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근대철학 일차문헌

루소(1762), 「3부」, 『에밀』

현담 2022. 4. 16. 12:12

아래 내용에는 근대서양정치사상(서울대학교 2022-1 김주형) 강의 및 토론 내용, 개인적 생각 등이 섞여 있음

 

pp.298-343.

 

언제나 기억하라. 무지는 전혀 해를 끼치지 않으며 오류만이 해롭다는 사실을. 사람을 알지 못하는 것 때문이 아니라 안다고 생각하는 것 때문에 길을 잃는다는 사실을.” (298)

 

지금까지 우리는 법칙들 중 필연의 법칙만 알았는데, 이제 우리는 유용한 것을 고려에 넣는다. 우리는 이내 우리에게 알맞고 좋은 것(쓸모 있는 것 오역, suitable and good)에 이르게 될 것이다. [...] 행복에 대한 선천적인 욕망과 그 욕망을 충족시키지 못함은, 그로 하여금 그 욕망을 채워주는 데 도움이 되는 새로운 수단을 끊임없이 추구하도록 만든다. 바로 그것이 호기심의 최초의 근원이다. [...] 우리의 최초의 연구 가운데 그 취미가 인간에게 전혀 자연스럽지 못한 지식들은 버리고, 본능이 우리로 하여금 추구하도록 하는 지식에만 한정하자.” (298-299)

 

우리가 정신적 대상에 이르게 되는 것은 감각적 대상을 통해서이다. 정신이 최초로 작용할 때에는 언제나 감각만이 정신의 안내자가 되게 하라.” (300)

 

그에게 학문을 가르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학문을 사랑하는 취미를 갖게 하여 그 취미가 더 커질 때 학문을 배우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 중요하다. [...] 그러한 주의를 유발하는 것은 언제나 즐거움이나 욕구여야 한다.” (307)

 

모든 학문을 공통적인 원칙에 결부시켜 계속해서 발전시키는 일련의 일반적인 진리의 사슬이 있는데, 그 사슬이 철학자들의 방법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그러한 사슬이 아니다. 각각의 구체적인 대상이 또다른 대상을 계속해서 제시하여 보여주는 완전히 다른 방법이 있다.” (307)

 

그는 철학자가 되어가지만 자신은 노동자에 불과할 뿐이라고 생각한다. [...] 순전히 이론적인 지식은 아이뿐 아니라 청년기에 가까운 아이에게도 적합하지 않다 [...] 그의 모든 경험이 어떤 연역을 통해 서로 연결되도록 하고 그 연쇄에 도움을 받아 그것들을 그의 정신 속에 순서대로 배열시켜서, 필요할 경우 다시 기억해낼 수 있도록 하라.” (316)

 

전체의 질서를 잘 아는 사람은 각 부분이 있어야 할 위치를 안다. 그리고 어떤 한 부분을 잘 알고 또 그 부분을 깊이 아는 사람은 박식가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전자는 분별이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당신도 기억하듯이, 우리가 얻고자 하는 것은 지식보다는 판단력이다.” (343)

 

cf) “우리 시대의 학문은 다르다. 사람들은 더 이상 연구하지 않으며, 관찰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꿈을 꾸는데, 그들은 엄숙하게 어떤 나쁜 밤들의 꿈을 우리에게 철학으로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나 역시 꿈을 꾸고 있다고 사람들은 말하리라. 나는 그 사실을 인정한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할 생각이 없는 것을 하고 있으며, [...] 그 꿈이 깨어 있는 사람들에게 유용한 어떤 것이 있는지 어떤지에 대한 탐구는 독자의 몫으로 남겨둘 것이다.” (198, 2)

 

cf) “나는 철학자들에게 상의를 했으며, 그들의 책을 읽으면서 그들의 다양한 견해를 검토해보았네. 나는 그들 모두가 오만하고 독단적이며 단정적이라고 생각했지. [...] 그들은 공격할 때에는 의기양양하지만 자신을 방어할 때에는 축 늘어지지.” (478-479, 4)

 

*학문 혹은 철학 : 루소가 비판하는 학자 혹은 철학자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짐: 감각과 경험에서부터 탐구하지 않고 순전한 상상과 이론에서부터 탐구함, 개별적인 경험에서 연역해나가기보다는 공통적인 원칙을 상정, 겸손하게 자신이 모르는 것을 인정하고 오류를 경계하기보다는 오만과 독단에 빠져 자신이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함, 선천적인 욕망이나 유용성에 따라서가 아닌 학문을 그 자체로 추구함(허영심으로 간주), 지식을 판단하는 능력을 기르기보다는 지식을 무분별하게 습득함, 전체의 질서를 조망하고 각 부분들의 위치를 이해하는 대신 한 부분에 대해서만 깊이 이해함. 반대로 루소가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학자 혹은 철학자는 위와 정반대의 특징을 가지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음. 루소는 철학(philosophia)의 본래 의미인 학문을 사랑함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고민하고 그것에 가까운 철학을 하고자 함.

 

*배움의 발전 : 이전(1, 2)에는 신체와 감관을 훈련시키면서 필연의 형식 혹은 법칙만을 배웠다면, 이제(3)는 유용성이라는 내용을 가지고 여러 학문(지리, 화학 등)을 배우기 시작함

 

pp.329-330.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책이 있다면 단 한 권이 있는데, 내 생각에 그것은 가장 좋은 자연 교육 개론을 제공해줄 것이다. [...] 그것은 로빈슨 크루소이다.” (329)

 

바로 그렇게 우리는 무인도라는 것을 경험하게 하는데, 그것은 내게 우선 비교의 대상으로 이용될 것이다.” (330)

 

그런 상태는 사회적 인간의 상태가 아님을 나는 인정한다. 그 상태는 필시 에밀의 상태도 아니다. 하지만 그 같은 상태에 의거하여 다른 모든 상태를 평가해야 한다. 편견을 극복하고 사물의 진정한 관계에 대한 판단을 정리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고립된 사람의 상황에 자신을 놓아보는 것이며, 모든 일에 대해 그러한 인간이 그 자신의 유용성에 비추어 스스로 판단하는 것과 같이 그렇게 판단하는 것이다.” (330)

 

*로빈슨 크루소 : 에밀의 상태를 묘사하거나 에밀이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님. 대신 에밀에게 사회상태의 인간과 비교할 수 있는 대상이자 자연적 필연성과 유용성을 판단할 때의 기준을 제시해줌.

 

pp.346-347.

 

당신은 현재의 사회 질서를 신뢰한다. 그것이 불가피한 변혁을 면할 수 없다는 사실을, 또한 당신의 아이와 관련될 수 있는 변혁을 당신으로서는 예측할 수도 예방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생각지도 못한 채 말이다.” (346)

 

나는 유럽의 대군주국들이 여전히 오래 존속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 그것은 또 모든 사람의 눈에 너무나 잘 보이고 있다.” (347)

 

*불가피한 변혁 : 현 체제가 더 이상 지속될 수 있는 체제가 아니라는 관점을 보여줌. 위기의 시기는 루소의 사회/정치 이론의 중요한 배경. 이런 배경 아래에서 귀족 출신인 에밀에 대한 교육은 평민 출신의 아이에 대한 교육보다 오히려 더 보편적이고 적용가능성이 높은 교육을 보이기 수월함. 루소에게서 귀족은 당대의 나쁜 풍습과 편견에 물들기 쉽고 신분 하락의 위험에 노출된 인간으로서취약한 계층. 루소는 인간 외부의 사회에서 비롯되는 악을 쳐내고 자연성을 보존하는 방식으로 에밀을 교육함으로써 자기를 떠나는 신분을 더 이상 잡지 않으며, 그 같은 운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간으로 남을 줄 아는 [...] 행복한 사람”(347)로 성장시키고자 함.

 

pp.348-349.

 

인간이자 시민인 자는 그가 누구이건 그 자신 외에는 사회에 줄 수 있는 재산이 없다. 그의 모든 재산은, 싫겠지만 사회의 것이다. 그리하여 어떤 사람이 부자이면, 그가 그의 부를 향유하지 않든지 아니면 대중도 마찬가지로 그 부를 향유하든지 해야 한다.” (348)

 

당신은 재산 없이 태어난 경우보다 더 많이 다른 사람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 왜냐하면 당신은 혜택받은 자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 그런데 당신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가 아들에게 자신의 재산, 즉 노동의 증거이자 대가를 양도함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다. 스스로 벌지 않은 것으로 빈둥대며 먹고 사는 사람은 그것을 훔친 것과 같다.” (348)

 

하지만 필연적으로 타인을 희생하여 살아가야 하는 사회에서는 그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비용을 노동을 통해 갚아야 한다. 거기에는 예외가 없다. 그러므로 일을 하는 것은 사회적 인간에게는 필요불가결하다. 부자든 빈자든, 강자든 약자든, 일하지 않고 놀고 먹는 시민은 모두가 도둑인 것이다.” (349)

 

*노동 : 루소는 노동을 인간이 사회에서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비용을 갚는 활동으로 이해함. 사회인이라면 노동의 의무에는 예외가 없어서 부자든 빈자든 상관없이 모두에게 노동이 요구됨. 하지만 부자에게는 대중도 마찬가지로 그 부를 향유하게끔 적선(2부 논평에서 다룸)해야 한다는 추가적인 요구가 주어지는데, 대체로 부자는 본인이 노동해서 재산을 일궜기보다는 재산을 상속받아 노동 없이 재산을 거머쥐기 때문. 그러나 루소는 부자 일반에게 적대적인 것은 아닌 것으로 보임. “내 아버지는 그것을 얻음으로써 이미 사회에 봉사했다.”(348)고 주장하는 사람에게 그 사람의 아버지가 자신의 빚을 갚았다고 치자.”(348)라고 말하며 루소는 인정의 여지를 보임.

 

p.349.

 

모든 신분 중에서 운명과 타인의 지배로부터 가장 독립적인 것은 장인 신분이다. [...] 그는 농부가 속박받는 것과는 반대로 자유롭다. 왜냐하면 농부는 그의 논밭에 매여 있으며, 그 수확은 타인이 처분하기 때문이다. [...] 그 논밭 때문에 사람들은 많은 방법으로 농부를 괴롭힐 수 있다. 하지만 장인은 어디에서든 자신을 괴롭히려는 사람이 있으면 곧바로 짐을 싼다.”

 

하지만 농업은 인류의 최초의 직업이다. 그것은 가장 유익하고 가장 정직한 직업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종사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직업이다. [...] 그러므로 나는 그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네 조상의 땅을 가꾸어라. 만일 네가 그 땅을 잃거나, 땅이 없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직업을 배우라.’.”

 

*농업 : 사회계약론에서 살펴보았듯 농업은 국가의 식량을 생산하고, 고된 노동을 통해 신체를 단련함으로써 강건한 시민을 만들며, 풍습을 교정하고, 이해관계를 단순화하여 일반의지에 이르기 더 쉽게 함. 그런데 여기서는 농민 대신 장인이 되라고 함. 왜 그럴까? 이는 농민이 땅 때문에 대인의존에 너무 취약하기 때문. 땅이 있으면 농민으로 살지만, 땅이 없으면 장인으로 살라는 루소의 조언은 이상과 현실의 타협인 셈. 오히려 귀족은 상속받은 재산으로 땅이 많을 것이고, 사회적 권위로 땅을 잃을 일이 없을 것이기 때문에 귀족에게는 장인 대신 농민으로 사는 것이 적극적으로 권유될 것. 그래서 그런지 루소는 사회계약론에밀에 군데군데서 귀족의 전원적 삶을 끊임없이 아름다운 것으로 묘사하며 장려함.

 

pp.363-367.

 

우리의 아이는 이제 자기 개인으로 다시 돌아가 아이이기를 그만두려 하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그는 이제 그를 사물에 얽어매는 필연성을 의식하고 있다. 우리는 그의 신체와 감각의 단련부터 시작하여 그의 정신과 판단력을 훈련시켰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그의 손발의 사용법과 그의 능력의 사용법을 연결시켰다. 우리는 그를 행동하고 생각하는 존재로 만든 것이다. 이제 우리에게는 인간을 완성하기 위해 그를 자애심 많고 다정다감하며 인정 많은 존재로 만드는 일만이 남았다. 말하자면 감정에 의해 이성을 완성하는 일이다.” (363-364)

 

내가 자연을 벗어나고 있다고 사람들은 말할 것이다. 나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자연은 세론에 기초해서가 아닌, 필요에 기초해서 그의 도구들을 선택하고 규제한다. 그런데 필요는 인간의 상황에 따라 변한다. 자연 상태에서 사는 자연인과 사회 속에서 사는 자연인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 그는 도회지에서 살도록 만들어진 미개인이다.” (367)

 

*루소의 교육과정 정리 : 사물에 얽어매는 필연성(1), 신체와 감각의 단련(2), 정신과 판단력의 훈련 및 손발과 능력의 사용법 연결(3), 감정에 의한 이성의 완성을 통해 행동하고 생각하는 존재로 만들기(4)

 

*필요의 변화에 따른 교육의 변화 : 루소의 교육은 언제나 인간의 자연성에 기초함. 그리고 인간의 자연성에 기초한다는 것은 인간의 필요에 기초한다는 것. 그러나 그 필요라는 것이 자연상태와 사회상태에서 다르기 때문에 에밀이 사회상태의 필요에 잘 대응할 수 있게끔 교육이 변화하는 것. 에밀은 그곳에서 그의 필요물을 구할 줄 알아야 하며, 그곳 주민들을 이용할 줄 알아야 하며, 그들처럼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그들과 함께 살아갈 줄 알아야 함”(367).

 

pp.372-373.

 

한마디로 에밀은 그 자신과 관련된 모든 미덕을 지니고 있다. 마찬가지로 사회적인 미덕까지 지니기 위해서는 그 미덕을 요구하는 관계만 알면 된다. [...] 그는 자신을 전혀 타인과의 고려 속에서 생각하지 않으며, [...] 인간 사회에서 혼자이다. 그는 자기 자신만을 믿는다. [...] 어느 누구의 평화도 깨는 일 없이 그는 자연이 허락해주는 한 만족해하며 행복하고 자유롭게 살아왔다. 그렇게 열다섯 살에 이르렀는데, 당신은 그 아이가 그 이전의 세월을 허송했다고 생각할 것인가?”

 

*행복한 아이/인간 : 에밀은 훌륭한 사회인이 될 수 있는 모든 준비를 마침. 그는 사회적인 관계에 대한 지식만 습득하면 사회적인 미덕을 금방 갖출 수 있음. 그러나 그 이전에 에밀은 당장 죽더라도 여한이 없을 만큼 행복한 삶을 살아왔음. 그래서 루소는 에밀이 습득한 지식이 거의 없더라도 그 이전의 세월을 허송했다고 생각할수 없다고 거침없이 이야기함. 루소에게서는 인간의 잘 삶’, ‘행복하게 삶이 굉장히 중요한 주제임. 그리고 이 주제를 고려하지 않으면 그의 정치 이론과 정치학적 메시지를 제대로 읽어낼 수가 없음. 하지만 많은 루소 정치사상 해석가들이 이 주제를 고려하지 않으면서 무리하거나 과장된 해석을 내보이는 것 같음. (수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