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고대철학 일차문헌

아리스토텔레스, 「제1권」 7장, 『니코마코스 윤리학』

현담 2023. 2. 5. 23:00

<1권 목차>

 

1장 좋음과 목적

2장 최고선과 정치학

3장 논의의 방법

4장 최고선에 관한 통념들

5장 행복과 세 가지 삶의 유형

6장 좋음의 이데아 비판

7장 우리가 추구하는 좋음과 행복

8장 정의된 행복과 통념의 부합

9장 행복을 성취하는 방법

10장 행복과 운명

11장 행복과 죽음 이후

12장 칭찬과 명예

13장 영혼의 탁월성

 

7장 우리가 추구하는 좋음과 행복 (1097a15-1098b8)

 

1. 다양한 좋음과 최상의 좋음(최고선) (1097a15-23)

 

1. 서로 다른 행위나 기술에 있어서 좋음은 각기 다른 것으로 나타난다.

  1-1. 의술에 있어서 좋음은 건강이다.

  1-2. 병법에 있어서 좋음은 승리이다.

  1-3. 건축술에 있어서 좋음은 집이다.

  1-4. 다른 경우에 있어서 좋음은 각기 다른 것이다.

2. 모든 행위와 선택에 있어서 좋음은, 사람들이 모두 이것을 위해서 나머지 일들을 하는, 목적이다.

3. 그러므로, 행위에 의해 성취할 수 있는 모든 것의 목적이 하나가 있다면, 이것이 행위에 의해 성취할 수 있는 좋음(최상의 좋음)일 것이다.

4. 그러므로, 행위에 의해 성취할 수 있는 모든 것의 목적이 하나 이상이라면, 이것들이 행위에 의해 성취할 수 있는 좋음들(최상의 좋음들)일 것이다.

 

Ar. begins from the diversity of goods that we must recognize when we reject the Platonic attempt to find unity in goods. He wants to show that this diversity does not require us to reject unity in the human good. [...] After these illustrations of diversity in goodness, Aristotle focuses on the aspect of unity in the different cases. [...] The seond part(4.), allowing the possibility of many goods constituting the end, helps to explain why the beginning of ch.2 was expressed in conditional form. Ar. now makes it clear that he has not proved that there is just one end of human action. (Irwin, 180)

 

Q : 1.에서는 서로 다른 행위나 기술(in one action or craft Irwin, in one activity or sphere of expertise B&R)’이 주어였는데, 2.에서는 모든 행위와 선택(in every action and decision Irwin, in every activity and undertaking B&R)’이 주어이고, 3.에서는 행위에 의해 성취할 수 있는 모든 것(everything achievable in action Irwin, all practical undertaking B&R)’이 주어인 이유가 있을까?

A : ‘서로 다른 행위나 기술은 좋음의 다름을 강조하지만, ‘모든 행위와 선택은 다른 좋음들이 모두 목적임을 강조함. 그러므로, ‘모든 행위와 선택은 어떤 기술적 영역이나 행위 영역 내에서 성립하는 실천적 계기들을 표현하는 것으로 보임. 한편, ‘행위에 의해 성취할 수 있는 모든 것은 특정 영역들에서 성립할 수 있는 서로 다른 좋음들을 모두 일컫는 것일텐데, 그것의 목적이라면 최고선일 것. 그러므로, ‘행위에 의해 성취할 수 있는 모든 것서로 다른 행위나 기술의 층위에서 가장 보편적이고 우위에 있는 좋음의 층위로 나아가기 위한 단계를 설정. 결국, <2.에서 모든 행위와 선택’ - 1.에서 서로 다른 행위나 기술’ - 3.에서 행위에 의해 성취할 수 있는 모든 것’ - 최고선>의 구도로 볼 수 있음.

 

2. 가장 완전한 목적으로서 최고선, 곧 행복 (1097a24-1097b6)

 

1. 모든 목적이 다 완전한 것은 아니다.

2. 최고선은 분명 완전한 어떤 것이다.

3. 만약 (모든 목적 중) 어떤 하나만이 완전한 것이라고 한다면, 이것이 최고선이다.

4. 만약 (모든 목적 중) 여럿이 완전한 것이라면, 그것들 중에서 가장 완전한 것이 최고선이다.

 

a. x가 완전하다. iff x는 그 자체로 선택된다.

b. xy보다 더 완전하다. (yx보다 덜 완전하다.) iff x는 그 자체로 선택되지만, y는 다른 것 때문에(도) 선택된다.

c. x는 단적으로 완전하다. (x는 가장 완전하다.) iff x는 언제나 그 자체로 선택될 뿐 결코 다른 것 때문에 선택되는 일이 없다.

 

완전성의 위계 : 다른 것 때문에 선택되는 것 < 그 자체로도 선택되고, 다른 것 때문에도 선택되는 것 < 언제나 그 자체로 선택될 뿐 결코 다른 것 때문에 선택되지 않는 것

 

1. 우리는 명예, 즐거움, 지성(nous), 그리고 모든 탁월성들을, 이것들로부터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고 해도, 그 자체 때문에 각각을 선택한다.

2. 그렇지만 우리는 명예, 즐거움, 지성, 그리고 모든 탁월성들을, 이것들을 통해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각하며 행복을 위해서도 선택한다.

3. 반대로 (우리 중) 누구도 명예, 즐거움, 지성, 그리고 모든 탁월성들을 위해서 행복을 선택하지는 않으며, 일반적으로 다른 어떤 것 때문에 (행복을) 선택하지도 않는다.

4. 그러므로, 행복은 단적으로(가장) 완전한 것이다. (그러나 명예, 즐거움, 지성, 그리고 모든 탁월성들은 조건적으로() 완전한 것이다.)

5. 따라서, 행복은 최고선이다.

 

3. 자족적인 것으로서 최고선, 곧 인간적인 좋음 (1097b7-16)

 

1. 최고선은 완전하다(=완전한 좋음이다).

2. 완전한 좋음은 자족적이다.

3. 최고선은 자족적이다(=자족적인 좋음이다).

 

x가 자족적이다. iff x는 그 자체만으로도 삶을 선택할 만한 것으로 만들고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다.

 

Q : “자족성은 자기 혼자를 위한 자족성, 고립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위한 자족성인가?”

A : “인간은 본성상 폴리스적[=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야기하는 자족성은 자기 혼자만을 위한 자족성, 고립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위한 자족성이 아니다. 부모, 자식, 아내와 일반적으로 친구들과 동료 시민들을 위한 자족성이다.”

 

1. 자족성은 인간을 위한 자족성이다.

2. 인간은 본성상 폴리스적[=사회적] 동물이다.

3. 폴리스적 동물은 부모, 자식, 아내와 일반적으로 친구들과 동료 시민들과 함께 살아간다.

4. 자족성은 부모, 자식, 아내와 일반적으로 친구들과 동료 시민들(과 함께 살아가는 인간)을 위한 자족성이다.

(5. 최고선은 자족적인 좋음이다.

6. 최고선은 부모, 자식, 아내와 일반적으로 친구들과 동료 시민들과 함께 살아가는 인간을 위한 좋음이다.)

 

폴리스적 삶의 범위 혹은 자족성의 범위가 문제시됨.

 

물론 여기에는 어떤 한계가 부과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부모의 선조를 거슬러 올라가거나 자식과 그 밑의 후손, 친구의 친구 하는 식으로 늘려 간다면 무한히 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추후에 검토하기로 하자.”(1097b11-14)

 

4. 가장 선택할만한 좋음으로서 행복 (1097b17-20)

 

1. 만약 행복을 좋음들 가운데 하나로 센다면(셀 수 있다면), 좋음들 중에서 가장 작은 것을 행복에 덧붙일 경우 (좋음이 덧붙은) 행복은 (좋음이 덧붙지 않은 행복보다, 행복 자체보다) 더 선택할 만한 것이 될 것이다.

(2. 어떤 것이 그보다 더 선택할 만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가장 선택할만 한 것이 아니다.)

3. 그러므로, 만약 행복을 좋음들 가운데 하나로 셀 수 있다면, 행복 자체는 가장 선택할만 한 것이 아니다.

4. 그러나, 행복 자체는 가장 선택할만 한 것이다.

4*. 행복은 좋음들 가운데 하나로 셀 수 있다.

5. 따라서, 행복은 좋음들 가운데 하나로 셀 수 없다. (, 행복은 모든 좋음들을 포괄한다.) (, 행복은 질적으로 다른 좋음들과 다르다.)

5*. 따라서, 행복 자체는 가장 선택할만 한 것이 아니다. (, 행복은 모든 좋음들을 포괄하지 않는다.) (대신, 행복 자체는 셀 수 있는 좋음들 가운데에서는 가장 선택할만한 좋음이다. or 대신, 행복 자체는 다른 좋음들을 덧붙이지 않는 한에서 가장 선택할만한 좋음이다.)

 

Different construals are possible, yielding opposite meanings: (1) The phrase ‘it not being counted with other goods’ introduces a necessary condition for thinking happiness the most desirable thing. (2) The phrase introduces a ground for thinking this. On (1), happiness is the most desirable single good, but not the most desirable good, since the combination of it plus any of the others would be most desirable. So understood, the passage is inconsistent with the main purpose of the chapter so far, which is to show that the highest (i.e. best, most desirable) human good is rightly identified with happiness. On (2), the preferable interpretation, happiness can be seen to be the most desirable thing from the assumed fact that (pre-reflectively) it does not lend itself to being counted along with other goods. Since no other good can be added to it to take a more desirable combination, its status as maximally desirable is assured. (B&R, 275) 나는 여기서 B&R(2) 해석에서 후건긍정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생각함. 행복의 불가산성은 행복의 가장 선택할만 한 것임에서 따라나오는 것이고, 행복의 불가산성이 곧 행복의 포괄성임. 그러나 B&R은 행복의 불가산성에서 행복이 가장 선택할만한 것임이 따라나오고, 이것이 행복의 포괄성이라고 생각함.

Two possibilities: (a) An inclusive conception: The argument seeks to show that happiness is comprehensive (including all noninstrumental goods) by arguing that if it were not comprehensive, we would face the absurdness with some other noninstrumental good) than happiness itself. (b) An exclusive conception: The argument seeks to show that happiness does not embrace all intrinsic goods, by pointing out that we can identify a greater good than happiness (i.e., the combination of happiness with some other noninstrumental good) [...] the discussion of self-sufficiency seemed to imply an inclusive conception of happiness (i. it requires some contribution by other people, but also in the strong sense that ii. it includes the happiness of these other people)

행복은 여타 좋음들의 합이 아니라 여타 좋음들과 질적인 층위가 다른 좋음이다. (N씨)

 

그렇다면(행복이 모든 좋음들을 포괄한다면) 행복은 완전하고 자족적인 어떤 것으로서, 행위를 통해 성취할 수 있는 것들의 목적(최고선)이다.”(1097b20)

 

5. 인간의 기능(ergon) (1097b20-1098a20)

 

Re-Revised Main Question : 최고선인 행복이란 무엇인가? (4장 참고)

 

하지만 행복이 최상의 좋음[=최고선]이라는 주장은 아마 일반적으로 동의될 것으로 보이긴 해도, 보다 분명하게 행복이 무엇인지를 이야기하는 것이 요구된다.”(1097b21-22)

 

위에서 행복이 최고선으로 단지 불릴 뿐만 아니라 행복이 곧 최고선임을 밝혔기 때문에 “Main Question : 최고선이란 무엇인가?”(4장 참고)가 "Revised Question : 최고선이라 불리는 행복은 무엇인가?"(4장 참고)에서 다시 수정됨.

 

Subordinate Question : 인간의 기능은 무엇인가?

 

전제 : 인간에게도 기능이 있다. (1097b28)

 

(1. 어떤 것의 좋음은 그것의 기능에 있다.

2. 그러므로, 인간의(=인간적인) 좋음은 인간의 기능에 있다.

3. 행복은 인간적인 좋음이다.

4. 따라서, 행복은 인간의 기능에 있다.)

 

Revised Subordinate Question : 인간만의 고유한 기능은 무엇인가?

 

“[...] 눈이나 손, , 그리고 일반적으로 각각의 부분들이 어떤 기능을 가지고 있듯이 그렇게 인간에게도 이 모든 기능들 외에 어떤 기능이 있다고 상정해야 할까? 그렇다면 그것은 대체 무엇일까? [...] 우리는 [인간에게만] 고유한 것을 찾고 있으니 말이다.”

 

a. 영양 섭취와 성장하는 삶 식물적 삶 인간에게만 고유한 삶 x

b. 감각을 동반하는 삶 동물적 삶 인간에게만 고유한 삶 x

c. 이성을 가진 것의 실천적 삶 인간에게만 고유한 삶 o 인간만의 고유한 기능

 

반론 : aA에 고유하다고 해서, a를 잘 활용하는 것이 A의 기능은 아니다. 예컨대, 세상에 모든 칼들 중 하나의 칼만 고유한 체크무늬가 있다고 해도, 그 체크무늬를 잘 활용하는 것이 그 칼의 기능이 아니다. 그 칼 역시 자르는 것이 그것의 기능이다. 마찬가지로 식물이나 동물과 달리 인간에게만 이성이 고유하더라도, 그것을 활용하는 삶이 인간의 기능인 것은 아닐 수도 있고 오히려 식물적 삶이나 동물적 삶을 영위하는 것이 인간의 기능일 수도 있다.

A : 고유함을 잘못 이해한 반론이다. 무엇의 고유함은 여기서 무엇을 그 무엇으로 만들어주는 본질로 이해해야 한다. 예컨대, 칼은 어떤 칼이든 자르는 도구임이 그 본질이다. 그래서 체크무늬가 고유한칼이든 아니든 간에 잘 자르는 것이 그것의 기능이다. 식물의 본질은 영양 섭취와 성장이고, 동물의 본질은 감각의 동반이며, 인간의 본질은 이성의 실천이다. “That the being or essential nature of an individual is expressed through a typifying activity is the central doctrine of Ar.‘s metaphysics.”(B&R, 276) 여기서 우리는 기능(ergon)이 본래 도구적 뉘앙스를 가지기 보다는 일이나 특성적 활동(characteristic activity Crisp)이라는 뉘앙스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N씨), 기능을 도구적으로 이해하기보다는 본질 구현 활동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아보인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고유한 것이 이성이고, 인간에게 고유한 기능이 이성의 실천이라고 할 때,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

 

Q : 이성을 가진 것의 실천적 삶이 무엇인가?

A : 아래 도표 참고. (아래 도표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113장 참고)

  이성을 가진 것 (이성을 가진 영혼의 부분)
이성에 복종 (욕구적 부분) 그 자체 이성을 가지고 사유함 (일차적인 의미의 이성)
능력(dynamis)
에 따른 삶
x x
활동(energeia)
에 따른 삶
o o

 

Subordinate Answer : 인간만의 고유한 기능은 이성에 따른 영혼의 활동이다.

 

인간의 기능을 이성에 따른 활동 혹은 이성이 없지 않은 영혼의 활동이라고 상정할 수 있을 것이다.”(1098a8)

 

Main Answer : 행복은 탁월성에 따른 영혼의 활동이다.

 

(1. 인간의(=인간적인) 좋음은 인간의 기능을 잘, 그리고 훌륭하게 행하는 것이다.

2. 인간의 기능은 이성에 따른 영혼의 활동이다.

3. 그러므로, 인간적인 좋음은 이성에 따른 영혼의 활동을 잘, 그리고 훌륭하게 행하는 것이다. , 인간의 좋음은 탁월성에 따른 영혼의 활동이다.

4. 행복은 인간적인 좋음이다.

5. 따라서, 행복은 탁월성에 따른 영혼의 활동이다.)

 

+ 완전한 탁월성 : “만약 탁월성이 여럿이라면 그중 최상이며 가장 완전한 탁월성에 따르는 영혼의 활동이 인간적인 좋음일 것이다.”

+ 완전한 삶 : “나아가 그 좋음은 완전한 삶 안에 있을 것이다. 한 마리의 제비가 봄을 만드는 것도 아니며 [좋은 날] 하루가 봄을 만드는 것도 아니니까. 그렇듯 [행복한] 하루나 짧은 시간이 지극히 복되고 행복한 사람을 만드는 것도 아니다.”

 

Revised Main Answer : 행복은 완전한 삶 안에서 가장 완전한 탁월성에 따른 영혼의 활동이다.

 

6. 행복을 탐구하는 방법 (1098a21-1098b8)

 

6-1. 윤곽선을 그리고 상세하게 메워나가기

 

이것을 좋음의 밑그림으로 삼기로 하자. 아마도 먼저 윤곽선을 그린 후 그 다음에 상세하게 메워 나가야 할 터이니, 그 윤곽이 잘 그려진 것을 진척시키고 정교하게 완성하는 것은 누구든 할 수 있는 일처럼 보이며, 이러한 경우 시간이 발견자이자 좋은 조력자인 것처럼 보인다.”(1098a22-24)

 

6-2. 탐구에 적합한 만큼 정확성을 추구하기 (3장 참고)

 

즉 정확성이란 모든 분야에서 한결같이 찾을 것이 아니라, 각각의 경우마다, 주어진 주제에 따라, 또 각각의 탐구에 적합한 바로 그만큼만 추구해야 할 것이다.”(1098a27-29)

 

6-3. 원리들에 대해서는 이유를 요구하지 말기

 

또 모든 경우에 있어서 한결 같은 방식으로 그 이유(aitia)를 대라고 요구할 일도 아니다. 어느 경우에 있어서는, 가령 원리들(archai)에 관한 것처럼, ’사실이 그렇다는 것‘(to hoti)을 잘 드러내는 것으로 충분하다. 사실이 그렇다는 것이 일차적이며 원리이다.”(1098b1-3)

 

Having reached his own definition of the chief good, Ar. now treats it as starting point for further inquiry (see next note). He probably does not mean the distinction ‘that it is so’ - ‘why it is so’ to apply literally to the doctrine (D) that the chief good is excellent rational activity in a complete life. D itself is supposed to provide the why of pre-philosophical values, and it is difficult to see what space there could be for a yet more fundamental explanation of the why of D. Rather, he means an analogy between the inapporpriateness of expecting the implications of D to be spelled out with absolute precision, and the inappropriateness of always asking ‘Why?’ (B&R, 279)

[...] this passage on archai is concerned with theoretical principles known without qualification (in this case, the account of happiness), and not with the starting points in our inquiry. Starting points are beliefs that need some further explanation. Theoretical principles provide the necessary explanation, and so a further explanation cannot be given for them. (Irwin, 186)

 

6-4. 각각의 원리들은 그 본성에 따라 파악하기

 

각각의 원리들을 그것들이 본성적으로 그러한 대로 추적해야 할 것이며, 그것들을 잘 정의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1098b4-5)

 

원리를 파악하는 방식 : 귀납, 지각, 습성화 등. 1) Which of these means is most appropriate for ethical principles? Aristotle discusses habituation further in the following books. (Irwin, 186) 2) Habituation is the source of pre-reflective values, which are the starting points of ethical inquiry. In the present passage, Ar. particularly has in mind a starting point not grasped by sense-perception or habituation (though induction may play a part), namely his own definition of happiness. Although this was reached in the course of inquiry, it launches new inquiries, particularly concerning the excellences. (B&R, 279)

 

6-5. 원리들의 중요성

 

이 일은 뒤따르는 것들에 대하여 큰 무게를 갖기 때문이다. 원리들은 전체의 반 이상이며, 우리가 탐구하는 많은 문제들이 원리들을 통해 분명해지는 것처럼 보이니까.”(1098b6-8)

 

A Greek proverb; i.e., ‘Well begun is more than half do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