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현대대륙철학 일차문헌

[니체] 「환영과 수수께끼에 대하여」 후반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3부 2장 2절)

현담 2023. 5. 19. 19:49

그때 내 몸을 가볍게 해주는 일이 일어났다. 난쟁이, 그 호기심 많은 자가 내 어깨에서 뛰어내린 것이다! 그러고는 내 앞의 돌 위에 쪼그려 앉았다. 그런데 우리가 멈추어 선 바로 그곳에는 성문이 하나 있었다.

Then happened that which made me lighter: for the dwarf sprang from my shoulder, the prying sprite! And it squatted on a stone in front of me. There was however a gateway just where we halted.

Da geschah, was mich leichter machte: denn der Zwerg sprang mir von der Schulter, der Neugierige! Und er hockte sich auf einen Stein vor mich hin. Es war aber gerade da ein Thorweg, wo wir hielten.

: 차라투스트라가 삶을 긍정할 용기를 발휘하자, 차라투스트라를 짓누르던 중력의 정신인 난쟁이가 짓누름을 유예한다. 차라투스트라가 본격적으로 영원회귀사상을 주장하려 하자, 차라투스트라가 계속 상승할 것이냐 파멸할 것이냐 시험대에 오른 것이다. (J3 발제문) 시험대에 올랐다기보다도, 차라가 중력의 정신을 뿌리쳤다고 봐야할 것 같다. 차라투스트라는 영원회귀사상을 긍정하는 상태로 고양되었다. (교수님) “시험대에 오르다라는 표현이 애매한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교수님 말씀처럼 중력의 정신을 완전히 뿌리치고 영원회귀사상을 받아들여 고양된 상태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아직 차라투스트라 내면의 목소리인 난쟁이가 차라투스트라에게 시비를 걸고 있고, 이후에 차라투스트라는 다시 자신의 여러 생각과 그 배후에 놓여 있는 생각들이 두려워지기 때문이다. 영원회귀사상을 완전히 받아들이기 전, 자신이 일차적으로 이겨낸 중력의 정신과 결전을 벌이는 단계 정도로 보면 무난할 것 같다. (사견)

 

그때 나는 말을 이었다. “난쟁이여, 이 성문을 보라! 그것은 두 개의 얼굴을 갖고 있다. 두 개의 길이 여기서 만난다. 아직까지 어느 누구도 이 두 길의 끝까지 가 보지는 못했다. // 뒤쪽으로 나 있는 이 긴 골목길. 그 길은 영원으로 통한다. 그리고 저쪽 밖으로 나 있는 저 긴 골목길. 거기는 또 다른 영원이다, // 그 두 길은 서로 모순된다. 서로 머리를 부딪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 바로 이 성문에서 만난다. 위에 성문의 이름이, ‘순간이라는 이름이 쓰여 있다. // 그 두 길 중 하나를 따라 앞으로 더 앞으로, 더 멀리 계속 간다면, 그래도 이 길들이 영원히 서로 모순될 것이라고 믿는가, 너 난쟁이여?”

"Look at this gateway! Dwarf!" I continued, "it has two faces. Two roads come together here: these has no one yet gone to the end of. // This long lane backwards: it continues for an eternity. And that long lane forward - that is another eternity. // They are antithetical to one another, these roads; they directly abut on one another: - and it is here, at this gateway, that they come together. The name of the gateway is inscribed above: 'This Moment. // But should one follow them further - and ever further and further on, think you, dwarf, that these roads would be eternally antithetical?"

"Siehe diesen Thorweg! Zwerg! sprach ich weiter: der hat zwei Gesichter. Zwei Wege kommen hier zusammen: die gieng noch Niemand zu Ende. // Diese lange Gasse zurück: die währt eine Ewigkeit. Und jene lange Gasse hinaus - das ist eine andre Ewigkeit. // Sie widersprechen sich, diese Wege; sie stossen sich gerade vor den Kopf: - und hier, an diesem Thorwege, ist es, wo sie zusammen kommen. Der Name des Thorwegs steht oben geschrieben: `Augenblick`. // Aber wer Einen von ihnen weiter gienge - und immer weiter und immer ferner: glaubst du, Zwerg, dass diese Wege sich ewig widersprechen?"

: 이 성문의 비유는 시간에 관한 것이다. 실제의 성문이 성곽의 왼쪽 부분과 성곽의 오른쪽 부분을 잇는 지점이듯, 여기서의 성문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왼쪽과 오른쪽으로 이어지는 두 개의 길은 과거와 미래다. 과거와 미래가 만나는 순간(Augenblick)’의 지점은 바로 현재다. 시간은 이런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지속이다. 그런데 시간은 그리스도교가 제시하는 창조에서 종말로 이어지는 시간과는 달리, 창조라는 시작도 없고 종말이라는 끝도 없다. 시간은 영윈히 지속된다. 그 영원한 흐름 속에서 매 순간의 현재는 과거가 되고, 미래는 현재가 될 뿐이다 이런 시간관 속에서 차라투스트라가 주목하려는 것은 순간의 의미다. 그는 영원회귀 사유의 중심 내용 하나를 여기서 찾으려는 것이다. (역주)

  차라투스트라와 난쟁이가 있는 곳은 성문’, ‘순간이라는 현재이다. 그리고 성문에서 출발해 뻗어 있는 두 길은 각각 과거와 미래를 나타낸다. 성문에서 뻗어 나간 두 길은 서로 머리를 부딪쳐 결국 하나의 고리를 만든다. , 과거의 시간 선과 미래의 시간 선은 하나의 원을 이룬다. (J3 발제문)

 

Q: 과거의 시간과 미래의 시간이 머리를 맞대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도대체 어떻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인가? (J2)

A: 모르겠다. 이 부분이 사실 엄밀하게 이해되지는 않는다. 나는 영원회귀가 이론적으로 증명될 수 있다거나 그럴듯하게 해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걸 가지고 논문을 쓰는 사람도 있는데 시간 낭비 아닌가 싶다.

  좀 더 단순화하여 생각해보면 봄-여름-가을-겨울이 거의 비슷하게 반복되니 그런 식으로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다. 그런데 니체는 모든 것이 순서까지 똑같이 영원히 반복된다고 말하는데 그것까지는 받아들이기 힘들다. 모든 게 그냥 똑같이 반복되어도 좋다고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나의 신비체험 이야기를 다시 꺼내자면, 그 당시 나는 나의 과거의 삶이 똑같이 반복되어도 좋겠다, 그래도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지, 나의 이런 삶이 이전에도 있었고 이후에도 있겠다 이런 생각까지는 전혀 하지 않았다. 똑같은 부모, 똑같은 나라에서 태어나도 좋겠다, 오히려 그렇게 태어나서 고맙다고 생각하였다.

  영원회귀사상은 우리가 이론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 방식으로 증명할 수 있는 사상이 아니다. 공간이 한정되어 있다는 가정도 납득할 수 없다. 빅뱅 이후로 우주는 계속 팽창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빅뱅 이후 계속 새로웠지 않은가. 모든 것이 영원히 똑같이 반복된다는 니체의 말과 현대 과학적 성과가 양립할 수 있을까. (교수님).

 

난쟁이가 경멸조로 중얼거렸다. “모든 곧은 것은 속인다. 모든 진리는 굽어 있고, 시간 자체가 원이다.” // 나는 화를 내며 말했다. “, 중력의 정신이여, 너무 가볍게 만들지 말라! [...]”

"Everything straight lies," murmured the dwarf, contemptuously. "All truth is crooked; time itself is a circle." // "you spirit of gravity!" said I wrathfully, "do not take it too lightly! [...]"

"Alles Gerade lügt, murmelte verächtlich der Zwerg. Alle Wahrheit ist krumm, die Zeit selber ist ein Kreis." // "Du Geist der Schwere! sprach ich zürnend, mache dir es nicht zu leicht! [...]"

: 차라투스트라는 영원회귀 시유에 대한 오해 하나를 불식시키려 한다. 영원회귀 사유가 시간의 순환에 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가 난쟁이에게 던지는 질문은 그 오해를 유발시키는 미끼 역할을 한다. 이 길들이 영원히 서로 모순될 것이라고 보는가?’라는 미끼를 난쟁이는 덥석 물고는, 영원회귀 사유를 피타고라스가 제시했던 순환적 시간으로 풀이한다. 이에 대해 차라투스트라는 너무 가볍게 만들지 말라면서 직접 쐐기를 박는다. 차라투스트라의 영원회귀 사유는 시간의 순환처럼 그렇게 쉽게 생각할 종류의 것이 아니다. (역주)

  난쟁이는 차라투스트라의 주장을 시간 자체가 원이라는 단 하나의 명제로 단순화하여 일축하려 한다. 하지만 차라투스트라의 영원회귀사상은 단순히 시간의 반복이라는 사실적 차원에서 머무를 만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가치 중립적인 하나의 사실을 넘어서, 삶에 대한 허무주의적 부정이냐 강인한 긍정이냐의 기로에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J3 발제문)

  “모든 곧은 것은 속인다. [...] 시간 자체가 원이다.”라고 했을 때 난쟁이는 기독교나 진보적 역사관에서 목적을 향해 쭉 나아가는 직선적 시간관은 거짓이며 그 대신 원형적 시간관을 내세우고 있기 때문에 차라투스트라 입장에서 난쟁이의 말 자체가 틀린 건 아니다. 하지만 난쟁이는 너무 안이하게 생각하고 있다. 영원회귀사상은 단순히 머리로 이해하는 사상이 아니라 실존적 변화를 촉구하는 사상이다. 실존적으로 세상을 아름답게 보고 의미로 충만한 것으로 체험하지 못하면 영원회귀사상을 이해했다고 볼 수 없는 것인데, 난쟁이는 단순히 머리로 이해하고서 자기가 영원회귀사상을 이해하는 것처럼 구니까 그런 것이 역겹게 보여 차라투스트라는 화를 내고 있다. (교수님)

 

나는 계속 말했다. “보라 이 순간이라는 것을! 순간이라는 이 성문으로부터 길고 영원한 골목길 하나가 뒤쪽으로 내달리고 있다. 우리 뒤에 하나의 영원이 놓여 있는 것이다. // 만물 가운데서 달릴 수 있는 것이라면 이미 언젠가 이 골목길을 달렸어야 하지 않은가? 만물 가운데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면 이미 언젠가 일어났고 행해졌고 달려 지나갔어야 하지 않는가? // 그리고 모든 것이 이미 존재했었다면, 난쟁이 너는 이 순간이라는 것을 뭐라 여기는가? 이 성문 또한 이미 존재했었음에 틀림없지 않겠는가? // 모든 것이 그토록 서로 단단하게 연결되어 있지 않겠는가? 이 순간이 다가올 모든 것을 자기 자신에게로 끌어당기도록, 그래서 자기 자신마저도 끌어당기도록 말이다. // 모든 것 중에서 달릴 수 있는 것이라면 이 기나긴 골목길 저쪽으로도 달릴 수 있는 것이라면 언젠가는 달려야만 하기 때문이다. // 그리고 달빛 아래 느릿느릿 기어 다니는 이 거미와 이 달빛 자체, 함께 속삭이고 영원한 것에 대해 속삭이며 성문에 앉아 있는 나와 너, 우리 모두는 이미 존재했었어야 하지 않겠는가? // 그리고 다시 되돌아와, 우리 앞에 놓인 또 다른 골목길, 그 길고도 소름 돋는 골목길을 달려야 하지 않는가? 그렇게 우리는 영원히 되돌아올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Observe," continued I, "This Moment! From the gateway, This Moment, there runs a long eternal lane backwards: behind us lies an eternity. // Must not whatever can run its course of all things, have already run along that lane? Must not whatever can happen of all things have already happened, resulted, and gone by? // And if everything has already existed, what think you, dwarf, of This Moment? Must not this gateway also - have already existed? // And are not all things closely bound together in such wise that This Moment draws all coming things after it? Consequently - itself also? // For whatever can run its course of all things, also in this long lane outward - must it once more run!- // And this slow spider which creeps in the moonlight, and this moonlight itself, and you and I in this gateway whispering together, whispering of eternal things - must we not all have already existed? // -And must we not return and run in that other lane out before us, that long weird lane - must we not eternally return?"

Siehe, sprach ich weiter, diesen Augenblick! Von diesem Thorwege Augenblick läuft eine lange ewige Gasse rückwärts hinter uns liegt eine Ewigkeit. // Muss nicht, was laufen kann von allen Dingen, schon einmal diese Gasse gelaufen sein? Muss nicht, was geschehn kann von allen Dingen, schon einmal geschehn, gethan, vorübergelaufen sein? // Und wenn Alles schon dagewesen ist: was hältst du Zwerg von diesem Augenblick? Muss auch dieser Thorweg nicht schon - dagewesen sein? // Und sind nicht solchermaassen fest alle Dinge verknotet, dass dieser Augenblick alle kommenden Dinge nach sich zieht? Also - sich selber noch? // Denn, was laufen kann von allen Dingen: auch in dieser langen Gasse hinaus - muss es einmal noch laufen! - // Und diese langsame Spinne, die im Mondscheine kriecht, und dieser Mondschein selber, und ich und du im Thorwege, zusammen flüsternd, von ewigen Dingen flüsternd - müssen wir nicht Alle schon dagewesen sein? // - und wiederkommen und in jener anderen Gasse laufen, hinaus, vor uns, in dieser langen schaurigen Gasse - müssen wir nicht ewig wiederkommen? -"

: 힘에의 의지가 자기 고양을 추구하며 역동함에 따라, 시간이 흘러 세계의 모습이 변화한다. 그런데 그 모든 변화는 우로보로스처럼 시작과 끝이 맞물려 있는, 아니 정확히 말하면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한 순환 고리 안에 있는 순간들 사이에 이행이다. , 모든 것은 이미 존재했었던 것들인 동시에 앞으로도 계속 다시금 존재할 것들이 된다. (J3 발제문)

  물음표로 제시되었지만, 실제로는 느낌표나 마침표다. 영원회귀 사유는 영원한 회귀에 대해 말한다. 하지만 니체 철학의 대전제에 따르면 같은 것의 반복은 있을 수 없다. 헤라클레이토스가 그랬듯 니체 역시 모든 것은 영원한 흐름 속에서 늘 변화를 거듭한다고 한다. 거기서 단 한 순간이라도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는 것은 없다. 그래서 차라투스트라의 말은 거미나 달빛 자체, 나와 너가 똑같은 모습으로 다시 재연되거나 부활한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이 비유와 메타포들을 동원해서 니체가 진정 말하고 싶은 것은, 매 순간이 필연이고 의미가 충만하며, 그렇기에 영원한 회귀를 바랄 정도라는 점이다. 이 내용은 영원회귀 사유가 힘에의 의지의 생기존재론을 완성시키는 이론적 측면을 전제한다. 힘에의 의지의 자기 본성으로의 영원회귀 힘에의 의지의 지속적 운동 관계세계의 지속 그 세계 속 모든 것의 의미와 필연성 확보과정을. 텍스트의 만물 가운데 (...) 되돌아올 수밖에 없지 않은가는 바로 이 이론적 측면에 관한 것이다. (역주)

  미래와 과거가 다 연결되어 있고 끊임없이 순환하기에 매순간 영원의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기독교적 이원론적 사고는 영원한 세계가 위에, 덧없는 세계가 아래에 있는 수직적 사고를 기초로 한다. 하지만 영원회귀사상에서는 매순간에 영원의 충만이 깃들어있다.

  앞에서 우주론적 증명에 대해 살펴보았는데 여기서 니체는 그 증명을 분명하게는 아니지만 비슷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세계에 있는 것들, 즉 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라든가 세계에 다양한 개체들은 유한한 것들인데, 이런 것들이 영원한 시간 속에서 다양한 조합을 이루더라도 그 조합의 숫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영원한 시간 속에서 반복될 수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다.

  모든 것이 똑같이 돌아온다고 하면 납득이 안 되니, 들뢰즈나 백승영의 경우, 끊임없이 새롭게 생성되는 매 순간을 의미가 충만한 필연으로 받아들인다고 해석한다. 그런데 그렇게 해석하게 되면 니체의 영원회귀사상이 너무 평범한 이야기가 되어버린다. 니체가 하는 이야기를 그대로 읽으면,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는지 납득은 안 되지만, 그냥 모든 것이 똑같이 돌아온다고 읽힌다. 끊임없이 새롭게 생성된다라는 의미라면 굳이 “wiederkommen”이라고 썼겠는가. 나 자신과 함께 달빛 아래 느릿느릿 기어 다니는 이 거미와 이 달빛 자체마저도 같이 회귀할 것이라고 이야기하는데?

  니체를 무난하게 해석하게 되면 영원회귀 사상이 가지는 특별함, 즉 실존적 결단을 내리게 하는 성격이 사라져버린다. 모든 것이 똑같이 돌아오는 세계를 받아들일 수 있냐고 물으면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러나 끊임없이 새로운 세계를 받아들일 수 있냐고 물으면, ‘, 그럼 미래에는 좋게될 수도 있잖아!’하고 냉큼 받아들일 수 있다. 일반 사람들의 구미에 맞게 니체를 왜곡한 거 아닌가 싶다. 세상이 지긋지긋하면 죽음이 구원이라고 생각하기도 하는데, 영원회귀사상은 죽지도 못하게 만든다. 영원회귀 사상이 가지고 있는 파급, 우리를 끔찍한 세계 앞에 세우려는 니체의 의도를 고려하여 해석해야 한다. (교수님)

 

Q: 과거의 나는 현재의 나와 똑같은 인생을 산다. 현재의 나는 미래의 나와 똑같은 인생을 산다. 이렇게 각각의 들이 서로 영향을 주지 않고 독립적으로 똑같은 인생을 산다면 영원회귀사상을 받아들일 부담이 더 줄어들지 않는가? 오히려 서로 영향을 주고 서로 다른 인생을 사는 것이 더 부담스럽지 않은가? (J3)

A: 영원회귀사상이라는 것은 무난하게 사는 사람들이 내세웠을 때 큰 울림을 주지 못한다. 적어도 니체처럼 누구라도 살기 싫었을 인생을 살아야 큰 울림을 줄 수 있다. 여자한테 매번 차이고, 정신이 멀쩡할 때는 학문적으로 크게 인정받지 못해 자비로 자기 책을 출판하고, 병약하게 태어나 사는 내내 골골거리다가 결국 삶의 말미에는 미쳐버리고, 이런 인생을 살고 싶은가? 이렇게 다시는 살기 싫은 인생이 영원히 반복되어도 좋다고 바로 니체가 말했기 때문에 영원회귀사상은 그 의미가 있다. (교수님)

  무한한 시간 속 들이 서로 자기동일하고 독립적인 인생을 산다고 하더라도 각각의 는 자기 인생에서 한 번쯤은 누구라도 피하고 싶은 끔찍한 고통을 느낄 것이다. 다시 말해, 누구라도 자기 삶이 충분한 무겁게 느껴지게 만들 계기가 있을 것이며, 그때 그 사람의 태도를 봐야 영원회귀사상을 받아들였는지 안 받아들였는지 판단할 수 있다. (D) 사문유관상(四門遊觀相)에 따르면, 부처는 동문에서 출생의 고통을, 남문에서 늙음의 고통을, 서문에서 병듦의 고통을, 북문에서 죽음의 고통을 관찰하였다. 생로병사는 어떤 사람이든 피할 수 없지만 피하고 싶은 큰 고통일 것이다. 여기서 고통은 굳이 나의 고통일 필요는 없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고통이라 할지라도 충분히, 아니 더 크게 삶의 무거움을 체감하게 만든다. 우리는 사람하는 사람의 죽음을 직면했을 때, 그 사람이 건강하게 더 오래살다 떠났다면 좋았을 것을, 그 사람이 더 행복한 삶을 살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불가능하지만 절절하게 소망하게 된다. (사견)

  D가 말했듯, 영원회귀사상을 받아들이냐 마느냐는 우리가 절대 안 일어났으면 좋겠다 싶은 고통을 겪었을 때 판가름날 것이다. 어지간한 사람 경우에는 자기 배우자나 자식이 일찍 죽는 일이 큰 고통이다. 누님 두 분의 남편이 둘 다 목사였는데 일찍 돌아가셨다. 누님 두 분은 기독교로 이겨내셨다. 그런 고통은 맨정신으로 이겨내기 힘들다. 허구적 존재에 매달린다고 하더라도 그런 고통은 이겨내기 힘들다. 그래도 하느님의 섭리라고 하면 위안이 된다. 하느님께서 일찍 데려가신 이유가 있겠지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그냥 그냥 아무 이유없이 죽었다고 하면 위로가 안 된다. 하지만 영원회귀사상에 따르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저 일어날 운명이 일어난 것이다, 이렇게 받아들이긴 굉장히 힘들다. 그래서 종교에서 위안을 찾는다는 것이 그렇게 나쁜 일로 볼 것이 아니다. (교수님)

 

이렇게 말하면서 나는 소리를 점점 낮췄다. 나 자신의 여러 생각과 그 배후에 놓여 있는 생각들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때 갑자기 가까운 곳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 [...] // 그러자 그 개는 무서워 떨었다. 개도 도둑과 유령의 존재를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 이렇게 개가 짖어대는 소리를 다시 듣게 되자, 나는 또다시 연민에 휩싸인 것이다. // 그런데 난쟁이는 어디로 가버렸지? 성문은? 거미는? 그리고 그 모든 속삭임은? 내가 꿈이라도 꾼 것인가? 깨어 있던 것인가? 갑자기 나는 험준한 절벽 사이에 서 있었다. 홀로, 황량하게, 황량하기 그지없는 달빛 아래.

Thus did I speak, and always more softly: for I was afraid of my own thoughts, and arrear-thoughts. Then, suddenly did I hear a dog howl near me. // [...] // Thereby had the dog been terrified: for dogs believe in thieves and ghosts. And when I again heard such howling, then did it excite my commiseration once more. // Where was now the dwarf? And the gateway? And the spider? And all the whispering? Had I dreamt? Had I awakened? between rugged rocks did I suddenly stand alone, dreary in the dreariest moonlight.

Also redete ich, und immer leiser: denn ich fürchtete mich vor meinen eignen Gedanken und Hintergedanken. Da, plötzlich, hörte ich einen Hund nahe heulen. // [...] // darob entsetzte sich damals der Hund: denn Hunde glauben an Diebe und Gespenster. Und als ich wieder so heulen hörte, da erbarmte es mich abermals. // Wohin war jetzt Zwerg? und Thorweg? Und Spinne? Und alles Flüstern? Träumte ich denn? Wachte ich auf? Zwischen wilden Klippen stand ich mit Einem Male, allein, öde, im ödesten Mondscheine.

: 여기서부터는 영원회귀 사유의 실천적 측면에 관한 것으로, 영원회귀 사유로 인해 인간에게 닥칠 위험 상황과 그 위험 상황의 극복 가능성을 두 번째 환영이자 수수께끼의 형태로 보여준다. 즉 위버멘쉬로의 결단을 통해서 영원회귀 사유의 허무적 파국은 극복된다. (역주)

  후술할 것처럼, 영원회귀사상은 삶에 대한 긍정의 가능성이 있는 한편, 허무적 위험도 있다. 차라투스트라가 영원회귀사상을 주장하다가 두려움을 느끼는 까닭은 그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차라투스트라는 영원회귀사상을 삶에 대한 긍정으로 소화하는 데 성공한다. 그것은 중력의 정신인 난쟁이가 사라진 것으로서 나타난다. (J3 발제문)

  도둑과 유령을 영원회귀사상과 관련시킨다면 영원회귀사상의 어두운 측면으로 이해할 수 있다. 아무런 목표도 없이 모든 것이 회귀한다는 사실이 끔찍하게 나타날 때의 영원회귀사상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는 다른 해석이 불가능한 것 같다. 영원회귀사상의 어두운 면을 보고 개는 겁을 집어먹고 두려움에 떠는 것이며, 이런 개에게 차라투스트라는 동정을 느낀다. 다른 곳에서 차라투스트라는 동정을 극복하기가 어렵다는 이야기를 했다. 개의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순간적으로 연민을 느낀 것의 의미가 있을까. 큰 의미는 없을 것 같다. (교수님)

  차라투스트라가 영원회귀사상의 위험성을 경고하며 영원회귀사상을 포기시키려던 난쟁이를 이겨내면서 난쟁이는 사라진다. 난쟁이가 사라진 이제 차라투스트라는 별을 깨는 투석용 돌이 자기 머리 위로 떨어지는 사태를 대면해야 한다. 염세주의와 허무주의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인 가정인 영원회귀를 직접 마주해야만 하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제 성문도, 거미도, 난쟁이도 없이 홀로, 더 나아갈 데 없는 험준하고 황량한 절벽에 섰다.

  두려움에 떨면서 짖는 개는 영원회귀사상의 끔찍한 위험이 닥칠 것을 경고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도둑과 유령이 이제 곧 등장한다는 것이다. 공포영화로 치면 귀신이 등장하기 직전 귀신의 등장을 예고하는 이상현상이 고조되는 상황이다. 시간적 배경도 보름달이 떠오른 한밤중이다. 니체가 굳이 보름달이 떴다고 설정하는 이유는 그것이 정오에 뜬 태양과 대비되기 때문일 것이다. 정오의 태양은 세상의 모든 사물의 그림자를 사라지게 한다. 반면 한밤의 보름달은 세상의 모든 사물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이 보름달이 평평한 지붕 위에, 마치 남의 땅 위에 있는 것처럼 조용히 멈추어 있는 것에는 큰 의미가 담겨있다기보다는 보름달이 어떻게 떠있는지에 대한 묘사로 보인다. 보름달은 지붕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남의 집에 침입해 지붕 위에 서있는 도둑처럼 잘 보이게 떠있다.

  굳이 차라투스트라가 아이였던 때, 아득히 먼 그 어린 시절로돌아가 짖어대는 개들을 보며 측은한 마음이 들었었던 기억을 상기시키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 경우 아이는 미신을 믿는 미성숙한 존재라는 부정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유령은 없고, 도둑이 보름달이 밝게 뜬 밤에 도둑질을 하지는 않으니 도둑도 없다. 개가 짖는 데에는 사실 합리적인 이유가 없고 그런 개에 대해 측은한 마음이 들 필요도 없다. 짖는 개는 어렸던 차라투스트라 미신과 두려움의 투사물이다. (사견)

 

그리고 정녕 나는 그때 내가 보았던 것, 그와 같은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나는 젊은 양치기 하나가 몸을 비틀고 객객거리고 경련을 일으키며 얼굴을 찡그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의 입에는 시커멓고 묵직한 뱀 한 마리가 매달려 있었다. // [...] // 내 손은 뱀을 잡아당기고 또 잡아당겼다. 소용없었다! 내 손은 목구멍에서 뱀을 빼내지 못했다. 그때 내 속에서 무언가가 소리를 질렀다. “물어뜯어라! 물어뜯어!” // “대가리를 물어뜯어라, 물어뜯어!” 이렇게 내 속에서 소리를 질렀다. 나의 전율과 증오와 구역질과 연민이, 내 안에 있는 좋은 것과 고약한 것 모두가 한꺼번에 소리를 질러댔다.

And truly, what I saw, the like had I never seen. A young shepherd did I see, writhing, choking, quivering, with distorted countenance, and with a heavy black serpent hanging out of his mouth. // [...] // My hand pulled at the serpent, and pulled: - in vain! I failed to pull the serpent out of his throat. Then there cried out of me: "Bite! Bite! // Its head off! Bite!" - so cried it out of me; my horror, my hatred, my loathing, my pity, all my good and my bad cried with one voice out of

me.-

Und, wahrlich, was ich sah, desgleichen sah ich nie. Einen jungen Hirten sah ich, sich windend, würgend, zuckend, verzerrten Antlitzes, dem eine schwarze schwere Schlange aus dem Munde hieng. // [...] // Meine Hand riss die Schlange und riss: - umsonst! sie riss die Schlange nicht aus dem Schlunde. Da schrie es aus mir: "Beiss zu! Beiss zu! // Den Kopf ab! Beiss zu!" - so schrie es aus mir, mein Grauen, mein Hass, mein Ekel, mein Erbarmen, all mein Gutes und Schlimmes schrie mit Einem Schrei aus mir. -

: 검은 뱀은 영원회귀 사유의 어두운 측면, 인간을 허무적 공황상태로 갈 가능성을 의미한다. (역주)

  삶이 영원히 반복될 것이라는 영원회귀의 발상은 처음에 범인(凡人)들에게 최대의 무게(das grösste Schwergewicht)’(즐거운 학문§314)로 주어진다. 삶을 긍정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자에게 삶이 영원히 반복될 것이라는 사실은 압도적 허무로 다가선다. 그런 자는 가치의 창조와 멀며, 그런 자에게는 세계가 의미도 목표도 없이 불가피하게 회귀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시커멓고 묵직한 뱀 한 마리가 양치기의 목구멍에 들어가 있는 것은 그런 최대 무게의 허무를 가리킨다. (상징 동물이 하필 뱀인 것은 우로보로스와 관계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 허무는 자기 스스로 벗어나는 수밖에 없다. 차라투스트라가 뱀을 뽑아내려고 해도 뱀이 뽑히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이다. (J3 발제문)

  양치기는 차라투스트라 자신의 투사물이다. 뱀은 영원회귀사상을 가리킨다. 뱀이 양치기의 목구멍을 틀어막고 있는데, 차라투스트라가 빼주려고 하지만 빠지지 않는다. 영원회귀사상은 본인의 주체적인 결단에 의해서만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교수님)

  영원회귀사상을 완전히 받아들이기 위한 여정의 절정에 이르렀다. 커다란 검은 뱀 한 마리가 양치기의 입에 매달려 있는 공포스러운 사태가 묘사된다. 공포영화에서 귀신이 등장한 순간이다. 그 뱀은 누구도 대신 감당하거나 분담할 수 없다. 양치기가 살기 위해서는 오로지 양치기 자신이 그 뱀을 물어뜯어야 한다. 이제는 난쟁이냐 자신이냐가 아니다. 훨씬 더 처절한, 뱀이냐 자신이냐이다. (사견)

 

여하튼 그 양치기는 내 고함소리가 알려준 대로 물어뜯었다. 제대로 물어뜯어 버렸다! 그는 뱀 대가리를 저 멀리 뱉어냈다. 그러고는 벌떡 일어섰다. // 더 이상 양치기도 아니고 여느 사람도 아닌, 변화한 자, 빛에 둘러싸인 자가 되어 그는 웃고 있었다! 지금까지 지상에 그가 웃듯이 웃어본 자는 아무도 없었다. // , 내 형제들이여! 나는 인간의 웃음이 아닌 웃음을 들었다. 이제 어떤 갈증이, 결코 잠재울 수 없는 동경이 나를 잠식하는구나.

-The shepherd however bit as my cry had admonished him; he bit with a strong bite! Far away did he spit the head of the serpent: - and sprang up.- // No longer shepherd, no longer man - a transfigured being, a light-surrounded being, that laughed! Never on earth laughed a man as he laughed! // O my brothers, I heard a laughter which was no human laughter, - and now gnaws a thirst at me, a longing that is never allayed.

- Der Hirt aber biss, wie mein Schrei ihm rieth; er biss mit gutem Bisse! Weit weg spie er den Kopf der Schlange -: und sprang empor. - // Nicht mehr Hirt, nicht mehr Mensch, - ein Verwandelter, ein Umleuchteter, welcher lachte! Niemals noch auf Erden lachte je ein Mensch, wie er lachte! // Oh meine Brüder, ich hörte ein Lachen, das keines Menschen Lachen war,

: 양치기가 죽음의 고통을 받으며 누워 있다가 결국 뱀을 물어뜯어 뱉어내는 이 환영은 인간이 영원회귀 사유의 어두운 측면을 극복하고 위버벤쉬로 결단하는 것을 뜻한다. 이 장면은 천일야화에 수록된 신드바드의 일곱 번째 항해의 한 장면을 각색한 것이다. 거기서는 어떤 뱀의 아가리에 사람이 달려 있었고, 그 사람은 얼굴이 바깥쪽으로 나와 있어 긴박하게 도와달라고 외친다. 그러자 신드바드는 황금지팡이로 뱀을 내리치고 뱀은 그 사람을 내뱉어버린다.

  영원회귀 사유의 이런 실천적 기능은 즐거운 학문341번에 사유실험의 형태로 선취되어 있다. “어느 낮이나 어느 밤에 악마가 가장 고독한 고독감에 잠겨 있는 네게 살며시 다가와 다음처럼 말한다면 너는 어떻게 하겠는가: ‘네가 지금 살고 있고 살아왔던 이 삶을 너는 다시 한번 그러고 셀 수 없이 여러 번 반복해서 살아야만 한다: 거기에는 아무것도 새로운 것이 없을 것이다 (...) 저 사유가 너를 엄습한다면 그것은 현재 있는 너를 변화시킬 것이며 그리고 아마도 분쇄해버릴 것이다.” (역주)

  차라투스트라의 외침대로 뱀을 물어뜯은, 즉 스스로 가치를 창조하는 자로서 영원회귀를 다시 마주한 양치기는 변화한 자, 빛에 둘러싸인 자가 되어 있다. 양치기는 이제 영원히 반복되는 삶을 긍정하는 자로서 영원회귀를 다시 마주한 것이다. (J3 발제문)

  영원회귀가 불러일으키는, 뱀이 목구멍을 물어뜯으면서 질식시키는 수준의 염세주의와 허무주의는, 결국 양치기 스스로의 힘으로 극복된다. 그는 염세주의와 허무주의를 물어뜯은 후 저멀리 뱉어내고 전혀 새로운 존재가 되어 일어섰다. 그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다. 그는 초인이다. 초인을 향한 동경이 차라투스트라를 잠식한다. (사견)

 

 

(수업 : 박찬국, <존재론연습> (20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