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현대대륙철학 일차문헌

[니체] 「세 가지 악에 대하여」 전반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3부 10장 1절)

현담 2023. 6. 1. 12:06

*아침 꿈(morning dream, Morgentraum) : 아침 꿈에 차라투스트라는 바닷가에 어떤 곶에 서서 세계를 저울질하고 있었다. 프로이트식으로 말해서 꿈에서는 의식 차원에서 이뤄지는 여러 은폐들이 사라진다. , 꿈에서는 세상에 의해서 주입받은 세계관, 세간적 이해가 느슨해지는 것이고, 그래서 꿈을 통해서 실상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여기서 니체도 비슷한 맥락에서 꿈에서 세계를 재었고, 꿈에서 본 세계가 진상일 수가 있으니, 꿈에서 깨어난 낮에 꿈에서 세계를 저울질하듯이 가장 악한 것으로 인정받아왔던 것들이 정말 나쁜 것인지 저울질해보겠다고 말한다. (교수님)

 

내 지혜가, 그 모든 "무한한 세계"를 몽땅 비웃어주는, 깨어 있고 웃음짓는 대낮의 지혜가 꿈에게 은밀하게 말을 건네서였을까? 그 지혜는 "힘이 있는 곳에서는 수가 지배자다. 수가 더 큰 힘을 갖고 있다라고 말하니. // 내 꿈은 어찌 그리 확신에 차서 이 유한한 세계를 바라보는지. 새로운 것도 옛것도 욕망하지 않고, 두려워하지도 애원하지도 않으면서. // 마치 저 온전한 사과 하나가, 시원하고도 부드러우며 벨벳 껍질을 지닌 무르익은 황금 사과 하나가 내 손에 주어져 있듯, 세계는 그렇게 내게 주어져 있었다.

Did my wisdom perhaps speak secretly to it, my laughing, wide-awake day-wisdom, which mocks at all "infinite worlds"? For it says: "Where force is, there becomes number the master: it has more force." // How confidently did my dream contemplate this finite world, not new-fangledly, not old-fangledly, not timidly, not entreatingly:- // -As if a big round apple presented itself to my hand, a ripe golden apple, with a coolly-soft, velvety skin: - thus did the world present itself to me:-

Sprach ihm heimlich wohl meine Weisheit zu, meine lachende wache Tags-Weisheit, welche über alle "unendliche Welten" spottet? Denn sie spricht: "wo Kraft ist, wird auch die Zahl Meisterin: die hat mehr Kraft." // Wie sicher schaute mein Traum auf diese endliche Welt, nicht neugierig, nicht altgierig, nicht fürchtend, nicht bittend: - // - als ob ein voller Apfel sich meiner Hand böte, ein reifer Goldapfel, mit kühl-sanfter sammtener Haut: - so bot sich mir die Welt: -

: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이 아침에 꾼 꿈에 대해 이야기한다. 꿈을 통해 세계를 저울로 달아보는 그는 이원론에 바탕한 무한한 세계와 일원론적인 유한한 세계를 대립시킨다. 무한한 초월세계는 마치 차라투스트라가 곶에 발을 딛고 있듯 우리가 발딛고 서 있는 이 곳과 다른 세계로 배후세계론자들에게서는 이곳을 떠나 가야할 이상향, 궁극적인 지향점이다. 그러나 차라투스트라는 새로운 것도 옛것도 욕망하지 않는다. 신화와 종교에 등장하는 또 다른 세계, 과거에 존재했거나 앞으로 다가올 것이라 약속된 유토피아를 꿈꾸며 이 세계를 불완전한 곳으로 배척하지 않는다. 그의 꿈은 이 유한한 세계에 대한 확신이 있다. 그 확신의 근거는 바로 다음 문장에 보인다. ‘온전한 사과 하나’, 그리고 시원하고도 부드러우며 벨벳 껍질을 지닌 무르익은 황금 사과 하나가 내 손에 주어져 있듯’, 세계는 그에게 추상적인 무언가가 아니다. 자신의 신체로 감각할 수 있어 그 온도와 감촉과 무게를 온전히 느낄 수 있는, 그래서 의심할 수 없는 것, 그것이 바로 이 유한한 세계이다.

  또한 이 감각할 수 있는 유한한 세계는 힘의 의지로 가득하다. 백승영은 이 힘에 대한 의지가 하나가 아니라, 다수라는 의미에서 수가 지배자인 것이라고 해석한다. 세계 속의 모든 개체들 각각이 힘의 의지를 가지고 있으며, 이 다수에 의한 힘의 의지 행사를 통해 이 세계가 구성되고 작동하는 것이다. 이러한 다수성은 무한한 세계, 즉 초월세계의 영원한 일자로 궁극적인 목적을 귀속시키는 이원론과 배치된다. , 즉 이 다수성과 다양성이야말로 진정한 세계의 지배자이기 때문이다. (W 발제문)

  힘은 실제로 활동하고 작용하는 에너지로 니체가 염두에 두는 힘은 여타의 물리적 힘이나 심리적 힘이 아니라 힘에의 의지라는 의지의 힘이다. 힘에의 의지는 하나가 아니라, 다수다. 자연 속의 개체들 모두가 힘에의 의지의 장소로, 각자 자신의 힘을 행사하고 싸워가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이 힘씨움은 개체의 내부와 외부에서 동시에 진행되며 이 세상은 그런 힘싸움이 이루어지는 거대한 관계 네트워크다. 이렇듯 힘에의 의지가 이루어내는 세계는 다수(Vielheit) 의 세계이며, 초월세계가 무한성의 세계인 것과 달리 이 세계는 유한성의 세계다. ‘힘이 있는 곳에서는 수가 지배한다라는 것은 이런 뜻이다. (역주)

  무한한 세계가 이원론자들이 이야기하는 피안세계를 이야기한다고 볼 수도 있다. 아낙시만드로스는 아페이론, 즉 무한정자를 이야기하면서, 세계를 무한한 것으로 보았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도 마찬가지로 세계를 무한한 것으로 봤을 것 같은데 그런 걸 의미한다고 볼 수 있을 것도 같다.

  니체는 영원회귀사상과 관련해서 우주적 증명을 할 때 힘에의 의지의 총량이 유한하다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여기서 유한한 세계라고 했을 때는 힘에의 의지의 총량이 유한하다는 것을 일차적으로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니체가 백승영이 말하는 다수성이나 다양성까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적어도 이원론자들이 이 세계를 유한한 세계라 볼 때의 유한한 세계를 여기서 니체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시간적으로 끊임없이 생성소멸하고 영원성이 결여된 덧없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이 세계를 유한한 세계로 본다. (교수님)

 

거기서 축복하는 법을 가르치는 자, 바로 그가 저주하는 법 또한 가르친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가장 저주받은 세 가지는 무엇이었을까? 이 세 가지를 나는 저울에 달아볼 것이다. // 육욕, 지배욕, 이기성. 이 세 가지가 지금까지 가장 저주받아 왔고 가장 고약하게 비방받고 왜곡되어 왔다. 이 세 가지에 대해 나는 인간적인 좋은 저울질을 해볼 것이다.

He who taught to bless taught also to curse: what are the three best cursed things in the world? These will I put on the scales. // Voluptuousness, passion for power, and selfishness: these three things have thus far been best cursed, and have been in worst and falsest repute - these three things will I weigh humanly well.

Wer da segnen lehrte, der lehrte auch fluchen: welches sind in der Welt die drei bestverfluchten Dinge? Diese will ich auf die Wage thun. // Wollust, Herrschsucht, Selbstsucht: diese Drei wurden bisher am besten verflucht und am schlimmsten beleu- und belügenmundet, - diese Drei will ich menschlich gut abwägen.

: 차라투스트라의 꿈은 신의 세계, 즉 초월적인 무한한 세계가 아니라 자신이 발딛고 선 땅의 세계, 인간의 세계를 긍정한다. 그리하여 무한한 세계를 지향하는 배후세계론자들이 악하다고 저주하는 것 셋을 골라 재평가를 시도한다. 저울 한 쪽에 그는 세 가지 질문을 올려놓는다. 각각의 질문에 대한 답이 바로 육욕, 지배욕, 이기성이다. (W 발제문)

  기독교는 축복하는 법저주하는 법을 가르친다. 기독교에서 육욕에 대립되는 것이 순결, 지배욕에 대립되는 것이 겸손, 이기심에 대립되는 것이 이타심이다. 수도사들이 서약하는 것들, 예컨대 순결, 복종, 빈곤, 가난도 후자의 대립항들과 비슷한 부류이다. 기독교에서는 이런 것들을 축복받을 덕으로 가르친다. 이에 반해 전자의 대립항들, 즉 육욕, 지배욕, 이기심은 저주받을 악덕으로 평가한다.

  “인간적인 좋은 저울질을 해볼 것이다.”라는 번역이 어색하다. “인간적으로 좋은 것으로서 저울질 해보겠다.”라고 번역하면 비문은 아닌데, 의미가 여전히 분명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육욕, 지배욕, 이기심은 타락해서 나타날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자연스러운 상태라고 할 수 있는데, 건강한 인간에게 있어서는 좋은 것이다. 건강한 인간의 상태는 자연스러운 상태이다. (교수님)

  텍스트는 육욕, 지배욕, 이기성을 니체의 비도덕주의(Immoralismus)의 기본입장을 적용하여 재평가한다. 그것들은 그 자체로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며, 행위자가 누구인지에 따라 건강한 방식으로 발휘될 수도 병리적 방식으로 발휘될 수도 있다. 그것을 누릴 권리를 가지려면 건강해야 한다. 바로 이것이 텍스트의 1절이 제시하는 유한한 이 세상에서 유한한 인간이 가져야 하는 인간적인 관점이자, 그 관점에서 나오는 정직한 말이다. 텍스트 2절에서는 육욕과 지배욕과 이기성의 건강한 경우와 병리적 경우를 각각 구분하여 병렬시킨다. (역주)

  니체는 도덕의 계보에서 좋음의 기원, 즉 도덕주의가 말하는 좋음이 비롯된 기원을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어린 양들이 커다란 맹금을 매우 싫어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커다란 맹금이 어린 양들을 채어가는 것을 비난할 근거는 되지 못한다. [] 강한 것에게 강한 것으로서 자신을 표현하지 말 것을 요구하는 것, 즉 그것에게 압도하려는 욕망, 제압하려는 욕망, 지배자가 되려는 욕망, 적과 저항과 승리에 대한 갈망을 갖지 말 것을 요구하는 것은, 약한 것에게 강한 것으로 자신을 표현할 것을 요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불합리하다. (박찬국 역, 74-5)

 

니체에게 도덕의 근본원리는 힘의 의지라는 자연성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앞서 저주받은 세 가지, 즉 육욕, 지배욕, 이기성을 유한한 세계의 인간적관점을 적용하여 재평가하겠다고 말했다. 이 때 인간적의 인간이란, 원죄를 가진 신 앞의 인간이 아니라 자연 속의 동물로서 유한한 세계를 구성하는 인간이다. 이러한 인간의 관점에서 도덕은 선과 악이 아닌 좋음과 나쁨의 형태가 된다. 어린 양들이 커다란 맹금을 싫어하는 것은 그들의 목숨을 위협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맹금의 입장에서 어린 양은 생존을 위한 먹이이므로 채어가는 것이 자연스럽고 좋은일이다. 이러한 자연의 원리를 억누르는 것은 불합리하며, 이것이 바로 니체의 비도덕주의의 핵심이다. 바로 이러한 비도덕주의적 관점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육욕, 지배욕, 이기성을 재평가하는 것이다.

  백승영에 따르면 비도덕주의는 도덕적 가치평가의 척도를 행위로부터 행위자로 변경한다. 도덕주의가 특정 행위 자체를 선과 악의 판단 대상으로 삼았다면, 비도덕주의는 누가 그 행위를 하느냐에 따라 좋음과 나쁨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이 때 이 좋음과 나쁨의 행위자는 각각 주인과 노예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비도덕주의적 판단을 니체는 다음 2절에서 저주받은 세 가지를 들어 보여주고 있다. (W 발제문)

 

어떤 다리를 건너 현재는 미래로 나아가는가? 어떤 강제에 의해 높은 것은 자신을 아래로 향하도록 하는가? 그리고 이미 최고로 높은 것에게 더 높이 자라나라고 명하는 것은 무엇인가?

On what bridge goes the now to the hereafter? By what constraint does the high stoop to the low? And what enjoins even the highest still to grow upwards?-

Auf welcher Brücke geht zum Dereinst das Jetzt? Nach welchem Zwange zwingt das Hohe sich zum Niederen? Und was heisst auch das Höchste noch - hinaufwachsen? -

: 1) “미래는 현재의 남녀가 낳아야할 초인적인 아이이다. “어떤 다리는 육욕이다. 육욕은 성적인 욕망의 충족을 넘어 초인을 낫는 길이다. 2) “어떤 강제는 지배욕이다. 자기에 대한 극복, 자기에 대한 지배를 통해 초인의 경지에 이르러 힘에의 의지가 충만한 사람은 그 경지에 아직 도달하지 못한 사람에게 자신의 힘을 아낌없이 베푼다. 이것이 베푸는 덕이자 선사하는 덕이다. 초인의 경지에 올라 거기서 다른 사람에게 덕을 베푸는 것은 모두 지배욕에 속한다. 3) “이미 최고로 높은 것은 이기심이다. 우리 본성인 힘에의 의지를 염두에 두고 있다. 우리의 힘에의 의지는 끊임없이 자기 고양을 요구한다. 1), 2), 3)은 건전한 형태로 나타나는 육욕, 지배욕, 이기심이다. (교수님)

 

 

(수업 : 박찬국, <존재론연습> (20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