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근대철학 일차문헌

루소(1762), 「1부」, 『에밀』

현담 2022. 4. 13. 01:06

아래 내용에는 근대서양정치사상(서울대학교 2022-1 김주형) 강의 및 토론 내용, 개인적 생각 등이 섞여 있음

 

p.61.

 

모든 것은 창조자의 수중에서 나올 때는 선한데 인간의 수중에서 모두 타락한다.”

 

cf) “인간의 마음에는 선천적으로 사악함이 없다. 인간의 마음속에 어떻게 어디를 통해 들어왔는지 말할 수 없는 악은 하나도 없다.” (161, 2)

 

*루소의 저술에서 자주 등장하는 구절. 루소의 전체적 기획의 핵심. 자연과 사회를 구분하고, 자연적 선(natural goodness, 사회계약론을 읽을 때도 언급되었지만 자연적 선은 우리가 보통 이라고 부르는 사회적 선과 다름)과 사회적 타락(social corruption)을 구분하는 방식.

 

*루소는 모든 악의 기원을 인간 외부의 사회로 봄. 그래서 루소의 교육은 인간의 마음속에 악이 들어오는 경로를 파악하고 차단하는 특성이 있음.

 

인간은 모든 것을 뒤죽박죽으로 만들고 보기 흉하게 만들며, 기형과 괴물을 좋아한다. 그들은 무엇 하나 자연이 만든 상태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인간에 대해서까지도, 조련된 말처럼 자신들을 위해 인간을 훈련시켜야 하며, 그들 정원의 수목들처럼 그들의 기호에 따라 인간을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라도 하지 않으면 모든 것은 훨씬 더 악화될 것이다. [...] 지금 상황에서는(그러한 형편이기에) 태어나자마자 홀로 타인들 틈에 내팽겨쳐진 인간은 세상에서 가장 보기 흉한 모습이 될 것이다.”

 

내가 말하는 대상은 당신, 즉 갓 태어난 그 관목을 대로에서 비켜나게 하여 세상 사람들의 의견(인습)의 충격으로부터 보호해줄 줄 아는 애정 깊고 용의주도한 어머니, 바로 당신이다.”

 

*사회의 교육 : 사회제도는 인간에게서 자연과 본성을 말살시키고 그 자리에 편견과 권위와 필요와 본보기들”(61)을 주입시켜 인간을 조련된 말이나 정원의 수목처럼 제멋대로 훈련시킴. 그러나 그런 교육마저 없으면 인간은 우연히 길 한 가운데에 태어나 행인들에 의해 마구잡이로 밟혀 으깨짐으로써 죽게 되는 한 그루 관목처럼 사회에 의해 형해화되어 파멸하게 됨. 그래서 우리는 사회의 교육을 피해야 하지만 교육 자체를 피하고 아이를 자연인으로 살게 둘 수 없음.

 

*자연인과 아이 :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묘사되는 자연 상태의 인간, 즉 자연인은 사회적인 것 일체가 모두 제거되어 인간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오랑우탄에 가까움. 하지만 에밀에서 묘사되는 아이는 사회로부터 보호받지만 고립되지는 않는, 기본적인 생존과 성장의 여건을 마련 받으면서 사회와 제한된 수준으로 상호작용하는 말 그대로 어린 인간임.

 

pp.62-67.

 

그 교육은 자연이나 사물 또는 인간의 소산이다. 우리의 능력과 기관들의 내적인 성장은 자연의 교육이다. 반면, 그 성장을 이용하도록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인간의 교육이다. 그리고 우리와 접촉하는 대상들에 대한 경험 획득은 사물의 교육이다.” (62)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세 종류의 선생을 통해 교육받는다. 그 세 선생의 가르침이 서로 대립되는 교육을 받은 학생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하여, 결코 조화로운 사람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 세 선생의 가르침이 일치하고 같은 목표로 향할 때에만 학생은 자기의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며 시종 일관되게 산다. 그 사람만이 올바른 교육을 받은 사람이다. [...] 그 세 가지 교육의 일치를 누구에게서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정성을 기울여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목표에 어느 정도 가까이 가는 것뿐 [...]” (62)

 

그 세 교육의 일치는 각자의 교육의 완성에 필요하기 때문에, 다른 두 교육을 통솔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어찌할 도리가 없는 바로 자연의 교육 쪽이다. [...] 변질 이전의 성향을 나는 우리 안에 있는 자연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이 최초의 성향에 일치시켜야만 한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의 세 가지고 교육이 다르기만 하면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그 세 가지 교육이 서로 대립되어 [...]” (63-64)

 

*세 교육의 일치 : 올바른 교육의 목표이지만 가까이 갈 수 있을 뿐 실현이 불가능에 가까움. 하지만 루소가 세 교육이 본질적으로 대립한다거나 세 교육의 일치가 원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하지는 않음. 그것은 완전 불가능(impossible)하기보다는 거의 불가능(improbable)한 것. 그래서 자연의 교육을 중심으로 나머지 인간의 교육과 사물의 교육을 최대한 일치시키기 위해 노력하여야 할 당위가 있음.

 

하지만 그 세 가지 교육이 서로 대립되어, 어떤 사람에게 그 자신을 위한 교육이 아닌 타인을 위한 교육을 시키고자 할 때는 어떻게 될까? 그때에는 그 최초의 성향과의 일치는 불가능하다. 자연과 싸우든지 아니면 사회제도와 싸우도록 강요받기 때문에, 한 인간을 만드느냐 아니면 한 시민을 만드느냐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 둘을 동시에 만들 수는 없기 때문이다.” (65)

 

좋은 사회 제도라는 것은, 인간에게서 가장 교묘하게 자연성을 잃게 만들어 그의 절대적인 존재를 제거하고 그 자리에 상관적인 존재를 주어 라는 자아를 공동체 속으로 양도시킬 줄 알게 하는 그런 제도이다. 그리하여 각 개인은 자기 자신을 더 이상 한 개체가 아니라 한 공동체의 부분으로 생각하여 전체에 더 민감할 뿐이다.” (66)

 

다섯 명의 아들을 군에 보낸 스파르타의 한 어머니가 전투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 노예가 돌아왔다. 그녀는 떨면서 그에게 소식을 물었다. ‘주인 마님의 아드님 다섯이 모두 전사했습니다.’ ‘이런 비천한 인간 같으니라구. 내가 네게 그것을 물었더냐?’ ‘우리가 승리했습니다.’ 그 어머니는 신전으로 달려가 신에게 감사했다. 바로 그것이 시민이라는 것이다.” (66-67)

 

*루소의 인간 교육은 시민 교육으로 이어지는가? : 김영욱에 따르면, 에밀은 좋은 정치체의 시민이 아니라, 자신이 사는 정치체의 정당성과 상관없이 개인적 행복을 찾을 수 있는 인간으로 교육되었다. (루소, 사회계약론, 김영욱 역, 후마니타스, 2018, p.242) 실제로 에밀의 곳곳에서 그러한 뉘앙스의 텍스트를 찾아볼 수 있다. “부유하든 가난하든 저는 자유로울 것입니다. 저는 어떤 나라 어떤 고장에서도 자유로울 뿐 아니라 지구상 어디에 있어도 자유로울 것입니다.”(855, 5), “자유는 어떤 형태의 정부에도 있지 않아. 자유는 자유로운 인간의 마음에 있어서, 그는 자유를 어디에서나 지니고 있어” (856, 5).

  물론 에밀이 어떤 정치체에도 상관없이 행복할 수 있는 인간으로 교육된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그것이 에밀이 좋은 정치체의 시민으로 교육된 것은 아니라는 것을 함축하지 않다. 루소의 인간 교육은 시민 교육으로 읽힐 여지도 충분하다. 우선, 인간 교육과 시민 교육이 루소에게서 필연적으로 대립하는 것은 아니다. 세 가지 교육이 대립할 때는 인간이냐 시민이냐 양자택일이 불가피하겠지만, 세 가지 교육의 일치는 세 가지 교육이 다르기만 하면 가능한 일”(64)이다. 나아가, 루소는 에밀의 곳곳에서 자신의 교육법과 강하고 용맹한 시민의 묘사를 같이 등장시킨다. “어둠 속에서 흔들림이 없을 정도로 친숙해진 발과 주위의 모든 물체에 쉽게 적응되도록 단련된 손은 아무리 깜깜한 어둠 속에서라도 그를 인도할 것이다. [...] 밤은 그에게 전혀 두렵지 않을 것이다. 두려워하기는커녕 그는 밤을 좋아할 것이다. 군사적인 원정이 문제인가? 그는 부대원들과 함께 있는 것만큼이나 혼자 나가는 것에도 언제나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다.”(246, 2), “왜 내 학생은 항상 그의 발에 쇠가죽을 신고 다니도록 강요받아야 하는가? 필요한 경우, 그 자신의 피부가 신발로 이용될 수 있다 해서 어떤 죄악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 그들의 도시를 침입한 적들 때문에 한겨울 자정에 헐레벌떡 일어난 제네바 시민들은 그들의 신발보다 총을 먼저 찾았다. 그들 중 아무도 맨발로 걸을 줄 몰랐다면 제네바가 점령당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는가?”(249, 2). 또한, 루소는 사회계약론에밀의 곳곳에서 강하고 용맹한 시민을 필요로 하는 좋은 정치체를 묘사한다. 위의 스파르타도 좋은 정치체를 묘사하는 하나의 사례이고, 사회계약론48장에서 영광과 조국에 대한 열렬한 사랑에 심취한 인민으로 구성된 스파르타와 로마가 기독교 공화국을 박살 낼 것이라는 서술도 있다. 마지막으로, 좋은 사회는 가장 교묘하게 자연성을 잃게한다. 그래서 인간 교육의 결과로 아이가 사물에 의한 필연에 익숙해지는 것은 곧 시민이 정치체에서 일반의지에 의한 필연에 종속되는 것을 예비하는 것이고, 아이가 자기애를 잘 보존하는 것은 곧 시민이 정치체에서 애국심을 갖게 되는 것을 예비하는 것일 수 있다.

 

pp.70-71.

 

우리가 진정 해야 할 연구는 인간 조건에 관한 연구이다. [...] 진정한 교육은 교훈을 가르치는 데 있다기보다는 단련에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70)

 

어린이를 그의 방에서 나올 필요가 없으며 이전과 다름없이 그의 하인에 둘러싸여 있는 인간으로 키우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방법을 생각할 수 있을까? 그 불행한 인간은 지상에 한 걸음만 내디뎌도, 한 계단만 내려서도 파멸하고 말 것이다. 그것은 그에게 고통을 참고 견디는 법을 가릐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느끼도록 훈련하는 것일 뿐이다.” (71)

 

cf) “가장 행복한 사람은 고통을 가장 적게 맛보는 사람이며, 가장 불행한 사람은 쾌락을 가장 적게 느끼는 사람이다. 언제나 즐거움보다 고통이 더 많다. 그 점은 인간 모두에게 공통적이다.” (138, 2)

 

*행복을 위해 고통의 최소화를 이야기하지만, 고통은 인간의 조건임. 그래서 오히려 주어지는 고통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견디는 교육을 통해 인간은 고통에 익숙해지고 그것에 덜 민감하게 되어 행복에 더 가까워질 수 있음.

 

pp.81-119.

 

아이의 최초의 울음은 부탁이며 간청이다. 그런데 조심하지 않으면 울음은 곧 명령이 된다. 아이는 도움을 받는 것으로 시작하여 시중을 받는 것으로 끝난다. 그처럼 처음에는 자기 자신의 나약함에서 남에게 의존하려는 감정이 생겨나며, 곧이어 지배와 군림의 관념이 생겨난다.” (115)

 

두 번째 경우라면, 아이의 말을 듣고 있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라. 그가 울더라도 듣는 척하지 말아야 한다. 일찍부터 사람들에게도 그는 주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물들에게도 그것들은 그의 말을 전혀 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명령하는 버릇이 들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115)

 

첫 번째 준칙. [...] 자연이 그들에게 부여한 모든 힘그들은 그 힘을 남용할 줄 모른다-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한다. 두 번째 준칙. 육체적인 욕구와 관련된 모든 경우 그들을 도울 것이며, 이해력에서든 힘에서든 그들에게 부족한 부분을 보충해주어야 한다. 세 번째 준칙. 그들에게 제공되는 도움은, 엉뚱한 생각이나 까닭 없는 욕구에 응하는 것이 아닌 현실적으로 필요한 것에 국한되어야 한다. [...] 네번째 준칙. [...] 그들의 욕구가 직접 자연에서 온 것인지 그 엉뚜한 생각에서 온 것인지를 구분하기 위해 그들의 말과 표정과 몸짓을 유심히 관찰해야 한다.” (119)

 

*울음의 구별 : 자연적 필요에 따른 울음은 도움을 요구하는 울음이므로 충족시켜줘야 함. 자연적 필요에 따르지 않는 울음(땡깡, 떼쓰기)은 명령하는 울음이므로 무시해야 함. 버르장머리 없는 아이의 노예가 되기 싫으면 아이가 필연의 계기를 깨닫게 해야 함(‘, 이건 안 되는구나.’).

 

우리는 아이 마음에 드는 일을 하는가 하면, 아이에게 우리 마음에 드는 일을 하도록 요구하기도 한다. 또는 우리가 아이의 변덕스러운 행동에 복종하는가 하면, 아이로 하여금 우리의 변덕스러운 행동에 복종하도록 하기도 한다. 중간이 없어, 아이는 명령을 하거나 아니면 명령을 받든지 해야 한다.” (81)

 

아이들이 타인의 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물에 의해서만 저항받는 한, 그들은 고집쟁이도 되지 않을 것이고 화를 잘 내지도 않을 것이며 한층 건강한 상태를 유지할 것이다.” (114)

 

*사물의 필연성에 의한 교육 : 아이 또한 어른으로부터 명령받고 복종해서는 안 됨. 필요에 의한 것이 아닌 한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 의존이나 필연성이 성립하는 것으로 아이가 이해해서는 안 되기 때문. 아이는 사물을 통해 자신의 능력이 어디까지 닿을 수 있고 그래서 자신의 욕망이 어디까지로 제한되어야 하는지 스스로 깨달아야 함.

 

모든 악함은 약함에서 나온다.” (116)

 

cf) “지배 그 자체도 그것이 여론에 집착할 때에는 노예 같은 것이 된다. 왜냐하면 당신이 편견에 사로잡혀 통치하는 바로 그 사람들의 편견에 좌우되기 때문이다. 그들을 당신 마음대로 끌어가기 위해서는 당신도 그들의 마음에 들게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 (145, 2)

 

cf) “마침내 그가 요구하는 어떤 것이 거부당하지 않을 수 없을 때, 요구만 하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믿었던 그는 그 거절을 반역으로 간주한다. [...] 그에게 사람들이 설명해주는 이유라는 것은 모두 그의 생각에 단지 변명들 뿐이다. 그는 도처에서 악의를 본다. [...] 친절에 대해 전혀 감사할 줄 모르며, 누가 반대하면 무슨 반대가 되었든 분노를 터뜨린다. [...] 그는 폭군인 것이다. 그는 노예들 중에서 가장 비천한 노예인 동시에 피조물 중에서 가장 불행한 존재이다.” (153, 2)

 

*자기 아래에 모든 사람에게 명령하고 그들을 부리는 폭군은 가장 행복하고 강한 사람으로 보이지만 실상 가장 불행하고 약한 사람임. 잘못 키워진 버릇없는 아이와 비슷함. 그는 고통을 견뎌낼 줄 모르기 때문에 사소한 고통에도 고통스럽고, 필연의 계기를 모르기에 조금의 저항에도 분노함과 동시에 그것을 악의로 간주하고 두려워함. 그는 피지배자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줄 모르고, 그래서 피지배자를 부리기 위해 피지배자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음. “지배 그 자체도 그것이 여론에 집착할 때에는 노예 같은 것이 된다. [...] 그들을 당신 마음대로 끌어가기 위해서는 당신도 그들의 마음에 들게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들은 사고 방식만 바꾸면 되지만, 당신은 억지로라도 행동 방식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145, 2) (이 부분에서 루소는 지배자가 여론을 조작할 가능성을 간과한 것이라는 비판이 가능) 루소에게서 약함 = 부자유함 = 불행함이고, 약함에서 명령과 지배의 의지가 발생하여 악함으로 이어짐. (사회계약론에서는 칸트나 헤겔을 종종 떠올리게 되는데, 에밀에서는 니체를 종종 떠올리게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