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고대철학 일차문헌

플라톤, 「의인화한 법률의 연설」 전반부 (50a-51c), 『크리톤』

현담 2023. 3. 12. 13:12

<목차>

 

1. 도입부 (43a-44b)

2. 크리톤의 탈옥 권유 (44b-46a)

3. 크리톤의 권유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응수 (46b-50a)

 

4. 의인화한 법률의 연설 (50a-54d)

  4-1. 정의의 원칙들의 적용 (50a-50c)

  4-2. 정의의 원칙들의 검토 (1) : 보복금지 원칙은 정당한 것인가? (50c-51c)

 

  4-3. 정의의 원칙들의 검토 (2) : 합의의 원칙은 정당한 것인가? (51c-53a)

  4-4. 탈옥에 관한 기타 문제에 대한 응수 (53a-54b)

  4-5. 신화 (54b-d)

5. 종결부 (54d-e)

 

 

4. 의인화한 법률의 연설 (50a-54d)

 

소크라테스 : 그러면 이렇게 고찰해 보게. 법률과 국가 공동체가 여기서 달아나려는 이를 어떻게 표현하든- 우리에게 다가와 앞에 서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고 가정해 보세. (50a)

 

4-1. 정의의 원칙들의 적용 (50a-50c)

 

4-1-1. 탈옥은 아테네에 해를 입히는 것이다.

 

1. 개인들에 의해 어떤 나라의 법정 판결들이 효력을 상실하고 파괴된다면(내려진 판결이 효력을 가져야 함을 규정하는 법이 파멸된다면), 그 나라의 법률과 그 나라는 전복된다(파멸된다, 존립할 수 없다).

(2. 소크라테스가 탈옥한다면, 아테네에서 소크라테스에 의해 아테네의 법정 판결들은 효력을 상실하고 파괴될 것이다.

3. 따라서, 소크라테스가 탈옥한다면, 아테네의 법률과 아테네는 전복된다.)

 

*내려진 판결이 효력을 가져야 함을 규정하는 법 : 1) 기원전 403년에 30인 참주정이 몰락한 후 민주정이 회복되었을 때 제정된 특정 법률을 가리키는 것이거나, 2) 아니면 어느 법체계든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기본적인 일반 원리를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그것을 특정 법률로 이해하지만, 갤럽(Gallop, 1997: 106)은 기본적인 일반 원리로 본다. (역자주, 62-63)

  나는 갤럽의 해석을 따라 아테네를 포함한 어떤 나라에서든 이 법이 파멸되는 것을 가정할 수 있다고 보고 위 논증을 재구성하였다.

 

Q. 소크라테스가 탈옥한다고 해서 아테네의 법정 판결들이 효력을 상실하고 파괴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소크라테스의 자의식 과잉 아닌가?

  : 소크라테스가 탈옥한다면 아테네의 법정 판결이 효력을 상실하고 파괴되는 하나의 사례가 성립한다. 이러한 사례가 아테네의 개인들에게서 보편화되면, 결국 아테네의 법정 판결들은 효력을 상실하고 파괴될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행위의 보편화 가능성을 고려하여 행위에 대한 도덕적 판단을 내리고 있을 수 있다. (칸트식 해석)

  소크라테스가 탈옥한다면 아테네의 법정 판결이 효력을 상실하고 파괴되는 하나의 사례가 성립한다. 이러한 사례는 아테네의 존립을 작든 크든 위협하는 사례, 내지는 아테네의 파멸에 작든 크든 기여하는 사례이다. 어떤 것의 존립을 위협하거나 파멸에 기여하는 것은 어떤 것에 해를 끼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소크라테스의 탈옥은 아테네에 해를 입히는 것이고, 이는 정의의 원칙 ~(더 직접적으로는 )를 위반하는 것이다. (내재적 해석)

 

1. 소크라테스가 탈옥한다면,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에 해를 입히는 것이다.

2. 남에게 해를 입혀서는 안 된다. ()

3. 따라서, 소크라테스는 탈옥해서는 안 된다.

 

Q. 의인화한 법률은 계속해서 자신(, “우리”)과 나라를 같이 언급한다. 이 둘은 어떤 관계에 있을까? 그리고 왜 나라를 의인화하지 않고 법률을 의인화했을까?

  : Brisson(2005, n71)을 따라 나라 전체’(sympasan tēn polin)를 앞의 국가 공동체’(to koinon tēs poleōs)와 동의어로 본다면 (역자주, 62) 나라는 곧 국민들이 특정한 정체성에 따라 그 안에 구성원으로 자신들이 속해 있다고 간주하는 공동체라 할 수 있다. 한편, 법률은 공동체가 따르는 원리 혹은 공동체를 지배하는 원리를 법률이라 볼 수도 있다. (나라는 몸, 법률은 머리로 이해해볼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법률이 곧 공동체를 구성하는 성원들을 일률적으로 통제하면서 공동체의 동일성과 실천성을 유지하는 핵심이기에 법률을 의인화하는 것이 더 바람직한 시도였을 수 있겠다.

 

4-1-2. 탈옥은 아테네에게 보복하는 것이다.

 

나라가 개인에게 판결을 옳게 내리지 못하고 정의롭지 못한 짓을 한다면, 개인은 나라의 판결을 무시하고 나라에게 정의롭지 못한 짓을 해도 된다?

 

소크라테스 : [...] 우리는 그들에게 나라가 우리에게 정의롭지 못한 짓을 하고 판결을 옳게 내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할 것인가? [...]

크리톤 : 단연코 그렇게 말할 것이네, 소크라테스. (50c)

 

그러나 이는 정의의 원칙 ~(더 직접적으로는 )를 위반

 

1.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에게 정의롭지 못한 짓을 당하였다.

2. 그러므로, 소크라테스가 탈옥한다면, 소크라테스는 보복으로 아테네에 정의롭지 못한 짓을 하는 것이다.

3. 정의롭지 못한 짓을 당하더라도 보복으로 정의롭지 못한 짓을 해서는 안 된다.

4. 따라서, 소크라테스는 탈옥해서는 안 된다.

 

4-1-3. 국가가 내린 판결을 준수한다는 것이 합의 사항이다.

 

소크라테스 : 그러면 법률이 다음과 같이 말한다면 어떤가? “소크라테스, 이것도 우리와 당신 사이의 합의 사항이오? 아니면 국가가 내린 판결을 준수한다는 것이 합의 사항이오?” (50c)

 

*이것 : 정의롭게 내려지지 않은 판결에 불복종하는 것을 가리킨다. (역자주, 63)

 

소크라테스와 국가 간 합의 사항은 국가가 내린 판결을 준수한다는 것임을 시사하고 있음. 정의의 원칙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와 합의한 것들이 정의롭다면, 그는 그것들을 이행해야 한다.”였음. 그런데 여기서는 단순히 합의 사항이 무엇인지를 묻고 있을 뿐, 합의 사항이 정의로운지를 묻고 있지 않음. 아마 4-1-1.4-1-2.에서 탈옥이 정의롭지 않고 판결 준수가 정의로운 것을 살펴보았으니 그 합의 사항이 정의로움을 이미 전제하면서, 여기서는 합의까지 했으니 이행해야 한다는 식으로 를 적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임.

 

4-2. 정의의 원칙들의 검토 (1) : 보복금지 원칙은 정당한가? (50c-51c)

 

소크라테스, [...] 당신은 우리와 나라에 무슨 잘못을 탓하여 우리를 파멸시키려 드는 거요?” (50c-d)

 

이 구절은 의인화한 법률이 자신과 나라가 소크라테스에게 범한 잘못이 전혀 없고, 그래서 소크라테스가 자신들을 파멸시키는 것이 부당하다고 말하는 것으로 읽히지 않는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억울하게 당하는 인물이 악당에게 흔히 하는 대사가 내가 당신에게 무슨 잘못을 저질렀길래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 거요?”이다. 악당이 그냥.”이라고 대답하는 사이코패스가 아닌 이상 악당이 그 인물에게 당한 잘못이 있기는 할 것이고 그것을 그 인물에게 읊을 것이다. 그러곤 악당은 으레 그렇듯 그 인물을 죽이거나 악랄하게 괴롭힐 것이다. 관객들이 악당을 악당이라 부르는 이유는 악당이 잘못을 당하긴 당했더라도 악당이 그런 식으로 자신에게 잘못을 저지른 인물을 죽여버리거나 괴롭히는 것이 정의는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소크라테스가 앞으로 전개할 논증을 이해한다면 도움될 것이다.

 

1. 아테네의 혼례에 관한 법률에 따라 소크라테스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결혼해서 소크라테스를 태어날 수 있었다.

2. 아테네의 양육과 교육에 관한 법률에 따라 소크라테스의 아버지가 소크라테스로 하여금 시가와 체육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하였다.

3. 어떤 사람이 누군가에 의해 태어나고 양육받고 교육받는다면, 어떤 사람은 그 누군가의 자손이며 노예이다. (그 누군가는 어떤 사람의 아버지이며 주인이다.)

4. 주인과 노예에게는 정의로운 것은 대등하지 않다. , 주인이 노예에게 하려는 것이 무엇이든 노예가 주인에게 되갚아 행하는 것은 정의롭지 않다.

5. 따라서, 아테네의 법률(과 아테네)이 소크라테스를 파멸시키는 게 정의롭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하려고 해도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의 법률(와 아테네)에게 가능한 한 보복으로 파멸시키려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ex. (노예는 주인에게) 싫은 소리를 들었다고 해서 말대꾸할 수도 없었을 것이고, 맞았다고 해서 되받아서 때릴 수도 없었을 것이다.

 

Q1. 3.4.는 굉장히 폭력적인 전제 혹은 주장이다. 누군가를 나아서 기른다면 그 누군가에게 아무렇게나 대해도 된다는 말인가? 아버지가 아들을 나아서 길렀다면 아버지가 아들을 아무 때나 칼로 찔러도 아들은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말인가? 단순히 현대와 고대의 차이로 치부하기에는 직관적으로 너무나 명백하게 비도덕적이고 비이성적인 주장 아닌가?

 

Q2. 애초에 4-1-1.에서 4-1-3.까지 정의의 원칙 적용이 끝난 것으로 보이는데 소크라테스는 왜 이런 논증을 펼쳐 Q1.과 같은 문제를 스스로 야기하는 것인가?

 

A2. 보복금지 원칙과 그것의 적용을 정당화하기 위함으로 보인다. 보복금지 원칙은 아무런 정당화 없이 그 자체로 정의의 원칙으로 채택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예컨대, A 국가의 군대가 B 국가의 도시 b를 갑자기 쳐들어와서 약탈하고 돌아갔다면, B로서는 보복을 하는 것이 정의에 어긋나지 않을 수도 있다. 어떤 상황에서는 보복 행위 자체가 정의로운 행위이거나 보복 행위를 하지 않는 것이 부정의한 행위일 수 있고, 그렇다면 무제한적 보복금지 원칙이나 보복금지 원칙의 무조건적 적용은 부정의하다.

  내 생각에 보복금지 원칙이 넓은 의미에서 보복으로 부를 수 있는 행위 일체를 금지하지는 않는다. A의 약탈 이후 똑같이 B의 군대가 선전포고도 없이 A의 도시 a에 난데없이 쳐들어가서 약탈하고 돌아간다면, 이는 직관적으로 정의롭지 못한 보복 행위이다. 하지만 BA에게 배상을 요구해서 받아내거나, 그런 요구를 거절하는 A와의 공존이 어렵다고 판단하여 전면전을 치르든가, 여러 다른 이른바 정의로운 보복 행위가 성립할 수 있다. 보복을 위한 보복, 해를 입히기 위한 해를 입히기는 정의롭지 못하다. 그러나 보복이 어떤 정당성에 기초할 때, 해를 입히는 것이 정의 구현의 불가피한 수단일 때 보복은 정당화될 수 있다. 전자가 보복금지 원칙에서 말하는 좁은 의미의 보복이라면, 후자는 넓은 의미의 보복에는 포함되지만 좁은 의미의 보복은 아닌 보복이다. 보복금지 원칙은 넓은 의미의 보복 차원에서 보았을 때는 제한적이고 조건적으로 적용되는 원칙이다.

  그렇다면 크리톤에서 문제가 되는 보복은 좁은 의미의 보복일까, 아니면 좁은 의미의 보복에 해당하지 않지만 넓은 의미의 보복에는 해당하는 정당한 행위일까? 여기서 소크라테스의 판단은 그것이 좁은 의미의 보복이라는 것이고, 그래서 보복금지 원칙에 의해 금지되어 마땅하다는 것이다. 이런 판단을 내리도록 하는 주된 근거는 행위의 교환이 이루어지는 행위자들의 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 앞서 대등했던 AB와 달리, 국가는 개인을 태어나게 하고 지금의 개인이 될 수 있도록 길러낸 아버지이며, 모든 개인들을 공동체로 묶어 지배하고 공동으로 행위할 수 있게끔 하는 주인이다. (여기서 국가가 개인의 주인임을 주장하기 위해서 3. 전제에 기대지 않았다.) 이런 특수한 관계에 처한 개인인 소크라테스에게 있어 불복과 탈옥은 아테네에 대한 정의로운 보복 행위가 아니다. (뒤이어 나오겠지만 소크라테스와 아테네의 관계는 소크라테스의 아테네에 대한 강한 사랑이 담긴 관계이기에 국가와 개인, 아버지/주인과 자식/노예의 관계로 형식화하기에는 부족한 면이 있다.)

 

A1. 소크라테스를 옹호하는 입장에서도 3.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힘들다. 어떤 사람이 누군가에 의해 태어나고 양육받고 교육받는다면, 어떤 사람은 그 누군가의 자손이라고 할 순 있겠지만 어떤 사람이 그 누군가의 노예라고 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3.에 기대지 않고서도 국가가 개인의 주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A2. 참고. 나는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노예가 문자 그대로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주인의 말만 듣고 일만 해야 하는 노예를 가리키키는 것이라 보지 않는다. 그것은 일종의 유비인데, 개인은 진짜 노예와 달리 국가와 합의하는 주체이자, 국가의 일에 참여하고 국가를 설득하기도 하는 국가의 구성원이기 때문이다. 개인은 국가와의 관계에서 자발적이고 참여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렇기 때문에 국가의 명령을 받들어야 하는 특별한 종류의 노예인 셈이다.)

  4.는 오해의 소지가 많지만, 그 오해를 해소하기 위해 소크라테스가 이후로 열심히 노력한다고 말하고 싶다. 다만, 여기서 밝히고 싶은 점은, 아버지가 아들을 낳아서 기른다면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무렇게나 대해도 된다는 식의 말을 소크라테스가 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그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어떤 잘못을 저지르는 것과 아들이 아버지에게 같은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 정의의 관점에서 차이가 있다는 식의 말을 하고 싶은 것으로 보인다. 당연히 아버지가 아들을 낳고 길렀다고 해서 아버지가 아들을 아무 때나 칼로 찔러도 되는 것도 아니며, 그때 아들은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다만, 아버지가 아들을 칼로 찔렀을 때, 아들이 아버지를 칼로 찔러서도 안 된다는 말로 봐야 할 것 같다. (기존의 예시는 아버지가 딸을 강간하는 예시였으나 읽기 끔찍해서 예시를 바꾸었다.)

 

당신은 그리도 지혜로워서, 신들과 지각 있는 사람들에게 조국이 어머니나 아버지 혹은 그 밖의 모든 조상보다도 더 영예롭고 더 존엄하며 더 성스럽고 더 존귀하게 여겨진다는 것을, 그리고 다음과 같은 것을 알지도 못했단 말이오?” (51a-b)

 

소크라테스는 여기서 신들과 지각 있는 사람들이 조국을 부모나 조상보다도 더욱 경건하게 대해져야 하는 존재로 여기는 이유를 따로 밝히고 있지는 않으나, 부모나 조상들의 존재와 삶 역시 국가에 의존하기 때문, 즉 국가가 존재의 원인의 계열에서 상위에 있기 때문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이와 같은 관계에서는 겪은 일을 똑같이 되돌려 주는 형식의 보복이 더더욱 정당화될 수 없다. (나현)

 

“(1) 아버지보다도 조국을 더 받들고 더 순종하며 조국이 격노할 때 더 달래드려야(appease) 한다는 것, (2) 조국을 설득하거나 아니면 (3) 조국이 명령하는 것은 무엇이든 이행해야 한다는 것, (3`) 조국이 무언가를 겪어 내라고 지시하면 두들겨 맞는 것이든 투옥되는 것이든 잠자코 겪어내야 한다는 것, [...] (3) 전쟁터나 법정에서나 그 어디에서나 나라와 조국이 명하는 것은 무엇이든 이행하거나 아니면 (2) 정의로운 것이 본래 어떠한지에 대해 나라를 설득해야 한다는 것을 말이오. [...]” (51b-d)

 

(1)은 자식이 아버지를 대하는 기본 태도의 상위 호환이다. (위에서 살펴보았듯 부모나 조상보다도 조국은 상위의 존재이기 때문. 신 바로 아래로 생각하면 좋을 듯 하다.) 개인은 국가를 더 모시고, 더 따르고, 더 분노를 가라앉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여기서 곧 나올 설득과 함께 흥미로운 것이 달래기이다. 개인은 국가를 논리적으로 설득할 수도 있어야 하지만, (그 전에 혹은 그와 별개로) 감정적으로 평정을 되찾게 도울 수도 있어야 한다.

  (3)은 개인이 국가의 명령을 대하는 태도 중 하나이다. 명령하는 것 중 능동적으로 행해야 할 것은 행하고 (3`) 수동적으로 겪어내야 할 것은 겪어내야 한다. 두들겨 맞는 것과 투옥되는 것은 각각 전쟁터와 법정에서 수동적으로 겪어내야 할 것에 해당한다. (전쟁터와 법정은 각각 용기와 정의의 발현 공간이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용기와 정의를 각각 성격적 탁월성 논의의 시작과 끝에 다룰만큼 두 덕은 핵심적인 덕이다.)

  (2)는 개인이 국가의 명령을 대하는 태도 중 다른 하나이다. 설득이 여기서 명령에 대한 이행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 애매하다. 국가가 내리려는 명령이 정당하다면 명령이 내려진 후 그것을 그대로 이행하면 되겠지만, 내리려는 명령이 부당해 보일 때, (2-1) 국가가 명령을 내리기 전 최대한 바른 방식으로 명령을 내리게끔 설득을 하다가 (2-2) 설득에 실패하여 그 명령이 내려졌다면 이행하지 않고 계속 그것을 철회하게끔 설득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소크라테스가 탈옥하지 않고 국가에 복종하고 있다는 크리톤의 맥락 속에서 설득을 (2-2)까지로 해석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소크라테스의 경우 설득이 (2-1)에 그치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비록 ‘A 아니면 B’의 형식으로 설득과 이행이 제시되긴 하였지만, 소크라테스는 이행하면서도 그 이행을 통해서 아테네를 설득하고 있다.

 

*소크라테스를 시민 불복종의 옹호자로 보는 크라우트(R. Kraut)의 견해에 대한 비판

  : 그는[크라우트는] 크리톤의 후반부에서 나라와 조국이 명하는 것은 무엇이든 이행하거나 아니면 정의로운 것이 본래 어떠한지에 대해 나라를 설득해야 한다”(51b-c)는 구절을 중시한다. 여기서 설득이라는 선택지가 있다는 것은 정의롭지 못한 법에 대한 불복종의 여지를 남기는 것으로 그는 해석한다. 그리고 그는 전반부에서 언급된 또 하나의 정의의 원칙, 합의한 것들은 이행해야 한다. 그것들이 정의로운 한에서라는 원칙도 중시한다. ‘그것들이 정의로운 한에서라는 단서는 불복종의 여지를 남긴다고 보는 것이다.

  크라우트의 견해에 대해서는 브릭하우스(T. C. Brickhouse)와 스미스(N. D. Smith)의 반론이 주목할 만하다. 그들은 소크라테스가 설득과 복종이라는 두 가지 선택지를 언급했지만, 설득에 실패하면 결국 복종하는 길만 남을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그들은 소크라테스의 정의의 원칙이 정의롭지 못한 법에 불복종하라는 것을 함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철저한 준법을 강조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 그들은 법이 정의롭지 못하더라도 그 법에 복종하는 것은 정의로운 일이라는 것이 소크라테스의 생각이라고 해석한다. (작품 안내, 103-104)

 

*소크라테스를 철저한 준법 정신의 소유자로 보는 브릭하우스와 스미스의 견해에 대한 비판

: 사실 크라우트는 설득이라는 선택지를 지나치게 확대 해석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크라우트와 달리 브릭하우스와 스미스가 정의의 원칙이 준법을 강조하는 것으로 본 점은 수긍이 잘 안 간다. 왜냐하면 결코 정의롭지 못한 짓을 해서는 안 된다”(49b)는 원칙은 오히려 정의롭지 못한 법적 명령에 복종해선 안 된다는 것을 함축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정의롭지 못한 법적 명령에 복종하는 것은 결국 정의롭지 못한 짓을 하는 셈이 되니 말이다. [...] 정의롭지 못한 짓을 한 적이 없다는 평판이 나 있던 레온을 사형에 처하려고 연행해 오라는 명령이 적법하게 이루어진 것이라면, 소크라테스는 그를 체포하는 데 동행했으리라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연행 명령에 불복종한 이유로 그것의 적법성 여부를 거론한 것이 아니라, 단지 그것이 정의롭지 못하고 불경건한 것이라는 점만을 거론하고 있음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역자가 보기에는 변명의 두 예와 크리톤전반부에 나오는 정의의 원칙은 악법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불복종 의지를 분명히 보여 주는 것이다. 다만 크리톤의 후반부는 나라의 법적 명령에 무조건 복종할 것을 요구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크라우트의 지적처럼, 그 명령이 정의로운 한에서복종할 것을 요구하는 것으로 여기는 게 적절해 보인다. [...] 우리가 철저한 준법을 요구하는 크리톤의 후반부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특히 변명의 다음 구절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소크라테스가 정의롭지 못한 짓을 하는 것이나, 신이든 인간이든 더 훌륭한 자에게 불복종하는 것은 나쁘고 수치스러운 것이라는 점을 나는 알고 있다”(29b)고 말하는 구절 말이다. [...] 여기서 더 훌륭한 자에는 신과 인간에 더하여 법률이나 조국도 포함될 수 있을 텐데, 이들의 명령들이 상충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분명 소크라테스는 더 상위의 훌륭한 자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 점은 이미 살펴본 변명의 철학 관련 예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재판 과정에서 철학을 금하는 법적 명령(배심원들의 명령)에 복종할 것인가, 아니면 그보다 상위의 명령으로서 철학할 것을 지시하는 신의 명령에 복종할 것인가 하는 기로에서, 그는 주저 없이 신의 명령에 복종하는 쪽을 택하고자 했다. 그에게는 신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야말로 정의로운 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여기서 신의 명령이란 단순히 종교적인 의미는 아니라는 점을 언급해 두는 게 좋을 것 같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종교적인 신념을 위해 법적 명령에 불복하고자 했다기보다, 철학함이라는 보편적으로 가치 있는 활동을 위해 그렇게 했다. [...]

  그런데 크리톤에서는 변명에서처럼 법률이나 조국의 명령과 상충되는 신의 명령이 상정되어 있지 않다. [...] 그것은 재판할 때의 상황과 그 이후의 상황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변명의 재판 상황에서 소크라테스는 스스로 두 가지 선택지를 상정한다. 철학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무죄 방면될 것인가, 아니면 신의 명령을 따라 철학 포기 요구를 거부할 것인가? 여기서 그는 죽게 되더라도 신의 명령을 따르겠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그러니까 그는 사형선고를 받을 각오를 하고 신의 명령을 따른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자신의 선택의 결과에 따른 책임을 감당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니 재판 이후의 상황이 묘사된 크리톤에서는 이미 선택한 신의 명령을 다시 거론할 필요가 없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작품 안내, 104-110)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악법도 법인가?

: 소크라테스가 탈옥을 거부하고 죽음을 택한 것은 악법도 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는 악법도 법이라는 말을 한 적도 없고, 그런 사상을 갖고 있었던 것 같지도 않다. 크리톤후반부에서는 의인화한 법률이 법의 명령에는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는 식의 연설을 하지만, 이것은 법의 명령과 신의 명령이 상충할 때에도 오직 법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변명에서뿐 아니라 크리톤에서도 소크라테스느는 그 두 명령이 상충할 때는 상위 명령인 신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는 사상을 변함없이 견지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그가 악법에는 불복종할 수 있는 철학자임을 뜻하는 것이다. 하지만 소크라테스가 모든 악법, 즉 모든 정의롭지 못한 법이나 법적 명령에 무조건 불복종하라는 견해를 갖고 있다고 보아서는 안 된다. 그는 불복종이 정당화될 수 있는 경우가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음을 분명히 구분해서 인식했던 것으로 보인다. (작품 안내, 111-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