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근대철학 이차문헌

『에밀』 「1부」 논평

현담 2022. 4. 15. 14:46

자연화된 사회는 정말 자연적인가?

 

  루소는 한 사람을 길러내는 올바른 교육은 자연과 인간과 사물의 교육이 합치될 때에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우리의 능력과 기관들의 내적인 성장은 자연의 교육이다. 반면, 그 성장을 이용하도록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인간의 교육이다. 그리고 우리와 접촉하는 대상들에 대한 경험 획득은 사물의 교육이다.”(63) 이때 세 종류의 교육 중 주도권을 갖는 교육은 자연의 교육인데 왜냐하면 유일하게 그것만 우리가 어찌할 도리가 없는”(64) 교육이기 때문이다. 한 사람을 가르치는 방법과 한 사람이 접촉하는 사물은 바꿀 수 있어도, 그 사람이 (다시 태어나도 마찬가지이겠지만) 다시 태어날 수는 없다. 결국 루소에게 있어 교육의 목표는 자연스럽게 태어난 사람을 적절한 인간적이고 사물적인 개입을 통해 자연스럽게 키워내어 인간으로서의 삶”(69)을 살게 만드는 데에 있다. 그것은 자연이 먼저 그에게 요구하기에 필연적이고(69), 우리의 존재를 완전히 향유하게 만들기에 바람직하다(139).

 

  적절한 인간적이고 사물적인 개입 방법의 핵심은 인간이 처한 조건에 있다. 인간적 삶의 조건은 결핍과 고통이다. 인간은 결핍에서 고통을 느끼고, 결핍을 느끼게 하는 욕구에서 불행을 느낀다(138-139). 인생에서 결핍을 없앨 수는 없으니 고통에 대해 단련시켜야 하고, 인생에서 결핍을 덜 느낄 수는 있으니 욕구와 능력의 균형을 맞추도록 훈련시켜야 한다. 그래서 루소는 인생에서 피할 수 없는 병을 잠시 치료해준다고 나서는 의사를 경멸하고, 자기 능력보다 항상 많은 것을 욕구하면서 타인을 지배하는 폭군을 혐오한다. 고통을 견딜 줄 알고 자기 의지와 능력을 일치할 줄 알도록 교육받은 인간은 행복하고, 강하고, 선하고, 자유롭다.

 

  인간은 결핍에서 결핍을 보충할 필요가 생기고, 그 필요로부터 노동을 통해 사물을 소유하게 되고, 소유하게 된 사물에 대한 인간들의 권리들이 충돌하면서 서로 합의하게 된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도덕적인 세계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177) 결국 사회를 형성하여 살아가는 것도 인간의 조건이다. 여기서 발생하는 문제는 사회제도는 인간의 자연성을 파괴하고 그에게서 본성을 질식시켜, 그 자리에 아무것도 채워주지 않을 것”(61)이라는 점이다. 루소의 교육론은 이 지점에서 사회론 혹은 정치론과 맞닿는다. 교육론의 관점에서 인간을 어떻게 사회화시켜야 하는지가 문제가 되고, 정치론의 관점에서 사회를 어떻게 자연화시켜야 하는지가 문제가 된다. 사회화된 자연인이 살기 적합한 자연화된 사회가 발견되어야 루소의 교육론과 정치론은 성공할 수 있을 텐데 그러한 사회는 어떤 사회일까? “좋은 사회 제도라는 것은, 인간에게서 가장 교묘하게 자연성을 잃게 만들어 그의 절대적인 존재를 제거하고 그 자리에 상관적인 존재를 주어 라는 자아를 공동체 속으로 양도시킬 줄 알게 하는 그런 제도이다.”(66) 한 마디로 내가 공동체가 되고 공동체가 내가 되는 사회가 바로 그러한 사회이다. 그 사회에서 가장 자연스럽다고 여겨지는 인간의 자기애는 시민의 애국심이 되고, 인간의 자유를 전혀 침해하지 않는 자연의 사물에 대한 의존”(148)은 일반의지에 대한 복종이 된다. “그런 국가에서는 자연 상태의 모든 이점과 사회 생활의 모든 이점을 하나로 결합”(148)한다.

 

  여기서 자연화된 사회가 정말 자연적인지 비판스럽게 바라보게 되는 대목이 있다. 전사한 다섯 아들의 소식을 떨면서 전하는 하인을 비천하다고 타박한 후 국가의 승리를 듣자 신전으로 달려가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스파르타 어머니를 진정한 시민으로 묘사하는 대목이다(66-67). 이러한 어머니가 가능할 수도 있고, 이러한 어머니가 시민으로서 바람직할 수는 있지만, (둘 다 그렇게 보기는 어렵다는 점을 차치하고서라도) 이러한 시민상을 요구하는 사회가 자연스럽다는 주장은 루소가 자연의 의미를 심하게 왜곡한 것처럼 보인다. 다섯 아들들을 모두 전사시킨 후 승리한 국가, 나아가 그에 대해 신전으로 달려가 승리에 감사드리는 어머니를 시민의 모범으로 삼는 국가는 일반의지를 명목으로 자연스러운 모성애를 타락시키고 사회화된 어머니를 착취한 것이 아닌가? 일반의지는 공동체를 위해 무엇이든 개별자에게 요구할 수 있고 그것은 오히려 개별자를 위한 것이라는 루소의 입장에서 다섯 아들들은 자기 자신과 어머니를 지키기 위해 자발적으로 전쟁에 나설 수밖에 없었으며, 그것을 이해하는 어머니는 시민답게 행동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기절하거나 통곡하고, 평생 다섯 아들 모두를 징집한 국가와 다섯 아들 모두를 희생시킨 전쟁에 대해 치를 떠는 것이 정말 자연화된 사회의 모습이 아닐까 하는 직관은 지울 수 없다. 이러한 직관을 이론적으로 확대했을 때, 오히려 자연화된 사회는 일반의지와 개별의지의 도덕성을 모두 인정하고 둘 사이 상호존중 아래에서 법을 제정하고 행정을 처리하는 사회가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