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고대철학 일차문헌

플라톤, 「소크라테스의 응수」(46b-50a), 『크리톤』

현담 2023. 2. 15. 18:59

<목차>

 

1. 도입부 (43a-44b)

2. 크리톤의 탈옥 권유 (44b-46a)

 

3. 크리톤의 권유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응수 (46b-50a)

  3-1. 소크라테스와 원칙 (46b-c)

  3-2. 다수의 판단이 아니라 전문가의 판단을 따라야 한다. (46c-48a)

  3-3. 사는 것이 아니라 정의롭게 사는 것을 중시해야 한다. (48a-d)

  3-4. 정의의 원칙들 (48d-49e)

  3-5. 정의의 원칙들의 적용 (49e-50a)

 

4. 의인화한 법률의 연설 (50a-54d)

5. 종결부 (54d-e)

 

3. 크리톤의 권유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응수 (46b-50a)

 

소크라테스 : 친애하는 크리톤, 자네의 열의가 어떤 옳음을 동반하고 있다면, 그것은 크게 가치가 있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 열의가 더하면 더할수록 그만큼 더 그것은 내게 곤혹스러운 것이네. 그러니 우리는 그렇게 실행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고찰해야 하네.

 

크리톤의 탈옥 실행에 대한 열의는 옳음을 동반하고 있는지(탈옥이 옳은 것인지) 고찰되어야 크게 가치 있을 것이고, 아니라면 곤혹스러울 것일 뿐. 아래에서부터 크리톤의 열의가 가치가 있는 것인지 확인하고자 하는 소크라테스의 고찰이 시작됨. 중요한 점은 소크라테스가 단지 자신의 탈옥이 옳고 그른지를 고찰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고찰을 통해 친애하는 크리톤의 열의가 가치 있는 것인지를 평가하는 것이 궁극적 목적이라는 점.

 

3-1. 소크라테스와 원칙 (46b-50a)

 

*원칙(logos) : ‘원칙으로 옮긴 ‘logos’는 말, 주장, 원칙, 이성, 논변(논증) 등의 의미를 두루 지닌 용어로, 지금의 대목에서는 원칙’(principle)이나 논변’(argument)으로 번역되곤 한다. [...] 역자는 원칙이라는 용어를 선택했다. 현재의 대목부터 49e까지의 주된 논의는 행위의 원칙을 확립하는 문제, 즉 탈옥이나 그 밖의 어떤 일과 관련해서 어떻게 행해야 할지를 결정할 때에 따라야 할 원칙이나 원리를 확립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원칙은 논리적으로는 우리의 행위 결정의 근거나 전제가 되며, 또한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 49a-e에서는 소크라테스가 탈옥의 문제를 다루는 데 주된 출발점이 될 것들로 정의의 원칙들을 확립하게 된다. (역자주, 58)

 

3-1-1. 원칙의 원칙

 

: 나는 언제나, 추론해 볼 때 내게 가장 좋은 것으로 보이는 원칙 이외에는 내게 속해 있는 다른 어떤 것에도 따르지 않는다.

 

3-1-2. 이전의 원칙들을 존중함

 

1. 이전에 말한 원칙들은 추론해 볼 때 지금도 내게 가장 좋은 것으로 보인다.

2. 그러므로, 나는 이전에 말한 원칙들 이외에는 따르지 않는다.

(3. 이전에 말한 원칙들에 따르면 나는 탈옥하지 않아야 한다.

4. 따라서, 나는 탈옥하지 않아야 한다.)

 

크리톤이 소크라테스를 탈옥시키기 위해서는 1.을 비판하고 더 좋은 것들을 제시해야 함. 그런데 이미 크리톤은 “2. 크리톤의 탈옥 권유에서 암묵적으로 몇 가지 원칙들을 제시하면서 1.을 비판하고 있었음. 이제 소크라테스가 할 일은 자신이 이전에 말한 원칙들이 무엇인지 밝히고, 크리톤의 비판에 반박하면서 그것들이 가장 좋은 것임을 옹호하는 것.

크리톤은 단순히 소크라테스의 가장 친한 친구일 뿐 아니라, 당대 대중이 믿던 전통적인 정의관을 따라서 믿고 그것을 대변하는 인물. 그래서 소크라테스의 작업은 1) 대중의 판단을 믿어서는 안 되고 훌륭한 사람의 판단을 믿어야 하며, 2) 훌륭한 사람의 판단은 전통적인 정의관이 아니라 자신이 믿는 정의관이라는 식으로 진행됨.

 

46b-49e에서 원칙으로 제시된 것들을 세세하게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다. (작품 안내, 76)

 

판단들 가운데 어떤 것에는 주의를 기울여야 하되, 어떤 것에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사는 것이 아니라 훌륭하게 사는 것을 가장 중시해야 한다.

훌륭하게 사는 것과 아름답게 사는 것과 정의롭게 사는 것은 같다.

결코 정의롭지 못한 짓을 해서는 안 된다.

정의롭지 못한 짓을 당하더라도 보복으로 정의롭지 못한 짓을 해서는 안 된다.

남에게 해를 입혀서는 안 된다.

해를 입더라도 보복으로 해를 입혀서는 안 된다.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와 합의한 것들이 정의롭다면, 그는 그것들을 이행해야 한다.

 

3-2. 다수의 판단이 아니라 전문가의 판단을 따라야 한다 (46c-48a)

 

3-2-1. 소크라테스의 원칙 1

 

원칙 1 : 판단들 중 어떤 것은 주의를 기울여야 하되(존중해야 하되) 어떤 것에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판단들은 사람들이 내린다(사람들의 것이다).

 

수정된 원칙 1 : 사람들의(사람들이 내린) 판단들 중 어떤 것은 존중해야 하되 어떤 것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좋은 판단들을 존중해야 하되, 나쁜 판단들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좋은 판단들은 분별 있는 사람들의 것들이고, 나쁜 판단들은 어리석은 사람들의 것들이다.

 

재수정된 원칙 1 : 분별 있는 사람들의 좋은 판단들을 존중하되 어리석은 사람들의 나쁜 판단들을 존중해서는 안 된다.

 

  분별 있는 사람들은 전문 지식을 가진 한 사람이다. 그리고 어리석은 사람들은 전혀 전문 지식을 갖지 못한 다수의 사람이다.

 

ex. 체육을 하는 사람이나 이 일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칭찬과 비난과 판단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오직 의사이거나 체육 선생인 한 사람의 판단에 주의를 기울인다.

 

*한 사람 : 내용상 소수를 추가해서 이해해도 무방하다. 소크라테스가 전문 지식을 가진 자는 한 사람만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전문 지식을 가진 사람들은 여럿이 있더라도, 그들은 하나의 동일한 전문 지식을 갖는다는 관점에서 전문 지식을 가진 사람을 한 사람으로 상정한 것으로 보인다. (역자주, 60)

 

재재수정된 원칙 1 : 전문 지식을 가진 한 사람의 좋은 판단들을 존중하되 전혀 전문 지식을 갖지 못한 다수의 사람의 나쁜 판단들을 존중해서는 안 된다. (동의)

 

3-2-2. 크리톤의 원칙 1 반박

 

크리톤의 원칙 1 : 한 사람에게 불복종하더라도 다수의 판단을 존중해야 한다.

 

  한 사람에게 불복종하고 다수의 판단을 존중하면 해를 입는다.

 

수정된 크리톤의 원칙 1 : 해를 입더라도 다수의 판단을 존중해야 한다.

 

ex. 체육을 하는 사람이나 이 일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이 오직 의사이거나 체육 선생인 한 사람의 판단과 칭찬을 존중하지 않은 채, 전혀 전문 지식을 갖지 못한 다수의 판단과 칭찬을 존중한다면, 그는 몸에 해를 입는다.

ex. 정의로운 것과 정의롭지 못한 것, 부끄러운 것과 아름다운 것, 좋은 것과 나쁜 것과 관련해서도 전문 지식을 가진 사람의 판단을 따르지 않는다면, 정의로운 것에 의해서는 더 좋게 되고 정의롭지 못한 것에 의해서는 파멸된다고 하던 대상(영혼)이 파괴되고 손상된다.

 

  특정 대상에 관련하여 한 사람에게 불복종하고 다수의 판단을 존중하면 그 대상은 해를 입는다. 체육은 몸에 관련한다. 체육에 있어서 한 사람에게 불복종하고 다수의 판단을 존중하면 몸이 파괴된다. 파괴된 몸을 지닐 경우 우리의 삶은 살 만한 가치가 없다.

  정의로운 것은 영혼에 관련한다. 정의로운 것에 있어서 한 사람에게 불복종하고 다수의 판단을 존중하면 영혼이 파괴된다. 그런데 영혼은 몸보다 훨씬 더 귀하다. 그러므로 파괴된 영혼을 지닐 경우 우리의 삶은 살 만한 가치가 전혀 없다.

 

재수정된 크리톤의 원칙 1 : 우리의 삶이 살 만한 가치가 전혀 없어지더라도 다수의 판단을 존중해야 한다.

 

(원칙의 원칙 2 : 어떤 원칙을 따를 때 우리의 삶이 살 만한 가치가 전혀 없어질 수 있다면, 그 원칙은 따르지 않아야 한다.)

 

소크라테스 : 그러면 더없이 훌륭한 친구여, 우리는 다수의 사람이 우리에 대해 뭐라고 말할 것인지에 그토록 크게 주목할 게 아니라, 정의로운 것들과 정의롭지 못한 것들에 관해 전문 지식을 가진 한 사람과 진리 자체가 뭐라고 말할 것인지에 주목해야 하네. 그러니 우선, 자네가 정의로운 것들과 아름다운 것들 및 좋은 것들 그리고 이것들과 상반된 것들에 관해 다수의 판단에 주목해야 한다고 권고를 할 때 자네는 옳게 권고하는 것이 아니네. (48a)

 

재재수정된 원칙 1의 적용 : 정의로운 것들에 관해 전문 지식을 가진 한 사람의 좋은 판단을 존중하되 전혀 전문 지식을 갖지 못한 다수의 사람의 나쁜 판단들을 존중해서는 안 된다.

 

3-3. 사는 것이 아니라 정의롭게 사는 것을 중시해야 한다 (48a-d)

 

3-3-1. 소크라테스의 원칙 2

 

원칙 2 : 사는 것이 아니라 훌륭하게 사는 것을 가장 중시해야 한다.

 

  훌륭하게 사는 것과 아름답게 사는 것과 정의롭게 사는 것은 같다.

 

역자는 위 명제도 소크라테스가 제시하는 원칙들 중 하나로 간주하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우선 당위 명제가 아니고, 그래서 다른 원칙들과 결합했을 때에만 쓸모 있기 때문이다. 또한 플라톤이 본 명제를 제기하는 맥락이 독립적으로 하나의 원칙을 제시하는 맥락이라기보다는, 우리는 훌륭하게 사는 것을 중시해야 하는데 훌륭한 것이 곧 정의로운 것이니 우리는 정의롭게 사는 것을 중시해야 한다는 식의 맥락이기 때문이다. 물론 원칙이 합의된 것 내지는 공동의 논의 기반 역할을 하기 때문에 역자의 의도도 이해가 간다. 그러나 원칙을 단지 합의된 것 이상의 것, 즉 행위의 출발점 역할을 하는 당위 명제로 이해한다면, 그래서 필요 이상의 원칙을 줄일 수 있다면, 위 명제는 원칙으로 간주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수정된 원칙 2 : 사는 것이 아니라 정의롭게 사는 것을 가장 중시해야 한다. (동의)

 

이런 원칙과 같은 취지의 언급들이 다른 초기 대화편들에서도 발견된다. 고르기아스(512e)에서 그는 삶에 대한 애착을 가져서는 안 되고, 주어진 생애에 어떻게 하면 가능한 한 훌륭하게 살 수 있는지를 생각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변명(28b-c)에서도 소크라테스는 생사의 위험을 고려할 것이 아니라 행위를 할 때 오직 정의로운 일을 행하는 것인지 정의롭지 못한 일을 행하는 것인지, 훌륭한 사람이 할 일을 행하는 것인지 못된 사람이 할 일을 행하는 것인지를 생각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작품 안내, 79)

 

3-3-2. 크리톤의 논증 반박

 

크리톤의 가정 : 죽음은 가장 나쁜 것이다.

 

1. 분명 다수의 사람은 우리를 죽일 수 있다.

(2. 그런데 가장 나쁜 것은 가장 좋은 것의 반대이다.

3. 가장 좋은 것은 사는 것이 아니라 정의롭게 사는 것이다.

4. 그러므로, 가장 나쁜 것은 죽는 것이 아니라 정의롭게 살지 않는 것이다.)

5. 따라서, 다수의 사람이 우리를 죽일 수 있다는 것이 곧 그들이 우리에게 가장 나쁜 것을 줄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3-3-3. 소크라테스의 원칙 2에 따른 논의의 한정 (동의)

 

-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탈옥하게 된다면 자신이 살게 될지 죽게 될지를 고찰할 것이 아니라, 정의로운 일을 하는 것일지 정의롭지 못한 일을 하는 것일지 고찰해야 한다.

- 돈의 지출과 평판 및 아이들의 양육에 관한 고려 사항들은 자신의 탈옥이 정의로운 짓인지 아닌지를 고찰한 이후의 부차적인 문제이다.

 

3-4. 정의의 원칙들 (48d-49e)

 

소크라테스 : [...] 나는 자네가 기꺼워하지 않는 상태에서가 아니라 자네가 설득을 받아들인 상태에서 내 생각대로 행하는 게 중요하다고 여기네. 그러면 우리의 고찰의 출발점이 자네가 보기에 만족할 만하게 이야기되는 것인지 지켜보게. 그리고 최대한 자네가 생각한 대로 질문에 대답해 보게나. (48e-49a)

 

  여기서 출발점으로 제시되는 원칙들은 탈옥의 정의로움 여부를 판별하기 위한 것으로서, 앞에서 언급된 원칙들과 구분하여 정의의 원칙들이라고 일컫기로 한다. [...] 그는 먼저 결코 정의롭지 못한 짓을 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도출해 낸다. 그리고 이어서 네 가지 원칙을 추가한다. 그 다섯 가지 원칙들은 다음과 같다. (작품 안내, 81-82)

 

결코 정의롭지 못한 짓을 해서는 안 된다. (49b)

정의롭지 못한 짓을 당하더라도 보복으로 정의롭지 못한 짓을 해서는 안 된다. (49b)

남에게 해를 입혀서는 안 된다. (49c)

해를 입더라도 보복으로 해를 입혀서는 안 된다. (49c)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와 합의한 것들이 정의롭다면, 그는 그것들을 이행해야 한다. (49e)

 

⇒ ⓐ는 수정된 원칙 2 “사는 것이 아니라 정의롭게 사는 것을 가장 중시해야 한다.”의 귀결로 보인다. 정의롭게 사는 것은 정의로운 일을 행하는 동시에 정의롭지 못한 일을 행하지 않으면서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결코라는 말을 통해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자발적으로 정의롭지 못한 짓을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것이기 때문에 를 함축한다. 또한, “사람들을 해롭게 하는 것은 정의롭지 못한 짓을 하는 것과 전혀 다르지 않기 때문도 함축한다. 와 마찬가지로 수정된 원칙 2의 직접적인 귀결로 볼 수 있다.

 

*소크라테스가 정의의 원칙을 분류하는 두 관점

  : 1) 소크라테스는 그것들을 두 가지 원칙으로 생각한 듯이 보이기도 한다. 49e-50a를 보면 그는 탈옥의 문제를 단지 두 가지 원칙, 와 관련해서만 언급하기 때문이다. 이는 그가 이외의 ~를 상이한 원칙들로 보지 않고 하나의 원칙으로 생각했음을 보여 주는 듯하다. 그러나 그가 ~를 하나하나 열거하지 않고 만을 언급한 것은 단지 생략적인 표현일 뿐이라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다시 말해 그는 반복적으로 길게 언급하는 번거로움을 피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

  2) [...] 법률은 탈옥이 정의의 원칙들을 어기는 것임을 밝히기 위해 세 가지 논변을 펴는데, 그 하나는 에 의거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에 의거한 것이며, 그리고 셋째 것은 에 의거한 것이다. [...] 좀 더 엄밀한 의미에서는 ~를 세 가지 원칙으로 보는 게 옳다. (), (), 를 세 원칙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원칙을 이처럼 세 종류로 나누어 보아야 의인화한 법률의 연설을 제대로 분석할 수 있다. 바로 그 세 원칙들은 탈옥의 부당성을 밝히는 세 논변에서 각기 활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작품 안내, 83-86)

 

Q.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왜 ()()를 구분하려 했을까?

  : 그는 자신의 정의관이 대중의 정의관, 즉 전통적 정의관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분명히 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대중(다수의 사람)도 원칙 에는 쉽게 동의했을 것이다. 하지만 보복금지 원칙 는 대중이 수용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당시 대중은 보복을 정의의 기본 원리로 삼았던 전통적 정의관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크리톤도 대중과 같이 전통적 정의관 혹은 전통적 도덕관을 가진 인물이라는 점은 이 대화편 여러 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가 극복하고자 했던 정의관을 기원전 7세기의 아르킬로코스(Archilochos)가 잘 보여준다. 그는 나는 내게 해를 입힌 사람에게 고약한 치욕을 되갚아 줄 수 있는 큰 하나의 기지를 갖고 있다”(단편, 61(48))고 말한다. 이는 보복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자랑스럽게 말하는 구절로 보인다. 이처럼 대중은 보복적 정의관을 갖고 있으며, “친구들은 이롭게 하되 적들은 해롭게 하는 것”(cf. 메논71e, 국가332e, 334d-e, 362b )을 정의의 주요 원칙으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소크라테스는 이런 전통적 정의관을 포기하는데, 이는 그의 지극히 혁신적인 도덕론의 일부이다. (작품 안내, 86-87)

 

3-5. 정의의 원칙들의 적용 (49e-50a)

 

소크라테스 : 그러면 이것들에 근거해서 살펴보게나. 우리가 나라를 설득하지 않고 여기서 떠난다면, 어떤 이들을, 그것도 특히나 해롭게 해서는 안 될 이들을 해롭게 하는 것인가, 아닌가?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합의한 정의로운 것들을 준수하는 것인가, 아닌가?

크리톤 : 소크라테스, 나는 자네가 묻는 것에 대답할 수가 없다네. 나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거든.

 

Q. 크리톤의 대답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 이 대답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에 대해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갈린다. 그 양쪽 입장을 간략히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한쪽에서는 이 대답이 크리톤의 이해력 부족과 비철학적인 면모를 보여 주는 것이고,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철학적 논의를 통해 자신의 진지한 생각을 밝히는 일을 포기하고, 그저 수사적인 설득을 위해 법률을 내세우게 된 것으로 해석한다. 그런가 하면 다른 쪽에서는, 소크라테스가 철학적 논의를 포기하지 않았고 법률의 연설에서도 그의 진지한 생각이 반영되어 있다고 본다.

  앞쪽의 주장이 맞다면 크리톤의 답변 전후의 논의가 긴밀한 연속성을 가질 수 없을 것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고 역자는 본다. 그리고 크리톤의 대답은 단순히 물음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뜻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 물음의 의미는 사실상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크리톤은 탈옥이 구체적으로 어떤 점에서 정의의 원칙들에 부합하거나 그렇지 않은지를 제대로 알지 못하겠다고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는 그가 그 부합 여부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실 다음에 전개되는 의인화한 법률의 연설을 보면, 탈옥이 원칙들에 부합하는지 여부를 설명하는 것은 그다지 쉬운 일이 아니다. (작품 안내, 88-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