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현대대륙철학 일차문헌

[니체] 「세 가지 악에 대하여」 후반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3부 10장 2절)

현담 2023. 6. 1. 12:09

육욕: 참회복을 걸친 채 신체를 경멸하는 자 모두에게는 가시이자 말뚝이요, 배후세계론자 모두에게서는 "세속"이라며 저주받는 것이다. 육욕이 혼란과 오류를 가르치는 교사 모두를 조롱하고 바보 취급하기 때문이다. // 육욕: 잡것들에게는 그들을 불태워버리는, 천천히 타오르는 불길이다. 벌레 먹은 목재와 악취 나는 누더기 일체에게는 욕정에 불을 붙여 김을 내게 할 준비가 되어 있는 난로다.

Voluptuousness: to all hair-shirted despisers of the body, a sting and stake; and, cursed as "the world," by all the believers in an afterworld: for it mocks and befools all erring, misinferring teachers. // Voluptuousness: to the rabble, the slow fire at which it is burnt; to all wormy wood, to all stinking rags, the prepared heat and stew furnace.

Wollust: allen busshemdigen Leib-Verächtern ihr Stachel und Pfahl, und als "Welt" verflucht bei allen Hinterweltlern: denn sie höhnt und narrt alle Wirr- und Irr-Lehrer. // Wollust: dem Gesindel das langsame Feuer, auf dem es verbrannt wird; allem wurmichten Holze, allen stinkenden Lumpen der bereite Brunst- und Brodel-Ofen.

: 금욕주의를 좇는 종교인이나 신자들에게, 즉 도덕주의자들에게 신체는 초월세계의 신과 하나됨을 막는 장애물이므로 저주받은 것이다. 반대로 욕망에 휘둘리는 이들은 욕망으로 하여금 자신의 삶을 태워버리게 만든다. 이 건강하지 못한 두 집단에게 육욕은 독이나 마찬가지이다. (W 발제문)

  “참회복을 걸친 채 신체 경멸하는 자”, 즉 성직자가 하는 이야기는 바울이 한 이야기를 연상시킨다. 그는 신이 자신이 오만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살 속에 가시를 박아넣어줬다고 이야기한다. 그는 자신에게 있는 육욕을 죄로 보면서 여전히 자신이 죄의 유혹에 사로잡힐 소지가 있다는 점을 깨닫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신 앞에서 겸손해진다. 기독교에서 육욕은 인간의 유한성을 상기시키는 가시이자 말뚝이다. 혹은 인간이 육욕을 극복하고자 하는데 그럴 수 없기 때문에 사로잡히는 죄의식, 죄책감이 가시이자 말뚝이다. 육욕은 성스러운 것에 대비되는 천하고 악한 세속이다. 그리하여 이원론을 가르치는 교사 모두는 육욕의 근절을 주장하지만, 결국 그들은 육욕을 근절하지 못하기에 육욕에 의해 조롱당하고 바보 취급당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죄의식에 시달린다.

  “천민들은 육욕을 통제하고 승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결여한다. 그래서 예컨대 그들은 섹스중독에 빠질 수 있다. “누더기라는 말이 상징하는 바는 그들이 자기 충동들, 열정들에 통일적인 위계질서를 부여하지 못하고 분열되어 있는 인간이라는 것이다. 천민들은 육욕에 사로잡히기 쉽다. (교수님)

 

육욕: 자유로운 심장을 지닌 자들에게는 죄 없는 것이자 자유로운 것이며, 지상의 낙원에서 누리는 행복이다. 온 미래가 현재에 바치는 넘쳐흐르는 고마움이다. // 육욕: 시들어버린 자에게만은 달콤한 독이지만, 사자의 의지를 지닌 자들에게는 대단한 강심제요 정중히 아껴온 포도주 중의 포도주다. // 육욕: 한충 높은 행복과 최고 희망에 대한 크나큰 비유적 행복이다. 많은 이들에게 혼인과 혼인 이상의 것이 약속되고 있으니.

Voluptuousness: to free hearts, a thing innocent and free, the gardenhappiness of the earth, all the future's thanks-overflow to the present. // Voluptuousness: only to the withered a sweet poison; to the lion-willed, however, the great cordial, and the reverently saved wine of wines. // Voluptuousness: the great symbolic happiness of a higher happiness and highest hope. For to many is marriage promised, and more than marriage,-

Wollust: nur dem Welken ein süsslich Gift, für die Löwen-Willigen aber die grosse Herzstärkung, und der ehrfürchtig geschonte Wein der Weine. // Wollust: das grosse Gleichniss-Glück für höheres Glück und höchste Hoffnung. Vielem nämlich ist Ehe verheissen und mehr als Ehe, -

: 그러나 사자의 의지를 가진 건강한 자에게는 힘을 추구하기 위한 원동력이 될 수 있으며, 자유로운 심장을 지닌 자, 즉 자기 자신의 주인인 자에게는 이 유한한 세계를 지상 낙원으로 만드는 행복인 것이다. 특히 그는 기독교에서 신성한 것으로 여기는 혼인을 육욕과 동일시함으로써 혼인의 본질, 즉 동물로서 인간종의 번식을 드러낸다. 이는 현재가 미래로 건너가는 다리이자, 후손을 통해 품는 최고 희망으로서 육욕을 보는 관점이다. 육욕이 없다면 미래 또한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W 발제문)

  힘에의 의지가 건강한 자들, 자기 자신을 잘 통제할 수 있는 자들에게 육욕은 자연스러운 현상일 뿐 죄가 아니다. 육욕은 오히려 남녀간의 관계를 통해서 나타날 초인, 미래의 아이, 그런 훌륭한 아이가 현재에 바치는 고마움이다. 쉽게 말해, 미래의 아이는 육욕 덕분에 자신이 태어날 수 있었다는 점에 고마워한다. 니체는 기독교가 성욕을 죄악시하면서 생명의 근원을 죄악시한다고 본다. 성행위를 통해 생명이 태어나기 때문이다.

  “시들어버린 자는 자기 욕망을 통제하지 못하는 허약한 자이다. 그는 달콤한 육욕에 빠져서 몸과 마음을 다 망쳐버린다. “사자의 의지를 지닌 자”, 즉 자기를 잘 통제할 수 있는 강건한 의지를 가진 자는 육욕을 적절히 이용하고 아껴서 즐긴다.

한층 높은 행복과 최고 희망은 성행위를 통해서 미래에 나타날 초인을 가리킨다. “많은 이들에게 혼인과 혼인 이상의 것이 약속된다는 것은 혼인을 넘어서서 초인을 낳는 게 약속되어 있다는 뜻이다. (교수님)

 

사내와 여자 사이보다 자기 자신이 더 낯선 많은 사람들에게 약속되고 있으니. 그런데 사내와 여자가 서로에게 얼마나 낯선 존재인지를 그 누가 온전히 파악하고 있는가? // 육욕 ; 나는 내 생각과 내가 하는 말 둘레에 울타리를 치겠다. 돼지와 광신자가 내 정원에 침입하지 못하도록!

-To many that are more unknown to each other than man and woman: - and who has fully understood how unknown to each other are man and woman! // Voluptuousness: - but I will have hedges around my thoughts, and even around my words, lest swine and libertine should break into my gardens!-

- Vielem, das fremder sich ist, als Mann und Weib: - und wer begriff es ganz, _wie_fremd_ sich Mann und Weib sind! // Wollust: - doch ich will Zäune um meine Gedanken haben und auch noch um meine Worte: dass mir nicht in meine Gärten die Schweine und Schwärmer brechen! -

: 육욕을 누릴 자격과 권리는 오로지 건강한 존재에게만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자기지배의 힘을 갖추고 있어, 육욕을 창조적 힘으로 활용할 수도 있다. 니체는 자신의 이런 생각이 육욕에 대한 탐닉이나 육욕에 대한 찬미로 오해될 여지가 있다고 여긴 것 같다. 특히 누릴 자격이 없는 병리적 존재들에게서 그런 오해가 생기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남성과 여성의 차이는 엄청나서 서로를 제대로 다 파악할 수 지경인데, 그들보다 더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이 병리적 존재와 건강한 존재이기에, 니체는 자신의 생각을 병리적 존재가 오용하게 두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역주)

 

지배욕 : 가장 단단한 심장을 지닌 자들의 벌겋게 달아오른 채찍이다. 가장 잔인한 자가 자신을 위해 아껴둔 무시무시한 고문이자 이글거리는 화형장 장작더미의 음침한 불꽃이다.

Passion for power: the glowing scourge of the hardest of the heart-hard; the cruel torture reserved for the cruellest themselves; the gloomy flame of living pyres.

Herrschsucht: die Glüh-Geissel der härtesten Herzensharten; die grause Marter, die sich dem Grausamsten selber aufspart; die düstre Flamme lebendiger Scheiterhaufen.

: ‘가장 잔인한 자가장 단단한 심장을 지닌 자가 대립되어 있다. 전자는 니체가 도덕의 계보에서 제시하듯 병리적인 인간이고, 후자는 건강한 인간이다. ‘단단한‘hart’를 번역한 것이다. 니체는 이 단어를 차라투스트라전체에서 건강한 사람의 특징으로 사용한다. “창조자는 단단하기 마련이다 (...) 단단해질지어다처럼(3낡은 서판과 새로운 서판에 대하여29). (역주)

  지배욕이란 타인을 자신의 영향력 아래 두고 싶어하는 욕망이다. 육욕과 마찬가지로 지배욕 역시 누구의 지배욕이냐에 따라 좋음과 나쁨이 갈린다. 지배욕 그 자체로는 선과 악, 혹은 좋음과 나쁨을 판단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가장 단단한 심장을 지닌 건강한 자에게 지배욕은 그가 통제할 수 있고 사용할 수 있는 채찍이다. 그는 먼저 자신의 주인이 되기 위해, 즉 자기 자신을 스스로의 영향력 아래 둘 수 있도록 스스로를 단련한다. 그러나 잔인한 자는 그 지배욕에 휘둘리어 스스로를 고문하는 화형의 수단으로 사용하게 된다. 오로지 타인의 지배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사는 삶은 자신조차 그 지배의 노예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W 발제문)

 

Q: 스스로를 고문한다는 것과 타인을 지배한다는 것이 모순되는 것 아닌가? (교수님)

A: 먼저 자기 자신을 단련하여 지배하지 못하면, 타인을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다는 지배욕에 휘둘리며 고통받는다는 뜻으로 해석하였다. (W)

 

  이 부분이 애매하다. 뒷부분은 상당히 부정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니체는 지배욕이 외부로 분출되지 못하면 자기학대로 나타난다고 했다. 한편, 앞부분은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지배욕은 정말 강한 자가 자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가하는 채찍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나는 전체적으로 다 긍정적인 의미로 해석하고 싶다. “무시무시한 고문은 바로 그 앞부분 이야기를 보완설명하고 있는 것이지 그와 대립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물론 다르게 해석할 여지가 충분히 있지만 전체적으로 자기를 강하게 단련시키려는 욕망, 자기를 강하게 지배하고자 하는 욕망을 말하는 것 아닌가 싶다. (교수님)

  직역하면 지배욕: 가장 단단한 단단한 심장의 달아오른 채찍; 가장 잔혹한 자를 위해 아껴둔 잔혹한 고문; 생동하는 장작더미의 어두운 불꽃이다. 사실 국역만 보면 W처럼 해석하는 게 자연스러운데, 직역을 통해 문장 구조를 보면 세미콜론의 첫 번째 부분만 긍정적으로 해석하고 나머지 두 부분을 부정적으로 해석한다는 게 자연스럽지는 않다. 반전의 의미가 중간에 들어갔다면 채찍다음에 세미콜론 대신 온점을 찍고 새로운 문장을 시작했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백승영은 “lebendig”이글거리는으로 번역했는데 사실 생동하는으로 번역하여 본래 의미인 살아있는(lively)”의 좀 더 긍정적인 뉘앙스가 들어가야 하지 않나 싶다. 그렇다면 세 번째 부분도 부정적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 물론 가장 단단한 심장을 지닌 자들가장 잔인한 자의 대비를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가장 잔인한 자가 병리적인 인간이라고 해도, 두 번째 부분의 내용이 병리적인 자가 지배욕에 휘둘려 스스로를 고통스럽게 한다는 것이 아니라 지배욕이 비록 고통을 수반하지만 병리적인 자를 일깨우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것으로 보아야 맥락상 조금 더 자연스럽다. 왜냐하면 바로 뒤에 나오는 생동하는 장작더미가 병리적인 자의 힘에의 의지라고 해석한다면 거기에 불을 지펴지게 하는 어두운 불꽃이 지배욕이며, 나아가 이 문장 뒤에 나오는 문장들에서도 지배욕은 등에”, “지진”, “번개등과 동일시되며 말세인들을 일깨우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사견)

 

지배욕 : 가장 허영기에 차 있는 대중들에게 들러붙은 악의에 찬 등에다. 확실치 않은 덕 일체를 비웃고 온갖 말()과 긍지를 타고 달리며 조롱하는 자다. // 지배욕 : 썩어 푸석거리는 것과 속이 텅 빈 것 모두를 부수고 깨뜨리는 지진이다. 우르르 꽝꽝 소리를 내고 징벌하면서 회칠한 무덤을 파헤치는 자다. 설익은 대답 곁에 번개처럼 떨어지는 의문부호다.

Passion for power: the wicked gadfly which is mounted on the vainest peoples; the scorner of all uncertain virtue; which rids on every horse and on every pride. // Passion for power: the earthquake which breaks and upbreaks all that is rotten and hollow; the rolling, rumbling, punitive demolisher of whited sepulchres; the flashing interrogative-sign beside premature answers.

Herrschsucht: die boshafte Bremse, die den eitelsten Völkern aufgesetzt wird; die Verhöhnerin aller ungewissen Tugend; die auf jedem Rosse und jedem Stolze reitet. // Herrschsucht: das Erdbeben, das alles Morsche und Höhlichte bricht und aufbricht; die rollende grollende strafende Zerbrecherin übertünchter Gräber; das blitzende Fragezeichen neben vorzeitigen Antworten.

: 허영기 때문에 주목과 명성을 원하는 대중에게 지배욕은 소크라테스처럼 무지의 장을 깨우는 등에가 아니다. 오히려 대중의 허영기를 만족시킬 가장 확실하고도 현실적인 수단이다. 대중의 힘이 세지면 그 외의 것들은 모두 대중적인 색채를 입게 된다. 현자들의 지혜도, 현실 정치가의 권력도, 저널도, 대중의 영향권 하에 놓이는 것이다. 그러니 그들에게 지배욕은 중심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다.

  병든 자의 지배욕은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도, 세상 전체도 파괴해버릴 수 있는 위험이다. 대중의 행복이나 자신의 사적 이해관계 같은 것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 지배욕 때문에 이미 지나가버리고 묻혀버린 과거도 다시 들추어내어 파괴하거나 응징하기도 한다. 권력을 갖게 된 경우 역사의 변조나 위조도 서슴없이 하는 것처럼. 물론 왜 그런 일이 생겼지?’ 라는 물음에 적절한 답변이 없으면, 지배욕 때문이라는 답변이 나오기도 한다. (역주)

  지배욕은 또한 허영심으로 가득 한 대중에 등에처럼 들러붙어 있다. 이 부분에서 정동호와 백승영은 각각 지배욕의 좋은 사례와 나쁜 사례로 해석하는 차이를 보인다. 정동호는 등에가 소크라테스의 변론에서 무지의 잠을 깨우는 그 등에를 차용한 것이라고 보지만, 백승영은 그 등에가 아니라며 오히려 대중의 허영을 만족시킬 가장 확실하고도 현실적인 수단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허영심 많은 대중은 허영심에 휘둘리는 노예에 가까운 부정적 표현이다. 지배욕이 대중의 무지의 잠을 깨운다고 해석하거나, 그 대중의 허영을 만족시킨다기보다는 허영심 많은 이들이 지배욕에 휘둘리거나 지배욕에 의해 고통받는 것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된다.

  다음으로 불확실한 덕을 비웃고 말과 긍지를 타고 달린다는 표현이 이전까지 차라투스트라가 건강한 자를 묘사하던 것과 유사하다는 면에서 이 부분의 지배욕은 건강한 자의 지배욕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지배욕은 썩고 비어있고 낡은 것들을 파괴하는 좋음이 될 수 있다. 자신의 영향력, 즉 힘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권위, 특히 도덕적 권위와 오래된 사상과 관습을 파괴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W 발제문)

  여기도 앞부분과 뒷부분이 서로 상반되는 내용이 아니라. 서로 보완하는 내용이라 봐야할 것 같다. 건강한 지배욕은 허영기에 차 있는 대중들로 하여금 사실은 별볼일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해서 자기자신을 극복하도록 촉구하는 등에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래야지 그 뒷부분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확실치 않은 덕 일체혹은 애매한 덕 일체는 세간적인 여러 가치들을 가리킨다. 자기에 대한 강한 긍지로서 지배욕(건강한 자의 지배욕)은 이런 것들을 비웃고 조롱한다.

  그 다음도 백승영은 부정적으로 해석했지만 건강한 자의 지배욕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푸석거리고 속이 텅 빈 것은 생명력을 결여하는 것, 건강한 힘에의 의지를 결여하는 것인데, 그것 모두를 부수는 것으로서 지배욕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회칠한 무덤은 위선자들, 즉 속은 텅 비어 있는데 그럴듯한 것이 있는 것처럼 자기를 꾸미는 사람들을 가리키고, “설익은 대답이원론적 세계 해명을 가리킨다. 건강한 지배욕은 전자의 실체를 파헤치고, 후자를 과감하게 의문에 부친다. (교수님)

 

지배욕: 그 시선 앞에서 사람들은 기어 다니게 되고, 머리를 조아리고 전전긍긍하게 되며, 뱀과 돼지보다도 더 비천하게 된다. 끝내 사람들 내부에서 크나큰 경멸의 소리가 터져 나올 때까지. // 지배욕: 커다란 경멸을 가르치는 무시무시한 여교사로, 도시와 나라들의 면전에 대고 "물렀거라"라고 설교한다. 그것들 내부로부터 "내가 물러나겠소"라는 외침이 터져 나올 때까지.

Passion for power: before whose glance man creeps and crouches and drudges, and becomes lower than the serpent and the swine: - until at last great contempt cries out of him-, // Passion for power: the terrible teacher of great contempt, which preaches to their face to cities and empires: "Away with you!" - until a voice cries out of themselves: "Away with me!"

Herrschsucht: vor deren Blick der Mensch kriecht und duckt und fröhnt und niedriger wird als Schlange und Schwein: - bis endlich die grosse Verachtung aus ihm aufschreie -, // Herrschsucht: die furchtbare Lehrerin der grossen Verachtung, welche Städten und Reichen in's Antlitz predigt "hinweg mit dir!" - bis es aus ihnen selber aufschreie "hinweg mit mir!"

: 타인의 지배, 혹은 지배욕은 사람들로 하여금 기어다니며 뱀과 돼지보다 비천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오히려 그 덕분에 사람들은 또한 경멸, 크나큰 경멸을 배우기도 한다. 이 때 경멸은 자기 안의 노예적 존재, 즉 힘의 의지를 잃어버리고 타인의 지배에 굴종하는 자신에 대한 경멸이며, 나아가 도시와 나라들, 즉 굳건하게 세워진 기존의 관습과 제도의 지배에 굴종하는 자신에 대한 경멸이다. 건강한 지배욕은 주인으로서의 자신을 되찾을 수 있도록 만든다. (W 발제문)

  앞에서(<자기극복에 대하여>에서) 사람들은 자기보다 약한 자 위에 군림하며 힘에의 의지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자기보다 강한 자에게 복종하곤 한다고 말했다. “조아리고 전전긍긍하는 것은 이렇게 자기보다 강한 자에게 복종하는 것이라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 그 뒷 문장과 연결시키려면 강한 자에게 꼭 그런 것이라기보다는 기존의 가치관/세계관에 복종한다고 해석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렇게 복종하는 자기 자신을 참을 수 없게 될 때 크나큰 경멸의 소리가 터져나오면서 기존의 가치관/세계관에 물렀거라하고 호통을 치게 된다. (교수님)

 

지배욕: 그런데 높은 자가 아래로 내려와 권력을 갈망할 때, 누가 그것을 탐욕이라고 부를 것인가! 참으로 그러한 갈망과 하강에는 그 어떤 병적인 것도 탐욕적인 것도 없거늘!

Passion for power: but who would call it passion, when the height longs to stoop for power! Truly, nothing sick or diseased is there in such longing and descending!

Herrschsucht: doch wer hiesse es Sucht, wenn das Hohe hinab nach Macht gelüstet! Wahrlich, nichts Sieches und Süchtiges ist an solchem Gelüsten und Niedersteigen!

: 지배욕이 좋음이 되는 때는 바로 높은 자가 아래로 내려와 권력을 갈망할 때이다. 백승영은 플라톤이 말하는 철학자 왕의 경우를 예로 들어 설명한다. 철학자 왕은 진리를 추구하는 자족적 삶에서 행복을 구하지만, 그런 행복을 뒤로 하고 폴리스 시민의 삶을 위해 통치한다. 그가 갖는 권력은 탐욕이 아니며 선사하는 덕이다. (W 발제문)

 

[...] 이런 신체와 영혼이 누리는 자기희열은 스스로를 이라고 일컫는다. // 이 자기희열은 좋음과 나쁨이라는 말로 자신을 감싼다. [...]

Of such bodies and souls the self-enjoyment calls itself "virtue." // With its words of good and bad does such self-enjoyment shelter itself as with sacred groves;

Solcher Leiber und Seelen Selbst-Lust heisst sich selber: "Tugend." // Mit ihren Worten von Gut und Schlecht schirmt sich solche Selbst-Lust wie mit heiligen Hainen;

: 차라투스트라는 자기 자신, 즉 행위자가 기준이 되는 비도덕주의적 입장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자기희열은 그 자체가 덕이며, 그것이 좋음과 나쁨의 기준이 된다. 행위 자체가 아니라 행위자, 즉 나에게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 그것이 바로 덕인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복된 이기성을 가질 수 없는 조건, 즉 모든 노예근성을 경멸한다. 노예근성은 자신이 아닌 다른 목적을 위해 자신을 버리는 행위이다. 도덕주의에서 선한 행위인 인내 역시 자신을 버리는 행위이며, 차라투스트라에게서는 도덕적 가치를 갖지 못하는 나쁨이다. 비겁함은 힘의 의지를 잃고 자기 자신을 지키지 않는 행위이므로 역시 나쁜 것이다. 그러나 이렇듯 자신을 지키지 못하는 인내와 비겁함이 오히려 도덕주의 아래에서 선한 것으로 여겨지며 이기성을 반대로 악한 것으로 몰아갔다. 도덕주의의 영향으로 비겁함을 체화한 자들은 결국 세상에 지치기 마련이며 자기 상실, 즉 유한한 세계에서의 자기 존재를 버리고 하나님의 나라, 초월적 세계로 떠나가기를 소망하게 되었다. (W 발제문)

  백승영과 W가 말하는 좋음과 나쁨”(GutSchlecht)도덕의 계보학에서 선과 악(GutBöse)의 대립 개념이다. 선과 악이 우리말로 좋음과 나쁨이기 때문에 두 개념쌍이 어떻게 구별되는지 분명치 않은데, “좋음과 나쁨탁월함과 저열함으로 번역하면 의미가 더 분명해진다. 나폴레옹은 노예도덕의 관점에서는 악(bose)하지만, 군주도덕의 관점에서는 탁월하다(gut).

  “Lust”는 욕망, 환락이라는 의미이다. “Selbst Lust”자기 향유정도로 번역하고 싶다. 자기를 혐오하고 자기를 버리고자 하는 상태가 아니라 자기에 대해 긍지를 가지면서 자기에 대해 만족하는 상태이다. 건강한 이기심을 갖는 인간, 자기를 사랑하는 인간이 갖는 자기 희열을 의미한다. 자기에 대해서 기쁨을 느끼는 인간, 자기 삶을 향유할 줄 아는 인간은 맹세를 요구하는 소심한 불신이나 지나치게 불신하는 지혜를 천하게 여긴다. 후자는 데카르트 이후의 근대 철학을 가리킬 수도 있고, 일반적인 사람들의 성향을 가리킬 수도 있다. 더 천하게 여겨지는 것은 권력에 굴종하는 자다. 차라투스트라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긍정하고 만족하라고 가르치만 천한 자가 하는 식의 그러한 것을 가르치는 것은 아니다. 천한 자들은 신들과 신들의 발길질 앞에서 노예처럼군다. “신들은 운명이고, “신들의 발길질은 고통에 찬 운명인데, 천한 자들은 그 운명을 노예처럼 수동적으로 받아들인다. 또한 사람들과 사람들의 멍청한 견해 앞에서 노예처럼군다. , 그들은 사람들과 사람들의 일반적인 여론/평판에 휘둘린다. 고귀한 자들이나 초인에 가까운 자들은 천한/천박한 것들을 단호하게 거부한다. 자기를 정말 사랑하는 사람, 건전한 이기심을 갖는 사람의 경우 이런 식의 성격을 가진다. 이기심이라는 것도 병적인 탐욕으로 나타나는 이기심이 있고,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행복에 넘치고, 그 행복을 사람들에게 나눠주려는 이기심이 있다. 우리의 과제는 이기심이라든가 육욕, 지배욕을 타부시하고 근절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건강한 것으로 승화시키는 것이다. (교수님)

 

 

(수업 : 박찬국, <존재론연습> (20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