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현대대륙철학 일차문헌

[니체] 「가장 추악한 자」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4부 7장)

현담 2023. 6. 8. 20:40

차라투스트라는 어두운 기억으로 빠져들었다. 언젠가 한 번 이 협곡에 섰던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Zarathustra, however, became absorbed in dark recollections, for it seemed to him as if he had once before stood in this valley.

Zarathustra aber versank in eine schwarze Erinnerung, denn ihm war, als habe er schon ein Mal in diesem Thal gestanden.

: 환영과 수수께끼에 대하여에서 커다란 검은 뱀이 목에 걸린 양치기를 보았던 그곳이다. 그 동일한 계곡에서 차라투스트라는 가장 추악한 인간을 만나게 된다. (교수님)

 

*가장 추악한 자(The ugliest man, Der hasslichsre Mensch) : 니체는 왜 이 사람을 가장 추악한 인간이라 부를까? 신이 자신의 추악한 점을 꿰뚫어보는 것은 모든 인간에게 다 적용될 수 있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 사람 같은 경우에는, 스스로 자신을 추악하다고 생각하는 자인데, 추악한 자신을 신이 내려다보면서 너는 오늘도 죄 지었구나. 불쌍한 녀석.’하는 식으로 동정하는 것을 견딜 수 없어서 신을 살해한 자이다. 일반적인 사람들의 경우에는 신이 꿰뚫어볼 때 신에게 용서를 빌고 참회를 한다. 그러고는 신이 자신을 용서했다고 생각하면서 위안을 얻기도 한다. 그런데 가장 추악한 자는 신이 자신을 동정하는 것을 자기 자존심이 허용하지 않았고 신의 동정에서 비롯된 수치심 때문에 신을 죽였다. 그러나 그후에도 그는 자신이 추악한 죄인이라는 인식에 여전히 사로잡혀 있다. 그는 수치심, 그 수치심과 동전의 양면과 같은 자존심 때문에 신을 죽이고 마음의 의지처를 제거해버린 것이다. 결국 여전히 자기 자신을 죄인이라고 생각하지만 마음의 의지처까지 상실해버린 가장 불쌍한 인간이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추악한 인간이라고 표현한 것 아닌가 싶다.

  니체는 즐거운 학문에서 광인의 입을 빌려서 우리는 신을 살해했다, 우리는 신을 살해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우리 인간이 독립적 인간이 되기 위해서 그렇다. 이 사람, 가장 추악한 자도 신을 살해했다는 측면에서 신에게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인 인간이 될 수 있는 소지를 다른 사람에 비해서 훨씬 더 많이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는 자기 내면에 있는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소질, 인간의 잠재력을 아직 깨닫지 못하는 상태에 있다. 기존의 신을 거부했지만 허무주의적이고 염세적인 태도에 사로잡혀 있는 인간이라고 볼 수 있을 듯하다. 고등학교 때 나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기존의 종교와 모든 가치를 거부하고 삶이 허무하다고 생각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나 자신에 대해 긍정하는 것도 아니고 나 자신을 죄인이라 생각하고, 이기적이라고 생각하고, 자학하는 그런 상태가 있었다. (교수님)

 

Q. 가장 추악한 자가 병리적 인간인가? 신으로부터 독립하고자 하는 인간이라는 측면에서 마냥 병리적이라고 해석할 수는 없을 것 같다. (E) (아래는 백승영 역주)

 

가장 추악한 자는 신을 살해히는 병리적 인간에 대한 메타포다. 그는 자기부정적이고 인간적대적이며 세계부정적인 존재이자, 수치심과 원한과 복수욕에 충실한 병리적 존재다. 그의 신의 살해도 수치심과 복수욕이라는 병리성의 소산일 뿐이다. 니체에게 그것은 결코 건강한 신 부정 방식일 수 없다. 그저 병든 인간의 한풀이에 불과해서, 결국 또 다른 믿음의 대상을 찾게 된다(4깨워 일으킴, 나귀의 축제). 그의 신 부정은 실패로 끝나는 것이다. 니체가 그를 인간 중에서 가장 추악하다고 하는 것은 이런 점들 때문이다. (p.517)

 

전형적인 병리적 인간의 전형적인 비틀린 심리다. 자기부정의 심리를 지닌 가장 추악한 자는 자신의 모습을 수치스러워한다. 그런데 어디에나 있고 모든 것을 속속들이 간파하는 신은 그런 모습까지 파고든다. 그러고는 안쓰러워하는 동정의 눈길을 보낸다. 그런데 신의 동정은 그에게는 사랑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에게마저 숨기고 싶은 것을 알아차렸다는 사실 때문에 그는 더 수치스러워하고 분노한다. 그의 수치심과 분노는 목격자 증인을 없애려 한다. 목격자를 남겨 놓는다면 그는 수치심으로 인해 제대로 살아갈 수 없다. 이렇듯 그의 자기부정과 수치심 그리고 복수욕이 신을 살해한다. 이것이 바로 병리적 인간이 수행하는, 병리적 방식의 신의 살해다. 아주 잔인하고도 파괴적인 악의가 만들어낸. (p.524)

 

A. 보다 높은 인간 중 하나이다. 말세인들이나 기독교를 신실하게 믿는 사람보다는 훨씬 높은 인간, 자기에 대한 긍지를 어느 정도 가지고 있으며 신에게 의존하지 않고 자기를 실현하려고 하는 사람이다. 물론 이 사람이 신에 대한 원한이나 복수심을 통해 신 관념을 극복한다고는 이야기할 수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이 사람을 단적으로 병리적인 인간으로 해석하면 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보다 높은 인간의 성격이 잘 안 드러나게 된다. 신의 동정에 대해 수치심을 느끼고 신을 살해했다는 점은 긍정적으로 보아야 할 것인데, 그런 것도 원한이나 복수심에서 비롯되었을 뿐이라고 부정적으로 해석해버리면 이 사람이 왜 높은 인간이냐가 해석이 안 된다. 이 사람이 가지는 문제점은 아직 자기를 죄인이라고 생각하고 자기 안에 악이 많은 추악한 인간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여전히 병적이고 아직 이원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그래도 좌우간 신이 자기에 대해 동정한다는 데에 수치심을 느껴 신을 살해했다는 사실 자체는 긍정적인 현상으로 봐야 할 것이다. 처음부터 병적인 인간이고, 병리적인 방식으로 신을 살해했다고 해석하는 건 문제가 있다. (교수님)

 

*목격자(witness, der Zeuge) : 여기서 목격자는 신이며, 신을 목격자로 생각하는 태도는 고대 그리스의 소피스트들에게서도 볼 수 있다. 곧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법의 감시가 소홀할 때에도 늘 인간을 감시, 목격하고 있는 자가 있다고 함으로써 인간을 위협하기 위해 신을 안출해냈다는 것이다. ‘가 신을 죽인 이유는 신이 를 항상, 그리고 철저하게 꿰뚫어 보는 것을 견디지 못했기 때문이다. 신은 구석구석까지 끊임없이 보는 자여야 한다. 따라서 신은 인간의 추악한 면도 철저히 알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추악함을 보고 뻔뻔스럽게 동정하고 있는 신을 인간은 용서할 수 없었고, 따라서 그를 죽인 것이다. (E 발제문)

 

저들이 나를 뒤쫓고 있다. 그대가 이제 내 마지막 도피처다. 저들이 나를 증오해서 뒤쫓는 것도 아니고, 추적자를 시켜 뒤쫓는 것도 아니다. , 그런 추적이라면 나는 비웃고 자랑하고 기뻐할 거다. // 지금까지 모든 성공은 제대로 쫓기는 자의 것이지 않았던가? 그런데 제대로 쫓는 자는 뒤따르는 법도 쉽게 배우는 볍. 그가 뒤에서 쫓기 때문이지! 하지만 나를 쫓는 것은 저들의 동정이다. // 저들의 동정, 바로 그것을 피해 나는 그대에게로 도망친 것이다. , 차라투스트라여, 나를 보호해달라. 그대 내 최후의 도피처여,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챈 유일한 자여.

They persecute me: now are you my last refuge. Not with their hatred, not with their bailiffs; - Oh, such persecution would I mock at, and be proud and cheerful! // has not all success thus far been with the well-persecuted ones? And he who persecutes well learns readily to be obsequent - when once he is - put behind! // But it is their pity- -Their pity is it from which I flee away and flee to you. O Zarathustra, protect me, you, my last refuge, you sole one who divined me:

Sie verfolgen mich: nun bist du meine letzte Zuflucht. Nicht mit ihrem Hasse, nicht mit ihren Häschern: - oh solcher Verfolgung würde ich spotten und stolz und froh sein! // War nicht aller Erfolg bisher bei den Gut-Verfolgten? Und wer gut verfolgt, lernt leicht folgen: - ist er doch einmal - hinterher! Aber ihr Mitleid ist's - // - ihr Mitleid ist's, vor dem ich flüchte und dir zuflüchte. Oh Zarathustra, schütze mich, du meine letzte Zuflucht, du Einziger, der mich errieth:

: 가장 추악한 자는 동정을 피해 차라투스트라에게로 도망쳤다. 그는 자신이 왜 신을 죽였는지를 차라투스트라가 이해할 수 있다고 여긴다. 따라서 차라투스트라가 자신의 마지막 도피처가 되어주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라투스트라가 지나가고자 한다면, 그는 자신이 왔던 길로는 가지 말기를 부탁한다. 그가 걸어 왔던 길은, 자신 또한 부정하고 싶은 자신의 추악한 모습을 보고도 동시에 그 추악한 모습까지도 동정한 목격자를 짓밟아 온 험한 길이기 때문이다. (E 발제문)

  뒤를 쫓는 저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교수님) 가장 추악한 자를 동정하는 자들이다. (E) 그런 자들인데 아직 신을 믿는 자들로 보인다. ‘봐라 말이야, 너는 신을 죽였는데 너무 비참하지 않느냐! 다시 신의 사랑의 품 안으로 되돌아와라.’ 이렇게 말하면서 쫓는 자들이 아닐까.

  쫓기는 자들은 기존의 가치를 부인하는 사람들이다. 쫓는 자들은 기존의 가치를 수호하는 사람들이다. “증오해서 뒤쫓는사람들은 기존의 가치를 무너뜨리려고 하는 자들에 대한 증오로 추적한다. 이런 식의 추적이라면 가장 추악한 자는 오히려 비웃고 자랑하고 기뻐할 것이다.” 제대로 쫓는 사람들은 쫓김을 당하는 자의 새로운 가치를 받아들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바울의 이야기를 연상시킨다. 바울은 정통 유대교를 믿었던 사람들이고, 기독교 신자를 박해했던 사람들이다. 그러다가 예수를 만나서 사람이 변하고 예수의 사도가 되었다. 원래 바울의 이름이 사울이다. 서양에서는 이런 식으로 인간이 완전히 변하는 것을 사울이 바울이 되었다라고도 말한다. 여하튼 기존의 가치를 진지하게 신봉하는 사람이라면 삶에 대해 상당히 진지한 고민을 하는 사람이기에 새로운 가치를 따를 수 있다. 그러나 가장 추악한 자를 쫓는 것은 증오가 아니라 저들의 동정이다. 증오란 적으로 생각하고, 대등한 존재라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동정한다는 것은 자기들이 훨씬 우월한 사람이라 생각하는 것이고, 이런 사람은 변화 가능성이 전혀 없다. (교수님) 덧붙여 가장 추악한 자 입장에서는 그 자신이 스스로 추악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상황에서 신이라는 심리적 안식처를 제거해버렸기 때문에 동정에 가장 취약한 상태일 것이다. 당장 울면서 그들과 그들의 신을 끌어안고 싶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그런 취약한 상태라는 것을 잘 알기에 오히려 더 절실하게 도피하고자 하고 차라투스트라에게 보호를 애원하는 것이다. (사견)

 

거지가 되기에는 나는 너무도 풍부하다. 위대한 것, 무시무시한 것, 가장 추악한 것, 뭐라 형언할 수조차 없는 것을 풍부하게 갖고 있지! 차라투스트라여, 그대가 보인 수치심은 나를 영예롭게 했다!

For that I am too rich, rich in what is great, frightful, ugliest, most unutterable! your shame, O Zarathustra, honoured me!

- dazu bin ich zu reich, reich an Grossem, an Furchtbarem, am Hässlichsten, am Unaussprechlichsten! Deine Scham, oh Zarathustra, ehrte mich!

: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면 이 사람이 마냥 자학에 사로잡혀 있다, 마냥 자신을 추악하다고 생각한다고 보기엔 어렵다. 여러 가지 충동들을 지금 긍정적인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자기혐오에 빠져있으면서 의지처도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한편으로 이런 식으로 긍지와 자존심을 갖고 신을 살해했다는 점에서 말세인이나 왜소한 인간보다 훨씬 높은 인간이자 초인의 가능성을 훨씬 더 많이 갖고 있는 인간이다. (교수님)

 

나는 동정한다며 몰려드는 자들로부터 간신히 빠져나왔다. 오늘날 동정은 주제넘은 짓이라고 가르치는 유일한 자, 바로 그대 차라투스트라를 찾아서! // 신의 것이든 인간의 것이든 동정은 주제넘은 짓이지. 동정은 수치심에 반한다. 돕겠다고 달려드는 저 덕보다는 도와주지 않으려는 것이 더 고귀할 수 있다. // 그런데도 그것, 즉 동정은 오늘날 모든 왜소한 인간들에게서 덕 그 자체로 불리고 있다. 저들은 커다란 불행에도, 커다란 추악함에도, 커다란 실패에도 외경심을 갖지 않지.

With difficulty did I get out of the crowd of the pitiful, - that I might find the only one who at present teaches that 'pity is obtrusive' - yourself, O Zarathustra! // -Whether it be the pity of a God, or whether it be human pity, it is offensive to modesty. And unwillingness to help may be nobler than the virtue that rushes to do so. // That however - namely, pity - is called virtue itself at present by all petty people: - they have no reverence for great misfortune, great ugliness, great failure. //

Mit Noth kam ich heraus aus dem Gedräng der Mitleidigen, - dass ich den Einzigen fände, der heute lehrt `Mitleiden ist zudringlich` - dich, oh Zarathustra! // - sei es eines Gottes, sei es der Menschen Mitleiden: Mitleiden geht gegen die Scham. Und nicht-helfen-wollen kann vornehmer sein als jene Tugend, die zuspringt. // Das aber heisst heute Tugend selber bei allen kleinen Leuten, das Mitleiden: - die haben keine Ehrfurcht vor grossem Unglück, vor grosser Hässlichkeit, vor grossem Missrathen.

: 동정하는 인간은 자기가 동정받는 인간보다 우월한 인간이라 생각하고, 동정받는 인간을 스스로 일어날 수 없는 불쌍한 인간이라 간주하면서 우월의식을 느끼는 사람이다. 그래서 동정은 주제넘은/뻔뻔스런 짓이다. 그보다는 차라리 도와주지 않으려 하는 것이상대방이 스스로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이기에 그 사람을 존중하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돕겠다고 달려드는동정보다 더 고귀할 수 있다.” (교수님)

  차라투스트라 혹은 니체에게 동정이란 고귀한 자와 반대되는 왜소한 인간들이 갖고 있는 덕목이다. 인간은 살면서 고난과 갈등을 필연적으로 겪을 수 밖에 없지만, 동정심이 많은 인간들에게 이 삶의 본질적인 요소들은 부정적인 것이자 없애버려야 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왜소한 자들은 커다란 불행’ ‘커다란 추악함’ ‘커다란 실패에 위대함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며, 삶의 고통을 스스로 극복하려고 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한 채, 동정이 자신에 대한 무시임을 알지 못한 채, 이것이 곧 선한 덕목임을 믿으며 살아가는 것이다. (E 발제문)

 

오늘날 진리라고 일컬어지는 것. 그것은 왜소한 사람 출신이면서 자신을 두고 내가 곧 진리라고 했던, 기이한 성자이자 왜소한 자들의 대변자였던 그 설교자가 했던 말이다. // 그 불손한 자가 이미 오랫동안 왜소한 인간들을 오만방자하게 만들어왔다. ‘내가 곧 진리라고 가르치면서 결코 작지 않은 오류를 가르쳤던 바로 그 자가.

And 'truth' is at present what the preacher spoke who himself sprang from them, that singular saint and advocate of the petty people, who testified of himself: 'I - am the truth.' // That immodest one has long made the petty people greatly puffed up, - he who taught no small error when he taught: 'I - am the truth.'

Und `Wahrheit` heisst heute, was der Prediger sprach, der selber aus ihnen herkam, jener wunderliche Heilige und Fürsprecher der kleinen Leute, welcher von sich zeugte `ich - bin die Wahrheit.` // Dieser Unbescheidne macht nun lange schon den kleinen Leuten den Kamm hoch schwellen - er, der keinen kleinen Irrthum lehrte, als er lehrte `ich - bin die Wahrheit.`

: 왜소한 인간들을 오만방자하게 만들었다는 것은 곧 자만심을 갖게 했다는 것을 뜻한다. 인간은 진리를 소유할 수 없다. 그러나 이 동정은 이제 권력을 얻어, 오늘날 하나의 진리로 칭해지게 되었다. 하지만, 차라투스트라 혹은 니체에게 하나의 진리는 한 시대, 한 세상에 대한 해석일 뿐, 절대적 진리가 될 수 없다. 따라서, 왜소한 인간들의 대변자인 설교자의 독단적 태도를 비난하는 것이다. (E 발제문)

  “기이한 성자이자 왜소한 자들의 대변자였던 그 설교자는 예수이다. 그가 불손한 자인 이유는 그가 자기 자신을 진리라고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진리라고 말하면서 가르쳤지만 결코 적지 않은 오류를 가르쳤다. 발제자는 예수의 가르침이 한 시대, 한 세상에 대한 해석인데 절대적으로 진리라고 이야기했기 때문에 니체가 오류라고 말하고 있다고 보았지만 그렇게 보기는 어렵다. 니체는 그냥 예수의 가르침 자체가 시대를 불문하고 잘못된 것, 노예들의 원한이 담겨있는 이데올로기라고 보는 것이다. 니체는 물론 예수 자신은 노예도덕의 기제에 깔려있는 원한 감정에서 벗어나 있다고 하지만, 기독교는 기본적으로 원한 감정이 승화된 형태, 원한 감정이 피워낸 아름다운 꽃봉오리도덕의 계보에서 말한다. 동정과 이웃사랑 등은 모두 노예적 정신을 가진 사람에게서 비롯되는 것인데 예수는 모든 인간들이 추구해야할 덕목인 것처럼 가르쳤다는 점에서 니체는 그의 가르침을 오류라고 비판하는 것이고, 그런 오류를 절대적인 진리라고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그를 불손하다고 비판하는 것이다. (교수님)

 

이제 그대는 그대 자신에게 그대의 동정을 조심하라고 경고하라! 많은 이들이, 고통받고 있는 자, 확신을 잃은 자, 절망한 자, 물에 빠진 자, 추위에 떨고 있는 자들이 그대에게 오고 있기 때문이다. // 나는 그대에게 나도 조심하라고 경고한다. 그대는 내 최고의 수수께끼이자 가장 고약한 수수께끼를 알아맞혔다. 나 자신이 누구이고 무엇을 했던지를 말이다. 나는 그대를 쓰러뜨린 도끼의 정체를 알고 있다.

You yourself, however, - warn yourself also against your pity! For many are on their way to you, many suffering, doubting, despairing, drowning, freezing ones. // I warn you also against myself. you have read my best, my worst riddle, myself, and what I have done. I know the axe that fells you.

Du selber aber - warne dich selber auch vor deinem Mitleiden! Denn Viele sind zu dir unterwegs, viele Leidende, Zweifelnde, Verzweifelnde, Ertrinkende, Frierende - // Ich warne dich auch vor mir. Du erriethest mein bestes, schlimmstes Räthsel, mich selber und was ich that. Ich kenne die Axt, die dich fällt.

: 가장 추악한 자의 말에는 다음과 같은 점들이 들어 있다. 차라투스트라 부류의 창조자들에게는 동정이 아니라 인간을 단단하게 만드는냉엄한 인간사랑이 필요하다는 것. 차라투스트라가 가장 추악한 자에게 동정을 보이면, 다음 문장부터 소개될 그의 목격자에 대한 복수의 화살을 차라투스트라도 맞게 되리라는 경고. 온갖 유형의 병든 자들을 동정하게 되면, 그들 중 누군가의 수치심은 차라투스트라에게 목격자에 대한 복수의 화살을 쏘게 될 것이라는 경고. (역주)

  복수의 화살을 맞으리라는 경고는 어디서 나오는가? 목격자들에게 복수할 수 있어서 조심하라고 하는 것인가? 이렇게까지 말하는 부분은 텍스트에는 없는 것 같다. 차라투스트라가 동정한다면, 가장 추악한 자가 동정하는 신을 살해했듯이 자존심 때문에 그를 살해할 것이라거나 차라투스트라에게 동정받은 자들이 그에게 복수를 가할 것이라고 보긴 어렵다. 동정심이 차라투스트라를 약화시킬 것이기 때문에 경고하는 것으로 보인다. 동정이란 일종의 자기연민이다. 내가 저 사람처럼 되면 얼마나 힘들까하고 자기를 약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 생각 중에 자기도 약한 존재로 전락하게 된다. 또한 불필요하게 고통이 두 배가 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실제로는 공감을 넘어서 그 사람이 느끼는 고통보다 더 고통을 느낄 수 있다. 대학생 시절 도탄에 빠진 민중을 구한다는 사명을 갖고 막스주의자가 되었지만 정말 도탄에 빠진 사람이 있었을까 싶다. 다들 도탄에 빠져있기보다는 그럭저럭 산다. 그런데 민중의 도탄을 생각하면서 스스로가 도탄에 빠지게 되었다. 결국 동정은 생명력을 저하시키는 감정이기에 조심하라고 경고한 게 아닐까 싶다. (교수님)

 

인간은 어찌 이리도 궁핍하단 말인가!” 그의 심중의 생각은 이러했다. “어찌 이리 추악하고, 어찌 이리 숨 가빠하며, 어찌 이리 숨겨진 수치심으로 가득 차 있단 말인가! // 인간은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고 사람들은 내게 말한다. , 인간의 자기사랑은 어느 정도로 커야 한단 말인가! 얼마나 많은 경멸이 이 자기사랑에 맞서고 있는 것인가! // 여기 이 자 또한 자기 자신을 경멸하는 만큼 자기 자신을 사랑했다. 내 보기에 그는 크게 사랑하는 자이자 크게 경멸하는 자다. // 여기 이 자보다 더 깊이 자기 자신을 경멸할 법한 자를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 그것 또한 높이지. , 이런, 어쩌면 저자가 내가 그 외침을 들었던 좀 더 높은 인간 아닐까? // 나는 크게 경멸하는 자를 사랑한다 하지만 사람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How poor indeed is man," thought he in his heart, "how ugly, how wheezy, how full of hidden shame! // They tell me that man loves himself. Ah, how great must that self-love be! How much contempt is opposed to it! // Even this man has loved himself, as he has despised himself, - a great lover methinks he is, and a great despiser // No one have I yet found who more thoroughly despised himself: even that is elevation. Alas, was this perhaps the higher man whose cry I heard? // I love the great despisers. Man is something that has to be surpassed." - -

"Wie arm ist doch der Mensch! dachte er in seinem Herzen, wie hässlich, wie röchelnd, wie voll verborgener Scham! // Man sagt mir, dass der Mensch sich selber liebe: ach, wie gross muss diese Selber-Liebe sein! Wie viel Verachtung hat sie wider sich! // Auch dieser da liebte sich, wie er sich verachtete, - ein grosser
Liebender ist er mir und ein grosser Verächter. // Keinen fand ich noch, der sich tiefer verachtet hätte: auch Das ist Höhe. Wehe, war Der vielleicht der höhere Mensch, dessen Schrei ich hörte? // Ich liebe die grossen Verachtenden. Der Mensch aber ist Etwas, das überwunden werden muss." - -

: 가장 추악한 자는 신을 살해했지만, 진정으로 신을 살해한 것은 아니다. 그는 신을 살해했지만 여전히 선과 악의 이원적 구성을 따르고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자기 스스로에 대해 추악하다 여기며 부정하고 있는 그 무언가가 오히려 긍정할 수 있는, 생산적인 것일 수 있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자기 자신을 긍정하며 자기 스스로 삶을 살아 나갈 수 있는 용기와 긍지를 가질 때, 비로소 인간은 신을 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가장 추악한 자는 자기 자신을 경멸하며, 더 위대한 자가 되기를 희망한다. 이 점에서 차라투스트라는 가장 추악한 자를, 현재의 자기 자신에 안주하고 있는 인간들보다는 높은 인간이라고 보고 있다. (E 발제문)

  가장 추악한 자가 갖지만 이원론자가 갖지 않는 수치심은 자기가 신에 의해 동정받는 자라는 수치심이다. 이원론자는 자기 본능이나 욕망에 대해서만 수치심을 느낀다. 그러나 가장 추악한 자 또한 자기 자신을 경멸한다고 했을 때는 이원론에 사로잡혀서 자기 본능이나 욕망에 대해서 수치심을 느낀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는 그런 자기 자신을 신에 대한 수치심 아래 깔려 있었던 자긍심으로 뛰어넘으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크게 사랑하는 자이자 크게 경멸하는 자다.” (교수님)

 

니체와 기독교

: 기독교를 니체가 파악한 방식으로 파악할 수 있을지 니체를 떠나서 생각해볼 수 있다. 우리가 기독교라고 말하지만 여러 가지 종류의 기독교가 있고, 기독교를 믿는 사람도 여러 종류가 있다. 니체가 특히 염두에 두고 있는 기독교인은 이원론적 사고방식에 사로잡혀서 마조히즘적인 자기학대를 일삼는 기독교인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은 중세 때나 있었지 요새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예컨대, 성욕 때문에 자기를 죄인이라 생각하고 자기를 학대하는 기독교 신자는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기독교에서도 한편으로는 동정녀 마리아를 숭배하면서 성욕을 죄악시하는 측면이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출산과 탄생을 하느님의 선물이라 생각하면서 긍정적으로 보는 측면도 있다. 근절되지 않는 성욕 때문에 자기학대를 하는 행위는 병적인 현상이며 마조히즘적인 방식으로 신을 믿는 것인데 일반적이지는 않다. 정말 존경하는 기독교인들이 있는데, 그 사람들은 굉장히 밝고 온유하다. 같이 있으면 편하고 따뜻한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 역시 자기자신을 죄인이라 생각하고 죄를 항상 반성하겠지만 신이 자신을 항상 용서하고 사랑한다고 생각한다. 신이 자기를 감시하고 단죄하려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니체가 묘사하는 신의 동정은 상당히 야비한 동정이다. 유튜브를 보면 연예인들이 잘 사는 이야기보다 불행하게 된 이야기를 다루는 영상들이 많이 올라온다. 모 연예인은 이혼했고, 모 연예인은 사업하다가 망했다는 식이다. 이런 영상들은 사람들의 호기심과 동정을 같이 불러일으킨다. 이런 호기심은 악의적인 호기심이고, 이런 동정은 야비한 동정이다. 남의 불행을 보면서 나는 상대적으로 저 사람보다 불행하진 않다라고 생각하며 자기 위로를 하려는 사람들의 심리적 성향에서 비롯되는 호기심이고 동정이기 때문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신의 동정과 사랑은 이런 영상들을 만들어내는 유튜버들과 그것을 시청하는 시청자들의 동정과 사랑과 비슷하게 묘사되고 있다. 하지만 기독교 신을 믿으면서 나름 건강한 삶을 사는 기독교인들이 있다. 그 사람들은 신의 사랑을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신이 항상 자기 곁에 있고 자기는 항상 신의 사랑 속에 있다고 생각하면서 불안에서 벗어난다. 불안에서 벗어나면 마음에 여유가 생겨서 다른 사람들에게 동정이 아니라 충만한 마음에서 따뜻한 말 해줄 수 있고 도움도 줄 수 있다.

  불교에서도 기독교에서처럼 참회를 하고, 하심(下心) 즉 자기를 낮추라고 한다. 나는 그래도 선하게 사는 편이지, 하는 자기에 대한 교만을 갖게 되면 자기를 개선할 여지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자신의 이기심 때문에 자학을 하진 않더라도 그것들을 자각을 할 필요는 있다. 나를 버리고 신의 사랑에 나를 다 맡기겠다든가, 부처의 마음이 나에게 깃들게 하겠다는 식으로 이기심을 버릴 수 있다. 그러면 마음이 훨씬 충만해지고 평온해질 수 있고, 나아가 남에게 자신의 공허함이나 외로움을 달래게 하는 대신 자신의 충만을 나눠줄 수 있다. 자기의 이기심이나 죄성을 자각한다는 것이 반드시 니체가 말하는 것처럼 자기학대에 빠지지는 않는다. 그것은 신에게 귀속되는 무조건적인 사랑과 같은 정신이 자기에게 깃들게 하기 위한 조건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니체는 예수가 그런 무조건적 사랑의 정신을 구현하는 사람으로 보긴 했지만, 예수도 일종의 데카당스, 즉 생명력의 퇴화 현상에 빠져있다고 보았다. 예컨대, 원수에게 왼뺨을 맞으면 오른뺨을 대주는 태도는 생명력이 저하된 인간의 태도라는 것이다. 그런데 꼭 그렇게 봐야할까. 니체가 숭상하는 나폴레옹보다도 훨씬 높고 고귀한 정신에서 비롯된 용서의 태도로 볼 수도 있다. 막스 쉘러는 니체가 기독교 사랑을 오해하고 있다고 비판하는 책을 쓰기도 하였다. 우리는 그런 막스 쉘러의 비판에 귀를 기울여볼만하다.

  결국 니체가 비판하는 기독교는 기독교의 한 일면 아닐까 싶다. (교수님)

 
(수업 : 박찬국, <존재론연습> (20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