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로 지혜로운 자들이여, 그대들을 몰아대고 열렬히 타오르게 하는 것을, 그대들은 “진리의지”라고 부르는가? //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사유가능하게 만들려는 의지. 나는 그대들의 의지를 이렇게 부른다!
"WILL to Truth" do you call it, you wisest ones, that which impells you and makes you ardent? // Will for the thinkableness of all being: thus do I call your will!
"Wille zur Wahrheit" heisst ihr's, ihr Weisesten, was euch treibt und brünstig macht? // Wille zur Denkbarkeit alles Seienden: also heisse ich euren Willen!
: 최고로 지혜로운 자들’은 가치를 정립하는 자들을 의미한다. 좁게는 철학자를 의미한다고도 이해할 수 있는데, 이는 철학자들이 진리에 대한 열망과 추구가 가장 강하기 때문이다. 이제 차라투스트라가 ‘진리의지’의 정체를 밝히고자 한다. ‘진리의지’는 실은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사유가능하게 만들려는 의지’이다. 다른 말로 존재하는 모든 것, 즉 세계를 인식하고 통제하고 지배하려는 의지이다. (S2 발제문)
그대들은 존재하는 모든 것을 먼저 사유가능한 것으로 만들고자 한다. 그것들이 과연 사유가능한 것인지에 대해 근거 있는 불신을 가지고 의심하기 때문이다. // 존재하는 것은 모두 그대들을 따르고 그대들에게로 휘어져야 한다! 그대들의 의지가 바라는 것이 그것이다. 그것들은 매끄럽게 되어야 하며, 정신의 거울과 반사로서 정신에게 예속되어야 한다. // 그대 최고로 지혜로운 자들이여. 이것이 그대들 의지의 전부다. 힘에의 의지의 한 경우인 것이지. 그대들이 선과 악에 대해 그리고 가치평가에 대해 말할 때도 마찬가지다.
All being would you make thinkable: for you doubt with good reason whether it be already thinkable. // But it shall accommodate and bend itself to you! So wills your will. Smooth shall it become and subject to the spirit, as its mirror and reflection. // That is your entire will, you wisest ones, as a Will to Power; and even when you speak of good and evil, and of estimates of value.
Alles Seiende wollt ihr erst denkbar machen: denn ihr zweifelt mit gutem Misstrauen, ob es schon denkbar ist. // Aber es soll sich euch fügen und biegen! So will's euer Wille. Glatt soll es werden und dem Geiste unterthan, als sein Spiegel und Widerbild. // Das ist euer ganzer Wille, ihr Weisesten, als ein Wille zur Macht; und auch wenn ihr vom Guten und Bösen redet und von den Werthschätzungen.
: 세계는 본디 인간에게 낯선 공간이기에 인간의 삶은 생존마저 문제가 될 정도로 불안정했다. 카오스의 상태에서 벗어나 안정된 삶을 영위하기 위해 인간은 세계를 인식하고자 했고 그 결과 세계는 친숙한 공간으로 변모했다. (S2 발제문) 세계를 왜 사유가능하게 만들고자 하는가? 삶의 안정성을 위해서이다. 무언가 낯설면 우리는 불안과 공포를 느낀다. (교수님)
그러나 사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끝없는 생성 변화의 과정 속에 있는 것이기에 원칙적으로는 정확한 인식이 불가능하다. 때문에 인간은 언어 특히는 개념을 통해 그것들을 대상화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결과적으로 모든 인식은 오류가 되었다.
진리의지는 진리를 열망하고 추구한다는 명목 하에 정신으로 세계를 지배하고자 했다. 이는 진리의지도 힘에의 의지이기 때문이다. 진리의지가 해석적 진리인 오류를 만든 것은 작게는 생존을 위해서이고 크게는 삶의 향상을 위해서이다. 모든 진리는 해석적 진리이다. 힘에의 의지인 진리의지는 끊임없이 새로운 해석을 만들어낼 것이고 이는 가치평가에도 적용된다. (S2 발제문)
관점주의의 기본이 되는 생각이다 ① 인식의 대상인 존재하는 모든 것은 끝없는 생성의 과정 속에 있다 그래서 그것을 ‘과연 우리가 제대로 포착해낼 수 있는지’라는 회의는 ‘근거 있는 불신’이다 그 회의의 결과는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 자체로는 인식가능하지 않다’이다. 그래서 원칙적으로 인식가능하지 않은 것을 고정시켜 잡아내어 우리에게 인식가능한 형태로 만드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다양한 유형의 ‘같지 않은 것을 같게 만드는(Gleichmachen des Ungleichen)’ 작업은 그 대표적인 경우다. 관점주의가 인긴의 인식을 오류라고 선언하는 이유중의 하나는 바로 이것이다. 그런데 ② 이 오류를 차라투스트라는 ‘진리의지’가 만들어낸다고 한다. 진리의지가 오류를 만들어내는 이 아이러니한 상황은 진리의지가 힘에의 의지이기 때문에 발생한다. ③ 힘에의 의지가 이런 전략을 구동하는 것은 ㉠ 세계를 통제하고 제어하고 지배하면서 인간의 생존조건으로 만들기 위해서다, 그렇지 않으면 세계는 우리에게 카오스적 흔란이거나 공포의 대상으로 남게 될 테고, 결국 우리의 생존 자체가 어려워진다. ㉡ 더 나아가 삶의 향상적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서다. 이렇게 힘에의 의지는 진리를 추구한다면서 결국 삶을 위한 유용한 오류(=해석)’를 만들어낼 뿐이다 그것이 도덕적 해석이든, 인식적 해석이든, 여타의 실천적 해석이든 예외는 없다. 그렇다면 ‘진리’라는 것은 불변의 절대 진리일 수 없다. 진리는 해석적 진리로 유용성 정도에 따라 ‘진리로 간주’될 뿐이고, 가변적이다. (역주)
그렇다면 니체 철학도 하나의 오류인가? 즉, 니체의 힘에의 의지 이론 또한 다른 철학적 이론들처럼 하나의 이론이고 하나의 세계에 대한 해석일 뿐인가? 모든 이론은 해석적 오류라고 주장한다면, 자기 이론까지 그 오류에 포함되어 버리기 때문에 상대주의에 빠져버릴 것 같다. 물론 니체는 힘에의 의지가 하나의 가설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어느 정도 실제를 반영하는 가설이라고 이야기해야 니체 철학이 성립하지 않을까. 포퍼는 모든 과학적 이론이 다 가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것은 실제에 가깝고 어떤 것은 멀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힘에의 의지도 가설이기는 하지만 여타의 이론보다는 실제를 반영하는 가설로 보아야 할 것이다. 니체 자신이 생성소멸하는 세계 저편에 영원불멸하는 내세가 있다든가 모든 갈등과 불평등에서 벗어난 유토피아 세계가 존재한다는 가설들과, 생성하는 세계밖에 없으며 갈등과 투쟁 끝이 없다는 자신의 가설을 같은 해석적 오류로 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가설이야말로 사실을 반영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니체 철학을 상대주의와 구별하기 위해 실용주의와 연관시키는 해석이 있다. 이론의 정당성을 삶에서의 실용적인 효과에서 찾자는 것이 실용주의적 입장인데, 니체 철학도 우리 삶에 건강한 힘을 주기 때문에 우리에게 진리가 아니냐는 것이다. 니체 철학을 따른다고 해서 힘에의 의지가 더 강해지는지도 의문이지만, 만약 그렇다 하더라도 거기서 설명이 멈출 수 없다. 왜 니체 철학이 다른 철학보다 삶을 더 건강하게 하는가 하는 질문에 우리는 니체 철학이 사실에 가까워서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어떤 철학적 이론도 실재론을 벗어나면 자가당착의 위험이 있기 때문에 실재론을 벗어나기 어렵다. 진리의지 개념과 연관되어 “모든 철학은 하나의 해석적 오류다.”라는 식의 이야기가 나와서 말하게 되었는데, 자세히 말하자면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릴 것 같아 이만 말을 줄인다. (교수님)
Q : 니체는 관점주의 내에서도 특정 관점이 실제에 가깝다고 말하는 것 같은데, 이런 입장은 그 자신의 생성 소멸의 세계관에 대립하는 것 아닌가? (J2)
A : 건강한 의지의 관점은 특정 관점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타란툴라는 자기 관점이 절대적인 것으로 보고 다른 관점들을 배격한다. 그러나 니체는 자유로운 정신을 이야기한다. 자유로운 정신은 다양한 관점을 시험해보는 정신이며, 그것이 바로 건강한 정신이다. 건강한 정신은 아무 생각도 없이 바로바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판단하는 정신이 아니다. 그것은 다양한 관점들을 고려하고 판단한다. (교수님)
Q : 일반적으로 니체의 인식론을 관점주의로 해석한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니체의 인식론을 관점주의로 다 설명할 수 없다고 본다. 니체의 인식론에 절대적인 진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절대주의적 측면이 있다고 해도 될까? (J)
A : 나도 그런 입장이다. 왜 다양한 관점에서 봐야 하는지 니체에게 물을 수 있다. 니체라면 그렇게 해야 힘에의 의지를 건강하게 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다시, 왜 하필 그렇게 해야 힘에의 의지가 건강하게 되는 것인지 물을 수 있다. 니체라면 어떤 특정한 관점에 사로잡히는 것 보다 다양한 관점을 고려하는 것이 현실을 반영하기 더 적합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사람들의 다양한 관점에 입각한 결정이 사람들의 삶을 건강하게 한다. 이런 식으로 결국 니체가 힘에의 의지를 정당화하려면 실재론을 상정할 수밖에 없지 않나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철저하게 글을 써보지는 않아서 생각이 완전히 정리가 안 됐는데, 한 번 그런 쪽으로 글을 써보고 싶은 생각이 있다. (교수님)
그대들은 아직도 그대들이 그 앞에서 무릎을 꿇을 만한 세계를 창조하려 한다. 이것이 그대들의 마지막 희망이자 도취겠지.
You would still create a world before which you can bow the knee: such is your ultimate hope and ecstasy.
Schaffen wollt ihr noch die Welt, vor der ihr knien könnt: so ist es eure letzte Hoffnung und Trunkenheit.
: 철학자들은 세계를 친숙한 존재에서 권위적인 존재로 변모시켰다. 즉, 그들은 세계를 편의에 따라 인식하다가 이제 세계를 불변하는 가치가 존재하는 곳으로 만들었다. 철학자들은 진리가 해석적 진리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자신이 그 앞에서 무릎을 꿇을 만한 불면하는 절대적 진리를 추구한다. 삶을 위한 진리가 아닌, 진리를 위한 삶을 추구하는 것이다. (S2 발제문)
최고로 지혜롭다는 들은 삶을 위한 인식과 진리가 아니라, 그들이 ‘그 앞에서 무릎을 꿇을’ 인식과 진리를 추구한다. 인식과 진리를 삶보다 앞세우고, ‘진리를 위한 삶’을 당연시한다’. 그들의 ‘진리’는 삶과 무관해도 무방했고, 삶의 요구를 반영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들이 추구하고 섬기려는 진리는 해석적 진리가 아니라, 불변하는 절대 진리였던 것이다 (역주)
앞에서는 철학자가 세계를 개념 체계 안에 사로잡아 그 안에서 안정성을 느낄 수 있는 세계로 만드는, 다시 말해 세계를 자기 앞에 무릎 아래 꿇리는 동학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여기서는 반대로 철학자가 세계 앞에 무릎 꿇는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기실 철학자의 세계는 자기 이론 체계 안에서 구성한 세계이지만, 철학자는 그것이 자신이 구성한 세계라는 점을 깨닫지 못하고 그것이 절대적인 진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는 포이어바흐의 소외 이론과 유사하다. 포이어바흐는 인간이 신을 만들었지만, 역으로 신 앞에 인간이 무릎 꿇는다고 말했다. (교수님)
물론 현명치 못한 자들인 대중은 한 척의 조각배가 떠다니는 강물 같다. 그 조각배에는 가치평가들이 가면을 쓴 채 엄숙하게 앉아 있고.
The ignorant, to be sure, the people - they are like a river on which a boat floats along: and in the boat sit the estimates of value, solemn and disguised.
Die Unweisen freilich, das Volk, - die sind gleich dem Flusse, auf dem ein Nachen weiter schwimmt: und im Nachen sitzen feierlich und vermummt die Werthschätzungen.
: 정립된 가치는 비판적이지 못한 대중에게 그대로 받아들여지고 전파된다. 세상의 가치는 이런 식으로 확립되는 것이다. (S2 발제문)
여기서부터는 이런 내용이다. 최고 현자들, 예컨대 철학지들은 무엇이 인식이고 무엇이 진리인지를 ‘현명하지 못한’ 대중에게 제시한다. 자신들이 만들어낸 해석을 끝없이 변화하는 ‘생성의 강물’ 위에, 마치 변화하지 않는 불변의 진리인 것처럼 ‘엄숙하게 그리고 치장을 가해’, ‘절대 진리이듯’ 상정해 놓는다. 그 위세에 대중도 철학자들처럼 그것 앞에 무릎을 꿇는다. 철학자의 해석을 자신들의 것으로 삼는 것이다. 이런 상황은 대중에 대한 철학지들의 우위와 지배권을 누설한다, 이것을 두고 차라투스트라는 철학자들의 지배의지, 즉 힘에의 의지가 ‘절대진리’를 추구하게 했고, 그것을 가지고 자신들의 힘을 행사하려는 의도가 아니냐고 하는 것이다. (역주)
그대들은 그대들의 의지와 가치를 생성이라는 강물 위에 띄워놓았다. 그 오래된 힘에의 의지를, 대중에 의해 선과 악으로 믿어진 것이 드러내고 있구나. // 그대 최고로 지혜로운 자들이여, 그런 손님들을 조각배에 앉혀놓고 화려하게 꾸미고 자랑스러운 이름까지 지어준 것은 바로 그대들이었다. 그대들이, 그리고 그대들의 지배의지가!
Your will and your valuations have you put on the river of becoming; it betrays to me an old Will to Power, what is believed by the people as good and evil. // It was you, you wisest ones, who put such guests in this boat, and gave them pomp and proud names - you and your ruling Will!
Euren Willen und eure Werthe setztet ihr auf den Fluss des Werdens; einen alten Willen zur Macht verräth mir, was vom Volke als gut und böse geglaubt wird. // Ihr wart es, ihr Weisesten, die solche Gäste in diesen Nachen setzten und ihnen Prunk und stolze Namen gaben, - ihr und euer herrschender Wille!
: 철학자들은 자신의 해석을 생성과 변화의 강물 위에 불변의 절대진리인 것처럼 띄운다. 이에 대중들도 그 앞에 무릎 꿇는다. 철학자들의 해석적 진리를 자신의 절대적 진리로 삼는 것이다. 이는 사실상 철학자들이 대중에 대한 지배로 그들의 지배의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S2 발제문)
철학자들은 자기들이 진리를 추구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니체가 보기에 이 철학자들도 결국은 진리보다 힘을 추구하고 있다. 철학자들은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반영한다고 말하지만 자기의 사유틀에 이 세계를 굴복시키며, 나아가 자신들의 철학을 일반 민중들로 하여금 따르게 하고 그러면서 힘을 만끽한다. 니체는 바그너 같은 음악가도 힘에의 의지를 추구한다고 본다. 바그너는 관중들이 자기 음악에 감동하고 도취하는 모습을 보며 힘에의 의지를 충족시켰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교수님)
강물은 이제 그대들의 조각배를 저 멀리 떠나보낸다. 강물은 떠나보내지 않을 수 없다. 부서진 물결이 거품을 일으키고 노하여 배 밑창에 부딪혀도 문제될 것 없다. // 그대 최고로 지혜로운 자들이여, 강물은 그대들의 위험이 아니다. 그대들의 선과 악의 종말도 그대들의 위험이 아니다. 그대들의 위험은 오히려 의지 자체, 힘에의 의지, 지칠 줄 모르고 생명을 탄생시키는 생의지다.
Onward the river now carries your boat: it must carry it. A small matter if the rough wave foams and angrily resists its keel! // It is not the river that is your danger and the end of your good and evil, you wisest ones: but that Will itself, the Will to Power - the unexhausted, procreating life-will.
Weiter trägt nun der Fluss euren Nachen: er muss ihn tragen. Wenig thut's, ob die gebrochene Welle schäumt und zornig dem Kiele widerspricht! // Nicht der Fluss ist eure Gefahr und das Ende eures Guten und Bösen, ihr Weisesten: sondern jener Wille selber, der Wille zur Macht, - der unerschöpfte zeugende Lebens-Wille.
: 황문수 역시 “그대들의 위험은 시냇물에 있는 것도 아니고, 그대들의 선과 악의 종말에 있는 것도 아니다”라고 백승영과 유사하게 그대들의 위험이 시냇물이나 선과 악의 종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식으로 번역을 했는데, 원문과 영문판을 보면 다소 다른 의미로 보인다. 본인은 “그대 최고로 지혜로운 자들이여, 강물은 그대들의 위험과 그대들의 선과 악의 종말이 아니다.(=그대들의 위험과 그대들의 선과 악의 종말은 강물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의지 자체, 힘에의 의지, 지칠 줄 모르고 생명을 탄생시키는 의지이다.(=의지 자체, 힘에의 의지, 지칠 줄 모르고 생명을 탄생시키는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다)”로 번역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진리는 해석적 진리이기에 새로운 해석에 의해 대체될 수밖에 없다. 기존의 해석을 통해 향상된 새로운 삶은 새로운 해석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강물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강물이 거품을 일으키고 조각배에 충격을 주기도 하지만 실로 큰 위협은 되지 못한다. 강물에게는 가치를 전복할 힘이 없기 때문이다. 가치의 전복은 강물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힘에의 의지 자체에서 오는 것이다. 힘에의 의지의 힘싸움은 가치평가에도 예외 없이 적용된다. (S2 발제문)
발제자가 수정한 번역이 옳다. 철학이 특정한 방식의 가치 평가를 하고 있는데, 그런 가치 평가가 종말에 이르는 이유는 이 세계가 끊임없이 변해서가 아니라 힘에의 의지가 끊임없이 자신을 고양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의지는 어떤 단계에서는 이런 가치 평가, 다른 단계에서는 저런 가치 평가를 한다. 낙타의 정신의 상태, 사자의 정신 상태, 아이의 정신 상태에서 모두 가치 평가가 이루어지는데, 각각의 가치 평가는 다르다. 가치 평가는 의지의 성장과정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교수님)
*생명과 살아있는 것 일체의 특성
(my gospel of life, and of the nature of all living things, mein Wort vom Leben und von der Art alles Lebendigen)
1) 살아있는 모든 것은 복종하는 존재인 것이다.
(All living things are obeying things. Alles Lebendige ist ein Gehorchendes.)
2) 자기 자신에게 복종할 수 없는 존재에게는 명령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Whatever cannot obey itself, is commanded. Dem wird befohlen, der sich nicht selber gehorchen kann.)
3) 복종보다 명령이 더 어렵다는 것이다.
(Commanding is more difficult than obeying. Befehlen schwerer ist, als Gehorchen.)
: ‘살아있는 것들이 입을 닫고 있는 것’은 생명의 특성을 파악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니체에게도 어려웠다. 하지만 니체는 포기하지 않고 온갖 관점에서 관찰했고 끝내는 그 특성을 알아냈다.
1) 살아있는 것은 힘싸움을 통해 복종과 명령의 관계를 결정한다. 힘싸움 자체가 살아있는 것의 특성인 것이다. 이러한 힘싸움은 살아있는 것의 내부와 외부에서 동시에 전개된다. 가장 강한 자도 강한 자가 되려는 의지에 복종하고 있다.
2) 자기 자신에게 복종할 수 없다는 것은 자기지배의 힘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때문에 외부의 힘싸움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고 명령이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3) 명령에는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복종하는 것[자]에 대한 책임까지 따른다. 명령하는 자는 언제나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힘싸움을 진행한다. 자기 자신에게 명령할 때도 예외는 아니다. 자기 자신에게 명령한다는 것은 자신의 내부에 명령하는 부분과 복종하는 부분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시험 공부를 하려는 의지와 유튜브를 보려는 의지가 힘싸움을 하는 것이다. 시험 공부를 하려는 의지가 승리하면 유튜브를 보려는 의지는 그의 명령에 복종할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러한 힘싸움은 끝없이 지속되기에 명령과 복종의 위계질서 역시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사실이다. 때문에 판관은 명령을, 제물은 복종을, 보복은 새로운 힘싸움을 통해 생겨난 새로운 명령을 의미한다. (S2 발제문)
1), 2) 살아 있는 모든 것은 명령과 복종의 관계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은 맞다. 그런데 강한 자도 강한 자가 되려는 의지에 복종한다는 해석까지 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강한 자도 자기 자기 자신이 스스로에게 내린 명령에 복종한다는 의미가 아닐까. 자기 자신을 지배할 수 없는 자는 결국 남의 지배를 받는다. 이런 자는 상당히 생명력이 퇴화한 자이다.
3)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다르게 해석하자면, 자기 자신이 설정한 가치관(‘나는 이렇게 살아야겠다’, ‘이렇게 사는 게 옳다’)에 따라야 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교수님)
살아있는 것을 발견한 곳, 거기서 나는 힘에의 의지를 발견했다. 섬기려는 자의 의지 속에서도 나는 주인이고자 하는 의지를 발견했다.
Wherever I found a living thing, there found I Will to Power; and even in the will of the servant found I the will to be master.
Wo ich Lebendiges fand, da fand ich Willen zur Macht; und noch im Willen des Dienenden fand ich den Willen, Herr zu sein.
: 살아있는 것이 이러한 특성을 가지는 것은 힘에의 의지가 벌이는 힘싸움 때문이다. 힘에의 의지는 언제나 상승과 지배를 원하기에 힘싸움은 필연적이다. 이러한 힘싸움은 끝없이 지속되기에 복종은 저항하는 복종이지 무기력한 복종이 아니다. (S2 발제문) “힘싸움”이라는 용어가 사용된 것으로 보아 백승영의 해석으로 보인다. 그는 모든 복종은 “무기력한 복종”이 아니라 “저항하는 복종”이라고 주장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때 “무기력한 복종”이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다. 병든 인간의 “무기력한 복종”도 분명히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무기력한 복종”도 병리적인 힘싸움으로서 힘싸움의 한 양태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분명해 보인다. (사견)
하나의 힘에의 의지는 모든 힘에의 의지를 대상으로 힘싸움을 벌인다. 때문에 자기보다 강한 자에 대한 복종과 자기보다 약한 자에 대한 명령은 동시에 일어난다. (S2 발제문) 약한 자들도 다 힘을 추구하는데 그 방식은 자기보다 강한 자를 섬김으로써 그의 힘을 빌려 자기보다 약한 자를 지배하는 식이다. 그들도 “이 즐거움 하나만큼은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교수님)
얼핏 보면 힘싸움과 거리가 멀어보이는 “희생”, “봉사”, “사랑”조차도 힘에의 의지가 벌이는 힘싸움이다. 힘싸움처럼 보이지 않는 병리적인 힘싸움도 역시 힘싸움이다. (S2 발제문) 이처럼 강자의 “힘을 훔쳐낸” 약자는 “힘싸움” 없이 힘을 얻으려고 하기에 비겁한 것 아닌가? 아니면 강자가 약자에게 병리적 의미의 “희생”, “봉사”, “사랑”을 해버림으로써 약자와의 “병리적인 힘싸움”에서 패배한 것인가? (사견)
*자기극복(self-surpassing, der Selbst-Überwindung), 몰락(succumbing, Untergang), 굴곡진 길(crooked paths, krumme Wege) : 살아있는 것의 특성인 힘에의 의지는 상승하고 지배하기를 원한다. 때문에 살아있는 것은 언제나 자기극복을 해야 하는 것이다. 힘에의 의지를 포기하는 것은 생명을 포기하는 것이다. 몰락을 선택하는 것은 결코 무기력한 패배가 아니라 자신을 고양시키기 위한 것이다. 끊임없는 힘싸움을 불러오는 힘에의 의지를 이해하는 자는 끊임없이 자기극복을 하는 생명이 가는 길이 평탄하지 않다는 사실 또한 이해할 것이다. (S2 발제문) 여기서 “몰락”은 보다 증대된 새로운 힘을 위한 기존 자신의 가치관의 자발적 몰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교수님)
*생존의지(Will to existence, Wille zum Dasein) : 여기서 니체가 염두에 두는 것은 ① 진화생물학에서 자연과 생명체의 발전의 원동력으로 삼은 생존경쟁(struggle for survival), ② 스피노자의 코나투스(connatus), ③ 쇼펜하우어의 생의지(Wille zum Leben) 이 세 가지다. 여기서 상정되는 ‘힘’이나 ‘의지’는 의지(힘)의 상승운동 및 관계운동을 담고 있지 않다. 즉 힘에의 의지가 아니다. (역주) “존재의지”라는 번역이 더 좋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번역해야 아레에서 등장하는 니체의 간결한 논증이 훨씬 강력하게 와닿는다. (사견)
이유는 이렇다 존재하지 않는 것은 의욕할 수 없으며, 이미 생존하고 있는 것이 어찌 또 생존을 원한단 말인가! [...] 살아있는 것에서 많은 것이 생 그 자체보다 더 높이 평가되고 있다. 그런 평가를 통해 스스로 말을 하는 것이 있으니, 바로 힘에의 의지다!
For what is not, cannot will; that, however, which is in existence – how could it still strive for existence! [...] Much is reckoned higher than life itself by the living one; but out of the very reckoning speaks - the Will to Power!
Denn: was nicht ist, das kann nicht wollen; was aber im Dasein ist, wie könnte das noch zum Dasein wollen! [...] Vieles ist dem Lebenden höher geschätzt, als Leben selber; doch aus dem Schätzen selber heraus redet - der Wille zur Macht!
: 짧고 강력한 논증이다. 존재하지 않는 것은 의욕할 수 없고, 존재하는 것은 이미 존재하고 있는데 존재를 또 욕구할 필요가 없다. 만약 “Dasein”을 “생존”으로 번역하면, 1) 무엇보다, 해당 논증이 “존재하지 않는 것”과 “존재하는 것”을 남김없이(exhaustive) 검토하고 있음이 잘 드러나지 않게 된다. 2) 또한, 니체에게서 “생”이 이미 힘에의 의지로 정의되었기 때문에 긍정적인 뉘앙스를 띠고 있어, 해당 논증이 자기논박처럼 보일까 우려된다. 3) “생존”은 풀어쓰면 “생명의 존속”일텐데, 생명체가 생명의 존속을 의욕한다는 점은 부정하기 힘들다. 밥도 먹고 잠도 자야 초인을 향해 앞으로 나아갈 수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존재”는 “있음/있는 것”인데 있는 것이 단지 있기 위해 의욕한다는 점은 직관적으로 부정된다.
물론 뒷문장에서 “생 그 자체”가 “Dasein”에 대응하기도 하고, “Dasein”이라는 독일어 단어 자체가 ‘생존’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기는 하다. 그렇지만 “Leben selber”가 곧 앞문장에서 다루었던 전혀 의욕할만하지 않은 ‘그저 존재함’이라는 의미로 드러나는 것을 자연스럽게 보이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굳이 “weiterleben” 같은 일상적 단어 대신 철학적 색채가 강한 “Dasein”이라는 단어를 썼다는 점을 살리기 위해서라도 여전히 “존재”로 번역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사견)
“생 그 자체”보다는 “생존 그 자체”로 번역하는 것이 나을 듯하다. (내가 2)에서 우려한 측면을 교수님께서도 그대로 우려하고 있다.) 이미 생존을 하고 있는데 무슨 또 생존을 의지하고 있다는 거냐, 살아있는 것은 단순히 생존을 의지하는 게 아니고 힘에의 의지 증대를 추구한다고 말하고 있다. 진화론이라든가 쇼펜하우어 철학은 모든 생물체들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을 생존과 종족 번식이라고 본다. 그런데 비단 닭만 해도 단순히 생존만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닭장 속의 닭들이 가장 성공적인 삶을 사는 것 아닌가. 비록 좁은 닭장 속에 갇혀 평생을 보내지만 그들은 생존을 보장받고 알도 많이 낳는다. 그러나 우리는 닭장 속의 닭들이 제대로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닭이 그런 식의 생존을 바랄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닭도 닭다운 삶을 추구할 것이다. 이런 식의 사고가 전제되어야 동물권이나 동물해방운동이 의미가 있을 것이다. 단순히 진화론이나 쇼펜하우어 식으로 생각하면 동물들이 현재 사육되고 있는 방식에 대한 비판이 불가능할 것이다. (교수님)
선과 악의 창조자이어야만 하는 자, 진정 그는 우선 파괴자가 되어 가치들을 부숴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 이렇게 최고의 악은 최고의 선에 속하는 것이다. 최고의 선, 그것은 창조적 선이다.
And he who has to be a creator in good and evil - truly, he has first to be a destroyer, and break values in pieces. // Thus does the greatest evil pertain to the greatest good: that, however, is the creating good.
Und wer ein Schöpfer sein muss im Guten und Bösen: wahrlich, der muss ein Vernichter erst sein und Werthe zerbrechen. // Also gehört das höchste Böse zur höchsten Güte: diese aber ist die schöpferische.
: 가치 정립자들이 자신이 정립한 가치로 타인을 지배한다는 사실에서 그들의 힘에의 의지가 드러났다. 그러나 끊임없는 자기극복의 과정에 불변의 가치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다. 가치 정립자들의 “가치평가로부터 더 강력한 위력과 새로운 극복이 자라나고 있다. 거기서 그대들[가치 정립자들]의 알과 알 껍질은 부서지고 있고.”
파괴는 창조의 전제 조건이다. 불변의 가치를 파괴하고 힘에의 의지에서 비롯된 새로운 가치를 세워야 한다. 가치가 전복되면 선악도 전복된다. 최고의 악인 파괴는 이제 창조적 선으로서 최고의 선이 되었다. (S2 발제문)
우리의 진리들로 인해 부숴질 만한 것이라면 모조리 부숴버리도록 하자! 지어야 할 집이 아직도 많지 않은가!
And let everything break up which - can break up by our truths! Many a house is still to be built!
Und mag doch Alles zerbrechen, was an unseren Wahrheiten zerbrechen - kann! Manches Haus giebt es noch zu bauen!
: 니체가 진리를 밝힘으로 인해 많은 나약한 자들이 무너질 것이다. 그러나 진리로 인해 무너질만큼 나약한 자라면 모두 무너뜨려야 한다. (S2 발제문) 나약한 자들이 무너진다고 해석할 수도 있겠고, 기존의 가치들이 무너진다고 해석할 수도 있겠다. (교수님) 맥락상 기존의 가치들이 무너진다는 해석이 더 나은 해석이다. (사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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