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현대대륙철학 일차문헌

[니체] 「구원에 대하여」 전반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2부 20장)

현담 2023. 5. 26. 15:05

어느 날 차라투스트라가 큰 다리를 건너고 있을 때, 불구자와 거지들이 그를 둘러썼다. 곱사등이 하나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WHEN Zarathustra went one day over the great bridge, then did the cripples and beggars surround him, and a hunchback spoke thus to him:

Als Zarathustra eines Tags über die grosse Brücke gieng, umringten ihn die Krüppel und Bettler, und ein Bucklichter redete also zu ihm:

: 마태오복음(마태복음)1530절 이하의 장면을 패러디하면서 니체는 예수의 구원에 의문부호를 달려는 의도를 숨기지 않는다. 차라투스트라의 주변에도 불구자와 거지들이 모여들고, 그들은 예수에게 그랬듯 차라투스트라에게도 구원을 바란다. 하지만 차라투스트라의 구원과 예수의 구원은다르다 구원의 내용도 다르고 구원의 주체도 다르다 니체는 이것을 갈릴라 호수라는 공간을 큰 다리로 대체하는 알레고리 방식으로 알려준다. 인간의 위버벤쉬화()는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해내는 자기구원 행위이고, 그것은 힘에의 의지 덕분에 가능하다. (역주)

 

보시오, 차라투스트라여! 대중도 그대에게서 배우고 그대의 가르침을 믿게 되었소. 그런데 대중이 그대를 전적으로 믿도록 하려면 아직 한 가지가 더 필요하오. 그대는 우선 우리 불구자들을 설득시켜야 한다오! 지금 여기 가려 뽑은 불구자들이 있으니, 그대에게는 참으로 절호의 기회인 셈이요! 그대는 장님의 눈을 뜨게 하고 절름발이를 걷게 할 수 있소. 그리고 등 뒤에 너무 많은 것을 달고 있는 자에게서 그것을 약간 덜어낼 수도 있소. 내 생각에는 이것이야말로 불구자들로 하여금 차라투스트라를 믿게 만드는 올바른 방법일 것이오!”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한 그자에게 대답했다. “곱사등이에게서 혹을 떼어내면 그에게서 정신을 떼어내는 것이다 대중은 이렇게 가르친다. 그리고 장님에게 그의 눈을 준다면, 그는 이 지상에서 나쁜 것을 너무 많이 보게 되어 눈을 고쳐준 자를 저주하게 된다. 절름발이를 걷게 만든 자는 절름발이에게 가장 큰 해악을 끼치는 것이다. 걷게 되자마자 그의 악덕이 그와 동행할 것이기 때문이다. 대중은 이렇게 불구자에 대해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대중이 차라투스트라에게 배우는데 차라투스트라가 대중들로부터 배우지 못할 이유가 있는가?

”Behold, Zarathustra! Even the people learn from you, and acquire faith in your teaching: but for them to believe fully in you, one thing is still needful - you must first of all convince us cripples! Here have you now a fine selection, and truly, an opportunity with more than one forelock! The blind can you heal, and make the lame run; and from him who has too much behind, could you well, also, take away a little; - that, I think, would be the right method to make the cripples believe in Zarathustra!" // Zarathustra, however, answered thus to him who so spoke: When one takes his hump from the hunchback, then does one take from him his spirit - so do the people teach. And when one gives the blind man eyes, then does he see too many bad things on the earth: so that he curses him who healed him. He, however, who makes the lame man run, inflicts upon him the greatest injury; for hardly can he run, when his vices run away with him - so do the people teach concerning cripples. And why should not Zarathustra also learn from the people, when the people learn from Zarathustra?

"Siehe, Zarathustra! Auch das Volk lernt von dir und gewinnt Glauben an deine Lehre: aber dass es ganz dir glauben soll, dazu bedarf es noch Eines - du musst erst noch uns Krüppel überreden! - du musst erst noch uns Krüppel überreden! Hier hast du nun eine schöne Auswahl und wahrlich, eine Gelegenheit mit mehr als Einem Schopfe! Blinde kannst du heilen und Lahme laufen machen; und Dem, der zuviel hinter sich hat, könntest du wohl auch ein Wenig abnehmen: - das, meine ich, wäre die rechte Art, die Krüppel an Zarathustra glauben zu machen!" // Zarathustra aber erwiderte Dem, der da redete, also: "Wenn man dem Bucklichten seinen Buckel nimmt, so nimmt man ihm seinen Geist - also lehrt das Volk. Und wenn man dem Blinden seine Augen giebt, so sieht er zuviel schlimme Dinge auf Erden: also dass er Den verflucht, der ihn heilte. Der aber, welcher den Lahmen laufen macht, der thut ihm den grössten Schaden an: denn kaum kann er laufen, so gehn seine Laster mit ihm durch - also lehrt das Volk über Krüppel. Und warum sollte Zarathustra nicht auch vom Volke lernen, wenn das Volk von Zarathustra lernt?

: 백승영 역의 각주에서 이 단락은 요한복음 939-41절을 차용한 것으로 해석된다. 짜라투스트라는 이 내용을 대중의 가르침이라 칭하고 그 논지를 비틀어서, 구원이란 무엇이고 무엇을 대상으로 하며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대한 주장의 포석으로 삼고 있다. 이 단락에서 차용된 요한복음의 논지는 개별 감관의 구원보다 더 옳은, 중요한 바가 있음을, 눈으로 보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보아야 할 것이 있음을 암시한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를 비틀어 감관의 구원이 현재보다 더 나쁠 수 있음을 대중의 가르침이라고 언급한다. 이는 예수가 제시한 바리새인들이 가졌던 육신의 눈과 가지지 못했던 영적인 눈 사이의 이분법을, 기독교의 신체에 대한 경멸로서 재해석한 바이다. 즉 외려 (영적인 것이 그렇게 중요하다면) 감관이 차라리 없는 것이 낫다는 식으로 차라투스트라는 대중의 구원, 복음서의 구원을 조롱하고 있다. (H2 발제문)

  “가려 뽑은 불구자들은 장애별로 불구자들을 가려 뽑았다는 말로 보인다. 곱사등이는 차라투스트라 당신이 대단한 사람이라면 예수처럼 기적을 일으켜보라고 요청하고 있다. 예수는 장님의 눈을 뜨게 해주고 절름발이를 일으켜 세웠다.

  대중들 사이에서는 이런 식의 이야기가 있다: 장님에게 눈을 준다면 이 지상의 나쁜 것을 너무 많이 봐서 저주하게 된다, 차라리 장님임을 받아들이라, 그게 차라리 나은 것일 수 있다. 차라투스트라도 이런 이야기에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고 본다. 그래서 곱사등이든 장님이든 절름발이든 불구자가 아닌 상태에 비해서 낫기 때문에 자기 운명을 받아들여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곱사등이에게서 혹을 떼어내면 그에게서 정신을 떼어내는 것이다는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르겠다) 물론 이런 가르침은 자기 운명을 흔쾌하게 받아들이게 하는 가르침은 아니다. 절름발이가 아닌 것에 비해서 더 낫다는 식으로 비교하면서 받아들이게 하기 때문이다. 일상적으로 불평불만이 많은 사람들한테, 너보다 훨씬 못한 처지에 있는 사람 많아, 너는 너 처지에 만족해야 해, 이렇게 말할 때의 논법과 비슷하다. 차라투스트라의 영원회귀사상, 즉 삶에 대한 무조건적 긍정과 큰 차이가 있고 그에 비해 수준이 떨어지는 가르침이다. 사실 자기보다 못한 사람 생각하면서 만족한다고 해서 만족이 잘 되는 건 아니다. 그렇게 비교하지 않고서도 자기 삶에 대해서 만족하고 자기 삶을 긍정하는 태도가 결국 중요하다. 자기 삶에 불만을 가진 사람에게, 너보다 못한 사람을 생각해봐, 하면 불만이 조금 완화되겠지만 그보다 잘난 사람과의 비교로부터 쉽게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비교의식 자체로부터 벗어나는 게 더 중요하다. (교수님)

  H2 발제문에서 백승영은 이 대목을 니체가 대중과 복음서의 가르침을 조롱하는 대목으로, 교수님은 차라투스트라가 수준에 맞게 자기 운명을 받아들이게 하는 가르침을 설파하는 대목으로 해석한다. 나는 텍스트 맥락상 차라투스트라가 비아냥거리고 있다고 보았다. 사실 이때껏 대중은 차라투스트라를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조롱해왔다. 그들이 차라투스트라에게 뭔가를 배우고 믿게 되었을 리가 만무하다. 그런데 곱사등이가 대뜸 찾아와서 대중도 그대에게서 배우고 그대의 가르침을 믿게 되었소.”라고 말하며 대중이 그대를 전적으로 믿도록 하려면자신의 장애를 고쳐달라고 하니 차라투스트라 입장에서는 실소가 나왔을 것이다. 그래도 차라투스트라는 대중이 자신으로부터 배웠다면, 자신도 대중으로부터 배우지 않을 이유가 없다면서, 자신으로부터 배운 것이 없는 대중의 염세적 입장에 따라, 육체가 온전해지고 지상과 밀접한 삶을 살수록 악이 뒤따를 가능성이 크니 불구자를 오히려 고쳐주면 안 된다는 식으로 말한다. 이는 대중을 믿게 하기 위해 장애를 고쳐달라는 것에 대한 비아냥섞인 반론이자 대중은 장애를 고치지 말라고 하기 때문에 장애를 고치는 것은 대중이 자신을 믿도록 하는 데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대중이 자신에게서 뭔가를 배웠다는 것에 대한 비아냥섞인 반론이기도 하다 나는 염세주의를 부정하지만 대중은 염세주의에 빠져 있다-. 의도는 이러하지만 내용 자체는 차라투스트라 자신의 실제 입장과 구별되는데 차라투스트라 스스로도 대중은 이렇게 가르친다”, “대중은 이렇게 불구자에 대해 가르치고 있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사실 차라투스트라에게 불구자의 장애는 인간들과 함께 지낸 이래 보았던 것들 중 가장 대수롭지 않은 일일 뿐이다. 고쳐주고 말고 할 게 없는 사안이라는 것이다. (사견)

 

나는 그보다 더 고약한 것들을 보았으며 또 보고 있다. 그중 많은 것들은 너무나 역겨워 하나하나 열거하고 싶지 않지만, 어떤 것들은 침묵하고 싶지 않을 정도다. 말하자면 한 가지만을 지나치게 가지고 있고, 다른 것은 전혀 갖지 않은 인간들이 그렇다. 이들은 하나의 커다란 눈, 하나의 커다란 주둥이, 하나의 커다란 배, 혹은 그밖의 커다란 무언가일 뿐인 인간들이다. 나는 이런 자들을 거꾸로 된 불구자라고 부른다.

I see and have seen worse things, and divers things so hideous, that I should neither like to speak of all matters, nor even keep silent about some of them: namely, men who lack everything, except that they have too much of one thing - men who are nothing more than a big eye, or a big mouth, or a big belly, or something else big, - reversed cripples, I call such men.

Ich sehe und sah Schlimmeres und mancherlei so Abscheuliches, dass ich nicht von Jeglichem reden und von Einigem nicht einmal schweigen möchte: nämlich Menschen, denen es an Allem fehlt, ausser dass sie Eins zuviel haben - Menschen, welche Nichts weiter sind als ein grosses Auge, oder ein grosses Maul oder ein grosser Bauch oder irgend etwas Grosses, - umgekehrte Krüppel heisse ich Solche.

: 이 단락에서 차라투스트라는 구원의 대상이 되는 존재를 거꾸로 된 불구자로 구체화한다. 하나의 기관이 극대화된 불구자는 육신이 삶을 위해 여러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한 가지 기능만을 할 수 있는, 그러한 기능에 생이 종속되어 있기에 거꾸로 된존재다. (그러나 이러한 존재를 대중은 위대한 인간’, ‘천재로 추앙한다. 그러나 차라투스트라는 그 대중들의 인식에 문제를 제기한다. 이러한 문제의식과 관련해서, 본 발제문에서 언급된 학자들에 대하여내의 비소(卑小 - 보잘 것 없이 작다)적 진리 비판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요한복음의 관건이 영적인 것의 부재였다면, 니체에게 있어서 관건은 생적, 육체적인 것의 전도라는 점이다. (H2 발제문)

  사람들이 흔히 불구자라고 하는 사람들보다 더 불구자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기관들 중 딱 하나만 발달한 사람들이다. 귀만 발달한 인간, 눈만 발달한 인간 등은 모두 어떤 분야의 전문화된 인간을 상징한다. 그런 인간을 현대인들은 천재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런 인간은 전인적인 인격적인 성숙성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천재가 아니라 불구자다. 마르크스가 자본주의 사회의 분업을 비판하는 논의와 비슷하다. 노동자는 분업으로 한 가지 일만 하다보니 그 분야만 뛰어나게 되고 나머지 분야에서는 전혀 발달하지 못하게 된다. 현대적인 예시를 들자면, 야구선수는 평생 야구공만 던지니 팔만 발달했다고 할 수 있고, 가수는 평생 노래만 부르니 입만 발달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전인적인 인격적 성숙을 갖춘 야구선수나 가수도 있을 수 있다.) (교수님)

  거꾸로 된 불구자에 대한 니체의 묘사는 에머슨의 에세이 <좀 더 높은 영흔의 영향이다. 거기에는 천재라고 불리는 자의 과장되고 악덕에 가까운 지혜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다. (역주)

 

곱사등이에게 그리고 그를 입과 대변인으로 내세운 자들에게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고는 몹시 언찮은 심사로 제자들에게로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말했다. // “진정, 내 벗들이여.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니노라면 마치 사람의 파편들과 절단된 손발들 사이를 돌아다니는 것 같다! // 사람들이 전쟁터나 푸줏간에서처럼 토막토막 잘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것은 내 눈에는 끔찍한 광경이다. // 내 눈은 현재에서 과거로 도망쳐보았다. 그런데 거기서도 똑같은 광경을 보았다. 파펀들과 절단된 손발들과 소름 끼치는 우연들만 보였고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 지상의 이런 현재와 과거, , 내 벗들이여! 내가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니 내가 반드시 도래해야 할 것을 내다보는 자가 아니라면, 나는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 앞을 내다보는 자, 의욕하는 자, 창조자, 미래 그 자체, 그리고 미래로 향하는 다리, 그리고 아, 이 다리 옆에 있는 불구자, 이 모든 것이 차라투스트라다.

When Zarathustra had spoken thus to the hunchback, and to those of whom the hunchback was the mouthpiece and advocate, then did he turn to his disciples in profound dejection, and said: // Truly, my friends, I walk among men as among the fragments and limbs of human beings! // This is the terrible thing to my eye, that I find man broken up, and scattered about, as on a battle - and butcher-ground. // And when my eye flies from the present to the bygone, it finds ever the same: fragments and limbs and fearful chances - but no men! // The present and the bygone upon earth - ah! my friends - that is my most unbearable trouble; and I should not know how to live, if I were not a seer of what is to come. // A seer, a purposer, a creator, a future itself, and a bridge to the future - and Alas. also as it were a cripple on this bridge: all that is Zarathustra.

Als Zarathustra so zu dem Bucklichten geredet hatte und zu Denen, welchen er Mundstück und Fürsprecher war, wandte er sich mit tiefem Unmuthe zu seinen Jüngern und sagte: // "Wahrlich, meine Freunde, ich wandle unter den Menschen wie unter den Bruchstücken und Gliedmaassen von Menschen! // Diess ist meinem Auge das Fürchterliche, dass ich den Menschen zertrümmert finde und zerstreuet wie über ein Schlacht- und Schlächterfeld hin. // Und flüchtet mein Auge vom Jetzt zum Ehemals: es findet immer das Gleiche: Bruchstücke und Gliedmaassen und grause Zufälle - aber keine Menschen! // Das jetzt und das Ehemals auf Erden - ach! meine Freunde - das, ist mein Unerträglichstes; und ich wüsste nicht zu leben, wenn ich nicht noch ein Seher wäre, dessen, was kommen muss. // Ein Seher, ein Wollender, ein Schaffender, eine Zukunft selber und eine Brücke zur Zukunft - und ach, auch noch gleichsam ein Krüppel an dieser Brücke: das Alles ist Zarathustra.

: 파편들, 전도되지 않은 온전한 사람이 아닌 절단된 손발들만 보일 뿐 사람을 발견할 수 없었다는 점은 진정한 사람, 도래할 자인 초인이 아직 존재한 바 없음을 의미한다. 차라투스트라 또한 그러한 초인의 가능성을 인식하고는 있지만, 아직 그 다리를 건너지 못하였다는 점에서는 어느 정도는 불구자에 불과하다. 그러나 또한 차라투스트라는 미래 그 자체이자 창조자로서도, 우연을 구원할 자로서도 존재한다. (H2 발제문)

  “파편들과 절단된 손발들과 소름끼치는 우연들만 보였고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 사람들의 삶이라는 것이 통일적 의미를 가지지 못하고 파편들로 이루어져있으니 우연들로 나타난다. 통일성을 제대로 갖춘 인간은 보이지 않는다. 이런 인간은 앞에서처럼 전문화된 인간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지만, 여기서부터는 논의가 바뀐다. 따라서, 한편으로는, 과거,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사람들의 삶에 통일성을 구현해야 하는데, 과거는 과거, 현재는 현재, 미래는 미래대로 제멋대로 흩어져있다는 말로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과거의 트라우마에 사로잡혀 사는 삶, 과거에 짓눌려 현재 및 미래와 조화로운 통일을 못 이루는 삶이 있다. 미래의 불안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미래밖에 보이지 않아 현재 눈앞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것들을 보지 못하기도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들의 여러 충동들, 본능들이 위계질서를 이루지 못하고 분열되어 있는 데카당스 상태, 생명이 쇠퇴한 상태로 볼 수도 있다.

  “지상의 이런 현재와 과거현재를 봐도 그렇고 과거를 봐도 그렇고, 다 파편화된 인간들이다. 견디기 힘든 사실이 바로 이것이다, 제대로된 인간들이 없다는 것. 그래서 도래해야 할 것”, 즉 초인을 꿈꾼다. 이런 꿈이 없다면, “나는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다리 옆에 있는 불구자차라투스트라가 불구자에 불구자에 불과하다고 해석하기 보다는, 차라투스트라도 불구자처럼 여러 약점이 있겠지만, 그는 그런 것들을 운명으로 긍정적으로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 다시 말해, 여러 불행과 불구적인 요인들을 가지고 있지만, 그 모든 것을 다 긍정하면서 자기 삶을 흔쾌히 수용한 사람이 차라투스트라라고 해석해야 한다. (교수님)

 

 

(수업 : 박찬국, <존재론연습> (20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