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중세철학 이차문헌

Stump(1988) “Sactification, Hardening of the Heart, and Frankfurt’s Concept of Free Will”, The Journal of Philosophy 85(8)

현담 2023. 5. 30. 14:17

서론 (pp.395-396)

 

*저자의 주된 관심

: Frankfurt의 인격(self) 분석을 종교 철학의 문제들, 특히 성화(聖化, sanctification)의 교리와 신에 의한 마음 완강하게 만들기(God’s hardening hearts) 개념에서 비롯되는 수수께끼들에 적용하는 것

 

*논문의 진행

자유와 인격에 관한 Frankfurt의 원래 입장을 살펴본다.

Frankfurt의 원래 입장에 제기된 가장 중요한 비판들을 논의하고, 수정된 Frankfurt의 설명은 성공적으로 그 비판들로부터 보호될 수 있다는 점을 논증한다.

수정된 Frankfurt의 설명이 성화와 마음 완강하게 만들기에 관하여 오랫동안 지속되는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 보인다.

 

I. Frankfurt’s Account (pp.396-397)

 

*Frankfurt의 입장

: 사람(person, 사람으로서 인간)의 본질은 의지(will)의 구조에 있다. 사람은 이차 욕망과 의욕(second-order desires and volition)을 형성할 수 있다.

 

*Frankfurt 정리 (Frankfurt(1971) 직접 참고)

- 일차 욕망(first-order desire) : “AX를 원한다(A wants X).”

  a) 효과적이지 않은 일차 욕망

      ex) 치킨도 먹고 싶고 피자도 먹고 싶었지만 둘 다 먹으면 배부르니까 더 먹고 싶었던 치킨을 먹었을 때 피자를 먹고 싶었던 욕망 (발제자 예시)

  b) 효과적인 일차 욕망(effective [first-order] desire) = 의지(will)

      ex) 치킨도 먹고 싶고 피자도 먹고 싶었지만 둘 다 먹으면 배부르니까 더 먹고 싶었던 치킨을 먹었을 때 치킨을 먹고 싶었던 욕망 (발제자 예시)

 

- 이차 욕망(second-order desire) : “AX를 원하기를 원한다(A wants to want X).”

  a) 단순히 어떤 일차 욕망을 가지길 바라는 이차 욕망

      ex) 마약 중독자 심리치료사는 마약 중독자가 어떤 식으로 마약을 원하게 되는지 알고 싶어 마약을 원하고자 하는 욕망을 원할 수 있지만, 실제로 마약을 원하게 되고 그것이 효과를 가지기는 원하지 않음

  b) 어떤 일차 욕망을 의지로 가지길 바라는 이차 욕망 (실제 효과 여부와는 별개) = 이차 의욕(second-order volition)

      ex) 일에 집중하려는 사람은 일에 집중하고 싶어[효과가 발휘되었으면 해서] 일에 집중하고자 하는 욕망을 이미 원하고 있음. 다만, 막상 일이 닥치면, 딴짓하고자 하는 욕망이 일에 집중하고자 하는 욕망을 이겨 결국 일에 집중하지 못해 효과를 가지지 못할 수 있음.

 

- 사람 vs 탕자

  a) 사람(person) : 이차 욕망과 의욕을 가지는 행위자(agent)

      ex) 내키지 않는 중독자(unwilling addict)는 충돌하는 일차적 욕망들(마약을 복용하고 싶은 욕망 vs. 마약 복용을 자제하고 싶은 욕망)을 가짐. 그는 그중 마약 복용을 자제하고 싶은 욕망이 자신의 의지가 되고 효과를 발휘하기를 의욕하지만, 실제로는 마약을 복용하고 싶은 욕망이 그의 의지가 되고 효과를 발휘하여 결국 그는 마약을 복용하게 됨.

  b) 탕자(蕩子, wanton) : 이차 욕망을 가지거나 가지지 않지만 이차 의욕을 가지지는 않는 행위자

      ex) 방탕한 중독자(wanton addict)의 행동은 그의 일차적 욕망들의 경제를 그대로 반영할 뿐, 그를 행동으로 옮기는 일차적 욕망들이 그를 행동으로 옮기길 원하는 일차적 욕망들인지는 중요치 않음. 다시 말해, 그는 일차적 욕망들 간의 관계가 그가 가진 의지를 가지게 하는 결과를 산출하는 것을 원하는지에 관한 숙고를 하지 않거나 못함. (그가 마약을 복용하지 않고 있는 것은 그가 마약 복용을 자제하고 싶은 욕망이 자기 의지가 되기를 의욕해서가 아니라 단지 피곤하거나 배고파서 자고 싶은 욕망이나 식사하고 싶은 욕망이 마약 복용하고 싶은 욕망보다 우세하기 때문일 것)

 

- 행위의 자유 vs 의지의 자유

  a) 행위의 자유(freedom of action) : 하고 싶은 행위를 할 능력

      ex) 잔디밭에 뛰어노는 강아지는 잔디밭에 뛰어놀고 싶어하면서 또 뛰어놀고 있기 때문에 그 강아지는 행위의 자유를 향유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음

  b) 의지의 자유(freedom of will) : 갖고 싶은 의지를 가질 능력

      ex) 잔디밭에 뛰어노는 강아지가 잔디밭에 뛰어놀고 싶은 욕망을 자신의 의지가 되기를 욕망하면서 또 잔디밭에 뛰어놀고 싶은 욕망이 의지가 되고 있는 것 같지는 않기에 그 강아지가 의지의 자유를 향유하고 있다고 말하긴 어려움

 

- 도덕적 책임(moral responsibility)

  : 어떤 사람의 행위에 대한 도덕적 책임은 행위 당시 그 사람의 의지의 자유를 함축하지 않는다. , 의지의 자유는 행위의 도덕적 책임의 필요조건이 아니다.

  ex) 내키는 중독자(willing addict)는 이미 마약에 중독되어 있어 이차적으로 의욕하는대로 의지를 바꿀 자유는 없지만(의지의 자유를 결여하지만), 어쨌든 마약을 복용하고 싶은 욕망이 의지가 되기를 이차적으로 의욕하면서 자신의 중독 상태에 만족함. 이 사람은 의지의 자유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도덕적 책임을 피할 수 없음.

 

*StumpFrankfurt 정리 추가

- 개인이 의지의 자유를 가지기 위한 세 가지 조건

  (1) 이차 의욕을 가진다.

  (2) 이차 의욕과 어긋나는 일차 의욕[=의지, will]을 가지지 않는다.

  (3) 이차 의욕 때문에 일차 의욕을 가진다.

- 도덕적 책임의 평가

  : 일차적으로, 행위자가 의지의 자유를 가지고 행위하였는지(acted with free will) 여부보다는, 행위자가 자유롭게 행위하였는지(acted freely) 여부에 의거해야 한다.

 

. Implications of Frankfurt’s Account (pp.397-399)

 

*자유(freedom)에 대한 기초 관념에 따른 Frankfurt의 자유 정의

: 원하는 것으로의 장애물의 부재

행위의 자유(freedom of action) : 원하는 행위를 하는 데에 있어서 장애물의 부재

의지의 자유(freedom of will) : 원하는 의지를 의지하는 데에 있어서 장애물의 부재

 

*장애물(obstacles)의 기원에 따른 Frankfurt의 자유 세분

(1) 원하는 행위를 하는 데에 있어서 외적 장애물의 부재

  ↔ ex) 학업을 수료하고 싶은데 등록금이 없어서 학업을 수료하지 못함

(2) 원하는 행위를 하는 데에 있어서 내적 장애물의 부재

  ↔ ex) 학업을 수료하고 싶은데 정신병 때문에 학업을 수료하지 못함

(3) 원하는 의지를 의지하는 데에 있어서 외적 장애물의 부재

  ↔ ex) A가 방에 머무르길 원하는 과학자가 A의 뇌에 심은 칩에 전기자극을 줘서 A가 방에 머물길 의지하게 함

(4) 원하는 의지를 의지하는 데에 있어서 내적 장애물의 부재

  ↔ ex) A는 수업하러 가기 위해서 방에서 나가길 원하지만 방문 상인방에 올라앉아 자고 있는 검은 고양이를 보고 그 고양이를 지나쳐 나가면 불행한 일이 일어날까봐 무서워함. A는 미신적인 무서움과 분투하지만 결국 그 고양이를 지나쳐 나가지 않고자 하는 욕망이 방에서 나가고자 하는 욕망을 이기고 방에 머물고자 의지함.

 

- 보통 의지의 자유는 (3)이지만 Frankfurt에게서 의지의 자유는 (3)&(4)이기 때문에 후자가 더 강한(strong) 개념

- 일반적으로 (1), (2), (3)의 의미에서 행위자가 자유를 결여한다면, 우리는 행위자가 무엇을 하거나 하는 데에 실패한다고 해서 도덕적 책임을 묻지 않음. 우리 중 대부분은 (4)의 의미에서 행위자가 자유를 결여할 때, 행위자에게 책임을 물음.

- Frankfurt에게 있어서, (1), (2), (3)의 의미에서 행위자가 자유롭다면, (4)의 의미에서 자유롭지 않더라도, 행위자가 자유롭게 행위하는 것이고 따라서 행위에 도덕적 책임이 있음. 그리고 (4)의 의미에서까지 행위자가 자유로워야만 행위자가 의지의 자유를 가지고 행위하는 것.

 

. The Revised Frankfurt Account (pp.399-402)

 

*Frankfurt의 설명의 수정 방향 - 지성(intellect)의 역할을 고려하는 아퀴나스

: 행위자의 지성이 행위 당시 어떤 설명(description, 약한 의미의 설명) 하에서 p(혹은 q)를 추구할만한 좋은 것으로 표상할 때에만 행위자가 행위 p를 하기를(혹은 사태 q를 초래하기를) 의지한다.

- 지성은 행위자의 따지는 능력(computing faculty)일 뿐이기에, 지성의 추론(reasoning, 약한 의미의 추론)이 꼭 합리적(rational)일 필요는 없으며, 비합리적(irrational)일 수도 있음.

- 나아가 지성의 추론이 꼭 의식적일(conscious) 필요는 없으며, 행위자 스스로 의식하지 못할(without the agent’s being aware) 수도 있음.

 

*Frankfurt의 설명의 첫 번째 수정

: 행위자의 지성이 의지 당시 어떤 설명 하에서 V1을 추구할만한 좋은 것으로 표상할 때에만 일차 의욕 V1을 초래하는 이차 의욕 V2를 가진다.

이차 의욕은 일차 욕망들에 대한 어떤 추론의 결과이다.

 

*Frankfurt의 설명의 두 번째 수정

: 어떤 이차 욕망이 효과적 욕망(effective desire)이고 행위자가 그에 대응하는 일차 의욕을 가질 때에만 그 이차 욕망은 이차 의욕이다.

 

  ex) 개선된 중독자(reformed addict)는 마약 복용을 자제하고자 하는 욕망을 의지(일차 의욕)가 되도록 효과적으로 욕망(이차적으로 의욕)하여 마약 복용을 자제한다. 개선된 중독자는 이차 의욕을 가진다.

  cf) 내키지 않는 중독자(unwilling addict)는 마약 복용을 자제하고자 하는 욕망을 의지(일차 의욕)가 되도록 욕망(이차적으로 욕망)하지만 효과적으로 욕망하지 못하여 마약을 복용하고자 하는 욕망이 의지가 되고 결국 마약을 복용한다. 내키지 않는 중독자는 이차 의욕을 가지지 않는다.

 

개인은 이차 욕망을 가지고, 그의 이차 욕망들이 일차 의욕들과 어긋나지 않으며, 이차 의욕들 때문에 일차 의욕들을 가지게 될 때에만 의지의 자유를 가진다.

일차 의욕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행위자가 충돌하는 이차 의욕을 가지는 것은 불가능하나, 충돌하는 이차 욕망을 가지는 것은 가능

  ex)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에서 베르코벤스키는 친구들에게 자신을 인기 있게 만들 도박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기를 욕망하는 동시에 스트라브로긴 부인의 존경을 살 도박을 원치 않는 욕망을 가지기를 욕망한다. 베르코벤스키는 어떤 이차 욕망에 상응하는 일차 의욕을 가지든 간에 그 일차 의욕은 다른 어떤 이차 욕망에 어긋나게 되기 때문에 의지의 자유를 가질 조건을 충족하지 못한다.

 

. Criticisms of Frankfurt & The Revised Frankfurt Account (pp.402-411)

 

*비판 (1) - 조작된 고차 의욕 문제

: Frankfurt의 설명에 따르면, 타인에 의해 직접적으로 생산된 보다 고차적인 의욕과 특정 의욕이 일치하더라도 행위자는 자유로울 것이다. 그러나 이는 반직관적이다.

수정된 설명에 따르면, 행위자의 이차 욕망은 그의 지성이 특정한 일차 욕망을 추구할만 한 좋은 것으로 표상한 직접적 결과이기 때문에, 이차 의욕 또한 행위자 편에서의 추론의 결과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행위자의 이차 의욕은 타인에 의해 생산될 수 없다.

  ex) AB의 머리속에서 지속적으로 생각을 생산해낸다면(추론한다면), 그 생각(추론)B의 것이 아니라 A의 것이며, B는 사람이기를 멈추고 A의 꼭두각시가 된다. [B는 이차 의욕 자체를 가지지 못한다.]

  ex) AB의 머리에 단지 간헐적으로 생각을 생산해낸다면(추론한다면), BA에 의해 생산된 생각(A의 추론)을 인지하고 그 자신의 추론의 결과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것이다. [B는 자신의 이차 의욕을 가진다.]

  ⇒ 두 예시 중 어느 경우에도 BA의 이차 의욕을 가지는 것이 아니다.

 

*비판 (2) - 보다 고차적인 의욕으로의 무한퇴행

: Frankfut의 설명에 따르면, 행위자가 V1과 관련해서 의지의 자유를 가지고 행위하기 위해서는 V1에 일치하는 보다 고차적인 의욕 V2가 요구된다. 이때 행위자는 V2 자체를 자유롭게 의지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V2에 일치하는 보다 고차적인 의욕 V3가 요구된다. 이때 행위자는 V3 자체를 자유롭게 의지해야 하는데...

V2를 지지하는 V3는 사실상 V1으로 이끌었던 추론의 재평가와 확인의 표현일 뿐이며, 마찬가지로 V2를 거부하는 V3는 사실상 V2로 이끌었던 추론의 재평가와 거부의 표현일 뿐이다. 따라서, V3는 원래 이차 의욕의 기저를 이루던 추론의 재계산의 결과일 뿐이다. (, 보다 고차적인 의욕으로의 무한퇴행이 아니라 원래 있던 추론의 재평가(reevaluation)/재계산(recalculation)만 있을 뿐이다.)

 

- 모든 삼차 의욕들이 이차 의욕들로 붕괴되는(collapse into) 것은 아니며, 이차 욕망들과 구별되고 심지어 그것들과 어긋나는 삼차 욕망들을 행위자가 가질 수 있다. 욕망이 추론에 항상 즉각적으로 반응적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삼차 이상의 욕망/의욕은 이차 욕망/의욕으로 붕괴되며, 특별한 경우에 있어서도, 삼차 욕망은 이차 욕망의 반성(reflection)일 뿐이다. 결국, 보다 고차적인 욕망의 차원의 수는 무한하지 않고 외려 둘이나 셋으로 제한된다.

  ex) A는 어렸을 때 침례교도였지만 신앙을 버리게 되었고, 경주 후 맥주를 주기적으로 제공하는 요트 클럽에 가입한다. 그는 어울리기 위해 맥주를 마시고자 하는 일차 욕망을 가진다. 그런데 아직 그에게 잔존하는 신앙의 흔적을 바탕으로 그는 맥주를 마시지 않고자 하는 욕망을 욕망하는 이차 욕망을 가진다. 그렇지만 그는 신앙을 버렸으니 맥주를 마시고자 하는 욕망을 욕망하는 이차 욕망도 가진다. 이 경우 그는 양육에 의해 유증된 이차 욕망(언급한 두 가지 이차 욕망 중 전자)을 가지지 않고자 하는 욕망인 삼차 욕망을 가진다. [삼차 욕망(유증된 이차 욕망을 가지지 않고자 하는 욕망)과 이차 욕망(맥주를 마시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고자 하는 욕망)은 그 내용이 달라서 전자가 후자로 붕괴되지는 않지만, 어쨌든 삼차 욕망은 이차 욕망이 표현하는 신앙을 버렸으니 어울리기 위해 맥주를 마시는 것은 좋다.’는 추론의 반성일 뿐.]

 

- 이차 욕망 자체가 행위자의 추론의 표현이고 그러므로 바로 그 사실에 의하여(eo ipso) 추론에 의해 승인된 것으로서 행위자에 의해 승인된다. [삼차 욕망은 승인의 재승인/거부]

 

*비판 (3) - 행위자의 인격을 그의 보다 고차적인 의욕에 동일시하는 문제

: Frankfut의 설명은 행위자의 인격을 그의 보다 고차적인 의욕에 동일시하고 있는데, 그러한 동일시는 좋게 봐줘도 논쟁적이다. 심리학은 우리 본성의 어두운 측면들, 즉 거부되거나 억압된 일차 욕망들이 우리의 고차 욕망들과 우리가 승인하는 일차 욕망들만큼 우리 인격을 구성한다고 본다. 만약 행위자가 특정한 그의 어두운 일차 욕망들과 동일시된다면, 행위자는 이차 의욕에 어긋나게 행동한대도 그가 정말 원하는 것을 자유롭게 하는 것일 수 있다.

행위자는 그의 고차적인 의욕과 동일시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지성과 동일시되고, 행위자의 이차 욕망들은 의지에 대한 그의 지성의 반성의 표현들이기에 그의 일차 의욕과 이차 욕망이 일치할 때 그가 정말 원하는 것을 의지하는 것이고 따라서 자유로운 것이다.

 

수정된 비판 (3)

  : 행위자의 인격을 그의 일차 욕망들이 (혹은 그의 감정들, 무의식, 혹은 다른 어떤 그의 본성의 요소가) 아니라 그의 추론 능력[지성]에 동일시하고 있는데, 그러한 동일시는 여전히 논쟁적이다.

두 가지 의미의 동일시가 있다. 1) 행위자가 자기 자신을 그의 특정한 일차 욕망들 따위의 자신의 어떤 부분에 동일시하는 것은 그가 자신의 해당 부분을 인정하거나 승인하는 이차 의욕을 형성하는 것과 같다. 2) 어떤 행위자든 항상 그의 추론 능력과 동일시된다. 수정된 비판 (3)은 이 두 가지 의미의 동일시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ex) 타마르는 자신을 강간한 암논의 아이를 낳았다. 아이를 향한 타마르의 마음은 양가적이었다: ‘어머니로서 아이를 소중히 대하고 싶다’; ‘암논을 닮은 아이를 거부하고 싶다.’ 어느날 타마르는 자신에게 달려오는 아이에게 이유 없이 벌컥 화내며 그를 때린다. 그때 그녀 속에는 후자의 마음이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타마르는 이제 두 가지 마음 중 어느 쪽을 자신과 동일시할지 결단해야 한다. 1-1) 두 가지 마음 중 갈피를 잡지 못하며 동일시를 미룬 이유가 바로 행위자 편에서의 이차 의욕이었다. 1-2) 타마르가 후자의 마음에 자신을 동일시하기를 선택한다면, 그녀의 추론 능력이 그녀가 아이를 거부하는 것을 합리화하고 그것을 승인할 만한 것으로 간주하여, 결국 아이를 거부하고자 하는 그녀의 일차 욕망을 그녀의 의지로 만드는 이차 의욕을 형성한 것이다. 2) 타마르 자신(she herself)이 정말 원하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그녀의 추론 능력이 무엇을 승인하는지 고려해야 한다. 타마르는 자신의 저열한 마음에 자신을 동일시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동일시는 그녀가 그 마음을 승인하는 이차 의욕을 형성함과 같다. 그리고 그 이차 의욕의 형성이 그녀의 동일시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은 이차 의욕이 그녀의 추론적 능력으로부터 비롯되었고 그 덕분에 타마르 자신이 정말 원하는 것을 지시하기 때문이다.

 

. Applications to issues in the Philosophy of Religion (pp.411-420)

 

*성화의 교리와 그로부터 비롯되는 문제들

  1) 신은 어떤 사람들을 도덕적으로 더 좋게 만들기 위해 그들의 마음에 개입한다.

  2) 사람은 자유 의지를 가진다.

문제 (1) : 사람이 도덕적으로 좋게 되기 위해서는 어떤 도덕적 좋음을 자유롭게 의지해야만 한다. 하지만 신이 사람의 마음에 개입한다면 그 사람은 어떤 도덕적 좋음을 자유롭게 의지하는 것이 아니게 되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더 좋게 될 수 없다.

문제 (2) : 신이 사람의 마음에 개입해도 그 사람이 어떤 도덕적 좋음을 자유롭게 의지하는 것이 가능하다 할지라도, 도덕적 선을 그 사람보다는 신에 귀속시키게 되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더 좋게 될 수 없다.

문제 (3) : 신이 결국 사람을 도덕적으로 더 좋게 만든다 할지라도, 신이 모든 사람에게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cf) 한 가지 유념해야 할 것은, 성화의 교리에서 신이 성화하는 사람들은 자신들 안에 도덕적 악과 분투 중인 기독교인이다.

 

*성화의 교리로부터 비롯되는 문제들의 해결

 

ex) 파트리시우스는 자신의 아내 모니카를 때리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믿고 자신의 아내를 때리지 않고자 하는 욕망이 자신의 의지가 되기를 이차적으로 욕망한다. 그러나 욱하는 분노가 그를 덮치면 그는 아내를 때리고자 하는 욕망에 따라 행동한다. 분노가 사그라들면 그는 자신의 도덕적 신조에 따라 행동하지 못했음에 통탄한다. 파트리시우스는 신에게 자기 스스로 승인할 수 있는 종류의 사람[아내를 때리지 않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신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기도한다.

 

- 문제 (1) : 신이 파트리시우스의 아내를 때리지 않고자 하는 일차 욕망을 의지로 변화시켰을 때, 신은 파트리시우스의 의지의 자유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설립하는 것이다. (파트리시우스의 아내를 때리지 않고자 하는 욕망이 자신의 의지가 되기를 원하는 이차 욕망과 일차 의욕이 일치를 이루게 되었기 때문이다.)

- 문제 (2) : 신은 파트리시우스가 전적인 이차 욕망을 가져야만 파트리시우스의 의지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고 일차 욕망을 의지로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에, 전적인 이차 욕망을 가진 파트리시우스에게도 도덕적 선이 귀속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But not yet.”이라고 기도한 것처럼이 아니라 전적인 이차 욕망을 가지고 기도하기 위해서 파트리시우스는 오랫동안 내적인 분투를 겪었을 것이다.)

- 문제 (3) : 신이 의지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고 일차 욕망을 의지로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아무나가 아니라 상응하는 이차 욕망을 가진 사람들의 마음에만 개입할 수 있다. 만약 신이 그런 사람들이 아닌 사람들의 마음에 개입하여 의지의 자유를 침해한다면, 침해당한 사람들에게 도덕적 선이 귀속될 수 없고, 따라서 그들을 더 좋게 만들 수 없다.

예상 비판 : 문제 (1), (2), (3)에 대한 해명은 펠라기우스주의이다.

위 해명은 행위자가 무엇보다 자기 자신의 의지의 행사로써 성화를 성취할 수 있다는 주장을 수반하지 않는다. 오히려 신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행위자의 인지와 그러한 도움을 가지겠다는 행위자의 의지에 반응한 신이 이 모든 성화의 작업을 수행한다. 물론 행위자 편에서 의지에 따른 행위가 신의 성화의 작업에 필요하지만, 그런 관점은 펠라기우스주의자로 거의 언급되지 않는 아우구스티누스와 아퀴나스 또한 받아들였던 관점이다.

 

*마음을 완강하게 만들기 교리와 그로부터 비롯되는 문제들

 

신은 파라오가 마음이 약해져 히브리인들이 이집트를 떠나게끔 허용하지 않도록 파라오의 마음을 완강하게 만든다. 비록 히브리인들이 이집트로부터 탈출하는 것이 신의 궁극적 목표이지만 말이다. 그리고 신은 파라오가 히브인들의 탈출에 저항했기에 그를 벌한다. (출애굽기 7-14)

 

문제 (1) : 신이 행위자를 도덕적으로 더 나쁘게 만들기 위해 행위자의 의지에 개입하는 일은 그의 완전한 선성과 양립불가능하다. (그런 일은 사탄이나 할 일처럼 보인다.)

문제 (2) : 신이 행위자의 마음을 완강하게 만드는 것이 신의 완전한 선성과 양립가능하다 할지라도, 신이 그 자신이 마음을 완강하게 만든 행위자를 처벌하는 것은 그의 완전한 선성과 양립불가능하다.

 

*마음을 완강하게 만들기로부터 비롯되는 문제들의 해결

 

ex) 괴벨스는 폴란드가 겪었던 종류의 황폐화를 독일의 이익에 봉사하는 한 언제든 초래하고자 하는 일차 욕망을 가진다. 또한 그는 히틀러의 명령을 받들어 독일의 이익에 봉사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 생각하여 그러한 일차 욕망을 인정하고 승인하는 이차 욕망들 또한 가진다. 정상적인 인간적 연민을 억제하는 데에 정신적 에너지를 소진하여 피로해진 괴벨스는 어느날 황폐화된 폴란드가 나오는 뉴스영화를 다시 보면서 황폐화를 불사하고자 하는 일차 욕망이 약해져 스스로에게 마음을 강하게 먹으라고 촉구한다. 신은 괴벨스의 유사기도에 응답한다.

 

- 문제 (1) : 신은 괴벨스를 그가 개입하지 않았을 때보다 더 나쁘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예상 비판 : 신이 개입하여 파트리시우스를 도덕적으로 더 좋게 만들었던 것과 유사하게 신이 개입하여 괴벨스를 더 나쁘게 만드는 것이다.

a) 앞에서 파트리시우스는 내적인 분투 속에서 자신이 도덕적으로 좋다고 믿는 바에 어긋나게 행동했다. 만약 잘못을 범하는 양심이라도 구속력이 있다면, 아내 때리기 자체가 도덕적으로 악하지 않다손 치더라도, b) 파트리시우스가 자신이 도덕적으로 악하다고 믿는 행위인 아내 때리기를 할 때 그는 도덕적으로 더 나쁘게 될 것이다. [전자는 양심의 구속을 준수하고자 함(좋다고 믿는 것을 위해 노력하지만 못함), 후자는 양심의 구속을 무시(나쁘다고 믿는 것을 함)]

그렇다면, 괴벨스가 신이 개입하지 않았을 때보다 더 나쁘게 되려면, 파트리시우스의 경우를 살펴보았을 때, 그 전에 괴벨스가 폴란드를 돕는 행위가 도덕적으로 좋다고 믿고 있었어야만 한다. 그렇게 되면 신이 개입함으로써 괴벨스로 하여금 폴란드 황폐하게 만들고자 하는 욕망을 의지로 가지게 만들었을 때, 명백히 괴벨스를 도덕적으로 더 나쁘게 만들뿐더러 그의 자유 의지 또한 침해하게 된다. [가만히 놔두면 좋다고 믿는 것을 할텐데, 개입하면 좋다고 믿는 것을 못하게 하니까]

그런데 실제 괴벨스는 폴란드를 돕는 행위가 도덕적으로 나쁘다고 믿고 있었다. 그렇게 되면 신이 개입하지 않았을 때 괴벨스는 자신이 도덕적으로 악하다고 믿는 행위를 하는 것이고 [양심의 구속을 무시], 신이 개입할 때 괴벨스는 자신이 도덕적으로 선하다고 믿는 행위를 하는 것이다 [양심의 구속을 준수]. 이 경우, 어쩌면 신이 개입하지 않았을 때 괴벨스가 더 나빠지는 것이라고 볼 여지도 있다. 적어도 나쁘다고 믿는 행위[폴란드를 돕는 행위]을 하는데 괴벨스가 도덕적으로 더 좋아질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예상 비판 : 괴벨스는 단지 그의 악한 일차 욕망이 강화된 것만으로 더 나빠졌다.

맞다. 폴란드를 파괴하는 것은 현실에서 객관적인 악이기 때문에 그런 악을 바라는 욕망도 악이고 그것이 강화되면 괴벨스는 더 나빠지는 것이다. 그런데 괴벨스는 철저하게 양심을 가리고 왜곡하는 도덕적 괴물(moral monster)이고 잘못을 범하는 양심이라도 구속력이 있기에, 그가 폴란드를 파괴하는 것을 자제한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선택받은 주인 히틀러를 배신하여 독일의 전쟁 노력을 침식시키는 것이기에 더 나빠진다. [위 예상 비판에 대한 대응과 같은 골자]

 

남는 문제 : 괴벨스를 가만히 두나 개입하나 괴벨스가 더 나빠진다면, 둘 중 어느 선택지가 악을 덜 산출하는가?

신이 개입했을 때 악이 덜 산출된다. 그렇게 볼 근거는 다음과 같다. 1) 신이 개입하지 않았으면 손상되었을 괴벨스의 의지의 자유가 보존된다. 2) 신이 파트리시우스에게 [받아 마땅해보이는] 의지의 힘을 주는 것처럼 [결과적으로 선을 줌], 괴벨스에게는 그가 받아 마땅한 것을 주는 것으로 보인다 [결과적으로 악을 줌]. 반면 괴벨스 같은 악한이 단순히 피로로 인해 훌륭한 행위에 빠지게 된다는 것은 도덕적으로 의구심이 든다. 3) 신은 괴벨스의 일차 욕망에만 관여하여 그것을 강화해서 그의 악한 이차 욕망과 일치시킨다. 그때 괴벨스의 지성과 이차 욕망이 악에 접합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신은 괴벨스의 품성과 그것에 따른 결과 속에서 그의 소망의 악함을 보여주기 위한 거울을 그에게 제공하는 것일 수 있다. 일단 괴벨스가 자신의 이차 욕망이 악하다는 것을 이해해야만 왜곡된 양심을 바로잡을 수 있고 그의 이성과 이차 욕망을 재형성할 수 있으며 도덕적으로 재탄생할 수 있다.

 

- 문제 (2) : 행위자 자신의 의지가 행위자가 저지르는 악의 원천이자 기원이기 때문에 신이 행위자를 탓하고 처벌하는 것은 결코 부당하지 않다. <출애굽기>에서 신은 파라오가 원하지만 힘이 부족하여 스스로 할 수 없었던 것을 대신 해주는 것이라 해석해야 한다. 다시 말해 파라오의 일차 의욕이 그의 악한 이차 욕망과 상응하도록 만들어준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예상 비판 폴란드인의 행복(welfare) 무시 문제

: 괴벨스의 마음이 약해진다면 폴란드인들의 고통이 완화될 것인데, 괴벨스의 마음을 완강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폴란들인의 행복을 무시하는 것이다.

해당 비판은 폴란드인의 운명이 전적으로 괴벨스의 의지에 달려있다는 잘못된 가정에 기초하고 있다. 만약 신이 있다면, 괴벨스의 의지와 폴란드인의 행복 사이에 신성불가침한 연결 따위는 없을 것이고, 신의 관점에서 그 둘은 전적으로 별개의 문제로 다뤄진다. 괴벨스가 마음이 약해진 순간을 가지지 못했더라도 신이 폴란드인들을 도울 방법을 여전히 열려 있었고, 만약 신이 괴벨스의 마음을 완강하게 만들어서 괴벨스가 폴란드에게 새롭게 고통주기를 계획한다고 하더라도 신은 그것을 방해할 수 있다. 신이 괴벨스의 의지에 따른 행위가 폴란드인에게 고통주는 것을 허용하더라도 그것은 폴란드인에 대한 신의 별개의 결정 때문일 것이다. 그것이 어떤 결정이고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는지는 악의 문제라는 별개의 논의를 요하며 본 논문의 범위를 넘어선다.

 

질문

 

1. Frankfurt에게 있어 사람임의 핵심은 이차 욕망의 형성에 나타나는 인간의 성찰적 능력이다. 그런데 Stump에게서 이차 욕망의 형성에 관여하는 지성과 이차 욕망의 표현인 설명은 비합리적이어도 상관없고 무의식적이어도 상관없다. 비합리적이고 무의식적인 성찰을 성찰이라고 볼 수 있을까? Stumpwantonperson의 경계를 흐리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 나아가, Stump 자신도 p.410에서 감정(emotion)과 추론적 능력(reasoning faculty)를 철저하게 구별하는데, 사실 감정 또한 대체로 비합리적이고 무의식적이기도 하지만 나름의 추론을 제공한다. 예컨대, 동물적 두려움은 종족 번식을 위해 생명 보존을 좋은 것으로 표상한다. Stump의 지성과 추론의 기준은 강화되어야 하는 것 아닐까?

 

2. Stump는 의지의 자유의 조건으로 “(3) 이차 의욕 때문에 일차 의욕을 가진다.”를 명시하였다. 그런데 성화와 마음을 완강하게 만들기에서 신이 인간의 의지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 아니라 강화한다고 할 때는 “(2) 이차 의욕과 어긋나는 일차 의욕[=의지, will]을 가지지 않는다.”는 조건을 강조한다. 그런데 신이 일차 의욕을 임의로 강화시켜 이차 욕망과 일차 의욕을 일치시킨다면, 이차 의욕 때문에 일차 의욕을 가지는 것이 맞는가? 만약 그렇다면 때문에는 어떤 의미로 사용되는 것인가? 오히려 일차 욕망이 의지가 되면서 이차 욕망이 이차 의욕이 되기에 거꾸로 일차 의욕 때문에 이차 의욕을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닌가?

 

3. Stump는 전도된 양심이 악으로 지시하는 행위를 하는 것, 즉 자신이 악한 행위라고 믿지만 객관적으로 선한 행위를 하는 것과, 전도된 양심이 선으로 지시하는 행위를 하는 것, 즉 자신의 선한 행위라고 믿지만 객관적으로 악한 행위를 하는 것을 똑같이 나쁘다고 본 후, 그래도 신이 개입하여 후자의 행위를 하는 것이 덜 나쁘다고 본다. 이때 잘못을 범하는 양심이라도 구속력이 있다는 것을 주요한 가정으로 내세운다. 그런데 행위자가 전도된 수준의 비뚤어진 양심을 가질 경우에는 그것의 구속력에 반하더라도 객관적 도덕률을 따라 행위하도록 강제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가장 마지막 부분인 109장에서 말해 못 알아듣는 사람은 법으로 강제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외려 행위자가 행위를 강제받으면서 객관적 선에 따라 양심을 바로세우게 될 가능성이 더 커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