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근대철학 이차문헌

『에밀』 「사부아 보좌신부의 신앙고백」 논평

현담 2022. 4. 24. 13:30

자연종교, 관용, 정치종교

 

  루소는 인간이 모든 종교를 직접 다 검토해보지 않고 이는 인간의 생에서 불가능한 일이다- 자신이 믿는 종교가 유일하게 올바른 종교라고 믿는 것은 타인의 판단에 의지”(551)한 결과로 신의 권위가 아닌 인간의 권위에 모든 것을 부여하는 것”(551)이라고 말한다. , 종교에 대한 불관용은 신의 권위를 인간의 권위에 복종”(543)시키는 행위로 신의 뜻을 따르는 행위가 아니라 외려 신의 뜻을 거스르는 행위인 것이다. 루소에 따르면, 인간은 창조주와 관련되는 것에 대해 너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 정신의 무력함”(557)을 겸허히 인정하고 신에게 어울리게 신을 섬긴다면”(556) 어떤 종교든 유익하고 훌륭한 것으로 존중해야 한다. 모든 인간에게 자연적으로 주어져 있는 양심과 이성에 따라 미덕을 실천하는 것만으로도 인간은 충분히 신에게 어울리게 신을 섬기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자연의 언어로 이야기”(522)하는 신은, 신성한 본능으로서 양심(522)과 신의 위대한 사상이 인간에게 다다르도록 하는 이성(531)을 사용하여 신의 영광을 위해, 사회의 행복을 위해, 그리고 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531) 사는 것만을 인간에게 요구할 뿐이기 때문이다.

 

  결국 루소는 한 인간이 믿는 종교가 신에게 어울리게 신을 섬기는 자연종교인 한 어떤 종교이든 상관없이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아예 종교가 없는 경우나 신에게 어울리지 않게 신을 섬기는 종교에게 루소는 어떤 태도를 취할까? 그는 그 둘, 즉 오만한 반종교적 철학과 맹목적 광신을 양극단으로 경계하면서 그사이에 종교적 관용을 위치시키는 것으로 보인다(565). 특히 무종교에 대해서 루소는 정신을 삶에 집착하게 하고 영혼을 나약하고 비열하게 만들며, 모든 정념을 비열한 개인적인 이해와 비천한 인간의 자아에 집중시키며, 모든 사회의 진정한 토대를 소리 없이 그렇게 서서히 파괴한다.”(564)라고 말하며 그것을 철저히 비판하며 심각하게 경계하는 모습을 보인다. “신이라는 공통의 중심”(524)을 부정하는 무종교는 사회와 도덕의 기초를 붕괴시켜 인간을 타락하게 만들기에 숭고한 미덕들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그것을 더 잘 인도하기만 하면”(564) 되는 광신보다 위험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렇게 루소의 관용이 무엇을 토대로 삼고 있고 자연종교를 토대로 하고 있다- 어디에 위치시키고 있음을 이해하여야만 반종교적 철학과 맹목적 광신 사이에 위치시키고 있다- 사회계약론에서 서술하는 정치종교의 교의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긍정적 교의로서 전지/전능/전선한 신의 존재와 내세 및 심판에 대한 믿음(171), 압축하자면 위대한 신은 존재하고, 그는 내세에서 선악을 판별한다.”는 단순한 명제는 무종교를 사회에서 배제한다. 그리고 불관용이라는 유일한 부정적 교의(171)는 다른 종교를 관용하지 않는 종교를 국가에서 추방함(172)으로써 광신 또한 사회에서 배제한다. 이때, 우리가 검토하지 않은 한 가지 정치종교의 교의, “사회계약과 법의 신성함”(171)이라는 긍정적 교의를 자연종교와 정치종교의 차이점으로 발견할 수 있다. 이는 자연종교가 가진 다분히 인간의 종교스러운 속성, 최고신에 대한 순수하게 내적인 숭배와 도덕의 영원한 의무에 국한되어”(164) 전쟁에서 승리하는 데에 무관심하고 예속과 의존에 찌들어 폭정에 너무 유리한 정신상태를 갖게 만드는(168) 속성을 보완한다. 인간은 어쨌든 사회를 이루고 살아야 한다. 그 안에서 자유롭게 살기 위해서, 그리고 그 안에서의 자유로운 삶을 보존하기 위해서, 루소는 인간으로서는 자연종교를 가지는 것에 족하더라도 시민으로서는 정치종교를 가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을 법하다.