서 차라투스트라는 처음부터 꾀 많은 자들, 추측을 하려는 자들, 결단의 모험을 하려는 자들을 불렀던 것이다. “만일 순환적 반복이 단지 개연성이나 가능성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도, 가능성에 대한 생각 역시 (... ) 우리를 뒤흔들고 변화시킨다”(『유고』 KGWV2, 11[203]). (역주)
배 위의 이들이 차라투스트라의 설파를 들을 자격이 있는 것은 한마디로 “추측할 수 있는 곳에서 추론하기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영원회귀사상이 실천적 울림을 가지는 데는 ‘추론’이 아닌 ‘추측’만으로도 충분하다. 달리 말해, 영원회귀사상이 우주론적 차원에서 참으로 입증되지 않더라도, 영원회귀의 가능성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실천적 울림을 가질 수 있다. 오히려 ‘추론’을 즐기는 자들이야말로 영원회귀를 체감하고 체득하기에는 부적절하다. (J3 발제문)
“실”은 미노타우루스의 미궁에서 빠져나왔던 테세우스를 연상시킨다. 여기서 “실 하나를 더듬으며 따라가려고” 하는 태도는 이미 존재하는 진리/가치 등에 의존해서 살려고 하는 태도를 가리킨다.
“추론”은 전통적 진리/가치를 자명한 전제로 삼으면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되는지 논리적으로 연역해내는 것이다. 반면, “추측”은 수수께끼를 푸는 것처럼 논리를 뛰어넘는 방식으로 사유하는 것을 가리킨다. 영원회귀 사상은 전통적 진리로부터 추론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것을 의문시하고 문제시하며 완전히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사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원회귀사상을 이해하자면 수수께끼를 푸는 듯한 상당히 비논리적인 사고가 필요하고, 실존적인 결단을 통한 비약이 필요하다. (교수님)
최근에 나는 시체처럼 빛바랜 어스름 속을 울적하고도 괴로운 심사로 입술을 팍 깨문 채 걸었다. 내게 하나의 태양이 진 것만은 아니었다. // 자갈 사이로 고집스럽게 위로 뻗어 있고, 잡초도 관목도 더 이상 말을 건네지 않는 심술꽃고 쓸쓸한 오솔길, 이 산속의 오솔길이 내 고집스러운 발밑에서 달그락거렸다. // 비웃듯 달그락거리는 자갈 소리에도 묵묵히 걸음을 떼고, 미끄러지게 만드는 돌을 짓밟아가면서 그렇게 내 발은 힘겹게 위를 향해 올랐다.
Gloomily walked I lately in corpse-coloured twilight - gloomily and sternly, with compressed lips. Not only one sun had set for me. // A path which ascended daringly among boulders, an evil, lonesome path, which neither herb nor shrub any longer cheered, a mountain-path, crunched under the daring of my foot. // Mutely marching over the scornful clinking of pebbles, trampling the stone that let it slip: thus did my foot force its way upwards.
Düster gierig ich jüngst durch leichenfarbne Dämmerung, - düster und hart, mit gepressten Lippen. Nicht nur Eine Sonne war mir untergegangen. // Ein Pfad, der trotzig durch Geröll stieg, ein boshafter, einsamer, dem nicht Kraut, nicht Strauch mehr zusprach: ein Bergpfad knirschte unter dem Trotz meines Fusses. // Stumm über höhnischem Geklirr von Kieseln schreitend, den Stein zertretend, der ihn gleiten liess: also zwang mein Fuss sich aufwärts.
: “내게 하나의 태양이 진 것만은 아니었다.”라는 말은 어색한 한국어로 보인다. 역자 백승영은 원문의 “eine Sonne(a Sun)”가 통상 쓰이는 “die Sonne(the Sun)”가 아니라는 점에서 “하나의 태양”이라 번역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 때문에 “태양”에 모종의 심오한 함의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맥락을 보면, “내게 그 밤은 단지 해가 져서 다가온 하룻밤 이상의 것이었다.” 정도의 의미일 것이다. (J3 발제문)
상당히 분위기가 어둡다. 모든 것이 아무런 의미나 목적도 없이 동일하게 회귀한다고 생각하면 어지간한 사람은 허무감, 염세감에 빠진다. 우리는 미래, 다음 세상에는 더 좋은 삶, 더 나은 세상이 펼쳐지길 원하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서양에서는 시간을 천지창조로부터 최후의 심판을 향해 가는 하나의 직선적 행로로 본다.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은 최후의 심판에서 자기들은 구원받을 거라 희망을 가진다. 헤겔이나 막스의 근대 진보사상도 시간의 끝에는 절대정신의 실현이나 공산주의 혁명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직선적 시간관에 기초하고 있다. 기독교적 시간관의 연장인 것이다. 역시나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시간관이다. 그러나 영원회귀사상은 이런 종류의 희망을 다 꺾어버린다. 모든 것이 똑같이 되돌아올 뿐이고, 거기에는 어떤 의미나 목표도 없다. 사람들을 오히려 허무감과 염세감에 빠뜨린다. 차라투스트라 역시 영원회귀 사상이 떠올랐을 때 이런 식의 허무감과 염세감에 사로잡혔다. 그는 이러한 허무감, 염세감을 이겨내며 “힘겹게 위를 향해 올랐다.” (교수님)
저 위로. 내 발을 저 아래 심연으로 끌어내리는 정신, 내 악마이자 불구대천의 원수인 중력의 정신을 뿌리쳐가면서 저 위로. // 저 위로. 반쯤은 난쟁이고 반쯤은 두더쥐인, 절름발이이면서 남까지 절름거리게 만드는 저 중력의 정신이 나를 타고 앉아, 내 뱃속으로 납을, 나의 뇌 속으로 납덩이 같은 생각을 방울방울 떨어뜨렸지.
Upwards: - in spite of the spirit that drew it downwards, towards the abyss, the spirit of gravity, my devil and archenemy. // Upwards: - although it sat upon me, half-dwarf, half-mole; paralysed, paralysing; dripping lead in my ear, and thoughts like drops of lead into my brain.
Aufwärts: - dem Geiste zum Trotz, der ihn abwärts zog, abgrundwärts zog, dem Geiste der Schwere, meinem Teufel und Erzfeinde. // Aufwärts: - obwohl er auf mir sass, halb Zwerg, halb Maulwurf; lahm; lähmend; Blei durch mein Ohr, Bleitropfen-Gedanken in mein Hirn träufelnd.
: 차라투스트라는 한밤에 길을 걸으면서 ‘난쟁이’로 표현되는 ‘중력의 정신’과 사투하며 ‘저 위’로 올라가려고 분투한다. ‘중력의 정신’은 차라투스트라를 심연으로 끌어내리려는 악마적 정신이다. 이것은 크게 두 가지 의미로 보인다. 첫째, 차라투스트라로 하여금 위버멘슈로 향하는 길을 포기하고 말세인으로 전락하게 하려는 지상의 타성. 둘째, 후술할 것으로, 영원회귀 사상이 내포하는 허무적 위험.
여기서 ‘중력의 정신(무거움의 정신, der Gest der Schwere)’은 앞서 서설 등에서 언급된 차라투스트라의 하강(몰락, Untergang)과는 비슷하면서도 다른 이미지를 빚어낸다. 하강과 ‘중력의 정신’은 모두 아래로 향하는 이미지이지만, 하강은 비유컨대 하화중생(下化衆生)을 위한 것인 반면 ‘중력의 정신’은 파멸을 위한 추락을 야기한다. (J3 발제문)
이 장면은 『천일야화』와 『햄릿』의 오마주다. 『천일야화』에 나오는 신드바드의 다섯 번째 여정에서, 어떤 노인이 신드바드에게 자신을 어깨에 태워 강을 건너게 해달라고 하고, 신드바드기 그 청을 받아들여 강을 건넌다. 하지만 노인은 신드바드의 목에 다리를 걸고서는 내려오지 않으려 한다. 『햄릿』 I, 5장에는 죽은 왕의 영흔이 자신의 죽음에 대해 “독을 자신의 귀에 떨어뜨렸다”라고 말하는 부분이 나온다. ‘난쟁이’는 정신의 위대함과 높이와 크기를 알지 못하는 존재에 대한 메타포고, 두더지는 땅을 파고 땅속에서 사는 존재, 그러니까 높이 비상하는 새의 정신을 갖추지 못한 존재에 대한 메타포다.
중력의 정신(삶과 세상을 무겁게 만드는 것 일체)은 긍정의 노래를 부르려는 차라투스트라의 적이지만, 이 부분에서 중력의 정신은 차라투스트라의 내면의 목소리다. 2절에서는 차라투스트라의 어깨에 걸터앉아 있다고 되어 있지만, 내면의 목소리가 그에게 영원회귀 사유가 초래할 위험에 대해 속삭이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의 지혜의 돌인 영원회귀 사유가 차라투스트라 자신을 파멸시키고, 인간의 삶을 허무적 탄식으로 채워 생명력 자체를 고갈시킬 것이라고 말이다. (역주)
차라투스트라가 영원회귀사상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하는데, 영원회귀사상을 포기하도록 유혹하는 정신이 있다. 그것은 자기 고양을 향한 힘에의 의지와 대립되는 정신, 즉 중력의 정신이다. 위로 올라가려는 힘에의 의지와 반대로, 아래로 끌어내리려는 중력의 정신은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하강의 정신, 안주하려고 하는 혹은 전락하려고 하는 정신이다.
“난쟁이”는 키가 작은 인간이니까 보통 정신적인 높이가 떨어지는 존재를 상징한다. 니체는 『이 사람을 보라』에서 그리스도교인들을 난쟁이 족속이라 비판한다. 여기서는 이러한 성직자의 정신을 포함할 수도 있는 수준 낮은 정신을 의미한다. “두더지”는 난쟁이와 유사한 비유로 보인다. 두더지는 태양의 빛을 싫어하니 지하적이고 염세적인 정신을 의미한다. 보통 고전문헌학자들이라든가 문헌 텍스트를 열심히 연구하는 학자들을 두더지라 일컫는데, 여기서 그런 정신도 포함할 수도 있겠다. “절름발이”는 생명이 위축된 정신을 말하며, “절름거리게 만드는”은 생명력을 위축시키는 정신을 말한다. “납”은 그리스도교처럼 삶을 부정하는 염세적 사상을 가리킨다. 귀에 납을 넣는 것이 중세시대 고문방식이었다고 한다. 니체는 자신의 사상을 “황금빛”으로 표현하는데, “납”은 상당히 부정적인 상징으로 쓴다. (교수님)
“오, 차라투스트라여, 그대 지혜의 돌이여!” 그는 비웃듯 한 마디 한 마디 속삭였다. “그대는 자신을 높이 던졌지만, 모든 던져진 돌은 반드시 떨어지기 마련이다! // 오, 차라투스트라여, 그대 지혜의 돌, 투석용 돌이여! 별을 깨부수는 자여! 그대는 그대 자신을 그리도 높이 던졌지만, 모든 던져진 돌은 반드시 떨어지기 마련이다! // 돌은 그대 자신에게 돌아와 그대를 쳐서 죽이도록 되어 있다. 그 돌을, 오, 차라투스트라여, 그대는 정말이지 멀리도 던졌다. 헌데 그 돌은 다시 그대 머리 위로 떨어지게 되지.”
"O Zarathustra," it whispered scornfully, syllable by syllable, "you stone of wisdom! you threw yourself high, but every thrown stone must fall! // O Zarathustra, you stone of wisdom, you sling-stone, you star-destroyer! yourself threw you so high, - but every thrown stone - must fall! // Condemned of yourself, and to your own stoning: O Zarathustra, far indeed threw you your stone - but upon yourself will it recoil!"
"Oh Zarathustra, raunte er höhnisch Silb' um Silbe, du Stein der Weisheit! Du warfst dich hoch, aber jeder geworfene Stein muss – fallen! // Oh Zarathustra, du Stein der Weisheit, du Schleuderstein, du Stern-Zertrümmerer! Dich selber warfst du so hoch, - aber jeder geworfene Stein - muss fallen! // Verurtheilt zu dir selber und zur eignen Steinigung: oh Zarathustra, weit warfst du ja den Stein, - aber auf dich wird er zurückfallen!"
: 난쟁이가 차라투스트라를 가리키며 쓴 ‘지혜의 돌(Stein der Weisheit)’이라는 표현은 연금술에서 핵심 재료로 쓰이는 현자의 돌(Stein der Weisen)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현자의 돌은 값싼 금속을 금으로 바꾸는 능력이 있다는 전설상의 물질이다. 이 해석을 받아들인다면, 난쟁이가 차라투스트라를 “지혜의 돌, 투석용 돌”이라고 칭하는 것은 가치를 창조하는 자이자 범인(凡人)을 위버멘슈로 이끄는 자인 ‘지혜의 돌’ 차라투스트라를 한낱 ‘투석용 돌’로 격하하는 것이 될 터이다. 그런데 니체가 연금술 상징을 얼마나 알고 있었으며 자신의 문학적 수사를 위해 얼마나 사용했는가? 이 해석의 타당성은 그에 달려 있는 듯하다. (J3 발제문)
니체가 연금술에 대해 이야기한 적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긴 하다. 그런데 난쟁이가 차라투스트라를 “투석용 돌”로 격하하여 비꼬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투석용 돌은 “별을 깨부수는 자”와 연관되는데, 이는 차라투스트라가 기존의 가치를 깨부순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투석용 돌”인 영원회귀사상은 기존의 모든 기독교적 가치와 목적론적 세계관을 철저하게 깨부수는 사상, 다시 말해 인간들에게 위안을 줬던 모든 정신, 사상을 깨부수는 사상이며, 그런 의미에서 엄청난 새로운 시도로 높이 평가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오히려 그 돌에 맞아서 차라투스트라가 죽을 것 같다는 점이다. 영원회귀사상으로 기존의 모든 가치를 부정하지만 오히려 그로 인해 염세주의나 허무주의에 떨어질 위험이 큰 것이다. (교수님)
난쟁이는 차라투스트라가 도모하는 상승이 끝내 파멸적 추락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악담을 퍼부은 뒤 침묵하는데, 그 침묵 역시 차라투스트라를 큰 중력으로 짓누른다. 난쟁이는 애초에 차라투스트라가 등반하는 ‘중력의 정신’인 탓이다. 한번 ‘중력의 정신’이 고개를 내민 이상, 그것을 외면하는 것은 소용없다. 싸움의 결착을 짓지 않는 한 ‘중력의 정신’은 계속 차라투스트라를 짓누를 것이다. (J3 발제문)
그런데 내 안에는 내가 용기라고 부르는 어떤 것이 있었다. 지금까지 내 모든 낙담을 죽여왔던 바로 그것이지. 이 용기가 마침내 내게 걸음을 멈추고 말을 하라고 명했다. “난쟁이여! 너! 아니면 나다!” // [...] // 하지만 용기는 최고의 살해자다. 공격하는 용기는. 이 용기는 죽음마저도 죽인다. “그것이 삶이었던가? 좋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 더!”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But there is something in me which I call courage: it has thus far slain for me every dejection. This courage at last bade me stand still and say: "Dwarf! You! Or I!"- // [...] // Courage, however, is the best slayer, courage which attacks: it slays even death itself; for it says: "Was that life? Well! Once more!"
Aber es giebt Etwas in mir, das ich Muth heisse: das schlug bisher mir jeden Unmuth todt. Dieser Muth hiess mich endlich stille stehn und sprechen: "Zwerg! Du! Oder ich!" - // [...] // Muth aber ist der beste Todtschläger, Muth, der angreift: der schlägt noch den Tod todt, denn er spricht: "War das das Leben? Wohlan! Noch Ein Mal!"
: 차라투스트라는 더는 ‘중력의 정신’을 외면하지 않고, “난쟁이여! 너! 아니면 나다!”라며 결착을 위해 거세게 맞선다. 차라투스트라가 발휘하는 인간적 용기는 인간으로 하여금 온갖 짐승을 넘어서도록 한 용기이다. 그것은 온갖 심연 위에 서 있어 추락하기 쉬운 인간으로 하여금 끝끝내 그 고통을 딛고 삶을 긍정하도록 만드는 용기이다.
차라투스트라의 용기는 “그것이 삶이었던가? ... 다시 한 번 더!”라는, 삶에 대한 최고 긍정에 이른다. 이 단계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영원회귀를 아직 우주론적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영원회귀하는 삶에 대한 긍정을 선취한 셈이다. “다시 한 번 더!” 역시 “다시 한 번 더!”하게 된다면, 삶은 결국 무한히 반복될 것이기 때문이다. (J3 발제문)
Q: “영원회귀를 아직 우주론적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교수님)
A: “삶이 필연적으로 영원회귀한다”가 아니라 “삶이 회귀해도 좋다”라고만 말하고 있어서 그렇게 이야기하였다. (J3)
*영원회귀사상의 우주론적 증명과 실존적 결단의 촉구
: (원래 니체에게서는 원자가 아니라 힘에의 의지이지만 이해하기 쉽도록) 이 세계 모든 것들이 다 원자로 이루어졌다고 가정해보자. 원자들의 숫자는 유한하다. 공간도 유한하다, 시간은 무한하다. 모든 개체/사건은 원자들의 조합에서 생긴다. 원자들의 숫자는 유한하기 때문에 그것들의 조합으로 나타나는 개체들/사건들의 수도 많긴 하겠지만 유한하다. 그렇다면 개체들/사건들은 무한한 시간과 한정된 공간 속에서 반복해서 나타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정말 영원회귀사상이 입증이 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오히려 영원회귀사상은 우리를 실존적 결단 앞에 세우는 사상이다: “시간/역사에 이상적인 목적 같은 것이 없고 모든 것이 끊임없이 반복해서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세계를 긍정하겠는가?” 긍정하는 사람은 생명력이 넘치는 사람이고, 부정하는 사람은 생명력이 약하고 삶에 지친 사람이다. 삶에 지친 사람은 허무주의나 염세주의에 빠질 수도 있고, 그 상태를 견딜 수가 없어서 유토피아 사상이나 기독교에 의지할 수도 있다.
그런데 영원회귀사상을 “긍정한다”는 것이 단지 “나는 영원회귀사상을 긍정한다”라고 말하면 긍정하는 것인가? 니체는 우리들의 의식적인 생각이 사실 진정한 자기인 몸의 지배를 받는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몸 차원에서 성숙하고 건강해지지 않으면, 우리가 영원회귀 사상을 아무리 의식적으로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진정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니체의 경우에도 실스마리아 호수를 걸으면서 어느 순간 영원회귀사상에 엄습을 당했다고 말했다. 물론 니체는 『이 사람을 보라』에서 자신이 항상 삶을 긍정했다고 말하지만, 니체도 초기에는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에 빠진 적도 있는 것이고, 삶을 진정으로 긍정하기 전의 시간들이 있었다. 영원회귀사상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생리적/심리적 전제 조건들이 마련되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아무리 영원회귀 사상을 받아들이겠다고 결심한다 하더라도 받아들일 수 없다. 영원회귀사상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이 세계가 아름답게 보인다는 것인데, 내가 아무리 세계를 아름답게 보겠다고 결심한다고 하더라도 갑자기 세계가 아름답게 보이겠는가.
그러니 영원회귀사상이 사람들을 실존적 결단 앞에 세울 때, 사람들은 단순히 의식적으로 영원회귀사상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하기만 하면 끝인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영원회귀사상을 진정으로 체화하기 위해 여러 노력을 해야 한다. 자기 삶, 자신의 힘에의 의지를 강하게 만드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니체에 따르면, 식단과 환경 또한 힘에의 의지에 많은 영향을 미치기에 그 또한 잘 조정해야 한다.
니체의 체험과 나[교수님]의 체험이 같지는 않겠지만, 30살 때 세상을 완전히 긍정하게 된 체험이 있었다. 의식적으로 내가 그렇게 되겠다고 해서 된 건 아니었다. 2년 정도 단전호흡을 해오던 어느날 가만히 앉아있는데 세상이 아름답게 보였고 나의 삶도 긍정하게 되었다. 그전에는 염세주의에 많이 사로잡혀 있었는데, 한순간 나의 모든 과거를 다 긍정하게 된 것이다. 마치 서울대에 합격하면 그동안 공부하느라 고생했던 게 다 긍정되는 것처럼, 이런 기쁨을 맛보는 순간에는 인생의 모든 순간이 다 필요했고 의미가 있었다고 느껴진다. 나는 고등학교 때 허무주의, 대학교 들어와서는 막스주의에 빠지면서 허무주의에서 벗어났지만, 막스주의를 버리고 나서는 다시 허무주의에 빠져있었다. 그러나 그 체험 하나로 염세주의와 허무주의에서 벗어났다. 몸과 마음이 깨끗해지면서 사람들이 너무 아름답게 보였다. 삶의 어느 한 순간을 긍정한다면 세계 전체를 긍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삶이 세계 전체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주 전체와 합일이 되는 체험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강렬한 황홀경이 얼마나 갔는지 모르겠다. 주관적으로 상당히 오래 갔다고 느꼈는데 객관적으로 짧은 시간일 수도 있다. 두세달 정도 동안 별 노력없이 세상이 아름답게 보였다, 마음이 항상 평온하고 맑고, 나도 모르게 내 몸까지 사랑스럽고 감사하게 느끼게 되었다. 우리는 보통 우리 몸을 도구나 수단처럼 생각하는데 맘에 안 들면 몸에게 신경질을 부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체험을 할 때는 몸이 너무 감사하다. 그것도 내가 감사하겠다는 마음을 가지겠다고 그런게 아니라 저절로 그런 마음이 일어난다. 나는 석사논문을 하버마스로 썼는데 그 체험을 한 번 하니까 관심이 종교와 형이상학으로 완전히 옮겨갔다. 불교를 공부할까 생각하기도 했는데, 전혀 새로운 공부를 다시 시작하기가 부담스럽기도 하고, 서양철학이 또 매력이 있었기 때문에, 그나마 현대철학 중에서는 하이데거가 신비주의와 통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하이데거를 공부하게 되었다.
나의 체험은 종교에서 신비체험이라 하는 것인데, 신비체험과 니체의 영원회귀사상이 통하는 면이 있다. 그러나 동일시하긴 어렵다. 니체는 나폴레옹, 시저, 괴테 같은 사람들을 높이 평가한다. 그들 역시 자기 삶을 긍정했겠지만 종교적으로 그들을 높이 평가하긴 어렵다. 종교적 신비체험 같은 경우는 인간이 정말 전통적 의미에서 선한 인간이 되는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사랑과 선의가 넘친다. 이 경우 나폴레옹처럼 유럽을 정복한다든가 괴테처럼 바람을 피운다든가 하는 행위는 상상할 수 없다.
여하튼 나는 영원회귀사상의 우주론적 증명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기는 힘들고, 영원회귀사상을 실존적 결단을 촉구하는 사상으로 해석하는게 그나마 납득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영원회귀사상은 염세주의와 허무주의를 극단으로 밀고가는 사상이다. 세상이 아무 의미도 없이 영원히 회귀하는데도 세상을 긍정할 것이냐. 긍정하는 사람은 모든 염세주의와 허무주의를 극복하는 것이고, 아닌 사람은 염세주의와 허무주의에 빠지거나 아니면 기독교나 목적론적 사고방식에 빠지게 된다. 여기서 난쟁이는 차라투스트라가 결국 영원회귀사상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염세주의와 허무주의에 빠지게 될 것이라 악담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염세주의와 허무주의에 빠지든가 영원회귀사상을 완전히 받아들이고 세상을 긍정하든가 둘 중 하나라고 결단을 내리고 용기로 중력의 정신을 압도해버린다. 니체는 “인간은 가장 용기 있는 짐승이다.”라고 말하면서 인간에게는 그런 가능성이 존재한다고 본다.
“인간의 고통이야말로 가장 깊은 고통인데도.” - 니체는 인간이야말로 고통에 예민한 존재라고 본다. 동물들은 어지간한 고통도 잘 느끼지 못한다. 소를 생각하면 모기가 엄청 물텐데 꼬리 한 번 치고 만다. 그런데 우리는 모기 조금만 물어도 신경이 발달해서 예민하게 느낀다. 우리는 동물에 비해서 느끼는 고통이 훨씬 클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고통을 그래도 극복해왔다. 인간은 심지어 미래의 죽음까지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용기는 “죽음마저도 죽인다.” 영원회귀사상을 받아들이면 죽음마저도 긍정하는 것이다. 죽음은 끊임없이 회귀하는 사건 중 하나이기 때문에 흔연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해하기 쉽게 다시 나의 신비체험을 이야기하자면 그런 체험 가운데에서는 이 자리에서 죽어도 좋다고 생각한다. 불교에서 ‘여여하다’는 표현을 쓰는데, 죽음마저도 여여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가 된다. (교수님)
*과거와 자기
: 인간이 절대적으로 무력한 것이 이미 흘러가버린 과거다. 우리는 ‘다시 되돌아가면 안 그럴텐데’ 하며 과거를 정말 되돌리고 싶다고 생각할 때가 많다. 하지만 그건 절대 불가능하기에 우리는 시간 앞에서 무력하다고 느낀다. 시간 앞에서 느끼는 무력감은 결국 과거에 느끼는 무력감인데, 과거에 느끼는 무력감을 극복하는 방법은 과거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비록 과거에 행했던 일이 잘못이라 할지라도 나의 성숙과 성장을 위해서 진정한 자기가 원했던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신체를 경멸하는 자들에 대하여>에서 니체는 우리 안에 현명한 현인이있다고 봤는데 그것이 바로 ‘자기’였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서 데미안이 우리의 참된 자기에 해당한다. 니체는 자신이 고전문헌학 교수로 매몰되어서 살고 있을 때, 자신의 현명한 자기가 그런 식의 삶을 떠나도록 병을 만들어냈고, 그래서 교수직을 버리게 되었다고 말한다.
여러분은 여러분 안에 현명한 자기가 있는 것 같은가? 나는[교수님은] 그런 현명한 자기가 있는 것 같다. 나는 고등학교 때 갑자기 염세주의에 빠졌고 그래서 철학책과 종교책을 찾아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런 것들에서 위안을 못 얻었고 대학교 때 막스주의 빠져서 허무주의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지금은 막스주의가 잘못된 이념이라고 생각하지만, 막스주의자로 7, 8년을 산 것에 대해 후회 하지 않는다. 여하튼 어느 순간이 되니까 내가 회의에 사로잡히겠다 결심한 것도 아닌데 막스주의에 회의가 생기게 되었고, 다시 회의주의에 빠졌다. 나는 단전 호흡을 시작했고 결국 신비체험을 경험했다. 내가 내 삶의 주체라고 생각하지만 니체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힘에의 의지가 나를 이쪽저쪽으로 이끌어가게 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교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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