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현대대륙철학 일차문헌

[니체] 「차라투스트라의 서설」 1-2절,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현담 2023. 3. 16. 21:24

차라투스트라의 서설1

 

*태양(sun, die Sonne) : 니체의 초기 사유에서부터 자연은 종종 과잉낭비의 성격을 갖는 것으로 묘사되곤 한다. 니체에게서 자연은 마치 넘쳐흐르는 자신의 충동들을 마음껏 쏟아내지 못하여 괴로워하는 생명체의 이미지를 갖는다. 이러한 자연의 이미지가 태양과 차라투스트라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고 있다. 태양이 자신의 빛을 마음껏 뿜어내지 못하고, 차라투스트라가 자신의 지혜를 베풀지 못한다면, 괴로움이 있을 것이다. 차라투스트라에게는 자신의 지혜를 베푸는 일이 곧 그의 행복이다. (J 발제문)

  다윈의 세계는 궁핍하다. 뭇 생명들이 생존을 위해 한정된 자원을 차지하고자 서로 싸우는 세계다. 이원론적 종교도 현세를 눈문의 골짜기를 표현하는 등으로 세계를 고통과 결핍으로 특징지운다. 하지만 니체는 이 세계를 힘과 생명력으로 넘치는 것으로 본다. 어마어마하게 많은 생물종이 있지 않은가. 자연은 낭비적이라 할 정도로 자기 힘이 넘쳐서 폭발적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런 우주적 생명력을 디오니소스 신이라 본다. 쇼펜하우어 또한 물 자체로서 우주적 의지를 상정하고, 그것이 개체들로 자신을 표현한다고 보는데, 우주적 의지가 결핍감으로 고통스러워한다고 본다. 그래서 개체들도 결핍감에 사로잡히고 욕망에 끝이 없다. 니체는 비극의 탄생같은 초기 저작에서 쇼펜하우어의 도식을 끌어들이는데, 고통스러운 이유가 다르다. 우주적 의지가 고통스러운 이유는 결핍감 때문에 아니라 힘이 넘쳐서 발산을 못해서 그렇다. 힘이 넘치는 헤라클레스에게 가만히 앉아서 공부하라고 하면 엄청 괴로울 것이다. 니체의 이상적 인간도 이처럼 생명력으로 충만한 인간이다. (교수님)

  쇼펜하우어에게 있어서 자연, 우주적 의지는 결핍을 해소하고자 하는 다수의 욕구들의 상호투쟁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욕구가 결핍을 해소하는 순간은 일시적일 뿐이다. 뒤따라오는 것은 언제나 권태일뿐이고, 그렇기 때문에 우주적 의지는 고통으로 가득하다. 이는 진화론에서 표상된 자연과도 일면 유사하다. 진화론의 자연에서는 제한된 공간과 자원을 둘러싼 생존경쟁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물론 니체에게 있어서도 자연은 고통스러운 투쟁의 장으로 이해된다. 그런 점에서 니체는 마지막까지 쇼펜하우어의 계승자이자 진화론의 영향을 받는 사상가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차이가 있는데, 그것은 니체가 자연을 결핍이 아니라 과잉 및 낭비의 성격을 갖는 것으로 이해했다는 점이다. 자연은 넘쳐흐르는 자신의 풍요로움을 쏟아내고자 한다. 자연의 고통은 결핍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풍요로움에서 비롯된 것이다. (J 프로토콜)

 

*나의 독수리와 나의 뱀(my eagle and my serpent, mein Adler und meine Schlange) : 기독교를 상징하는 존재는 무엇인가. . 맹수는 아니다. 그러나 니체 철학 동물은 맹수다. 양은 순종, 겸손. 신뢰, 복종, 맹신을 상징한다. 양은 목자의 말을 무조건적으로 믿는 동물이다. 그러나 독수리는 무리 지어서 사냥하지 않고 혼자 사냥한다. 그는 무리에 의지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강하게 신뢰한다. 그는 긍지의 상징이다. 뱀은 에덴의 질서에 따르지 않고 자기의 질서를 만든다. 뱀은 관념을 살지 않고 대지에 살며 편견을 먹지 않고 흙을 먹는다.”(인터넷 참고) 그는 지혜의 상징이다. 니체가 자기 자신의 수호동물로 삼은 동물에서도 벌써 반기독교적 성격이 강하게 나타난다. (교수님)

  차라투스트라의 동물들인 독수리와 뱀은 각각 긍지와 지혜를 상징한다. 이는 그리스도교의 동물인 양과 대립된다. 독수리와 뱀은 공격적인 파토스를 가지고 있는 맹수다. 그러나 양은 선하고 유순하며 복종하는 희생양이다. 덧붙이자면, 니체는 도덕의 계보의 첫 번째 논문 13절에서 다시 한 번 이러한 비유를 사용할 것이다. 독수리는 주인도덕의 상징이고, 양은 노예도덕의 상징이다. 양은 맹금에게 원한을 품는다. (J 프로토콜)

 

*하강(go down, untergehen) : 원문에서는 ‘untergehen’이 강조되어 있다. ‘unter-’아래로-’라는 뜻을 가지고 ‘gehen’가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이 표현은 일몰이나 몰락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태양이 저 너머의 아래에 있는 세상을 비추어주기 위해서는 일몰해야 하듯이, 차라투스트라도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베풀기 위해서는 아래로 내려가야만 한다.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차라투스트라는 아래로 내려가 실패에 직면한다. 그런 점에서 차라투스트라의 아래로 내려감은 곧 차라투스트라의 몰락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는 반드시 차라투스트라의 몰락-극복-상승의 삼항일체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몰락이 있는 곳에서만 극복이 있고, 극복이 있는 곳에서만 상승이 있기 때문이다. 몰락 없이는 극복과 상승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상승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자신의 몰락을 원할 줄도 알아야 한다. (J 발제문)

  고고한 산의 세계, 순수성을 유지할 수 있던 세계에서 혼탁한 인간 세계로 내려간다(“인간이 되고자 한다”)는 의미에서 몰락이라 할 수 있고, 단순히 산을 내려간다는 의미에서 하강이라 할 수도 있고, 더 큰 상승을 위해서 몰락한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교수님)

 

차라투스트라의 서설2

 

*그대의 재(your ashes, deine Asche) : ‘는 과거의 유산들, 전통적인 도덕-형이상학의 잔재들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지혜는 진공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대결 속에서 만들어지는 법이다. 이와 관련하여 니체는 전통적인 도덕-형이상학과 대결하면서 쌓인 긴장이 미래를 향한 활시위를 팽팽하게 만드는 필수적인 요소라고 말한 바 있다. (J 발제문)

  재를 과거의 유산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그것들을 불태워버리고 남은 것, 부정해버리고 남은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옳아 보인다. 불태워버리고 남은 재, , 이원론적인 도덕을 불태우고 남은 것은 니힐리즘이다. 과거에 차라투스트라가 나른 자신의 재는 차라투스트라가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지 못하고 니힐리즘의 빠진 상태를 나타낸다. 니힐리즘에 빠지면 세상을 잿빛으로 본다. 어떤 목적도 가치도 없는 것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다. 이원론은 허구라도 삶의 의미와 방향, 그리고 힘까지도 주던 것이다. 그것이 불탄 이후로는 의미도 방향도 생명력도 다 사라져버리고 재만 남는다. (교수님)

 

*구토(역겨운 것, loathing, Ekel), 어린아이(child, Kind), 깨어난 자(awakened one, ein Erwachter) : 구토 또한 니힐리즘의 상징으로 보인다. 사르트르의 소설 제목 역시 구토이다. 아무런 삶의 목표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니 삶이 역겹고 지겹게 느껴지는 것이다. 아무런 목표도 의미도 없이 살아야 하는 사람의 표정에는 삶의 지겨움과 역겨움이 드러나있었던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그런 상태를 극복하기 위해 산에 올라온 것이고, 10년동안의 수행으로 아이의 정신이 된다. 아이의 정신, 춤추는 정신은 철저하게 현세의 삶을 긍정하는 정신이다. 고난과 고통에도 불구하고 인생을 유희처럼 사는 것이다. 아이들은 노는 게 사는 것인데 그러한 아이들의 모습이 생을 긍정하는 가장 전형적인 모습이라 본 것이다.

  깨어난 자는 춤추는 자나 어린아이와 같은 정신을 가진 자를 가리킨다. 그는 무지몽매한 이원론의 칠흑같은 밤에서 깨어났다. 여기서 깨어난 자를 부처랑 연결시키는 해석이 있지만 설득력이 없다. 니체가 말하는 아이의 정신과 부처는 다르다. 니체는 나폴레옹 같은 사람도 어린아이처럼 살았다고 보지만, 불교에서 나폴레옹을 칭송할까. 아마 끊임없이 번뇌와 망상에 사로잡혀서 고통스럽게 산 사람으로 볼 것이다. (교수님)

 

*바다(sea, das Meer) : ‘바다는 고독한 모험의 장소이다. 이것 역시 속박으로부터의 해방을 뜻한다. 니체는 아침노을이 새롭게 떠오르는 바다를 향해서 항해를 시작하는 이미지를 자주 활용한다. (J 발제문)

  바다가 여기서는 차라투스트라가 머물렀던 산속을 가리킨다. 산속이라는 바다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자기 몸의 무게를 느끼지 않으면서 살았다. 가뿐하고 명랑한 정신으로. 산의 고독함이 그의 그런 순수하고 밝고 활기찬 삶을 도와주고 있었다. 하지만 차라투스트라는 이제 육지, 즉 혼탁한 세상으로 가려고 한다. 성자는 왜 그런 힘든 삶을 살려고 하냐 말하고 있다. (교수님)

  성자는 고독한 수행을 마친 차라투스트라에게 계속해서 고독하게 머무르라고 충고한다. 그러나 차라투스트라는 이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내려가고자, 몰락하고자 한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가 연상되는 대목이다. 계속해서 사람들을 향해서 나아가고자 하는 차라투스트라의 모습에서 우리가 발견해야 하는 것은 차라투스트라-니체가 결코 자기폐쇄적인 실존주의자가 아니라는 점이다. 차라투스트라-니체는 숙명적으로 고독한 인간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바깥으로 뻗어나가고자 한다. 일종의 계몽, 일종의 교육을 수행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차라투스트라-니체가 플라톤의 교육적인 태도를 계승했다는 평가는 아주 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J 발제문)

 

*사랑(love, lieben) : 차라투스트라는 분명 사람들을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백발의 성자가 사람들에 대한 사랑은 상처를 줄 뿐이라고 반박하자,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이 사랑을 운운했는지를 반문한다. 이러한 상황은 성자의 사랑과 차라투스트라의 사랑이 다소간 다른 의미를 갖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고 해석될 수 있다.

  차라투스트라의 사랑은, 마치 태양이 만물을 비추고 그로인해 행복을 느끼는 것처럼, 베푸는 행위 그 자체를 자신의 행복으로 여기는 넘쳐흐르는 사랑이고자 한다. 그것은 베푸는 사랑이다. 그러나 성자의 사랑은 완전한 것에 대한 존경의 사랑이며 그것이 자신의 부족함을 채워주기를 원하는 사랑이다. 성자는 자신의 사랑이 베푸는 사랑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것은 사실상 바라는 사랑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완전한 존재인 사람에 대한 성자의 실망은 완전한 존재인 신에 대한 사랑으로 옮겨간 것이다.

  하지만 뒤이어 보게 되겠지만 차라투스트라의 사랑도 아직 미성숙한 사랑이다. 그는 아직 자신이 베푸는 가르침을 사람들이 순순히 받아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사람들은 그것을 받으려고 하지 않으며 오히려 차라투스트라를 조롱하고 비난할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마저도 창조해내야 한다. 차라투스트라의 사랑은 베푸는 사랑의 수준을 넘어서 창조하는 사랑으로까지 나아가야 한다. 이는 마치 태양이 자신이 비추어줄 존재를 창조해내야만 하는 상황과도 같다. ‘창조하는 사랑의 경지에서 사랑은 곧 창조와 동일한 의미를 가지게 되며, 이때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을 스스로 만들어내야만 한다. (J 발제문)

 

Q. 베푸는 행위 그 자체를 행복으로 여기는 무조건적 사랑 원칙이 조건적 사랑 원칙으로 변하는 건가? (J2)

A. 전적으로 동의한다. 지금 차라투스트라는 낙관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가면 갈수록 사람들, 제자들에게 실망하고,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가르침을 거두려고 한다. 가장 마지막에는 끝났다, 미래의 아이를 기다리겠다하고 마무리된다. (J)

 

  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들에게 베풀겠다고 하지만, 나중에 가서는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특별한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렇지만 적어도 지금은 모든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얘기하고 있다. 차라투스트라 입장에서는 어떤 사람이 그런 사람인지 모르니까 일단 모든 사람에게 가르침을 펼쳐야 한다. 일단 기본적으로 누구나 그런 사람이라 상정을 해야할 거 같고, 그런 의미에서 차라투스트라의 부제는 부분적으로 모든 사람을 위한 책이다. 베풂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다. 하지만, 차라투수트라는 극소수 사람에게만 사랑을 베풀려고 한다기보다는,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려고 하는데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극소수다 이렇게 봐야 하는 것이다. 니체는 천재를 자기의 지혜와 재능이 넘쳐 흐르는 사람이라 보는데 이 사람들이 준다는 의식 없이 선물한다고 본다. 그런데 우리 모두가 피카소 그림을 다 볼 수 있는 있지만, 보고 기쁨을 느끼는 사람은 소수이다. 바하의 음악을 즐기고 감명을 받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다. 바하는 분명 모든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고 싶었을 것일텐데도 말이다.

  기독교에서 얘기하는 사랑이 있고, 니체가 얘기하는 사랑이 있다. 똑같은 도덕이라 하더라도 노예도덕이 있고, 군주도덕이 있는 것처럼. 평등주의에서 얘기하는 사랑은 동정이다. 기독교의 신은 인간을 동정하는 신이다. 인간은 고통에 사로잡힌 불쌍한 존재이고, 예수가 동정하는 신인 것이다. 예수는 인간을 죄와 고통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짊어지고 자신을 희생한다. 이것이 또 기독교의 이상으로 나타난다. 고통스러운 사람, 힘든 사람을 위해 자신을 희생해야 한다, 이런 사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하지만 니체는 동정하는 신을 부정한다. 동정이라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비하가 깔려 있는 것이다. ‘너는 내가 구해줘야 한다.’ 상대방의 잠재력,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다. 죄를 지었으면 죄지은 사람이 스스로 죄를 짊어져야 하는 것 아닌가. 죄에 대해 반성하고 다시 그 잘못 저지르지 않도록 노력해라고 말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인간의 죄를 대신해서 인간을 구하려고 하는 데서 벌써 인간을 보잘 것 없는 존재로 보고 있는 것이다. 동정하는 신이나 동정하는 덕은 인간의 발전과 성장을 막는다. 정말 인간을 사랑하는 자라면, 왜 그거 가지고 좌절해, 충분히 할 수 있어, 나랑 같이 해보자, 이렇게 가야 하는 것 아닌가. 창세기의 신이라는 것은 그 당시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저차원적인 도덕관념 반영한다. 창세기의 신은 전제군주이다.

  신학자들은 이러한 불합리성을 지적하면 불합리하니까 믿는다고 이야기한다. 불합리하지 않고 합리적이면 믿을 필요가 뭐가 있겠냐고 반문한다. 그러나 니체는 무어라고 대꾸하는가. 니들이 불합리한 존재니까 그런 불합리한 것들을 믿는 거 아니냐. 그런 식의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믿을 정도로 너네가 정신이 문제가 있다, 나약하다. 그런 걸 믿는 사람들의 정신상태는 뭔가 정말 많은 불안과 외로움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교수님)

  차라투스트라의 사랑이 그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대상마저도 창조해내야 하는 창조하는 사 랑으로 나아갈 것임에 따라, 그의 사랑의 범위가 줄어든다고 할 수 있는가? 그렇다. 앞으로 살펴보게 되겠지만, 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에게 내려가 실패에 직면할 것이고, 심지어 그의 제자들에게마저 실망을 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더 높은 존재로 창조될 수 있는 인간이 오직 소수의 인간에게만 허용된다고 단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가르침을 마주하기 이전에는 그 누가 더 높은 존재로 거듭날 수 있는, 더 나아가 위버멘쉬의 이상에 가까워질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을지 알 수 없을 테니 말이다. 따라서 현실적으로는 소수의 인간에게만 가능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원리적으로는 모든 사람들에게 가능성이 있다고 말하는 편이 낫겠다. (J 프로토콜)

 

*적선(구호금, alms, ein Almosen) : 차라투스트라의 베풂과 달리, 적선은 연민(동정심, das Mitleid)에서 비롯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와 관련해서 니체가 일찍부터 일관되게 연민을 극복의 대상으로 여겨왔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니체가 연민을 비판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첫째로 연민은 나약한 자가 강한 자의 마음에 상처를 줌으로써 자신의 힘의 감정을 획득하는 은밀하고도 비겁한 수단이 될 수 있다. 니체의 심리적 통찰에 따르면, 적선을 받는 자가 기뻐하는 것은 단순히 건네받은 재화뿐만이 아니라 자신이 그것을 주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였다는 은밀한 힘의 감정 때문이다.

  둘째로 연민으로 인하여 타인에게 적선을 하는 자는 타인의 존재를 진정으로 배려하지 않으면서 자신이 느끼는 도덕적인 만족감만을 추구하게 될 수 있다. (뒤이어 8절에서 차라투스트라가 마주칠 늙은이가 전형적인 그러한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따라서 차라투스트라가 자신이 적선을 할 정도로 궁핍하지 않다고 말한 것은, 그런 위선적인 도덕적 만족감을 탐할 만큼 마음이 궁핍하지 않다는 뜻이다. (J 발제문)

  게다가 적선을 베푼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시샘을 받을 위험이 있다. 왜냐하면 천민과 노예는 자신보다 더 나은 형편에 있는 자들을 시샘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제4부의 자발적으로 거지가 된 자에서 이야기될 것이다.) 그러한 시샘은 곧 복수심으로까지 이어진다. ‘연민시샘의 감정은 기본적으로 비천한 인간의 부정적인 감정에 해당하며, 그렇기 때문에 노예도덕의 근본성격을 규정하고 있는 감정이기도 하다.

  이렇듯 차라투스트라-니체에게 있어서 연민은 일관되게 극복되어야 할 것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우리는 차라투스트라-니체가 끊임없이 연민의 불가피함에 직면한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 때문에 계속해서 내려가고자 하고, 니체는 불가피하게 희생되는 인간들에 대한 연민 때문에 괴로워하기도 했다. 니체가 최후의 순간에 채찍질당하는 말의 목을 끌어안은 것도 연민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차라투스트라-니체의 사상 속에서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연민의 가능성이 그래도 남아 있지 않은지에 대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다. 차라투스트라의 연민은 분명 비천한 인간의 부정적인 연민의 감정과는 구별되기 때문이다. 차라투스트라의 연민에는 모종의 긍정적인 의미도 있을 것이다. (J 프로토콜)

  성자가 그리고 그들에게 무언가를 주고자 한다면 다만 적선 정도만 해주시오. 그리고 그돌로 하여금 구걸하도록 하시오!”라고 말하는 이유는 단순히 그들에게 그냥 주면 고마운줄 모를 것이기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 적선을 하는 사람이 궁핍한 이유(“아닙니다. 저는 적선을 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럴 정도로 궁핍하지 않습니다.”)는 적선 행위가 적선을 받은 사람들에게 선하다는 식의 찬양을 듣고 정신적 만족감을 얻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신적으로 궁핍한 자들이 동정한다는 것이다. 정말 도와줄 사람이 있으면, 예컨대 거지가 있으면, 당신 왜 그렇게 사냐, 같이 가서 일하자, 이렇게 말해야 한다. 정말 그 사람에게 사랑을 베푸려면 그 사람이 독립적인 삶을 살도록 해줘야지, 돈 몇 푼 던져주고 끝이라면 그건 자기만족일 뿐이다. (교수님)

 

사람들에게 가지 말고 숲에 머물도록 하게! 차라리 짐승들에게로 가든지!”

“Do not go to men, but stay in the forest! Go rather to the animals!”

“Gehe nicht zu den Menschen und bleibe im Walde! Gehe lieber noch zu den Thieren!”

: 니체의 자진해서 거지가 된 자이야기를 연상시키는 구절이다. 부자들의 사회의 탐욕스럽고 부정의한 면에 회의를 느껴 자발적으로 가난한 자들의 공동체를 찾아간 부자 청년이 그들 역시 부자들에 대한 시기에 사로잡힌 추한 영혼을 지니고 있었음을 알게 되고 낙심한다. 인간의 보편적 불완전성에 환멸을 느끼고 실망한 그는 다음으로 소들을 찾아가는데, 소들은 탐욕도 시기도 없이 최소한의 외적 조건에 만족하여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고 있음을 발견한다. 동물들 속에서 지내는 것이 마음을 가장 편하고 맑은 상태로 유지하는 길인 것이다. (N 프로토콜)

 

Q1. 차라투스트라는 왜 성자가 신은 죽었다는 소식을 아직도듣지 못했다고 하는가?

A. 숲속의 성자는 듣지 못했지만, 차라투스트라는 신은 죽었다는 소식을 아주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 니체는 자신의 독자들이 이미 신의 죽음에 대해서 알고 있다고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부가 출간되기 1년 전 1882년의 즐거운 학문에서 신의 죽음에 대한 소식이 이미 광인의 입을 통해서 분명하게 전달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니체가 직접 출간한 작품들 중에서 신의 죽음이 가장 분명하고 생생하게 전달되고 있는 대목이 바로 즐거운 학문3125광인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절이다.

  이후 니체는 1887년에 즐거운 학문에 새로운 서문과 함께 5부를 추가하면서 다시 한 번 신의 죽음에 대해서 말한다. 그 대목은 5부의 첫머리인 343우리의 쾌활함이 의미하는 것이라는 제목의 절이다. 앞선 125번 절에서 광인의 입을 통해서 절규하듯이 전해진 신의 죽음에 대한 부음(訃音)은 이제 신의 죽음으로 인해 새로운 아침노을과 새로운 바다 열리는 복음으로 묘사된다. 신의 죽음은 많은 사람들에게는 슬픈 소식이겠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기쁜 소식일 수 있는 것이다. 즐거운 학문125번 절과 343번 절이 니체가 말하는 신의 죽음을 아주 분명하게 전달해주는 가장 대표적인 절들이라고 할 수 있다. (J 발제문)

 

Q2. “신은 죽었다는 소식의 의미가 무엇인가?

A. 쉽게 오해될 수 있는 것과 달리 신의 죽음은 특정한 신이나 단순히 그리스도교라는 한 종교의 죽음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신의 죽음이란, 이제껏 인류를 지배해온 최고의 가치들과 절대적인 가치평가의 기준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된 총체적인 허무주의(니힐리즘, Nihilismus, nihilism)적 상황에 대한 상징이다. 전통적인 도덕-형이상학, 피안의 것에 대한 온갖 종류의 믿음과 신앙이 더 이상 진지하게 견지될 수 없다. ‘낡은 신앙새로운 신앙으로 수정하거나, ‘천국이상적인 사회로 수정한다고 해서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유일하게 참된 것은 오직 날것 그대로의 이 현실세계와 그 속에서의 적나라한 삶뿐이다.

  그렇다면, 피안의 것에 대한 온갖 종류의 믿음과 신앙의 도움 없이, 우리는 도대체 이 현실세계에서 어떠한 의미를 품고 살아가야 한다는 말인가? 이것이 니체의 근본물음이자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하고도 또 절실한 물음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 현실세계 속에서의 삶이 유일한 것이라는 말에 쉽게 동의를 표할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마음속에 어떠한 의미를 품고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뚜렷한 대답을 여전히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 어중간한 상황 탓에 여전히 적지 않은 사람들이 사이비 신앙에 빠지거나 이상적인 사회를 운운하는 조잡한 선동에 휘둘리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한 한 가지 해법으로 차라투스트라가 제시하는 것이 바로 위버멘쉬(Übermensch)’. ‘위버멘쉬신의 죽음을 전제하며, ‘신의 죽음에 대한 응답이다. 차라투스트라가 신의 죽음을 언급한 이후에 설파하는 첫 번째 가르침이 위버멘쉬에 대한 가르침인 것도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다. (J 발제문)

 

Q3. 차라투스트라는 왜 성자에게 신은 죽었다는 소식을 알리지 않고 떠나는가?

A. 차라투스트라가 성자에게 베풀지 않은 것은 신은 죽었다는 소식이고, 성자에게서 빼앗지 않은 것은 성자가 가지고 있는 신에 대한 신앙이라고 할 수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그 백발의 성자가 자신만의 신을 섬기며 숲속에서 혼자 살도록 내버려둔다.

  혹자는 여기에서 왜 차라투스트라가 성자에게 신의 죽음을 가르치지 않는지를 물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차라투스트라에게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는 점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성자는 숲속에서 홀로 자신만의 신을 찬양하며 조용히 살다가 갈 것이기 때문이다. 차라투스트라-니체가 신앙을 가진 자들을 그토록 혹독하게 비판하고 또 비난하는 이유는 그들이 고귀한 인간으로 거듭날 수 있는 강한 자들, 더 나아가 인류 전체를 퇴락시킨다는 이유에서인데, 홀로 사는 늙은 성자는 적어도 그런 폐를 끼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굳이 차라투스트라가 그와 설전하며 기력을 낭비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니체는 모든 신앙을 거짓이라고 단언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신앙이 갖는 유용성을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 신앙을 통해서만 행복하게 살아질 수 있는 삶이라고 한다면 신앙을 가져도 좋다. (니체는 그의 여동생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니체가 용납할 수 없는 것은 그 신앙을 가지고 이 현실세계와 그 속에서 건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비방하고 끌어내리려고 하는 경우다. 신앙은 근본적으로 오류이긴 하지만 편안한 삶에 도움이 될 수 있긴 하다. 물론 긍정적인 사태는 아니지만 말이다. (J 발제문)

  나는 차라투스트라가 성자가 단지 주변에 폐를 끼치지 않고 혼자 숲에 사는 신앙인이기 때문에 소식을 전하지 않고 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성자는 도저히 소식을 전하고 사랑을 베풀고자 해도 받아들이지 않을 짐승임을 차라투스트라가 간파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게 더 맞을 것 같다. 니체는 그 성자를 짐승으로 자주 묘사하고 있으며(“나처럼 곰 가운데 한 마리의 곰, 새 가운데 한 마리의 새이고자 하지 않는가?”, “노래를 짓고 그 노래를 부르지. 그리고 노래를 지으면서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그르렁거리도 하네. 이렇게 나는 신을 찬양하네. 그건 그렇고 그대는 우리에게 어떤 선물을 가지고 왔지?”), 결정적으로 차라투스트라는 성자가 짐승처럼 신을 찬양한다는 말을 듣고 작별 인사를 건넨다(“이 말을 듣자 차라투스트라는 성자에게 작별인사를 하며 말했다. “그대에게 줄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그대에게서 무것도 가져 오지 못하게 나를 빨리 보내주기나 하시오!””). 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에게 가서 사랑을 베풀고자 하지만 도저히 사랑을 베풀 수 없는 짐승에게는 사랑을 단념한 것이다. 이렇게 처음 마주한 성자에 대한 사랑의 단념이 점점 확장되어 결국 모든 사람들에 대한 사랑의 단념으로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사견)

  니체만 하더라도 젊은 사람들, 청년들에게서 자기 제자를 찾았다. 노인들은 위험이나 고통을 무릅쓰려는 패기나 열정이 사그라든 사람들이고 마음과 몸이 편한 상태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청년 같으면 설득하려고 했을텐데 노인은 죽을 날도 얼마 안 남았는데 그냥 두는 것일 수도 있다.

  니체는 모두가 초인이 될 수는 없고 말세인으로 사는 사람이 많을 수밖에 없을텐데 그 사람들한테는 기독교가 필요하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기독교는 초인에게 순종하는 사람으로 만들어주기 때문에 기독교는 초인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필요하다고 말하는 대목도 있다. 그런데 다른 대목에서는 기독교 전체를 제거해야 한다고도 말한다. 안티크리스트 마지막에는 기독교 박멸법 이야기도 나온다. 이렇듯 니체가 서로 모순되는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그런데 초인의 사회에서도 기독교를 폐기해야한다고 보는 게 맞지 않을까. 초인이 지배하는 사회가 오면 그에 맞는 사상이나 종교를 주입시킬 것이다. 기독교는 신 앞에서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니체는 초인을 따라야 한다고 본다. 플라톤만 해도 국가에서 고귀한 거짓말을 말한다. 복종을 저항없이 받아들이게 하려면 신화를 교육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니체도 그런 식의 종교나 사상 교육을 추구하지 않았을까. 여튼 서로 상반되는 내용이 있고 뭐가 니체의 진정한 의도인지 단정하기 힘들지만, 플라톤식으로 고귀한 거짓말을 교육시키는 걸 택하지 않을까 싶다. (교수님)

  기독교 사상의 부분적 필요를 인정하는 것처럼 서술하는 대목과 기독교 전체를 제거해야 한다는 급진적인 주장이 공존하는 등, 니체의 텍스트 내에서 기독교에 대해 모순되는 입장을 취하는 것처럼 보이는 부분들이 있다. 둘 중 어느 한 쪽이 옳다고 명시적으로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기독교 사상에서와 니체에게서 추구되는 가치가 상반되는 정도를 고려할 때 니체의 진의는 후자에 가까웠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플라톤이 국가의 기획에서 잘못된 당위를 전하는 기존의 문학 전통을 부정하고 자신의 철인 통치 체제를 정당화하는 신화로 아이들을 교육할 것을 제시했던 것과 같이, 기독교를 폐기하고 그 대신 니체가 추구하는 바로서 사람들을 건강하게 하는새로운 사상 체계/종교를 주입하는 것이다. (N 프로토콜)

 
 

(수업 : 박찬국, <존재론연습> (20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