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현대대륙철학 일차문헌

[니체] 「구원에 대하여」 후반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2부 20장)

현담 2023. 5. 26. 15:09

그대들도 종종 자문했었지. ‘우리에게 차라투스트라는 누구지? 우리는 그를 어떻게 불러야 하지?’ 그러고는 나처럼 그대들도 질문으로 대답하곤 했다. // 그는 언약하는 자인가, 아니면 성취하는 자인가? 정복자인가, 아니면 상속자인가? 가을인가, 아니면 쟁기인가? 의사인가, 아니면 건강을 되찾는 자인가? // 그는 시인인가, 아니면 진실된 자인가? 해방자인가, 아니면 구속하는 자인가? 선한 자인가, 아니면 악한 자인가?

And you also asked yourselves often: "Who is Zarathustra to us? What shall he be called by us?" And like me, did you give yourselves questions for answers. // Is he a promiser? Or a fulfiller? A conqueror? Or an inheritor? A harvest? Or a ploughshare? A physician? Or a healed one? // Is he a poet? Or a genuine one? An emancipator? Or a subjugator? A good one? Or an evil one?

Und auch ihr fragtet euch oft: `wer ist uns Zarathustra? Wie soll er uns heissen?` Und gleich mir selber gabt ihr euch Fragen zur Antwort. // Ist er ein Versprechender? Oder ein Erfüller? Ein Erobernder? Oder ein Erbender? Ein Herbst? Oder eine Pflugschar? Ein Arzt? Oder ein Genesener? // Ist er ein Dichter? Oder ein Wahrhaftiger? Ein Befreier? Oder ein Bändiger? Ein Guter? Oder ein Böser?

: 예수가 종종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뭐라고 생각하느냐하고 물었는데, 여기서 차라투스트라는 그 물음의 형식을 차용하고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일단 앞의 문장에 등장하는 것들 모두라 보아야 할 것이다. , 그는 언약하는 자이자 성취하는 자”, “정복자이자 상속자”, “가을이자 쟁기”, “의사이자 건강을 되찾는 자이다. 그런데 뒤의 문장에 등장하는 것들은 서로 대립되기 때문에 둘 다를 가리킨다고 봐야할 것인지, 아니면 둘 중 하나를 가리킨다고 봐야할 것인지 문제가 된다. “시인은 차라투스트라가 어떤 때는 긍정적으로 이야기하고 어떤 때는 부정적으로 이야기한다. “진실된 자와 대립하고 있으니 시인은 거짓말을 지어내는 자로 봐야 할 것인데, 차라투스트라는 진리는 사실 오류라고 하니까, 또 시인을 꼭 부정적으로 볼 건 없다. 여기서는 분명하지 않다. 또한, 차라투스트라는 전통적인 가치에서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자이지만, 초인의 이상을 향해 촉구하는 자이기에 구속하는 자라고 볼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분명하지 않다. 마지막으로, 차라투스트라는 전통적인 선악개념으로 따지면 분명 악한 자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선한 자이다. 분명치 않다. (교수님)

 

그리고 파편과 수수께끼와 소름 끼치는 우연. 이것들을 하나로 압축하고 모으는 일. 이것이 내가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는 일의 전부다. // 인간이 시인이자 수수께끼를 푸는 자이자 우연을 구원하는 자가 아니라면, 나는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참아내겠는가! // 지나간 일을 구원하고 일체의 그랬었지내가 그렇게 되기를 원했다로 변형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내가 구원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And it is all my poetisation and aspiration to compose and collect into unity what is fragment and riddle and fearful chance. // And how could I endure to be a man, if man were not also the composer, and riddle-reader, and redeemer of chance! // To redeem what is past, and to transform every "It was" into "Thus would I have it!" - that only do I call redemption!

Und das ist all mein Dichten und Trachten, dass ich in Eins dichte und zusammentragen was Bruchstück ist und Räthsel und grauser Zufall. // Und wie ertrüge ich es, Mensch zu sein, wenn der Mensch nicht auch Dichter und Räthselrather und der Erlöser des Zufalls wäre! // Die Vergangnen zu erlösen und alles `Es war` umzuschauen in ein `So wollte ich es!` - das hiesse mir erst Erlösung!

: 우리 인간이 가장 무력한 것이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이다. 이런 과거에 대한 무력감 때문에 끊임없이 흘러가는 시간에 대해 원한이나 복수심을 가질 수 있다. 그런 원한이나 복수심이 염세주의로 나타나고 현세를 타락한 세계로 보는 사고방식으로 나타나곤 한다.

  구원은 피안세계로 가거나 미래의 어떤 유토피아 세계가 이뤄지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일체의 그랬었지를 내가 그렇게 되기를 원했다, 일체의 과거를 우연이 아니라 나의 성장과 성숙을 위해 필연적으로 요구되었다, <신체를 경멸하는 자들에 대하여>에서 나왔던 현명한 자기가 자신의 고양을 위해서 필요로 했던 것들이다, 라고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구원이다. 심지어 내 삶 전체가 고통과 고난으로 가득했었더라도, 내가 그렇게 원했던 것이다, 라고 받아들이는 것이 진정한 구원이다. (교수님)

 

의지는 해방시킨다. 그런데 해방하는 자를 아직 사슬에 묶어두는 그것의 이름은 무엇인가? // ‘그랬었지.’ 이것이 이를 갈고 있는 의지와 그 가장 쓸쓸한 비탄의 이름이다. 이미 행해진 일 앞에서 무기력한 의지는 과거의 일 전부에 대해 악의를 지닌 방관자다.

Willing emancipates: but what is that called which still putts the emancipator in chains? // "It was": thus is the Will's teeth-gnashing and lonesomest tribulation called. Impotent towards what has been done - it is a malicious spectator of all that is past.

Wollen befreit: aber wie heisst Das, was auch den Befreier noch in Ketten schlägt? // `Es war`: also heisst des Willens Zähneknirschen und einsamste Trübsal. Ohnmächtig gegen Das, was gethan ist - ist er allem Vergangenen ein böser Zuschauer.

: “무기력한 의지는 병든 힘에의 의지라고 봐야 할 것이다. 병든 의지는 과거 일을 바꿀 수도 손쓸 수도 없다는 점에서 과거 일에 원한을 가지는 자이다. 이런 의지는 과거에 묶어두어져 있고, “갇혀있다. 반면, “해방하는 자는 건강한 힘에의 의지다.

  “시인은 바로 위에서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여기서 해방하는 자도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그 전에 차라투스트라는 누구냐는 질문에 대한 두 번째 대답 질문의 전자들이 차라투스트라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교수님)

 

의지는 되돌림을 의욕할 수 없다. 시간의 흐름과 시간의 욕구를 꺾을 수 없다는 것이지. 바로 이것이 의지에게는 가장 쓸쓸한 비탄이다. // [...] // 그래서 의지는 통분하고 역정을 내며 돌을 굴리고, 자기처럼 통분과 역정을 느끼지 않은 것에게 복수를 해댄다. // 그렇게 해방하는 자인 의지는 고통을 가하는 자가 되었고, 그러고는 고통받을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해 복수를 해댄다. 자신이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복수를. // 시간과 시간의 그랬었지에 대한 의지의 적의. 그렇다, 이것이, 이것만이 복수 그 자체다.

Not backward can the Will will; that it cannot break time and time's desire - that is the Will's lonesomest tribulation. // [...] // And thus does it roll stones out of animosity and ill-humour, and takes revenge on whatever does not, like it, feel rage and ill-humour. // Thus did the Will, the emancipator, become a torturer; and on all that is capable of suffering it takes revenge, because it cannot go backward. // This, yes, this alone is revenge itself: the Will's antipathy to time, and its "It was."

Nicht zurück kann der Wille wollen; dass er die Zeit nicht brechen kann und der Zeit Begierde, - das ist des Willens einsamste Trübsal. // [...] // Und so wälzt er Steine aus Ingrimm und Unmuth und übt Rache an dem, was nicht gleich ihm Grimm und Unmuth fühlt. // Also wurde der Wille, der Befreier, ein Wehethäter: und an Allem, was leiden kann, nimmt er Rache dafür, dass er nicht zurück kann. // Diess, ja diess allein ist Rache selber: des Willens Widerwille gegen die Zeit und ihr `Es war.`

: “의지는 되돌림을 의욕할 수 없다.” , 의지는 과거의 사실, 과거 자신의 과업을 되돌릴 수 없다. 이는 의지가 시간의 욕구를 꺾을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여기서 시간의 욕구가 무슨 말일까? 시간이 흘러가려는 욕구로 볼 수 있을 듯하다. 시간은 되돌릴 수 없이 흘러가는 성향을 갖는다. 의지가 그런 시간 앞에서 무력하다는 것이 의지에게는 가장 쓸쓸한 비탄이다.” (교수님) 의지의 본성은 자유지만, 시간의 흐름 앞에서는 그 자유를 발휘할 수 없다. 시간의 흐름을 꺾을 수도 없고, 시간을 역행해서 되돌릴 수도 없다. 이미 일어난 일(Es war)에 대해 무기력한 의지는 자유의 장애물인 시간을 만난 것이다. (역주)

  “자기처럼 통분과 역정을 느끼지 않은 것을 어떤 해석가들은 자기처럼 역정을 느끼지 않는 사람,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 혹은 삶을 긍정하는 사람이라 해석하는데, 나는 오히려 여기서는 시간 자체를 말하는 것 아닌가 싶다. 시간 자체는 통분과 역정을 느끼지 않는다. “고통받을 수 있는 모든 것은 무엇인가. 모든 생명, 나아가 시간이 지배하는 현세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의지는 어떻게 복수를 해대는가? (교수님) 시간을 역류시킬 수 없다는 사실이 의지를 분노상태로 몰아넣고, 의지는 시간과 시간 속에서 만들어진 모든 것 즉 생성하고 변화하는 것들 전체를 복수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것을 우연이라고 하고, 별 볼 일 없다고 하고, 문제이자 죄 있는 것이라고 하며, 고통의 원인이라고 하는 것이다. 변화하는 시간 속 인간의 삶도 같은 방식으로 재단된다. (역주)

 

*어리석음이 정신이라는 것을 배워(that this folly aqcuired spirit, dass diese Narrheit Geist lernte) : 현세의 삶을 인간이 저지른 죄에 대한 형벌이라고 보는 철학자들, 종교인들을 가리킨다. 어리석지만 그 중에서 지성적인 인간들의 경우 지성을 이용해서 인간적인 모든 것혹은 시간적인 모든 것에 고상한 철학이나 종교를 이용해서 정신적인 복수를 한다. (교수님)

 

그래서 복수는 자기 자신을 이라고 칭한다. 복수는 거짓말을 하면서도 양심 있는 척을 하는 것이다. // 의욕하는 것에게는 되돌림을 의욕할 수 없다는 사실에서 오는 고통이 있다. 그 때문에 의욕 자체와 삶 일체가 이어야 하는 것이다.

"Penalty," so calls itself revenge. With a lying word it feigns a good conscience. // And because in the willer himself there is suffering, because he cannot will backwards - thus was Willing itself, and all life, claimed - to be penalty!

`Strafe` nämlich, so heisst sich die Rache selber: mit einem Lügenwort heuchelt sie sich ein gutes Gewissen. // Und weil im Wollenden selber Leid ist, darob dass es nicht zurück wollen kann, - also sollte Wollen selber und alles Leben - Strafe sein!

: “의욕하는 것내지는 의지가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에서 고통을 느끼고,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시간에 대해 복수한다, 그래서 의욕 자체와 삶 일체를 벌로 생각한다. 쇼펜하우어는 욕망을 벌이라고 보지는 않고, 고통의 원인으로 본다. 그렇지만 욕망에 계속 사로잡히면 고통스럽게 되는 것이고, 그런 욕망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욕망 자체가 벌이라고 볼 수도 있다. 여기서는 벌이라는 것은 신이 내린 형벌이라고 볼 수도 있고 (기독교), 아니면 욕망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는 것을 가리킨다고도 볼 수 있다 (불교, 쇼펜하우어). (교수님)

 

*정신 위로 구름들이 겹겹이 모여들었고(cloud after cloud roll over the spirit, wälzte sich Wolke auf Wolke über den Geist) : “어리석음이 정신이라는 것을 배워와 유사한 의미다. 정신이 총기를 잃어버렸다, 맑은 정신에 구름이 끼어가지고 정신이 미쳐버렸다, 정도의 의미다. 그래서 모든 것은 사라진다. 그러니 모든 것은 사라져 마땅하다.” 같은 논리적인 비약의 오류를 저지르는 것이다. 시간과 시간의 지배받는 현세의 모든 것은 사라진다. 그러나 사라져 마땅하다는 것은 시간, 시간의 흐름을 당연한 벌로서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이다. (교수님)

 

자신의 아이들을 먹어 치워야 한다는 저 시간의 법칙. 이것이야말로 정의 그 자체다.’ 광기는 이렇게 설교했다.

"And this itself is justice, the law of time - that he must devour his children:" thus did madness preach.

`Sittlich sind die Dinge geordnet nach Recht und Strafe. Oh wo ist die Erlösung vom Fluss der Dinge und der Strafe Dasein`? Also predigte der Wahnsinn.

: 그리스 신화의 크로노스는 제우스 등의 자식들을 자신의 권좌를 유지하기 위해 산채로 삼켜버린다. 차라투스트라는 이 신화를 시간의 작용, 변화 일반을 거부하는 광기를 묘사하기 위해 차용한다. 복수심으로 인해 광기에 이른 병든 의지는 자신의 분노와 고통을 시간의 죄악으로 규정하고, 그 복수를 정의로서 정당화한다. (H2 발제문) “자신의 아이들을 먹어 치워야 한다는 시간에서 과거가 완전히 무가 되어 되돌릴 수 없게 된다는 것을 말한다. 광기는 그것이 정의 자체라고 설교한다. (교수님)

  H2 발제문과 관련하여, 크로노스 신화 자체는 시간의 작용을 묘사하고 있지, 광기를 묘사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광기는 되돌릴 수 없는 과거에 고통을 느껴 정의라는 이름으로 복수를 해대는 것에서 성립한다. 그러니 이것이야말로 정의 그 자체다라는 말이 바로 광기를 묘사한다. 그리고 변화 일반을 거부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불분명하다. 시간 속에 있는 것들은 변화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거부가 불가능하다. “긍정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읽어야 할 것 같다. (사견)

 

*옳음과 벌(justice and penalty, Recht und Strafe), 영원한 정의(eternal justice, ein ewiges Recht) : 백승영(2022)에 따르면, 이 단락은 아낙시만드로스의 철학에 대한 비판이다. 의지는 변화를 고통으로 여기고 그러한 고통을 주는 변화를 죄악시한다. 이런 맥락에서 차라투스트라는 끊임없이 운동하는 무한정자(apeiron)’를 바탕으로 전개되는, “있는 것들은 자신들의 불의에 대한 벌과 배상을 시간의 질서에 따라 서로에게 지불한다.”라는 아낙시만드로스의 주장을 시간의 변화가 끊임없이 일어남에 따라 그 벌 또한 끊임없이, 영원히 일어난다는, 그렇기에 변화하는 삶 또한 끊임없이 죄이고 그 벌도 영원할 수밖에 없다는 염세주의적인 주장으로 해석한다.

  과거는 바꿀 수 없다는 것은 그에 대한 의지의 무력감과 분노, 복수심과 벌의 존재 또한 변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변화 또한 영원히 죄악시될 수밖에 없다. 광기는 이러한 정의에 따라 사물들을 변하지 않는 것(옳음)과 변하는 것()이라는 이분법적 정의로 정렬시킨다. 이러한 구도 속에서 영적이지 않은 삶, 생성 변화하는 의욕을 지닌 육신은 그 자체로 죄이고 처벌의 대상이다. (H2 발제문)

  아낙시만드로스 철학과 쇼펜하우어 철학이 섞여 있다. 아낙시만드로스는 옳음과 형벌에 따라서 세계가 도덕적인 질서지어져 있고, 우주의 조화를 어기는 죄에 대한 벌이 소멸이고 죽음이라는 식으로 이야기한다. 쇼펜하우어도 영원한 정의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우리는 흔히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 때 일방적으로 피해를 준다고 생각하는데, 물자체의 차원에서는 자기와 남이 분리가 되어 있지 않아서 타인에게 피해를 줘도 자기에게 피해를 입히는 것과 같다. 이것이 영원한 정의인데, 사실 물자체 차원에서는 그렇다 하더라도 현실적인 차원에서는 여전히 고통을 주는 인간이 있고 고통을 받는 인간이 있기에 납득이 어렵다. 쇼펜하우어는 자기 사상이 불교의 윤회설과 통한다고 보았다. 윤회설에서도 영원한 정의가 나온다는 것인데, 윤회설에서는 고통을 주면 다음 세상에서는 고통을 당하는 사람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더라도 윤회설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나 납득하지 윤회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납득하기가 어렵다. (교수님)

  H2 발제문에서 시간과 과거와 변화의 관계가 좀 잘 설명되었으면 좋겠다. 의지가 무력감을 느끼는 핵심 이유는 과거 일을 되돌릴 수 없기 때문이다. 시간의 지배 하에 있는 모든 것들도 순간순간 과거로 밀려나고 있기 때문에 역시 무력감을 느끼게 된다. 그러니 시간과 시간의 지배 하에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저주하는 것이다. 발제자 혹은 발제자가 참고한 백승영은 시간의 지배 하에 있는 모든 것들이 변화/생성소멸이라는 성질을 가진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 했던 같다. 그렇다면 역으로 불변/영원불멸이라는 성질을 가지는 것은 시간의 지배 바깥에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위와 같은 해석은 하나의 가능한 해석이지만 설득력 있는 해석인지는 모르겠다. 우선 변화까지 굳이 다뤄야 할 필요를 못 느낀다. 또한 벌의 반대쌍은 상이지 옳음이 아니다. 그리고 제대로 준 벌과 제대로 준 상은 둘 다 옳음이다. 발제자가 말하는 이분법적 정렬은 성립하지 않는다. 벌과 옳음은 오히려 같이 간다. 의지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나는 뭔가를 할 수 있어야 하는데 과거에 대해서는 뭔가를 할 수가 없어서 분하고 고통스럽다. 그런데 나의 삶과 이 세계가 모두 시간의 지배 하에 과거로 흘러가고 있다. 나는 그래서 이것들에 대해서 역시 분하고 고통스럽다. 나는 이것들을 이제부터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로 규정할 것이다. 그래도 나는 양심이 있다. 내가 벌 받고 있는 것은 옳음이다. 정당하다는 말이다. 그러니 나는 이 세계에서 한 평생 살면서 달게 벌을 받을 것이다!’ 여기서 나는 변화라는 개념을 도입하지 않았다. (사견)

 

*구원(deliver, erlösen), 무욕(non-willing, Nicht-Wollen) : 쇼펜하우어의 사상이 여기서 타겟이 되고 있다. 쇼펜하우어는 욕망이야말로 우리에게 고통을 초래하고 많은 죄를 짓게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욕망 자체가 충족이 안 되는 경우를 많이 겪고, 그래서 고통에 시달리곤 한다. 또한 우리는 생존욕망에 따라 생존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과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 다른 사람에게 공격도 가하고 하면서 그를 밟고 올라설 수밖에 없다. 그런 욕망에 사로잡히는 것이 또 한편으로는 벌이기도 하다. 삶 전체가 죄인 동시에 벌인 셈이다. 그런데 영원한 정의 속에서 우리가 욕망을 갖는 존재로 다시 태어나고, 그런 욕망으로 고통받는 것은 영원한 죄와 벌이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이러한 영원한 죄와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욕망을 근절하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한에서는 자살을 하더라도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는 않는다고 보았다. 어차피 자살하더라도 욕망은 사라지지 않고, 물자체로 돌아가서 또다른 욕망으로 나타나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 말하지만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욕망에서 우리가 완전히 벗어나자면 욕망을 근절해야 한다. 쇼펜하우어가 욕망을 근절하는 방법으로 제시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아사이다. 생존욕망 중 식욕이 가장 강한 욕망인데, 식욕을 부정하면서 굶어죽는 것이다. 아사야말로 욕망을 확실히 벗어나는 것이고,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물 자체의 욕망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거기서도 벗어나게 된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는 독일의 자발적으로 굶어 죽은 사람에 대한 신문 기사 인용도 실려있다. 금욕주의적인 욕망근절의 전형적인 이야기로 보이면서, 이런 식으로 죽음을 맞아야 한다고 말하기 위해서다.

  니체는 욕망을 완전히 버리는 것을 삶을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보고 무욕을 구원이라 말하는 것을 광기의 노래로 진단한다. 진정한 구원은 창조의지가 나서서 “‘그런데 내가 그러하기를 원했다!’고 할 때”, “거기에다 그런데 내가 그렇게 되기를 원한다! 내가 그렇게 원하게 될 것이다!’라고 외칠 때이루어지게 된다. (교수님)

 

내가 그대들에게 의지는 창조자라고 가르쳤을 때, 나는 그대들을 이 터무니없는 노래에서 벗어나도록 이끌었다. // 일체의 그랬었지는 창조의지가 나서서 그런데 내가 그러하기를 원했다!’고 할 때까지는, 파편이고 수수께끼이며 소름 끼치는 우연이다. // 창조의지가 거기에다 그런데 내가 그렇게 되기를 원한다! 내가 그렇게 원하게 될 것이다!’라고 외치게 펼 때까지는 말이다.

Away from those fabulous songs did I lead you when I taught you: "The Will is a creator." // All "It was" is a fragment, a riddle, a fearful chance - until the creating Will says to it: "But thus would I have it."- // Until the creating Will says to it: "But thus do I will it! Thus shall I will it!"

Weg führte ich euch von diesen Fabelliedern, als ich euch lehrte: `der Wille ist ein Schaffender.` // Alles `Es war` ist ein Bruchstück, ein Räthsel, ein grauser Zufall - bis der schaffende Wille dazu sagt: `aber so wollte ich es!` // Bis der schaffende Wille dazu sagt: `Aber so will ich es! So werde ich's wollen!`

: 앞선 단락을 반복함으로써 차라투스트라는 창조하고자 하는 의지, 과거의 그랬었지마저도 내가 그러하기를 원했다라고 긍정하는 의지를 그 해결책으로 제시한다. 이러한 의지는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모두 자신의 고양을 위한 바로, 곧 자신의 의지에 의한 필연으로 정렬한다. 이러한 창조자로서의 의지는 오로지 자신의 의욕, ‘보다 더 높은 것을위한 자기 고양에 의거하는 것으로서, ‘타란툴라처럼 타인에 대한 질투와 고통을 주고자 하는 욕구로 움직이는 의지, 시간에 대해 복수심을 품는 병든 의지와 구별된다. 이러한 측면에서 창조자로서의 힘에의 의지는 타자가 아닌 오로지 그 자신으로서 완성되고, 스스로를 구원한다.

  이는 서두에서 언급된 기독교적 구원 개념과, 크게 그 구원의 대상과 방식, 구원을 행하는 주체 측면에서 구분된다. 먼저 니체가 복음서를 차용하는 맥락에서 기독교적 구원은 영적인 불구자들을 대상으로 신앙, 피안의 지위를을 회복하는 것으로서 성립한다. 그리고 그러한 구원은 구세주, 혹은 신의 동정과 사랑에 의해 오로지 타율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반면 이 장에서 제시된 차라투스트라의 구원은 차안의 생적 가치를 발휘하지 못하는 전도된 불구자들과 같은 자들을 그 대상으로, 창조하는 의지로서의 힘에의 의지를 회복하는 것을, 그럼으로써 우연과 파편들을 필연과 인간으로 짜맞출 수 있게 함을 그 의미로 삼는다. 그리고 이는 구세주나 시간과 같은 외적인 대상에 의한 것이 아닌, 그 자신이 무엇보다도 더 높은 것으로서의 자신의 고양을 오로지 자신의 의지, 창조하는 의지로 의욕함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H2 발제문)

 

*시간과의 화해(reconcilation with time, Versöhnung mit der Zeit) : 시간이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 삶 자체가 시간이라서 그렇고, 그렇기에 시간과의 화해는 삶과의 화해다. 삶은 또 세계와 연결되기에 삶과의 화해는 세계와의 화해다.

  헤겔의 철학도 시간과의 화해를 추구한다. 헤겔은 인류의 모든 역사를 절대정신의 자기전개로 해석하였다. 절대정신의 성숙은 인간의 자기성숙이다. 그러니 헤겔은 우리의 역사를 돌이켜보며 다 필요했구나하는 점을 논리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사람들한테 이성적으로 인류의 역사 다 받아들이자고 촉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니체식의 화해와 헤겔식의 화해는 무슨 차이가 있을까? 헤겔식의 시간과의 화해는 논리적으로, 이성적으로 납득할 수 잇는 방식의 화해다. 그러나 니체에게서 인간에게 있어 지성, 깨어있는 의식이 가지는 비중은 굉장히 적다. 니체에 따르면, 인간 전체가 변해야 한다. 힘에의 의지가 충만한 인간이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자신의 과거를 흔쾌히 받아들일 수 있다. (니체도 나름 논리적으로 설득하려고 한다. 자신의 병이라는 것이 나의 성장을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고 말하기도 하니까.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시간과의 화해에서 비롯되는 기쁨과 충만을 가져오기는 힘들다.) 힘에의 의지가 충만한 인간이 되었으면 과거와의 화해가 저절로 일어난다. 그런 식의 화해가 진정한 화해다.

  어떤 의미에서 모든 철학이나 종교에서는, 시간과의 화해든 대결이든, 시간이 문제가 된다. 이원론적인 철학이나 종교는 시간 그 자체를 죄와 형벌이라 생각하고 부정하고 극복하려고 한다. 헤겔은 이원론자는 아니다. 신은 피안에 있는 게 아니라 현세에 있고 자기전개한다. 이 점에서 니체와 유사하다. 니체 연구자 카우프만은 헤겔과 니체가 서로 본질적으로 동일하다고까지 이야기한다. 헤겔에게서 역사는 인간이 인격적으로 성숙하게 되는 과정이며, 그 논리는 단순히 지성적으로 설득이 가능한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성숙 단계에 도달한 사람에게만 설득이 가능할 수 있다. 니체와 헤겔으 유사하게 보려면 유사한 측면이 있다. (교수님)

 

그의 말이 이쯤에 이르렀을 때 차라투스트라는 갑자기 말을 멈추었는데 극도로 놀란 사람처럼 보였다.

-But at this point in his discourse it chanced that Zarathustra suddenly paused, and looked like a person in the greatest alarm.

- Aber an dieser Stelle seiner Rede geschah es, dass Zarathustra plötzlich innehielt und ganz einem Solchen gleich sah, der auf das Äusserste erschrickt.

: 황문수 역 각주는 이 단락을 아직 영원회귀 사유가 완숙하지 못한 상태에서 차라투스트라 내부에서 정립되고 있는 과정으로, 즉 아직 영원회귀 사상이 완성되지 않았기에 말을 삼킬 수밖에 없다고 해석한다. 반면 백승영(2022)에서 이 차라투스트라의 침묵은 자신의 설법이 그 내용 상의 난해함으로 인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상황에 대한 답답함으로 해석된다. (H2 발제문)

  백승영 선생님 식으로 해석하는 것이 무난하겠다. 다른 해석으로, 차라투스트라는 영원회귀사상은 함부로 이야기할 것이 아니겠다, 함부로 이야기하면 <환영과 수수께끼에 대하여> 장에서 난쟁이처럼 단순히 머리로만 이해하고 이해했다고 생각하기 쉽기 때문에 함부로 말하기보다는 침묵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제자들 또한 난쟁이처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할 가능성이 높아 침묵했다는 것이다.

  어떤 해석자들은 곱사등이가 제자들보다 뛰어나기 때문에 곱사등이와 제자들에게 각각 다르게 얘기했다고 해석한다. 그렇게 보기 어렵다. 차라투스트라가 불구자한테 했던 이야기는 차라리 불구자가 된 것이 안 된 것보다 나을 수 있다는 상대적 비교에 의한 삶의 긍정이었다. 그런데 제자들한테 했던 설법은 너의 그랬었다그렇게 원했다로 긍정하라는, 한 차원이 더 높은 이야기였다. 제자들보다 곱사등이한테 더 고차원적으로 이야기했다는 건 말이 안된다. (교수님)

 

 

(수업 : 박찬국, <존재론연습> (20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