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것(rabble, Gesindel) : Gesindel(불량배, 천한 놈, 잡놈, 잡것)은 누군기를 평하하는 단어다(『차라투스트라』에서는 Pöbel(천민)이라는 단어도 사용되기에 Gesindel은 ‘잡것’으로 번역한다), 니체는 인간을 설명할 때 대립법주를 사용하기를 즐기며, 니체의 이런 경향성은 『차라투스트라』가 본격적으로 구상되고 집필되던 시점부터 두드러진다. 그 대립 범주는 ‘건강한(gesund)-병든(krank) 사람’, ‘위대한(groß)-왜소한(klein) 사람’, ‘좀 더 높은(höher)-조야한(verkleiner) 사람’, ‘정신적 귀족(Adel)-천민(Pöbel)’, ‘주인(Herr)-노예(Sklave)’, 제대로 되어 있는(gut-wegkommen)-제대로 되어 있지 못한(schlechtwegkommen) 사람’ , ‘위버멘쉬(Übermensch)-인간말종(letzter Mensch)’ 등 다양하게 제시된다. 잡것이라는 단어는 그 대립 관계에서 후자의 범주에 해당된다. 병들고 별 볼 일 없고 조야한 천민이나 노예, 그래서 제대로 되어 있지 못한 사람인 것이다. 『차라투스트라』에서 비난의 대상이 되는 배후세계론자, 죽음의 설교자, 신체경멸자, 덕 있다는 자, 교양있는 속물, 무리-대중 등등도 모두 잡것이지만, 6장 텍스트에서는 니체 당대의 정치와 문화에서 힘을 행사했던 자 혹은 이념이나 이론, 국가 자체를 겨냥한다. 이들의 존재와 힘은 무리-대중에 그 토대를 두기에, 대중이라는 잡것과 일종의 공생관계를 형성한다. (역주)
잡것은 삶을 부정하고 자기극복을 방해한다. 여기서 잡것은 근대 대중사회의 저열한 인간들을 가리킨다. 텍스트에서 주로 다루는 잡것은 세 가지 유형으로 각각 쾌락을 추구하는 잡것(쾌락을 추구하는 대중), 권력을 추구하는 잡것(대중의 요구에 영합하여 권력을 행사하는 지배자들), 글 쓰는 잡것(대중의 취향에 맞게 글을 쓰는 저널리스트들)이다. 그들은 일종의 공생관계를 형성한다. (S2 발제문)
중역본(중국어 번역본)에서는 잡것이 무엇으로 번역되는가? (교수님) 천민이라 번역된다. (S2) 옛날 세대는 잡것이라는 단어를 많이 쓰긴 했는데 요즘은 잘 안 쓰는 듯하다. 역자는 Pöbel을 천민으로 번역해서 Gesindel을 잡것으로 번역한다고 했는데, 천민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현대적인 번역 같기도 하다.
잡것의 세 가지 유형에서 ‘쾌락을 추구하는 잡것’은 정확히 말하면 쾌락에 탐닉하고 빠지는 잡것이다. 니체는 쾌락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행복을 쾌락과 동일시하고 쾌락을 탐닉하는 자를 천민으로 보았다. 그리고 ‘글쓰는 잡것’은 저널리스트뿐만 아니라 철학자들까지 포함한다. 2부 8절 「유명한 현자들에 대해서」에서 니체는 직접 언급하지는 않지만 칸트와 헤겔, 중세 기독교 철학자들(아우구스티누스, 아퀴나스 등)을 공격한다. (교수님)
*기쁨(쾌락, delight, der Lust) : 삶의 모든 면에 대하여 유보 없이 긍정할 때에만 삶은 비로소 기쁨의 샘이 된다. 진정한 기쁨은 힘에의 의지의 힘싸움에서 비롯되는 끊임없는 자기극복이다. 그러나 잡것들이 마심으로 인해 삶이라는 본디 깨끗한 샘에 독이 퍼졌다. 다시 말해, 저들의 추악한 욕망(“불결한 꿈”), 즉 음욕(갈망, lustfulness, Lüsternheit – 갈망(백승영 역)은 긍정적인 단어로 잡것들에게는 부정적인 단어인 욕정(정동호 역)이나 정욕(황문수 역)이 더 적합하다. 중문판은 음욕으로 번역.)을 쾌락(기쁨)이라 부름으로 인해 쾌락이라는 말마저 독으로 오염되어 그 의미가 변질되었다. (S2 발제문)
Lust는 쾌락, 주로 육체적 쾌락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삶은 Lust의 샘이라고 말했을 때 Lust는 정신적 쾌락까지 다 포괄한다. 니체가 긍정하는 Lust는 자기극복의 쾌감, 아이의 정신이 삶을 긍정하는 데서 오는 기쁨이다. 그런데 천민의 추악한 욕망으로 인해 Lust의 샘이 오염되었고, Lust의 의미가 변질되었다. 천민은 감각적인 욕망에 탐닉한다. 방탕한 천민은 성욕이든 식욕이든 감각적 욕망에 빠진다.
lütern은 ‘음탕한’이라는 의미가 있다. ‘갈망’이라고 번역하면 부정적인 의미가 잘 안 드러나서 발제자가 ‘욕정’이나 ‘정욕’이 더 적합한 번역이라고 말했는데, 차라리 중역본에서 번역한 ‘음욕’이 ‘욕정’이나 ‘정욕’보다 부정적인 의미가 더 확실히 드러내는 듯하다. (교수님)
저들의 눅눅한 심장을 불가에 놓으면 불꽃은 언짧아한다. 잡것이 불가에 다가서면 정신 자체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면서 연기를 낸다. // 저들의 손에서 과일은 들척지근해지고 짓무른다. 저들의 눈길은 과일나무를 바람에 쉽게 부러지게 하고 꼭대기를 시들게 한다.
Indignant becomes the flame when they put their damp hearts to the fire; the spirit itself bubbles and smokes when the rabble approach the fire. // Mawkish and over-mellow becomes the fruit in their hands: unsteady, and withered at the top, does their look make the fruit-tree.
Unwillig wird die Flamme, wenn sie ihre feuchten Herzen an's Feuer legen; der Geist selber brodelt und raucht, wo das Gesindel an's Feuer tritt. // Süsslich und übermürbe wird in ihrer Hand die Frucht: windfällig und wipfeldürr macht ihr Blick den Fruchtbaum.
: 눅눅하다는 말은 열기가 없고 습기가 차 있다는 말이다. 잡것들의 심장은 자기극복을 향한 열정이 없다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불’은 자기극복 내지는 초인의 이상을 실현하려는 열정으로 볼 수 있다. 이때 ‘불꽃이 언짢아한다’는 그런 열정에 비추어봤을 때 잡것들의 심장은 영 시원찮다고 이해할 수 있다. 또한 ‘불’은 자기극복의 의지와 열정을 가지는 사람들로 볼 수도 있다. 이때 ‘불꽃이 언짢아한다’는 잡것들이 이런 사람들을 퇴락시킬 위험이 있기 때문에 이런 사람들이 언짢아한다고 이해할 수도 있다. 쾌락을 잡것이 오염시키는 것처럼 진정한 열정을 가진 사람들도 감각적 쾌락주의에 빠져 타락할 수 있다. (교수님)
잡것이 맺은 결실은 지나치게 달콤하여 상해버리기에 제대로 된 것이 아니다. 심지어 잡것은 생명력 자체를 파괴한다. (S2 발제문) 과일을 삶의 결실, 과일나무를 삶 자체로 볼 수 있겠다. 감각적 쾌락주의는 인간을 망치고 나약하게 만든다. 쾌락을 위해 남한테 굴종한다든가 그러기 쉬우니까. (교수님)
그리고 삶으로부터 등을 돌렸던 여러 사람들, 이들은 실은 잡것에게 등을 돌렸을 뿐이다. 잡것과는 샘물과 불꽃과 열매를 나누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 사막으로 가서 맹수들과 함께 갈증에 시달렸던 여러 사람들, 이들은 다만 더러운 낙타몰이꾼들과 함께는 물통 둘레에 앉고 싶어하지 않았던 것이다. // 파괴자처럼 찾아들었던, 열매가 익어가는 들녘에 우박처럼 찾아들었던 여러 사람들. 이들은 단지 자신의 발을 잡것의 입속으로 밀어 넣어 그 목구멍을 틀어막고자 했을 뿐이었다.
And many a one who has turned away from life, has only turned away from the rabble: he hated to share with them fountain, flame, and fruit. // And many a one who has gone into the wilderness and suffered thirst with beasts of prey, disliked only to sit at the cistern with filthy camel-drivers. // And many a one who has come along as a destroyer, and as a hailstorm to all cornfields, wanted merely to put his foot into the jaws of the rabble, and thus stop their throat
Und Mancher, der sich vom Leben abkehrte, kehrte sich nur vom Gesindel ab: er wollte nicht Brunnen und Flamme und Frucht mit dem Gesindel theilen. // Und Mancher, der in die Wüste gieng und mit Raubthieren Durst litt, wollte nur nicht mit schmutzigen Kameeltreibern um die Cisterne sitzen. // Und Mancher, der wie ein Vernichter daher kam und wie ein Hagelschlag allen Fruchtfeldern, wollte nur seinen Fuss dem Gesindel in den Rachen setzen und also seinen Schlund stopfen.
: 1) 잡것에 대한 역겨움으로 인해 목숨을 끊은 자들을 가리킨다. (S2 발제문) 그렇게 해석하기는 어렵다. 그들은 삶 자체로부터 등을 돌렸다기보다는 천민의 삶으로부터 등을 돌렸다. (교수님) 여기서 등장하는 모든 “여러 사람들”을 같게 해석한다면, 두 번째 “여러 사람들”이 “사막으로 가서 맹수들과 함께 갈증에 시달렸던 사람들”인데, 앞서 「세 변화에 대하여」에서 사막에 있는 사자의 정신이 낙타의 정신과 대비되었으니, “여러 사람들”을 사자의 정신으로 해석해도 될까? (D) 여기서 사자의 정신으로 특정하여 해석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사자의 정신을 포함하여 천민의 삶으로부터 등을 돌린 사람들 정도로 해석하야지 않을까. (교수님) “맹수들과 함께”를 “사자의 정신을 포함하여”로 읽으면 “여러 사람들”을 좀 더 넓게 이해할 수 있겠다. (사견)
2) 더러운 낙타몰이꾼은 데마고그들을 의미한다. 이들은 낙타의 정신을 지닌 대중들을 이끈다. ‘사막으로 가서 맹수들과 함께 갈증에 시달렸던 여러 사람들’은 잡것에 대한 역겨움으로 인해 사막으로 가 맹수들과 함께 힘겨운 삶을 산 자들이다. 이들은 자유를 향한 갈증을 느끼는 고양된 정신을 가진 자들이었다. (S2 발제문)
3) ‘열매가 익어가는 들녘’은 ‘모든 곡식 밭에’(황문수 번역, 원문은 allen Fruchtfeldern, 중문판 역시 ‘一切谷物田(일체의 곡식 밭에)’라는 번역 채택)로 번역하는 것이 적합하겠다. ‘모든 곡식 밭에’는 잡것들이 일군 모든 결실을 의미하고 ‘우박처럼 찾아들었던 여러 사람들’은 파괴적이고 급진적인 개혁가들을 가리킨다. 이들의 목표는 잡것을 단숨에 제거하는 것이었다(S2 발제문)
‘모든 곡식 밭’은 잡것들과 관련되기는 하다. 그런데 잡것들이 어떤 결실이 있는지 모르겠다. (교수님) 잡것들이 맺은 결실은 아마 1) 쾌락을 추구하는 잡것들이 이룩한 쾌락주의적 문화, 2) 권력을 추구하는 잡것들이 이룩한 천박한 정치와 교양, 3) 글쓰는 잡것들이 이룩한 예술과 학문이 아닐까 싶다. (사견)
그리고 황문수 식의 해석은 과도하게 급진적인 해석 같다. 황문수는 일본 학자들의 각주들을 참고해서 가져오기도 하는데, 일본 학자들이 가끔 이렇게 급진적으로 해석한다. ‘파괴적이고 급진적인 개혁가’는 무정부주의자나 사회주의자를 가리킬텐데, 니체는 그런 사람을 혐오한다. 그래서 여기서 “여러 사람들”이 ‘자유를 향한 갈증을 느끼는 고양된 정신을 가진 자들’라면, 니체가 혐오하는 그런 사람들과 “여러 사람들”을 동일시하는 것은 문제가 있어 보인다. “파괴자”는 천민들을 파괴하고 부정하려고 했던 사람들로 해석할 수 있다. (교수님)
오히려 내가 한때 던졌던 의문, 이것이 나를 거의 질식시켰다. “뭐라고? 삶은 잡것도 필요로 한다고? // 독으로 오염된 샘, 악취를 내뿜는 불꽃, 불결한 꿈, 생명의 빵을 파고드는 구더기가 필요하다고?” // 내 증오가 아니라 내 구역질이 나의 생명을 굶주린 듯 먹어들어갔다! 아, 나는 정신에마저 종종 싫증을 냈었는데, 잡것마저 제법 정신을 갖춘 것을 보았을 때 그랬다.
But I asked once, and suffocated almost with my question: What? Is the rabble also necessary for life? // Are poisoned fountains necessary, and stinking fires, and filthy dreams, and maggots in the bread of life? // Not my hatred, but my loathing, gnawed hungrily at my life! Ah, often became I weary of spirit, when I found even the rabble spiritual!
Sondern ich fragte einst und erstickte fast an meiner Frage: wie? hat das Leben auch das Gesindel nöthig? // Sind vergiftete Brunnen nöthig und stinkende Feuer und beschmutzte Träume und Maden im Lebensbrode? // Nicht mein Hass, sondern mein Ekel frass mir hungrig am Leben! Ach, des Geistes wurde ich oft müde, als ich auch das Gesindel geistreich fand!
: 삶이 구역질을 일으키는 잡것조차 필요로 한다는 사실은 차라투스트라를 질식하게 만들었다. 결국 잡것이 일으키는 구역질도 인간의 자기극복을 위해 삶에 필요한 존재인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잡것이 제법 머리를 쓰는 지적인 존재라는 사실에 지성 자체가 싫어지기도 했다. (S2 발제문)
삶이 고양되기 위해서는 “적의”가 필요하고, “죽음”은 새로운 생명을 위해 필요하며, “수난의 십자가”로 비유되는 고통 일반조차 삶의 성숙을 위해 필요하다. 하지만 세계의 완전성을 긍정하는 삶을 위해 “천민”이 필요하다는 사실이 차라투스트라에게 가장 납득하기 힘들다. 니체는 자신이 영원회귀를 받아들이기 힘들게 만들었던 것이 말세인 또한 영원히 돌아와야 한다는 사실이라고 다른 곳에서 말한 적이 있다.
천민에 대해 니체처럼 이야기하려면 자기가 천민이 아닌 것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하는데 이런 확신은 다소 오만하다. 니체도 어머니께 결혼할만한 돈 많은 과부가 없는지 편지 쓴 적이 있따. 부자 과부와 결혼해서 안정적인 저술 활동하고 싶었던 것이다. 교수 퇴직 연금은 보잘 것 없는 액수였기에 니체는 여유있게 살지 못했다. (천박한 니체의 모습;;) 그리고 니체는 자기의 어머니와 누이를 천민에 가까운 사람들로 간주하고 혐오하기도 했는데 그런 행태도 사실 주제넘는다. 니체가 아플 때 돌봐준 사람은 자기 엄마와 누이밖에 없었다.
“제법 정신을 갖춘” 잡것은 칸트나 헤겔 같은 철학자일 수도 있고, 상당히 뛰어난 저널리스트일 수도 있겠다. 『우상의 황혼』에서 니체는 자기가 싫어하는 문필가들과 사상가들을 쭉 나열한다. 그런 사람들을 여기서 다 포괄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교수님)
*권력(power, Macht) : 잡것이 너무나도 많기에 권력을 잡기 위해서는 반드시 저들을 의식하고 저들의 요구에 영합할 수밖에 없다. 하여 정치가는 필연적으로 잡것의 수준에 맞는 통치를 한다. 대중정치가 그 결과이다. 니체가 겨냥한 것은 19세기 유럽의 정치체제일 것이다. 자유와 평등이념을 전제하는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는 전형적인 대중정치이다. (S2 발제문)
권력이라는 것도 이제 진정한 권력이 아니라 대중들에 대한 아부이다. 진정한 권력이라면 대중들을 고양시키고 극복하길 촉구해야 하는데, 지금의 권력은 대중들에 영합하고 아부한다. 『안티크리스트』에서 니체는 황제가 기독교를 믿지도 않으면서 믿는 척하고 대중들을 현혹한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교수님)
내 구역질 자체가 내게 날개를 달아주고 샘물을 예감하는 힘을 주었던 것인가? 실로 나는 기쁨의 샘을 다시 찾기 위해 최고 높은 곳으로 날아올라야만 했으니! // 오, 내 형제들이여! 나는 그 샘을 찾아냈다! 여기 가장 높은 곳에서 기쁨의 샘이 내게 솟구치고 있다! 그 어떤 잡것도 함께 마시지 않는 그런 삶이 있는 것이다!
Did my loathing itself create for me wings and fountain-divining powers? Truly, to the loftiest height had I to fly, to find again the well of delight! // Oh, I have found it, my brothers! Here on the loftiest height bubbles up for me the well of delight! And there is a life at whose waters none of the rabble drink with me!
Schuf mein Ekel selber mir Flügel und quellenahnende Kräfte? Wahrlich, in's Höchste musste ich fliegen, dass ich den Born der Lust wiederfände! // Oh, ich fand ihn, meine Brüder! Hier im Höchsten quillt mir der Born der Lust! Und es giebt ein Leben, an dem kein Gesindel mit trinkt!
: 잡것에 대한 구역질 자체가 역설적으로 차라투스트라를 잡것과 구역질에서 구원하였다. 잡것에 대한 구역질이 자기극복으로 그리고 초인의 삶의 발견으로 이어진 것이다. ‘그 어떤 잡것도 함께 마시지 않는 그런 삶’은 초인의 삶을 의미한다. 초인의 삶은 잡것들에 의해 오염되지 않는다. 잡것들이 오를 수 없는 높이와 오염을 정화하는 깊이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S2 발제문)
천민에 대한 구역질이 자기극복하는 동기가 되었다. 「서설」에서 “위대한 경멸”이 언급되었었다. 차라투스트라는 시장의 군중에게 초인에 대해서 이야기했지만 군중이 이해하지 못하고 야유를 퍼붓자 그렇다면 저들의 긍지에 호소해야겠다고 생각하여 말세인 이야기를 했었다. 말세인에 대한 구역질이 군중의 경멸을 일깨워서 그들로 하여금 ‘나는 저런 말세인이 안 되겠다’하는 결심을 하게 만들도록 시도했던 것이다. 천민에 대한 구역질은 그런 이야기들과 연결된다. (교수님)
차라투스트라는 군중이 말세인 상태 자체를 극복할 수 있도록 군중에게 말세인에 대한 경멸을 유발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여기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미 말세인에 대한 경멸 자체는 지겨울 정도로 많이 느끼고 있었고 그들과 같이 되지 않으려고 “오랜 세월을 귀가 먹고 눈이 멀고 벙어리가 되어 불구자처럼 살아왔다.” 그는 오히려 말세인에 대한 경멸 자체를 극복했어야 했다. 그리고 이윽고 여기서 그는 영원히 경멸스러운 말세인이 돌아와도 괜찮다는, ‘경멸의 극복’이라 불릴 만한 것을 체험하였다. (사견)
나는 그대에게 좀 더 조심스럽게 다가서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내 심장이 너무도 격렬하게 그대에게 솟구쳐 가고 있으니. // 짧고 뜨겁고 우울하면서도 행복 넘치는 내 여름이 작열하고 있는 내 심장. 나의 이 여름의 심장이 그대의 냉기를 얼마나 갈망하고 있는지! // 머뭇거리던 내 봄날의 비애는 지나갔다! 유월에 날린 내 눈송이의 심술궂음도 지나갔다. 나는 온통 여름이 되었고 여름의 한낮이 되었다!
And yet must I learn to approach you more modestly: far too violently does my heart still flow towards you:- // My heart on which my summer burns, my short, hot, melancholy, over-happy summer: how my summer heart longs for your coolness! // Past, the lingering distress of my spring! Past, the wickedness of my
snowflakes in June! Summer have I become entirely, and summer-noontide!
Und noch muss ich lernen, bescheidener dir zu nahen: allzuheftig strömt dir noch mein Herz entgegen: - // Mein Herz, auf dem mein Sommer brennt, der kurze, heisse, schwermüthige, überselige: wie verlangt mekin Sommer-Herz nach deiner Kühle! // Vorbei die zögernde Trübsal meines Frühlings! Vorüber die Bosheit meiner Schneeflocken im Juni! Sommer wurde ich ganz und Sommer-Mittag!
: 초인의 삶을 발견했다는 사실로 인해 흥분하여 단번에 달려드는 것이 아니라 침착하게 단계적으로 다가서야 한다. // 창조적 정신의 성숙을 여름에 비유하였다. 여름은 뜨겁지만 짧다. 즉 창조적 정신은 절정에 다다르면 금세 사라져버린다. 때문에 여름은 행복하면서도 우울하다. 그렇기에 생명의 샘의 냉기를 갈망하는 것이다. // ‘머뭇거리던 내 봄날의 비애’는 젊은 니체가 낭만주의에 심취했던 것을 가리킨다. ‘유월에 날린 내 눈송이의 심술궂음’은 니체가 실증주의에 심취했던 것을 가리킨다. 이 두 단계는 모두 잡것들 틈에서 보낸 시절로 이제는 지난 과거이다. 니체의 창조적 정신은 성숙에 도달했다. (S2 발제문)
보통 니체 사상을 3단계로 나눈다. 1) 초기 시기는 『비극의 탄생』과 『반시대적 고찰』을 썼던 시기이다. “머뭇거리던 내 봄날”은 이 시기 니체가 쇼펜하우어 사상에 심취했을 때로 보인다. 2) 중간 시기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을 썼던 시기이다. 이 시기 니체는 과학의 실증적인 정신, 민주주의, 소크라테스 등을 상당히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래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을 바그너에게 보냈을 때 바그너가 상당히 실망했다고 한다. 젊은 시절의 니체가 낭만주의적 도취를 찬양하던 것과 달리 과학적 냉정함, 볼테르적 계몽주의적 정신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월에 날린 내 눈송이”가 바로 이 시기를 비유하는 것으로 보인다. 3) 마지막 시기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이후 나머지 다른 모든 저작들을 썼던 시기를 가리킨다. 이 시기를 “여름의 한낮(정오)”라는 표현을 많이 비유한다. 여름의 한낮이야말로 모든 그림자가 다 사라지고 온통 햇빛으로 가득한 시간이다. 플라톤적 이원론 사상은 현세는 천상의 그림자일 뿐 천상이야말로 빛으로 가등한 세상인데, 영원회귀사상을 철저히 받아들임으로써 삶과 대지를 완전히 긍정할 때 이 세상 자체가 빛으로 가득한 세상으로 나타나고 모든 그림자 사라진다.
“창조적 정신의 성숙이 절정에 다다르면 금세 사라져버린다.”라고 읽을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나의 여름의 심장”은 초인을 향한 열정이라고 봐야할 거 같다. “냉기”는 초인을 향한 열정을 충족시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냉기”를 지혜의 차가움으로 보면, 차라투스트라는 열정과 지혜가 통일된 상태를 갈망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그런 상태는 삶의 진실을 완전히 파악하게 된 상태일 것이다. 그런데 분명하지는 않다. 잘 모르겠다. (교수님)
“냉기”는 “그대의 냉기”인데 “그대”가 기쁨의 샘으로서 삶이기 때문에 지혜로 보기는 힘들 것 같다. 여기서 “기쁨”으로 번역되는 Lust는 역자가 잡것이 오염시킨 것으로 언급될 때는 “쾌락”으로 번역되었다. 나는 두 가지 뉘앙스를 포괄할 수 있는 다소 중립적인 번역어인 “즐거움”이 더 좋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즐거움”에는 “쾌락”이 담고 있는 Lust의 주요 의미 중 하나인 ‘욕망’이라는 의미가 잘 담겨 있지 않는다. 그래서 일상 한국어에서 다소 부정적으로 쓰이긴 하지만 ‘즐거움’이나 ‘기쁨’의 의미를 포괄할 수 있는 “쾌락”을 Lust의 번역어로 일관적으로 채택하는 것이 더 좋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쾌락의 샘”이라고 하면 참 뉘앙스가 별로다.. 번역은 어려워..) 여하튼 냉기는 정신적이든 육체적이든 고양된 삶에서 느낄 수 있는 즐거움으로 보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 그런데 왜 그 즐거움이 냉기일까? 아마 “작열하고 있는 나의 심장”, 즉 차라투스트라의 초인을 향한 열정을 식히는 역할을 수행해서일 것이다. 그게 무슨 역할일까? 식힌다는 것은 열정을 사그라들게 한다기보다는 열정을 소화한다 혹은 해소한다고 이해해볼 수 있겠다. 예컨대, 나폴레옹은 프랑스를 통합하고 주변 국가를 복속시키는 정복욕적 즐거움을 느끼면서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고양해나갔다. 즐거움의 샘에 조심스럽게 다가가야 하는 이유는 성급히 열정만 앞서 다가갔다가는 자신을 고양시키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나폴레옹이 정복자로서의 꿈에 눈이 멀어 군사적/외교적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고 다른 나라들을 정복하려고 했을 때 그는 처참하게 실패하여 자신을 고양시키는 정복욕적 즐거움을 만끽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전에 “내 여름”은 왜 “짧고 뜨겁고 우울하면서도 행복 넘치는” 것일까? 뜨겁다는 것은 초인을 향한 열정 때문일 것이다. 행복 넘치는 것은 초인을 향한 삶이 비로소 “그 어떤 잡것도 함께 마시지 않는 그런 삶”이자 “최고 높이에서” “지복의 고요”를 누리는 삶이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문제는 “내 여름”이 왜 짧고 우울하냐로 귀결된다. 발제자는 짧아서 우울하다고 해석했다. 절정에 다다른 창조적 정신은 금방 사라지고 그래서 우울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교수님 말씀처럼 절정에 다다른 창조적 정신이 금방 사라진다는 것은 납득하기 힘들다. 나아가 니체가 만약 그런 의미를 전달하려고 했으면 “짧고”와 “우울하고”를 붙여 나열하든지 나열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서술했을 것 같다. 그렇다면, 다시, “내 여름”은 도대체 왜 A) 짧고 B) 우울한가? 발제자도 교수님도 잘 모르겠다고 하는데 나라고 뾰족한 답은 없다. 그렇지만 몇 가지 해석적 가능성이 떠오르긴 한다. A1) “여름”에 초인의 삶을 깨닫게 된 즉시 삶의 여러 결실을 맺기 위해 노력하여 금방 “가을”로 넘어가기 때문이다. A2) 초인의 삶을 깨달은 시점이 “머뭇거리던 내 봄날”과 눈송이를 날리던 “유월”을 지나 이미 상당히 나이가 들어버린 시점이라 남은 삶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A3) 돈오점수처럼 찰나에 깨달은 후에는 이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데, 여기서는 냉기에 의해 여름의 심장이 식혀지지 않으면 여름이 지속될 수 없기 때문이다. B1) 김동규(2014, 『멜랑콜리아』)에 따르면, 멜랑콜리는 부끄러움 없는 자기 비난, 남을 욕하듯 자신을 욕하는 감정이라는 의미가 있다. 여기서는 “머뭇거리던 내 봄날”과 눈송이를 날리던 “유월”을 돌이켜보았을 때 느껴지는 부끄러움 없는 자기 비난의 감정일 수 있다. B2) 김동규(2014)에 따르면, 울증은 조증과 결합하여 극단의 감정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조울은 천재나 위대한 사람, 영웅의 전조로 취급되기도 하고 광인의 병리적 증상으로 취급되기도 한다. 여기서는 “우울”이 “행복 넘치는” 감정과 결합하여 초인의 전조가 되는 조울로 이해될 수도 있다. B3) 김동규(2014: 189)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창작가들은 모두 자유로운 사람들이다. 그런데 여기서 자유는 인간이 떠맡아야 하는 짐으로 등장한다. …… 창작의 자유를 확보하기 위해서 자신의 전부를 걸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유로운 창작자는 모두 자기존재감이 실린 자유의 짐에 고통받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멜랑콜리라는 어둡고 무거운 기분에 젖어 있을 수밖에 없다.” 여기서 차라투스트라가 창조적 정신에 도달하면서 자신의 인생을 모두 초인의 삶에 걸게 되기 때문에 느끼는 무거운(schwer) 마음(mutig)이 우울(schwermüthig)일 수 있겠다. 나는 이 해석적 가능성들 중 A3)와 B3)가 가장 그럴듯하다고 생각한다. (사견)
“melancholy”라는 단어의 의미를 중심으로 세 가지 해석을 제시했는데, “schwermutig”라는 독일어 단어를 “melancholy”라는 영어 단어로 번역한 영어 번역자가 이러한 해석들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번역을 했을지는 모르겠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조금의 광기도 없는 천재는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B2)나 B3) 해석을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정확히는 잘 모르겠다. (교수님)
우리는 미래라는 나무 위에 보금자리를 짓는다. 독수리의 부리가 우리 고독한 자들에게 먹을거리를 날라다 줄 것이다! // 실로 불결한 자들이 함께 맛보아서는 안 될 먹을거리를! 저들이 그것을 먹으면, 불을 삼켰다고, 주둥이가 불타고 있다고 여기게 될 것이다!
On the tree of the future build we our nest; eagles shall bring us lone ones food in their beaks! // Truly, no food of which the impure could be fellow-partakers! Fire, would they think they devoured, and burn their mouths
Auf dem Baume Zukunft bauen wir unser Nest; Adler sollen uns Einsamen Speise bringen in ihren Schnäbeln! // Wahrlich, keine Speise, an der Unsaubere mitessen dürften! Feuer würden sie zu fressen wähnen und sich die Mäuler verbrennen!
: 미래는 초인의 시대 혹은 초인 자체일 수 있겠다. 고독한 자들은 초인의 시대를 준비하는 자들 혹은 초인을 향한 삶을 사는 자들인데 이들의 긍지(“독수리”)는 온갖 고난과 고통을 먹을거리 삼아 초인의 시대를 일구어나가거나 초인을 향해 자기 자신을 고양시킨다. 불결한 자들, 즉 나약한 천민들은 그런 고난과 고통이 그저 고통스러울 뿐이다. (사견)
우리는 거센 바람처럼 저들 위에서 살고자 한다. 독수리와 이웃하고 눈과 이웃하며 태양과 이웃하여 거센 바람으로 살고자 한다. // 그리고 언젠가는 바람처럼 저들 사이로 휩쓸고 들어가, 내 정신으로 저들의 정신에게서 숨결을 빼앗을 것이다. 내 미래가 그러기를 원한다. // 진정, 차라투스트라는 온갖 낮은 지대로 몰아치는 거센 바람이다. 그는 자기의 적들에게 그리고 무언가를 토해내고 뱉어내는 자 모두에게 충고한다. “바람을 거슬러 침을 뱉지 않도록 조심하라!”
And as strong winds will we live above them, neighbor to the eagles, neighbor to the snow, neighbor to the sun: thus live the strong winds. // And like a wind will I one day blow among them, and with my spirit, take the breath from their spirit: thus wills my future. // Truly, a strong wind is Zarathustra to all low places; and this counsel counsels he to his enemies, and to whatever spits and spews: "Take care not to spit against the wind!"
Und wie starke Winde wollen wir über ihnen leben, Nachbarn den Adlern, Nachbarn dem Schnee, Nachbarn der Sonne: also leben starke Winde. // Und einem Winde gleich will ich einst noch zwischen sie blasen und mit meinem Geiste ihrem Geiste den Athem nehmen: so will es meine Zukunft. // Wahrlich, ein starker Wind ist Zarathustra allen Niederungen; und solchen Rath räth er seinen Feinden und Allem, was spuckt und speit: hütet euch gegen den Wind zu speien!
: 차라투스트라는 지금은 잡것들에게로 내려가지 않겠다고 한다. 아직은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절한 때가 오면 차라투스트라는 거센 바람이 되어 잡것들 사이로 내려가 자신의 지혜를 전할 것이다. 차라투스트라가 거센 바람처럼 내려가 자신의 지혜를 전달할 때 잡것들은 그를 향해 침을 뱉지 말아야 한다. 그 침은 고스란히 자신에게로 향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차라투스트라는 1부 <시장터의 파리들에 대하여>에서 벗들에게 시장터의 파리떼를 피해 거세고 강한 공기가 흐르는 곳으로 달아나라고 충고한 바 있다. (S2 발제문)
발제자는 차라투스트라가 “거센 바람”으로 휩쓸고 들어가고 몰아치는 것을 자신의 지혜를 전달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하지만 지금 이 텍스트 자체가 이미 차라투스트라가 자신의 지혜를 전달한 기록이 아닌가? 나는 차라투스트라가 “거센 바람”으로 산다고 했을 때는 높은 산 정상에서 몰아치는 바람처럼 정신의 “높은 경지”에서 초인을 향해 고난과 고통을 자양분 삼아 산다는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언젠가는 바람처럼 저들 사이로 휩쓸고 들어”간다는 말은 니체의 사상이 미래에 잡것들의 천박한 정신을 질식시킨 후 새 정신으로 불어넣어질 것임을 예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니체는 지금 자신의 가르침을 비난하고 그에 저항하는 자들에게 이러한 시대의 흐름에 저항하여 자기 자신을 욕보이지 말라고 충고하는 것이다. (사견)
(수업 : 박찬국, <존재론연습> (20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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