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자들(scholars, Gelehrten) : 니체의 학문비판을 담은 텍스트다. 당대 인문·사회과학의 학문성을 문헌학에 대한 니체의 시각으로 대변하여 문제시한다. 〈고매한 자들에 대하여〉와 〈때묻지 않은 인식에 대히여〉에서 수행되었던 철학(자) 비판의 연장선이기도 하다. 텍스트의 첫 부분은 니체가 바젤대학 문헌학 교수시절 집필했던 『비극의 탄생』에 얽힌 그의 체험이다. 이 책은 문헌학계의 촉망받던 스타였던 그의 첫 저작이었지만, 그가 문헌학계를 떠나는 계기가 된다. 그의 첫 저작에 문헌학계는 조롱당했다고 느꼈으며, 냉소 어린 침묵으로 그들의 실망을 표현했다. 『비극의 탄생』에 대한 유일한 학적 대응은 그의 슐포르타 후배이자 후에 유럽 문헌학계의 얼굴이 되는 빌라모비츠 뮐렌도르프(Ulrich von Wilamowirz Möllendorlf)의 팽플릿 형식의 글이었다(Zukunftsphilologie!: eine Erwiderung auf Friedrich Nietzsches “Geburt der Tragödie” (Berlin: Gebrunder Bornträger, 1872)). 여기서 그는 니체의 완벽하지 못한 문헌학적 지식, 역사적 사료나 문헌을 취급할 때의 미숙과 오류, 지적 허영들을 지적하고 동시에 빛바랜 염세주의와 “우싱 바그너”가 숭배되고 있는 니체의 철학적 입장도 반박한다. (역주)
*양(sheep, ein Schaf) : 여기서의 양’이 바로 뮐렌도르프다 독일어 단어 ‘Schaf’는 동물 ‘양’을 뜻하기도 하지만, ‘Schafskopf(양-머리)’처럼 ‘바보’나 ‘멍청이’ 혹은 ‘돌대가리’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 멍청이 윌렌도르프가 차라투스트라가 쓰고 있는 담쟁이덩굴 화관을 먹어치웠다는 것은, 『비극의 탄생』의 핵심 사유 중 하나인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학적으로 저격했다는 의미다(디오니소스-자그레우스 신이 머리에 쓰고 있는 관은 담쟁이덩굴로 만든 것이다. 신화의 묘사로는 그 신의 머리에 난 팔을 감추기 위해 담쟁이덩굴로 칭칭 감썼다고도 한다). (역주)
또한 백승영(2022)에 따르면, 이러한 상황을 차라투스트라가 “잠들어 누워 있을 때”라고 묘사하는 것은 『비극의 탄생』을 쓸 당시 니체가 아직 깨어 있지 않았음을, 곧 니체 본인이 1886년에 작성한 『비극의 탄생』에 대한 “자기비판의 시도”에서 직접 언급하듯 『비극의 탄생』을 작성하던 시기 자신이 아직 “청년기의 미숙”한 상태에 머물러 있었음을 드러낸다. (H2 발제문)
아이들과 엉겅퀴 그리고 빨간 양귀비꽃에게 나는 아직 학자다.
A scholar am I still to the children, and also to the thistles and red poppies.
Ein Gelehrter bin ich den Kindern noch und auch den Disteln und rothen Mohnblumen.
: ‘아이들’, ‘엉겅퀴’, ‘양귀비’는 황문수 역 각주에서 생명력, 활기 등으로 제시된다. (H2 발제문) ‘아이들’, ‘엉겅퀴’, ‘양귀비’에게 학자라고 했을 때 학자는 좋은 의미로 쓰였다. 고전의 참된 정신을 드러내려하는 학자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교수님)
*호두를 까는 방식(the knack of nut-cracking, das Nüsseknacken) : 여기서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이 학자 집단과는 같이할 수 없음을, 그들과 전혀 다른 방법론을 지향함을 드러낸다. 여기서 제시되는 “호두를 까는 방식”은 반복적이고 기계적인, 일상적 노동이된 학문 작업으로 이해될 수 있다. (H2 발제문)
나는 너무나 뜨거우며, 내 고유의 사상들로 불타고 있다. 그 때문에 숨을 쉬지 못하는 일도 자주 있다. 그러니 나는 먼지가 쌓여 있는 모든 방을 뛰쳐나와 바깥으로 나가야만 한다. // 하지만 학자들은 차가운 그늘 아래 차갑게 앉아 있다. 저들은 모든 일에서 관망자이기를 원하고, 태양이 작열하는 계단에는 앉지 않으려 조심한다.
I am too hot and scorched with my own thought: often is it ready to take away my breath. Then have I to go into the open air, and away from all dusty rooms. // But they sit cool in the cool shade: they want in everything to be merely spectators, and they avoid sitting where the sun burns on the steps.
Ich bin zu heiss und verbrannt von eigenen Gedanken: oft will es mir den Athem nehmen. Da muss ich in's Freie und weg aus allen verstaubten Stuben. // Aber sie sitzen kühl in kühlem Schatten: sie wollen in Allem nur Zuschauer sein und hüten sich dort zu sitzen, wo die Sonne auf die Stufen brennt.
: 이 단락에서 제시되는 대립구도, 차라투스트라와 학자, 뜨거운 활동가와 차가운 관망자들 간의 비교들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내에서 창조적 태도를 준거점으로 여러 차례 환유된다. (대표적으로는 2부 “때묻지 않은 인식에 대하여”의 “관조하는 자들”과 “창조하는 자들”, 차가운 달과 뜨거운 태양의 대조, 4부 “좀 더 높은 인간에 대하여” 9절에서 학자들의 “차갑고 바싹 마른 눈” 등이 존재한다.) 이러한 대립구도들은 오로지 객관적으로 세계를 “때묻지 않은 인식”으로 파악하고자 하는 태도가 초인의 창조적 태도와 대립됨을 시사한다. 학자들은 이러한 태도를 가지고 있기에 자신과 타인의 욕망, 의지를 부정하는, 태양이 작열하는 계단에 앉지 않으려는 위선적 태도를 보인다. 반면 차라투스트라가 지향하는 초인의 삶은 15장에서 제시된 태양의 “뜨거운 숨결”과 이 창조를 열망하고, “강력한 오류”를 감내한다. 그러나 학자들은 그러한 삶의 태도를 감당할 수 없기에 어떠한 의욕이나 의지도 없이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멍하니 바라보는 자들처럼 그저 관조적으로, 타인의 사유들을 평가하려 하지도 않고 그저 바라볼 뿐이다. (H2 발제문) 학자들은 방관자들이다. 이들은 고전문헌학 책들을 보더라도, 좋게 말하면 객관적으로, 나쁘게 말하면 방관자처럼 글을 쓴다. (교수님) 발제자의 “위선적 태도”라는 표현은 이해가 가질 않는다. 학자들이 ‘무기력’, ‘방관적’, ‘기계적’, ‘고리타분’하다고 볼 수는 있지만, 속으로는 악한 생각을 하면서 선한 척을 하는 ‘위선적’인 사람들로 볼 이유는 없다. (사견)
저들을 손으로 잡기라도 하면,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가루포대처럼 그들 주위에 온통 먼지가 일어난다. 하지만 저들이 일으키는 먼지가 곡물에서, 여름 들녘의 황금빛 환희에서 생겨난 것임을 그 누가 알 것인가?
Should one lay hold of them, then do they raise a dust like flour-sacks, and involuntarily: but who would divine that their dust came from corn, and from the yellow delight of the summer fields?
Greift man sie mit Händen, so stäuben sie um sich gleich Mehlsäcken, und unfreiwillig. aber wer erriethe wohl, dass ihr Staub vom Korne stammt und von der gelben Wonne der Sommerfelder?
: 그러나 학자들의 이러한 태도는 그 사상들의 가치, 창조적 열망의 결과로서 갖는 가치를 사장시킨다. 먼지 쌓인 문헌들은 본디 “별의 기호”, “참된 꿈”과 같은 것들로 시작했지만 학자들의 관조적 태도는 (때묻지 않은 방식, 즉 있는 그대로 대상을 파악하고자 한 학자들의 의도와 다르게) 오히려 그 “황금빛 환희”로서의 창조성을 가려버린다. (H2 발제문) “여름들녘의 황금빛 환희”는 고전문헌학자들이 연구하는 문헌들을 낳은 사람들, 고대의 위대한 정신들을 가리킨다. (교수님)
*먼지(dust, der Staub) : 오래되고 낡은 자료들을 하나하나 연원과 출처를 밝히고 비교하고 검토하여 고증하는 문헌학의 방식, 책 먼지가 쌓여있는 문헌학자의 연구실을 연상시킨다. 문헌학에 대한 이런 부정적 평가와는 달리, 니체는 문헌학에서 학적 장점을 찾아내기도 한다. 문헌학은 그에게 ‘말의 연금술사’로 만드는 기술을, ‘천천히 읽고 천천히 쓰는 법’을 가르치는 학문이기도 하다. (역주)
*늪(swamp, der Sumpf), 개구리(frog, der Frosch) : 백승영 역의 각주에서 개구리는 『선악의 저편』 1장 “철학자들의 편견에 관하여”에서 언급된 ‘개구리의 관점(Frosch-perspktiven)’으로 해석된다. 이러한 해석에 따르면 학자들이 내는 꽥꽥 소리는 한 가지 분야에만 편중된 사유를 함으로써, 그 전문 분야에 대해 박식해 보이지만 정작 우물 안 개구리와 같은 얄팍하고 왜소한 식견을 갖게 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외에도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내에서 늪과 개구리의 비유가 사용되는 예시로는 1부 1장 “세 가지 덕에 대하여”에서 등장하는 ‘차가운 개구리’와 ‘뜨거운 두꺼비’, 3부 7장 “지나쳐 가기에 대하여”에서 경멸의 대상과 너무 오래 붙어 있었기에 경멸하는 대상 자체가 되어버린 ‘차라투스트라의 원숭이’를 비판하는 과정에서 대도시와 그 거주민들에 비유되는 늪과 개구리 등이 있다. 이러한 서술들에서 개구리는 어떠한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 부정적 대상으로, 늪은 악취와 얄팍함으로 비유된다. (H2 발제문)
*영리한 손가락(dexterous fingers, kluge Finger) : 학자들이 이론의 체계를 만들 때의 유능함에 대한 표현. 그들에게는 다양한 방법적 기교와 기술이 있으며, 그것은 매우 복잡하고도 정교하다. 학자들은 그것을 다루는 ‘전문가’로, 한층 더 복잡하고 정교한 전문세계를 만들어낸다. “학자들. 오늘날 그들은 정신의 군인들이라고 불리거나, 유감이지만 정신의 양말을 짜는 자라고 불린다”(『유고』 KGWVIIl 12(1]86). (역주)
저들의 복잡함에 비하면 나의 단순함은 대체 무엇일는지!
what does my simplicity pretend to beside their multiplicity!
was will meine Einfalt bei ihrer Vielfalt!
: 학자들의 체계를 위한 체계를 비판하는 측면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힘에의 의지’가 갖는 ‘단순함’을 부각한다. (H2 발제문) 학자들은 정교하고 복잡한 논리를 만들어내지만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은 단순하다. 실제로 니체의 논리가 정교하진 않다. 니체의 사상은 단순하지만 열정과 정신이 깃들어있다. (교수님)
*시계장치(clockworks, Uhrwerke), 물레방아(millstones, Mühlwerke), 절굿공이(pestles, Stampfe) : 반복적 작업을 수행하는, 학자들의 기계장치로서의 성격을 드러낸다. 정해진 수순과 규준만을 준수하는 그들의 활동은 오로지 수동적이기에 오류를 감내하지 못하고, 창조적이지도 않다. 외려 학문의 창조성을 가리고 퇴색시키는, 하얀 먼지를 만드는 것일 뿐이다. (H2 발제문)
학자들은 서로를 가까이에서 일일이 감시하며 웬만해서는 서로를 믿지 않는다. 하찮은 잔꾀를 부려대며 절름발이 지식을 지닌 자들을 기다린다. 거미가 먹이를 기다리듯이.
They keep a sharp eye on one another, and do not trust each other the best. Ingenious in little artifices, they wait for those whose knowledge walks on lame feet, - like spiders do they wait.
Sie sehen einander gut auf die Finger und trauen sich nicht zum Besten. Erfinderisch in kleinen Schlauheiten warten sie auf Solche, deren Wissen auf lahmen Füssen geht, - gleich Spinnen warten sie.
: 상대가 과연 자료를 잘 처리하는지, 고증에서 실수는 하지 않았는지, 혹은 논리와 논증 구성에서 오류를 범하지는 않았는지를 늘 살피는 것이다. 학문발전을 위한 비판과 토론이라는 미명하에 이루어지는 일이지만, 차라투스트라에게는 거미가 먹이를 기다리는 일과 다를 바가 없다. 무언가 자그마한 실수 하나라도 찾아내면, 그것을 자신의 유능함을 보여주는 계기로 삼는다. 니체는 이런 류의 고상한 척하는 비판이, 평균적인 보통의 학자에 의해 창조성을 빛내는 철학자를 망치는 데 사용된다고 한다. 평균본능을 지난 학자는 “하찮은 질투에 사로잡혀 자기가 오를 수 없는 높이에 있는 사람의 저급함을 교활하게 살피는 살랭이의 눈을 갖고 있다 (...) 그들은 비범한 인간을 본능적으로 근절하려고 하고, 그들을 꺾어버리려고 하는 것이다. 학자가 할 수 있는 가장 나쁘고 가장 위험한 것은 그의 속성 중 평범함의 본능에서 온다”(『선악의 저편』 206). (역주)
학자들도 나름대로의 힘에의 의지가 있기 때문에 서로 약점을 캐면서 우월의식을 느끼고 싶어 한다. (교수님)
우리는 서로에게 낯설고, 저들의 덕은 저들의 거짓말이나 속임수 주사위보다 더 내 취향에 거슬린다. // 그리고 내가 저들 옆에 살았을 때에도, 나는 저들 위에 살고 있었다. 저들이 나를 싫어한 것도 이 때문이다. // [...] // 그래도 나는 내 사상을 품고서 저들 머리 위를 걸어 다닌다. 설령 내가 나 자신의 오류 위에서 걷는다 할지라도, 그래도 나는 여전히 저들과 저들의 머리 위에 있을 것이다. // 인간은 동등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정의가 말하고 있다. 내가 원하는 것, 저들에게는 감히 그것을 원할 권리가 없다.
We are alien to each other, and their virtues are even more repugnant to my taste than their falsehoods and false dice. // And when I lived with them, then did I live above them. Therefore did they take a dislike to me. // [...] // But nevertheless I walk with my thoughts above their heads; and even should I walk on my own errors, still would I be above them and their heads. // For men are not equal: so speaks justice. And what I will, they may not will!
Wir sind einander fremd, und ihre Tugenden gehn mir noch mehr wider den Geschmack, als ihre Falschheiten und falschen Würfel. // Und als ich bei ihnen wohnte, da wohnte ich über ihnen. Darüber wurden sie mir gram. // [...] // Aber trotzdem wandele ich mit meinen Gedanken über ihren Köpfen; und selbst, wenn ich auf meinen eignen Fehlern wandeln wollte, würde ich noch über ihnen sein und ihren Köpfen. // Denn die Menschen sind nicht gleich: so spricht die Gerechtigkeit. Und was ich will, dürften sie nicht wollen!
: 여기서 차라투스트라는 그들과 자신의 차이에 대한 관점을 드러낸다. 차라투스트라는 학자들에 비해 자신의 사상이 분명한 우위의 가치를 갖는다고 보는 것은 그가 학자들과 달리 가치를 창조할 수 있음에 근거한다. 이러한 우위는 그가 가치를 능동적으로 창조한다는 것 자체에서 비롯하기에, 설령 그가 그 창조 과정에서 어떠한 오류를 범할지라도 그 우위는 침해 받지 않는다. 이러한 구분을 차라투스트라는 정의로 칭한다. 이와 달리 학자들은 표준화된 방법론, 기계적 학문활동과 그를 통한 깨끗한 인식, 학자 자신의 힘에의 창조적 의지가 개입되지 않고 어떠한 계단도, 오류도 허용하지 않는 때묻지 않은 진리를 추구한다. 이러한 구별 도식에서 앞선 학자들에 대한 거미의 비유를 참조할 때, “타란툴라에 대하여”에서 제시된 평등주의적 관점이 이 장의 문헌학자들에게도 공유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달리 말해 “저들의 덕은 저들의 거짓말이나 속임수 주사위보다 더 내 취향에 거슬린다.”라는 차라투스트라의 말에서 지칭하는 ‘저들의 덕’은 차라투스트라의 정의, “인간은 동등하지 않기 때문이다.”와 대립되는 것으로, 곧 평등주의적 가치관으로 이해할 수 있다. (H2 발제문)
“내가 저들의 옆에서 살았을 때에도”가 아니라, “내가 저들의 집에 살았을 때에도”로 번역해야 한다. ‘고전문헌학계에 몸을 담고 있었을 때에도’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저들의 덕을 평등주의적 가치관으로 보기는 힘들다. 학자들은 꼼꼼히 문헌을 탐색하고 따지는 것을 미덕으로 본다고 말하는 것 같다. (교수님)
발제자의 오해는, 앞에서 “거미가 먹이를 기다리듯이”의 “거미”를 평등주의자를 가리켰던 “타란툴라”로, 그리고 여기서 “인간은 동등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정의가 말하고 있다.”를 평등주의를 반대하는 발언으로 독해하면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학자들이 서로 실수하기를 기다리며 서로 잡아먹으려는 것과 달리, 평등주의자들은 자기들끼리는 연대하면서 자신들보다 강한 자는 끌어내리려고 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또한 “인간은 동등하지 않기 때문이다.”라는 말이 나온 맥락은, 차라투스트라가 평등주의를 반대하는 맥락이 아니라, 차라투스트라 자신의 사상이 설령 오류라 할지라도, 자신은 상위의 인간이며 학자들은 하위의 인간들이기에 감히 자기처럼 머리 위에 군림할 수 없다는 맥락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사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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