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현대대륙철학 일차문헌

[니체] 「건강을 되찾는 자」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3부 13장)

현담 2023. 6. 2. 13:43

*건강을 되찾는 자(the convalescent, der Genesende) : ‘건강을 되찾는 자는 영원회귀 사상과 이에 내재된 위험, 즉 허무주의(Nihilismus, nihilism)를 다룬다. 차라투스트라는 허무주의와 정면으로 대결하면서 고통과 역겨움(‘아프구나!’, ‘메스껍다’)을 겪지만 이를 극복하고자 한다. 즉 차라투스트라는 3환영과 수수께끼에 대하여에서 허무주의를 상징하는 검은 뱀에 의해 공격당하지만 그 뱀을 물어뜯어 뱉어내는 양치기와 같은 일을 겪는다. 따라서 건강을 되찾고 있는 자는 차라투스트라이다. (Y 발제문)

 

*심연의 사유(abysmal thought, abgründlicher Gedanke) : 자신의 동굴로 돌아온 차라투스트라는 영원회귀 사상을 깨우고자 시도한다. 영원회귀 사상은 차라투스트라의 외부에 있지 않고 그의 깊은 내부 즉 심연에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아직 세상에 널리 퍼지지 않은 채 잠재되어 있는(‘잠들어 있는’) 영원회귀 사상을 깨우는 수탉이자 새벽이다. 달리 말해 차라투스트라는 영원회귀의 교사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이 무덤, 생명력이 부재하는 상태도, ‘장님과 같은 맹목적인 상태(기독교를 믿거나 노예 도덕을 따르는 것 등)도 낫게 만들 만큼 뛰어난 교사임을 자부한다. 영원회귀 사상은 완전히 깨어나서(‘를 모두 뜨고) 스스로 말해야 하며, 한 번 깨어났으면 영원히 깨어 있어야 한다. 달리 말해 영원회귀 사상은 세상에 영원토록 영향을 끼쳐야 한다. 백승영의 해석(2022b)에 따르면 니체는 여기에서 바그너의 오페라 <<니벨룽겐의 반지>> 3<지그프리트>에서 신들의 우두머리인 보탄(Wotan)이 대지와 지혜의 여신인 에르다(Erda)를 소환하지만 다시 잠들게 만드는 장면을 패러디한다(‘증조모들을 깨워놓고 계속 주무시라고 말하는 것은 내 방식이 아니다!’). 니체는 바그너의 경우에서 <지그프리트>의 플롯을 비판한 바 있다. (Y 발제문)

  영원회귀 사상은 한두번 자각해서는 안 되고 삶 전체에 걸쳐서 고수해야 한다. “세상에 영원토록 영향을 끼쳐야 한다는 해석까지는 다소 과도하다. ‘항상 내가 영원회귀 사상에 따라서 살아야겠다하는 결의를 의미하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이 무난해 보인다. “증조모들을 깨워놓고 계속 주무시라고 말하는 것은 내 방식이 아니다!”라는 말은 영원회귀 사상을 깨달았지만 다시 잊어버리고 기존의 가치관에 따라 사는 건 별 의미가 없다는 의미이다. (교수님)

 

*둥근 고리(circuit, Kreis) : 차라투스트라에 따르면 생은 곧 영원회귀(‘둥근 고리’)이며 고통이다. 영원회귀 사상에 따르면 삶에서는 가장 고통스러운 일들을 포함해 이미 일어났던 모든 일이 동일하게 반복되므로 삶은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또한 우리가 계속해서 살아간다 해도 생은 과거와 달라질 것이 없다. 따라서 우리는 영원회귀 사상과 대면하면서 허무주의에 빠질 위험에 처해 있다. 영원회귀 사상이 가장 깊은 심연의 사유인 것은 그것이 차라투스트라의 내면에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영원회귀 사상에 위험, 즉 허무주의의 가능성이 내재되어 있음을 암시하기도 한다. (Y 발제문)

  원환은 영원회귀사상을 가리킨다. 그런데 영원회귀사상은 꼭 어두운 면이 아니라 긍정적인 면까지 다 포함한다. 원환은 영원히 다시 돌아오는 생 자체다. 생은 고통과 함께 기쁨도 포함한다. 이원론적 사고방식은 수직선으로 상징될 수 있다. 수직선 위에는 영원한 행복이 있고, 수직선 밑에는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 반면 원환은 중심에서 둘레에 있는 모든 점은 같은 거리에 있다. 모든 순간순간이 영원한 의미로 충만해 있는 것을 상징한다. (교수님)

 

*이레(seven days, sieben Tage) : 차라투스트라는 영원회귀 사상과 대면한 뒤 정신을 잃고 7일 동안 앓는다. 7일의 회복 기간은 <창세기>에서 기독교 신이 6일 동안 세계를 창조한 것을 연상시킨다. 이는 니체가 영원회귀 사상을 세계의 창조만큼이나, 어쩌면 그것보다 더 위대한 것으로 보고 있음을 암시한다. 차이가 있다면 차라투스트라의 회복은 신의 창조보다 하루가 더 걸린다. 또한 기독교 신은 고통받지 않는 데 비해 차라투스트라는 사정없이 고통받으며, 이는 삶과 창조가 필연적으로 고통을 수반한다는 니체의 사상을 담고 있다. 백승영(2022b)에 따르면 창조자가 하루라도 더 그것을 체험하면서 고통받을 때 창조물은 더 많은 지혜를 담게 되므로, 영원회귀 사상은 기독교 신이 창조한 세계보다 더 나은 창조물이다. (Y 발제문)

 

*두 마리의 어린 양(two lambs, zwei Lämmer) : 우선 독수리가 양들을 양치기에게서 힘겹게 빼앗아 왔다는 표현은 기독교 등 전통적인 가치로 인해 인간들이 영원회귀 사상을 받아들이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는 뜻으로 보인다. 백승영(2022b)에 따르면 두 마리의 양들은 영원회귀 사상에 의해 희생되는 두 부류의 인간, 위대한 인간과 왜소한 인간을 상징한다. 위대한 인간과 왜소한 인간은 달라 보이지만 사실 위대한 인간 역시 알고 보면 왜소하다. 앞선 장들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아무리 위대하거나 악한 인간도 그 위대함이나 악함의 수준이 충분치 않음을 안타까워한 바 있다. 달리 말해, 위대한 인간과 왜소한 인간 둘 다 아직 초인(Übermensch)이 되지 못했다. 그러므로 아직 초인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는 영원회귀 사상으로 인해 허무주의에 빠질 가능성을 가진다. (Y 발제문)

  1) 크게 의미를 부여해야 할 말인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2) 백승영 식으로 해석도 가능하다. 1) 문자 그대로 읽으면 독수리가 차라투스트라의 허기를 채울 음식으로 두 마리 양을 갖다 놓은 것이다. 2) “위대한 인간은 위대하지도 않지만 위대한 척하고, 사람들이 위대하다고 떠받드는 인간들, 예컨대 지상의 왕이나 교황과 같은 사람들을 가리킨다. (교수님)

 

어떤 새로운 깨달음이, 신맛을 내는 무거운 깨달음이 그대를 찾아오기라도 했는가? 발효된 반죽처럼 그대는 누워 있었고, 그대의 영혼은 부풀어 올라 모든 가장자리를 넘어 팽창했으니.

Did perhaps a new knowledge come to you, a bitter, grievous knowledge? Like leavened dough you lay, your soul arose and swelled beyond all its bounds.

Kam wohl eine neue Erkenntniss zu dir, eine saure, schwere? Gleich angesäuertem Teige lagst du, deine Seele gieng auf und schwoll über alle ihre Ränder. -

: 차라투스트라는 영원회귀 사상이 품고 있는 허무주의의 가능성(‘무거움신맛’) 때문에 고통을 겪는다. 동물들은 차라투스트라의 상태를 팽창하는 발효된 반죽에 비유한다. 이 표현은 차라투스트라가 생명력을 잃었음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힘에의 의지(Wille zur Macht)에 의해 자기 자신을 극복할 가능성 역시 가지고 있음을 나타낸다. 세계 또한 영원회귀 사상으로 인해 허무주의에 빠질 가능성을 가지지만 스스로 허무주의를 극복할 능력 역시 갖추고 있다. (Y 발제문) 영원회귀 사상의 어두운 면, 받아들이기 어려운 면을 신맛을 내는 무거운 깨달음이라 표현하고 있다. “발효된 반죽은 그런 깨달음에 의해서 힘들어하면서 반죽처럼 누워있는 차라투스트라를 묘사한다. 차라투스트라는 그런 깨달음에도 영원회귀 사상을 받아들이려고 하면서 영혼이 고양된다(“그대의 영혼은 부풀어 올라 모든 가장자리를 넘어 팽창했으니.”). (교수님)

 

*정원(a garden, ein Garten) : 세계가 차라투스트라의 정원이라면 차라투스트라와 세계는 서로 같은 뜻을 가지고 있을 것이며, 둘 모두 허무주의를 극복할 치유력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독수리가 차라투스트라를 위해 가져온 음식 가운데 과일과 약초, 솔방울 등은 이러한 치유력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Y 발제문)

  “정원을 허무주의를 극복할 치유력을 상징한다기보다는, 영원회귀 사상을 흔쾌히 받아들인 사람에게 나타나는 세계의 밝은 모습을 상징한다. 차라투스트라가 영원회귀 사상의 어두운 면을 보면서 너무 힘들어하고 고통받고 있으니, 동물들은 영원회귀 사상을 받아들인 사람한테 나타나는 세계의 아름다움과 충만함을 이야기하면서 차라투스트라에게 힘을 주려 한다. 그러나 차라투스트라는 동물들이 영원회귀 사상을 제대로 깨치지도 못했으면서 깨친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서 혼을 낸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 차라투스트라는 동물들이 세계의 밝은 면을 이야기하는 데에서 위로를 받기도 한다. (교수님)

 

말이 있고 소리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인가. 말과 소리는 영원히 갈라져 있는 것들 사이에 놓여 있는 무지개이자 가상의 다리가 아닌가? // 개개의 영혼에는 제각각 다른 세계가 속한다. 각각의 영혼에게 다른 영흔들은 배후세계지. // 가장 비슷한 것들 사이에서 다름 아닌 가상이 가장 아름답게 거짓말을 한다. 가장 작은 틈이 다리를 놓기에는 가장 어렵기 때문이다. // 내게 어찌 나의 바깥이 있을 수 있겠는가? 바깥은 없다! 그런데 온갖 소리를 들으면서는 이 사실을 잊고 만다. 잊는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인가!

How charming it is that there are words and tones; are not words and tones rainbows and seeming bridges between the eternally separated? // To each soul belongs another world; to each soul is every other soul a back-world. // Among the most alike does semblance deceive most delightfully: for the smallest gap is most difficult to bridge over. // For me - how could there be an outside-of-me? There is no outside! But this we forget on hearing tones; how delightful it is that we forget!

Wie lieblich ist es, dass Worte und Töne da sind: sind nicht Worte und Töne Regenbogen und Schein-Brücken zwischen Ewig-Geschiedenem? // Zu jeder Seele gehört eine andre Welt; für jede Seele ist jede andre Seele eine Hinterwelt. // Zwischen dem Ähnlichsten gerade lügt der Schein am schönsten; denn die kleinste Kluft ist am schwersten zu überbrücken. // Für mich - wie gäbe es ein Ausser-mir? Es giebt kein Aussen! Aber das vergessen wir bei allen Tönen; wie lieblich ist es, dass wir vergessen!

: 영원회귀 사상에 대한 동물들의 생각은 차라투스트라의 생각과 일견 유사하다. 때문에 동물들이 말할 때 세계는 그와 뜻이 같은 차라투스트라의 정원이 될 가능성을 가진다. 차라투스트라가 인간 세상에 갔을 때 그는 철저하게 혼자였으므로 세계는 그의 정원일 수 없었다. 그러나 사실 동물들과 차라투스트라의 생각은 서로 다르다.

  이를 암시하기 위해 니체의 언어철학이 소개된다. 니체에 따르면 인간은 힘에의 의지에 의해, 그리고 언어가 삶에 필요하기 때문에 -인간은 사자 등 자연의 다른 생명체들에 비해 미약하기 때문에 살아남기 위해 다른 인간들과 연합해야 하는데, 이때 언어가 필요하다- 언어를 만들어낸다. 이렇게 만들어진 언어는 사물의 본질과 무관한 일종의 오류(‘거짓말’, ’속임수’)이다. 언어는 서로 다른 것들을 연결하는 듯 보이지만(‘무지개’, ‘다리’) 사실 그러지 못하며 아름다운 가상(Schein)’에 불과하다. 이는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첫째, 인간은 언어를 사용해 타인과 대화하지만 타인에 대해 진정으로 알 수 없으며 따라서 타인과 연결될 수 없다. 각각의 인간에게 타인의 내면은 존재할 수 없고(‘내게 어찌 나의 바깥이 있을 수 있겠는가?’) 알 수 없는 배후세계(Hinterwelt)’이다. 둘째, 언어는 여러 상이한 사물들을 하나의 동일한 단어나 개념으로 묶어 사물들을 연결하지만, 그러면서 오류를 범할 수 있다. 특히 사물들이 가장 비슷한 것들일 때 그러하다. 언어는 서로 유사하지만 사실 완전히 다른 사물들을 하나의 동일한 개념 아래 묶으면서 추상화하고 일반화한다. 그러나 인간들에게 언어는 필수불가결하다. 언어가 있기 때문에 인간들은 생각하고 이해하며 소통할 수 있다. 또한 언어를 사용하면서 인간들은 생명력을 얻게 된다(‘사물들로부터 기운을 얻춤을 추게 된다’). (Y 발제문)

  동물들은 영원회귀 사상을 제대로 체화하지 못했으면서, <환영과 수수께끼에 대하여>에서 난쟁이처럼 영원회귀 사상을 체득한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다. 지적으로 영원회귀 사상을 이해하는 것과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언뜻보면 비슷하게 보이는데, 사실 언어라는 가상이 그 틈을 채우고 있을 뿐, 엄청난 거리를 갖는다. 그러나 차라투스트라는 동물들의 말을 듣고 상당히 위로를 받는 것처럼 이야기한다. 물론 하나의 영혼은 다른 영혼들이 어떻게 세상을 느끼고 바라보는지 이해할 수 없다. 자기 자신을 벗어나서 다른 사람들의 영혼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런데 온갖 소리를 들으면서는 타인들과 나 사이의 거리를 잊어버린다. 동물들도 나랑 비슷한 체험을 하고 있구나 착각하게 된다. 그리고 동물들의 말을 들으면서 힘을 얻게 된다. 결국 동물들과 영원회귀 사상을 체득한 자신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지만, 말과 소리에서는 그런 차이가 분명히 안 드러난다, 그러나 말과 소리를 통해서 위로를 얻었다는 이야기이다. (교수님)

 

*존재의 바퀴(the wheel of existence, das Rad des Seins) : 동물들에 따르면 영원회귀 사상이란 동일한 일들(‘존재의 똑같은 집’, ‘존재의 해’)이 영원토록 반복되는 것을 가리킨다. 세계 속의 만물은 계속 생성하고 소멸하며(‘모든 것은 죽고 모든 것은 다시 피어난다’), 서로 이어지고 헤어진다(‘모든 것은 헤어지고 모든 것은 다시 인사를 나눈다’). 동일한 일들이 반복되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매 순간 존재는 시작된다’. 순간들 중에서 유일하게 중심이 되는 한 순간은 없으며 모든 순간은 각자 중심으로 기능한다(‘중심은 어디에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순간은 영원만큼 풍부하다. 백승영(2022b)은 이를 달리 해석하는데, 힘에의 의지들은 자신 혼자서는 존재할 수 없다. 다수의 힘에의 의지들이 참여하지 않으면 그들 사이의 힘싸움은 벌어질 수 없고, 힘싸움 없이 의지는 힘에의 의지일 수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힘싸움에서 질 약한 힘에의 의지조차도 필요하다.

  그런데 영원이라는 오솔길은 굽어 있다는 동물들의 표현은 환영과 수수께끼에 대하여에서 차라투스트라의 비난을 샀던 난쟁이의 표현(’모든 진리는 굽어 있고, 시간 자체가 원이다’)과 흡사하다. 난쟁이와 유사하게 동물들은 영원회귀 사상에 대해 이론적으로 잘 알고 있으나 영원회귀 사상을 체험할 때의 허무주의와 이를 극복할 때 따르는 고통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영원회귀 사상은 전통적인 사상이 그러하듯 논증과 분석을 거쳐 안다기보다는 몸으로 직접 체험하는 것인데, 동물들은 영원회귀 사상을 체험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동물들이 보기에 세계는 만물 자체가 스스로 춤을 추는오직 유희적이기만 한 세계이다. (Y 발제문) 동물들이 영원회귀 사상을 체득하지는 못했지만, 차라투스트라도 영원회귀 사상을 긍정적으로 체화한 사람에게는 세계가 동물들이 말하는 만물 자체가 스스로 춤을 추는 세계로 나타난다고 보긴 한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이 세계가 모래성을 짓고 부수는 유희와 같다고 이야기했다. (교수님)

 

*괴물(monster, Untier) : ‘괴물은 영원회귀 사상에 내재된 허무주의의 가능성을 상징한다. 괴물환영과 수수께끼에 대하여에서 양치기의 목에 들어갔던 검은 뱀과 동일한 상징이다. 차라투스트라는 괴물의 머리를 물어뜯으면서, 즉 허무주의와 정면으로 대결하면서 고통을 겪었다. (Y 발제문) 괴물은 영원회귀 사유의 어두운 측면, 인간을 허무적 위험으로 내몰 수 있는 기능 때문에 붙인 말이다. 3환영과 수수께끼에 대하여에서는 묵직한 검은 뱀으로 표현된 바 있다. 거기서 젊은 양치기가 겪었던 그 일이 이번에는 차라투스트라 자신의 경우로 제시된다. (역주)

 

너희는 이 모든 것을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단 말인가? , 내 짐승들이여, 너희도 잔인하기는 마찬가지인가? 인간들이 그리하듯 너희 또한 내 크나큰 고통을 구경만 하려 했다는 말인가? 인간이야말로 가장 잔인한 짐승이거늘.

And you looked on at it all? O my animals, are you also cruel? Did you like to look at my great pain as men do? For man is the cruellest animal.

Und ihr schautet dem Allen zu? Oh meine Thiere, seid auch ihr grausam? Habt ihr meinem grossen Schmerze zuschaun wollen, wie Menschen thun? Der Mensch nämlich ist das grausamste Thier.

: 차라투스트라에 따르면 인간은 가장 잔인한 짐승이고 특히 자기 자신에게 가장 잔인하므로 고통받으면서 쾌락을 느낄 수 있다. 인간은 심지어 비극과 기독교 서사(‘지옥’, ‘십자가형’) 등 자신에게 고통을 주는 것을 일부러 만들어내어 즐기기도 한다. 인간이 견딜 수 없는 것은 고통 그 자체가 아니라 무의미한 고통이다. 위대한 인간은 자기극복을 추구하면서 고통을 감수한다. 위대한 인간이 고통에 차서 소리를 지르면 왜소한 인간은 바로 달려와 자신은 가질 수 없는 그의 위대함과 고통을 은밀하게 갈망한다. 그러나 노예도덕은 이 갈망동정이라고 정의한다. 왜소한 인간은 삶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고통을 두려워하고 삶과 세계를 비난하지만 사실 그러면서 나름의 쾌락을 느낀다. (Y 발제문)

  차라투스트라는 영원회귀 사상의 어두운 측면에 직면해서 고통스러워하고 영원회귀 사상을 흔쾌히 받아들이기 위한 고통스런 투쟁을 벌인다. 동물들은 그런 고통을 고려하지 않고 영원회귀 사상의 밝은 면을 깨달은 것처럼 이야기한다. 차라투스트라는 동물들에게 너희들은 내가 영원회귀 사상을 받아들이기 위해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제대로 보지 못했다. 아니 바라만 보고 있었다.’라고 질책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고통을 동물들도 느끼기를 기대한 것으로 보인다. 차라투스트라는 동물들에게 너희도 다른 인간들의 고통을 보면서 쾌감을 느끼는 잔인한 존재인 인간들과 비슷하다고 말한다. Y는 여기서 잔인한 짐승으로서 인간이 느끼는 쾌락을 마조히즘적 쾌락으로 해석했지만, 여기서는 새디즘적 쾌락으로 해석해야 한다. 인간이 비극을 즐기는 이유를 니체는 비극적 영웅이 당하는 고통을 보면서 쾌감을 느끼기 위해서라고 보고 있다. “투우도 마찬가지로 소가 겪는 고통을 보면서 쾌감을 느끼기 위해서 즐긴다. 예수의 십자가형도 마찬가지로 신적인 인간이 고통받는 것을 보면서 쾌감을 느끼기 위해 만들어냈다. “지옥은 자신들은 천국에 있을 것이라 생각하면서 지옥에 있는 사람들을 보고 희열을 느낄 그런 사람들이 꾸며냈다. 인간은 이런 비극적인 존재들이 비극을 당하는 것을 보면서 고소해한다는 의미에서 가장 잔인한 짐승이다.

  “위대한 인간이 소리를 지르는 것은 비극적 영웅이 고통을 받는 것이다. 그럴 때 왜소한 인간은 나는 듯 달려오는 이유는 그 장면을 보면서 쾌감 느끼기 위해서이다. 다시 말해, 위대한 인간들이 고통겪는 것을 보면서 왜소한 인간들은 쾌감을 느끼려고 달려온다. “그런 것을 두고 왜소한 인간은 그의 동정이라고 부른다.” , 왜소한 인간들은 동정심에 가득 차서 그 고통을 바라본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쾌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교수님)

 

왜소한 인간, 특히 시인은 얼마나 열심히 혀를 놀려 삶을 탄핵하는가! 들어보라. 하지만 그 모든 탄핵 속에 들어 있는 쾌락을 흘려듣지 말라!

The little man, especially the poet - how passionately does he accuse life in words! Listen to him, but do not fail to hear the delight which is in all accusation!

Der kleine Mensch, sonderlich der Dichter - wie eifrig klagt er das Leben in Worten an! Hört hin, aber überhört mir die Lust nicht, die in allem Anklagen ist!

: 여기서 시인은 염세주의적 시인을 가리킨다. 그는 혀를 열심히 놀려서 삶을 탄핵한다. 그는 삶에 대한 원한을 품었기 때문이다. 삶이라는 것은 정말 무가치하고 허무하다고 말하면서 삶에 대한 잔인한 공격성을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공격하는 데서 그는 쾌감을 느낀다. 염세주의도 삶에 대한 사디즘적 쾌감이다. (교수님)

 

*뻔뻔한 여자(the insolent one, die Freche) : 왜소한 인간의 다른 이름은 말세인(der letzte Mensch) 혹은 허무주의자이다. (‘저 뻔뻔한 여자’)은 왜소한 인간에게 일단 기다리라고 말하면서 그를 스쳐 지나간다. 달리 말해 왜소한 인간은 자신을 극복하면서 삶을 충만하게 살지 못하고 그저 안일하게 삶을 흘려보낸다. (Y 발제문) 뻔뻔한 여자는 삶이다. 왜소한 인간은 염세주의자, 이원론자, 삶을 탄핵하는 자이다. 뻔뻔한 여자인 삶은 이들에게 관심이 없다. ‘너희들이 그렇게 이야기해봤자 삶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라는 의미로 봐야할 것 같다. (교수님)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 가장 잔인한 짐승이다. 그러니 스스로를 죄인’, ‘십자가를 지고 있는 자’, ‘참회자로 부르는 자들 모두에게서, 그러한 불평과 탄핵 속에 들어 있는 환락을 흘려듣지 말라! // 그런데 나 자신은, 나는 이렇게 말하면서 인간을 탄핵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는 것인가? 아 내 짐승들이여 내가 지금까지 배운 것은 다만 이것인데, 인간에게서는 자신의 최선을 위해서는 자신의 최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Towards himself man is the cruellest animal; and in all who call themselves "sinners" and "bearers of the cross" and "penitents," do not overlook the voluptuousness in their plaints and accusations! // And I myself - do, I thereby want to be man's accuser? Ah, my animals, this only have I learned thus far, that for man his most bad is necessary for his best,-

Der Mensch ist gegen sich selber das grausamste Thier; und bei Allem, was sich "Sünder" und "Kreuzträger" und "Büsser" heisst, überhört mir die Wollust nicht, die in diesem Klagen und Anklagen ist! // Und ich selber - will ich damit des Menschen Ankläger sein? Ach, meine Thiere, Das allein lernte ich bisher, dass dem Menschen sein Bösestes nöthig ist zu seinem Besten, -

: 여기서부터는 마조히즘적 쾌감을 다룬다. 인간은 스스로를 죄인으로 여기며 학대하고 참회한다고 하면서 쾌감을 느낀다. 이번에는 자기 자신을 잔인하게 공격하는 데에서, 어떤 면에서는 인간이 자신의 삶을 또 탄핵하면서 쾌감을 느끼는 것이다. (교수님)

  차라투스트라가 예견하는 초인은 왜소한 인간과 대비된다. 초인은 노예도덕, 즉 선악의 가치체계를 뛰어넘어 더 선해지고 더 악해져야만 한다’. 달리 말해 초인은 주인도덕을 추구해야 한다. 차라투스트라가 고통과 비애’, ‘권태를 겪으며 허무주의(‘모든 인간의 무덤’)에 빠진 것은 그가 노예도덕을 추구하기 때문이 아니다. 즉 차라투스트라는 인간의 악에 절망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차라투스트라는 선과 악의 왜소함, 노예도덕의 왜소함에 절망한다. 그리고 왜소한 인간들 역시 영원회귀한다는 사실에 절망한다. (Y 발제문)

  그런데 차라투스트라는 최선을 위해서는 최악이 필요하다라고 말한다. , 지금 자신은 인간을 탄핵하는 것이 아니며 가장 왜소한 인간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영원히 되돌아오는 것을 받아들이려고 한다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에게 있어 영원회귀 사상을 받아들이기 가장 어렵게 만들었던 사실은 왜소한 인간이 영원히 되돌아온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 사실을 받아들임으로써 자신이 더 강해진다고 이야기한다(“인간에게서 모든 최악은 그의 최선의 힘이며, 최고의 창조자에게 그것은 가장 단단한 돌이라는 것”). (교수님)

 

*새로운 노래(new lays, neue Lieder), 새로운 리라(new lyres, neue Leier) : 짐승들은 차라투스트라에게 새로운 노래를 부르라 권한다. ‘새로운 노래는 영원회귀 사상을 담고 있는 노래이다. 여기에는 니체의 음악에 대한 관점이 전제되어 있다. 언어(‘’)는 체험해야만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영원회귀 사상을 담는 데 한계를 가진다. 반면 음악은 매개를 거치지 않고 직접적으로 전달되는 가장 보편적인 언어이다. 니체의 음악에 대한 관점은 음악은 존재의 직접적 표현이라 보았던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노래를 부르라는 동물들의 의견에 동의하지만 그러기 위하여 자신의 영혼과 더 많은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영원회귀 사상이 다음과 같은 난점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영원회귀 사상에 따르면 왜소한 인간과 위대한 인간 모두 동일한 인간으로 다시 살게 된다. 한 개인에 대해서는 그의 가장 탁월한 점과 가장 부족한 점(‘가장 큰 것가장 작은 것’)이 모두 동일하게 반복된다. 만약 그가 이 사실에 절망하여 목숨을 끊는다면 같은 삶과 같은 일이 반복될 것이다. 차라투스트라의 경우 영원회귀의 교사로서 다시 살게 될 것이다. 따라서 한 인간이 영원회귀 사상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가 지금까지 삶에서 겪었던 모든 일들을 다시 동일하게 겪는다 하더라도 삶을 선택하는 일이며, 삶에 내재된 모든 고통까지 긍정하는 일이다. 또한 그가 영원회귀 사상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극복하면서 초인을 지향하기를 선택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영원회귀 사상을 담은 새로운 노래는 오직 새로운 리라’, 즉 초인에 의해 연주될 수 있다. (Y 발제문)

  차라투스트라가 음악 전체를 다 긍정한다기보다는, 음악 중에서도 영원회귀 사상을 체화하지 못하는 데에서 생기는 음악이 있다고 보고 영원회귀 사상을 체화한 음악만을 긍정하는 것 같다. 그는 , 그대들 어릿광대, 손풍금이여, 침묵하라!”라고 동물들에게 말한다. 리라와 손풍금(barrel-organs, Drehorgeln)은 다르다. 손풍금에 맞춰서 부르는 노래는 똑같은 노래라도 참된 정신이 들어가 있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차라투스트라가 부를 새로운 노래새로운 리라를 필요로 한다. (교수님)

 

이제 몰락하는 자가 그 자신을 축복할 때가 왔다. 이렇게 차라투스트라의 몰락은 끝난다.

The hour has now come for the down-goer to bless himself. Thus ends Zarathustra's down-going.

Die Stunde kam nun, dass der Untergehende sich selber segnet. Also endet Zarathustra's Untergang.

: 차라투스트라가 영원회귀 사상과 정면으로 대면한 후 건강을 되찾고 영원회귀의 교사라는 자신의 숙명을 긍정(‘축복’)하게 되는 것은 하나의 극복이다. 이 극복과 함께 서설에서 시작되었던 차라투스트라의 하강(Untergang)’은 끝난다. (Y 발제문) “Untergang”은 산에서 내려오는 차라투스트라의 여정으로 볼 수도 있고, 영원회귀 사상의 어두운 측면에 괴로워하는 몰락의 상태로 볼 수도 있다. 분명치 않고 여러 가지 해석이 열려 있다. (교수님)

 

이렇게 말을 마친 다음 짐승들은 조용히 차라투스트라가 자기들에게 무슨 말을 해주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차라투스트라는 그들의 침묵을 듣고 있지 않았다. 그는 잠들지는 않았지만 잠든 사람처럼 눈을 감고 조용히 누워 있었다. 그 자신의 영혼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던 것이다. 차라투스트라의 그런 침묵을 알아챈 뱀과 독수리는 그를 에워싼 위대한 적막을 존중하여 조심스레 물러났다.

When the animals had spoken these words they were silent and waited, so that Zarathustra might say something to them; but Zarathustra did not hear that they were silent. On the contrary, he lay quietly with closed eyes like a person sleeping, although he did not sleep; for he communed just then with his soul. The serpent, however, and the eagle, when they found him silent in such wise, respected the great stillness around him, and prudently retired.

Als die Thiere diese Worte gesprochen hatten, schwiegen sie und warteten, dass Zarathustra Etwas zu ihnen sagen werde: aber Zarathustra hörte nicht, dass sie schwiegen. Vielmehr lag er still, mit geschlossenen Augen, einem Schlafenden ähnlich, ob er schon nicht schlief: denn er unterredete sich eben mit seiner Seele. Die Schlange aber und der Adler, als sie ihn solchermaassen schweigsam fanden, ehrten die grosse Stille um ihn und machten sich behutsam davon.

: 이 마지막 장면은 짐승들의 생각과 차라투스트라의 생각에 괴리가 있음을 누설한다. 짐승들은 영원회귀 사유의 이론적 부분은 정확히 알고 있다. 하지만 차라투스트라의 고통과 인간의 고통을 헤아리지 못할 뿐만 아니라, 차라투스트라의 숙명이 갖는 위험도 인지하지 못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영원회귀 사유로 자신이 목적했던 바가 과연 성공할 것인지를 아직도 확신하지 못한다. 과연 사람들이 위버멘쉬로 살기로 결단할지에 대해 여전히 자신이 없는 것이다. 이유는 두 가지다. 짐승들의 말대로 그가 영원회귀를 가르치는 스승이자 교사영원히남아, 사람들이 계속 제자로 머문다면, 그래서 스승의 신화’(1선사하는 덕에 대하여)를 계속 파괴하지 못한다면, 그의 시도는 실패하게 된다. 또한 고통 속에서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위버벤쉬로 살기를 결단하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인간 삶과 인간 세상의 참모습은 고통의 연속이다, 한두 번의 고통이라면 결단은 쉬울 수도 있겠지만, 관계세계의 특성상 고통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게다가 홀로 방어하는 것도 녹록지 않기에 어려움은 더 크다. 차라투스트라의 고민은 이런 어려움 때문이며, 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그는 자기 영흔과 대화를 더 해야 한다. (역주)

  “짐승들의 생각과 차라투스트라의 생각에 괴리가 있음을 누설하는 장면임은 동의한다. 그런데 차라투스트라가 사람들이 위버멘쉬로 살기로 결단할지에 대해 여전히 자신이 없는것을 묘사하는 장면은 아니다. 이제 더 이상 차라투스트라의 목적은 동시대인들을 초인으로 살게끔 결단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동시대인들 중 초인으로 살기로 결단할 사람이 거의 없을 것임은 차라투스트라가 산에서 하강한 이후로 차차 인지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그는 영원회귀를 가르치는 스승이자 교사로 영원히 남고자 선택할 것인데, 그는 미래에 자신의 가르침이 미래에 일으킬 파장을 기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차라투스트라는 동시대인들을 어떻게 초인으로 만들지 고민하기 위해 영혼과 대화를 더 해야 한다고 말한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이 겪었던 하강과 그 하강의 과정에서 만났던 온갖 역겨운말세인들이 다시 돌아와도 괜찮다고 스스로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 영혼과 대화를 더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사견)

 
 
(수업 : 박찬국, <존재론연습> (20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