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중세철학 이차문헌

Davidson(1996), "The Vita Beata: Ambrose, De Officiis 2.1-21 And the Synthesis of Classical and Christian Thought in the Late Fourth Century", Recherches de théologie ancienne et médiévale 63

현담 2023. 10. 8. 13:30

(0. 『성직자의 의무(De officiis ministrorum)』(이하 『의무론』’))

 

  암브로시우스의 『의무론』 은 키케로의 동명의 저작을 모델로 삼은 저술이다. (본래 두 저작의 제목은 모두 ‘De offiis’이었는데 후대에 구분을 위해 암브로시우스의 저작에 ‘De officiis ministrorum’이라는 제목을 붙였다고 한다.) 키케로가 자신의 아들과 로마 공화정의 몰락을 목격하는 청년들을 대상으로 저술했듯이, 암브로시우스는 이교 및 아리우스파의 도전을 목격하고 있는 자신의 영적인 후계인 밀라노의 젊은 성직자들에게 도덕적 행위의 이상을 제시하기 위해 『의무론』 을 썼던 것이다. 실제로 두 저작의 구성은 유사하다. 양자 모두 제1권에서는 올바름(honestum, the honourable), 2권에서는 이로움(utile, the expedient), 3권에서는 올바름과 이로움이 궁극적으로는 상충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다룬다.

  Davidson(1996)은 기독교의 관점에서 규정되는 진정한 이로움을 논의하는 제2권의 제1~21(이하 ‘BK2’)을 분석 대상으로 삼는다. 이 부분은 2.12.21에서 키케로를 의식하고 있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의무론』 의 다른 부분과 달리 키케로의 영향을 확인하기 어렵다. 이 때문에 이 부분을 행복에 대한 암브로시우스의 독립적인 설교가 삽입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H 발제문)

 

(1. 서론)

 

  In his Sermo 150, Augustine argues that the desire to attain the vita beata(행복한 삶) has been the motivation for all types of philosophy and that it is also the reason that people would give if asked why they became Christians; the quest is common to all human beings, whether good or evil. [...] The truth of Augustine’s claims is illustrated in a variety of Latin Christian works from the fourth century, which take up the traditional philosophical theme of happiness and the summum bonum(최고선). [...] However, one striking example of the way in which classical perspectives and biblical teaching coexist in a fourth-century Christian mind has been relatively neglected by scholars: namely, the opening section of book 2 of Ambrose’s De Officiis (2.1-21). The passage repays careful study as an illustration of Christian humanism at work.

 

  4세기 교부들의 여러 기독교 저술에서 행복한 삶(vita beata)’최고 선(summum bonum)’이라는 주제가 소화되었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저자는 암브로시우스의 『의무론』  BK2가 이러한 과정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임에도 아직 학계에서 충분히 주목을 받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하며, BK2에서 행복한 삶에 대한 고전 철학의 관점과 기독교의 관점이 공존하고 있는 방식을 밝히려고 한다. (H 발제문)

 

  [...] Ambrose works with two distinct controlling concepts of the vita beata: (1) vita beata in a Christian sense, identified with eternal life; (2) vita beata in a non-Christian sense, associated with virtue, the blessings of a good conscience, and the moral benefits of suffering and privation. The coexistence of these two strands offers a fascinating glimpse into the way in which Ambrose combines biblical perspectives with principles which he has inherited from classical philosophy. I shall consider his handling of each sense of vita beata in turn.

 

(2. 기독교의 관점: 행복한 삶에 대한 표면적 태도)

 

  Faith is a sure foundation on which to build an enduring edifice of good works, and a safe harbour in which the vessel of works may berth (2.7). The blessed life is not a matter of external circumstances, but of freedom from sin and being filled with the grace of God; the beatus vir, as the Psalms way, is he who shuns the company of ungodly and walks according to the laws of the Lord (2.8).

 

  암브로시우스는 표면적으로는 행복한 삶에 대한 기독교의 관점을 채택하고 고전 철학의 관점을 부정하는 태도를 취한다. BK2는 행복한 삶을 성경에 근거하여 영원한 삶으로 규정하고 다시 이 영원한 삶을 신약에 근거하여 현재 경험되는 혜택이자 미래에 주어지는 보상으로 규정한다. BK2에서 한편으로 행복한 삶은 현세에서 경험되는 보상으로 설명되고(2.3), 행복한 삶을 사는 사람은 박해받더라도 정의롭기 때문에 즐거워할 수 있는 모습으로 묘사된다(2.9). 다른 한편으로 행복한 삶은 신으로부터 주어질 미래의 보상인 영원한 삶으로서(2.18) 현세적 보상에 의해 가로막히는 것으로 설명되기도(2.2) 한다. 또한 BK2는 성경의 인물들이 보여주는 일화나 시편·산상수훈의 구절 등 기독교적 언어와 권위를 통해 행복한 삶을 규정하려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기독교의 행복은 고전 철학의 행복보다 우월한 것으로 제시된다. 암브로시우스는 BK2에서 키케로의 『최고선악론』을 따라 행복에 대한 고전 철학의 다양한 견해를 분별하면서도 이러한 다양한 견해를 일괄적으로 잘못된 견해라고 평가한다. 성경에 근거하여 고전 철학의 지혜가 아니라 신에 대한 이해만이 행복에 이르도록 해줄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2.5). 그는 행복에 대한 예언자와 복음의 설명이 고전 철학보다 권위적이라는 점을 시간적 선후관계를 통해 주장하기도 한다. 전자가 후자보다 시간적으로 앞서므로 후자는 전자를 표절한 것이거나 -여기에는 시간적 선후관계를 인과관계로 간주하는 오류(post hoc, ergo propter hoc)가 전제되어 있다-, 전자보다 열등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2.6) 것이다 -여기에는 시간적으로 선행하는 것이 가치적으로 우월하다는 오류가 전제되어 있다-. 아울러 고전 철학의 견해가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반면 성경의 견해가 명료하고 권위 있게 제시된다는 점을 들어 기독교의 관점을 옹호하기도(2.8) 한다. (H 발제문)

 

(3. 고전 철학의 관점: 행복한 삶의 실질적 내용)

 

  However, Stoicism consistently maintained that the highest end is a life of virtue, whether this is attained by repudiation of every vice and detachment from externals (so the ancient Stoa), or by rational control of subrational passions and judicious handling of one’s personal nature and circumstances (so the middle and later Stoics); outward good fortune is not necessary to happiness. We find Ambrose striking the same note.

 

  행복한 삶에 대한 BK2의 견해가 표면적으로 성경에 권위를 두고 있는 것과 달리 그 구체적인 내용은 스토아 학파, 신플라톤주의의 견해와 친연성을 보인다. 암브로시우스가 스토아 학파의 견해를 따르고 있다는 점은 양심, 외적 선과 덕에 대한 BK2의 설명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BK2에서 행복한 삶은 양심의 평온(과 무죄에 대한 확신)을 통해 확보된다고 설명된다(2.19). 이때 신약에서 양심이 신 앞에서의 양심으로 규정되는 것과 달리 BK2에서는 양심이 온전히 한 개인의 내면에서 규정될 수 있는 것처럼 설명하는 대목들도(2.21) 발견된다. 양심에 대한 이러한 설명은 자신의 내면의 로고스에 근거하여 이성적 통제를 수행할 수 있다는, 스토아 현자의 자족(autarcheia)에 상응한다. (H 발제문)

 

  The difficulty lies in the ambiguity of Ambrose’s Latin: does per quam refer to vitam beatam or to virtute sola? Is eternal life obtained by the blessed life, or by virtue alone? [...] Supporters of this interpretation are uneasy with the alternative view, that Ambrose is making virtue the sole prerequisite for vita aeterna, without mentioning faith. Nevertheless, I believe that this second reading is more persuasive: the antecedent of per quam is virtute sola.

 

  It is of course clear from 2.5-7 and 2.9 that he thinks of virtus in terms of Christian good works, and in 2.9 he asserts that good works earn the blessedness of eternal life, again without referring to faith (which appears in 2.5-7). He thus fuses Stoic and Christian ideas: virtue is the ‘hope and cause of heaven’, the prerequisite for earthly happiness and for eschatological bliss.

 

  또한 BK2는 외적 선이 행복한 삶에 전혀 필요하지 않으며 행복한 삶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오직 덕만이 필요할 뿐이라는 스토아 학파의 전통적인 입장을 취한다. 덕은 유일한 최고선으로 간주되며(2.18) 성경에서 제시되는 인물들의 행복한 삶은 궁핍·위험·상실 등 외부 조건에 휘둘리지 않는 스토아 현자의 부동심(apatheia)과 유사한 방식으로 묘사된다(2.20). 행복에 도움이 되지 않는 부()에 무관심한 삶을 강조한 것(2.15)현자만이 부유하다.’라는 스토아 철학의 역설과 유사하며 종의 신분으로도 주인의 욕정에 저항한 요셉이 행복했다는 설명(2.20)현자만이 자유롭다.’라는 스토아 철학의 역설과 유사하다. (H 발제문)

 

  Where he differs from all the Stoics (and especially, of course, from the perspective of Seneca) is in his argument that riches are in fact a hindrance to the vita beata, and that poverty is a blessed state (2.13-17; cf. 1.28-29,59-64,241-245). At this point, he is inspired once more by his reading of Scripture, and particularly with the Beatitude, ‘Blessed are the poor...’ (2.15; cf. 1.59): the godly poor are unencumbered by the dangers of wealth, and in the realization of their need they seek help from God, who will furnish them with eternal riches as a reward for their faithfulness, while the evil rich will be punished (2.16; 2.2.).

 

  But not only is mental or spiritual prosperity superior to physical; Ambrose argues that physical troubles are spiritually beneficial: suffering is in fact conducive to the attainment of ultimate blessedness (2.10-21). He is here differing from traditional Stoicism, which views these conditions as morally neutral (though Epictetus and Seneca can also see some value in suffering.)

 

  다만 BK2는 외적 선을 스토아 학파에서처럼 중립적인 것으로 이해하지 않고 성경의 관점에 따라 부정적인 것으로 이해한다는 점에서 스토아 학파의 견해와 차이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저자는 이러한 견해가 한편으로는 겉으로 드러나는 영광을 피하는 것이 진정한 영광이라 생각하는 로마인들의 전통적인 태도에 근거해 설명되거나 신플라톤주의의 관점에서 설명된다는 점에서 암브로시우스가 여전히 고전적인 태도를 유지한다고 평가한다. (H 발제문)

 

  However, scholarly preoccupation with the Ciceronian input into the Christian De Officiis has tended to produce a neglect of another vital element of Ambrose’s thought neo-Platonism.

 

  당시 밀라노는 기독교적 신플라톤주의의 중심지였다는 사실과 암브로시우스의 여러 설교에서 신플라톤주의 저작이 동원되고 있다는 사실은 신플라톤주의에 대한 친연성을 보여준다. BK2에서는 육체와 영혼의 엄격한 이원론을 취하고 있다는 점을 통해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이 확인된다. BK2는 신플라톤주의에서와 마찬가지로 행복한 삶을 육체가 아닌 영혼의 차원에서 규정한다(2.19). 그뿐만 아니라 육체적인 고통이 영혼의 유덕함과 행복에 도움이 된다고까지 설명하기도 하는데(2.10·20), 이러한 설명은 육체적 고통이 경험되는 지상을 천상의 완전함에 도달하기 위해 영혼이 정화되는 시험장으로 이해하는 신플라톤주의의 견해와 유사하다. 성경에 근거하여 행복한 삶과 영원한 삶을 동일시했으면서도 BK2에서 지상의 행복한 삶과 천상의 영원한 삶을 서로 다른 단계로 구분하여 제시한 것(2.18)은 이러한 신플라톤주의의 견해를 반영한 결과라고도 볼 수 있다. (H 발제문)

 

(4. 결론)

 

  I do not believe, however, that Ambrose’s De Officiis as a whole is intended as an apologetic exercise, an attempt to bridge the world of pagan philosophy and literature with the world of Christian fatih and ecclesiastical life. Rather, Ambrose seeks to show how Christianity can commence with classical ideals, keep whatever is congenial and whatever does not (rightly or wrongly) appear to him to conflict with the Faith, and go on to demonstrate that Christians can attain to profounder levels of spiritual insight and moral achievement.

 

『의무론』  BK2에서는 행복에 대한 기독교의 관점에 근거하여 고전 철학의 관점을 비판하면서도 스토아 학파와 신플라톤주의의 주요한 관점을 흡수하는 혼합된 관점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혼합된 관점은 기독교의 관점이 우월하다(nobler)는 점을 고전 철학의 방식으로 보이려고 한 데에서, 다시 말해 행복론을 비롯한 고전 철학의 사상이 신앙과 상충하지 않는 한 기독교에서 유지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에서 더 높은 성취가 가능함을 보이려고 한 데에서 비롯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암브로시우스가 살았던 4세기 후반에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이러한 혼합된 관점은 기독교 신학이 고전 철학과 성경이라는 서로 다른 근원을 바탕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H 발제문)

 

수업 토론 (H 정리)

 

참고: 2.18에 대한 해석적 논란

2.18: virtute sola vitam praestari beatam per quam vita aeterna acquiritur.

영원한 삶을 얻게 하는 행복한 삶을 덕만이 보장한다.

덕만으로 행복한 삶을 성취할 수 있지만 영원한 삶은 성취할 수 없다. (신앙이 필요)

영원한 삶을 얻게 하는 덕만이 행복한 삶을 보장한다. (Davidson, 최원오)

덕만으로도 현세에서는 행복한 삶을, 내세에서는 영원한 삶까지 성취할 수 있다.

스토아: 덕만으로도 행복을 성취할 수 있다.

신플라톤주의: 천상을 향한 영혼의 진보 과정에서 행복은 단계적으로 경험된다.

 

코멘트 및 의문

1. 행복이 현재의 경험이자 미래의 보상이라는 복음의 설명에 대한 논란?

  → 스콜라 철학: 현세에서는 원죄 때문에 완전한 행복을 경험할 수 없지만 내세의 완전한 행복을 조금씩 경험할 수 있는 기회는 있다.

 

2. 스토아의 자족(autarcheia)은 목적(행복)의 성취를 위해 외부 조건()을 필요로 하지 않음?

신은 내면과 연결되어 있으므로 외적 조건이라고 이해할 수 없다. 나의 양심을 규정하기 위해 초월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의미로는 이해될 수 있다.

 

3. 저자의 설명대로라면 스토아 학파의 견해는 현세의 행복을 설명하는 논리로 활용되고 신플라톤주의의 견해는 현세의 행복에 안주하지 않고 미래의 행복으로 나아가야 할 필요성을 설명하는 논리로 활용되는 듯하다.

 

4. 고통은 잘 견뎌내면 되는 것인가, 아니면 찾아나서야 할 대상인가?

4세기 무렵 기독교 이론에서 고통을 행복의 구성 요소로 인정하게 된 것은 박해 경험과 관련지어 이해될 수 있다.

 

5. BK2에서 고전 철학을 부정해야 한다는 주장은 아직 충분히 (고전 철학적인 의미에서) 논증되지 못한 듯하다. 그가 동원하는 근거는 성경(복음)의 진술, 성경 진술의 시간적 선행(오류), 성경 진술의 명료성·권위일 뿐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에서는 행복을 영원성 개념과 관련지어 이해하는 관점을 도입함으로써 기존의 고전 철학보다 우월함을 주장할 수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