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고대철학 일차문헌

플라톤, 「도입부」(43a-44b), 『크리톤』

현담 2023. 2. 14. 17:49

<목차>

 

1. 도입부 (43a-44b)

 

2. 크리톤의 탈옥 권유 (44b-46a)

3. 크리톤의 권유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응수 (46b-50a)

4. 의인화한 법률의 연설 (50a-54d)

5. 종결부 (54d-e)

 

1. 도입부 (43a-44b)

 

소크라테스 : 이 시간에 웬일로 왔지, 크리톤? 아직 이르지 않나?

크리톤 : 물론 이르지.

소크라테스 : 시간이 얼마나 됐나?

크리톤 : 어두운 새벽녘이네.

[...]

소크라테스 : 그런데 자네는 방금 왔나, 아니면 온 지 한참 됐나?

크리톤 : 꽤 한참 됐네.

소크라테스 : 그러면 어째서 곧바로 날 깨우지 않고 말없이 앉아만 있었나?

크리톤 : 단연코 나는 자넬 깨우고 싶지 않았네, 소크라테스. 바로 내가 자네라 해도 심한 불면 상태와 고통 속에 있고 싶지는 않았을 테지만, 자네가 얼마나 달게 자고 있는지를 보면서 사실 나는 한동안 놀라워하고 있었다네. 그래서 자네가 가능한 한 즐겁게 시간을 보내도록 일부러 자넬 깨우지 않았던 거네. 나는 평생을 살면서 전에도 여러 차례 자네의 성향 때문에 자네가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지금 직면한 불운 속에서 자네가 이를 얼마나 수월하고 차분하게 견뎌 내는지를 보고는 훨씬 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네.(Well of course I didn't wake you, Socrates! I only wish I weren't so sleepless and wretched myself. I've been marvelling all this time as I saw how peacefully you were sleeping, and I deliberately kept from waking you, so that you could pass the time as peacefully as possible. I've often admired your disposition in the past, in fact all your life; but more than ever in your present plight, you bear it so easily and patiently. - Gallop, 63)

소크라테스 : 크리톤, 곧 죽어야 한다고 해서 내 나이에 화를 내는 건 적절하지 못할 것이네.(Well, Crito, it really would be tiresome for a man of my age to get upset if the time has come when he must end his life. - Gallop, 63)

 

*어두운 새벽녘(orthros bathys) : 새벽이 될 무렵이기는 하나 그 직전은 아니고 아직 밤의 어둠이 짙은 때를 가리킨다. (역자주, 51)

 

잠에서 깬 소크라테스가 크리톤에게 먼저 묻는 질문은 크리톤, -1) 어쩐 일이야? ➀-2) 아직 이르지 않아?이다. -2) 아직 이르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이어서 -1) 용건을 묻는 대신, 그가 바로 다음에 묻는 질문은 크리톤, 이제 막 온거야, 와서 기다린 거야?”이다. 자신의 친구가 와서 기다렸다는 사실을 확인하고서는 왜 깨우지 않고 기다렸던 건지 묻는다. 그는 친구가 찾아온 용건보다 잠들어 있던 자신 앞에서 앉아 기다리고 있었을 친구를 먼저 생각했던 것이다. 요컨대, 소크라테스는 친구가 이른 시간에 찾아온 것에 대한 상황 파악과 함께 놀라움과 반가움을 표시한 후, 바로 친구가 자고 있던 자신을 깨우지 않았던 상황을 파악하고 왜 그랬는지를 물으면서 고맙고 미안함을 넌지시 드러내고 있다.

  크리톤은 소크라테스의 그런 감정들을 이해하고, “네가 그렇게 꿀잠을 자는데 어떻게 깨우냐?”라는 식으로 말하기보다는, 내가 너였다면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잠시라도 단잠을 청하고 싶었을 거야.”라고 다정하게 말한다. 나아가 크리톤은 자신의 이러한 말이 친구가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잠으로 도피하고 있었다는 뉘앙스를 풍길까 걱정함과 동시에, 자신의 친구가 고통스러운 상황을 태연하게 견디며 잠을 청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대한 진심어린 존경을 전달하기 위해 나는 너가 평소에도 너의 성향에 따라 행복한 사람인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러한 불운 속에서도 너의 성향에 따라 담담하게 잠을 잘 수 있다는 사실이 참 놀랍고 멋져.”라고 덧붙여 말한다. 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110장의 다음 구절들을 떠올리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귀함(kalon)은 이러한 불운들 가운데에서도 빛을 발한다. 누군가 크고도 많은 불운들을 고통에 무감각해서가 아니라 고결하고 담대한 성품의 소유자이기 때문에- 침착하게 견뎌낸다면 말이다.”(1100b31-33)

 

만일 사정이 이렇다고 한다면 행복한 사람은, 물론 프리아모스가 당한 것과 같은 비운이 덮친다면야 지극히 복될 수도 없겠지만, 결코 비참하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 그는 행복으로부터 쉽게 내버려지지 않을 것이고, 그 어떤 흔한 불운들에 의해서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며, 만약 그가 흔들린다면 수없이 닥치는 큰 불운에 의해서만 그럴 것이기 때문이다.”(1101a6-10)

 

  행복한 사람은 탁월성을 자신 안에 단단히 지니고 있어 크고 많은 불운이라는 외적 조건에도 여전히 아름다운 사람이다. 그는 지극히 복되다고 말할 순 없어도 결코 비참하지는 않다.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크리톤의 존경과 칭찬이 낯간지러운지 살만큼 산 사람이 이제 죽는다고 화를 내면 쓰겠나?”라고 유머를 던진다. 장수한 사람이 더 이상 삶을 바란다면 욕심을 부리는 것이리라는 말로 자신의 탁월한 성정이 고통을 견디며 고귀함을 발하고 있다는 크리톤의 말에 정확하게 대응하지 않고 주의를 돌리며 분위기를 풀고 있는 것이다.

  이 짧은 대화 속에서 소크라테스와 크리톤은 성숙한 우정의 전형을 보여준다. 서로 반가워하고, 고마워하면서 미안해하고, 공감하고, 존경하고, 농담을 나누는 사이, 그것이 진정한 친구 사이가 아닐까? 그리고 그러한 친구 사이에서 피어나는 서로에 대한 감정이 진정한 우정이지 않을까 싶다.

 

크리톤 : 소크라테스, 자네 나이가 된 다른 사람들도 그와 같은 불운에 사로잡히지만, 그들의 경우는 나이가 당면한 운명에 대해 화내는 일이 없도록 만들어주지는 못하네.

소크라테스 : 그렇긴 하지. 그런데 자네는 왜 이렇게 일찍 온 거야?

크리톤 : 소크라테스, 슬픈 소식을 갖고 왔네. 내가 보기에, 자네에겐 슬픈 소식이 아니겠지만, 나를 비롯한 자네의 친구들 모두에게는 슬프고 참담한 소식이네. 내가 생각하기에, 이것은 누구보다도 내가 견뎌 내기에 가장 참담한 소식일 것이네.

 

크리톤은 소크라테스의 농담을 진지하게 받는다. 장수한 사람도 더 삶을 바라며 욕심을 부린다고 말하면서. 크리톤은 소크라테스가 농담으로 제시한 내용에서도 사실 소크라테스의 탁월성 덕분에 그것이 가능함을 지적하고 있다.

이제야 소크라테스는 -1) 크리톤이 찾아온 용건을 묻는다. 이에 크리톤은 소크라테스에겐 슬프지 않지만, 그의 친구들 모두에게는 슬픈, 무엇보다 소크라테스를 가장 친한 친구로 생각하는 자신에게는 가장 참담한 소식, 즉 소크라테스가 곧 죽게 된다는 소식을 들고왔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