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현대대륙철학 일차문헌

[니체] 「왕들과의 대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4부 3장)

현담 2023. 6. 2. 16:09

*왕들(the kings, die Könige) : 4부는 차라투스트라의 마지막 부로, 니체는 4부를 1-3부와 다르게 사적으로 출판했다. 4부에서는 차라투스트라와 좀 더 높은 인간(Der höhere Mensch)’들이 서로 만나고 대결한다. ‘좀 더 높은 인간들은 천민보다 바람직하지만 결국 초인이 되지는 못한다. ‘왕들과의 대화에서 처음 등장하는 왕들은 좀 더 높은 인간들가운데 일부이다.

  차라투스트라는 그의 숲에서 두 왕들과 그들의 짐을 실은 나귀 한 마리와 마주치고 몸을 숨긴다. 백승영(2022b)에 따르면 두 왕들 중 오른편 왕은 현실 국가의 대표자, 왼편 왕은 기독교 교회의 대표자를 상징한다. 두 왕들은 모두 천민 사회를 떠나왔지만, 현실 국가의 대표자인 오른편 왕만이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을 자신의 입으로 직접 말하고 보다 적극적으로 천민 사회를 비판한다. 반면 기독교 교회의 대표자인 왼편 왕은 기독교와 니체의 관계를 반영하듯 보다 소극적이다.

  왕들은 두 명인데 왜 나귀는 한 마리밖에 없을까? 이 사실을 차라투스트라가 소리내어 말하자 왕들이 차라투스트라의 예절에 대해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면서 이후의 서사가 전개된다. 왕들이 나귀를 공유한다는 사실은 왕들이 같거나 유사함을 암시한다. 니체는 2큰 사건들에 대하여에서 국가와 교회는 유사하다고 말한 바 있다. 또한 왕들이 나귀를 공유한다는 사실은 왕들의 권력이 실질적으로 미약함을 암시한다. 그러나 왕들은 마치 강력한 권력자처럼 보이기를 바라는 듯 화려하게(‘왕관을 쓰고 자줏빛 띠를 두르고 홍학처럼 알록달록’) 꾸미고 있다. (Y 발제문)

  백승영은 왼편 왕과 오른편 왕을 각각 기독교와 현실 국가를 대변하는 사람들로 해석하는데 그렇게까지 해석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여기서 분명히 드러나지 않는다. 어떤 해석자는 각각 프랑스왕과 독일왕이라고도 해석하는데, 그것도 분명치 않다. 나귀는 왕들에게 지배받는 민중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교수님) 왕은 민중 위에 군림하는 자이기에 왕이 타는 나귀를 민중으로 해석하는 것이 일리있다. 뒤에서 왕들이 자신들보다 좀 더 높은 인간을 찾아 나섰고,’ ‘그에게 이 나귀를 끌고 가고 있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나귀는 민중이고, 나귀를 양도하는 것은 자신들보다 훌륭한 인간에게 민중을 지배할 권력을 양도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겠다. (사견)

 

*바른 사회(good society, gute Gesellschaft) : ‘바른 사회란 천민과 노예도덕(’바른 예절’)이 지배하는 사회를 가리킨다. 차라투스트라가 바른 예절(good manners, gute Sitte)’을 갖추지 않았다고 비판하는 것으로 보아 왼편 왕은 아직 어느 정도 노예도덕을 옹호하고 있다. 이는 왼편 왕이 기독교의 대표자라는 해석을 뒷받침한다. 오른편 왕은 왼편 왕의 견해를 반박하는데, 그는 천민 사회가 겉으로 예절바르고 교양 있어 보이지만(‘귀족을 참칭하고 있더라도’) 사실 잘못되었다고 말한다. 천민 사회가 잘못된 것은 생명력의 결핍(데카당스, ’오래된 고약한 질병’), 그리고 이를 노예도덕으로 치료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사실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자들(‘그보다 더 고약한 치료술사’) 때문이다. 기독교는 생명력의 결핍을 노예도덕으로 치료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을 대표한다. 오른편 왕에 따르면 천민 사회에서 가장 고귀한 존재는 농부이다. 이는 풍요로운 자연과 상호작용하는 농부가 천민 사회에서 가장 풍부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는 뜻으로 보인다. 그러나 천민 사회에서는 농부뿐만 아니라 기독교적인 것(‘성자’, ‘노아의 방주’), 귀족적인 것(‘귀공자’), 경범죄(‘건달’), 신문과 언론(‘쇠파리 같은 글쟁이’) 등이 뒤섞여(‘잡탕’) 존재한다. 천민 사회에서 왕들의 조상이 가졌던 강력한 권력은 조상의 옷(‘변색된 선조들의 화려한 옷’)과 같이 변색된 지 오래다. 왕들은 오히려 그들과 결탁해 이윤을 챙기려는 천민들과 공모한다. 왕들은 진정한 으뜸가는 자가 아니지만 그런 척 사기극을 벌인다. 때문에 왕들은 구역질을 느끼고 천민 사회를 떠나온 것이다. (Y 발제문) ‘귀공자는 귀족적인 것이라기보다는 귀족적인 체하는 별볼일 없는 존재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같이 언급되는 것들 모두가 농부와 대비되는 부정적인 존재로 서술되기 때문이다. 발제자가 건너뛴 유대인은 이후에 소상인의 악취라는 말에서 언급되는 소상인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사견)

  오른편 왕이 예절, 예의, 교양, 미풍양속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오른편 왕은 오늘날 사회를 지배하는 예절이 거짓된 예절이다, 겉만 번지르르한 예절이다, 하고 비판하고 있을뿐, 예절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왼편 왕은 노예도덕을 변호하고 오른편 왕은 그렇지 않다고 보기는 어렵다. 차라투스트라의 말을 듣고 왼편 왕이 기분 나빠하면서 염소치기는 사람들과 떨어져서 살아서 무례해진 예의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자, 오른편 왕은 예의가 불필요하고 말하지는 않고, 단지 지금 너무 겉만 번지르르한 예의가 되버렸다고 개탄할 뿐이다. (교수님)

 

*좀 더 높은 인간(the higher man, höherer Mensch) : 비록 왼편 왕이 오른편 왕과 같이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을 직접 말하지는 않지만, 차라투스트라의 말(‘그대들이 서로에게’)이나 두 왕들이 하나의 주체처럼 서술되는 것(’왕들은한목소리로 말했다’)을 볼 때 왼편 왕과 오른편 왕 모두 천민 사회와 노예 도덕에 동의하지 않는다. 사실 왼편 왕과 오른편 왕 모두 그래야만 천민 사회를 떠나올 수 있다. 따라서 두 왕들은 천민과 구별되는 좀 더 높은 인간으로서 차라투스트라에게 환영받는다. 왕들은 차라투스트라와 마찬가지로 좀 더 높은 인간을 찾고 있다. 왕들은 지상에서 최고인 인간이 현실 세계를 지배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이 말은 플라톤의 철인통치론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천민 사회에서 실제로 권력을 잡고 있는 자는 말세인, 혹은 말세인보다 못한 짐승이며 지배적인 덕은 노예도덕(‘천민의 덕’)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왕들이 자신의 가르침을 따르는 데 기뻐하면서 시를 짓는다. (Y 발제문)

  교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왕들이 천민 사회와 노예도덕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있는지는 유보적이다. 둘 다 천민 사회에 질린 자들이고 노예도덕의 부정적인 면을 인지하고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왼편 왕은 아직도 바른 예절운운하면서 차라투스트라를 비판하고 있고, 오른편 왕도 말은 그럴듯하게 하지만 왼편 왕과 같은 나귀를 같이 타고 요란하게 치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직 바른 사회를 벗어나지 못한 것처럼 보이게 한다. (사견)

 

*퇴락(decline, Verfall) : 차라투스트라는 시에서 아폴론의 신탁을 전하는 시빌라(Σβυλλᾰ, Sibylle)(‘술 마시지 않고도 취해버린 무녀’)의 입을 빌어 자기 당대의 천민 사회를 고대 로마에 비유한다. 고대 로마에 기독교가 유입되어 노예 도덕(/)이 주인 도덕(탁월함/저열함), 천민성(유대교, 기독교)이 귀족성(로마)을 이기자 로마는 퇴락한다. 니체는 도덕의 계보에서 노예 도덕과 주인 도덕의 투쟁을 보다 상세히 분석한다. 노예 도덕은 로마의 기독교 공인 이후 로마를 넘어 온 세계를 지배하는 덕이 되고 니체 당대에는 천민 사회를 가능케 한다. 니체는 이를 노예들의 복수라 칭한다. (Y 발제문)

 

*나귀(ass, der Esel) : ‘긴 귀를 가진 나귀는 차라투스트라의 시에 불만을 가지고 -(Y-E-A, I-A)’라고 외치는데, 이후의 장들인 깨워 일으킴나귀의 축제에서 밝혀지지만 -는 기독교의 아멘(Amen)과 같은 역할을 한다. 이후 왕들을 비롯한 좀 더 높은 인간들은 나귀를 기독교 이후의 새로운 우상으로 섬긴다. 따라서 나귀는 주인을 섬기는 노예 도덕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백승영(2022b)에 따르면 나귀는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를 태웠던 나귀를 패러디한 것으로, 니체는 사람들이 예수가 아니라 예수가 탔던 나귀를 섬기게 함으로써 기독교에 대해 모욕적인 의미를 담는다. (Y 발제문) 교수님은 앞에서 나귀를 왕들에게 지배받는 민중으로 해석하였는데, 여기서 발제자는 노예 도덕을 상징한다고 해석한다. 두 해석은 양립가능한 것으로 보이는데 민중은 노예도덕에 찌들어있고 그래서 왕들이 경멸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사견)

 

*평화애호적인 왕들(peaceable kings, friedfertige Könige) : 왕들을 매혹시킨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은 주인 도덕과 힘에의 의지에 의한 싸움, 승리, 그리고 지배를 담고 있다. 주인 도덕에 따르면 힘에의 의지에 충실한 것(‘용감한 것’)이 곧 탁월함이다. 왕들에 의하면 그들의 조상은 끊임없이 힘에의 의지에 의한 싸움을 벌였다. 힘에의 의지에 의한 싸움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한 인간의 내부에서 여러 힘에의 의지들이 우위를 점하고자 벌이는 싸움이다. 이 싸움은 한 인간이 자기 자신을 극복하는 과정이기도 한데, 싸움의 결과 그 인간의 내부에서 가장 강력한 힘에의 의지가 주인 역할을 맡는다. 둘째, 한 인간·단체(국가 등)가 다른 인간·단체와 외부적으로 벌이는 싸움이다. ‘평화애호적인왕들은 조상과 같이 강력한 왕이 되기를 욕망하면서도, 힘에의 의지에 의한 싸움 두 가지 중 어느 것도 벌이지 않는다. 즉 왕들은 자기 자신을 극복하려 하지도, 외부의 세력과 싸움을 벌이지도 않는다. 왕들이 자신보다 좀 더 높은 인간을 찾아 그에게 복종하려고 한다는 것은 그들이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되지 못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또한 왕들은 자신의 외부에 있는 적인 천민들과 정면으로 대결하지 않고 천민 사회로부터 도망친다. 때문에 차라투스트라는 왕들을 마음속으로 비웃는다. (Y 발제문)

 

왕들이 내 동굴에 앉아 기다려준다면 내 동굴에게는 영광이리라. 물론 그대들은 오래 기다려야만 하겠지만! // 그렇지! 기다리는 게 뭐라고! 오늘날 기다리는 것을 배우는데 궁정보다 더 나은 곳이 어디 있던가? 그리고 왕들에게 남아 있는 덕의 전부는, 오늘날 기다렬 수 있음으로 명명되는 그것 아닌가?

It will honour my cave if kings want to sit and wait in it: but, to be sure, you will have to wait long! // Well! What of that! Where does one at present learn better to wait than at courts? And the whole virtue of kings that has remained to them - is it not called to-day: Ability to wait?

Es ehrt meine Höhle, wenn Könige in ihr sitzen und warten wollen: aber, freilich, Ihr werdet lange warten müssen! // Je nun! Was thut's! Wo lernt man heute besser warten als an Höfen? Und der Könige ganze Tugend, die ihnen übrig blieb, - heisst sie heute nicht: Warten-können?

: 평화애호가인 왕들에게 차라투스트라가 인정할 만한, 싸움이나 지배나 통치와 연관된 덕목은 아무것도 없다. 그런 존재들에게 차라투스트라는 최소한 인내심만이라도 갖추라고, 인내하면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으라고 하는 것이다. 그의 말에는 왕들에 대한 조소가 담겨 있지만, 동시에 니체의 현대성 비판도 숨어 있다. 1죽음을 설교하는 자들에 대히여에서는 현대의 문제를 정신적 성숙을 위한 여유와 한가로움을 부끄러움의 대상으로 삼고, 그 대신 기계 같은 움직임과 빠른 태세의 전환을 덕목처럼 간주하는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이렇듯 인내가 부족한 천민적 현대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인내를 덕으로 갖추라고 한다. 왕들이 인내심을 갖추면 그것은 그들의 힘으로 자유정신이 되는 데에서도 발휘될 것이다. 급하게 누군가의 도움을 구하는 대신에 말이다. (역주)

  차라투스트라는 왕들을 자신의 동굴로 초대하고 그들에게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말하는데, 이는 무슨 의미일까? 많은 경우 니체는 인내의(‘오늘날 '기다릴 수 있음으로 명명되는’) 덕을 높이 평가한다. 예를 들어 니체는 1죽음을 설교하는 자들에 대하여에서 근대인들이 정신적 여유를 상실한 채 고된 노동과 속도만을 쫓는다고 비판한다. 니체가 근대를 비판할 때 그 요지 중 하나는 근대인들이 인내의 덕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또한 니체는 독자에게 자신의 책을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읽으라고 말한다. 왕들은 조상이 가지고 있었던 귀족적인 덕 가운데 힘에의 의지와 연관된 덕은 모두 잃어버렸지만, 그나마 인내의 덕은 가지고 있다. (Y 발제문)

  물론 니체가 인내를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대목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서 차라투스트라가 왕들에게 말하는 뉘앙스에 주목할 때, 그가 왕들에게 말하는 인내는 긍정적인 의미가 아닌 것처럼 보인다. “오늘날 기다리는 것을 배우는데 궁정보다 더 나은 곳이 어디 있던가?”에서 차라투스트라는 기다리는 것앞에 오늘날”, 즉 퇴락한 근대를 시간적 배경으로 설정하고, “궁정”, 즉 퇴락한 왕들이 거주하는 곳을 공간적 배경으로 설정한다. 또한 왕들에게 남아 있는 덕의 전부는, 오늘날 기다릴 수 있음으로 명명되는 그것 아닌가?에서 차라투스트라는 기다릴 수 있음이라는 덕을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대신, 근대인들이 기다릴 수 있음으로 명명하는 것을 언급하며 그것이 왕들에게 남아 있는 덕의 전부라고 말한다. 결국 왕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그들이 궁정 속에서 안온하게 지내면서 아무런 자기극복을 하지 않고 그저 하루하루를 안일하게 보낼 수 있는 능력이라는 근대적인 악덕이지 니체가 다른 곳에서 긍정적으로 말하는 인내가 아니다. 그러니 여기서 차라투스트라는 말만 청산유수인 왕들에게 당신들은 입으로는 힘을 위한 투쟁을 숭상하지만 정작 아무런 투쟁도 하지 않는 자들이니, 내 동굴에 가서 당신네들 전문인 기다리기나 하고 있어라.”라고 비꼬고 있다고 해석해야 한다. (사견)

 

 
(수업 : 박찬국, <존재론연습> (20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